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 디킨스, 제인 오스틴, 조지 엘리엇, 코난 도일 등 우리가 친숙한 영국작가들의 공통점은 모두 빅토리아 시대에 활동한 점입니다. 빅토리아 여왕은 1837년에 즉위해서 1901년까지 63년동안 왕위를 지킴으로써, 22년에 서거한 엘리자베스2세 이전까지 영국 역사상 최장수 왕이었습니다.

빅토리아 여왕 치세 기간은 또 해가 지지 않는 제국으로서 영국의 최전성기이기도 합니다. 인류 문명 측면에서도 산업혁명의 완성기에 해당되면서, 도시화와 계급 갈등이 가속화된 시기입니다.

반면 한반도로 눈을 돌리면 한국의 암흑기와 빅토리아 시대가 겹칩니다. 1800년 정조 시대가 막을 내리면서 이른바 세도 정치가 조선사회를 지배하면서 스스로 고립과 몰락의 시간을 만들었습니다.

‘크리스마스 캐롤’ ‘두 도시 이야기’ ‘위대한 유산’ 등 디킨스의 작품을 읽으면서 빅토리아 시대의 전체상을 보고 싶었습니다. 조지 엘리엇 ‘미들 마치’를 읽을 때도 역시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리처드 앨틱의 ‘빅토리아 시대의 사람들과 사상’이 그런 궁금증을 풀어줍니다. 이 책의 ‘최장기간의 치세’ 편을 골라 읽었습니다. 문학 작품을 통해 그 시대와 역사와 철학, 사람들의 일상 생활을 실감하는 것 또한 독서의 재미입니다.

1. 빅토리아 시대

1901년 2월 2일 빅토리아 여왕의 장례 행렬을 보려고 런던 거리에 줄지어 서 있던 남녀노소 군중들 가운데 다른 군주가 영국 왕좌를 차지했던 날을 기억할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군중들 대다수는 오로지 빅토리아 여왕의 신민이었고, ‘빅토리아 시대 사람들’이었다.

63년이 넘는 긴 세월을 하나로 묶은 것은 영국 역사상 가장 오랜 기간을 통치한 군주 한 명뿐이었다.

1.1 빅토리아 초-중-후기

사실상 빅토리아 시대는 하나의 시대가 아니라 여러 시대였다. 빅토리아 여왕 중기의 시대 정신은 초기와 확연히 달랐고, 후기의 시대정신과도 두드러진 차이가 있었다.

그 시대의 양쪽 극단은 대단히 상이한 시기들과 혼합되어 있었고, 그 극단의 한쪽은 회고적으로 또 다른 쪽은 선행적으로 그 초기와 후기가 각각의 독특한 색채를 띠고 있었다.

빅토리아는 1837년 6월 열여덟의 나이로 여왕에 즉위했다. 역사가들은 제1차 선거법 개정안이 통과된 1832년을 빅토리아 여왕 시대로 잡는 경우도 종종있다. 1830년대는 전환기였다.

2.낭만주의 시대, 시인들

문학사에서는 공백기로 불리는데 낭만주의 에너지가 분출된 후 빅토리아 시대라고 식별할 수 있는 새로운 목소리가 들리면서 곧 등장할 신선한 활기를 기다리던 휴지기였다.

2.1 워즈워스와 콜리지

낭만주의 주요 시인들 가운데 빅토리아 시대의 작가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은 윌리엄 워즈워스였다. 존 스튜어트 밀, 존 러스킨, 매슈 아널드, 조지 엘리엇 같은 다양한 인물들이 모두 그의 자연시에 매료되었다.

워즈워스의 친구 콜리지는 1834년에 사망했는데, 명민한 독자들 사이에서 상당한 명성을 누렸고 시간이 흐르면서 그 명성은 더욱 커졌다. 그는 빅토리아 시대 사람들에게 일련의 종교적 사회적 관념을 유산으로 물려줬다.

2.2 바이런

낭만주의 시대의 빛나는 명성을 생전에 누렸던 바이런은 1824년에 사망했지만 사망후에도 10년동안 대중의 주목을 받았다. 바이런은 “ 피투성이 가슴의 역사적 장관이라고 부른 것에 몰입했고, 노골적인 고백을 선호하는 성향이 있었으며 지나친 수사를 구사했다는 점에서 차분한 문학 취향에 호소력을 갖지 못하였다.

2.3 퍼시 셸리

퍼시 셸리는 급진적인 정치적 견해와 과시적으로 주장한 무신론때문에 혐오스러운 인물로 간주되었다. 칼라일은 셸리에 대해 “참으로 불한당이었소. 교수형에 처했어야 마땅한 인물이었소”라고 말했다.

사적인 오명과 시적 재능을 구별할수 있었던 통찰력이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셸리의 명성은 꾸준히 높아졌다.

2.4 급진적 노동자의 환호

바이런과 셸리 두 사람을 우상처럼 숭배한 집단이 있었다. 급진적인 노동자는 미학적이라기 보다 이념적인 바탕에 두고 두 사람을 숭배했다.

바이런의 돈 주앙과 심판의 비전, 셸리의 ‘매브 여왕’은 불만을 품은 노동자들 사이에서 진설한 성서로 여겨졌고, 두 시인의 정조는 1820년대에서 1840년대 대중적 급진주의를 불 붙이는데 기여했다.

2.5 존 키츠

존 키츠는 1829년에 사망했는데 낭만주의자들 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았으나 명성을 누리지 못했다. 그는 자기의 시집 여러권이 유력한 비평지에서 받은 신랄한 논평에 극심한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그의 헌신적인 벗들은 그를 추모하기 위해 노력했고, 그의 시를 선전했으며 그 결과 대중들에게 이름을 알리는데 어느정도 성공하였다.

3.낭만주의 시대, 소설가

역사 소설과 월터 스콧은 막대한 양이 판매된 웨이블리 소설을 통해 빅토리아 시대 사람들의 기사도 시대에 대한 이상화와, 벤저민 디즈데일리의 영국 청년당 프로그램의 이면에 존재하는 영감으로 작용했다.

당대의 인물들과 사건들을 다소 사실적으로 다룬 작가군에 속하는 제인 오스틴은 점잖은 시골로 집안의 노처녀 1817년에 사망했는데 윈체스터 성당에 있는 그녀의 기념비에는 그녀가 소설을 썼다는 사실조차 기록되지 않았다.

생활고에 시달리며 삶에 지친 비평가이자 수필가인 윌리엄 해즐릿에게도 1830년 죽음이 찾아왔다. ‘엘리아 에세이’로 상당한 명성을 얻었고 빅토리아 시대 사람들이 그의 친근한 기억을 과장된 감상적 찬사로 장식해줄 찰스 램은 해즐릿의 뒤를 이어 2년 후에 죽음을 맞았다.

이처럼 많은 작가들의 죽음이 낭만주의 시대와 빅토리아 시대를 갈라놓았다.

4.토머스 칼라일

시분야에서 낭만주의 시인들의 소실을 견디게 해줄 시인은 1837년까지 등장하지 않았다. 빅토리아 시대를 대표하는 테니슨과 브라우닝 각각 1842년, 1850년대 중반이 되어서야 확고한 비평적 인정을 받게 되었다.

1830년대 최고 수준의 문학적 성과가 부족했지만 낭만주의적 충동은 그 간극을 넘어 지속되면서 개성적이기도 하고 변화하는 문화를 반영하기도 하는 새로운 표현 방식으로 옮겨갔다. 키츠와 같은 해에 태어난 카라일은 낭만주의 정신의 불꽃을 계속 타오르게 했다.

의상철학에서 더 없이 강렬하고 효과적으로 표현된 그의 초월주의는 그 못지 않게 추론적 지성보다 직관적 감정의 우월성을 부각시킨 그의 낭만주의적 주장과 마찬가지로 낭만주의 사상을 이어가는데 공헌했다.

5.존 러스킨, 윌리엄 터너

존 러스킨은 1843년 ‘현대 화가들’ 1권을 출판하면서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었고 자신의 사회 비평의 근간으로서 낭만주의 미학 원칙 몇가지를 채택했다. (이 책은 당시 비평가로부터 혹평을 받은 윌리엄 터너의 그림(전함 테메레이르호)을 옹호하기 위해 러스킨이 쓴 책이다)

6.낭만적 감정 토로

빅토리아 시대 초기의 사회 전반에서 낭만적 감정 토로는 수많은 방식으로 드러났다. 정치가 설교가 찬송가 작가들의 수사적 표현에서, 선동가의 웅변에서, 인기 배우들의 연기 방식에서, 일부화가들의 영웅적 주제에서 그러한 감정주의가 드러났다.

제프리 경은 찰스 디킨스의 돔비의 아들을 읽고 “ 아 친애해 마지 않는 디킨스 어젯밤에 그리고 또 오늘 아침에 나는 그 장면을 읽으면서 몹시 흐느껴 울었고, 이 눈물로 내 마음이 정화되었다고 느꼈소”라고 썼다.

하지만 애절한 감정에 탐닉하는 반면에, 그런 감정에 대한 불가피한 반발로서 남성다움의 이상이 생겨났고 그 이상에 따라서 고통을 숨기고 슬픔을 억눌러야 했다. 과묵함은 빅토리아 시대 윤리의 한 부분이었다.

빅토리아 시대 초기의 사람들은 낭만주의자들의 후예였다. 하지만 그 영향을 과장하는 것은 옳지 않다. 전반적으로 보아 낭만주의 경향은 하강 추세였다. 그 경향이 과장된 것은 경이로운 결실을 맺었기 때문이다.

7.이성시대의 지적 전망

이성시대의 지적 전망은 여전히 우세했다. 선도적인 지식인 계간지들은 예전의 합리주의적 정설에 집착했다. 초기 합리주의자들은 제레미 벤담의 지지를 받아 새로운 권위를 얻었다. 빅토리아 시대 가장 위대한 철학로 존 스튜어트 밀은 계몽주의적 합리주의자였다.

정숙한 체하기 점잖음에서 비롯된 취향과 금기들은 주로 해서 안되는 것들로 구성된 십계명으로서 앤 여왕 이후 시대의 방종한 담화와 행위에 대한 반발이 커지면서 19세기 직전에 만들어졌다.

예를 들어 훗날 터무니 없는 까다로움을 상징하게 되었던 토머스보들러 박사의 셰익스피어 희곡 무단 삭제본은 빅토리아가 태어나기 1년전 1818년에 출판되었다.

8.매너 개혁

‘매너 개혁’을 위한 운동은 조지 왕조 시대가 빅토리아 시대로 넘어가면서 더욱 절실히 요구되었다. 섭정시대는 실성한 부친 조지3세의 말년에 섭정으로 활약하다가 1820년부터 1830년까지 조지 4세로 군림한 웨일스 공의 비만한 풍채와 방종한 습관으로 요약되는 시대였다.

8.1

이 시기는 낭비를 일삼는 귀족들과 그들을 모방한 평민의 대표자들이 왕정복고를 연상시키는 도덕적 분위기에서 18세기 우아한 상류생활을 재현해보려고 노력했다는 점이 기억할 만하다.

이 시대 생활의 특징은 비싸고 화려한 의상, 반짝이는 살롱이나 도박장, 권투 시합장, 최신식의 매음굴, 새벽녘에 결투하러 나가기 전의 양복쟁이와 이발사, 시종들이 연달아 만나면서 몸치장을 하는 준비의식이었다.

8.2

빅토리아 시대 첫 10년은 번지르한 여명에 잠겨 있었다. 칼라일은 의상철학에서 파괴적인 물질주의에 빠져 있는 사회를 멋쟁이의 몸이이라고 비유했다. 그것은 현란한 왕보에 감싸인 도덕적으로 파산한 영혼으로서 그 옷은 넝마조각이나 다름없어서 그 아래의 부패를 가리지 못했다.

부패상은 디킨스의 소설에서 다양한 인물을 통해 묘사됐다. 돔비와 아들속 스큐턴 부인은 한껏 화장을 하고 코르셋을 착용함으로써 섭정시대의 황홀한 매혹을 계속 유지하는 유물이었다. ‘황폐한 집’에서는 파파노인 터비드 롭씨가 한번도 누려보지 못한 상류층의 지위를 꿈꾸며 멋쟁이 의상과 매너를 계속 흉내냈다.

8.4

1830년대 섭정시대의 오만한 사치는 새로운 산업화로 초래된 불결하고 비참한 상황과 나란히 존재했다. 젊은 소설가 디즈레일리는 ‘무녀’에서 여왕의 나라는 실은 두 나리이고 서로 다른 혹성에 살고 있듯이 서로의 습관과 사고, 감정에 대해서 무지하다. 그것은 바로 부자와 빈자이다”라고 썼다.

둘 사이의 간극은 해마다 넓어졌고, 그 간극을 좁힐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 당대의 큰 난제였다.

9.수정궁 임팩트

1851년 제1차 세계 박람회라는 중요한 사건이 일어났고 그 사건은 모든 국가 산업 제작품 대박람회라고 불렸지만 그 당시와 이후에도 수정궁이라고 흔히 알려졌다.

런던의 하이드 파크에 철과 유리로 세워진 방대한 건축물로서 역사상 처음으로 조립식 공공건물에 안치된 그 박람회는 디자인과 제조업에서의 영국의 우월성을 선전하기 위한 것이었다. 디자인은 형편없었지만 제조업에서 더 없이 독창적인 발명의 재주를 보여주었다.

수정궁의 축전은 빅토리아 시대의 절정기, 평형의 시대가 도래할 것을 예고했다. 그 시대는 15년 20년에 지나지 않는 기간이었지만 빅토리아 시대를 연상하게 한다.

10.초 호황 시대

1850년대 1860년대 영국이 과거에 그 비슷한 풍요도 누려본 적이 없을 정도로 호황을 누린 시절이었다. 대영제국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지상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였고, 최고 은행 선적회사여쏙, 제품 공급자였으며 해군을 통해 산선들의 항로에서 평화를 유지했다.

국민총소득, 실질 소득이 증가했고 수적으로 확대된 중산층은 과거 그 어느때보다 더 안락하게 살았고, 새로운 풍요의 흐름이 적어도 소량이나마 노동계층의 일부에까지 흘러들어갔기에 노동 계층도 수정궁의 방대한 유리 지붕아래 매혹적으로 전시된 제품들 중에서 소박한 물건을 간혹 살 수 있었다.

관련 링크:뇌가 젊어지는 독서급관, 귀독서(좋은 습관 연구소, 우병현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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