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 틸리의 ‘왜의 쓸모(원제 Why?)를 읽으면서 처음 영어문법을 배울 때 ‘The reason why’로 시작되는 관계부사절 구문이 떠올랐습니다.

이 구문은 ‘~한 이유’를 나타내는 문법으로, reason이라는 명사 뒤에 why가 붙어 이유를 설명하는 관계부사절이 오는 구조입니다. 영어권 네이티브와 대화할 때 이 표현을 많이 사용한 기억이 납니다. 한국인의 의식구조에 잘 맞는 영어 표현중 하나였기 때문입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어떤 현상에 대해 이유(reason)을 설명하려는 경향성은 문화권을 초월해 인간의 본능에 가까운 행위라는 점을 확인했습니다.

저명한 사회학자이자 정치학자인 찰스 틸리는 인간의 이런 본능을 사회과학적으로 접근합니다. 즉 틸리는 인간의 이유설명 유형으로 관습, 이야기, 코드, 학술적 논고 등 4가지를 들고 이런 유형들이 사회적 관계및 인간 관계에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분석합니다.

틸리의 분석을 바탕으로 일터에서 일을 할 때 상사, 동료, 부하, 파트너, 고객이 이유를 어떤 유형에 따라 설명하는지를 차분히 돌아보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예를 들어 협업을 할 때 타 부서장이 관습을 이유로 들면서 비협조적으로 나오는지, 규정을 들어 경계선을 가르는지를 한번 따져보세요.

이 책은 찰스 틸리가 세상을 떠난 해인 2008년 4월 미국에서 출판되었기에 꽤 시차를 두고 한국에서 번역출판된 셈입니다.

이 책에서 ‘이유의 유형’편을 골라서 10문단으로 요약했습니다.

1.이유를 설명하는 이유

공직자와 구급요원, 대학생을 막론하고, 인간이 자기 자신과 남들에게 이유를 제시하는 것은 진실이나 일관성에 대한 보편적인 갈망 때문이 아니다.

사람들은 때로 얄팍하고 모순되고 거짓된, 혹은 (적어도 관찰자의 시각으로 보기엔) 억지스러운 이유에 만족한다.

이유를 제시함으로써 자신과 상대방의 관계에 대해 어떠한 사실을 드러낸다. 이를 통해 화자와 청자는 둘 사이의 적절한 관계를 확증하고, 조정하고, 바로잡는다.

2.이유의 유형

사람들 사이에서 일반적으로 제시되는 이유는 서로 중첩되는 네 가지 범주로 분류된다.

2.1. 관습Convention:

태업, 파격, 비범함, 행운에 관해 관습적으로 용인되는 이유들은 다음과 같다. 기차가 연착됐어요, 이제 너도 때가 된 거야, 그 여자는 집안이 좋아, 그 남자는 그저 재수가 좋은 거야 등등.

2.2 이야기Stories:

인과 관계를 설명하는 서술. 생소한 현상이나 9·11 참사와 같은 특수한 사건뿐 아니라, 친구에게 배신당했거나, 큰 상을 받았거나, 이집트의 피라미드에서 20여 년 만에 고교 동창을 만난 일 등에도 사용된다.

2.3. 코드Codes:

법원 판결, 종교적 참회, 메달 수여 등의 행위에 관여한다.

2.4. 학술적 논고 Technical Accounts:

9·11 사건에서 세계무역센터 건물에 여객기가 충돌했을 때 88층에 있던 일레인 더치에게 일어난 일을 건축 공학자, 피부과 의사, 정형외과 의사는 각각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3.네가지 방식의 특성

이유를 제시하는 이 네 가지 방식은 각기 다른 특성을 지닌다.

네 가지 모두 화자와 청자의 사회적 관계에 따라 내용이 달라지고 사회적 관계에 강력한 영향을 끼친다. 기존의 관계의 확증, 개선, 새로운 관계 요구, 관계적 요구의 거부 등으로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네 가지 이유 제시법은 형식과 내용 면에서 상당히 다르다.

4.관습은 적당한 인과적 해명을 지어내지 않는다.

내가 왜 당신의 신문에 커피를 쏟았는지 시시콜콜 설명하려 들면 당신은 분명 지루해할 것이다. “이런, 제가 좀 덤벙거려서요!” 정도면 충분하다. 새로운 신문을 가져다주겠다고 제안하면 더 바랄 게 없다.

5. 예외적인 사건이나 생소한 현상과 이야기

지독한 실패나 값진 승리, 대대적인 실수, 공동체적 비극, 한밤중에 들리는 의문의 소리 등을 경험한 사람들은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는 말로 만족하지 않는다. 이야기가 필요하다.

그들 역시 당면한 상황과 사회적 관계에 이유를 맞추려 하지만, 이제는 이유 쪽에 더욱 무게가 실린다.

예외적인 사건의 이유를 제시할 때, 우리는 대체로 약간의 정당화나 비난으로 설명을 보완한다.

화자와 청자를 잇는 관계의 성질, 강도, 지속성, 적합성에 관한 암묵적 주장은 관습보다 이야기에서 훨씬 더 강력하다.

5.1 이야기의 세 가지 고유한 특성

첫째, 이야기는 사회적 과정을 재가공하고 단순화하여 그 과정을 구술할 수 있게 해 준다. X가 Z에게 Y를 했다는 말은, 벌어진 일에 관해 기억에 남을 만한 이미지를 전달한다.

둘째, 이야기는 강력한 책임 전가를 포함하고 있어서 윤리적 평가에 이용된다. 나의 공로를 주장하고, 그를 비난하고, 그들이 우리를 속였다는 식이다. 이 두 번째 특성 때문에 이야기는 사후 평가에 대단히 유용하다.

셋째, 이야기는 당면한 관계에 예속되어 있기에, 관계에 따라 달라진다. 축구 경기에서 패한 이유에 관해 TV 인터뷰 진행자가 듣게 되는 이야기는 선수들끼리 하는 말과 다르다. 5.2 이야기는 인과 관계를 간략하게 축소.

이야기는 일반적으로 제한된 수의 행위자만을 소환하는데, 이러한 행위자의 성격과 행위로 인해 초래되는 일들은 한정된 시공간 안에서 발생한다.

무슨 일이 발생했는지 설명해 주는 건 다름 아닌 행위자의 성격과 행위이다.

따라서 이야기는 필연적으로 오류나 예상치 못한 결과, 간접 효과, 점증 효과, 동시 효과, 피드백 효과, 환경 효과의 인과적 역할을 축소하거나 도외시하며 주로 스토리텔링의 양식을 따른다.

6.유효한 규칙을 준수하는 코드

코드는 설명에 큰 비중을 둘 필요가 없다. 예를 들어 “그냥 규정이 그래!”라고 할 수 있다.

종교적 지령, 법규, 권위 있는 시상 제도에는 이유가 넘쳐나지만, 그러한 이유는 실제 결과를 초래한 원인이 아니라, 벌어진 일이 현재의 코드와 어떻게 일치하는지를 설명해 준다.

판사, 성직자, 시상식 위원회 등의 제삼자는 코드에 따라 이유를 제시하는 데 지대한 역할을 한다.

6.1 코드의 피해자도 코드 인정

누구나 가끔은 한심한 정책을 욕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게임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코드는 필수 불가결하며 심지어 신성불가침한 분위기마저 띤다.

코드로 인해 피해를 본 사람들조차 그것을 확정된 판결로 받아들일 때가 많다.

7.학술적 논고 Technical Account

학술적 논고는 구조와 내용에 따라 천차만별이지만, 신뢰할 만한 인과 관계를 밝히려 한다는 면에서는 대동소이하다.

예를 들어 구조공학자는 인과 관계의 초점을 기계적 원리에, 내과 의사는 유기체의 역학에, 경제학자는 시장 주도적인 작용에 둔다.

7.1 원인과 결과에 집중

이런 전문가들은 이따금 반대 의견에 부딪히면 자신들의 전문 지식을 정당화하는 데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고, 널리 인정되는 전문적 방법에 따라 그러한 결론에 도달했다고 열정적으로 변론한다.

이들이 제시하는 이유는 대체로 잠정적인 원인과 결과에 집중되어 있다. 전문 분야와 전문 지식을 바탕으로 조직된 모든 기관은 이들의 학술적 논고를 뒷받침한다.

8.네 가지 이유 모두 수시로 관계 작업을 수행

8.1 확증

가장 눈에 덜 띄는 건, 화자와 청자의 관계를 확증하는 단순한 작업이다. 예컨대 참회자가 ‘자신의 죄에 대한 사제의 해석을 인정하고, 신과 인간에게 합당한 속죄를 하라’는 코드화된 지시를 받아들이는 건 인과성과 전혀 혹은 거의 관련이 없는 일이다.

8.2 관계 수립과 조정

그보다 조금 더 눈에 띄는 건, 음식이나 TV, 정치인의 선호도를 조사하는 사람이 설문의 목적을 설명할 때처럼 이유 제시가 관계를 수립하는 경우이다. 또한 학술적 논고의 저자가 청자의 존경과 순종을 요구하기 위해 전문가 자격을 내세우는 것처럼, 이유는 종종 관계를 조정한다.

8.3 관계를 개선하는 경우

가령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준 사람이 이야기를 통해 그 피해의 우발성이나 필연성을 알리고, 그럼으로써 표면상의 모습과는 달리 그것이 화자와 청자의 관계에 나쁜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고 증명하는 것이다. “죄송하지만……”이라는 어구는 관계 개선을 위한 이야기를 꺼낼 때 흔히 사용된다. 공식과 인과적 설명은 둘 다 관계 작업을 수행한다.

9.지나친 단순화

교양 있는 독자들은 안일하고 그릇된 이분법적 가정을 주의해야 한다. 정말로 교양 있는 사람이라면 관습이나 이야기에 의지해선 안 된다는 억측 말이다.

교양인은 자신의 코드나 학술적 논고를 다른 용어를 구사하는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번역하는 일이 많다.

9.1 지식의 경제이론

정치학자 러셀 하딘은 ‘초지식인’이 보유할 만한 상대성이론과 같은 지식과 생활인의 일상적인 지식을 구분한다. 그는 길바닥 수준의 인식론에 기반한 지식의 경제 이론을 요구한다.

(러셀의 지식의 경제 이론은 지식 획득 활동을 경제적 관점에서 분석하여, 인간의 무지 또한 합리적인 선택의 결과일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10.서로 대조되는 유형의 이유를 제시

서로 다른 화자와 청자의 쌍들은 같은 사건을 두고도 서로 대조되는 유형의 이유를 제시한다.

9·11 사건을 놓고 목격자와 당사자들이“이건 전쟁이야”, “이건 테러야”와 같이 관습에 따르거나,“테러범들이 고의로 비행기를 추락시켰어요”라며 이야기를 제시하는 경우를 살펴보았다.

9·11에 대한 건축학적, 공학적,물리학적 학술적 논고가 점점 늘어났다.반미성향의 신학자와 국제법 변호사의 코드화된 분석도 늘어났다.

이유는 사건의 유형보다 대화의 유형에 따라 달라지기에, 누가 누구에게 말하느냐는 엄청난 차이를 만들어낸다.

10.1중간 유형의 이유 제시

사람들이 상호작용을 하는 과정에서 하나의 유형이 다른 유형으로 변하기도 한다.

신앙 공동체에서 “신의 뜻”이라는 말은 관습과 이야기의 중간쯤에 위치하며, 신이 인간사에 개입한다는 지배적인 믿음에 기대어 대체로 설득력을 지닌다.

야구팬들의 대화는 관습과 이야기, 코드, 학술적 논고 사이를 정신없이 오가서, 다른 종목의 애호가들이 들으면 상세한 인과적 추론에서 단순한 슬로건으로의 비약에 어리둥절해질 수밖에 없다.

10.2 이유를 코드로 번역하기

학술적 논고와 코드를 사용하는 전공자들은 주로 관습과 이야기를 자신들만의 용어로 번역하거나 타인의 번역을 돕는 데 상당한 노력을 기울인다.

예를 들어 법정에서“거의 3일처럼 느껴졌다”는 말은 일상적인 대화에서는 무리 없이 사용될 수 있지만, 재판 기록이라는 심사를 통과할 가능성은 없다. 피고 측 변호인은 이런 관습적인 언어를 코드화된 용어로 번역해야 한다.

병원의 진찰이나 종교의 교리문답에서도 이처럼 평범한 대화가 전문적인 담화로 번역되는 광경을 목격할 수 있다.

10.3 네가지 유형의 이유, 구분 쉽다

하지만 대다수 사람들이 자주 접하는 이유 제시의 형식은 관습, 이야기, 코드, 학술적 논고라는 네 가지 유형으로 구별이 가능하며, 각각은 쉽게 구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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