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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에 수채화를 담다

정원정 조선비즈 인턴기자 mycitystory.korea@gmail.com

인왕산의 출발점이자 북악산의 끝자락에 이어지는 성곽을 따라 걷다 보면 ‘윤동주 시인의 언덕’을 만날 수 있다. 작고 수수한 언덕은 그의 시에 대한 순수한 열정을 닮았다.

서울 도심 속 이렇게 자연경관이 멋들어진 곳이 있을까 싶을 만큼 아름다운 이 곳은 사진 찍기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쉽게 지나칠 수 없는 장소다.

자연의 선물로 가득한 시인의 언덕을 110% 즐기기 위해 사진 촬영하기 좋은 장소 베스트 3곳을 소개한다.

① 문학관에서 언덕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만난 ‘북악산’

윤동주 문학관에서 올라오는 계단을 따라 언덕의 초입에 들어서면 북악산과 이어지는 서울의 모습에 시선을 빼앗긴다. 청와대와 종로, 광화문, 그리고 남산까지. 흐린 날은 안개낀 채로 아름답고, 맑은 날은 반짝이는 햇빛에 눈부신 풍경을 마주할 수 있다. 사진 찍는 각도를 조금씩 바꿔가며 촬영하면 각각 다른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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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망향대에서 바라본 아름다운 ‘서울’

향긋한 풀내음을 맡으며 언덕 길을 따라 걸으면 그 끝에 ‘망향대’가 있다. 고향인 북간도 명동촌을 그리워하는 시인의 마음을 담은 곳이다. 망향대에서 북쪽을 바라보며 맞는 바람은 고향에 계신 어머니의 품처럼 포근하다.

작은 계단 두어개를 올라서면 탁 트인 전망과 함께 인왕산과 북악산에 둘러싸인 서울을 내려다 볼 수 있다. 이 곳에서 북쪽을 바라보며 한 컷 찍으면 누구나 멋진 서울 풍경을 담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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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이색적인 사진을 원한다면, ‘성곽 틈 사이’로 바라본 인왕산

여기저기서 아름다운 풍경을 담고도 무언가 아쉬움이 남는다면, 성곽 틈새로 바라 본 울긋불긋한 인왕산을 찍길 권한다. 성곽이 액자가 된 고혹적인 수채화 한 점을 렌즈에 담을 수 있을 것이다. 틈새에 얼기설기 붙은 넝쿨과 나뭇잎이 자연미를 더한다. 잎새에 이는 바람도 절절한 시로 풀어냈던 시인처럼 작은 틈 하나 놓치지 않고 관찰하면서 그와 함께 호흡하는 기분을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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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언덕’ 과거 이야기

유은재 조선비즈 인턴기자 mycitystory.korea@gmail.com

– 서울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서 서울의 역사를 기억하다

– 사라진 청운시민아파트, 그 위에 들어 선 시인의 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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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의 언덕에서 내려다 본 서울시내의 모습

서울은 참으로 변화무쌍한 도시다. 헐어지고 세워지는 콘크리트 더미가 만들어내는 도시의 변화를 통해 역사를 엿보는 것 또한 재미다.

청운동 ‘시인의 언덕’ 역시 세월에 따라 모습을 바꿔왔다. 지금은 시인의 언덕이라 불리며 도심 속 공원을 찾는 시민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지만, 과거를 살펴보면 사연이 많은 언덕이다.

불과 5년 전까지만 해도 시인의 언덕은 ‘청운 시민 아파트’의 자리였고 50여년 전에는 북한 특수부대가 침입하는 등 분위기가 삼엄했었다. 그보다도 더 이전인 조선왕조 500년 동안은 궁이 내려다 보여 일반인들의 왕래가 일부 제한됐었다.

◆ 조선왕조 때 일반인 왕래 제한돼..

시인의 언덕에 올라서면 서울 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가운데 남산타워를 중심으로 왼쪽 눈 끝에는 동대문 두산타워가 걸리고 오른쪽 눈 끝에는 세종로가 걸린다. 백성들이 이곳에 서서 왕궁을 훤히 내려다보는 것을 꺼린 조선시대 왕들의 염려가 그럴법하다.

실제로 500여년전 조선시대 왕들은 왕궁이 훤히 내려다보인 다는 이유로 시인의 언덕에 백성이 함부로 발길을 들일 수 없게 했다. 1503년 연산군은 인왕산에 자리 잡고 있던 사찰과 민가를 모조리 철거했다. 왕궁이 훤히 들여다 보이기 때문이었다. 연산군은 인왕산 입구에 경수조를 설치해 함부로 산에 오르는 것을 금했다.

조선시대 뿐 아니라 현대에 와서도 이 곳은 발걸음이 제한된 곳이었다. 지금으로부터 50여년 전인 1968년 1월 21일, 북한 특수부대 소속 무장공비 김신조 일당이 청와대 근처까지 침입했다. 이들은 시인의 언덕 세검정 자하문에서 발각됐고 총격전이 벌어졌다. 이 사건으로 최규식 종로경찰서장이 순직했고 그의 동상이 자하문 앞에 세워져 있다. 시인의 언덕에 오르면 동상을 통해 그를 만날 볼 수 있다.

2012년, 금기된 공간이던 시인의 언덕이 시민에게 돌아왔다. 단풍 든 가을 산 보다 화려한 색상의 등산복을 입은 이들이 가을 인왕산을 찾고 시인의 언덕에서 쉬어간다. 하지만 여전히 이곳에는 긴장감이 느껴진다. 조선시대 성곽을 따라 내려오면 최규식 서장의 동상이 우두커니 서있고 그 뒤로 보초를 선 어린 군인들이 눈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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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왕산 자락은 조선시대부터 현재까지 성 안을 지키는 요새의 역할을 하고 있다. 조선시대 성곽(좌)과 최규식 서장 동상(우)

◆개발 열풍에 휩싸여 청운시민아파트 건설되기도..

50여년 전 대한민국이 개발 열풍에 휩싸였을 때 시인의 언덕 또한 시대적 흐름을 같이했다.

1968년 12월 ’69 시민아파트 기본건립계획’이 발표됐는데, 실제로 다음해인 1969년에는 서울에만 406개 동, 1만5840가구 분의 시민아파트가 우후죽순처럼 건설됐다. 그야말로 거센 개발 열풍이었다. 이 때 ‘시인의 언덕’이 위치한 인왕산 중턱에는 청운시민아파트가 들어섰다.

이후 청운시민아파트는 2007년 철거돼 공원으로 바뀌었다. 공원이 들어선지도 벌써 5년째인 이곳에서 이제 아파트의 흔적은 찾을 수 없다.

인근 옥인동에서 40년을 거주한 한 부부는 “매일같이 이곳으로 산책을 온다”며 “낡은 청운시민아파트가 산 중턱에 있을 때는 미관 상 보기 좋지 않았는데 공원으로 바뀌어 훨씬 좋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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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윤동주와 함께 걷다

정원정 조선비즈 인턴기자 mycitystory.korea@gmail.com

밤새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더니 어느새 그쳐 주변은 고요했다. 발 아래 빗물을 머금은 흙은 향긋한 풀내음을 냈다. 언덕배기로 오르는 나무 계단은 물에 젖어 고즈넉한 멋이 있었다.

인왕산 자락 청운공원에 위치한 ‘윤동주 시인의 언덕’을 오를 때면 풀벌레 소리, 바람 소리 하나 놓칠까 숨 죽이게 된다. 이 곳에서 거닐고 또 별을 세어 봤을 그의 마음을 느끼고 싶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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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와 청운동의 인연은 그가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학교)에 재학하던 193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학 재학 시절, 그는 학교 후배이자 문우(文友)였던 정병욱과 함께 종로 누상동에 있던 소설가 김송의 집에서 하숙생활을 시작했다.

정병욱의 회고에 의하면 두 사람은 늘 아침 식사 전 산책 삼아 집 뒤편 인왕산을 오르곤 했다. 청년 시절의 윤동주는 매일 아침 인왕산에 올라 시정(詩情)을 다듬었다.

‘새로운 길’부터 ‘별 헤는 밤’, ‘자화상’, ‘쉽게 씌여진 시(詩)’ 등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사랑 받는 그의 대표작들이 이 곳에서 완성됐다.

시인의 언덕에 올라서서 북악산과 인왕산을 바라보고 있으면, 치열하게 고민하며 시상을 다듬고 또 다듬던 청년 윤동주의 모습이 아른거린다.

2009년 조성돼 종로구가 관리하고 있는 ‘시인의 언덕’에는 청년 시인 윤동주와 함께 호흡할 수 있는 다양한 장치가 마련돼있다.

안내 표지판을 따라 올라가면 화려하진 않지만 깨끗하고 수수한 시인의 성정(性情)을 닮은 언덕이 펼쳐진다. 서울 성곽을 따라 걸으면서 인왕산을 한 눈에 담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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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을 품듯 주변을 둘러싼 나무 울타리에서는 시인의 주옥같은 시들을 만날 수 있다. ‘길’, ‘코스모스’, ‘고추밭’, ‘눈’, ‘서시’, ‘자화상’, ‘별헤는 밤’ 등 시인의 대표작들이 새겨져 있다. 울타리를 따라 걸으며 시 한 소절 읊고 아름다운 경치를 한 번 바라보면 그와 함께 걷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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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음을 재촉하다 보면 시인을 기리는 ‘서시비’와 수십년 동안 언덕을 지켜온 적송들을 만날 수 있다. ‘별헤는 음악회’ 등 다채로운 문화행사가 열리는 야외 무대도 있다. ‘서시정’도 눈에 띈다. 시인의 시에서 이름을 딴 서시정은 누구나 쉬어갈 수 있게 만든 작은 정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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궂은 날씨에도 시인의 언덕에는 많은 사람이 찾아 왔다. 단체 관람을 왔다는 김정철씨(55)는 “북악산도 보이고 인왕산도 보인다. 서울에도 이렇게 공기 좋고 풍경이 아름다운 곳이 있는 줄 몰랐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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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윤동주 시인의 언덕’이라고 자랑스레 말하기엔 부족한 면도 있었다. 이 동네에서 50년 넘게 거주한 오민탁씨(61)는 “매일 이 곳에 산책하러 오지만 윤동주 시인의 언덕이라는 것 말곤 잘 모른다”며 “윤동주라는 시인에 대해서는 이름 정도만 알고 있다”고 말했다.

윤동주 시인을 기리기 위해 조성된 언덕이지만 그에 대해 무지한 방문객의 관심을 촉구할만한 요소는 다소 부족했다.

외국인을 위한 영문 안내판이 없다는 것도 아쉬운 부분이다. 러시아에서 여행 온 니콜라이씨(22)는 “인왕산에서 북악산으로 넘어가는 코스에 이 언덕이 위치해 들렀을 뿐이다”며 “윤동주라는 사람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고 말했다.

그의 순결한 정신과 섬세한 서정을 아는 사람만 느낄 수 있단 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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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헤는 우물, 윤동주 문학관을 찾다

유은재 조선비즈 인턴기자 mycitystory.korea@gmail.com

윤동주 시인은 연희전문학교 문과 재학시절 종로구 누상동에 있는 소설가 김송의 집에서 하숙하며 종종 인왕산에 올라 시정을 다듬곤 했다. 그 당시 주옥같은 작품 ‘별헤는 밤’, ‘자화상’, ‘쉽게 씨워진 시(詩)’ 등이 탄생했다. 이런 인연으로 종로구는 청운수도가압장과 물탱크를 개조해 지난 7월 25일 윤동주 문학관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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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왕산 자락에 위치한 윤동주문학관의 야외전경. 청운수도가압장과 물탱크를 개조해 만들었다

윤동주 문학관은 건물에서 부터 시인의 느낌이 난다. 청운동 윤동주 문학관 소개 책자에서는 이 곳을 ‘물살에 압력을 가하는 가압장처럼 영혼의 물길을 정비해주는 영혼의 가압장’ 이라고 표현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중략)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윤동주, <별헤는 밤> 中

윤동주 문학관 자체를 시적으로 표현한 건축가 이소진 아뜰리에 리옹 서울 대표는 “윤동주 문학관’을 계획하면서 가장 신경쓴 부분은 기존건물(청운수도가압장과 물탱크)이 갖고 있던 특징을 최대한 보존하면서 용도를 바꾸는 것이었다”며 “가압장 건물과 자연경관의 소박한 분위기 간의 조화를 가장 많이 고려했다”고 말했다. 그는 “윤동주 시인 역시 소박한 느낌을 가지고 있어 설계하는 내내 시인의 겸손하고 소박한 느낌을 잊지 않게 노력했다”고 덧붙였다.

이 대표가 가압장의 느낌을 그대로 유지하려고 한 이유는 지역주민들이 지난 45년간 가압장에 가지고 있던 기억을 존중해주기 위해서였다. 그는 “가압장의 소박한 이미지, 높은 층, 연계된 물탱크들의 비례, 물자국, 울림, 빛은 억지로 만들 수 없는 건축학적인 가치가 충분히 있다”며 “두 개의 물탱크는 시인의 시 세계와 안타까운 시인의 마지막 순간을 충분히 상징적으로 표현한다”고 말했다.

윤동주 문학관의 진면목은 ‘열린 우물'(제2전시실)을 통해 ‘닫힌 우물'(제3전시실)로 넘어갈 때 제대로 느낄 수 있다.

윤동주 시인의 사진자료와 친필원고를 전시한 ‘시인채’에서 쇠문을 열고 들어가면 압도적인 깊이감의 외딴 공간 ‘열린우물’을 만나볼 수 있다. 이곳에 들어서면 관람객은 하늘이 뻥 뚫린 5미터 깊이의 우물에 덩그러니 던져진다. 이곳은 용도 폐기된 가압장의 물탱크를 개조한 곳이다. 변색된 벽면이 물의 흔적을 느끼게 해준다. 야외인지 실내인지 규정할 수 없는 모호한 공간이다.

이 곳을 지나 도착한 곳은 ‘닫힌 우물’. 닫힌 우물에서 관람객은 시인의 일생과 시를 짧은 영상을 통해 감상할 수 있다. 사다리가 있었을 벽면 위로 작게 뚫린 구멍을 통해 빛이 새어 나온다. 빛은 영상이 시작되면서 암전된다. 거친 벽면 위로 보여지는 영상은 관람객을 윤동주의 시 세계로 빠져들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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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문을 열고 나가면 탱크를 개조한 5미터 깊이의 전시관이 관람객을 압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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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팝니다”..부암동 카페거리

“고생 끝에 낙이 옵니다. 조금 만 더 올라 가세요.”

“여기가 커피프린스 나왔던 곳입니다.”

경복궁 역 3번 출구에서 녹색 버스를 타고 네 정거장을 지나 자하문 터널 입구에서 내리면 뒤편으로 북악산 꼭대기를 향한 가파른 출발 지점이 보인다.

시작부터 경사지다. 60도에 달하는 비탈길은 비가 내린 날이면 금방이라도 미끄러질 것 같아 허리를 앞으로 숙이며 걸어갈 수 밖에 없다.

두 번의 갈림길이 나올 때마다 우측으로 꺾으면 ‘동양방아간’이 나온다. 이제부터 부암동 카페 거리 투어가 시작된다.

산 자락 아래부터 시작하는 이 길은 차를 타고 올라갈 수 있게 잘 정비돼 있어 드라이브 코스로도 손색이 없다. 하지만 진정한 ‘고진감래’의 맛을 보기 위해서는 운동화를 신고 가벼운 차림으로 걸을 것을 추천한다. 산세 경치보다 활력소가 되는 ‘고진감래’벽화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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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메시지를 주는 지도 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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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을 찍으며 드라마 속 추억을 떠올리는 중국 관광객들

드라마 ‘커피프린스 1호점’에서 한성이(이선균役)네 집으로 알려진 ‘산모퉁이카페’는 목인박물관장이 수장고와 작업실로 사용하던 곳이었다. 2007년 드라마 촬영지로 사용하게 되면서 카페 겸 갤러리가 됐다.

카페 2층으로 올라가자 중국에서 관광 온 두 여성이 사진을 찍으며, 5년 전 인기리에 방영된 드라마의 장면들을 떠올리고 있었다.

상하이에서 친구와 자유여행으로 왔다는 천쉬링씨(28)는 “드라마 속 배경이 너무 예뻐서 꼭 와보고 싶었다”고 했다. 한바오메이(28)씨 역시 “이곳에서 전화기를 들고 노래를 부르던 한성이의 모습에 반했었다”며 “여기 오니까 드라마 속 장면들이 생각이 난다”고 말했다.

산모퉁이카페 2층 창가에서는 북악산의 아름다운 경치가 훤히 보인다. 그곳 선반 위에는 전화기 한 대가 놓여있다. 수화기를 들면 드라마 속 한성이 부르는 노랫소리가 흘러나온다. 드라마를 보고 방문한 손님들은 이 또한 재미있다는 반응이다. 부산에서 온 최윤희씨(32)는 “작은 소품에도 드라마를 떠올리게 하는 장치들이 있어 구경거리가 많은 것 같다”고 말했다.

이곳 부암동 일대는 내이름은 김삼순, 찬란한 유산 등 드라마와 영화 촬영지로 유명해지면서 이야기를 녹인 장소들이 새로운 관광 명소로 부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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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의문에 깃든 ‘광해’의 역사

허미연 조선비즈 인턴기자 mycitystory.korea@gmail.com

“천장에 봉황 그림 보이시죠?”

부암동에서 골목길 해설사로 활동 중인 김병애(65)씨는 창의문 입구 천장에 그려진 봉황 그림에 대해 설명했다.

그는 “창의문 바깥 쪽 지형이 지네 형상을 갖고 있어 지금도 그 쪽을 ‘지네골’이라고 부른다”며 “과거에는 지네의 독기(毒氣)가 창의문을 통하는 것이 궁궐과 왕조에 나쁜 기운을 준다고 해서 지네의 천적 격인 닭, 봉황을 그려 넣은 것” 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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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겸재 정선의 그림 ‘창의문’과 창의문 천장에 있는 봉황 그림

이어 김 씨는 영화 광해를 주제로 또 다른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는 “서인 세력이 광해군의 패륜행위와 외교정책에 불만을 품고, 군을 동원해 바로 이곳 창의문을 부수고 창덕궁으로 달려갔다고 한다”며 창의문에 얽힌 역사적 사건을 설명했다.

창의문은 ‘김신조 사건’으로 불리는 1·21사태와도 연관이 있다. 파주 파평산을 시작으로 우이령, 북악산을 넘어 1968년 1월 21일 세검정고개까지 접근한 북한 무장공비 김신조 일당 31명은 바로 ‘창의문’을 통해 청와대에 있는 박정희 대통령을 기습할 계획이었다. 이들은 경찰 검문 중 총격전을 벌이다 29명은 죽고 1명은 북한으로 도주, 현재 목사로 활동 중인 김신조 만이 유일하게 생존했다.

한편, 올해 5월부터 종로구 골목길 해설사로 활동하고 있는 김 씨는 “가을이라 많은 사람들이 성곽길 걷기에 참여한다”며 “사람들을 만나 도심에 있는 우리 역사의 자취들을 알려줄 수 있어 큰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또 그는 “길이 험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코스별로 볼거리도 많고 자연 경관도 좋아서 아이들과 함께 와서 우리 역사를 보다 재미있게 공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 창의문 주변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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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대문과 사소문

사대문(四大門)은 숭례문, 흥인지문, 돈의문, 숙정문

사소문(四小門)은 소의문, 광희문, 혜화문, 창의문

◆ 북악산코스 와룡공원∼숙정문∼촛대바위∼곡장∼청운대∼1·21사태소나무∼백악마루∼창의문

◆ 인왕산코스 창의문∼윤동주 시인의 언덕∼인왕산 정상∼경교장∼돈의문 터∼배재학당∼숭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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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6년 역사, 살아 숨 쉬는 창의문

– 서울 4소문(四小門) 중 유일하게 옛 모습 간직하고 있어

허미연 조선비즈 인턴기자 mycitystory.korea@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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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운동에 위치한 창의문

6일 아침 부슬부슬 내리는 가을비가 창의문 주변의 운치를 더했다. 등산복 차림의 사람들은 창의문을 우산삼아 비를 피하기도 했다. 인왕산 가는 길에 들렸다는 홍진숙(62)씨는 “종종 이 곳을 온다”며 “맑은 공기를 마시며 산길을 걷다 보면 마치 서울을 떠나 교외에 온 것 같다”고 말했다.

창의문은 ‘만남의 장소’ 역할도 하고 있었다. 교복을 입고 학창 시절을 함께 보낸 소녀들은 어느덧 예순을 넘은 나이가 돼 창의문 일대를 함께 걸으며 새로운 추억을 만들고 있었다. 공영자씨와 이애희(65)씨 등 9명은 “친구가 가이드 해 준다고 창의문 앞에서 모이자고 해서 여기서 동창회 모임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여재천(51)씨 일행은 직장 야유회 겸 성곽길을 걸으려고 창의문에 모였다. 그는 “요즘은 예전처럼 힘든 코스를 택하기 보다는 가볍게 걸을 수 있는 코스를 찾는다”며 “가을 바람도 쐬고, 단풍 떨어지는 것도 보면서 하늘 공원 쪽으로 가려고 한다”고 했다.

창의문은 돈의문(서대문)과 숙정문(북대문) 사이에 있어 ‘북소문(北小門)’, 이곳의 계곡 이름을 따 ‘자하문’이라고도 불린다. 서울 4소문(四小門) 중 유일하게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역사적으로도 유서가 깊다. 창의문은 1396년(태조5년) 서울 성곽을 쌓을 때 세워진 사소문 중 하나로 북한과 양주 방면으로 통하는 교통로였다. 하지만 1416년 이곳 통행이 왕조에 불리하다는 풍수지리설이 제기돼 문을 걸어 잠궜다가 이후 1506년(중종1년) 다시 열었다. 1623년 인조반정 때는 능양군(인조)을 비롯한 의군들이 이 문을 부수고 궁 안에 들어가 반정에 성공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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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도 마음도 누워가는 사찰, 현통사

– 창호지 넘어 들리는 폭포소리와 바람소리가 마음을 차분하게

– 자연에 내려놓는 각자의 고민들

– 도심 속 자연이 주는 영감으로 예술가들 자주 찾아

민경인 조선비즈 인턴기자 mycitystory.korea@gmail.com

“제월당 안에서 달을 바라보면 처마에 가려 달이 보이지 않습니다. 달을 보기 위해 고개를 비스듬하게 해야 비로소 달을 볼 수 있어서 月(월)을 눕혀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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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통사의 제원당, 현판의 적힌 月(월)자가 누워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현통사의 위치와 역사를 새겨놓은 비석에는 ‘한강을 굽어보며 수 백리를 연이어 뻗쳐 내리는 삼각산 정기는 이곳의 백사골에 이르렀고 세검정을 싸고 도는 맑은 물줄기를 따라 오르면 넓적한 바위 위에 삼각산 현통사라 새긴 일조문이 울뚝 솟아있다’라고 쓰여 있다. 현통사는 세검정초등학교에서 동쪽으로 500m 정도 떨어져 있어 도보로 10분이면 찾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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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내리는 현통사는 자연의 소리만 들릴 뿐 고요했다. 기자가 예정 시간보다 일찍 도착했지만 사찰의 주지인 부암 스님은 미리 다과를 준비하고 묵주를 돌리고 있었다.

비가 내려 수량이 많아진 폭포 소리와 사찰의 창호지 넘어 들려오는 빗소리가 들뜬 마음을 진정시켜 줬다.

현통사는 고려시대부터 현재 자리를 지켜왔다. 이 사찰은 조선시대까지 ‘장의사’라 불렸다. 이후 한국 전쟁으로 사찰이 소실되고 1958년 이름을 보문사로 변경했다. 1967년 재건 작업이 시작돼 1971년에 이르러 지금의 모습을 갖췄다. 이후 1987년 사찰명을 ‘현통사’로 변경했다.

현통사의 역사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사찰에 남아있는 사료(史料)와 스님들로부터 전해진 내용으로 현통사의 역사를 정리했다. 약 500평 부지에 건물들이 오밀 조밀 모여있는 현통사에는 주지 스님 한 분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주지 스님은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차를 마시며 자연을 즐깁니다”며 “현통사는 근처에 폭포가 있는 서울에서 보기 힘든 사찰입니다”라고 말했다.

사람들은 도심을 떠나 현통사에서 스스로 마음의 위안을 찾거나 희망을 기도하기도 한다. 그는 “매년 대입 수능일이 다가오면 학부모들이 사찰을 많이 찾습니다”라며 “수능 기도를 하는 모습을 보면 ‘여자는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하다’라는 말을 실감하곤 하죠”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이 같은 학부모들의 정성을 보면 스스로 마음이 경건해집니다”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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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지 스님을 만난 현통사의 제월당은 사랑채와 같은 곳이다. 이곳에서 손님과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눈다. 신발을 벗고 제월당 안으로 들어가려는 찰라 독특한 현판이 눈에 들어왔다. 제월당 현판 속 月(월)은 오른쪽으로 누워있다.

현통사 제월당霽月堂의 月자가 옆으로, 누워 있다 계곡 물소리에 쓸린 것인지 물 흐르는 방향으로 올려 붙은 달, 물에 비친 달도 현통사 옆에선 떠내려 갈 듯하다

비 오는 날 숲의 모든 소리는, 물소리 뒤에 숨는다

<조용미, 소리의 거처 中>

이처럼 문 앞부터 재치를 느낄 수 있는 제월당은 산의 경치를 감상하며 ‘힐링’하기 안성맞춤인 공간이다. 그는 “제월당에 앉아서 밖을 바라보면 늘 시 한편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라며 “출가 전 연애편지도 많이 썼는데 상대방이 늘 감동했지요”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는 “이 같은 매력 때문에 화가·서예가·시인들이 현통사를 자주 찾습니다”라며 “도심 속의 자연이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는듯 합니다”고 말했다.

또 주지 스님은 “요즘 젊은 사람들이 고민이 많은 것 같아요”라며 “주로 연애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지인보다 스님인 저에게 고민을 털어놓는 편이 안심된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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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월당 내 ‘금강경 병풍’, 금강경 병풍은 동방대학원대학교 이영철 교수가 금으로 직접 글을 썼다.

때론 자신의 문제를 털어놓지 못하고 전전긍긍하는 사람들이 있다. 고민을 털어놓는 것은 마음의 짐을 내려놓는 것이다.

또 대문을 활짝 열어 놓은 현통사는 차(茶)를 마시며 마음을 정화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주지스님은 “예로부터 술을 즐기는 나라는 망하고 차를 먹는 나라는 흥한다고 했습니다”며 “사찰을 찾은 사람들에게 자연과 차를 통해 삶의 여유와 사색을 즐길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요즘 서울의 대도심에 지친 사람들이 서울 구석 구석을 다니며 자신만의 공간을 찾고 있다. 현통사는 지친 도시민들에게 충분한 치유의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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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을 씻고 결의를 다진곳, 세검정

전효진 조선비즈 인턴기자 mycitystory.korea@gmail.com

-세검정, 인조반정 당시 칼을 씻으며 태평성대를 기원했던 곳

-차일암, 실록 완성한 후 세초연을 벌였던 연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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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초, 흑백의 역사 속에 갇혀 있던 세검정 터는 수묵 담채화에 색을 입히듯 오색 단풍으로 물들었다.

종로구 신영동 168번지에 자리한 팔각 정자 위로 따사로운 가을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다. 이 곳은 백사골 계곡이 북한산 계곡과 만나 홍제천을 이루며 흐르는 중간 지점으로 서울 특별시 기념물 제 4호 ‘세검정’이 있다. 미끄러질 듯 맨질맨질한 바위 위에 세워진 세검정 앞으로는 홍제천의 시원한 물줄기가 흐르며 그 운치를 더했다. 과거부터 맑은 물이 흐르기로 유명한 곳이다.

1960년대 만해도 동네 아낙들은 세검정 터로 나와 토닥토닥 방망이 질을 하며 묵은 빨래를 했다. 물장구 치던 아이들도 몇 번의 자맥질 끝에 꾀죄죄한 몸 때를 벗겼다. 시원한 개울 물 소리와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경은 누구나 얻을 수 있는 자연의 선물이었다.

하지만 현재 정자의 모습은 과거 조선 숙종(1674~1720) 때 처음 지어질 당시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현재 모습은 1941년 종이 공장의 화재로 소실된 이후 겸재 정선의 <세검정도>를 보고 1977년 재복원됐다.

겸재 정선의 그림을 보면 세검정 주변으로 돌 담장이 있다. 또 주변의 굵고 시원스럽게 흐르는 천으로 내려가 발도 담글 수 있는 받침 돌도 있다. 하지만 현재는 그 앞으로 신작로가 생기며 개울로 내려 갈 수 있는 시설물이 없어지고 비탈 진 바위만 있을 뿐이다.

신작로가 들어서면서 과거의 운치는 거의 사라졌다. 인근 주민들 중 “깨끗하고 예쁜 곳이지만 눈에 안 띄어 문화 유산인지 몰랐다”는 의견도 있었다.

과거의 화려함은 각종 사료에서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자연의 경치가 좋았던 과거에 이곳은 문인들이 아름다운 자연 경관을 즐겨보며 머리를 식히고 마음가짐을 새로이 했던 곳이었다.

◆세검정, 인조반정 당시 칼을 씻으며 결의를 다진 곳

최근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가 개봉 한 달 만에 1000만 관객을 돌파하며 흥행 중이다. 이 영화는 왕조 실록과 승정원 일기에서도 사라진 조선 왕조 15일 간의 일을 상상력을 동원해 제작하며 광해군을 재해석했다.

15대 임금 광해군은 재위 기간 동안 국방력을 강화하고 대동법을 실시하는 등 국가 정비에 힘 썼던 왕이었다. 하지만 반대파인 서인 세력을 흡수하지 못했다. 결국 광해군 15년(1623) 서인 세력은 광해군 폐위 문제를 논하고 인조반정을 일으켰다.

구시대를 마감하고 새 시대를 연 서인은 이 곳 정자로 왔다. 흐르는 홍제천 맑은 물에 피 묻은 칼을 씻으며 마음을 새로이 했다. 그들은 이 정자를 세검(洗劍)이라 칭했고 세검정은 새 시대의 영광을 찬미하는 상징이 되기도 했다.

◆차일암, 실록을 완성한 후 세초하던 곳

인왕산을 앞에 두고 북악산을 뒤로하여 경치 좋은 세검정은 ‘차일암’ 위에 세워졌다.

‘차일암’이란 이름은 왕조의 실록을 편찬한 후에 그 원고가 되는 사초를 바위 위에서 차일(천막)을 치고 씻어버린 일에서 유래했다.

실록은 당시 시대 상을 기록한 자료다.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만 볼 수 있을 뿐 국왕도 보지 못했던 실록은 왕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한 사초를 바탕으로 쓰였다.

일단 실록 편찬이 끝나면 글쓴이인 사관의 신변을 보장하고자 사초를 차일암 위에서 흐르는 물에 씻었다. 그 후 편찬에 참여한 사람들의 노고를 달래기 위해 이 곳에서 세초연을 벌였다. 문인들이 즐겨 찾던 세검정 일대는 정기적으로 세초연을 벌이던 연회장이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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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3대 명승, 백석동천을 가다

 

정용창 조선비즈 인턴기자 mycitystory.korea@gmail.com

◆속세를 벗어나는 길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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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부암동의 현통사를 지나면 포장된 길이 사라지고 흙바닥이 답사객을 반긴다. 경사는 그리 심하지 않지만, 본격적으로 숲길이 시작된다는 신호다. 흙길이지만 정비가 잘 돼있어 산책을 즐기는데 불편함은 없다. 길게 자란 나무들이 햇빛을 적당히 가려 줘 더욱 쾌적하다.

나뭇가지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을 즐기며 걷다 보면, 어느덧 길이 조금씩 넓어지며 백석동천(白石洞天)의 ‘백사실 별서(別墅: 오늘날의 별장을 의미) 터’에 도착한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경치 좋은 곳을 발견하면 ‘OO洞天’이라 이름짓고 그 아름다움을 즐겼다. 동천(洞天)이라는 단어에는 ‘하늘과 맞닿은 곳, 신선이 사는 곳’이라는 의미도 있는 만큼 단순히 보기 좋은 것만이 아니라 ‘속세와 떨어진 고즈넉한 아름다움’을 즐길 수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백석동천 역시 서울 안에 있다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청정한 분위기를 간직하고 있다.

과거에도 명승지로 이름난 곳은 사대부들이 별장을 짓고 피세(避世)공간으로 활용했다. 백석동천도 예외는 아니다. 원래 이 곳에도 사대부의 별장이 들어서 있었으나 건물은 모두 유실되고 과거 별장의 흔적만 남아있다. 어떤 이가 세속에서 벗어나 풍류를 즐기려 했는지 지금은 알 수 없다. 그저 ‘오성과 한음’으로 유명한 이항복의 호와 계곡의 지명이 일치한다는 점, 이항복이 어린시절을 근처 평창동에서 보냈다는 점 등을 미루어 이 곳이 이항복의 별장이 아니었을까 짐작하고 있다.

◆옛 사람과 같은 풍경을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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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서울의 별서는 지방과 달리 온전한 살림집의 형태를 띄고 있으며,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정자를 포함하고 있다. 백석동천 역시 정자와 살림집이 분리된 형태를 가졌다. 서울시 동명연혁고에 따르면 1860년대에 600여 평 규모의 별장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사랑채 터와 일부 담장의 흔적, 정자 터 뿐이다.

옛 별장과 자연이 어우러지는 멋진 모습을 볼 수 없다는 점은 아쉽지만, 너무 실망할 필요는 없다. 백석동천은 그 풍광만으로도 명승 제 36호로 지정되어 있을 정도로 아름다운 곳이다.

남아있는 사랑채 터에 올라오면 집 터의 위치는 주변 지형보다 조금 높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남아 있는 기단석 위에 사랑채가 올라가 있었음을 감안한다면, 집 주인은 창을 여는 것만으로 연못을 비롯한 주변 경관을 한 눈에 담을 수 있었을 것이다. 시야 확보를 위해서인지 집 터와 연못 주변에는 나무들이 듬성듬성 심어져 있다. 나무들이 적당한 그늘을 만들고, 탁 트인 시야는 마음까지 시원하게 뚫어주지만, 선선한 가을 날씨에는 조금 춥게 느껴지는 점이 아쉽다. 안채가 함께 들어선 공간이었음을 감안해도 빈 공간이 지나치게 넓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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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집 주인도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집 아래쪽의 연못에 마련된 정자 터로 가면 집에서 보는 것과는 또 다른 경치가 드러난다. 집 터에서 내려다 볼 때에는 적어 보였던 나무들이지만, 연못가에 내려온 산보객을 햇빛으로부터 지켜주기에는 충분하다. 가까이에서 본 연못은 생각했던 것보다 넓었다. 낙엽으로 덮인 부분이 많아 아쉬웠지만, 이 또한 가을에만 즐길 수 있는 풍경이다. 만약 정자에 앉아있는 것도 갑갑하다면, 정자에서 조금 떨어진 곳의 석상(石床 : 돌 평상)을 찾으면 된다. 혼자 앉아 즐기기에는 조금 넓고, 친구 한 명을 불러 바둑을 두거나 술잔을 기울이며 즐기기에 딱 좋다.

◆ 이어지는 길, 탈출은 끝나지 않았다.

별장 터를 벗어나면 계곡을 왼편에 끼고 길이 이어진다. 이 계곡은 서울 시내에서 유일하게 도룡뇽과 맹꽁이가 사는 곳이다. 아쉽게도 날이 추워지고 수량이 적어 도룡뇽을 볼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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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걷다보면 솟대가 등장한다. 지나가는 사람들마다 돌 하나씩 더 올리고 짧게 소원을 빈다. 옛날 마을 어귀에서 장승과 함께 수호신 역할을 담당했지만 어느 새 장승보다도 만나기 힘들어졌다. 솟대 밑둥은 사람들이 쌓은 돌탑에 둘러싸여 있다. 마을의 수호신과 소원을 비는 돌탑은 제법 어울리는 한 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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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에 새겨진 ‘白石洞川’ 이 동천의 시작을 알린다. 사실 현통사를 지나오는 길은 일반적인 답사 코스와는 반대 방향이다. 그러나 백사실 입구 쪽 주택가에는 급경사가 많아 본격적인 경치를 즐기기도 전에 지칠 수 있다.

삼십분 정도 숲길을 따라 걷다 보면 다시 주택가가 나온다. 작은 일탈을 즐기기에는 조금 부족한 듯하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주택가는 산을 끼고 이어지고 있으며, 주변 풍경에 한껏 어울리는 주택과 가게들이 모습을 드러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