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카 와일드는 퀸즈베리 후작과 명예훼손 소송에서 패소한 후 체포됩니다. 오스카 와일드는 1891년부터 후작의 아들과 연인이었고, 후작이 그를 동성애자라고 비난하자 명예훼손으로 고소했습니다. 그러나 동성애를 뒷받침하는 증거가 제출되어 패소합니다. 동성애는 당시 영국에서 범죄로 여겨졌습니다. 와일드는 체포되어 유죄 판결을 받고 2년 노동교화형을 선고받습니다.
아일랜드에서 태어나 교육을 받은 와일드는 영국 옥스포드에 입학하여 1878년에 우등으로 졸업했습니다. 재치와 현란한 스타일, 예술을 위한 예술을 주장하여 주목을 받았습니다. 와일드는 결혼하여 두 자녀를 낳았고 1888년에 동화 행복한 왕자를 썼습니다. 1890년 그의 유일한 소설인 <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이 연재되어 이듬해 책으로 나왔습니다. 그는 1891년에 그의 첫 희곡인 파도바 공작부인을 썼고 체포되기 전에 5편을 더 썼습니다.
와일드는 1897년에 감옥에서 풀려나 바로 파리로 도망가듯 정착합니다. 그는 감옥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의 수인번호 ‘C. 3. 3.’로 <레딩 감옥의 노래>를 발표합니다. 생의 쾌락을 찬미하던 오스카 와일드는 냉혹한 감옥에서 얻은 깨달음과 따뜻한 연민을 이야기하여 공감을 불러일으킵니다. 1900년 급성 뇌수막염으로 사망합니다.
사후 거의 백 년이 지난 1998년 런던 트라팔가 광장에 ‘오스카 와일드와의 대화’라는 제명의 동상이 세워집니다. 이제 동성애자들이 추앙하는 예술가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