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7년 러시아혁명이 일어나고 난 뒤, 러시아는 4년 동안 내전으로 대격변을 겪었다. 1922년 10월 붉은 군대가 블라디보스토크를 점령하자, 말하자면 반혁명세력이었던 백계 러시아인들은 탈출할 수밖에 없었다.
1920년대 초 한반도는 백계 러시아인들의 피난처였다. 이들 가운데 많은 수가 상하이, 일본, 샌프란시스코 등지로 다시 떠났다. 그 중 일부는 한반도에 남아 정착하였다.이들은 식민지 조선의 ‘경성’과 함경북도 경성군 ‘주을’에 작지만 흥미있는 러시아 공동체를 만들었다.
특히 ‘노비나’라 불리는 함경북도의 백계러시아인은 ‘얀코프스키’ 일가는 주을에 정착하였다. 미하일-유리-발레리 3대에 걸친 얀코프스키 일가의 디아스포라 삶이 시작되는 곳이다. 발레리 얀콥프스키의 가족사는 1945년 10월호「내셔널지오그래픽」에 ‘한반도에서도 가장 유명한 사냥꾼’ 이라는 특집 기사로 실린 적이 있다. 그 만큼 얀코프스키 일가는 호랑이 사냥군으로 유명했다.
‘얀포크스키’ 일가는 폴란드계 러시아인이었다. 러시아가 폴란드를 지배하던 1863년 무렵 모스크바 근처 대학을 다녔던 미하일 얀코프스키는 폴란드 독립투쟁에 가담했다가 시베리아로 유배당했다. 1868년 사면을 받은 미하일은 블라디보스토크에 정착하고, 러시아와 중국 국경을 가르는 아무르강을 오르내리며 국경 무역을 시작했다. 이와 함께 말 사육농장을 운영하여 큰돈을 벌었다. 미국까지 유학해 말 목축과 농장운영법을 배워온 유리 얀코프스키 덕분이었다. 사슴 사육을 시작해 녹용을 채취했고, 인삼 재배까지 했다. 1917년 무렵 얀코프스키 일가의 재산은 요즈음 가격으로 2000만 달러(200억원) 정도였다고 한다.
사회주의 혁명에 성공한 볼셰비키 세력들은 마침내까지 블라디보스톡까지 진군하였다. 자본가 세력으로 낙인 찍힌 얀코프스키 일가는 1922년 60명의 가족과 친척, 농장 일꾼들과 함께 야반도주해서 찾아간 곳이 청진이었다. 얀코프스키 일가는 다시 맨손으로 시작할 수 밖에 없었다. 당시의 상황을 3대손인 발레리 얀코프스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재벌로 통했던 우리 가족들은 하루아침에 거지 신세가 됐지요. 하지만 낙담하지 않았어요.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당시 하르빈으로 망명해 자리를 잡은 러시아 출신 자본가들을 찾아가 신용 대출을 요청했어요. 그들이 흔쾌하게 대출해 줘 그 돈으로 청진에서 기반을 잡았습니다”(월간조선)
조선에서 얀코프스키 일가를 다시 세우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얀코프스키 일가는 일본인과 사업을 하면서 재기의 기회를 잡게 되었다. 1926년 무렵 2대인 ‘유리’는 일본군에 식량을 제공하는 계약을 체결했고, 이를 통해 재기할 수 있었다. 이렇게 벌어들인 돈과 먼 친척인 (율 브리너의 아버지) 보리스 브리너에게 돈을 더 빌려 주을에 가옥과 대지를 구입했다.
얀코프스키 가족은 1928년 동해안의 주을온천으로 이사 갔다. 그의 아버지는 주을온천 주변에 큰 별장을 지었다. 청진에서 남쪽 50km 떨어진 해안가였다. 이곳에 온 가족이 살 수 있는 별장과 성당 등 부대시설을 만들었다. 다차에서 러시아에서 받았던 것처럼 가정교사를 두고 모든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얀코프스키 일가는 그곳에 ‘노비나’라는 이름을 붙였다. 노비나는 폴란드 국가 휘장에서 따온 이름이었다. 노비나는 1926년에서 1945년까지 19년 동안 유지되었다. ‘메밀꽃 필무렵’의 작가 이효석도 당시의 노비나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온천에서 삼마정쯤 들어간 산골은 망명해 있는 외국 사람의 부락 ‘노비나’ 촌이라는 것인데, 여름이 되면 그 부락이 피서지로 변해서 도회에 있는 외국인들이 한동안 모여들곤 했다’
그 시기에 얀코프스키 일가는 농장, 가축 사육, 사냥, 휴양지로 돈을 벌었다. 이곳 휴양지에 대한 뉴스가 아시아는 물론 유럽까지 널리 퍼졌다. 중국·일본·한국 등에 사는 외국인들이 여름휴가를 보내기 위해 찾았다. 2세대인 유리 얀코프스키는 처음으로 한국에서 사파리 프로그램까지 개발했다고 한다. 당시 스페인·중국·미국·일본 등에서 사냥꾼들이 몰려왔다.
전시체제로 들어섰던 1930년대 말에도 얀코프스키는 노비나 근처의 해안가에 또 다른 휴양지를 지을 수 있었다. 그 휴양지는 ‘루코모리예’라고 이름을 붙였다. 일본인들은 그것을 ‘류켄’으로 불렀다고 한다. 노비나와 루코모리예는 1930년대 내내 조선과 하얼빈, 북경, 상하이에서 온 백계 러시아인들의 휴양지가 되었다.
디아스포라 러시아인들은 교회당, 극장, 묘지까지 갖추고 있는 이여름 휴양지를 ‘진정한 러시아적인 보금자리’로 여겼다. 세월이 꽤 흐른 뒤에도 백계 러시아인들은 노비나를 ‘낙원’과 ‘동화의 세계’로 기억하고 있다. 그 중 하나가 ‘서머 코리안 보이’라고 불렸던 율 브리너였다. 율 브리너 집안은 얀코프스키일가와 친척의 연이 있어, 하얼삔에 살던 율 브리너는 여름이면 노비나를 방문하곤 했다.
태평양 전쟁은 노비아와 얀코프스키일가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버렸다. 1945년 8월에 소련군이 북한에 진주하자, 3대인 발레리 얀코프스키는 살아남기 위해 소련 군대에 자원 입대했다. 일본 경찰·관리·헌병을 심문하고 재판할때 통역업무를 담당했다. 그러나 1946년 1월, ‘국제 자본가의 앞잡이’와 ‘일본 스파이’라는 죄목으로 유형에 보내졌다. 스탈린 사후 복권되어 마침내 블라디보스톡에 정주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