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년 4월 15일, 28세의 재키 로빈슨은 브루클린 다저스 유니폼을 입고 메이저리그 무대에 등장합니다. 메이저 리그의 첫 아프리카계 미국인 선수가 되었습니다. 그날 2만 7천명의 관중석에는 흑인 관중이 1만 4천명에 달했습니다. 50년 후인 1997년 4월 15일,그를 기념하는 행사가 뉴욕 스타디움에서 열립니다. 로빈슨의 등번호 42는 오직 로빈스만을 위한 것이라 선언합니다.
로빈슨은 물론 뛰어난 운동선수입니다. 재키는 UCLA 재학 중에서 야구, 농구, 미식축구, 육상의 4개 스포츠에서 선수로 초청 받았습니다. 베를린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획득한 그의 형의 멀리뛰기 기록도 경신합니다. UCLA미식축구 팀에서도 패스, 돌진 및 득점 부문에서 선두였습니다. 그럼에도 로빈슨은 재정적인 어려움으로 UCLA를 중퇴해야했고, 1942년에 군에 입대하여 중위로 임관했습니다. 그는 군 복무 중 인종 차별 사례에 항의한 후 1944년에 군법회의에 회부되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명예 제대했습니다.
프로야구에서도 올해의 신인상, MVP 및 6회 올스타 자격을 보유했습니다. 그는 관중을 끌어모아, 열광케 하고, 흑인도 갈 수 있는 길을 보여주었습니다. 로빈슨은 50년 이상 인종 차별을 받아온 스포츠에서 인종 장벽을 허물었습니다. 그의 재능과 성공에도 불구하고 로빈슨은 야구팬과 동료 선수들로부터 엄청난 인종 차별에 시달렸습니다. 동료선수들은 로빈슨을 팀에서 제외시켜 달라는 청원도 했습니다. 로빈슨이 남부에서 경기하는 동안, 팀 동료와 동일한 호텔과 레스토랑을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인종차별의 사례는 헤아릴수 조차 없이 많습니다. 그의 진정한 힘은 그 모욕적인 인종차별에 직면하여, 굳건한 인내로 대항했다는 것입니다.
로빈슨의 인내는 그를 메이저리크에 스카웃한 브랜치 리키 다저스 단장과의 약속입니다. 그를 발탁하면서 다저스 단장은 “인종적 모욕을 참을 수 있느냐”고 질문합니다.일상적인 조롱과 위협에서 광범위한 제도적 불평등에 이르는 뿌리 깊은 인종차별을 이야기합니다. 특히 가경기장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욕적인 사례를 이야기하고 어떻게 대항해야하는지 말해줍니다. 단장은 “부당한 대접도 감수하겠다”는 다짐도 받냈습다.
평생 인종차별을 겪은 로빈슨은 단장에게 침착함을 유지하겠다고 약속합니다. 브랜치 리키는 인종차별을 반대하는 운동가는 아닙니다. 다만 그는 뛰어난 운동 능력을 지닌 흑인 선수들을 뛰지 못하는 하는 불합리한 통념에 의문을 제기했을 뿐입니다. 그가 야구에 몰고 온 혁신은 ‘재키 로빈슨’ 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리그가 시작되자 로빈슨에게 곧바로 공격이 가해집니다. 잔인한 인종 차별적 조롱은 그나마 괜찮은 것이었고, 그는 데뷔후 고의적인 투구에 여러차례 투구에 맞았습니다. 배팅 헬멧이 도입되기 전, 로빈스는 모자안쪽에 금속판을 덧대어 대응합니다. 선수들은 그를 쫓아내기 위한 청원도 합니다. 미국 대중은 로빈슨에게 팬 메일, 증오 메일, 사인 및 출연 요청, 살해 위협을 쏟아부었습니다. 그의 안전은 결코 보장되지 않았습니다.
널리 알려진 공인으로서 로빈슨은 다양한 영역에 휘둘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의제를 발전시키기 위해 흑인 커뮤니티에서 그의 상징적인 지위를 활용하기를 열망했습니다. 리차드 닉슨 등 정치인, 마틴 루터킹 등 시민 운동가, 다양한 사업가들과 함께 활동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진정한 의미는 재능있는 흑인 젊은이에게 기획의 문을 열어주었다는 것입니다. 흑인계 미국인들은 그의 성공과 그것이 상징하는 기회에 열광했습니다. 다양한 운동분야에서이제 재능있는 운동선수들이 발탁할 수 있는 문을 열어주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