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리 홀리데이 Billie Holiday 가 몇 주 전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나는 이제야 그녀에 대한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 아마도 이글보다 훨씬 긴 부고를 받는 사람들이 많이 있을 테지만, 홀리데이는 그 누구보다도 더 오래 우리 가슴속에 살아 있을 것이기에 이 보잘것 없는 글이 조금 늦어졌다고해서 고인이나 남아 있는 우리에게 그리 누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홀리데이가 세상을 등졌을 때 우리들은 모두 비탄에 잠겼다.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홀리데이만큼 진정으로 자기 파괴의 길을 걸었던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마흔넷의 나이에 그토록 힘겨웠던 삶의 여정이 마침내 막바지에 다다랐을 때, 그녀는 이미 육체적으로나 예술적으로나 망가질 대로 망가져 있었다.

어떤 이들은 황폐해진 가운데서도 그녀의 예전의 목소리가 이따금 빛을 잃지 않고 묻어나는 순간을 위안 삼으며 아무렇지도 않은척 하려 애를 썼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차마 그녀의 모습을 보려고도, 그 노래를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영국에서는 거의 구할 수도 없는, 1939년에서 1946년 사이의 전성기 음반들을 운 좋게도 갖고 있는 나이 지긋한 사람들은 차라리 집안에 틀어박혀 그녀에게 불후의 명성을 안겨준, 그 거칠게 굽이치는 육감적이고 참을 수 없이 슬픈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어쩌면 우리는 그녀의 육체적 죽음을 슬퍼하기보다는 그녀가 고통에서 벗어났음에 안도해야 할지도 모른다. 사업 감각이라곤 없었던 그녀가 술과 마약을 살  수 있게 해주었던 그 목소리를 잃고, 또한 한번 보면 잊지 못할 만큼 아름다웠던 예전의 모습도 잃어버리고, 어떻게 한창때의 모습과 노래를 기억하는  나이 지긋한 사람들의 변함없는 애정에만 의지해서 중년을 맞이할 수 있었겠는가.

아이러니하게도, 우리가 느끼는 슬픔이야말로 빌리 홀리데이의 예술, 누구라도 애석해하지 않을 수 없는 한 여자의 예술을 잘 나타내주는 것이다.  홀리데이와 견줄만한 다른 위대한 블루스 가수들은 그녀보다는 좀더 나은 환경에서 활동할 수 있었다. 이 암사자들은 종종 상처받거나 궁지에 몰리기는 했어도 클레오파트라나 페드라와 같은 비극의 여주인공에 비견할만하지만, 홀리데이의 경우는 가슴 깊이 상처 입은 오필리어와 같았다고 할 수 있다.

홀리데이는 블루스, 아니 재즈 가수들 중에서도 푸치니 오페라의 디바와 같은 존재였으며, 그녀가 카바레풍으로 불렀던 블루스는 가히 독보적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타고난 가창법은 팝송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녀의 독창성은 마음에서 우러나온 그녀의 풍부한 감정표현에 팝적인 요소가 녹아들면서 만들어졌다. 그녀는 달콤한 선율을 철저히 배제한 채, 자신만의 흐느끼듯 늘어지는 목소리로 베시 스미스나 루이 암스트롱 처럼 비탄에 잠긴 곡조를 노래했다.

그 가늘면서도 거친 독특한 음색은 관능적이면서도 사랑의 고통을 체념하고 받아들이는 듯한 느낌을 준다. 거슈인의 오페라 ‘포기와 베스’에 나오는 곡들을 홀리데이만큼 노래한 사람은 일찍이 없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녀의 노래에는 잘려나간 자신의 다리를 바라보며 누워 있는 사람과 같은 마음의 고통과 육체적 체념이 뒤섞여 있다. 그래서 흑인에 대한 폭력에 항의하는 시에 곡을 붙여 불후의 명곡이 된 ‘이상한 열매 strange fruit'(흑인이 백인에게 린치를 당해 나무에 거꾸로  매달린 모습을 노래한 것) 에서 우리는 그처럼 섬뜩한 전율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고통은 곧 그녀의 삶이었이지만, 그녀는 그에 굴복하지 않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가 느끼는 슬픔이야말로 빌리 홀리데이의 예술, 누구라도 애석해하지 않을 수 없는 한 여자의 예술을 잘 나타내주는 것이다.  홀리데이와 견줄만한 다른 위대한 블루스 가수들은 그녀보다는 좀더 나은 환경에서 활동할 수 있었다. 이 암사자들은 종종 상처받거나 궁지에 몰리기는 했어도 클레오파트라나 페드라와 같은 비극의 여주인공에 비견할만하지만, 홀리데이의 경우는 가슴 깊이 상처 입은 오필리어와 같았다고 할 수 있다.

홀리데이는 블루스, 아니 재즈 가수들 중에서도 푸치니 오페라의 디바와 같은 존재였으며, 그녀가 카바레풍으로 불렀던 블루스는 가히 독보적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타고난 가창법은 팝송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녀의 독창성은 마음에서 우러나온 그녀의 풍부한 감정표현에 팝적인 요소가 녹아들면서 만들어졌다. 그녀는 달콤한 선율을 철저히 배제한 채, 자신만의 흐느끼듯 늘어지는 목소리로 베시 스미스나 루이 암스트롱 처럼 비탄에 잠긴 곡조를 노래했다.

그 가늘면서도 거친 독특한 음색은 관능적이면서도 사랑의 고통을 체념하고 받아들이는 듯한 느낌을 준다. 거슈인의 오페라 ‘포기와 베스’에 나오는 곡들을 홀리데이만큼 노래한 사람은 일찍이 없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녀의 노래에는 잘려나간 자신의 다리를 바라보며 누워 있는 사람과 같은 마음의 고통과 육체적 체념이 뒤섞여 있다. 그래서 흑인에 대한 폭력에 항의하는 시에 곡을 붙여 불후의 명곡이 된 ‘이상한 열매 strange fruit'(흑인이 백인에게 린치를 당해 나무에 거꾸로  매달린 모습을 노래한 것) 에서 우리는 그처럼 섬뜩한 전율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고통은 곧 그녀의 삶이었이지만, 그녀는 그에 굴복하지 않았다.

strange fruit 

홀리데이의 끔찍했던 과거에 대해서는 별로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녀의 자서전 ‘블루스를 노래한 여자 Lady Sings the Blues ‘에는 실제 일어난 일들보다도 그녀의 감정들이 잘 표현되어 있다. 사춘기 무렵 청중들이 던져주는 동전을 허리를 숙여 집지 않고 대신 자신의 손에 직접 쥐어주도록 했을 만큼 그녀는 자존심이 강했고, 어른이 되어서도 남의 도움에 기대려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녀 주위엔 그녀를 돕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뛰어난 안목에 더없이 진실한 사람이었던 존 해먼드가 그녀를 발굴하여 세상에 내놓았고, 1930년대 최고의 연주자들 테디 윌슨, 프랭키 뉴턴, 레스터 영이 그녀와 함께 했으며, 그녀에게 무한한 애정을 쏟았던 음악 애호가들과 수많은 대중들도 그녀 곁에 있었다.


그러나 스스로 죽음으로 몰고 갈 수 밖에 없었던 그녀의 고통스러운 생을 되돌리기에는 너무 늦어 있었다. 10살때 강간을 당하고, 십대에 마약에 중독되는 일이 설령 없었다 하더라도, 1915년 볼티모이 흑인 빈민가에서 아름다움과 자존심을 함께 지니고 태어난 것 자체가 그녀에게는 너무나 커다란 약점이었다.

그러나 스스로 파괴되어 가는 와중에도 그녀는 노래를 계속했다. 비록 이미 황폐해진 목소리였지만, 그것은 마음 깊이 애잔함을 불러일으켰다. 어찌 그녀를 위해 눈물을 흘리지 않고, 그녀를 이렇게 만든 세상을 탓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에릭 홉스봄 ‘저항과 반역 그리고 재즈'[195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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