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현이 제2이동통신사업 진출을 계획하고 준비한 시점은 공교롭게도 아들 최태원이 노소영과 사귀기 시작해 결혼에 이르는 시점과 중첩된다.
최종현은 1980년대 초 유공을 인수하면서 중견그룹에서 10대 재벌 그룹으로 부상하였다. 최종현 회장은 당시 정주영,이병철 등 1세대 재벌 총수에 비해 나이가 어리고 또 미국 유학파로 새로운 메가트렌드에 관심이 많았다. 한국장학재단을 만들어 미국 유학생을 적극 지원한 것도 최종현의 그런 면모를 잘 보여준다. 민등산 조림 사업도 수십년을 내다보려는 그의 성향을 반영한 프로젝트였다.
최종현은 늘 미국 등 해외 흐름을 주시하면서 선경의 ‘미래 구상’에 몰두했다. 평소 해외 미디어를 늘 가까이 하고 또 그룹 간부나 대학 교수들을 모아놓고 토론하며 자문을 구하는 것을 즐겼다.
최종현은 국내 두뇌의 자문에 만족하지 않고 미국 컨설팅회사와 계약을 맺고 해외 두뇌의 도움을 적극적으로 받았다. 그때 그가 선택한 회사가 미국 굴지의 회계법인이자 경영 컨설팅회사인 ‘딜로이트 & 투치’였다.
그는 1981년에 뉴욕에 설립한 ‘선경 아메리카’를 딜로이트에 고객으로 등록했다. 딜로이트에서 선경 프로젝트 담당으로 배정한 컨설턴트가 목정래였다. 운동권 출신인 목정래는 1971년 제적을 당하고 군복무를 마치고 1977년 미국으로 건너가 컬럼비아대학에서 금융학과 경영정보시스템(MIS)을 공부했다.
목정래는 졸업후 딜로이트에 입사해 컨설팅 업무를 하면서 미국 공인회계사 자격을 따기도 했다. 그는 선경이 어떤 그룹인지를 잘 모르는 상태에서 한국인이라는 인연으로 선경 아메리카 컨설팅 업무를 맡아 최종현과 인연을 맺었다.
목정래는 경영정보시스템 전공자로서 당시 미국 기업에서 유행을 했던 시스템통합 흐름에 밝았다. 그룹내 전산시스템을 통합해 인사, 재무, 재고 등을 통합 관리하는 경영정보시스템을 구축하려는 흐름이었다.
최종현회장이 목정래에게 요청한 프로젝트는 선경그룹 경영정보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었다. 목정래는 1985년 선경 아메리카에 MIS를 설치하는 작업을 수행하였다.
최종현과 목정래가 가장 집중한 프로젝트는 경영정보시스템 구축이 명확하다. 이후 이동통신사업 진출을 기획하고 준비하는 과정은 성공한 프로젝트에 대한 사후 해석격 설명이 대부분이다.
끊임없이 미래 먹거리를 찾는 최종현에게 목정래가 첫번째 글로벌 인재를 선경아메리카에 확보할 것을 제안하고 실행했다는 것이다.
‘선경’이라는 이름으로 월스트리트저널에 구인 광고를 내자 응모자가 없었다. 편법으로 딜로이트의 이름으로 모집 광고를 내면서 ‘딜로이트’라는 이름 밑에 작은 글씨로 ‘for Sunkyung’이라는 문구를 삽입했다.
목정래는 그때 이미 선경 아메리카의 MIS 설치 작업을 마치고 딜로이트로 원대복귀 해 있었다. 그러자 지원자가 찾아오기 시작했다. 그는 딜로이트 사무실에서 지원자들을 인터뷰하고, 그 결과를 서울에 있는 최종현에게 알렸다.
마케팅과 회계, 인사 분야의 사원 10여 명을 뽑았다. 모두 미국인이었다. 그들 밑에 조수로 재미 한국인을 한 명씩 더 뽑았다. 그들 인력을 거느리고 신규사업을 시작하기에 앞서, 현재 선경그룹이 한국에서 하고 있는 사업을 어느 정도 확장할 수 있는지, 조사하는 작업부터 했다. 동시에 선경에 맞는 신규사업을 발굴하는 프로젝트를 딜로이트에 맡겼다.
두번째 단계는 최종현회장은 미국 금융산업을 조사하면서 금융산업 진출을 원했으나 목정래가 미국 통신산업 흐름을 설명하면서 이동통신사업 진출을 조언했다는 설명이다.
이어 최종현이 이동통신사업 진출을 결심하고 실무적 준비를 목정래를 시켜 미국에서 미리 준비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목정래의 증언은 다음과 같다.
“이동통신사업의 장점은 설비투자가 유선통신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다는 겁니다. 게다가 교환기 대신 컴퓨터로 처리할 수도 있어 확장이 용이합니다. 또 이동통신을 하게 되면 유공처럼 울산의 석유화학단지에 정유탑을 많이 세울 필요도 없습니다. 또 재고가 없어도 되고 외상매출금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전화를 쓰던 사람이 요금을 안 내면 갑갑해서라도 한 달 후엔 돈을 내게 됩니다. 그러니까 투자 대비 자금회수율이 높고, 외상매출금 걱정을 안 해도 되고, 재고로 썩힐 필요 없으니 얼마나 좋은 사업입니까.”
당시 선경에는 이동통신 전문가가 한 명도 없었다. 다만 앞날에 대비해 유공 전산팀을 분사해 정보통신회사를 만들긴 했지만, 그것은 SI(시스템 통합)전문 팀일 뿐 이동통신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것도 수준이 매우 낮은, 초보적인 SI팀이었다. 따라서 선경이 이동통신사업을 해야 한다면 그 분야의 전문 인력을 양성하는 길밖에 없었다.
그때 마침 시카고에 ‘US셀룰러’라는 이동통신회사가 생겼다. 주사업자는 베이비 벨인 아메리테크였고, US셀룰러는 B밴드를 사용하는 지역사업자였다. 후발 사업자였기에 벨 회사에 비해 규모는 작았지만 수익성은 높았다. 마침 그 회사가 투자자를 모으고 있었다.
목정래는 그 회사에 선경 직원들을 훈련시켜 달라는 조건으로 100만 달러를 투자했다. 월급을 받지 않는 대신 6개월 내지 1년 동안 작업 현장에서 실무를 익힐 수 있었다. 그 회사 사장이 딜로이트 고객이어서 어려운 부탁을 쉽게 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첫해에 마케팅 분야에 5명, RF 분야에 3명 등 10명을 심을 수 있었다. 훈련요원은 해가 갈수록 늘어나 50여 명이 되었다. 미국에서 채용한 직원만으로는 숫자가 부족해 한국에서 차출한 대리급 직원을 파견해 기술을 쌓기도 했다. 테네시 등지에서 기지국을 설치하는 작업에도 참여했으므로 기술 습득을 제대로 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1980년대 말에는 독자적으로 사업을 추진할 수 있는 체제를 갖출 수 있었다.
이동통신사업에 경쟁을 도입하다
1989년 말 최종현이 미국에 있는 목정래를 한국으로 불러들였다. 선경그룹이 이동통신 전담팀을 구성하겠다며 총책을 맡아 달라 부탁했다. 그 무렵 체신부는 통신사업 구조조정안을 만드느라 야단법석이었다. 머지않은 장래에 한국의 이동통신시장이 요동칠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선경그룹은 각 사에서 전문가 한 명씩을 차출해 전담팀을 구성했다. 목정래는 한국으로 날아가 그들과 워크숍을 갖고 그들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 주었다. 하지만 그는 그때까지도 딜로이트 사원으로 남아 있었다.
이동통신회사의 본격적인 설립 작업은 이듬해인 1990년부터 시작되었다. 그 해 초 최종현이 미국에 있는 목정래에게 전담팀을 재구성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아직도 딜로이트 소속이었지만, 목정래는 군말 없이 한국으로 날아왔다. 미국에 남아 있는 최태원을 불러들이고, 경영기획실에서 번역 일을 맡고 있는 표문수를 끌어들였다. 그리하여 그 해 5월 50여 명의 직원으로 이동통신 전담팀을 재구성했다. 그 무렵 포철이 이동통신사업에 참여한답시고 미국의 이동통신회사인 팩텔과 손잡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선경의 오랜 내공의 역사를 알 리 없는 포철은 대통령 노태우의 사돈인 선경을 컨소시엄에 끌어들이려고 열심히 손짓했다.
선경은 포철과 손잡는 대신 미국의 GTE, 영국의 보다폰, 홍콩의 허치슨 등을 끌어들여 국제 컨소시엄을 구성했다. 영국의 이동통신회사인 보다폰은 그들 나름의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이미 1980년대 후반에 전 세계적인 시장망을 갖추고 있었는데, 이동통신회사 가운데는 가장 슬림한 형태로 운영하며 많은 이익을 내고 있었다. 협력 파트너로서는 그만이었다. 또한 허치슨의 총수 이가성은 그 무렵 중국에서 이동통신사업을 시작하고 있었다. 중국 진출을 꿈꾼다면 최적의 파트너라 할 수 있었다. 당시는 우리나라가 중국과 수교하기 전이어서 중국에 직접 진출할 수도 없었고, 중국 파트너와 손잡을 방법도 달리 없었다.
그처럼 착실히 실력을 쌓고 있는데, 반가운 뉴스가 날아왔다. 1990년 7월 체신부가 통신사업 구조조정계획을 발표했다. 골자는 이동통신사업 분야에도 경쟁을 도입한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한국이동통신(주)이 독점하고 있는 이동통신사업에 제2사업자를 허용해 한국이동통신과 경쟁을 시키겠다는 것이었다.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기회가 열리고 있었다.
1991년 4월 선경그룹은 제2사업자 선정에 대비하기 위해 ‘선경텔레콤’이라는 회사를 설립했다. 그리고 미주 경영기획실에 남아 있는 핵심 멤버들을 불러들여 사업계획서 작성 팀을 구성했다. 그때 최태원을 기획팀장, 표문수를 대외협력팀장, 이방형을 마케팅팀장에 앉히고, 목정래는 뚜렷한 직함 없이 ‘총괄’이라는 애매한 이름으로 사령탑 역할을 맡았다. 운동권 학생으로 반정부 활동을 벌였던, 자유인다운 면모가 엿보이는 대목이라 하겠다.
선경텔레콤이 다른 업체들을 끌어들여 컨소시엄을 구성하면서 ‘대한텔레콤’으로 이름을 바꿨다. 출범 당시의 직원이 200명이나 되었으니 급조된 다른 회사의 컨소시엄과는 규모부터 달랐다. 선경그룹 경영기획실장 손길승이 사장 자리를 맡았으나 1주일에 한 번 얼굴만 내밀었을 뿐, 모든 일은 목정래가 도맡아 끌고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