힐빌리의 노래

힐빌리는 스코틀랜드에서 북아이랜드로 이주했다가, 다시 미국 애팔래치아 산맥 산골 지역에 정착한 사람들을 뜻한다. 미국의 백인 빈곤층(Poor White)를 상징하는 용어다. 미국인에게 힐빌리는 도시생활을 거부하고 낙후 지역에 살면서 독립을 추구하는 백인 이미지와 가난하고 무식하고 완고한 ‘꼴통 백인’이미지를 갖고 있다고 한다.

스스로를 힐빌리로 자처하는 밴스는 그 러스트벨트에 속하는 오하이오의 철강 도시에서 가난하게 자랐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그곳은 일자리와 희망이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사라져가는 동네였다. 밴스의 표현을 빌리면, 그는 ‘모르는 사람이나 다름없는 남자와 차라리 모르는 게 나았을 뻔한 여자에게서 버림받은 자식’으로 태어나고 자랐다. 엄마는 거의 밴스가 태어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약물 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약물 중독에 빠져 끊임없이 정신적·신체적 폭력을 휘둘렀던 엄마와 돈 때문에 양육권을 버린 아빠, 엄마 곁을 스쳐간 수많은 아버지 후보자들 때문에 어린 밴스는 늘 불안과 우울에 시달려야 했다.친척들까지 포함해도 집안에서 대학에 진학한 사람은 거의 없다. 통계적으로 그들의 미래는 비참하다. 운이 좋으면 수급자 신세를 면하는 정도고 운이 나쁘면 헤로인 과다 복용으로 사망한다.

밴스는 기억 저편의 과거를 고통스럽고 처절했던 날 것 그대로의 모습을 이야기하고 있다. ‘무엇을 해도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것 같은 느낌’에 대해서, 나아가 무관심 속에 숨겨졌던 사회문제를 드러내고 있다. 그는 상처로 고통 받고 있는 힐빌리들의 문화를 적나라하게 폭로한 배신자로 불릴 위험을 각오해야 했다.

밴스는 그가 ‘힐빌리 문화’로부터 천천히 그리고 고통스럽게 벗어나는 과정을 그린다. 그것은 외손주 남매를 키워준 할머니가 집안의 버팀목 역할을 해주었기 때문이다. 제정신이 아닌 엄마를 떠나 할모라 부른 할머니의 곁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 그의 친구들이 ‘학습된 무기력’에 빠져 일찌감치 미래를 포기해버린 반면, 밴스는 매일매일 공부하라는 할모때문에 포기하지 않았다. 해병대에 자원한 것은 그의 인생을 바꾼 커다란 분기점이었다. 그는 해병대 생활을 통해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과 목표의식을 갖게 됐고, 노력하면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얻었다. 마침내 오하이오 주립대학을 마친 후에는 예일대 로스쿨에 입학할 수 있었다.

얼핏 보기에 가난과 역경을 딛고 아메리칸 드림을 이룬 성공기 같다. 그런데 실제 내용은 백인 빈곤층을 오랜 세월동안 관찰한 것을 날 것 그대로 기록한 인류학 조사 보고서같다. 힐빌리들은 1930년대 대공황을 겪기는 했지만 1970년대 까지는 그런대로 먹고 살만했던 것 같다. 정착초기에는 광산에서 일하면서 가족을 부양했고, 공황이후 철강, 자동차 산업 중심 도시로 이주해서 생계를 꾸렸다.

그런 힐비리의 세상이 바뀐 것은 미국내 제조업의 쇠락때문이다. 미국 제철업이 일본, 한국 등 새로운 국가에 밀리면서 일자리가 빠르게 줄어들었다. 이 과정에서 정부 보조를 받는 실직자들이 미들타운에서 크게 늘었다. 밴스의 할머니는 백인 빈곤층중 평생 일하지 않으면서 푸드스탬프로 고기와 술을 사먹고, 마약에 빠진 이웃들을 경멸했고, 자신의 세금을 그런 곳에 쓰는 정부를 힐난했다. 밴스 역시 마트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이른바 ‘복지의 여왕’에게 반감을 갖기 시작했다. 힐빌리는 육체노동에 종사했기에 오랜동안 민주당을 지지했다. 하지만 일자리가 줄어들고 동시에 복지에 연명하는 빈곤층의 증가를 보면서 공화당 지지로 돌아섰다. 공화당의 이념을 지지하기 보다 민주당에 대한 실망이 정치노선 선회의 원인이었다.

힐빌리는 특히 오바마와 같이 도회풍의 민주당 지도자와 자신들의 일치시키지 못했다. 완전히 다른 세계 사람들이 자신들을 위한다고 위선을 떠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밴스는 할머니의 정치적 이중성을 힐빌리의 ‘리얼리티’라고 본다. 즉 할머니는 제철소가 문을 닫고 일자리가 없어지는 현상에 대해 정부가 책임을 있다고 생각하면서 동시에 국가가 세금을 일하지 않는 자에게 사용하면서 사회를 망치고 있다고 정부를 비난한다.

미국의 백인이 다 같은 백인이 아니다. 우연하게 산골에 정착한 백인들은 아메리칸 드림을 다른 동네 이야기처럼 여기면서 150여년을 살았고, 21세기에도 여전히 희망없는 고통의 삶을 살고 있다. 지식인들이 복지 제도 논쟁에 집중하는 동안 문화적으로 소외된 집단들은 정책과 비전에 귀를 기울이기보다 좌절감과 분노를 배설할 통로로 정치를 소비하고 있다. 자연스럽게도 최하층 백인들이 분노하면서 뭉쳐서 도널드 트럼프를 세계 대통령으로 선출하는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가족과 복지, 일자리와 교육, 정치와 문화, 이 모든 것이 복잡하게 얽힌 실타래 속에서 개인과 사회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고, 어떤 책임을 져야 하는지를 그는 묻고 있다.

힐빌리들이 겪는 불운한 인생에 이들의 책임이 얼마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