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문물을 공부한 20대 중심의 개화파는 우정국 축하연에서 정변을 일으킨다. 그들은 고종의 신병을 확보하고, 곳곳에서 수구파의 거물들을 처단한다. 다음 날인 5일에 새로운 개화당 정부의 수립을 내외에 선포했다. 그들은 신분제를 폐지하고 입헌군주제 실시를 계획하고 있었다. 6일 오전 9시경에는 제정된 정강을 한양의 곳곳에 붙였고, 오후 3시에는 고종도 조서를 내렸다. 그러나 그시각 수천 명의 청나라 군이 궁궐로 쳐들어왔다. 150여 명의 일본 군대는 전투도 하지 않고 제물포로 도망쳤다. 결국 갑신정변은 ‘삼일천하’로 끝났다.
실패한 개화파는 역모의 죄를 받았다.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은 일본으로 망명했고, 홍영식 등 사관생도 7명은 끝까지 고종 옆을 지키다 살해되었다. 서재필은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건너가 막노동하며 학교를 마치고, 최초의 서양 의사가 되었다. 해외에 있었던 유길준은 귀국 후 가택연금되어 ‘서유견문’을 완성한다. 괴수 김옥균의 부모와 형제들은 자결하거나 죽임을 당했고, 그의 아내와 딸은 노비가 되었다. 홍영식의 아버지는 갑신정변의 실패 후 집에서 며느리, 손자와 함께 자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