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용창 조선비즈 인턴기자 mycitystory.korea@gmail.com
◆속세를 벗어나는 길목
서울 부암동의 현통사를 지나면 포장된 길이 사라지고 흙바닥이 답사객을 반긴다. 경사는 그리 심하지 않지만, 본격적으로 숲길이 시작된다는 신호다. 흙길이지만 정비가 잘 돼있어 산책을 즐기는데 불편함은 없다. 길게 자란 나무들이 햇빛을 적당히 가려 줘 더욱 쾌적하다.
나뭇가지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을 즐기며 걷다 보면, 어느덧 길이 조금씩 넓어지며 백석동천(白石洞天)의 ‘백사실 별서(別墅: 오늘날의 별장을 의미) 터’에 도착한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경치 좋은 곳을 발견하면 ‘OO洞天’이라 이름짓고 그 아름다움을 즐겼다. 동천(洞天)이라는 단어에는 ‘하늘과 맞닿은 곳, 신선이 사는 곳’이라는 의미도 있는 만큼 단순히 보기 좋은 것만이 아니라 ‘속세와 떨어진 고즈넉한 아름다움’을 즐길 수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백석동천 역시 서울 안에 있다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청정한 분위기를 간직하고 있다.
과거에도 명승지로 이름난 곳은 사대부들이 별장을 짓고 피세(避世)공간으로 활용했다. 백석동천도 예외는 아니다. 원래 이 곳에도 사대부의 별장이 들어서 있었으나 건물은 모두 유실되고 과거 별장의 흔적만 남아있다. 어떤 이가 세속에서 벗어나 풍류를 즐기려 했는지 지금은 알 수 없다. 그저 ‘오성과 한음’으로 유명한 이항복의 호와 계곡의 지명이 일치한다는 점, 이항복이 어린시절을 근처 평창동에서 보냈다는 점 등을 미루어 이 곳이 이항복의 별장이 아니었을까 짐작하고 있다.
◆옛 사람과 같은 풍경을 보다
일반적으로 서울의 별서는 지방과 달리 온전한 살림집의 형태를 띄고 있으며,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정자를 포함하고 있다. 백석동천 역시 정자와 살림집이 분리된 형태를 가졌다. 서울시 동명연혁고에 따르면 1860년대에 600여 평 규모의 별장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사랑채 터와 일부 담장의 흔적, 정자 터 뿐이다.
옛 별장과 자연이 어우러지는 멋진 모습을 볼 수 없다는 점은 아쉽지만, 너무 실망할 필요는 없다. 백석동천은 그 풍광만으로도 명승 제 36호로 지정되어 있을 정도로 아름다운 곳이다.
남아있는 사랑채 터에 올라오면 집 터의 위치는 주변 지형보다 조금 높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남아 있는 기단석 위에 사랑채가 올라가 있었음을 감안한다면, 집 주인은 창을 여는 것만으로 연못을 비롯한 주변 경관을 한 눈에 담을 수 있었을 것이다. 시야 확보를 위해서인지 집 터와 연못 주변에는 나무들이 듬성듬성 심어져 있다. 나무들이 적당한 그늘을 만들고, 탁 트인 시야는 마음까지 시원하게 뚫어주지만, 선선한 가을 날씨에는 조금 춥게 느껴지는 점이 아쉽다. 안채가 함께 들어선 공간이었음을 감안해도 빈 공간이 지나치게 넓어 보인다.
예전 집 주인도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집 아래쪽의 연못에 마련된 정자 터로 가면 집에서 보는 것과는 또 다른 경치가 드러난다. 집 터에서 내려다 볼 때에는 적어 보였던 나무들이지만, 연못가에 내려온 산보객을 햇빛으로부터 지켜주기에는 충분하다. 가까이에서 본 연못은 생각했던 것보다 넓었다. 낙엽으로 덮인 부분이 많아 아쉬웠지만, 이 또한 가을에만 즐길 수 있는 풍경이다. 만약 정자에 앉아있는 것도 갑갑하다면, 정자에서 조금 떨어진 곳의 석상(石床 : 돌 평상)을 찾으면 된다. 혼자 앉아 즐기기에는 조금 넓고, 친구 한 명을 불러 바둑을 두거나 술잔을 기울이며 즐기기에 딱 좋다.
◆ 이어지는 길, 탈출은 끝나지 않았다.
별장 터를 벗어나면 계곡을 왼편에 끼고 길이 이어진다. 이 계곡은 서울 시내에서 유일하게 도룡뇽과 맹꽁이가 사는 곳이다. 아쉽게도 날이 추워지고 수량이 적어 도룡뇽을 볼 수는 없었다.
잠시 걷다보면 솟대가 등장한다. 지나가는 사람들마다 돌 하나씩 더 올리고 짧게 소원을 빈다. 옛날 마을 어귀에서 장승과 함께 수호신 역할을 담당했지만 어느 새 장승보다도 만나기 힘들어졌다. 솟대 밑둥은 사람들이 쌓은 돌탑에 둘러싸여 있다. 마을의 수호신과 소원을 비는 돌탑은 제법 어울리는 한 쌍이다.
바위에 새겨진 ‘白石洞川’ 이 동천의 시작을 알린다. 사실 현통사를 지나오는 길은 일반적인 답사 코스와는 반대 방향이다. 그러나 백사실 입구 쪽 주택가에는 급경사가 많아 본격적인 경치를 즐기기도 전에 지칠 수 있다.
삼십분 정도 숲길을 따라 걷다 보면 다시 주택가가 나온다. 작은 일탈을 즐기기에는 조금 부족한 듯하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주택가는 산을 끼고 이어지고 있으며, 주변 풍경에 한껏 어울리는 주택과 가게들이 모습을 드러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