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과 비슷한 초코릿제품은 1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 군인들을 위한 초콜릿 배급에서 시작되었습니다.미군도 그 뒤를 따랐고, 전쟁이 끝난 후 돌아온 군인들은 초콜릿이나 캔디바로 불리는 단것들을 전파합니다. 1920년대 내내 이런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수천 명의 소규모 지역 제과업체가 등장합니다. 냉장과 운송 문제는 전국적인 유통의 장벽으로 남아 있었기 때문에 지역 브랜드가 각 시장을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밀턴 허쉬(1857년~1945년)는 1893년 시카고 만국박람회에 전시된 독일인 리먼의 초콜릿 제조기계를 보고, 초콜릿 사업에 뛰어들었습니다. 캐러맬 사업을 하던 허쉬는 캐러멜에 초콜릿 코팅을 할 수 있는 기계를 구매합니다. 허쉬는 덴버의 가게에서 일하며 신선한 우유와 바닐라와 설탕으로 캐러맬은 만드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그렇지만 밀크 초코릿을 만드는 것은 캐러맬과 달랐습니다. 그는 실패를 계속 했습니다.  핵심은 초코릿에 액체인 우유를 넣어야 하는데, 초콜릿은 고체여야합니다. 마침내 탈지우유를 설탕과 잘 섞어 엿처럼 만들수 있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밀크 초코릿이 ‘허쉬 코코아’입니다.

제조의 난제를 풀어냈지만, 그래도 그의 진정한 경쟁력은 대량생산의 성공입니다. 대량생산의 경쟁력은 무엇보다 가격에서 나옵니다. 당시 원가에서 제일 비싼 것은 카카오였고, 허쉬는 우유와 설탕의 비중을 높여 가격을 낮추어습니다. 뿐만 아니라 안정적인 재료 확보, 전국 적 유통망을 만들어냅니다. 1899년에 허쉬는 초콜릿 대량 생산을 위한 최초의 공정을 개발했습니다. 이듬해 그는 유럽의 쓴 초콜릿 맛을 선호하지 않는 미국인의 입맛에 맞춘 밀크 초콜릿 캔디바를 선보였습니다. 

이후 1900년대에 출시된 ‘허쉬초콜릿’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밀크초콜릿은 그 풍미와 질감, 달콤함까지 기존의 초콜릿과는 비교불가였습니다. 무엇보다 보통사람이 살 수 있는 가격이었습니다. 허쉬는 이 과자에 “Great American Chocolate Bar”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이제 초코릿은 부자들만 즐길 수 있는 사치품이 아니라, 대중들이일상적으로 즐길 수 있는 제품이 되었습니다. 마치 포드자동차 처럼, 식품산업에서도 진정한 미국적 생산방식을 만들어냈습니다.

그런데 곧 닥친 대공황은 초콜릿 골드러시를 늦추었습니다. 빠른 에너지와 저렴한 칼로리가 필요했던 시대에, 캔디바가 패스트푸드가 되었습니다. 독립적인 지역 제과업체도 사업을 접거나, 더 큰 제조업체에 인수되었습니다. 그래도 허쉬만은 살아남을 수있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 발발하면서 식량난은 더욱 심화되었습니다. 군대는 대형제조사에게 초콜릿 배급을 의뢰하여 지역 캔디바 붐을 종식시켰습니다. 군대는 칼로리뿐만 아니라 각성도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1937년 미 육군은 허쉬에 바형태의 초코릿” 을 주문합니다. 요구사항은 “4온스의 무게, 높은 에너지, 고온에 녹지않아야 하며, 삶은 감자보다 맛이 조금 더 좋아야”한다.  

허쉬는 귀리 가루 등을 조합하여 초콜릿 바를 마치 벽돌처럼 만들었습니다. 고온에 견딜 수 있게 만들어졌기 때문에 초코릿바는 매우 단단했고, 칼로 조각내어야 먹을 수 있다고 합니다. 제 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무렵, 허쉬는 30억 개 이상의 배급 바를 제조했습니다. 2차대전 중 유럽과 아시아에 주둔한 미국PX에서 허쉬바를 팔았습니다. 허쉬 초코릿은도 세계적 인 브랜드로 성장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제조, 운송 및 냉장 기술이 발전합니다. 이제 지역에 있는 제과업체는 더욱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대기업은 중소기업을 사들여 전국 배급망을 제공하게 됩니다. 오늘날 미국에 남아있는 “빅 쓰리” 초콜릿브랜드는 허쉬, M&M을 만드는 마즈, 네슬레가 시장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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