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자베스 2세는 누구보다 오래 버텼고, 시대의 변화에 적응했다.
엘리자베스 2세는 격동의 시대를 보냈다. 그녀는 1952년부터 2022년까지 영국과 영연방(53개의 주권 국가)의 수장이었다. 그녀는 그 어느 영국 군주보다 더 오래 통치한 여왕이고, 윈스턴 처칠에서 보리스 존슨까지 14명의 총리와 함께 했다. 그녀가 왕위에 올랐을 때, 영국 군주제의 미래는 예측할 수 없었다. 여왕은 군주제의 필요를 새롭게 정립하면서, 세계, 국가, 가족에 마주한 위기와 변화를 견뎌냈다.
엘리자베스가 즉위할 당시 윈스턴 처칠 , 요제프 스탈린 ,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등 강력한 정치지도자들이 세계를 이끌고 있었다. 70년 동안 왕좌를 지키면서 엘리자베스는 그들보다 오래 버텼고, 20세기 역사의 상징이 되었다. 2002년 50주년이 되는 해, 그녀는 “변화는 피할 수 없다. 그 변화를 받아들이는 방식에 따라 우리의 미래를 정해진다”고 말한다.
대중 미디어 시대, 여왕과 대중의 경계를 허물다.
1953년 6월 2일, 웨스트민터에서 엘리자베스 2세의 대관식이 진행되었다. 엘리자베스는 TV로 생중계되는 것을 처음엔 거부했지만, ‘클로즈업이 없는’조건으로 받아들였다. 약 2천 5백만명의 영국인들이 TV를 시청했고, TV가 대중매체로 자리잡게 된다. 대관식이후 언론에 대한 여왕의 태도는 달라졌다. 대관식이후 여왕은 TV 시청자가 되었고, 1960년 버킹엄 궁전에만 50개의 TV세트가 있었다. 1969년에는 왕실을 인간적으로 표현한 다큐멘터리가 제작됩니다. 왕실의 일상을 보여주기 위한 아이디어였다.
대중매체를 통해 왕실을 홍보하는 방법은 1981년 7월 29일, 찰스와 다이애나의 이른바 ‘세기의 결혼식’에서 절정을 이룬다. 결혼식을 보기 위해 60만명이 넘는 인파가 몰렸다. 50개국에 생중계로 결혼식이 중계돼 8억명에 달하는 사람이 이를 지켜봤다. 인터넷 시대가 되자 홍보전문가를 채용하여 스마트 폰과 소셜 미디어를 위한 대중적 이미지를 만든다.대중매체와 가까워진 왕실은 대중의 관심을 얻었지만, 타블로이드와 파파라치에 시달릴 수 밖에 없었다.
영연방을 만들어 제국의 체면을 유지하다.
대영제국의 전성기에는 4명 중 1명이 영국인이었다. 엘리자베스가 즉위했을때 영국은 해외에 70개 이상의 영토를 차지했다. 그렇지만 그녀가 물려받은 것은 위기에 처한 제국이다. 이미 대영제국은 몰락했고, 그 어려운 상황에서 엘리자베스는 영연방으로 재편하기 위해 노력한다. 여왕은 왕위에 오르기 전인, 1947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케이프타운에서 평생 영연방을 위해 헌신하겠다고 발표했다. 1952년 즉위 후 각국을 방문하며 연방의 유지를 위해 노력해 왔다. 그녀는 1953년에 “영연방은 우정, 충성, 자유와 평화에 대한 열망 위에 세워진 완전히 새로운 개념입니다. 국가와 인종의 평등한 동반자 관계라는 새로운 개념에 나는 내 삶의 날마다 마음과 영혼을 바칠 것입니다.”고 맹세했다.
그녀는 영연방의 상징이자 그 자체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강력한 구심력을 행사해 왔다. 영연방은 영국과 영국의 식민지였던 독립국 56개국으로 구성된 느슨한 형태의 연합체로, 영국 국왕이 국가 수장을 맡는 나라는 영국을 포함해 15개국에 달한다. 엘리자베스 2세가 서거하면서 과거 영국의 식민지배를 받은 국가들의 연합체인 영연방은 다시 위기를 맞고 있다.
엘리자베스 2세 이후?
영연방은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서거로 거대한 전환의 시기에 마주했다. 식민국 클럽에 불과하다는 비판을 받고 있는 영연방은 이제 위태롭다. 여왕이라는 구심점이 사라진 후, 영연방을 떠나는 나라들이 나타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여왕의 서거로 지금의 군주제가 끝을 향할 수도 있다. 영국 왕실 권위를 축소해 북유럽 왕실처럼 바꾸자는 여론이 등장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