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를 살아가는 장년은 그 어느 과거 세대보다도 인생의 황혼과 가을을 느낄 여유를 박탈 당한 세대라는 생각이 든다.
모든 것에서 기하급수적 폭발과 확장을 보여준 20세기를 걸어온 우리 세대는 삶을 지키기 위한 것이든 삶을 정리하기 위한 것이든 길고 긴 길을 걷다가 막다른 골목에서 삶을 정리하는 때를 만났던 수많은 세대와는 다르게 21세기의 막다른 골목에서 멈추지 않고 길을 걷고 있다. 아니 길이 아니라 그리고 가로막던 길을 뚫고 들어가 어떤 공간을 만났고 이 공간을 걷고 있는 것이다.
인류가 추구하던 공간이 의식을 지배한다고 감히 말하지만 그 공간은 또한 인간이 지켜야 할 가치와 생명과 재산도 지배한다. 그리고 그 의미도 변경시킨다. 어쩌면 인류 마지막 공간에 우리는 이제야 들어서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것을 이름하여 디지털 공간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인류는 디지털 공간을 삶의 거주지로 여기기 전에도 긴 역사의 시간을 더듬어 새로운 공간을 끊임없이 추구했다. 우주천체를 탐색했고, 지구를 구성하는 모든 자연의 구성요소의 미립세계도 파악했으며, 이를 추구하는 주체의 의식 속의 의식인 무의식을 탐구했다. 인류는 이런 탐구의 도정에서 명멸한 위대한 과학자의 길을 따라 공간의 확장에 도전하며 인류의 의식 확장에도 노력했다.
왜 인류는 아름다운 지구를 두고서도 새로운 공간을 추구하는 노력을 멈추지 않는 것일까? 디지털 공간은 이제 인류의 상상력의 마지막 여정이 될 것인가?
디지털 세계를 공간으로 인식하는 것은 공간 자체가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 되고 있다는 코페르니쿠스적인 인식의 변화를 말하는 것이고, 이는 칸트가 2000여년간의 서양철학의 인식론적 전회를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환이라고 말한 맥락의 증강된 인식체계의 변화를 우리에게 요구하는 일이다. 말하자면 인식주체와 인식대상과의 관계성의 설정에 중대한 변화가 생겼다는 것이고 이의 철학적 전개는 앞으로의 지식인들의 커다란 숙제이다.
디지털 공간은 애초에는 미미했다. 인류의 탄생과 진화의 초기에는 생명이 우연 발생했고 단세포에서 다세포 생물로 진화했듯이 디지털 공간도 시간을 먹어치우면서 형체를 갖추며 성장했다. 1969년 시작된 점과 점의 무작위 연결 네트워크가 1990년대 초 정보고속도로로 전환되기 시작하면서 면과 면의 연결을 시작하더니 다시 30년이 흘러 2020년대 초에는 이제 공간으로의 진화를 이루고 나아가 공간과 공간의 연결 또는 흡수합병을 전망하는 시대가 되었다. 초기 디지털 공간의 신인류를 역사는 어떻게 기록할까? 소위 MZ 세대가 신인류의 시작일까?
인터넷 공간(세계), 디지털 공간(세계), 가상 세계(공간)라고 하더니 급기야 메타버스(Metaverse)라는 디지털 공간의 명칭이 탄생했다. 그럼 신인류는 메타즌(Metazen) 또는 메태즌(Metaizen)으로 부를 수 있을까?
디지털 연결이 디지털 공간을 이루는 역사의 길에 나의 인생의 길도 오롯이 겹친다. 그러니 우리의 삶은 역사적이다. 그렇지 않은가? 50여년이 흐른 지금 나의 회고는 심각한 반성에 빠져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디지털 공간의 기초를 너무 부실하게 만들었다는 회한과 그런 잘못에 얼마간의 책임을 지지 않을 수 없다는 의식이 온 몸을 흔들기도 한다.
우리는 디지털 공간에 무슨 오류를 가하였다는 것인가? 가장 중요한 오류는, 그리고 다른 수많은 오류를 야기한 근본 오류는 디지털 공간에 자유(自由)를 제대로 부여하지 않았다는 것이고, 이는 아이러니컬하게도 디지털 공간에 신뢰(信賴)를 구축하지 못한 원인이라는 것이다. 이런 근본 오류는 디지털 공간과 물리적 공간을 대등한 독립 공간이라는 인식보다는 전자를 후자의 종속적 지위 또는 수단적 지위로만 인식하였다는 것에서 비롯된다.
이런 오류는 비록 대한민국에서만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소위 인터넷 아키텍처 그리고 디지털 공간 아키텍처에 구성요소로 자리잡은 많은 글로벌 기술규범에 우리는 너무 무지했고 이를 디지털 공간에 반영하는 노력을 너무 게을리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수많은 오해와 실수가 이어졌고 세계적으로 앞선 디지털 인프라를 가졌다는 글로벌 평가에도 불구하고 은밀하고 조용히 그 디지털 산업 경쟁력이 침식되고 있는 것이다.
“전자주민증 도입 논란”, “인터넷실명제 도입 논란”, “공인인증서 폐지 논란”, “마이데이터 사업”은 대한민국 땅에 배회하는 디지털 유령이며, 우리의 새로운 공간 인식이 너무도 부족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우리의 반성과 대안 모색은 여기에서 출발하여야 하며, 그 귀결은 디지털 신뢰공간의 구축을 통한 대한민국의 “디지털 신 글로벌 전략”이 될 것이다.
/황철증 디지털신뢰공간연구소 소장 newdhjj@gmail.com
서울대 법대(학사) 및 행정대학원(석사), 미국 콜럼비아 법대 (석사), 고려대 정경대학원(박사)을 졸업했습니다.
행정고시 29회로 1986년 중앙공무원교육원과 아시안게임조직위원회에서 단기 훈련을 거친 후 정보통신부에서 공직을 시작하였습니다.
1 BH, 국무총리실, 국정원(사이버안전센터), NIA 등에서도 근무를 한 바 있으나 주로 정보통신부에서 잔뼈가 굵었습니다. 방송통신위원회를 끝으로 26년간의 공직을 마친 후 사회의 한 구석에서 꼼지락 거리고 있습니다.
그동안 온갖 분야의 독서와 사색으로 삶을 붙들고 있으면서, 일찌기 담당한 인터넷 정책에 관한 주제에도 여전히 많은 관심을 쏟고 있습니다. 소위 디지털(인터넷) 아키텍처와 디지털(인터넷) 철학자로 스스로를 부르며 현대의 기술문명 역사의 흐름을 조망하는 것을 즐깁니다.
한편으로 이병주 소설가, 박이문 철학자, 최제우 동학창시자, 리처드 도킨스 진화생물학자, 움베르토 에코 기호학자 등 훌륭한 학자와 문인에게 지적 의식을 의탁하고 사는 자입니다.
이 글의 게재로 IT기자클럽의 디지털문명 칼럼니스트로 소박한 의무를 시작하는 셈입니다.
연락처는 newdhjj@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