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은 우주에 대한 인간의 이해를 크게 바꾸어 놓았습니다. 무엇보다 그의 연구와 정치적 입장덕분에 모순적이게도 원자폭탄이 만들어질 수 있었습니다. 그의 평화주의는 실천적이었고, 역사는 그가 정치적 삶을 살 수 밖에 없도록 만들었습니다.
1896년 아인슈타인은 독일 시민권을 포기하고 취리히에 있는 스위스 연방 폴리테크닉 학교에 등록했습니다. 그은 취리히 폴리테크닉에서 재학 중 눈부신 재능을 보였습니다. 허나 그의 반항적인 성향때문에 교수들의 추천을 받지못해 교수가 될수 없었습니다. 그는 스위스 특허청에서 일했는데, 오히려 좋은 기회가 되었습니다. 그는 빠르게 업무를 처리하고 나머지 시간에는 연구에 몰두했습니다. “기적의 해”라고 불리는 1905년에 그는 유명한 방정식 E=mc2와 특수 상대성 이론을 소개하는 4개의 혁신적인 기사를 출판했습니다. 이러한 발견으로 아인슈타인은 물리학 의 무대에 당당히 진출합니다. 1915년 발표한 일반상대성이론에서 1919년 5월 개기 일식을 예언합니다. 영국 천문학자 아서 에딩턴은 서아프리카 해안에서 일식을 촬영했고, 이제 아인슈타인을 세계적 인물이 됩니다.
그 후 아인슈타인은 어쩔 수 없이 정치적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공인으로서, 그는 점점 더 정치적이 될수밖에 없었습니다. 시오니즘 의 대의를 옹호하고, 군국주의와 재무장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냈습니다. 이것은 그의 고국인 독일에서 그를 인기 없는 인물로 만들었습니다. 1933년 히틀러가 집권하기 직전 아인슈타인은 베를린을 떠나 미국에 자리를 잡습니다. 그런데 평화주의와 좌익적 성향을 지지하는 아인슈타인은 후버의 FBI로부터 의심을 받게되어, 22년 간 감시당합니다. FBI는 전화 통화를 듣고 우편물을 열어 그의 쓰레기를 샅샅이 뒤져 그를 소련 스파이로 밝혀냈습니다. 1955년 아인슈타인이 사망할 때까지 그의 FBI 파일은 무려 1,800페이지에 달했습니다.
1930년대 후반, 아인슈타인은 독일 과학자들이 원자폭탄을 만들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파멸의 무기가 나치의 손에 쥐어질 수 있다는 두려움에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원자폭탄 연구를 제안합니다. 아인슈타인은 맨해튼 프로젝트에 직접 참여한 적은 없지만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폭 투하를 일으킨 자신의 역할에 대해 나중에 깊은 후회를 표명했습니다. “독일인들이 원자폭탄을 만드는 데 성공하지 못할 것을 알았다면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을 것입니다.”라고 그는 뉴스위크에 말했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핵 군축, 무기 실험 통제, 통일된 세계 정부를 열렬히 옹호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1955년 그가 죽기 직전, 아인슈타인은 이스라엘의 대통령이 되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종교적이지는 않았지만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유대인 혈통과 깊은 유대감을 느꼈고 반유대주의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냈습니다. 그는 확고한 시온주의자는 아니었지만 1952년에 이스라엘 정부는 그를 국가의 두 번째 대통령으로 임명하겠다고 제안했습니다. 73세의 아인슈타인은 이스라엘 대사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는 평생 동안 객관적인 문제를 다루어 왔다”면서 “따라서 나는 사람들을 적절하게 대하고 공무를 수행하는 데 타고난 소질과 경험이 부족하다”고 말합니다.
1950년에 그는 자신의 통일장 이론을 발표했지만 실패작이라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중력, 아원자 현상, 전자기학에 대한 통일된 설명은 오늘날에도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창의적인 사람 중 한 명인 알버트 아인슈타인은 1955년 프린스턴에서 사망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