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는 1800년 6월, 48세라는 다소 이른 나이에 사망했다. 사망 원인은 독살이 아니라 종기로 인한 자연사라고 한다. 정조이후 시작된 19세기는 혼돈의 시기였다. 세익스피어 작품같은 그의 삶과 죽음, 고난했던 우리 역사였기에 정조는 그야말로 핫아이템이다.
정조를 가리켜 흔히 ‘미완의 개혁군주’라고 부른다. 그는 그야말로 ‘밥 먹을 겨를도 없이’ 부지런히 국정에 매달렸고, 꿈틀거리는 변화의 시대를 열어제쳤다.
그동안 나랏일을 외면했던 사람들은 과거시험을 치르기 위해 전국에서 몰려왔다. 서얼과 아전은 신분 제약을 벗어나 규장각이나 장용영에 발탁되기 위해 애썼다. 비록 세계사 흐름에서 비켜간 변방이었지만, 청을 통해 새로운 문화를 접하고 동아시아 무역에도 참여했다.
정조는 즉위 후 영조의 탕평 이념을 계승하고, 왕권 강화에 힘을 기울였다. 그는 왕이라는 절대적 존재 아래 각 당파가 경쟁·협력하는 정치체제를 염원하였다. 그는 자신과 학문, 정치를 함께할 인재 양성을 위해 규장각을 성립했다. 오로지 왕을 위한 친위부대 장용영도 만들었다. 당파와 신분, 지역을 초월해 인재를 등용했다. 남인이었던 정약용, 서얼이었던 이덕무 등을 등용해 개혁정치를 이끌었다.
정조는 1791년 1월 마침내 육의전을 제외한 시전의 금난전권을 혁파하고, 그를 한문과 한글로 써서 큰 길거리와 네 성문에 내걸었다. 조선 초, 도성안팍 10리 내의 상업권을 보장한 금난전권은 국역에 대한 보상으로 주어졌다. 조선후기 상업이 발전하면서, 18세기 후반에는 금난전권을 획득하기 위해 거의 대부분의 상인이 권세가나 각 관청과 결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전상인들은 집권 정치 세력인 노론 계열의 특권 가문과 연결돼 있어 그 고리를 차단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1795년은 겉으로 볼 때 태평성대 그 자체였다. 혜경궁의 회갑 잔치을 위해 ‘8일간의 수원 행차’ 동안 정조는 노인들을 대접하고, 백성들의 고충을 처리했다. 3월에는 창덕궁 후원 잔치에 신하를 초대해 친인척을 멀리하고 어진 인재들을 가까이 하는 정치를 하겠다고 약속하기도 했다. 1796년, 정조의 상징 화성이 완성됨과 동시에 사도제자도 마침내 공식적으로 복권되었다.
그런데 재위의 끝무렵, 정조는 자신이 후원했던 신하의 지원도 받지 못하는 고립무원의 처지였다. 말년에 그는 “아무리 고심해도 정치가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말하거나 “나 혼자서 천 칸을 다 지키는 격”이라고 개탄하곤 했다. 개혁을 통해 도입된 새로운 질서는 자리 잡지 못했고, 신하들은 함께 하지 못했다.
마침내 노론의 신하들은 천주교 문제를 들고 나왔다. 정약용 등 국왕 지지세력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린 것이다. 천주교 문제라는 뜨거운 감자가 다시 거론되자, 정국은 급격하게 사학인 천주교 성토 국면으로 전환되었다. 개혁을 주도하던 남인의 영수 채제공의 후계자였던 이가환과 정약용은 물론이고, 정조까지 공격의 대상으로 몰리게 되었다.
이에 정조는 이가환과 정약용을 지방으로 내려보냈다. 그들이 떠난 후, 그에게는 사람이 없었다. 얼마 안 있어 채제공도 “조정의 온갖 일이 재작년보다 작년이 못하고, 작년보다 올해가 더 나빠지고 있다”면서 물러가 버렸다. 그러자 노론과 소론은 기다렸다는 듯 그 공백을 자기들 사람으로 채웠다. 남인의 소외는 곧 왕의 고립을 의미했다.
이런 상황에서 정조는 왕세자인 순조의 세자빈 간택에 들어갔다. 정조가 선택한 인물은 안동 김씨 김조순의 딸. 순조(1790∼1834)가 왕위에 오르고, 그녀는 순원왕후가 되었다. 영조의 비 정순왕후는 1801년 신유박해라는 천주교 탄압을 주도했다. 소수의 가문이 권력을 휘두르는 세도정치 60여년이 시작됐다. 세도정치는 안동 김씨 외에도 풍양 조씨, 여흥 민씨, 반남 박씨 등 서울 양반의 연합정권이라고 볼 수있다. 이후 조선의 왕은 누구도 정조처럼 강력한 왕권을 얻지 못했다.
역사학계는 권력 독점의 세도정치는 탕평정치의 한계가 구조화된 것이라고 말한다. 탕평정치와 세도정치는 분절된 것이 아니라 구조적으로 연결돼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정조 이후’는 엄청난 사건이 아니다. 19세기 세도정치도 조선이라는 왕조국가가 그 생명을 다해가면서 밟아나간 과정일 뿐이다.
이제 궁금한 것은 대항해시대 이후 조선의 한반도의 지정학적 조건이다. 그리고 발전은 내재적이 아니라 오히려 열려야 가능하다. 그 각도에서 다시 역사를 보다면 어떨까?
마지막으로, 애쓰다 지친 정조를 위하여 이제 편히 쉬라고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