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0여 년 전, 폴리네시아인들이 별빛에만 의지해 바다를 건너 하와이에 도착해 살게 됩니다. 그들이 하와이 제도에 처음으로 정착했다고 여겨집니다.
1778년, 대항해시대의 끝을 장식한 제임스 쿡이 카우아이 섬에 유럽인으로는 처음 도착합니다. 쿡 선장은 샌드위치 백작의 이름을 따서 이곳을 ‘샌드위치 제도’라고 이름 지었습니다. 19세기 중반까지 하와이는 샌드위치 섬으로 불리웁니다. 원주민과의 분쟁으로 사망한 쿡선장의 하와이 방문은 짧게 끝났지만 하와이 역사에 커다란 변화를 일으켰습니다.
십여년이 흐른 1792년에 쿡선장과 함께 섬에 처음 온 조지 밴쿠버 대위가 다시 하와이에 도착합니다. 밴쿠버대위는 하와이 원주민들에게 다양한 형태의 전쟁과 정부를 소개했습니다. 1810년 카메하메하 1세는 유럽식 전쟁을 통해 하와이 제도 전체를 점령하고 통일합니다. 카메하메하 1세가 죽자 그의 아들 카메하메하 2세가 왕위를 계승합니다. 그의 치세인 1820년에는 하와이에 최초의 선교사가 도착합니다. 기독교 선교사들이 하와이에 도착한 이후로 섬 원주민들은 주권, 문화, 삶의 방식이 점점 더 위협받게 되었습니다.
1835년에는 카우아이에 최초의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이 생깁니다. 하와이 제도의 비옥한 토양이 인정을 받고 농업이 주요 산업이 됩니다. 1850년대에는 하와이의 플랜테이션 생산량이 증가하면서 노동력의 수요도 높아졌습니다. 최초의 외국인 노동자는 중국인들이었습니다. 이후 일본, 한국, 필리핀과 포르투갈에서도 일자리를 찾아 노동자들이 들어왔습니다.
1840년에는 카메하메하 3세의 주도 하에 헌법이 제정되어 입헌군주국이 되었습니다. 1843년에는 영국, 미국, 프랑스 등이 독립국으로 승인합니다. 카메하메하 3세는 서구의 토지사유지 제도를 도입합니다. 하와이를 셋으로 나누어 왕실, 족장, 백성이 동일하게 토지를 갖게 하지만, 실패합니다. 토지 소유의 개념 자체가 낯설었기 때문에, 토지 소유권을 얻은 백성은 1% 미만에 그쳤습니다. 1848년에 홍역과 백일해가 선교사와 선원들을 통해 하와이 왕국으로 유입되어 인구의 4분의 1이 사망했습니다
1887년에는 샌퍼드 밸러드 돌(Sanford Ballard Dole)을 비롯한 미국계 이민자들이 들고 일어나 무력으로 왕궁을 점령한 뒤 군주인 칼라카우아를 협박하여 헌법을 개정하게 합니다. 칼라카우아는 아무 실권이 없는 상징적 국가원수가 되었고, 1891년에 사망했습니다. 1893년에는 소수의 백인 농장주와 사업가들이 조직한 쿠데타로, 하와이 군주국을 아예 축출해버립니다. 헌법 채택을 위해 왕의 협조를 강압적으로 얻어내었기 때문에 바요네트(총검) 헌법이라고도 합니다.
5년 후, 미국은 하와이를 풍부한 농업 자원이자 태평양의 전략적 거점으로 간주하면서 하와이를 합병했습니다. 그리고 1959년에 미국 의회는 하와이를 미국의 50 번째 주로 편입합니다. 그 기간 동안 식민지 개척자들은 땅을 몰수하고 섬의 일부를 군사화했습니다. 그들은 전통적인 문화 및 영적 관행을 억압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학교와 정부에서 하와이어를 금지했습니다.
세월이 흘러 1978에는 하와이주 헌법제정 회의에서 하와이어를 주의 공식 언어로 채택했습니다. 하와이는 미국에서 영어가 아닌 언어를 공식어로 사용하는 유일한 곳이 됩니다. 2009년 하와이 호놀룰루 태생인 버락 오바마 상원의원이 미국 제44대 대통령에 취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