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9년 5월 유니언 퍼시픽과 센트럴 퍼시픽 철도가 만나 대륙횡단철도가 완성되었습니다. 두 철도회사의 대표는 유타주에서 대륙횡단 철도를 연결하는 기념식을 진행했습니다. 드디어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대륙 횡단 철도 여행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서쪽으로 향하는 여행자들은 마차 열차를 타고 길고 위험한 여행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1832년 이후로 동부와 국경의 정치가들은 두 해안을 연결해야 할 필요성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1853년이 되어서야 의회는 대륙횡단철도를 위한 여러 경로를 조사하기 위한 자금을 책정했습니다. 그렇지만, 철도의 실제 건설은 남북간의 긴장때문에 늦어졌습니다.
남북 전쟁 1년 후 , 공화당이 장악한 의회는 태평양 철도법(1862)을 통과시킵니다. 대륙 횡단 노선인 유니언 퍼시픽과 센트럴 퍼시픽을 건설하기 위해 두 철도에 공공 토지 보조금과 대출을 보장했습니다. 이를 통해 1866년 오마하와 새크라멘토에서 철도 공사가 시작되어 전국을 가로지르는 북부 노선을 만들었습니다.
혹독한 겨울, 엄청난 여름 더위, 서부 마을의 무법적인 상황때문에 철도건설을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유니언 퍼시픽의 건설노동자들은 주로 아일랜드계의 남북전쟁 참전용사였습니다. 센트럴 퍼시픽의 건설노동자들은 주로 이주한 중국인이었습니다. 이들은 힘든 코스인시에라 네바다 산맥에 철로를 깔았습니다. 백인보다 낮은 임금을 받고 12시간 일을 했습니다. 눈사대타, 폭팔물 하고로 많은 사람이 사망했습니다.
그들이 겪은 모든 역경에도 불구하고, 유니온퍼시릭과 센트럴 퍼시픽 노동자들은 1869년 예정보다 앞당겨, 예산보다 적게 선로를 깔아 철도를 완성했습니다. 마차 열차로 몇 달이 걸리던 여행이 이제는 단 며칠밖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철도 건설 이후 몇 년은 미국의 급속한 성장과 확장의 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