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7월 16일 서울 아산병원에서 목정래 전 SK텔레콤 부사장 영결식이 거행되었다. 팬데믹 영향으로 인해 조카 모희숙씨 등 소수의 친지들만 고인의 마지막 길을 같이 했다. 목정래 부사장의 자녀들은 모두 미국 국적으로 미국에 거주하고 있었다.
목정래 부사장의 부음을 접한 정보통신계 인사들도 소수였다. 그는 자녀들을 미국에 두고 강원도 용평에서 전원생활하고 있는 중이었는데, 집 지붕에 생긴 벌집을 처리하다 불의의 사고를 당해 갑자기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었다.
목정래 부사장과 친분이 있는 정보통신계 인사들은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깊이 애도하면서 오늘날 SK텔레콤의 탄생의 숨은 주역이었던 그와의 인연을 떠올렸다.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후반까지 정보통신부에서 근무하면서 목정래 부사장이 SK텔레콤 역사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최종현회장 시대가 가고 최태원 시대가 열리면서 목정래부사장의 존재는 SK텔레콤뿐만 아니라 SK 그룹내에서 잊혀졌다. 목부사장의 성격도 나서서 존재감을 뽐내려고 하지 않고, 조용히 초야에 묻혀기를 원했기에 더욱 그러했다.
목정래라는 인물을 다시 소환한 것은 최태원 회장과 노소영 나비 관장간 이혼소송과 그에 따른 판결이다. 특히 2심에서 재판부가 노소영관장의 부친 노태우전대통령이 SK텔레콤 출범과 성장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점을 인정하여 1조3천억원에 이르는 자산을 노관장에게 주도록 판결함으로써 SK텔레콤의 탄생 과정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가 새삼 조명을 받고 있다.
재산분할에서 핵심 쟁점은 현재 SK그룹의 지주사인 SK주식회사에 대한 최태원회장의 지분이 어떤 과정을 통해 형성되었는가다.
이에 대한 최태원회장 노소영관장측 주장은 전혀 다르다.
최회장쪽은 최태원회장의 SK주식회사 지분과 그룹 총수 지위는 최종현 회장이 생전에 설계한 큰 그림과 사촌간 협약이라는 집안 문화에 따른 것이라고 주장한다.
반면 노소영쪽은 최회장의 지분은 노태우 대통령의 비자금(300억원)과 눈에 보이지 않는 대통령의 영향력에 뿌리를 두고 있고, 결혼후 최회장의 그룹총수 경영에 의해 형성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재산분할에 대해 최회장은 자신의 지분은 아버지(최종현)가 만들어준 것이고, 그룹 총수지위는 사촌들이 밀어준 것이라고 주장해야 결혼후 회사 성장 분을 분할에서 제외할 수 있다.
이에 대해 노소영쪽은 최회장 지분의 뿌리인 대한텔레콤 지분은 노태우대통령의 비자금이 시드머니 역할을 했고, 이어 결혼후 그룹총수 부인으로 내조하였기에 성장분은 공동 재산이라고 주장해야 최회장 재산을 분할 받을 수 있다.
SK텔레콤 탄생의 실무 지휘자였던 목정래는 최종현회장 생존시 늘 독대하면서 크고 작은 궂은 일을 처리했다. 따라서 목정래 부사장이 생존해 있다면 이혼소송의 핵심 쟁점에 대해 가장 정확히 증언할 수 있었을 것이다.
대한민국 통신산업 역사 현장을 생생하게 경험했던 다수의 인사들은 SK텔레콤 탄생이 한 두개의 프레임으로 분석하기에는 굉장히 복합적이며 다층 구조성격을 띠었다고 증언한다.
이를테면 노태우전대통령이 사돈 최종현회장을 위해 이동통신사업을 그냥 줬다는 프레임은 모든 것을 쉽게 설명할 수 있지만, 실제 SK텔레콤이 국내 1위 사업자가 되는 복잡한 과정을 설명하는데 너무 제한적이다.
또 그렇다고 최종현회장의 미래를 보는 눈이 섬유 화학그룹이었던 SK 그룹을 이동통신과 반도체 기업으로 키웠다는 프레임 역시 현실의 복잡한 요소를 제거해버린 단순한 서사에 불과하다.
먼저 최종현회장과 목정래의 만남에서 SK텔레콤 탄생 비화를 풀 수 있는 실마리를 찾아보자.
최종현은 1980년대 중반부터 섬유 화학 중심의 선경그룹을 키우기 위해 새로운 트렌드를 찾는데 큰 관심을 보였다. 그는 미국 유학 경험으로 인해 글로벌 컨설팅 회사를 활용하는 것을 중시하였는데, 핵심 파트너는 미국계 딜로이트투치였다.
최회장은 신사업 발굴 실행조직으로 1986년 미국에 SK 지사(미주 경영기획실)를 뉴욕에 설립하였다. (최태원회장은 1985년 미국 시카고대를 다니면서 노소영과 사귀고 있었다.)
그는 야심차게 미국 지사를 설립과정에서 딜로이트 투지에 컨설팅을 의뢰했는데, 딜로이트는 한국계인 목정래를 SK 담당으로 배정하었다. 최회장은 미국 딜로이트투치에 근무하던 30대 목정래를 만나 그의 능력을 높이 샀다.
목정래는 진주고를 졸업하고 연세대 법과에 70년에 입학하였다. 그는 71년 유신체제 반대 학생운동 리더 역할을 하다 박정희 정권에 의해 제적당하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미국에서 경영학으로 전공을 바꿔 졸업하고 딜로이트투치에 입사해 실력을 인정받고 있었다. 목정래의 전문 분야는 MIS(경영정보시스템)구축이었다.
이후 목정래는 뛰어난 영어실력과 미국 컨설팅업계내 네트워크를 활용하면서 최회장의 미래구상을 뒷받침하는 두뇌역할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그의 또다른 임무는 최태원의 유학생활과 미국 생활을 뒷바라지하는 일이었다. 최태원은 졸업후 1988년 9월 13일 노소영과 결혼식을 올린 뒤 노소영과 함께 뉴욕에서 목정래부사장 밑에서 1990년 12월까지 경영수업을 받았다.
SK그룹은 이동통신진출에 대해 최종현 회장이 혜안을 갖고 목정래를 통해 미국내 이동통신사업 동향을 조사하거나 소규모 투자를 통해 경험을 축적하는 등 정부 특혜와 상관없이 치밀하게 준비했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실제 과정을 보면 다른 해석을 낳을 수 있다.
최종현회장이 목정래씨를 통해 구현하려고 했던 실제 프로젝트는 선경그룹의 경영정보시스템을 최첨단으로 구축하는 것이었다. 당시 세계 굴지의 기업들은 첨단 경영정보시스템을 구축하는 경쟁을 벌였고, 최회장은 이런 흐름을 굉장히 부러워했다.
목정래부사장의 전문 분야 역시 경영정보시스템 구축이었기에, 그는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최회장에게 보고하면서 선경그룹 경영정보시스템 구축을 지휘하였다.
여기서 최회장이 경영정보시스템 구축에 힘을 쏟는 기간(1986년~1988년)에 미국 산업계에서 일어난 변화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선 1984년 AT&T가 지배하던 통신 독점체제가 깨지고, 경쟁체제가 등장하면서 새로운 통신산업이 부상하였다. 최회장과 목정래는 이런 흐름을 예의주시하면서 관련 정보를 수집하고 분서하였다.
두번째 주목할 것은 미국 통신산업계 변화에 영향을 받은 국내 통신산업 정책의 변화였다. 정보통신부(구 체신부)는 한국통신공사중심 통신 사업 독점이 깨고 데이콤 등 새로운 통신업체를 육성하는 정책을 도입하였다. 유선통신 시장 독점 구조는 깨졌고, 막 꽃을 피우기 시작한 이동통신은 여전히 한국통신의 자회사인 이동통신이 독점하고 있었다.
묘하게 미국과 한국 통신산업 정책이 대 전환을 이루는 시점에 아들 최태원이 강력한 차기 대통령후보였던 노태우의 딸 노소영과 유학중 연애를 통해 대통령과 1988년 사돈 관계를 맺는 일이 일어났다. 실제 노태우는 대통령이 되어 88년부터 92년까지 5년동안 청와대를 지켰다.
최회장은 미국과 한국 통신정책 변화와 대통령집안과 사돈이 된 것을 계기로 목정래를 통해 신사업 개척과 아들 그룹 승계라는 두 마리토끼 잡기를 구상하였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