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현의 순수한 혜안인가, 노태우 정부와의 교감인가?
최종현이 제2이동통신사업 진출을 계획하고 준비한 시점은 공교롭게도 아들 최태원이 노소영과 사귀기 시작해 결혼에 이르는 시점과 중첩된다.
1960년생 최태원은 신일고-고려대를 졸업하고 1983년 미국 시카고대 경제학과 석사과정에 입학하여 1989년까지 박사과정을 수료하였다. 1961년생 노소영 역시 윌리엄앤메리대를 거쳐 1985년 시카고대 경제학과 대학원에 진학하였다.
두 사람은 1985년 가을무렵 시카고대학 한국유학생 모임에서 만나 서로 사귀기 시작하였고, 1988년 9월 13일 청와대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노소영의 아버지 노태우대통령은 1987년 12월 대선에서 당선, 1988년 2월부터 1992년 2월까지 대통령직을 수행하였다.
SK측 설명에 따르면 최종현은 선견지명을 갖고 1985년부터 선경아메리카를 통해 미래 사업을 구상하고 인재를 모았다. 그러다가 목정래라는 한국계 컨설턴트를 만나 미국내 통신사업 흐름에 대해 조언을 듣고 1989년 이동통신사업 진출을 위해 통신사업체 지분투자, 통신사업체 선경직원 파견하여 현장경험 이수 등 사전 작업을 치밀하게 준비하였다.
그러면서 이동통신사업 진출 기회를 노리고 있는데 마침 1990년 노태우정부가 통신사업을 경쟁체제로 바꾸려는 정책을 발표하자, 미리 준비하고 있던 팀을 제2이동통신 진출용 업체로 전환하였다.
이런 치밀한 준비의 힘으로 1991년 정부의 2이동통신 선정에 응모하여 압도적인 점수차로 업체로 선정되었다.
이 프레임에 따르면 SK의 통신사업 진출은 최종현의 뛰어난 리더십과 목정래의 실무적 능력이 만들어낸 것이다. 아들 최태원과 조카 표문수는 실무자로 참여하였다.
사돈 노태우 대통령가 이끄는 정부의 도움을 전혀 받을 필요가 없고, 오히려 사돈기업이라는 평판으로 인해 손해를 봤다는 것이다.
반면 최태원과 노소영의 만남에서 결혼이 중첩되는 시기는 통신산업 구조 조정 정책 키를 쥐고 있는 노태우 대통령 집권기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최종현-목정래의 뛰어난 혜안과 치밀한 준비만으로 통신산업 진출을 설명하는 것은 무리다.
첫째, 목정래는 경영정보시스템을 전공하였고 회계사출신으로 최종현에게 첨단 경영정보시스템 구축하는 일을 도왔다. 자신의 전공분야가 아닌 이동통신사업 컨설팅을 수행했다는 것은 전공분야를 엄격히 따지는 미국 컨설팅업계 관행에 맞지 않다.
둘째, 목정래는 적어도 1988년까지 이동통신 사업 기획을 구체적으로 수행하지 않았다. 이동통신사업 기획을 하기 시작한 시점은 1989년 중반부터다. 이 시점은 노태우정부가 출범하고 이어 최태원-노소영 결혼(1988년 9월)이후 시점이다.
이런 점은 노태우 정부의 통신산업 전체 그림에 대한 정보를 직간접적으로 획득한 후에 이동통신사업 진출을 구체적으로 준비했을 가능성을 높여주는 것이다.
셋째, SK의 이동통신사업 진출 준비는 1989년 중반부터 그해 말까지 짧은 기간동안 숨가쁘게 진행되었다. 미국의 중소형 통신관련 업체에 투자하는 등 이동통신 관련 정보를 캐거나 실적을 쌓기 위한 프로젝트를 1990년까지 집중적으로 수행했다.
넷째, 이혼소송 2심 판결문에 따르면 1990년~1991년 사이 최종현은 청와대에서 이동통신 기술 시범회를 개최하였다. 미국에서 이동통신 사업 정보획득과 크레딧을 쌓고 나서 국내 최고 의사결정권자를 대상으로 기술 시범 행사를 개최한 셈이다.
이 시점은 최태원이 노소영과 결혼하고 나서 이동통신사업 기획팀에서 핵심 역할을 하고 있던 시점이다.
즉, 최태원은 1988년 9월 결혼하고 1989년 가을 시카고대 박사과정을 수료한 뒤 미주 경영기획실에 입사해 목정래 밑에서 이동통신사업 기획에 핵심역할을 수행하였다.
최종현-목정래의 움직임과 최태원-노소영의 동선이 우연이라고 보기에는 정확하게 이동통신사업을 향해 같은 길을 향해 걷고 있었다.
최태원과 노소영은 부부로서 한 침대에서 자면서 목정래밑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대화를 전혀 하지 않았다는 것은 상식에 어긋난다. 노소영 역시 최태원이 무슨 일을 하고 있고,무엇에 꽂혀 있는지를 부모와 공유하지 않았다는 것도 상식에 어긋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