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닉스는 현대전자와 LG반도체가 합병하여 탄생한 회사입니다. 개인적으로 1999년 탐사보도를 위해 청주 하이닉스(LG 반도체 공장)를 취재를 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 양사 합병이후 LG반도체 인력이 해외에 스카웃되면서 인력유출이 사회적 이슈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후 하이닉스는 SK에 인수되기 전까지 참 어려운 시기를 오랫동안 겪었습니다. 그러다가 챗GPT 출시를 계기로 AI빅뱅을 맞아 세계에서 가장 핫한 테크 회사로 우뚝 솟았습니다. IT를 오랫동안 취재했지만 하이닉스가 이렇게 변신할 줄 전혀 예측하지 못했습니다.

메모리 기반 반도체 산업은 늘 인텔, 퀄컴 등 비메모리 탑 클래스 회사에 의존하는 전형적인 부품업체였습니다. 엔비디아 역시 CPU에 붙여 그래픽 가속기를 돌리는 종속적인 지위에 있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하이닉스는 평균 연봉, 대학생 취업 희망1위 등 여러 평가기준에서 한국 최고의 회사 자리에 올랐습니다. 삼성전자라는 거대한 산앞에서 만년 2등이라는 딱지를 떼지 못했던 회사가 어떻게 대 전환에 성공했을까요?

그 궁금증을 ‘슈퍼 모멘텀’을 풀 수 있었습니다. 한국 저널리즘 풍토에서 늘 아쉬웠던 점은 논 픽션 시장의 크기가 너무 작은 탓에 제대로 된 논픽션 작품이 드문 것이었습니다.

월터 아이작슨의 스티브 잡스, 일론 머스크 전기를 읽으면서 참 부러워했습니다. 세계 최고 지위에 오른 인물이 저널리스트에게 자신의 스토리 집필을 맡긴 것도 놀랍고, 아이작슨이 위대한 인물의 명과 암을 모두 취재하여 균형있게 담은 점은 더 놀라웠습니다.

‘슈퍼 모멘텀’이 한국 논픽션 시장에서 일대 혁신을 일으키길 기원하며 ‘언더독의 HBM 도원 결의’편을 골라서 요약했습니다.

하이닉스의 최고 성과물인 HBM이 엔비디아의 경쟁사인 AMD과 함께 개척했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1. 2등의 한

“평생 소원이었던 경쟁사 한 번 이겨보고 싶었다.” “지난 7년, 긴 여정long journey을 함께 해 줘서 고맙다.” 2014년 6월 18일 미국 캘리포니아 산호세에서 열린 SK하이닉스 HBM 심포지엄. 심포지엄에 참석한 조 매크리Joe Macri AMD CTO가 하이닉스팀을 향해 헌사했다.

이날 행사는 20여 개 주요 고객사와 파트너사 관계자 100여 명을 대상으로 HBM을 선보이는 자리였다. 4개월 전 하이닉스 개발진이 전기전자공학자협회IEEE의 연례 학술대회 ISSCC37에서 HBM을 처음 공개하는 기술 논문을 발표했는데 생각보다 반응이 뜨거웠다.

HBM을 알리는 별도 심포지엄을 마련했다.

함께 보낸 고된 시간을 응축한 매크리 CTO의 한 마디에 그 자리에 있던 HBM 패키지 개발 파트장의 마음도 묵직해졌다. 머릿속으로 지난 7년이 지나갔다.

세상에 없던 것을 맨땅에서 시작해 만들어 낸 시간이었다 하이닉스의 엔지니어들은 AMD라는 파트너와 7년을 씨름해 아이디어로 존재하던 생각을 HBM이라는 제품으로 증명해냈다.

2. HBM은 ‘언더독 동맹’의 산물

CPU로는 거인 인텔에 치이고, GPU로는 엔비디아에 밀리던 AMD는 항상 승리에 배가 고팠다. 만년 2등 하이닉스는 늘 생존을 위해 분투하면서도 삼성전자를 넘어서기를 열망했다. 두 2등의 의기투합은 2008년 말 시작됐다.

AMD의 핵심 고위 엔지니어가 어느 날 하이닉스를 찾아왔다. 그는 당시 연구소장이던 박성욱 전 부회장에게 AMD가 컴퓨팅 시장을 혁신적으로 개혁할 신개념 고성능 GPU를 만들고 싶은데 하이닉스가 연구 중인 TSV 기술로 새로운 걸 해보자고 제안했다.

하이닉스가 그래픽 TSV 제품을 개발하면 이를 AMD가 쓸 테니 같이 시장을 개발해 보자는 것이었다.

3.AMD의 GPU 시장 진출

AMD는 공격적 사업 확장에 나서 2006년 10월 엔비디아와 GPU 시장을 양분하던 캐나다 기업 ATI를 인수해 GPU 시장에 진출했다.

하이닉스는 2000년대 중반 ATI에 이어 AMD의 GPU에 탑재할 그래픽용 D램을 공급하면서 AMD와 돈독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3.1 TSV로 한번 일을 내보자

AMD의 제안을 받고 하이닉스의 영업·설계·패키징 담당자 셋이 모여 ‘TSV로 한번 일을 내보자, 사업으로 만들어보자’고 뜻을 모았다. TSV(Through Silicon Via)

하이닉스가 TSV 기술로 적층한 고사양 메모리를 만들어낸다면 당장은 AMD의 게임용 그래픽 카드 GPU에 쓰이겠지만 향후 고성능 슈퍼 컴퓨팅에 필요할 거라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다.

3.2 TSV팀 구성

하이닉스는 2009년 TSV 기술에 관한 큰 회의를 연다. 이후 같은 해 11월 TSV 기술로 메인 메모리, 모바일, 그래픽, 고성능 컴퓨팅용 제품을 만들어보자는 전사 로드맵을 만들고 이듬해 연구소에 TSV팀을 꾸렸다.

회사 한편에서 기초 선행기술을 연구하는 단계에 있던 TSV가 회사 전체 전략이 되어 본격적인 프로젝트로 굴러가기 시작한 것이다.

4.한번 이겨보자

두 회사를 단단히 묶은 끈은 ‘한번 이겨보자’는 강렬한 마음이었다. 이 전 연구위원은 2011년부터 2014년까지 연구소 TSV팀장을 맡아 HBM 초기 개발을 이끌었다.

그는 HBM 개발에 참여한 동기를 이 한 줄로 얘기했다. “하이닉스를 다니면서 평생 소원이었던 경쟁사 한 번 이겨보고 싶었다.”

5. HBM 탄생 산실, ‘TSV동’

2013년 즈음으로 시간을 되돌리면 HBM의 시작은 작고 소박했다. 하이닉스 이천캠퍼스 체육관 옆에 작고 낡은 4층짜리 건물이 하나 있다.

보통 반도체 제조 시설은 알파벳과 숫자를 조합해 명명하는데 이 건물에는 ‘TSV동’이라는 유별난 이름이 붙었다. 여기서 HBM의 핵심 기반기술인 TSV로 HBM1이 개발되고 양산됐기 때문이다

5.1 창고 같은 TSV 시설

자동화 설비도 없어 수동 라인을 쓰던 시절이다. 2008년 하이닉스에 입사하자마자 TSV 개발에 투입됐던 패키지PKG 부문 한 부사장은 “이 건물은 이름을 못 바꾼다”고 잘라 말한다.

당시 연구개발총괄CTO로서 TSV 프로젝트를 지휘한 박성욱 전 부회장은 “기존 양산 시설에 TSV 장비를 놓을 데가 없어 패키지·테스트 건물의 작은 빈 공간을 찾아서 장비 몇 대를 놓고 썼다.

5.2 HBM의 산실로서 가치

패키지 부서 사람들이 죽자 사자 TSV 기술 개발에 매달린 곳이니 TSV동이라고 불렀던 것 같다”고 회상했다. TSV동은 더 이상 HBM 생산에 쓰이지 않는다. 20여 년 전 HBM이 탄생한 곳에서 이제는 어드밴스드 패키징팀이 미래 패키징 기술을 위한 선행 개발을 하고 있다.

6. 적층 기술 부상

2000년 대에 들어서자 ‘모어댄무어more-than-moore’ 기술에 대한 논의가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적층, 즉 칩을 쌓는 것이다.

평면이 한계에 부딪치자, 수직의 개념을 도입해 반도체 성능을 올려보자는 발상이다. 칩을 쌓으려면 층과 층을 연결해야 했다. 그러자니 구멍을 뚫어야 했다.

이것이 수직관통전극 TSV(Through Silicon Via) 기술이다. 칩에 수천 개의 미세 구멍을 뚫어 상하층 칩의 구멍을 수직 관통하는 전극으로 연결하는 것이다.

7.삼성전자의 TSV기술 개발 선수

2000년 이후 업계는 너도나도 TSV 기술 연구에 뛰어들었다. 삼성전자가 가장 먼저 시작했다.

2006년 4월 13일 삼성전자는 “세계 최초로 관통전극형 3D 패키지 기술을 적용한 8단 적층 낸드플래시 복합 칩을 개발했다”고 발표하면서 TSV 기술을 실제 제품에 적용한 것이 처음이라고 강조했다.

당시 삼성전자에서 TSV 기술 개발을 주도했던 반도체 패키징 전문가는 “그때 TSV 기술 개발을 어떻게 홍보해야 할까 하다가 논문에 있던 TSV라는 용어를 ‘관통전극’이라는 말로 표현해 설명했는데 이후 그 말이 하나의 기술 트렌드가 됐다”고 설명한다

8.하이닉스 TSV 연구 시작

하이닉스도 2006년부터 TSV 기술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TSV 기술은 어렵고 장비가 비싸 돈이 많이 든다.

살림이 어려웠던 하이닉스는 국가 지원을 받기로 했다. 앰코, 동부하이텍(현 DB하이텍)과 함께 프로젝트를 꾸려 2006~2008년 R&D 지원금 총 43억여 원을 받아 TSV 장비를 샀다.

TSV는 트랜지스터 성능 자체를 개선하는 것이 아니라, 연결과 적층으로 칩의 성능을 올리는 기술이다 보니 연구진은 하이닉스의 패키징 선행개발팀이 주축이 됐다.

9.HBM의 기반 기술, TSV

TSV를 아주 단순화하면 뚫고 채우고 갈고 쌓는 것이다. 먼저 가로 1㎝, 세로 1㎝ 크기 칩에 미세한 구멍 수천 개를 뚫어야 한다.

9.1 백지상태에서 출발

구멍을 만드는 기술도 없었기 때문에 하이닉스 팀은 말 그대로 백지 상태에서 출발했다.

칩에 회로를 새길 공간을 두어야 하기 때문에 구멍은 가능한 한 작고 가늘어야 한다.

그렇게 만든 구멍의 지름은 5㎛, 깊이는 50~60㎛다 (사람의 머리카락 평균 굵기가 70㎛, 0.007㎝다).

9.2 의사결정이 기술 개발의 핵심

2002년 하이닉스에 입사해 TSV 연구에 초기부터 참여했던 한 임원은 “칩의 속도를 올리려면 쌓아야 하고, 쌓으려면 구멍을 뚫어야 한다는 건 다 알고 있던 당연한 기술 전개였다.

그것을 실제 개발하고 몇 조 원 넘게 투자하는 실행을 할 거냐는 의사결정의 문제였다”고 말했다.

10. 킬러 애플리케이션 찾기

범용 메모리를 대량 생산해 가능한 한 저렴하게 공급하는 비즈니스를 해 온 메모리 기업에 고비용은 난감한 지점이 아닐 수 없다.

관건은 TSV의 ‘킬러 애플리케이션’은 무엇이 될 수 있을까였다. 이는 TSV 기술이 HBM이 되어 AI를 만나기 전까지 내내 하이닉스를 괴롭힌 질문이기도 했다.

10.1 모바일 시장에서 킬러 앱을 찾다

모바일 와이드 I/O를 적용한 제품을 하이닉스에 타진했다. 이들 기업과 하이닉스 사이 논의가 오갔지만 진전되지는 못했다.

기술적 장점에도 불구하고 TSV 기술이 성숙하지 못한 데다 결정적으로 모바일로는 단가가 맞지 않았다.

10.2 킬러 앱찾기 난관

메이저 콘솔 게임 플랫폼·하드웨어 기업 한 곳도 콘솔 기기 성능을 올리기 위해 유사한 니즈가 있었지만 같은 이유로 불발됐다.

댓글을 남기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