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에서 ‘밥 먹었냐?는 일상 인사가 어느새 ‘무엇을 먹었냐?’로 바뀌었습니다. 먹는 것 자체가 삶의 투쟁이던 시절이 지나 먹는 것 자체를 즐기게 된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미디어에 요리 테마 콘텐츠가 넘쳐나고 또 폭넓은 인기를 얻고 있기도 합니다.

넷플릭스의 ‘흑백요리사’는 그런 흐름을 압축해서 성공시킨 콘텐츠입니다. 정식 요리사 코스를 밟은 엘리트 요리사와 밑바닥에서 성장한 독립 요리사간 대결을 통해 음식과 요리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폭발시킨 것이지요.

개인적으로 요리에 대한 만남은 송파구의 ‘동락’이라는 오뎅 요리집을 통해서입니다. 동락은 한국 지리학계에서 명성을 얻은 손일 전 부산대 교수가 60대 초반에 창업한 음식점입니다.

손 교수는 65세가 되기 전에 교수직에서 떠날 결심을 하고 60세에 나카무라 아카데미에서 정식으로 요리를 배웠습니다.(노소동락, 푸른길)

우연히 지인의 소개로 동락을 오픈하는 날 손 교수의 음식과 함께 스토리를 접하고 ‘아, 요리라는 것이 단순히 먹는 대상이 아니구나’하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최강록 요리사의 ‘요리를 한다는 것’을 읽으면서 역시 요리는 스토리이며, 요리사는 스토리텔러라는 점을 다시 확인하였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광화문 직장 시절에 자주 들렀던 장호왕곱창의 ‘짤라’와 초등학교 시절 어머니가 특식으로 해주셨던 감자샐러드(당시는 사라다라고 부름) 스토리를 접하고 참 반가웠습니다.

1.안주가 맛있는 집

내 힘으로 돈을 벌던 30대 때는 내가 원하는 술집을 골라 다녔다. 그러면서 깨달았다. 나는 안주가 맛있는 집을 고르고 있었구나. 내가 좋아하는 건 술도 분위기도 아니라, 술을 마시면서 함께 먹는 음식이었다. 지금도 생각나는 음식들이 있다.

1.2 짤라의 추억

그때 김치찌개집에 가면 늘 ‘짤라’를 시켰다. 부들부들한 삶은 고기가 너무 맛있어서 일하시는 아주머니한테 물어봤다. “이게 무슨 부위예요?” “이거 짤라야.” “그래서 부위가 어디냐고요?”

“짤라라니까!” 더 물어보면 바쁜데 말 시킨다고 화를 내실 분위기였다. 사실 정확히 어느 부위인지 아는 사람이 그 가게에 없었다. 짤라는 소의 내장을 삶은 것이다. 숭덩숭덩 잘라내서 그런 이름이 붙었을까

1.3 내장 수육

한동안 이런 내장수육에 꽂혀서 어머니대성집에 갔고, 곱창이 들어간 곰탕 맛에 하동관을 다녔다. 나에게 포차의 기준이 된 가락동 원조포차의 병어조림은 비싸서 자주 못 먹었지만, 모둠생선구이의 튼실한 살점을 하나 집어들 때까지 소주잔을 들지 않았다.

2. 맛집 순례 시작

줄 서는 게 기본인 식당에 가봤는지, 소문만 듣던 메뉴를 몇 번 먹었는지로 어깨에 힘을 주던 때가 지나면, 그래서 그 맛이 어땠는지, 평가의 단계로 들어간다.

나는 맛있는 음식을 먹는 즐거움을 알게 되면서 다른 맛들이 더 궁금해져 자연스럽게 맛집을 찾아다녔다. 맛집에 관심이 있는 친구가 있으면 정보도 자주 공유하고 화제도 풍성해졌다.

3.일본 유학시절 맛집 순례

일본으로 요리 유학을 갔을 때 본격적으로 현지 맛집을 찾아가보고 싶었다. 그런데 돈이 없었다. 학비 때문에 밥 한 끼는 먹어도 미식은 즐기지 못했다. 학교 동기인 일본 학생들과 모임을 갖고서 일주일에 한 번씩은 5천 엔 정도로 코스 요리를 하는 식당을 돌아보자고 했는데, 몇 번 못 갔다.

3.1 가성비좋은 이자카야

일본 학생들도 스무 살 언저리여서 서른 살 유학생인 나와 비슷한 신세였다. 그러다보니 나중에는 가성비 위주로 식당을 찾게 되었고, 결국 이자카야로 전향하게 되었다

매일 저녁 들르는 직장인처럼은 할 수 없었지만, 나도 일주일에 몇 번은 아르바이트 하고 학교 갔다가 저녁이면 혼자서 이자카야에 갔다. 명란구이, 생선회 몇 점 같은 작은 접시 요리 또는 면요리 한 그릇에 잔술 한 잔. 갈 때마다 조금씩 다른 것들을 시켜 먹었다.

4.이자카야의 감자 샐러드 추억

나는 감자샐러드를 제일 좋아했다. 한국에서는 술안주로 먹을 일이 없는 메뉴인데, 먹어보니 생각보다 괜찮았다.

양이 과하지도 않은데 든든한 느낌도 있어서 첫 안주로 많이들 시키는 것 같았다. 삶은 감자와 계란을 마요네즈에 버무린 요리가 평범할 것 같지만, 알고 보면 가게마다 개성이 있다.

4.1 다양한 감자 샐러드

아삭하게 씹히는 오이나 양파는 꼭 들어 있고, 거기에 베이컨을 넣기도 하고, 고추기름을 뿌린다거나, 노른자를 흘러내리게 한다거나, 양파튀김을 올린다.

감자샐러드를 이렇게 복잡하게 해석할 수도 있구나 싶었다. 그래서 어떤 이자카야에서는 간판메뉴로 내세우기도 했다.

5. 동네 이자카야의 색다른 재미

이자카야에는 소박한 음식에 다양한 맛이 담겨 있었다. 먹는다는 것의 색다른 재미를 동네 이자카야에서 발견했다. 유학생 신분으로 정신줄을 놓고 시켜먹다간 타지에서 굶어죽을 수도 있을 것 같아서 1500엔을 한도로 두었다.

두세 잔 마시면서 음식 맛을 본 건데, 지금 생각해보니 5천 엔 코스보다 돈이 더 들었을지도 모르겠다.

6.제철 재료를 다루는 재미

본격적으로 요리사로 일하면서, 먹는다는 것은 즐거움 이상의 의미가 되었다. 특히 제철 음식이 나오는 식당에 가면 손님으로서 신선한 식재료를 맛보는 기쁨도 있지만, 요리사로서 내가 아는 식재료의 최상의 맛을 경험할 수 있고 계절 변화를 바로 실감할 수 있었다.

벌써 주꾸미 철이네. 이제 굴을 써도 되나. 좀 있으면 나물이 잔뜩 나오겠네. 메뉴 개발까지는 아니더라도 메뉴 구성에 큰 도움이 되었다.

7.맛집 평가 기준, 경험의 총합

어머니와 둘이서 줄 서는 식당들을 여러 군데 가보았다. 그런 곳을 다니다보면 이래서 사람들이 찾는구나 하는 집도 있었고, 이름값이 허상이구나 싶은 집도 있었다.

수많은 식당을 가보고 나서 맛집에 대한 개인적인 기준이 생겼다. 먹고 나왔을 때 ‘간이 절묘해’ ‘소스가 맛있어’ 이런 세세한 판단이 아니라, ‘합리적’이었다고 생각이 들면 나는 그곳을 맛집으로 인정한다.

7.1 합리적이라는 의미

‘합리적’이라는 건 ‘가성비’와는 다른 기준이다. 싸고 맛있어도 먹고 나왔을 때 찜찜한 곳이 있고, 돈을 많이 써도 ‘괜찮았어’ 하는 곳이 있다.

가격뿐만 아니라 음식의 맛을 포함해 그곳에서 내가 보낸 시간에 대해 종합적으로 평가를 하게 된다. 다시 말하면, 중요한 것은 전반적인 만족스러움이다.

8.가족과 함께 먹는다는 것

내가 먹는 걸 좋아하는 줄도 몰랐던 20대, 먹는 걸 좋아한다는 걸 알게 되고 즐긴 30대를 지나 40대가 된 지금도 가끔씩 혼자서 맛있는 식당을 찾는다. 이젠 아주 허름한 곳도 망설임 없이 들어가곤 한다

하지만 가족이 생기니 아무래도 생활 패턴이 달라지게 됐다. 혼자 다니기보다 가족이 함께 나서는 게 자연스러워졌고, 무엇보다 아이의 식성이 최우선일 때가 많다.

그래도 먹는 걸 좋아하는 건 변함이 없으니 내가 50대가 되면 먹을 수 있는 게 더 많아진 아이와 함께 ‘합리적인’ 맛집을 찾아다니지 않을까?

9.입안의 소소한 어드벤처

나에게 먹는다는 것, 맛을 즐긴다는 것은 모험이다. 새로운 식당에 가는 것도 모험이겠지만, 먹는 것 자체가 지금 바로 내 안에서 펼칠 수 있는, 즉시 실행할 수 있는 모험, 입안의 소소한 어드벤처다.

누군가에겐 일상 속 모험이 등산일 수도, 여행일 수도 있겠지만, 요리를 하는 나의 모험은 메모해놓은 식당을 찾아가는 것, 그곳에서 새로운 맛을 경험하고 만족스러운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9.1 어드벤처의 시작, 내 돈으로 주문

어린아이가 먹는 것에 자기주장을 펼치기 어려웠던 분위기였다. 그래서 음식이 주는 여러 가지 즐거움을 잘 몰랐다. 막 성인이 돼서도 부모님이 늘 드시던 걸 따라 먹었다. 그게 안전하니까.

그러다 내가 본격적으로 돈을 벌 즈음 모험이 시작됐다. 부모님이 사주시던 짜장면에서 벗어나 내 돈을 내고 탕수육을 사먹게 되면서 맛의 세계가 조금 열린 것 같다. 안 먹어본 것들을 하나씩 먹고 싶은 마음이 나한테는 모험심이었다.

그렇게 내가 가볼 수 있는 맛의 세계가 점점 넓어지면, 탕수육 말고 류산슬이란 걸 먹어보고 싶은 날이 오는 것이다. 이건 이런 맛이구나. 요런 식감도 나네. 맛을 음미하고 평가하고 비교하는 즐거움을 알게 됐다.

10.자녀에게 전하고 싶은 것

나도 차근차근 레벨업이 되면서 어디 가면 뭘 먹을 수 있는지, 그건 무슨 맛인지 가족과 친구들에게 알려줄 수 있는 모험담이 늘어났다.

요즘에는 아직 어린 우리 아이에게 내가 먹었던 음식에 대해 자주 얘기한다. 경험에서 나온 지혜를 전달하는 것이 부모로서 할 수 있는 교육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10.1 맛집 고르는 노하우 전수

먹는 걸 좋아하는 요리사 아빠라면 수학이나 예술을 가르쳐주진 못해도 (내 성적표에 수학은 ‘양’, 미술은 ‘가’였다.) 음식 얘기는 잘해줄 수 있다. 이 요리는 저 식당이 잘해. 이건 이렇게 해서 먹으면 맛있어. 이 음식은 이렇게 하니까 잘 먹게 되더라.

당장은 아이가 이해하지 못해도 언젠가 아빠가 음식 얘기를 많이 해줬다는 기억이 좋은 추억으로 남기를 바란다. 어릴 적 들었던 아빠의 음식 얘기가 나중에 아이가 커서 스스로 모험을 떠날 때 함께하는 오래된 지도가 되어주지 않을까?

10.2 나의 로망

나도 할아버지가 돼서도 맛의 모험을 계속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때는 또 새로운 세계가 펼쳐질 것 같다. 그런데 나는 맛있는 걸 먹을 때 늘 술 한잔 곁들이니까 술 마실 체력이 남아 있어야 하는데 그게 걱정이다.

관련 링크:뇌가 젊어지는 독서급관, 귀독서(좋은 습관 연구소, 우병현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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