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효진 조선비즈 인턴기자 mycitystory.korea@gmail.com

-세검정, 인조반정 당시 칼을 씻으며 태평성대를 기원했던 곳

-차일암, 실록 완성한 후 세초연을 벌였던 연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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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초, 흑백의 역사 속에 갇혀 있던 세검정 터는 수묵 담채화에 색을 입히듯 오색 단풍으로 물들었다.

종로구 신영동 168번지에 자리한 팔각 정자 위로 따사로운 가을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다. 이 곳은 백사골 계곡이 북한산 계곡과 만나 홍제천을 이루며 흐르는 중간 지점으로 서울 특별시 기념물 제 4호 ‘세검정’이 있다. 미끄러질 듯 맨질맨질한 바위 위에 세워진 세검정 앞으로는 홍제천의 시원한 물줄기가 흐르며 그 운치를 더했다. 과거부터 맑은 물이 흐르기로 유명한 곳이다.

1960년대 만해도 동네 아낙들은 세검정 터로 나와 토닥토닥 방망이 질을 하며 묵은 빨래를 했다. 물장구 치던 아이들도 몇 번의 자맥질 끝에 꾀죄죄한 몸 때를 벗겼다. 시원한 개울 물 소리와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경은 누구나 얻을 수 있는 자연의 선물이었다.

하지만 현재 정자의 모습은 과거 조선 숙종(1674~1720) 때 처음 지어질 당시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현재 모습은 1941년 종이 공장의 화재로 소실된 이후 겸재 정선의 <세검정도>를 보고 1977년 재복원됐다.

겸재 정선의 그림을 보면 세검정 주변으로 돌 담장이 있다. 또 주변의 굵고 시원스럽게 흐르는 천으로 내려가 발도 담글 수 있는 받침 돌도 있다. 하지만 현재는 그 앞으로 신작로가 생기며 개울로 내려 갈 수 있는 시설물이 없어지고 비탈 진 바위만 있을 뿐이다.

신작로가 들어서면서 과거의 운치는 거의 사라졌다. 인근 주민들 중 “깨끗하고 예쁜 곳이지만 눈에 안 띄어 문화 유산인지 몰랐다”는 의견도 있었다.

과거의 화려함은 각종 사료에서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자연의 경치가 좋았던 과거에 이곳은 문인들이 아름다운 자연 경관을 즐겨보며 머리를 식히고 마음가짐을 새로이 했던 곳이었다.

◆세검정, 인조반정 당시 칼을 씻으며 결의를 다진 곳

최근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가 개봉 한 달 만에 1000만 관객을 돌파하며 흥행 중이다. 이 영화는 왕조 실록과 승정원 일기에서도 사라진 조선 왕조 15일 간의 일을 상상력을 동원해 제작하며 광해군을 재해석했다.

15대 임금 광해군은 재위 기간 동안 국방력을 강화하고 대동법을 실시하는 등 국가 정비에 힘 썼던 왕이었다. 하지만 반대파인 서인 세력을 흡수하지 못했다. 결국 광해군 15년(1623) 서인 세력은 광해군 폐위 문제를 논하고 인조반정을 일으켰다.

구시대를 마감하고 새 시대를 연 서인은 이 곳 정자로 왔다. 흐르는 홍제천 맑은 물에 피 묻은 칼을 씻으며 마음을 새로이 했다. 그들은 이 정자를 세검(洗劍)이라 칭했고 세검정은 새 시대의 영광을 찬미하는 상징이 되기도 했다.

◆차일암, 실록을 완성한 후 세초하던 곳

인왕산을 앞에 두고 북악산을 뒤로하여 경치 좋은 세검정은 ‘차일암’ 위에 세워졌다.

‘차일암’이란 이름은 왕조의 실록을 편찬한 후에 그 원고가 되는 사초를 바위 위에서 차일(천막)을 치고 씻어버린 일에서 유래했다.

실록은 당시 시대 상을 기록한 자료다.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만 볼 수 있을 뿐 국왕도 보지 못했던 실록은 왕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한 사초를 바탕으로 쓰였다.

일단 실록 편찬이 끝나면 글쓴이인 사관의 신변을 보장하고자 사초를 차일암 위에서 흐르는 물에 씻었다. 그 후 편찬에 참여한 사람들의 노고를 달래기 위해 이 곳에서 세초연을 벌였다. 문인들이 즐겨 찾던 세검정 일대는 정기적으로 세초연을 벌이던 연회장이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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