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스베이거스는 1846년 멕시코/미국전쟁의 결과로 미국영토가 되었다. 라스베이거스의 시작은 교통요지라는 지리적 위치 때문이었다. 1904년 골드필드에서 금광이, 앨리에서 은광이, 토노파에서 은광과 동광이 발견되면서 채굴과 수송에 많은 사람이 필요하게 되었다. 마침내 1905년 LA와 솔트레이크를 연결하는 철도가 개통되면서, 라스베이거스는 중간기착지가 되었다.
1931년 네바다주가 도박을 합법화 하면서 라스베이거스는 변화의 문을 열었다. 이 무렵 후버 댐 건설이 시작되었고, 수천 명의 노동자들이 월급날 도박을 즐기기 위해 라스베이거스까지 약 25마일의 여행을 주저하지않았다. 그러나 2주마다 유입되는 노동자들이 라스베이거스를 도박의 메카로 만들기에 충분하지 않았다.
1930년대 라스베이거스를 만든 전직 경찰
1938년 로스앤젤레스 시장이 불법 도박을 단속하면서, LA의 카지노 인력이 라스베이거스로 근거지를 옮긴다. 대표적인 인물이 LA 경찰 가이 맥아피(Guy McAfee)이다. 그는 도박과 매춘 조직을 운영한 혐의로 기소를 피해 캘리포니아를 탈출했다. 그는 1941년 91번 고속도로 앞에 최초의 호텔/카지노를 개장했고, 그의 카지노 모델은 크게 성공했다. 얼핏 보면 휴가를 즐기며 도박을 할 수 있는 리조트이자, 영화 <벅시>가 묘사한 마피아의 폭력과 돈세탁, 도박과 환락의 장이었다. 뿐만 아니라 맥아피는 세금를 회피할 수 있는 기발한 방법을 만들어 전파했다. 초기 라스베이거스의 모델을 만든 인물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1950년대 마피아가 만든 라스베이거스
마침내 갱단이 라스베이거스에 모여들게 된다. 라스베가스는 마피아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했다. 그들은 다른 도시와 달리 라스베이거스에서 도박으로 합법적인 돈을 벌 수 있었다. 1970년대까지 네바다는 합법적인 카지노 도박이 있는 유일한 주였다.
1950년대에 라스베이거스에서 프랭크 시나트라, 딘 마틴 등 유명인들이 공연을 하면서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게 된다. 클럽과 리조트는 또한 가장 화려한 쇼걸 공연을 하기 위해 경쟁했다. 누드에 가까운 의상을 입은 쇼걸들이 우뚝 솟은 머리 장식을 하고 동시에 화려한 춤을 추었다.
유명 인사와 쇼걸 뿐만은 아니었다. 마피아는 관광객을 카지노로 끌어들이는 방법으로 핵 실험 을 이용하기도 했다. 라스베이거스는 네바다 시험장에서 약 65마일 떨어진 곳에 위치했다. 이른 아침 원자폭탄이 터지기 전날 밤, 리조트에서는 새벽에 눈에 띄는 핵폭발이 있을 때까지 파티를 열었다. 축하 행사에는 특별한 “아토믹 칵테일” 또는 “미스 아토믹 에너지” 미인 대회가 열리기도 했다.
기업의 시대에 변신중인 라스베가스
1960년대 중반과 70년대에 라스베이거스 리조트의 소유권이 바뀌기 시작했다. 하워드 휴즈는 1967년 데저트 인(Desert Inn)과 그 밖에 많은 부동산을 구입했다. 네바다주에서도 기업 게임법을 통과시켜 기업이 카지노를 운영할 수 있도록 했다. 이로 인해 마피아가 아니라 정상적인 기업들이 라스베이거스 리조트를 매입하고 운영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1978년부터 애틀랜틱 시티가 첫 카지노를 열면서 라스베가스는 네바다 이외의 지역에서 도박 경쟁에 직면하기 시작했다. 카지노 도박이 미국의 더 많은 지역에서 합법화됨에 따라 기업 리조트는 보다 많은 사람이 다양하게 즐길 수 있는 오락과 서비스를 제공하기 시작했다.
1931년 도박이 합법화된 라스베이거스에서 카지노 자본은 끊임없이 변신 중이다.라스베이거스의 상징이던 카지노 자본은 복합리조트로 거듭나고 있다. 라스베이거스는 더이상 세계 최대의 도박도시가 아니다. 그들은 ‘갬블링’(도박)이란 단어도 ‘게이밍’으로 순화했다. 2022년 그룹 방탄소년단(BTS)도 라스베이거스 도시자체와 콘서트를 연계하는 거대 프로젝트를 진행한바 있다. 라스베이거스가 꿈꾸고 있는 라스베이거스의 미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