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현은 1980년대 초 유공을 인수하면서 중견그룹에서 10대 재벌 그룹으로 부상하였다. 최종현 회장은 당시 정주영,이병철 등 1세대 재벌 총수에 비해 나이가 어리고 또 미국 유학파로 새로운 메가트렌드에 관심이 많았다. 한국장학재단을 만들어 미국 유학생을 적극 지원한 것도 최종현의 그런 면모를 잘 보여준다. 민등산 조림 사업도 수십년을 내다보려는 그의 성향을 반영한 프로젝트였다.
최종현은 늘 미국 등 해외 흐름을 주시하면서 선경의 ‘미래 구상’에 몰두했다. 평소 해외 미디어를 늘 가까이 하고 또 그룹 간부나 대학 교수들을 모아놓고 토론하며 자문을 구하는 것을 즐겼다.
최종현은 국내 두뇌의 자문에 만족하지 않고 미국 컨설팅회사와 계약을 맺고 해외 두뇌의 도움을 적극적으로 받았다. 그때 그가 선택한 회사가 미국 굴지의 회계법인이자 경영 컨설팅회사인 ‘딜로이트 & 투치’였다.
그는 1984년에 미국에 설립한 ‘미국 경영기획실(SK USA)’를 딜로이트에 고객으로 등록했다. 딜로이트에서 선경 프로젝트 담당으로 배정한 컨설턴트가 목정래였다. 운동권 출신인 목정래는 1971년 제적을 당하고 군복무를 마치고 1977년 미국으로 건너가 컬럼비아대학에서 금융학과 경영정보시스템(MIS)을 공부했다.
목정래는 졸업후 딜로이트에 입사해 컨설팅 업무를 하면서 미국 공인회계사 자격을 따기도 했다. 그는 선경이 어떤 그룹인지를 잘 모르는 상태에서 한국인이라는 인연으로 선경 아메리카 컨설팅 업무를 맡아 최종현과 인연을 맺었다.
목정래는 경영정보시스템 전공자로서 당시 미국 기업에서 유행을 했던 시스템통합 흐름에 밝았다. 그룹내 전산시스템을 통합해 인사, 재무, 재고 등을 통합 관리하는 경영정보시스템을 구축하려는 흐름이었다.
최종현회장이 목정래에게 요청한 프로젝트는 선경그룹 경영정보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었다. 목정래는 1985년 선경 아메리카에 MIS를 설치하는 작업을 수행하였다.
최종현과 목정래가 가장 집중한 프로젝트는 경영정보시스템 구축이 명확하다. 이후 이동통신사업 진출을 기획하고 준비하는 과정은 성공한 프로젝트에 대한 사후 해석격 설명이 대부분이다.
끊임없이 미래 먹거리를 찾는 최종현에게 목정래가 첫번째 글로벌 인재를 선경아메리카에 확보할 것을 제안하고 실행했다는 것이다.
목정래의 증언에 따르면 ‘선경’이라는 이름으로 월스트리트저널에 구인 광고를 내자 응모자가 없었다. 편법으로 딜로이트의 이름으로 모집 광고를 내면서 ‘딜로이트’라는 이름 밑에 작은 글씨로 ‘for Sunkyung’이라는 문구를 삽입했다.
목정래는 그때 이미 선경 아메리카의 MIS 설치 작업을 마치고 딜로이트로 원대복귀 해 있었다. 그러자 지원자가 찾아오기 시작했다. 그는 딜로이트 사무실에서 지원자들을 인터뷰하고, 그 결과를 서울에 있는 최종현에게 알렸다.
마케팅과 회계, 인사 분야의 사원 10여 명을 뽑았다. 모두 미국인이었다. 그들 밑에 조수로 재미 한국인을 한 명씩 더 뽑았다. 그들 인력을 거느리고 신규사업을 시작하기에 앞서, 현재 선경그룹이 한국에서 하고 있는 사업을 어느 정도 확장할 수 있는지, 조사하는 작업부터 했다. 동시에 선경에 맞는 신규사업을 발굴하는 프로젝트를 딜로이트에 맡겼다.
두번째 단계는 최종현회장은 미국 금융산업을 조사하면서 금융산업 진출을 원했으나 목정래가 미국 통신산업 흐름을 설명하면서 이동통신사업 진출을 조언했다는 설명이다.
이어 최종현은 1988년 이동통신사업 진출을 결심하고 실무적 준비를 목정래를 시켜 미국에서 미리 준비하도록 했다는 것이다.(선경 아메리카에 텔레커뮤니케이션 팀을 발족시켰다)
목정래의 증언은 다음과 같다.
“이동통신사업의 장점은 설비투자가 유선통신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다는 겁니다. 게다가 교환기 대신 컴퓨터로 처리할 수도 있어 확장이 용이합니다. 또 이동통신을 하게 되면 유공처럼 울산의 석유화학단지에 정유탑을 많이 세울 필요도 없습니다.
또 재고가 없어도 되고 외상매출금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전화를 쓰던 사람이 요금을 안 내면 갑갑해서라도 한 달 후엔 돈을 내게 됩니다. 그러니까 투자 대비 자금회수율이 높고, 외상매출금 걱정을 안 해도 되고, 재고로 썩힐 필요 없으니 얼마나 좋은 사업입니까.”
에스케이측이 최종현의 이동통신사업 사전 준비 증거로 제시한 사례는 다음과 같다.
첫째, 1988년 테네시 RSA에 지분투자했다.
둘째, 1989년 10월 뉴저지에 유크로닉스를 설립하였다.
셋째, 1989년 시카고 US셀룰러사에 100만달러를 투자하였다.
목정래는 US셀룰러사 투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당시 선경에는 이동통신 전문가가 한 명도 없었다. 다만 앞날에 대비해 유공 전산팀을 분사해 정보통신회사를 만들긴 했지만, 그것은 SI(시스템 통합)전문 팀일 뿐 이동통신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것도 수준이 매우 낮은, 초보적인 SI팀이었다. 따라서 선경이 이동통신사업을 해야 한다면 그 분야의 전문 인력을 양성하는 길밖에 없었다.
그때 마침 시카고에 ‘US셀룰러’라는 이동통신회사가 생겼다. 주사업자는 베이비 벨인 아메리테크였고, US셀룰러는 B밴드를 사용하는 지역사업자였다. 후발 사업자였기에 벨 회사에 비해 규모는 작았지만 수익성은 높았다. 마침 그 회사가 투자자를 모으고 있었다.”
목정래의 US셀룰러사 투자 조건은 선경 직원들을 훈련시켜 달라는 것이었다.월급을 받지 않는 대신 6개월 내지 1년 동안 작업 현장에서 실무를 익힐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이었다.
목정래에 따르면 마케팅 분야에 5명, RF 분야에 3명 등 10명을 US셀룰러사에 보냈고, 점차 50여 명까지 늘어났다. 테네시 등지에서 기지국을 설치하는 작업에도 참여시켜 현장 경험을 쌓았다.
1989년 목정래가 최종현의 요청으로 이동통신 진출 사전 준비작업을 하고 있는 사이
국내에서는 체신부가 통신사업 구조조정안를 만들기 위해 물밑에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최종현은 1989년말 선경그룹 각 사에서 전문가 한 명씩을 차출해 전담팀을 구성했다.
이어 최종현은 1990년초에 목정래를 한국으로 불러들여 이동통신회사의 본격적인 설립 을 위한 전담팀을 꾸리도록 지시했다.
이어 노소영과 결혼하고 선경아메리카에 근무하던 최태원을 불러들이고, 경영기획실에서 근무하던 고종조카 표문수를 합류시켰다.
1990년 5월 목정래의 지휘아래 최태원 팀장, 표문수 팀장 등 50여 명의 직원으로 이동통신 전담팀을 구성했다.
이 조직이 결국 선경텔레콤(대한텔레콤→SK C&C→SK주식회사로 사명 변경)의 근간을 이루며 SK텔레콤 등 SK그룹 지주사 역할을 한다. 이 조직은 1단계에서 대한텔레콤 이름으로 제2이동통신 수주준에 뛰어들었고, 사업권 반납후에는 SK그룹의 SI회사로 변신하여 오늘날 에스케이주식회사로 확대 발전한다.
국내 통신정책은 1990년 4월을 기점으로 대 전환을 맞는다. 노태우 당시 대통령은 제주도 해저케이블 기념식에서 통신시장 경쟁체제를 도입하겠다고 선언하였다. 즉 유선전화, 무선호출,데이터 송수신, 이동통신 등 4개 통신 산업 분야에 경쟁체제를 도입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이는 기존 사업자외에 다른 사업자에게 사업 기회를 주겠다는 것이다.
이어 체신부는 7월 9일 통신사업구조조정안을 발표하여 노태우 대통령의 선언을 구체적으로 뒷받침하였다.
1990년 한 해 내내 이동통신사업 진출 전담팀을 내부에서 비밀리에 꾸렸던 최종현은
1991년 4월 전담팀을 선경텔레콤이라는 법인으로 출범시켰다. 제2사업자 선정에 참여하겠다는 것을 대외적으로 천명한 것이다.
선경텔레콤 명목상 사장은 손길승(선경그룹 경영기획실장)이 맡았지만 실제 일은 목정래가 총괄이라는 타이틀로 수행했다. 최태원은 기획팀장, 표문수는 대외협력팀장, 이방형은 마케팅팀장 역할을 하였다.
선경텔레콤이 다른 업체들을 끌어들여 컨소시엄을 구성하면서 ‘대한텔레콤’으로 이름을 바꿨다. 출범 당시의 직원이 200명에 이를 정도로 규모를 자랑했다.
선경은 미국의 GTE, 영국의 보다폰, 홍콩의 허치슨 등을 끌어들여 국제 컨소시엄을 구성했다. 영국의 이동통신회사인 보다폰은 1980년대 후반에 전 세계적인 시장망을 갖추고 있었다. 허치슨의 총수 이가성은 그 무렵 중국에서 이동통신사업을 시작하고 있었다.
경쟁사였던 포철은 미국의 이동통신회사인 팩텔과 손잡았다. 포철은 한 때 대통령 노태우의 사돈인 선경을 컨소시엄에 끌어들이려고 노력했던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