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랜드출신 작가 클레어 키건의 문학세계를 영화를 통해 만났습니다. 영화 ‘오펜하이머’에서 오펜하이머 역을 맡았던 킬리언 머피가 주연을 맡은 ‘이처럼 사소한 것들’을 OTT를 통해 접하고 원작자인 클레어 키건이 누구인지 궁금하게 여겼습니다.

크리스마스를 앞둔 아일랜드 도시를 배경으로 전개되는 영화는 석탄유통업을 하는 빌 펄롱(킬리언 머피)의 일상사를 쫓아가면서 느릿느릿하고 조용조용하게 흘러갑니다. 영화는 극적인 반전이나 감춰진 비밀같은 자극적인 요소도 거의 없지만 묵직한 울림을 줬습니다.

영화를 보고 나서 이 영화의 원작이 클레이 키건의 ‘이처럼 사소한 것들’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또 킬리언 머피와 원작자 클레어 키건이 모두 아일랜드출신이라는 점을 알았습니다.

키건의 소설 ‘맡겨진 아이’와 ‘이처럼 사소한 것들’을 읽어야겠다고 마음만 먹고 있던 중에 ‘너무 늦은 시간’이 새로 출간되었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이 소설집은 키건이 썼던 세 편의 단편을 모은 소설집입니다. ‘남자와 여자의 이야기’라는 부제를 달고 있습니다.

키건의 소설을 읽으면서 인도계 미국 작가 줌파 라히리가 떠올랐습니다. 라히리가 인도계 미국인의 삶을 소설화했다면 키건은 아이랜드인 특유의 정서를 섬세한 문장으로 엮어냈습니다.

<<너무 늦은 시간>>에서 ‘길고 고통스러운 죽음’편중에서 키건의 글솜씨를 맛볼 수 있는 문장을 골라봤습니다.

소설의 무대는 아일랜드의 애킬섬 하인리히 뵐 코티지(The Heinrich Böll Cottage)입니다.

하이인리 뵐은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로 노벨 문학상을 받은 독일작가입니다. 그는 애킬섬에 별장을 마련해 집필활동을 하면서 ‘아일랜드 일기’를 썼습니다. 아일랜드는 그 별장을 뵐코티지로 명명하고 문학가들이 이곳에서 집필활동을 하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운영했습니다.

주인공은 뵐코티지 프로그램에 선정되어 한적한 곳에서 작업에 몰두할 생각에 설레지만 독일인 교수라는 사람이 불쑥 전화하고 찾아와 그녀를 방해합니다.

주인공은 예의 바르게 그의 방문을 허락하고 케이크를 만들어 대접하지만 상대방은 고마워하기는커녕 많은 사람을 제치고 선정되었으면서 한가롭게 케이크나 만들고 바다에 들어가 놀기나 한다며 비난합니다.

1.

그녀가 마침내 애킬섬으로 가는 다리를 건넜을 때는 새벽 3시였다. 드디어 마을이 나왔다. 어부 협동조합, 철물점 겸 식료품점, 불그레한 석조 교회까지 모든 건물이 흐릿하게 타오르는 가로등 아래 문이 잠긴 채 고요했다.

그녀는 어두운 대로로 차를 계속 달렸다. 양옆에 키 큰 진달래 덤불이 난잡하게 자랐지만 꽃은 지고 없었다. 사람 하나, 불 밝힌 창문 하나 보이지 않았다

2.

오는 길에 두 번이나 갓길에 차를 세우고 잠깐 눈을 붙였지만 섬에 들어오자 정신이 말똥말똥해지고 온전히 살아 있는 기분이 들었다.

해변으로 가파르게 떨어지는 칠흑같이 까만 길까지도 생기가 가득한 느낌이었다. 그녀는 높고 든든한 산과 헐벗은 언덕, 그리고 저 아래 도로가 끝나는 곳에서 선명하고 기분 좋게 철썩이는 대서양의 존재를 느꼈다.

3.

그녀는 옷을 벗고 누워서 책으로 손을 뻗어 체호프 단편의 첫 문단을 읽었다. 좋은 문단이었지만 끝까지 읽으니 눈이 자꾸 감겨서 기분 좋게 불을 껐다. 내일은 온전히 그녀의 것이 되리라. 일하고 책을 읽고 도로 끝 해안까지 걸어가 볼 것이다 .

4. 하늘은 흐렸지만 곧 갤 듯했고 군데군데 파랗게 물들었다. 저 아래 바다에서 리본 같은 물이 투명한 파도를 만들더니 해안에 부딪쳐 조각조각 부서졌다. 그녀는 독서가, 일이 무척 간절했다. 며칠이고 자리에 앉아 책을 읽고 일하면서 아무도 만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5.

그녀는 전화기를 내려놓고 빤히 바라보면서 왜 받았을까, 그쪽에서 전화번호를 왜 알려줬을까 생각했다. 여기 전화가 있다는 사실 자체에 잠시 화가 났다. 멋진 날로 시작해서 아직 멋진 날이었지만 뭔가 바뀌었다. 이제 약속이 생겼으므로 오늘 하루가 독일인의 방문을 향해서 흘러갈 수밖에 없었다

6.

그녀는 얼른 일어나서 뵐의 서재로 갔다. 안 쓰는 벽난로와 바다가 내다보이는 창문이 있는 작은 방이었다. 지금은 유명해진 일기를 썼다는 곳이 바로 이 방이지만 그것도 50년 전의 일이었다.

하인리히 뵐이 세상을 떠났고 유족이 이 집을 작가들을 위한 작업 공간으로 남겼다. 그리고 이제 그녀가 2주 동안 여기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녀는 천을 적셔서 책상을 닦고 공책과 사전, 종이, 만년필을 올려놓았다. 이제 커피만 있으면 된다

7.

도롯가에서 작고 통통한 암탉이 뭔가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서 목을 쭉 빼고 돌을 디디며 길을 따라 걸었다. 정말 예쁜 암탉이었다. 집을 나서기 전에 파우더라도 바른 것처럼 깃털 끝이 하얬다.

암탉이 풀로 뒤덮인 가장자리로 뛰어내리더니 왼쪽도 오른쪽도 보지 않고 달려서 도로를 건넌 다음 잠시 멈춰 날개를 다시 정리하고는 절벽을 향해 똑바로 질주했다.

8.

물이 갈비뼈까지 올라오자 그녀는 심호흡을 하고 뒤로 누워서 멀리 헤엄쳐 갔다. 바로 이 순간 자신이 인생에서 해야 할 일이 바로 이것이라고, 그녀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그녀는 수평선을 바라보며 어느새 진정으로 믿지 않는 무언가를 향해 감사를 드리고 있었다.

9.

어제 사 온 빵과 함께 먹고 레드와인을 한 잔 마셨다. 다 먹은 다음에는 접시를 헹궈 치우고 불을 피우고 체호프의 단편을 다시 손에 들었다. 어떤 여자의 이야기였는데, 그녀의 약혼자는 일정한 직업이라 할 것도 없지만 음악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10

“술을 좀 드실 거죠?” 그녀가 말했다. “아니, 아닙니다.” 그가 말했다. “운전해야 합니다.” 그는 푸크시아를 보고 있었다. “그럼 차는요? 차랑 케이크는 드셔야죠.” “수고가 많으시네요.” “전혀 수고스럽지 않아요.” 그녀는 이 말이, 이 말을 하는 것이, 그가 그 말을 하게 만드는 것이 지겨웠다.

11.

“그러면 아름다운 지원자에게 기회를 줘야겠네요.” 그녀가 이렇게 말하고 웃었다. “그렇게 생각합니까?” 그가 얼굴을 찌푸리고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그녀의 얼굴을 샅샅이 살피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그가 말했다. “제 아내를 보셨어야 합니다. 내 아내는 아름다웠어요.”

12.

“온통…… 전문용어예요. 우리는 상관 안 해요. 우리는 글을 쓸 수가 없어서 그러는 건데, 그런데 당신은 작가라면서 하인리히 뵐의 집에서 케이크나 만들고 있군요.”

그녀가 숨을 들이마셨다. “뭐라고요?” “하인리히 뵐의 집에 와서 케이크나 만들고 옷도 안 입고 수영이나 한다고요!” “무슨 말씀이세요?” “내가 매년 찾아오는데, 항상 똑같아요. 대낮에 잠옷이나 입고 돌아다니고, 자전거 타고 술집이나 가고!”

13. 그 순간 그녀가 자기 소리를 들었다. 웃음을 터뜨렸던 것이다. “하인리히 뵐에 대해서 하나도 모르면서!” 그가 외쳤다. “하인리히 뵐이 노벨문학상을 탄 것도 몰라요?”

“이제 그만 가셔야 할 것 같네요.” 그녀가 이렇게 말하고 대문으로 들어가 빗장을 세게 걸어 잠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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