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롤 드골(1890~1970) 은 1968년 5월 혁명 직후, 1969년 실시한 개헌안이 국민투표에서 부결되자 대통령직을 사임합니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와 완전히 은퇴하고 회고록을 쓰기로 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듬해 심장 마비로 사망하고 맙니다.
죽음이후 드골은 오히려 더 그리움의 대상이 됩니다. 프랑스에 그의 이름을 딴 도로를 3천 6백개가 넘는다고 합니다. 그는 여전히 자주 정치에 소환되고 있습니다. 드골은 ‘위대한 국가’라는 비전을 평생 탐구하고, 현실로 만들어갔습니다. 마크롱은 바로 드골 비전의 현대 옹호자입니다. 드골을 알아야 현대 프랑스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1940년 5월, 2차 세계대전에서 프랑스 육군은 6주만에 항복합니다. 군사적 패배일 뿐만 아니라 정신적 붕괴였습니다. 헨리 페댕 등 프랑스 장군들은 1940년 6월 나치 독일과 휴전 협정을 맺습니다. 그러자, 드골은 런던으로 피신하여 자유 프랑스군을 조직합니다. 드골은 BBC에서 라디오 방송을 시작하며, 프랑스 저항운동의 연락병이자 구심점을 만듭니다.
“프랑스의 병사들이여, 당신들이 어디에 있건 일어나십시오!” 패배주의에 휩싸여 흩어져 있던 프랑스인들이 드골의 연설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자유 프랑스’는 사실상 망명 정부의 역할을 대신하게 되습니다. 드골은 프랑스 식민지를 연합군에 편입시키고, 식민지출신 군대는 북아프리카에서 성공적으로 싸웠습니다.
이제 ‘자유 프랑스’는 연합국의 일원이 되어 반독일 전쟁에 참여한 것으로 인정받습니다. 1944년 6월에 그는 프랑스 망명 정부의 수장이 됩니다. 8월 26일, 연합군이 파리를 점령하자, 드골은 의기양양하게 파리에 입성했습니다. 3개월 후, 드골은 만장일치로 프랑스의 임시 대통령으로 선출됩니다. 연합국의 일원으로 싸운 전력이 있기에, 프랑스는 유엔 안보리 5대 상임 이사국의 일원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1946년 1월에 통치권이 부족하다고 주장하며 대통력직을 사임합니다. 1947년 반공 단체인 프랑스 국민 연합을 조직하여, 1951년 제1당으로 성장시킵니다. 그런데 또 다시, 드골은 1953년 당을 해체하고, 정계에서 은퇴합니다. 그런데 5년 후 알제리에서 반란이 일어나 프랑스는 다시 정치적 위기에 빠지게 됩니다. 드골도 다시 정치에 등장합니다. 새로운 헌법이 통과되고, 드골은 1962년 제 5공화국의 대통령으로 선출됩니다.
대통령 중심제 개헌으로 집권한 드골은 ‘위대한 프랑스’를 만드는데 매진합니다. 드골은 이제 프랑스를 강대국 중 하나로 반드시 인정해야 한다고 선언합니다. 그 어떤 국가도 프랑스를 좌지우지해서는 안된다고 스스로 결정합니다. 그 후 10년 동안그는 알제리를 독립시키고, 프랑스를 핵 보유국으로 만들고, 나토동맹에서 철수합니다. 소련을 방문하고, 중국을 최초로 인정하는 등 독립적인 외교노선을 따랐습니다. 미국 패권에 맞서며, 달러화 공방과 금본위제도를 둘러싼 논쟁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마크롱은 드골 대통령론을 말하자면 이론화합니다. 그가 올랑드 대통령의 고문으로 일하는 동안 그는 ‘주피터’대통령’론을 합니다. 마크롱은 왕의 상실과 혁명 이후의 공포가 프랑스 공화국의 중심에 “감정적이고 상상적인 집단적 공백”을 만들었다고 주장합니다. 이로 인해 프랑스인들은 불안감을 느꼈고, 아우라와 신비로움을 가진 지도자가 필요했습니다. 독일의 정치적 리더십이 법의 적용에 의해 정의된다면, 역사적으로 가톨릭 교회와 군주제를 중심으로 구조화된 프랑스 사회는 명확한 수직적 권위와 권력을 구현하는 대통령이 필요하다고 마크롱은 주장합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드골은 프랑스의 대통령이어야만 했습니다. 개인적 성품이나 스타일만이 아닙니다. 드골은 제왕적 대통령제와 직접선거를 고안하고 도입했습니다. 드골이 집권했던 1960년대만 해도 프랑스 국민은 “유럽이 거대한 프랑스가 될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드골 사후 독일에 경제적으로 추월당하고, 유럽의 균형자역할을 했던 프랑스의 외교적 파워는 점점 더 영향력을 잃고 있습니다. 냉전이 끝나고, 중국이 부상하면서, 미국의 유럽전략도 변화하고, 프랑스의 외교적 역할과 지위도 달라지고 있습니다.
그 하나의 사례가 호주의 잠수함 계약철회입니다. 2016년 호주는 프랑스로부터 잠수함 12척을 2030년부터 공급받기로 계약합니다. 그런데, 3국간 군사협의체인 오커스(AUKUS) 차원에서 호주에 핵잠수함을 공급하기로 합니다. 이에 호주는 프랑스와의 계약을 철회하고, 프랑스 방산업체인 나발그룹에 약 7,500억 원 위약금을 지불하며 마무리됩니다.
탈냉전 이후에도 미국의 외교목표는 여전히 러시아견제였습니다. 그래서 나토의 확대를 꾸준히 시도합니다. 이제 미국은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전략적 혜택을 누리고 있습니다. 중립을 지켰던 스웨덴과 핀란드가 나토에 합류하고, 유럽 국가들은 국비를 증강하면서, 미국에 더욱 안보를 의존합니다. 2022년 2월,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자, 마크롱은 바로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 푸틴을 5시간동안 만나기만 했습니다.
마크롱은 2023년 4월, 시진핑을 만나고, 환대를 받습니다. 그는 ‘전략적 자율성’을 주장하며, 중국에 신호를 보냅니다. 그런데 비즈니스 기회는 대가없이 주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문제는 마크롱과 무엇을 주고 받을 수 있는가입니다.
마크롱은 EU 의 다른 어떤 회원국도 소유하지 못한 하드 파워의 지렛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핵무기로 무장하고, 유엔 상임이사국인 프랑스는 전 세계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대규모 군대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군사 기지와 해외 영토는 카리브해에서 태평양까지 뻗어 있습니다. 프랑스는 264개의 대사관과 공관을 두고 중국(275개)과 미국(267개)에 이어 세계 3위의 외교 네트워크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역사적인 전환점이라고 해도, 아직 독일조차도 미국의 보호 없이는 큰 결정을 내리는 것을 꺼려했으며 그 어느 때보다도 미국 무기 구매에 열중하고 있습니다. 역사의 전환은 매우 느리게 올 수도 있습니다. 지나치게 가볍고 빠른 발검음 때문에 넘어질 수도 있는 국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