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7월, 길거리에서 아베가 총격으로 사망했습니다,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죽음에 아베라는 인물이 궁금해졌습니다. 그렇지만 아베라는 인물을 편견 또는 폄하없이 바라보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그렇게 갈피를 잡지 못하다가, 그도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그 땅에 태어났다는 것을 문득 깨달았습니다. 서로 다른 역사였지만, ‘민족주의적 사명감’은 비슷할 듯 합니다.

아베의 책에는 미일 안보협정이 통과되기 전날인 1960년 6월 18일을 기억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시위대가 의회 건물을 에워싸고, 그의 외할아버지 기시는 총리 관저 안에 갇혔습니다. 철없는 다섯살 어린 아베는 시위대의 구호였던 ‘안보반대’를 따라 외쳤고, 할아버지 기시 앞에서 가족은 난감해합니다. 그만큼 아베는 태어나면서부터 정치현장 그 자체에 노출되었습니다. 아베는 할아버지 기시의 정치적 일상을 자연스럽게 보면서 자랐습니다. 기시 노부스케는 아베에게 지속적으로 의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존재론적인 조건입니다.

정치가란 직업도 세습되는 일본이기에, 아베는 아버지의 비서로 정계에 입문합니다. 1993년 드디어 아베는 그가 존경하는 요시다 쇼인의 고향 조슈변(야마구치현)의 중의원에 당선됩니다. 아베는 “나는 아베 가(家)의 아들이지만, 기시 가문 유전자를 물려받았다”고 말합니다. 아베는 국회에 첫 등원하면서, 기자들에게 둘러싸여 이렇게 말합니다. “제가 국회의원이 된 것은, 일본국 헌법을 개정하기 위해서 입니다. 한시라도 빨리 미국에 의해 강요된 헌법이 아닌 일본의 자주헌법을 제정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할아버지 기시가 물려준 유산입니다. 그 유산이 아베를 만든 정치아젠다이자 동시에 무거운 짐이기도 합니다.

일본정치에서 아베의 특별함은 그가 대중적인 인기를 누렸다는 것입니다. 아베가 스타 반열에 오른 것은 2000년대 초반입니다. 북한에 납치된 일본인을 구출하는 운동에 앞장서면서 대중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아베는 말합니다. ‘ 국민의 생명과 재산, 어린이의 생명을 지킬 수 없는 정치가는 정치가로서의 자격이 없다’고….이제 ‘납치의 아베’는 영웅이 됩니다. 그의 장점은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요령이 있다는 점입니다. 아베는 일반 대중과 대화하는 방법을 본능적으로 터득하고 있었습니다. 아베의 연설은 짧고도 분명한 메시지를 전합니다.

그의 얼굴을 보기 위해 사람들이 몰려듭니다. 미스터 납치, 프린스로 불리는 아베 신조의 인기는 마치 케네디를 향한 것과 유사합니다. 아베의 인기가 올라가자 고이즈미 총리는 그를 전격 발탁합니다. 2006년 9월 아베는 고이즈미 총리의 뒤를 이어 52세 최연소 일본 총리로 등극합니다. 그렇지만, 약 5000만 건에 이르는 대규모 연금납부 기록을 누락 등 잇달아 사건이 터지면서 아베는 궤양성 대장암을 이유로 1년이 안되어 총리직에서 사임합니다.

2012년 글로벌 금융위기와 후쿠시마 재난으로 휘청거리는 상황에서 아베가 다시 등장합니다. 이후 2020년 건강상 이유로 자리에서 물러날 때까지 역대 최장수 일본 총리를 역임합니다. 그는 아베노믹스 를 주장합니다. 당시 미국 연준의장인 버냉키의 조언에 따라 ‘헬리콥터로 돈을 뿌리는’ 과감한 통화정책을 실행합니다. 아베노믹스를 실시한 이후 첫 임기엔 경제가 성장했으나, 점차 경제성장은 둔화해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랜 디플레이션 침체에서 벗어나고 주식 시장을 부양하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그의 상징이 된 ‘아메노믹스’는성공적인 정치브랜드였습니다. 정치가로써 아베는 본능적으로 자기자신을 브랜드화 할 줄 알았습니다.

아베는 일본의 미래를 위해 지정학적 비전과을 제시합니다. 2015년은 한일 수교 50주년이자, 패전 70주년, 중의원 선거를 앞둔 해였습니다. 아베는 양면적으로 느낄 수 밖에 없는 미국이라는 지배적 존재와 마주해, 일본 재무장을 밀어붙입니다. 미국과 패권을 다투는 중국이 등장했기 때문에, 오히려 기회가 만들어졌습니다. 아베는 미일동맹을 넘어 개방된 인도태평양이란 대항마를 만들어냅니다. 미국의 싱크탱크와 함께 만들어낸 전략이지만, 역시 아베는 ‘외교의 아베’ 라는 자기 상표를 보유하게 됩니다. 그 무엇보다 2015년 일본은 집단 자위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됩니다. 자국이 공격받고 있을 때는 물론 이웃 국가가 공격받을 때도 무력으로 개입할 수 있다는 권리를 갖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일본은 해외에 군대를 동원할 수 있습니다. 할아버지 기시의 정치적 목표를 거의 다 이루어냈습니다.

이 모든 업적과 명성에도 불구하고 아베는 부패한 정치인입니다. 아베가 선거에서 승리했음에도 전폭적인 지지를 받을 수는 없었습니다. 모리토모, 가케 학원 스캔들, 사쿠라를 보는 모임, 국유지 매각 관련 공문서 위조, ‘아베노마스크 등 부정부패의 스캔들이 연속됩니다. 무엇보다 아베의 죽음이후, 선거를 둘러싼 정치와 종교의 은밀한 거래가 만천하에 드러납니다.

그것은 1950년대 공산주의에 맞서기 위한 기시 노부스케의 유산이었습니다. 1960년대 문선명 교주와 기시 노부스케가 의기투합하며, 자민당과 통일교가 인연이 시작됩니다. 자민당과 교회의 관계는 공산주의의 위협이 사라진 후에도 중단 없이 이어진 이익공동체였습니다. 기시 같은 우익 정치인들 덕분에 통일교는 일본에 무사히 안착할 수 있었고, 우파 정치인은 선거자금과 선거운동을 후원받았습니다. 문선명은 그의 어록에서 아베가 선거할 때, 13명밖에 안되었던 의석수를 88명까지 키워주었다고 말한바 있습니다.

할아버지 기시는 아베에게 비극의 유산을 물려주었습니다. 아베의 정치적 업적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제 자랑스런 역사로 기억 될 수는 없습니다. 야마가미 데쓰야의 개인적 분노는 일본에 역사적 질문을 던집니다. 민주주의의 기본인 투명한 정치시스템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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