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7월9일 정오 북측은 김일성이 82세의 나이로 심장마비로 사망했음을 발표합니다. 1994년은 다사다난한 역사적 순간이었습니다. 북한의 핵무기 개발에 대한 의혹으로 시작된 한반도 핵 위기가 절정에 치달았습니다. 1994년 6월15일 판문점을 넘어 북한을 방문한 카터 전 대통령은 메신저역할을 합니다. 김일성 주석과의 회담에서 미국 정부가 유엔에서 추진하고 있는 대북 제재를 중단한다면 북한도 핵개발을 동결하겠다는 제의를 받았습니다.
카터-김일성 합의는 빌 클린턴 당시 행정부도 받아들였습니다. 미국은 ‘김일성의 죽음’이라는 돌발 악재에도 불구하고, 공식 ‘조문 성명’을 발표하고 북-미 고위급회담 대표단의 조문을 승인했습니다. 이후 미 회담을 거쳐 ‘1차 북핵위기’를 봉인할 ‘제네바 기본합의로 가는 길을 열었습니다. 반면에 김영삼 대통령과의 남북정상회담을 보름여 앞둔 ‘김일성의 죽음’으로 남북관계의 한동안 공백기가 시작됩니다. 조문논쟁이 벌어지면서 정치와 외교가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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