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정 조선비즈 인턴기자 mycitystory.korea@gmail.com

밤새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더니 어느새 그쳐 주변은 고요했다. 발 아래 빗물을 머금은 흙은 향긋한 풀내음을 냈다. 언덕배기로 오르는 나무 계단은 물에 젖어 고즈넉한 멋이 있었다.

인왕산 자락 청운공원에 위치한 ‘윤동주 시인의 언덕’을 오를 때면 풀벌레 소리, 바람 소리 하나 놓칠까 숨 죽이게 된다. 이 곳에서 거닐고 또 별을 세어 봤을 그의 마음을 느끼고 싶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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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와 청운동의 인연은 그가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학교)에 재학하던 193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학 재학 시절, 그는 학교 후배이자 문우(文友)였던 정병욱과 함께 종로 누상동에 있던 소설가 김송의 집에서 하숙생활을 시작했다.

정병욱의 회고에 의하면 두 사람은 늘 아침 식사 전 산책 삼아 집 뒤편 인왕산을 오르곤 했다. 청년 시절의 윤동주는 매일 아침 인왕산에 올라 시정(詩情)을 다듬었다.

‘새로운 길’부터 ‘별 헤는 밤’, ‘자화상’, ‘쉽게 씌여진 시(詩)’ 등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사랑 받는 그의 대표작들이 이 곳에서 완성됐다.

시인의 언덕에 올라서서 북악산과 인왕산을 바라보고 있으면, 치열하게 고민하며 시상을 다듬고 또 다듬던 청년 윤동주의 모습이 아른거린다.

2009년 조성돼 종로구가 관리하고 있는 ‘시인의 언덕’에는 청년 시인 윤동주와 함께 호흡할 수 있는 다양한 장치가 마련돼있다.

안내 표지판을 따라 올라가면 화려하진 않지만 깨끗하고 수수한 시인의 성정(性情)을 닮은 언덕이 펼쳐진다. 서울 성곽을 따라 걸으면서 인왕산을 한 눈에 담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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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을 품듯 주변을 둘러싼 나무 울타리에서는 시인의 주옥같은 시들을 만날 수 있다. ‘길’, ‘코스모스’, ‘고추밭’, ‘눈’, ‘서시’, ‘자화상’, ‘별헤는 밤’ 등 시인의 대표작들이 새겨져 있다. 울타리를 따라 걸으며 시 한 소절 읊고 아름다운 경치를 한 번 바라보면 그와 함께 걷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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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음을 재촉하다 보면 시인을 기리는 ‘서시비’와 수십년 동안 언덕을 지켜온 적송들을 만날 수 있다. ‘별헤는 음악회’ 등 다채로운 문화행사가 열리는 야외 무대도 있다. ‘서시정’도 눈에 띈다. 시인의 시에서 이름을 딴 서시정은 누구나 쉬어갈 수 있게 만든 작은 정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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궂은 날씨에도 시인의 언덕에는 많은 사람이 찾아 왔다. 단체 관람을 왔다는 김정철씨(55)는 “북악산도 보이고 인왕산도 보인다. 서울에도 이렇게 공기 좋고 풍경이 아름다운 곳이 있는 줄 몰랐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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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윤동주 시인의 언덕’이라고 자랑스레 말하기엔 부족한 면도 있었다. 이 동네에서 50년 넘게 거주한 오민탁씨(61)는 “매일 이 곳에 산책하러 오지만 윤동주 시인의 언덕이라는 것 말곤 잘 모른다”며 “윤동주라는 시인에 대해서는 이름 정도만 알고 있다”고 말했다.

윤동주 시인을 기리기 위해 조성된 언덕이지만 그에 대해 무지한 방문객의 관심을 촉구할만한 요소는 다소 부족했다.

외국인을 위한 영문 안내판이 없다는 것도 아쉬운 부분이다. 러시아에서 여행 온 니콜라이씨(22)는 “인왕산에서 북악산으로 넘어가는 코스에 이 언덕이 위치해 들렀을 뿐이다”며 “윤동주라는 사람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고 말했다.

그의 순결한 정신과 섬세한 서정을 아는 사람만 느낄 수 있단 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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