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변호사 J.D.밴스가 쓴 ‘힐빌리의 노래’를 귀로 읽었다. 조선일보 프라이데이 책코너에서 올해의 책으로 문유석판사가 선택했다는 기사를 읽고 힐빌리의 노래를 리디북스에서 전자책으로 샀다.
힐빌리는 스코틀랜드에서 북아이랜드로 이주했다가, 다시 미국 애팔래치아 산맥 산골 지역에 정착한 사람들을 뜻한다. 미국의 백인 빈곤층(Poor White)를 상징하는 용어다. 미국인에게 힐빌리는 도시생활을 거부하고 낙후 지역에 살면서 독립을 추구하는 백인 이미지와 가난하고 무식하고 완고한 ‘꼴통 백인’이미지를 갖고 있다고 한다.
힐빌리의 노래를 스마트폰으로 다 듣고 나서 빈 종이를 펼치고, 생각나는 내용을 매핑했다. 이 책은 밴스가 어릴 때부터 직접 보고 듣고 겪은 이야기로 구성돼 있다. 얼핏 보기에 가난과 역경을 딛고 아메리칸 드림을 이룬 성공기 같다.
그런데 실제 내용은 저자의 역경 극복스토리라기 보다 백인 빈곤층을 오랜 세월동안 관찰한 것을 날 것 그대로 기록한 인류학 조사 보고서같다. 감추고 싶은 가족 구성원 하나 하나의 스토리를 담담하게 책에 담았다.
책의 공간적 배경은 켄터키의 산골 마을 잭슨과 오하이오의 철강도시인 미들타운이다. 밴스 뿌리는 스코틀랜드에서 북 아일랜드 울스터(Ulster)지역으로 이주했다가, 다시 18세기에 미국행 배를 탄 스코-아이리쉬 사람들이다.
이들은 어디에서든지 늘 농업, 광업 등 육체노동으로 먹고 살았고, 가족 중심으로 뭉쳐 살았다. 그러면서 거칠고 외부에 의존하지 않는 독립적인 공동체를 지향했다. 외부와 교류하면서 새로운 것을 수용하는 해변 지역 사람들과 대비되는 문화적 유전자를 지니고 있다.
힐빌리들은 1930년대 대공황을 겪기는 했지만 1970년대 까지는 그런대로 먹고 살만했던 것 같다. 정착초기에는 광산에서 일하면서 가족을 부양했고, 공황이후 철강, 자동차 산업 중심 도시로 이주해서 생계를 꾸렸다.
밴스가 목격한 것은 힐빌리의 가정내 폭력적 문화였다. 제철소 근로자인 할아버지는 알콜 중독자였고, 할머니는 할아버지에 석유를 붓고 성냥을 그을 정도로 전형적인 힐빌리 여장부였다. 빈빈한 가정 폭력은 자녀들이 공부에 관심을 갖지 않고 연애와 마약의 유혹에 빠지게 하는 원인이었다.
힐빌리 공동체에서 10대 임신과 대학진학포기는 흔하디 흔한 일이었다. 밴스의 어머니 역시 18세에 임신을 하고 20세가 되기 전에 아이를 낳았다. 두 아이를 둔 싱글맘으로 남편 후보를 수시로 갈아치웠고, 짝짓기 실패가 거듭될 수록 마약에 빠졌다.
두번째 힐빌리 세계를 구성한 요인은 미국내 제조업의 쇠락이다. 미국 제철업이 일본, 한국 등 새로운 국가에 밀리면서 일자리가 빠르게 줄어들었다. 이 과정에서 정부 보조를 받는 실직자들이 미들타운에서 크게 늘었다.
밴스의 할머니는 백인 빈곤층중 평생 일하지 않으면서 푸드스탬프로 고기와 술을 사먹고, 마약에 빠진 이웃들을 경멸했고, 자신의 세금을 그런 곳에 쓰는 정부를 힐난했다. 밴스 역시 마트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이른바 ‘복지의 여왕’에게 반감을 갖기 시작했다.
힐빌리는 육체노동에 종사했기에 오랜동안 민주당을 지지했다. 하지만 일자리가 줄어들고 동시에 복지에 연명하는 빈곤층의 증가를 보면서 공화당 지지로 돌아섰다. 공화당의 이념을 지지하기 보다 민주당에 대한 실망이 정치노선 선회의 원인이었다.
힐빌리는 특히 먼데일, 오바마와 같이 도회풍의 민주당 지도자와 자신들의 일치시키지 못했다. 완전히 별세계 사람들이 자신들을 위한다고 위선을 떠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밴스는 할머니의 정치적 이중성을 힐빌리의 ‘리얼리티’라고 본다. 즉 할머니는 제철수도 문을 닫고 일자리가 없어지는 현상에 대해 정부가 책임을 있다고 생각하면서 동시에 국가가 세금을 일하지 않는 자에게 사용하면서 사회를 망치고 있다고 정부를 비난한다.
미국의 가난한 백인의 세계는 나같은 동양인에게 불편한 감정을 준다. 나의 오랜 고정 관념은 백인이 인디언의 땅을 빼앗았고, 아프리카 사람들을 끌고 와서 값싼 노동력으로 부려 아메리칸 드림을 이룬 사람들이다.
그런데 미국의 백인이 다 같은 백인이 아니고, 우연하게 산골에 정착한 백인들은 아메리칸 드림을 남 동네 이야기처럼 여기면서 150여년을 살았고, 21세기에도 여전히 희망없는 고통의 삶을 살고 있다니 믿을 수가 없다.
그 뿐만 아니다. 최하층 백인들이 분노하면서 뭉쳐서 교양미라곤 조금도 느끼기 어려운 도널드 트럼프를 세계 대통령으로 선출하는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는 사실도 믿기 어렵다.
힐빌리의 노래를 읽으면서 두가지가 머리속에 떠올랐다. 영화 ‘와일드’속 모녀의 삶이다. 백인 여성인 주인공은 시골 레스토랑에서 여급으로 일하면서 이 남자 저 남자와 잠자리를 하고 마약에 빠져 살아간다. 뭐 특별한 희망을 걸어나 목표를 세울만한 건덕지 없는 환경에서 막 사는 모습이다.
또 하나는 아누 파르타넨이 쓴 미국 교육과 복지제도 비평서(우리는 미래에 조금 먼저 도착했습니다)다. 파르타넨은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려면 북유럽으로 가라는 메시지를 던진다. 비싼 교육비와 의료비때문에 늘 생활고에 허덕이는 미국인들은 이제 더 이상 꿈을 꿀 수 없다는 것이다.
힐빌리의 노래, 와일드, 우리는 미래에…등 미국 문명 비평서들은 미국 사회에 깊숙히 박혀있는 모순과 허점을 드러낸다. 한국사회에도 힐빌리같이 꿈을 꿀 수 없는 환경에 처해있는 사람들이 있다. 또 앞으로 일자리를 잃고 복지에 의존해 살아가는 사람들이 계속 늘어날 것이다. 미래가 회색빛이다.
이런 상황에서 파르타넨의 해법을 진지하게 생각한다. 그녀는 사회적 안전망과 복지는 독립적 인간상 구현을 위한 플랫폼이라고 말한다. 저렴하고 우수한 교육제도와 의료제도는 개인이 가족과 회사에 의존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그녀는 증거물로서 북유럽이 새로운 혁신 허브가 되고 있는 점을 제시했다.
한국에서도 파르타넨 접근법이 가능하지 더 공부해봐야겠다.
파르타넨 접근법… '모든 것에 관한 노르딕 이론(Nordic Theory on Everything)', '우리는 미래에 조금 먼저 도착했습니다'의 원제다. 노르딕 이론의 핵심은 '인간 개개인의 독립성을 키우고 보장하는 것'이다. 나는 독립성의 고취가 교육이나 복지, 부부와 자녀 등의 가족관계 등에서 가장 중요한 원칙이라는 것에 동의한다.그러나 더 생각해 볼 문제가 있다. 최근 집에서 VOD로 노르웨이 영화 '올더뷰티(All the Beauty)'를 보면서 노르딕 이론의 현실을 본 느낌이었다. 서로의 독립성을 최대한 보장하는 사랑, 그러면서 끊임없이 외로와하고 고통스러워하는 두 사람. 존재의 가치를 추구하기 위해서는 '독립성'이라는 것이 목표가 되어야 하지만 '삶의 의미'를 위해서는 독립성만으로 부족한 것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우리 사회에서는 서로의 독립성을 해치고 방해하면서 서로 상처를 주는 경우가 많이 벌어진다. 그래서 미국 등 서구문화를 경험한 사람들은 한국 사회가 살기 힘들다고 한다. 그런데, 그 부당함에도 어쩌면 긍정적인 요소가 있을수도 있다. 존재의 가치는 훼손할지언정 '삶의 의미'는 조금 더 크게 만들 수 있을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