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킨리 대통령이 암살된후 시어도어 루즈벨트(1858-1919)가 42세의 나이로 대통령으로 취임한다. 미국의 26대 대통령 시어도어는 개혁적이며 제국주의적이었다. 그가 무엇을 할지 모르기 때문에, 당시 대기업들과 금융가는 긴장했다. JP 모건(1837-1913)이 당연히 첫번째 타격이 된다.윌가를 대표하는 JP모건은 기업의 트러스트를 만들고 있었고, 대통령 시어도어는 기업의 독점화에 반대했다. 시어도어는 1901년에 모건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석탄 및 철도 거대기업 그룹인 노던 시큐러티(Northern Securities)를 기소했고, 1904년 연방대법원은 해체를 명령했다. 연이어 미국 산업을 독과점하던 43개 독점 기업을 제소했다.
그런 시어도어도 파나마운하 때문에 JP모건이 필요했다. 대서양과 태평양을 연결하기 위해 파나마 지협을 가로지르는 운하를 만드는 꿈은 적어도 150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렇지만, 그 누구도 산악과 열대 지역을 가로지르는 운하를 실제로 만들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1800년대 내내 미국은 경제적, 군사적 이유로 대서양과 태평양을 연결하는 운하를 원했다. 마침내 그 기회가 프랑스로 부터 왔다. 프랑스는 운하건설을 시도한 최초의 국가였다. 이집트의 수에즈 운하 건설자인 드 레셉스가 이끄는 건설 팀은 1880년 해수면 운하를 건설하는 기공식을 가졌다.
그러나, 프랑스의 기념비적인 도전은 실패한다. 끊임없는 열대비는 계속 산사태를 일으켰다. 무엇보다 수천명의 건설노동자들이 황열병과 말라리아로 죽어나가고 있었다. 그렇지만 열대의 전염병을 퇴치할 효과적인 수단은 없었다. 드 레셉스는 해수면 운하가 너무 어렵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는다. 갑문 운하를 위한 노력을 다시 시작했지만 때를 놓쳤다. 에펠탑을 만든 에펠도 참여해서 만든 운하건설을 회사는 1889년에 그만 파산한다. 당시 프랑스는 운하사업에 2억 6천만 달러 이상을 투자했고, 7천만 입방야드 이상의 흙을 굴착했다. 운하 벤처의 붕괴는 프랑스에서 큰 스캔들을 일으켰다. 그이후 에펠은 사업을 그만두고 과학 연구에 전념했다.
프랑스의 경험에서 예상되는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시어도어 대통령은 파나마운하를 개발하고 싶었다. 그는 한때 해군차관보였고, 역사에 미치는 해상력의 영향에 대한 책을 쓰기도 했다. 시어도어 대통령은 바다에서 패권을 가지려면, 상업뿐만 아니라 군사적 역량도 필수적이라 굳게 믿었다. 따라서 대서양과 태평양을 잇는, 미국이 통제하는 운하를 절대로 포기할 수 없었다.
시어도어 대통령의 추진에 따라, 미국은 1902년에 운하 지역의 프랑스 자산을 4천만 달러에 매입했다. 운하건설을 위해서는 땅을 대여받아야 하는데, 콜롬비아가 거절한다. 그러자 미국은 군사적으로 개입하여, 1903년 11월 독립된 파나마 공화국을 인정한다. 그리고 파나마와 조약을 체결하여, 미국의 파나마 운하 지역의 독점적이고 영구적인 소유권을 보장받는다. 그 대가로 파나마는 1000만 달러와 25만 달러의 연금을 받았다.
하나님조차도 만약 자금을 조달한다면 JP모건에게 의뢰할 수 밖에 없었다. 대통령 시어도어의 노력으로, 1902년 미국 의회가 드디어 프랑스 회사의 자산매입를 승인했다.이제 JP 모건의 시간이 왔다. 우선 운하건설을 시작하기 위해서 착수금이 당장 필요했다. 미국은 프랑스 자산을 매입하기 위해 4천만 달러가, 독립시킨 파나마의 영토를 사용하는 댓가로 천만 달러가 필요했다. 서로 다른 통화를 가진 국제적 돈거래는 말하자면 통화스왑을 해야했다. 이를 집행할 수 있는 사람은 국제 금융거래 네트워크안에서 다양한 거래를 하던 JP 모건밖에 없었다. 시어도어대통령은 그를 특별지급대리인으로임명한다.1904년에 J P 모건은 각 국가에 돈을 지불했고, 그 지불이 완결된 후 미국 재정부가 모건 앞으로 수표를 발행했다.
우여곡절 끝에 파나마 운하는 1904년 5월 건설을 시작하여, 1914년 8월에 완성된다. 건설 중이었던 1906년 11월 시어도어 대통령은 17일간의 파나마와 푸에르토리코 등 남미 순방을 시작한다. 그는 먼로주의를 넘어 미국 본토 밖에서 공식 외교 순방을 한 최초의 대통령이 되었다. 운하 프로젝트가 실패할 것처럼 보이던 바로 그 순간, 재해와 질병 등으로 차질을 겪고 있는 파나마 운하의 진행 상황을 점검했다. 그는 더 나은 근무 조건을 또한 보장했다. 건설 현장을 방문한 시어도어 대통령은 직접 중장비를 조종하는 사진을 찍어, 그의 운하에 대한 진심을 미국에 보여주었다.
20세기 초 파나마 운하의 건설은 미국의 제국화 과정을 집약적으로 보여준 사건이다. 파나마 운하는 미국이 가진 기술력의 우위와 생산력의 규모를 전세계에 보여주었다. 독보적인 공학적 성취인 동시에 라틴아메리카를 미국의 영향권에 두는 제국건설의 시작이었다. 파나마 운하로 미국은 아메리카 대륙의 가장 중요한 경제적ㆍ전략적 교차로에 제국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오늘날 파나마는역외금융의 중심지이다. 파나마 프로젝트에 자금을 투자한 JP모건이 아직도 그 역사뒤에 있다. 파나마가 역외금융 중심지로 발돋움하게 된 건 1927년 미국의 석유회사 스탠더드 오일이 세금을 회피하기 위해서 시작되었다. 세계가 대공황으로 고통받고 있을 때, 파나마는 또 다른 변신을 시도한다. 월스트리트의 도움과 안내를 받아 특히 선적 등록과 관련하여, 미로 같은 면세 법인 설립했다. 미국 은행들은 점차 파나마를 금융 중심지이자, 탈세 및 돈세탁의 안식처이자, 선적 통로로 바꾸는 데 앞장섰다.
JP 모건은 유럽에서 자본을 조달하고, 파산한 철도를 재편하고, 위기 상황에서 시장을 안정시키고, 지금은 당연하게 여기는 많은 기업 및 재무 구조의 스탠다드를 만들었다. 시어도어 루즈벨트는 정치적 영리함과 포괄적인 비전을 결합해 제국주의를 향한 미국을 건설했다. 그 이후 30년 동안 시어도어 루즈벨트가 “세계 경찰력의 행사”라고 불렀던 이름으로, 미국은 카리브해 유역에서 30번 이상의 군사 개입을 감행한다. 시어도어 루즈벨트와 JP모건은 새로운 국가 파나마를 수립하는 과정에서 직접적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 둘 사이는 비록 애증의 관계였지만, 그래도 그 둘은 목표지향적 파트너였다.
1915년 샌프란시스코에서 개최된 「파나마-태평양 국제박람회」의 공식 포스터는 한해 전 개통된 파나마 운하를 영웅 헤라클레스를 빚대어 표현했다. 이 포스터는 이 시대의 진짜 영웅은 미국이라고 말한다. 불가능 해보였던 인류의 숙원 사업을 완성시킨 것이 바로 미국의 힘, 미국의 기술이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