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가 시작되지만, 미국은 해밀턴이 제안한 은행을 감독하고 최후의 대부자 역할을 하는 중앙은행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미국경제는 성장하고 은행도 늘었습니다. 1896년에서 1906년 십년동안 평균적으로 5퍼센트 성장했습니다. 자연스럽게 은행의 수도 폭발적으로 증가합니다. 1907년 미국에는 인구 4천명당 1개, 2만 2천개의 은행이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도시에서는 지역 은행이나 국영 대부업체를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옵션 말고도 대도시의 투자자들이 선호하는 다른 곳, 즉 신탁 회사가 있었습니다. 1890년대 초 등장한신탁회사는 채권과 주식 투자를 하다가,  결국 예금을 받기까지 합니다. 신탁 회사는 요컨대 다양한 역할을 포함하는 은행이 되었습니다. 일반 은행과 비교했을 때 그들은 더 위험한 자산에 투자했지만, 규제의 사각지대에 있었습니다. 은행은 자산의 25%를 현금으로 보유해야 하는 반면 신탁회사는 최소 5% 의무만 있었습니다.  은행보다 더 높은 이자를 지불하면서, 1907년까지 10년 동안 거의 250% 성장하여 거의 국립 은행만큼 커졌습니다.

이 은행같지만 규제없는 신탁 회사는 1907년 금융위기에 중심에 있습니다. 주범중의 주범이 니커보커신탁입니다. 구리광산업자인 아우구스투스 에인세와 얼음제조업자인 찰스 모스가 동업하여 만든 신탁회사입니다. 니커보커 신탁의 예금은 1897년 1000만 달러에서 1907년 6000만 달러 이상으로 급증합니다. 미국에서 세 번째로 큰 신탁이 되었습니다. 

니커보커 신탁은 더 크게 사업을 키우기 위해 구리회사인 유나이티드 코퍼 주식을 대량 매집했다가 주가가 폭락하는 바람에 큰 손실은 봅니다. 구리회사의 주식으로 시장을 독점하기 위해 그들의 은행에서 막대한 금액을 빌리고 횡령합니다. 그런데 경제는 1907년에 약간 둔화되기 시작하여 금속을 포함한 원자재 가격이 하락합니다. 구리의 가격도 구리회사의 주가도 하락합니다. 주식 가격이 하락하면서 하인즈와 모스는는 막대한 레버리지로 인해 큰 손실을 입게됩니다.  

이로 인해 대출에도 문제가 발생하고, 결국 니커보거는 큰 손실을 촉발했습니다. 이에 투자자들은 자금회수를 요구하여, 뱅크런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됩니다. 은행의 자금상황에 대해 소문이 퍼지자, 예금자들은 현금을 요구하며 거리에 줄을 섰습니다. 이는 차례차레 다른 신탁회사들 까지 옮겨갑니다. 임박한 붕괴를 감지한 주에서는 일단 비상 휴일을 선언했습니다. 일종의 금융 전염병에 휘말렸다는 소식이 나오자, 예금자들은 현금을 요구하며 거리에 줄을 섰습니다. 니커보거는 하루가 지나기도 전에 800만 달러를 지불했지만 불가항력이었습니다. 결국 일부 요구 사항을 거부해야 했고 다른 신탁으로 불이 옮겨졌습니다. 신탁회사인 아메메리카, 링컨 트러스 등도  뱅크런이 시작됩니다. 일부 뉴요커들은 한 신탁에서 다른 신탁으로 현금을 옮겼습니다. 금융 시스템이 안전하지 않다는 것이 분명해지자 미국인들은 집에 현금을 비축하기 시작했습니다.

주가가 폭락하자 뉴욕증권래소는 유나이티드 코퍼의 거래를 중지시켰다. 유나이티드 코퍼에 몰빵 투자한 니커보커신탁에는 투자자들이 몰려 들어 투자자금을 회수했고, 이 신탁회사는 이틀만에 파산위기에 몰렸습니다.

공황이 확산되고 금리가 125%까지 치솟자, 1907년 10월 JP 모건이 구제자로 등장합니다. 모건은 우선 현금을 마련합니다. 현금을 2,500만 달러의 구제 자금이 합의될 때까지 전체 뉴욕 은행 커뮤니티를 자신의 도서관에 가두었습니다. 붕괴는 막았지만 그 정도 현금으로는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견고한 경제에도 불구하고 전국적으로 자금 부족을 초래했고, 경제도 침체되었습니다. 모건은 ‘한계를 정해놓고 대응해야 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합니다. 신탁회사 사장들은 회사를 살리기 위해 모건 본사로 몰려들었지만, 실사를 통해 살릴 수 있는 기업과 문을 닫아야 할 기업을 구분합니다. 그 기준에 따라 현금결제를 요구하는 어음에 대해 지급보증합니다. 그가 구제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단지 구제자금을 모을 수 있는 재력만이 아니라 그가 가진 권위 혹은 믿음 때문입니다. 물론 그는 사업가이기 때문에 공짜는 없습니다. 모건이 지배하고 있는 US스틸은 일종의 전리품으로 테네시 석탄·철강·철도 회사(TC&I)를 인수합니다.

모건이 주도한 거시적인 구제안도 있지만, 보통사람들은 특정경제상황에 맞우어 만들어내는 해결책이 늘 있습니다. 부족한 법정화폐의 대안이 곧 등장합니다. 곧 달러지폐의 대체품으로  은행의 수표와 소액 차용증이 현장에서 법정화페처럼 사용됩니다. 이 민간 부문 긴급 현금의 총 가치는 모건 구제 금융보다 훨씬 큰 약 5억 달러였습니다. 그것은 일종의 편법이었지만, 1909년까지 미국 경제는 다시 성장했습니다.

문제는 현금부족이었기때문에 처음 구제안은 공식 긴급자금 5억 달러를 공급하는 것이었습니다.  이후 뿐만 미국의 화폐가 작동하는 방식을 논의할 위원회(국가 통화 위원회)를 설립하기로 했습니다. 4년 동안 시스템을 재구성하는 최선의 방법에 대한 전 세계의 증거를 조사했습니다. 최후의 수단으로 적절한 대출 기관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 결과 1913년 12월에 미국의 세 번째 중앙은행을 설립한 연방준비법이 제정되었습니다. 해밀턴은 결국 뒤늦게 길을 찾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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