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로 읽는다 리스타트 한국사 도감(유성운)’을 소개합니다.

2017년부터 3년간 중앙일보 지면과 온라인에 연재한 ‘유성운의 역사정치’를 대폭 보강한 것입니다.

‘유성운의 역사정치’의 특징은 역사와 현실 정치의 연결입니다. 저자는 대학에서 한국사를 전공했습니다. 기자가 된 이후 주로 국회 출입을 하면서 현실 정치를 밀착 취재했습니다.

저자는 현실 정치에서 역사와의 연결점을 찾아 한국사 다시 읽기를 시도했습니다. 또 전공을 살려 최신의 연구 성과를 자신의 역사 해석에 잘 녹였습니다.

저자는 서문에서 한국사의 고질적인 문제인 소위 ‘국뽕’을 걷어내려고 노력했다고 밝힙니다.

또 저자는 역사에서 정치를 읽고 정치에서 역사를 읽는 접근을 통해 한국의 현 시대 과제를 깊게 보려고 했다고 합니다.

임진왜란과 역사정치편 10줄 요약

1.일본이 불과 20일만에 한양까지 치고 올라온 것은 조선의 제승방략이라는 방어전략이 일본군의 속도전에 무너졌기 때문이다. 제승방략은 외적이 침입하면 중앙에서 지휘관을 내려보내 지방 병력을 지휘하는 방식이었다. 문제는 지휘관이 지방에 내려가는데 걸리는 시간이었다.

2.왜란에서 조선을 건진 것은 호남을 지켰기 때문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평양까지 진격한 다음 규슈 나고야에서 10만을 다시 서해를 통해 조선에 보내고 군수물자를 호남에서 조달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순신이 바닷길을 막고, 곽재우 등 경상우도 의병장과 김시민 진주목사가 일본의 호남 침입을 철통같이 막았다.

3.선조는 조총의 국산화에 매달려, 결국 왜인의 도움을 받아 조총 기술을 확보하였다.

“왜인이 투항해 왔으니 후하게 보살피지 않을 수 없다. 묘술을 터득할 수 있다면 적국의 기술은 곧 우리의 기술이나 왜적이라하여 그 기술을 싫어하고 익히는 일을 게을리하지 말고 착실히 할 것을 비변사에 이르라.” (선조 실록)

4.조선의 조총 기술은 왜란 이후 나선(러시아)정벌에서 위력을 발휘했다. 청나라는 아무르강 일대까지 진출한 러시아 군대와 충돌했는데, 조선에 조총 부대 파병을 요청했다. 당시 조선 조총 부대는 뛰어난 사격실력으로 러시아군을 공포에 떨게 했다.

5.선조는 조선 관군과 의병의 활동을 깎아내리고 명나라의 공을 강조했다 이는 선조 자신을 임진왜란 승리의 주연으로 띄우려는 정치적 계산이 깔려 있었다. 아우성치는 백성을 뿌리치고 한양 도성을 빠져나온 마당에 장수들을 추켜세우면 자신은 무대 밖으로 밀려날 거라는 위기감이 작동한 것이다.

6.조선이 왜란을 거치면서 망하지 않은 것은 역사의 오랜 물음표였다. 그렇게 무능한 지배층이 어떻게 300년을 지속했느냐는 것이다. 최근 연구는 황무지 개간책 등 효과적인 정책을 과감하게 도입하는 등 지배층의 각성을 주목한다.

7.전쟁이 끝나자 쓰시마는 국서를 위조할 정도로 대조선 국교회복에 매달렸다. 결국 쓰시마-부산-의주-만주로 이어지던 ‘실버 로드 silver road’ 가 구축해 18세기 까지 번영을 누렸다. 18세기 들어 일본의 은 생산량이 급감했고, 조선에서 수입하던 인삼을 자체 재배하자는 데 성공하면서 실버 로드가 쇠퇴했다.

8.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일본에 끌려간 피로인은 10만명 정도였다. 7000명은 귀국하였고, 9만여명은 일본에 남았다. 일본에 자의반 타의반으로 남은 조선인은 일본에 자리를 잡았거나, 귀국후에 받을 냉대를 고려했기 때문이었다.

9.일본에 남은 조선인중 특수 기술를 지닌 도공은 번주의 후원아래 일본 도자기 산업을 일궜다. 중국 도자기 대체재를 찾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일본도자기를 유럽에 공급하면서 규슈의 나베시마 가문과 사쓰마 시마즈 가문은 조선 도공덕분에 큰 부를 얻었다.

10.이삼평, 심수관 등 일본에 뿌리를 내린 조선 도공이 조선에서 도자기를 구웠다면 이름을 남겼을까? 역사 교과서에 뛰어난 도자기 기술을 가졌지만 세계수준의 도자기를 구운 도공의 이름은 기록에 남아 있지 않다.

Newsletter

1주1책 뉴스레터

* indicates required

Join the Conversation

1 Comment

댓글을 남기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