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6 혁명직후 최고회의 경제팀과 경제인 10여명이 한자리에 모여 간담회를 가진적이 있다. 이 모임은 당시경제담당 최고의원이었던 유원식씨가 주선했는데, 박의장도 그 자리에 참석했다. 이 때 최고위원측은 경제인들에게 우리나라 경제발전을 위한 방안을 제시해보라고 했다. 나는 그자리에서 ” 우리나라는 두번이나 혁명을 겪었으니 정치 안정이 없고, 정치 안정이 없으니 경제 안정이 없어 살기가 어렵다. 이제부터라도 보세가공무역으로 고용을 증대시켜 각자가 자기손으로 벌어먹고 살도록 해주는 것이 급하다”고 진언했다. 그 후 다른 장소에서 박의장을 뵌적이 있는데, 그때 박의장은 일전의 내 주장을 다시 한번 설명해 달라고 했다. 나의 말을 다 들은 후에 다음날 최고회의에 와서 자세히 설명해달라고 했다. 이튿날 최고회석상에서 나의 설명이 끝나자 보세가공 무역은 즉석에서 우리나라의 국책으로 채택되었다. 나는 실업인 이었으므로 보세가공 무역이 나의 제안에 의해서 정책으로 채택되었다 해서 내 책임을 다한 것이 아니라 당장 이를 실천에 옮겨야 했었다. “

전택보 진행중인 원본

64년 5월 상공부장관에 임명된 朴장관은 ‘수출만이 살 길’ 이라며 수출증대를 독려하기 위해 전국 주요 수출업체들을 직접 방문하고 나섰다.

朴대통령은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 달러 부족으로 좌초될 위기에 몰리자 달러 확보를 위해 수출관계 장관들을 몰아치기 시작했다.

당시 상공부장관 박충훈씨는 “朴대통령은 수출전선의 총사령관이었고, 나는 그 밑의 참모장격이었다” 고 회고

1969년 6월 정부는 전택보씨소유의 대성목재(자산규모 1백8억원) 조선피혁(자산 13억원) 한국물산(3억원) 삼익선박(6억원) 신진완구(1천5백만원) 등5개회사를 대채권자인 조흥은행에서 전부 인수, 정리처분키로 했다. 6개회사의 1년간 손실이 2억원이나되는 현상태로서는 68년부터시작된 차관의 원리금상환이 곤란하다는점을 들었다. 전택보는 자산규모 18억원의 천우사만을 소유하게  되었다. 이것도 수출제일주의를 소개한 전택보에 대한 박정희의 마지막 배려였다.

1936년 인천 만석동에 “조선목재 공업주식회사”라는 제재소 자리에, 1942년 “대성목재공업주식회사”라는 합판공장을 만든 것이 오늘날의 대형합판공장이 된 것의 효시라고 할 수 있다.

대성목재 공업주식회사는 초창기 소규모의 합판공장으로서 콩풀을 사용해서 합판을 만들다가 60년 일산 10,000매 공장으로 늘리고 61년 천우사 전택보씨가 인수하면서부터 일산 42,000매 규모의 큰 합판공장이 되었고, 65년에는 최초로 필리핀에 주재원을 파견하기도 했다.

당시에는 필리핀에서 주로 원목을 구입하였는데, 오늘날 우리가 상상하기에는 힘들은 직경 1m정도 되는 불그스레한 라왕원목이 한 달에 4배씩이나 인천 앞바다에 들어오곤 하였다.그 때는 내노라 하는 종합상사도 없었고, 서울상대 출신들이 은행보다 천우사라는 무역회사를 더 선호하는 시절이었는데, 천우사에 입사한 엘리트들이 대성목재에 근무하였던 것이다.


필리핀을 필두로 해서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에 주재원을 파견하기 시작하였고 모두 서울 상대 출신들이 주재원으로 나가는 게, 통상화 되다시피 했다. 그 때는 외국에 나가기도 힘들은 시절이었고, 주재원으로 나가는 것이 영광이기도 한 시절이었다. 대성목재는 근로자가 3,500여명이었는데, 대성목재 월급날이면 인천시내가 술렁이고, 술집, 음식점들이 좋아하던 시절이었다. 65~66년 당시 3,500여명 이면, 90년대초 삼익악기, 영창악기 등이 5,000명인 것과는 대조가 안 되는 것이었다.

전택보 회장 대성목재 월미공장 건설
당시 대성목재에 일반공으로 취직하려면, 브로커에게 일만원씩 주고 취직을 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당시 종업원 월급이 삼만원 정도 할 때이니 알만도 하지 않은가. 당시에는 미국이 엄청난 양의 합판을 수입하였는데 필리핀, 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는 원재료는 있으나, 합판공업을 할 만한 수준이 아니었으므로 비교적 원재료 국가와 거리가 가까운 일본, 한국, 대만 등에 합판공업을 육성시켜, 합판을 만들게 하고, 자기들은 그 합판을 수입해 갔던 것이다.

합판공업이 육성될려면, 그 주위공업도 같이 발달되어야만 한다, 예를 들면, 수지공업, 샌드페이퍼공업, 나이프공업 등등, 당시 일본은 합판기계공업도 함께 육성되어, 우리나라 합판공장의 기계들은 거의 일본에서 수입되었다. 66년에는 일본은 올림픽을 개최하였고, 당시 동경에는 지하철이 동서남북으로 빽빽히 있었던 시절이었다. 합판산업이 한창 잘 될 무렵인 66년~68년 무렵인 것 같다. 당시 대성목재는 천우사의 전택보씨가 운영하고 있었는데, 미국에서 주문량이 폭주하자, 일산42,000매 규모의 만석동 공장으로서는 감당하기가 힘들게 되었고, 이렇게 돈벌이가 잘 되고, 국가산업에도 보탬이 되는 사업이 어디 있느냐고 정부에 건의하여 월미도에 일산 55,000매 규모의 합판공장을 차관을 받아서 건설하게 된다.

건설이 거의 완료되어가는 시점인 69年에 미국은 점차 주문량을 줄이기 시작하였고, 전사장은 차관 이자에 허덕이게 되었다. 정부에서는 장덕진씨(후일 농림부장관)를 팀장으로 하는 부실기업정리팀을 만들어, 대성목재를 조흥은행 관리업체로 만들고, 군부팀인 황필주 사장을 영입하여 운영하게끔 하였다. 그 후로 전택보 회장은 합판산업에서 손을 띄게 된다.

1969년 6월 정부는 전택보씨소유의 대성목재(자산규모 1백8억원) 조선피혁(자산 13억원) 한국물산(3억원) 삼익선박(6억원) 신진완구(1천5백만원) 등5개회사를 대채권자인 조흥은행에서 전부 인수, 정리처분키로 했다. 6개회사의 1년간 손실이 2억원이나되는 현상태로서는 68년부터시작된 차관의 원리금상환이 곤란하다는점을 들었다. 전택보는 자산규모 18억원의 천우사만을 소유하게  되었다. 이것도 수출제일주의를 소개한 전택보에 대한 박정희의 마지막 배려였다. =

함경도 출신인 전택보는 1947년에 무역회사 천우사를 설립하여 경영하였다. 이후 대성목재공업주식회사·조선피혁주식회사를 인수 했다.

전쟁은 파괴를 의미한다. 남한은 무에서 출발했다.

그랬더니 朴장관께서 ‘그거 내가 만든 것 아니야. 허정 (許政) 과도정부 때 상공부장관하던 전택보 (全澤珤.작고) 씨 알지. 천우사 사장 말이야. 그 양반이 제일 먼저 사용했어. 들어보니까 좋은 것같아 내가 쓴 거지’ 라고 대답하더군요. ” 이 무렵 朴대통령의 수출에 대한 인식을 보여주는 일화 한토막. 어느 날 朴장관은 朴대통령의 지방순시에 동행했다가 기차안에서 느닷없는 질문을 받았다.

“朴장관, 우리나라 옛말에 사농공상 (士農工商) 이라는 말이 있지 않소. 내가 보기에 우리나라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상공농사’ 가 돼야 할 것같아. 朴장관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 당황한 朴장관은 얼떨결에 “각하, ‘상’ 이 ‘공’ 보다 앞서야 한다구요” 하고 되물으며 잠시 생각을 가다듬은 다음 “제 생각에는 ‘공상농사’ 가 더 맞을 것같은데요” 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朴대통령은 “물건만 만들면 뭣해요. 팔지 못하면 아무리 많이 만들어도 소용없어요. 수출이 제일이야” 라고 설명했다.

전택보(1901~1980) 보세가공무역

1967년은 박정희 정권의 제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 시작되는 해였다.제1차 경제개발계획도 무역정책에 중점을 두었었지만, 제2차 경제계발계획의 무역정책특색도 첫째는 수출 제1주의의 지속, 둘째는 무역자유화 정책의 촉구, 셋째는 수출 진흥정책의 다양화였다.수출 제1주의의 제3공화국정부는 제2차 계획초년도인 1967년의 수출목표를 3억6천만달러로 책정하였다.
그런데 그해 천우사(사장 전택보)는 1513만 달러의 수출실적을 올려 65년, 66년에 이어 67년에도 또다시 훈장을 탔다. 3년 연속 훈장을 타게 된 설봉은 <천우사 사내보 12월호>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는데 이 글에서 그가 얼마나 보람을 느끼며 흐뭇해하였는지를 엿볼 수 있다.

“금년에도 총 수출액 3억6천만 달러의 정부 목표 중에 합판이 4200만 달러, 피목 및 기타 보세가공품이 3000만 달러, 스웨터가 2500만 달러, 도합 1억 달러에 해당하는 품목이 모두 우리가 개척한 상품들의 수출실적입니다.그 중에서도 자랑스러운 것은 합판수출이었습니다. 처음에는 클레임을 받기도 하는 등 수출에 애로가 많았었으나 차차 품질을 인정받기 시작하면서 수출량이 늘어난 합판수출. 천우사는 대성목재 합판수출 덕분에 1963년 제1회 수출의 날에는 전국 수출업체 중에서 1위를 기록할 수 있었고, 64년 2위를 제외하고는 65년, 66년, 67년 연달아 수출실적순위에서 1위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의 이러한 감회는 그가 평소 주장했던 보세가공과 자신이 직접 개척한 합판수출이 수출진흥에 큰 역할을 한 것에 대한 자부심이기도 하였다.설봉은 보세가공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설봉이 보세가공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게된 것은 6·25 전란후 수복된 서울에서 수많은 실업자들이 방황하고 있는 것을 본 이후였다.

전쟁으로 생명을 잃은 사람이야 어쩔 수 없다치더라도 살아남은 사람들조차 앞으로 살아갈 길이 막막하게 느껴질 정도로 수복된 수도 서울의 모습은 참담했다.
거리에는 수많은 실업자들이 우글거렸고 전쟁미망인, 고아들은 이리저리 방황하고 있었다. 신문지상에는 연일 생활고로 인한 일가족 집단 자살, 강도, 살인, 사기 등의 사회악 기사가 가득차 있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국민은 극심한 빈곤 때문에 살기가 어려웠고 돈있는 사람들은 그들대로 불안감때문에 하루하루를 떨면서 살아가는 무서운 세상이었다.

세상형편이 이렇게 돌아가는 것을 본 설봉은 우리나라가 잘 살 수 있는 좋은 방법이 없을까 곰곰히 생각하게 됐다. 우리나라는 자원도 없고 변변한 기술도 없다. 약간의 생산시설마져도 6·25전란으로 잿더미 속에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나 아직도 사람은 많다. 그 노동력을 잘만 활용하면 활로가 트일 것이다. 생각이 여기까지에 이르자 설봉은 우리나라가 살길은 보세가공뿐이라고 느끼게 됐다. 지하자원개발이니 수산자원개발이니 개발 대상이 많겠지만 인적자원을 어떻게 개발하느냐가 우선과제이다. 북한 피난민들의 대거 월남, 거기에 인구의 자연증가는 거대한 인적자원을 구성하고 있으나 이 자원을 개방하지 못하고 있다. 이 많은 사람을 잘 활용하면 선진 제국과 경쟁해 이길 수 있다. 공장을 세워놓고도 노동자가 없어서 쩔쩔매는 나라의 기업인이 본다면 부러워할만큼 우리에게는 노동력이 풍부하다. 이 노동력을 이용 못한다는 것은 기업인의 역량부족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저렴한 노동력을 이용해 수공업, 가내공업으로 중소기업을 급속히 발전시키는 것이 적은 자본을 가진 우리가 조속한 시일 내에 실업자를 구제하고 국제수지를 개선시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전제하고 나서 그는 일본과 홍콩으로부터 기술을 도입해서 섬유제품, 2차가공품, 부품생산공장의 설치를 해야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그밖에도 크리스마스 장식업, 조화, 가발, 농구화, 메리야스, 양말, 수예품 등 할일이 얼마든지 있다고 역설했다. 우리국민이 공것을 바라지 말고 우리의 힘으로 우리의 경제난을 타개해 보겠다는 굳은 결의를 가지고 노력한다면 수년내에 억대의 외화를 벌것이 틀림없다고 외쳤다.

그리하여 설봉은 그당시 상공부장관, 재무부장관과 논의해 가칭 ‘가공무역추진위원회’라는 단체를 발기시켰다. 이 위원회의 취지는 우리나라에 없는 원료를 외국에서 도입해 이것을 가공해 수출하는 업체를 돕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합판사업/대성목재

대성목재공업은 일제강점기였던 지난 1936년 조선목재로 출발, 1945년 해방과 함께 손병도씨에게 경영권이 넘어갔다가 1955년 천우사를 새 주인으로 맞은 후 1960년대 합판 1억달러 수출을 주도했다.1936년 조선목재공업로 시작해 86년 동안 인천 향토기업으로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대성목재공업이 동화기업에 흡수합병된다.

1936년 인천 만석동에 “조선목재 공업주식회사”라는 제재소 자리에, 1942년 “대성목재공업주식회사”라는 합판공장을 만든 것이 오늘날의 대형합판공장이 된 것의 효시라고 할 수 있다.

대성목재 공업주식회사는 초창기 소규모의 합판공장으로서 콩풀을 사용해서 합판을 만들다가 60년 일산 10,000매 공장으로 늘리고 61년 천우사 전택보씨가 인수하면서부터 일산 42,000매 규모의 큰 합판공장이 되었고, 65년에는 최초로 필리핀에 주재원을 파견하기도 했다.

당시에는 필리핀에서 주로 원목을 구입하였는데, 오늘날 우리가 상상하기에는 힘들은 직경 1m정도 되는 불그스레한 라왕원목이 한 달에 4배씩이나 인천 앞바다에 들어오곤 하였다.그 때는 내노라 하는 종합상사도 없었고, 서울상대 출신들이 은행보다 천우사라는 무역회사를 더 선호하는 시절이었는데, 천우사에 입사한 엘리트들이 대성목재에 근무하였던 것이다.

필리핀을 필두로 해서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에 주재원을 파견하기 시작하였고 모두 서울 상대 출신들이 주재원으로 나가는 게, 통상화 되다시피 했다. 그 때는 외국에 나가기도 힘들은 시절이었고, 주재원으로 나가는 것이 영광이기도 한 시절이었다. 대성목재는 근로자가 3,500여명이었는데, 대성목재 월급날이면 인천시내가 술렁이고, 술집, 음식점들이 좋아하던 시절이었다. 65~66년 당시 3,500여명 이면, 90년대초 삼익악기, 영창악기 등이 5,000명인 것과는 대조가 안 되는 것이었다.

전택보 회장 대성목재 월미공장 건설
당시 대성목재에 일반공으로 취직하려면, 브로커에게 일만원씩 주고 취직을 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당시 종업원 월급이 삼만원 정도 할 때이니 알만도 하지 않은가. 당시에는 미국이 엄청난 양의 합판을 수입하였는데 필리핀, 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는 원재료는 있으나, 합판공업을 할 만한 수준이 아니었으므로 비교적 원재료 국가와 거리가 가까운 일본, 한국, 대만 등에 합판공업을 육성시켜, 합판을 만들게 하고, 자기들은 그 합판을 수입해 갔던 것이다.

합판공업이 육성될려면, 그 주위공업도 같이 발달되어야만 한다, 예를 들면, 수지공업, 샌드페이퍼공업, 나이프공업 등등, 당시 일본은 합판기계공업도 함께 육성되어, 우리나라 합판공장의 기계들은 거의 일본에서 수입되었다. 66년에는 일본은 올림픽을 개최하였고, 당시 동경에는 지하철이 동서남북으로 빽빽히 있었던 시절이었다. 합판산업이 한창 잘 될 무렵인 66년~68년 무렵인 것 같다. 당시 대성목재는 천우사의 전택보씨가 운영하고 있었는데, 미국에서 주문량이 폭주하자, 일산42,000매 규모의 만석동 공장으로서는 감당하기가 힘들게 되었고, 이렇게 돈벌이가 잘 되고, 국가산업에도 보탬이 되는 사업이 어디 있느냐고 정부에 건의하여 월미도에 일산 55,000매 규모의 합판공장을 차관을 받아서 건설하게 된다.

건설이 거의 완료되어가는 시점인 69年에 미국은 점차 주문량을 줄이기 시작하였고, 전사장은 차관 이자에 허덕이게 되었다. 정부에서는 장덕진씨(후일 농림부장관)를 팀장으로 하는 부실기업정리팀을 만들어, 대성목재를 조흥은행 관리업체로 만들고, 군부팀인 황필주 사장을 영입하여 운영하게끔 하였다. 그 후로 전택보 회장은 합판산업에서 손을 띄게 된다.

출처 : 한국목재신문(https://www.woodkorea.co.kr)

고도성장기 부산 합판산업의 성장과 쇠퇴(1960-1980)

합판은 한국에서 6.25전쟁 후의 복구수요를 기반으로 성장하였다. 그리고 1950년대 중·후반에는 유엔군의 군납수요도 합판산업의 성장에 자극을 주었다. 군납을 통해 품질을 인정받은 한국합판은 1961년부터 미국시장에 수출을 하기 시작하였다. 마침 인건비의 상승과 공해우려로 일본이 합판수출에서 철수하는 시기와 맞물리면서 한국의 합판산업은 1960년대 중반 이후 급속한 성장을 하였다. 1970년대에는 세계 5위의 합판생산국에 세계 1위의 합판수출국이 되었다. 합판산업의 중심은 부산이었다. 1960년대 중반부터 부산은 한국 최대의 합판도시가 되었다. 그리고 세계적인 합판도시가 되었다. 합판이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절 부산은 한국산업의 중심도시였다. 한때 한국수출의 29.2%의 수출을 담당하던 도시가 부산이었다. 여기에는 합판이 절대적인 역할을 하였다. 1970년대 부산에는 당시 세계최대의 합판기업이었던 동명목재를 비롯하여 6개의 대규모 수출합판업체들이 있었는데, 이들 기업은 한국합판생산의 절반을 상회하는 생산을 하였다. 그리고 1970년 동명목재의 생산량은 우리나라 전체 합판생산량의 31.2%를 차지하였다.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 중반까지는 이른바 합판의 시대였고, 부산의 시대였고 또 동명의 시대였다. 그러나 우리나라 합판산업의 성장기반은 취약하였다. 원목의 도입이 안정적으로 이루어져야 했고 저임금이 유지되어야 하는 구조였다. 그런 조건 속에서도 실제로 수익을 내기는 어려웠다. 생산가에서 차지하는 원재료의 비중이 너무 높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한계를 넘어서게 한 것은 정부의 각종 지원이었다. 각종 수출지원으로 합판기업들은 흑자를 볼 수 있었고 성장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외화가득률은 낮았다. 1970년대 말까지 합판은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그러나 제1차 석유파동 이후 등장하기 시작한 자원민족주의로 인해 원목의 구입이 어려워지면서 한국 합판산업은 위기에 직면하였다. 합판가격보다 빠르게 오르는 원목가격과 함께 수출길이 막히면서 합판산업은 위기에 빠져들었다. 마침내 1980년 세계 최대의 합판기업 동명목재가 도산을 하였고 잇달아 기업들이 쓰러졌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에 의한 합판산업의 구조조정이 시행되었다. 동명목재에 이어 부산에서는 태창목재, 반도목재, 광명목재, 대명목재가 퇴출되었다. 6개의 합판수출대기업 가운데 성창기업만이 부산에서 살아남았다. 일반적으로 과잉설비의 정리가 지역별로 균등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관례라고 보면 부산기업들의 집중 퇴출은 이례적인 것이었다. 합판산업의 구조조정 이후 우리나라 합판산업의 중심은 부산에서 인천으로 이동하였다.

합병 후 존속회사는 동화기업이고 대성목재공업은 소멸해 ‘대성목재공업’ 간판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됐다.동화기업은 대성목재공업을 흡수합병한다는 내용의 공시를 지난주 실시했다고 12일 밝혔다. 합병 목적은 경영효율성 증대 및 사업 경쟁력 강화를 통한 기업가치, 주주가치 제고다. 합병기일은 2022년 12월1일이다.

동화기업과 대성목재공업의 합병비율은 1대 0이다. 합병법인인 동화기업은 피합병법인인 대성목재공업의 주식을 100% 소유하고 있으며, 합병 시 합병법인은 피합병법인의 주식에 대해 신주를 발행하지 않으므로 합병비율을 1대 0으로 산출했다는 설명이다.

1960년대 중반 이후에는 수출길이 막히면서 수요부족과 설비과잉으로 침체의 늪에 빠져들기 시작해 1968년 조흥은행 주도의 은행관리를 거쳐 1973년 신동아, 1978년 효성그룹으로 사주가 변경된다.

이후 지난 1986년에는 산업합리화 업체로 지정되면서 유원건설과 인연을 맺어 재기의 가능성을 보였으나 1990년대 들어 지급보증을 섰던 모기업이 경영난에 처하면서 1995년에는 경영권이 다시 한보그룹으로 넘어간다. 이후 한보사태가 벌어져 2000년 동화기업이 인수, 창업 이래 사주가 무려 9번 바뀌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한편, 대성목재공업을 흡수합병한 동화기업은 1948년 서울 왕십리에서 제재소를 연 뒤 1960년대 말 인천지역에 36만평 규모 한국제재공업단지를 조성하며 국내 목재산업 발전의 발판을 제공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대성목재공업을 인수하면서 국내 1위 목재기업으로 발돋움했다

또한 그해 <한국일보>에 게재한 ‘나의 이력서’란 글에서는 그 당시를 회고하며 “당시 대미 합판수출량은 일본이 제일 많았고 그 다음이 대만이었다. 그러나 대성목재가 합판수출을 개척한 이래 한국의 합판수출은 점점 늘어나 오늘에 와서는 원목 한 톨도 안나는 한국이 합판수출 세계1위국가로 성장하게 되었다.그 후 대성목재는 수출호조에 힘입어 확장에 확장을 거듭하였고, 합판수출을 처음 했을 때에 비해 시설은 100%가 늘었다. 최근에는 월미도에 있는 매립지 땅 7만여 평을 매입하여 대규모 합판공장을 건설하고 있다”고 말하였다.

이와 같이 당시 천우사의 수출실적은 대단하였는데 여타 수출업체의 실적과 비교해 보면 1964년도 천우사 수출실적 552만 달러는 국내기업으로서는 대한중석에 이어 2위에 해당하는 수출실적이었다. 그러난 대한중석은 국영기업체였던 만큼 사기업체로는 천우사가 1위를 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1965년도에는 수출실적 825만 달러로 국영기업인 대한중석도 제치고 당당 1위에 올라섰고, 그 후 66년, 67년 계속 수출실적1위를 차지하였던 것이다.

합판은 한국에서 6.25전쟁 후의 복구수요를 기반으로 성장하였다. 그리고 1950년대 중·후반에는 유엔군의 군납수요도 합판산업의 성장에 자극을 주었다. 군납을 통해 품질을 인정받은 한국합판은 1961년부터 미국시장에 수출을 하기 시작하였다. 마침 인건비의 상승과 공해우려로 일본이 합판수출에서 철수하는 시기와 맞물리면서 한국의 합판산업은 1960년대 중반 이후 급속한 성장을 하였다. 1970년대에는 세계 5위의 합판생산국에 세계 1위의 합판수출국이 되었다. 합판산업의 중심은 부산이었다. 1960년대 중반부터 부산은 한국 최대의 합판도시가 되었다. 그리고 세계적인 합판도시가 되었다. 합판이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절 부산은 한국산업의 중심도시였다. 한때 한국수출의 29.2%의 수출을 담당하던 도시가 부산이었다. 여기에는 합판이 절대적인 역할을 하였다. 1970년대 부산에는 당시 세계최대의 합판기업이었던 동명목재를 비롯하여 6개의 대규모 수출합판업체들이 있었는데, 이들 기업은 한국합판생산의 절반을 상회하는 생산을 하였다. 그리고 1970년 동명목재의 생산량은 우리나라 전체 합판생산량의 31.2%를 차지하였다.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 중반까지는 이른바 합판의 시대였고, 부산의 시대였고 또 동명의 시대였다. 그러나 우리나라 합판산업의 성장기반은 취약하였다. 원목의 도입이 안정적으로 이루어져야 했고 저임금이 유지되어야 하는 구조였다. 그런 조건 속에서도 실제로 수익을 내기는 어려웠다. 생산가에서 차지하는 원재료의 비중이 너무 높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한계를 넘어서게 한 것은 정부의 각종 지원이었다. 각종 수출지원으로 합판기업들은 흑자를 볼 수 있었고 성장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외화가득률은 낮았다. 1970년대 말까지 합판은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그러나 제1차 석유파동 이후 등장하기 시작한 자원민족주의로 인해 원목의 구입이 어려워지면서 한국 합판산업은 위기에 직면하였다. 합판가격보다 빠르게 오르는 원목가격과 함께 수출길이 막히면서 합판산업은 위기에 빠져들었다. 마침내 1980년 세계 최대의 합판기업 동명목재가 도산을 하였고 잇달아 기업들이 쓰러졌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에 의한 합판산업의 구조조정이 시행되었다. 동명목재에 이어 부산에서는 태창목재, 반도목재, 광명목재, 대명목재가 퇴출되었다. 6개의 합판수출대기업 가운데 성창기업만이 부산에서 살아남았다. 일반적으로 과잉설비의 정리가 지역별로 균등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관례라고 보면 부산기업들의 집중 퇴출은 이례적인 것이었다. 합판산업의 구조조정 이후 우리나라 합판산업의 중심은 부산에서 인천으로 이동하였다.

대성목재공업(주) 전택보(全澤珤) 회장 편 (42)
1964년 사상처음으로 수출 1억 달러를 돌파한 11월30일을 기념하기 위해 그날을 수출의 날로 정한지 3년 째 되는 1966년 11월30일, 그러니까 제3회 수출의 날 기념식에서는 수출 무역에 공로가 많은 43개 업체가 선정돼 시상되었는데 그 가운데 천우사(사장 전택보)는 수출실적이 제일 많아 금탑산업훈장을 받는 영광을 차지하였다.

이해 정부는 총 수출 목표액을 2억5000만 달러로 책정했는데 기업체별 실적을 보면 천우사가 1073만 달러로 선두를 달렸고 그 뒤로 대한중석이 1014만 달러, 그 다음은 동명목재(980만 달러), 성창기업(810만 달러), 영흥상사(645만 달러), 대창기업(573만 달러)의 순위를 이루었다.
이에 대해 <현대경제일보>는 ‘조국 근대화의 수출역군’이란 제목 하에 천우사를 포함한 우수수출 업체에 대한 기사를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지난 1964년 11월30일 이래 주목할 만한 일은 수출이 양적인 면에서 증가현상과 더불어 질적인 면에서 수출 구조가 점차 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1965년 이전만 해도 수출 상품의 구성비율은 공산품 보다는 농산품 위주로 돼 있었으나 1965년 부터 정부에 의한 수출 정책이 크게 효과를 보여 공산품의 수출이 1억달러선으로 상승되었다.

특히 지난 1964년 11월30일 이래 1966년 11월30일까지 3년 동안 수출생산업의 기수로서 줄곧 1위를 달려 그 위치를 한번도 다른 사람에게 뺐기지 않은 천우사의 경우만 봐도 올해의 수출목표액 1300만 달러로 지난 10월 말 현재 1073만 달러의 실적을 올려 단위 수출 상사별로는 수위를 차지하고 있는데… 그 중 합판은 천우사 수출고의 주축을 이루고 있는 품목이며 나머지는 섬유제품을 비롯해 잡화, 완구, 트랜지스터, 라디오 등으로 돼 있다. … 천우사는 일반 가공무역과 보세가공무역이 2대 산맥으로 그 위치를 더욱 높이고 있다.…그런데 천우사의 경우 오늘날과 같은 영광의 자리를 구준히 쌓아온 것은 현재 천우사가 고용하고 있는 5, 6천명의 공원(工員)들이 노력한 결과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사장 전택보 씨의 기업인으로서의 뚜렷한 기업이념이 강력히 뒷바침하고 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바이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전택보 사장은 항상 우리나라는 과잉 인구에 의한 유휴노동력이 많은 대신 이와는 대조적으로 원자재의 부족 내지 고갈상태를 언제나 주장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와같은 여건을 타개하기 위해 자본이 많이 소요되는 대기업보다는 돈을 많이 필요로 하지 않고 유휴노동인구를 보다 많이 흡수할 수 있는 중소기업의 가공무역과 보세가공산업을 육성하면서 가까이는 사업에 종사하는 사람의 생활향상을 도모하고 멀리는 국민경제의 발전에 기여해야 한다고 주의 사람들에게 곧잘 말한다는 사실을 보아도 그의 기업이념이 어떤 목적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쉽게 상상할 수 있다’라고 적어 놓고 있다.

1914년 문천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그 해 말 부모를 따라 북간도(北間島)로 이주, 용정(龍井)에 있는 영신학교(永新學校) 고등과를 1918년에 졸업하고, 이듬해 모교인 영신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1920년 용정중앙교회에서 김정신과 결혼 현재·억재·순재 3남을 두었다.

고학생은 인삼장사란 인삼 엑기스를 파는 장사를 하는 것을 말한다. 인삼 엑기스 제조 공장에서 인삼 엑기스를 도매가격으로 사서 순경이나 공장직공들에게 파는 것이 인삼장사였다. 설봉도 처음에는 인삼장사를 했다.

설봉은 정측영어학교에서 영어실력이 점점 붙어갔다. 남보다 비교적 암기력이 뛰어났던 설봉은 그날 배운 것을 그다지 복습을 하지 않아도 단어를 외울 수가 있었다.
후일 설봉은 영어의 기초를 이곳에서 닦았다고 말하였다

고베 고등상업학교 입학한다. 고베는 일본의 대표적인 국제항구 도시였다. 국제도시에 걸맞게 외국인 거주자들도 상당히 많은 편이었고, 인종 차별도 다른 곳과 비교하면 별로 심하지가 않았다.이듬해 봄(1924년) 설봉은 고베고상에 응시를 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낙방이 되었다. 동경 대지진 난리통에 별다른 준비없이 시험에 응했기 때문이었다. 떨어지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설봉은 그 이듬해(1925년) 다시 시험을 치뤘고 이번에는 합격을 했다그가 고베고상을 졸업할 무렵 심한 불경기여서 조선인이 취직자리를 구하기란 하늘의 별따기였다. 그는 재학 시절 여선교사의 도움으로, 뉴욕내셔널시티은행 고베지점에 겨우 취직할 수 있었다. 그곳에는 미국인 15명과 일본인·중국인 30여명이 있었고 조선인은 전택보 혼자였다.

1929년 간도로 돌아왔다. 아내와는 9년 만에 함께 살게 된 것이었다.전택보는 다시 만주 영신학교 교사로 교편을 잡았다가, 고향으로 돌아와 함경남도 금융조합에서 일했다. 간도 교하현부근의 500정보를 구입, 선만주식회사 라는 대규모 농장을 경영하다가 8·15 광복을 맞이하여, 1945년 10월 단신 월남하였다.

전택보가 만주에서 농장 경영을 시작했을 무렵에도 벼농사는 수익성이 좋았다. 그러나 이때 그는 밤새우기 일쑤인 조선일보사 근무 때 얻은 지병인 심장경련증이 악화되었다. 한번 발작하면 숨이 막혀 죽을 것만 같았다. 그는 서른아홉 살 되던 해 12월 만주 지린(吉林)병원에 입원해 6개월 동안 병상에 누워 있어야 했다. 그가 조금씩 건강을 되찾으면서 농장도 차츰 궤도에 올랐다. 그의 농장이 큰 집단취락으로 되고 보니 자녀교육 문제가 시급한 과제로 떠올랐다. 그래서 전택보는 농장 안에 중국인 학교를 세우는 한편 조선인 교사를 초빙해 조선인 자녀들을 따로 가르치게 했다.

이런 상황에서 설봉은 고베고상 동창인 지우선씨와 사업을 하기로 결심했다. 잣을 가을에 사서 저장해 뒀다가 이듬해 봄에 팔면 이익을 보지 않을까 생각해서, 금융조합을 그만둘 때 받았던 퇴직금을 출자해 잣장사를 시작해 보았다. 그로서는 첫 사업인 셈이다.그러나 이 첫 사업에서 그리 재미를 보지 못했다. 예상한 만큼 잣값도 오르지 않고 품질도 변질되고해서 실패를 하고 말았다. 다음에는 쌀 장사에 손을 대어 보았다.추수기의 쌀값과 다음해 여름철 쌀값의 가격차이를 노린 장사였는데 이 장사에서는 상당한 재미를 보았다. 이제까지 기껏해야 100원 남짓한 월급을 받아왔던 그가 한달에 천여원하는 거금을 손에 쥐게되니 세상이 온통 제것만 같았다.쌀 장사에 재미를 본 설봉은 소장사에도 손을 뻗쳤다. 남만주 지방의 소값은 싼 반면에 용정의 소값은 상당히 비싸다는 것에 착안해서 소장사에 투자했던 것이다.

소장사에 투자를 한 것이 예상한 대로 이득이 많이 남아 돈을 많이 벌었다.그러나 이것은 살아움직이는 생명을 다루는 장사였기 때문에 예상밖의 귀찮은 일들이 많았다. 그래서 좀 더 안정성있는 사업을 하기로 마음먹고 길림성 근처의 교하현으로 이사가서 정미소를 차렸다.이 사업은 시설만 있으면 별로 자금이 없어도 된다는데 착안하여 시작한 사업이었다. 당시 길림성 교하현 근처에는 상당수의 우리나라 농민들이 벼농사를 주로 하며 살고 있었다.

농민들은 추수때 거두어 들인 벼를 마당에 쌓아둔채 저장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이 근처 정미소에 맡겨두었다가 필요한 때에 팔아 쓰고 있었다. 정미할 쌀은 맡겨둔 농민들의 요구에 따라 그때에 시세에 맞춰 결재를 해주면 되었는데, 농민들에게서 위탁받은 쌀을 하얼삔으로 보내어 바꾼 돈을 농민들이 결재를 요구할 때까지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는 이점이 있었다.

정미소를 하면서 설봉은 톡톡히 재미를 보았다. 그리하여 설봉은 이곳에다 아담한 새집을 짓고 부모님과 동생들을 데려다가 같이 지낼수 있게 되었다. 평생동안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자기돈으로 자기집을 지은 것이었다.

정미소 사업이 일단 본 궤도에 오르자 정미소는 동생 택완에게 물려주고 설봉은 북만주 지지하루에 가서 중국인이 경영하던 좁쌀 정미사업을 인수하였다. 지지하루는 겨울이 되면 기온이 영하 40~50도까지 떨어지는 추운지방이었다.집밖에만 나가면 엄청난 추위 때문에 몇 겹의 옷을 입고도 두툼한 털옷으로 또다시 무장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다닐수가 없는 지방이었다.이런곳을 설봉은 바쁘게 돌아다니며 좁쌀장사를 했다. 그 다음으로 손댄 것이 농장건설이었다. 농장건설에 관한 계획은 즉흥적인 발상이 아니었다.

그는 고베고상 시절에 이미 만주 전역의 농업조사 보고서까지 쓴 경험이 있었다.고베고상에서는 매년 성적이 우수한 학생 10여명을 선발하여 만주, 중국 등지로 해외여행을 시켰는데 설봉도 고베고상 시절에 우수학생으로 뽑혀 여순, 대련, 북경, 장춘, 하얼삔 등을 다녀오는 여행을 한 일이 있었다.그때 만주전역의 농업보고서를 쓴 것이 농장건설을 해야되겠다는 생각을 하게했던 것이다.

벼란 것은 원래 남방작물이므로 만주에서는 기껏해야 일본인들이 안동현에서 조금 심고 있었을 뿐 다른데는 벼동사가 전여 없었다. 만주벌판에 벼 농사가 보급되기는 순전히 조선인 이주자들에 의하여 이뤄졌던 것이다.조선 농민들은 벼가 원래 기후와 환경에 비교적 잘 적응하는 작물인 것을 알고 점차 북만주에까지 보급했던 것이다.

당시 일제의 식민정책으로 문전옥답을 억울하게 빼앗기고 고향을 떠나온 우리 농민들은 근 100여만명이나 되었는데 그들의 노력으로 벼 농사가 소련 영내에까지 보급되었다는 사실을 설봉은 그의 학창시절 조사보고서에서 지적해 냈던 것이다.농사도 잘되었고 농민 수입도 괜찮았지만 만주 특유의 기후 탓으로 문제가 있었다. 만주는 겨울이 길고 여름이 짧기 때문에 농민들은 여름에 번 수입을 겨울에 다 없애버렸다. 전택보는 농민들이 농사만 지어 가지고는 재산을 만들기가 어렵다고 판단해 농민들에게 축산을 장려했다. 또한 만주에서는 해산물이 귀했으므로 만주 토문(土門)에다 ‘동만(東滿)상회’라는 회사를 차리고 수산물 판매사업을 시작했다. 만주 생필(生必)주식회사를 통해 주로 명태를 팔았다.

설봉은 신참에서 멀지 않은 육가자(六家子)라는 역에서 약 10리를 들어간 곳에 약 5백정보의 무인지답을 샀다. 이 땅은 예전에 청나라 사람들이 살던 곳으로 만주사변때에 일본군에 의해 점령된 곳이었다.설봉은 여기에다 대단위 농장을 건설하기로 결심하고 일에 착수했다. 당시 만주에는 마적들의 횡포가 심하였으므로 마을을 만들려면 토성이나 석성을 쌓고 망대를 세우는 것이 우선적인 일이었다. 우선 넓이 12척, 높이 12척의 토성을 쌓았다.그리고 농민들에게 집 지을 자금을 대 준다고 하니까 청나라 사람 130호가 들어왔다. 조선 농민들에게는 집 지을 자금 외에 농우까지 마련해주고 약 30호를 입주시켰다.

만주는 겨울이 긴탓으로 가을에 추수한 뒤로는 기나긴 겨울을 술먹고 노름을 하는 것으로 재산을 탕진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를 생각하고 설봉은 농장 농민들에게 축산을 권장했다.

이러는 중 전쟁은 막바지에 접어들고 전세는 일본이 패배할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다. 일본이 패망하면 이제껏 해왔던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기에 설봉은 농장을 정리하고자 했다.

그러나 원매자가 선뜻 나서지 않았다. 겨우 만철에 교섭해 50만원에 팔기로 결정했다. 대금지불기일이 8월8일이었는데 일본의 패전으로 돈을 받아내지 못했다.

정미소와 농장경영에 몰두하며 북만주를 누비고 다니던 설봉은 우연한 기회에 명태장사에도 손을 댔다. 이때가 1941년이었는데 만주에서는 해산물이 매우 귀한 때문이었다. 더욱이 전쟁이 가열되면서 만주에서는 해산물을 찾아볼 수가 없을 정도로 해산물이 귀했다.

당시 만주의 큰 도시에는 지금의 고시가격과 비슷한 제도가 있어서 일정가격 이상 받을 수 없도록 돼있었고 이를 위반할 때에는 처벌을 받도록 돼 있었다.

그런데 번양(藩陽)역에서는 고시가격제도가 없어서 그 곳으로 해산물을 수출해서 팔기도 했다. 그러다가 철도경찰에 끌려가 유치장 신세를 지기도 했다. 번양이 봉천시에 편입된 사실을 모르고 장사를 하다가 고시가격위반으로 붙잡혀갔던 것이다.이런 일이 있은 후 얼마 지나서 북경이나 천진에는 고시가격제도가 없다는 것을 알아내고 북경이나 천진 등으로 수출을 하기로 했다.수출절차가 까다로왔으나 화신과 교섭을 해서 천진출장소 명의로 명태 수출허가를 얻어 수출하는데 성공했다. 14차분의 건명태를 천진에 끌어내리니 굉장한 분량이었다. 모두들 깜짝 놀랐다.

그러자 소문이 사방에 퍼지면서 천진과 북경에 있는 조선인 거간꾼들이 저마다 팔겠다고 나서는 것이었다. 한 쾌를 8원씩 팔아주면 구전으로 거기에서 1원씩 주기로 약속했다.그래서 팔기 시작한 것이 며칠 사이에 전량을 모두 팔아 치울 수가 있었다. 명태 한쾌에 투자된 돈이 운송비까지 합쳐 1원15전이었으니까 구전을 제하고도 엄청난 돈이 들어오게 되었다. 명태장사로 번 돈이 70만원이란 거액이 됐다.

1945년 미군정청 이재과장을 맡았다 그만두고, 1947년에 천우사(天友社)를 설립하여 본격적으로 사업에 투신, 무역업을 개척하였다. 서울로 환도한 뒤 천우사의 무역업만으로는 발전의 한계가 있음을 느끼고 생산업체를 건설할 생각을 굳혔다.그러니까 천우사의 간판이 걸린 것이 1947년 3월 8일이었고, 천우사가 간판을 내걸고 제일 먼저 손을 댄 것이 ‘종이 장사’였다.

1945년 10월8일, 드디어 설봉은 가족을 함흥에 남겨둔 채 남쪽행 기차에 올랐다. 기차는 화물차였는데 사람이 어찌나 많았던지 기차가 38선 근처에 도착하기까지 시종 화물차 지붕 위에 올라 있어야 했다.그 당시만 해도 그리 감시가 심하지 않았기 때문에 38선을 걸어서 넘었다. 서울에 도착해 소복여관(현 도큐호텔 자리)에 숙소를 정했다.

그리고 나서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이 전에 몸담고 있던 조선일보사였다. 그 당시 조선일보사는 극심한 경영난으로 방응모씨는 소유주식의 절반을 이중문이라는 사람에게 125만원에 팔아 그와함께 공동경영을 하고 있었다.설봉은 여관에 들어앉아 앞으로의 할일을 놓고 생각해 보다가 당시 미군정의 경무부장으로 있는 조병욱씨를 찾아갔다. 다른 사람의 취직자리를 부탁하러 찾아갔던 것인데 도리어 그에게 붙잡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즉 설봉은 경무부장 밑에 이재국장이 됐다.미군정 시대라 이재국장은 미국인 한명, 한국인 한명 이렇게 둘을 두고 있었다. 이재국장을 한 6개월 하고 있는데 조병욱 부장이 이번에는 자기와 같이 정치를 하는 것이 어떠냐는 부탁을 하길래 거절하고 이재국장 자리도 뿌리치고 나와버렸다.

그후 1946년 봄에 온가족을 데리고 38선을 넘었다. 그때는 38선을 넘기가 조금 힘들어져 있었다. 서울에 와서는 잠시 효자동에 있는 효자여관에 묵으면서 집을 구하러 다녔다. 그때 마침 청운동에 있는 조그만 기와집을 일금 10만원에 살 수 있었다.청운동 집에서 온가족이 오랜만에 함께 모여 살림을 꾸미고 들어앉으니 마음이 여간 기쁘지 않았다.

이 무렵 우연히 고베고상의 동창생 김인형씨를 만났다. 그는 대한상사라는 무역업을 하고 있었는데 자기는 장사할 줄을 잘 모르니 같이 해 보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설봉은 그 회사의 부사장이 됐다.설봉은 부사장으로 일을 하고 있으면서도  단독으로 대외 무역을 할 수 없을까 고민하며 돈줄을 물색하고 있었다. 그때 김상필씨로부터 이화대학 총장 김활란씨를 소개받았다.김활란 총장은 학교재단 기금 중 500만원을 선뜻 빌려주었다. 설봉은 이 돈을 장사 밑천으로 하여 조선일보 사옥 3층에 방 하나를 빌려 사무실을 차렸다.

이것이 바로 지금의 <천우사>의 시작이었다. 그러니까 천우사의 간판이 걸린 것이 1947년 3월 8일이었고, 천우사가 간판을 내걸고 제일 먼저 손을 댄 것이 ‘종이 장사’였다.조선일보사에 사무실이 있었던 만큼 창고도 마음대로 얻어 쓸 수 있었고, 판매처를 얻기도 안성맞춤이었다. 당시의 무역은 마카오 중심이었다.

국산품이란 말조차 생소하던 시절이었으니까 국민들 생활필수품은 대부분 마카오에서 조달됐다. 그때 신사들이 마카오 양복에다 마카오 구두를 신어야 행세를 할 수 있었던 시절이었다. 이런 시절에 천우사는 마카오 무역선에 싣고 온 양복지 지물류 등을 가지고 장사를 시작했다. 적은 자본이라 마카오까지 가서 무역을 할 수는 없었고, 상인들이 가지고 들어오는 물건을 사서 팔았다.국산품이란 말조차 생소하던 시절이었으니까 국민들 생활필수품은 대부분 마카오에서 조달됐다. 그때 신사들이 마카오 양복에다 마카오 구두를 신어야 행세를 할 수 있었던 시절이었다. 

이런 시절에 천우사는 마카오 무역선에 싣고 온 양복지 지물류 등을 가지고 장사를 시작했다. 적은 자본이라 마카오까지 가서 무역을 할 수는 없었고, 상인들이 가지고 들어오는 물건을 사서 팔았다.

1954년 마닐라, 1960년 뉴욕과 도쿄 수출거점 설치, 한국축산 개발 설립

이것이 1954년 대성목재공업주식회사·조선피혁주식회사를 인수하게 된 동기이다. 그는 국내 동업자끼리의 경쟁보다는 해외시장 개척에 더 적극적으로 나섰다.그래서 1960년 3월 우리 나라 최초로 합판을 수출하게 되었다. 그 뒤, 합판 수출은 우리나라 수출의 주품목으로 각광을 받게 되었다. 1964년 신진완구주식회사·신진수출주식회사를 설립하였고, 그 해 천우사는 552만 달러를 수출하여 국내 민간기업 중 1위를 차지하였다.

1965년에는 조선피혁을 강남공업(江南工業)으로 개칭하고, 한국축산개발주식회사와 삼익선박(三益船舶)을 설립하였고, 제2회 수출의 날 수출실적 제1위로 동탑산업훈장을 수상하였는데, 이 기록은 1967년까지 이어졌다. 천우사의 전성기를 맞은 것이다.

기독교 가정에서 성장한 탓으로 신앙심이 두터웠고, 독실한 기독교인으로서 그는 폭넓은 사회활동을 하였다. 1947년 이화여자대학교 이사로 취임한 것을 비롯해서, 1953년 조선일보사 대표취체역, 1957년 유네스코후원회 회장, 1959년 주한 덴마크 명예영사, 1961년 포풀라협회 회장, 1963년 국제법학회 부회장, 1963년 한국신학대학 이사 등 각계에서 눈부신 활약을 하였다.

한편, 재계에서도 8·15광복 후 대한상의(大韓商議) 재건운동, 한국무역협회 창립, 한국경제협의회 창립 등에 주도적 역할을 하여 경제계의 지도자로서 큰 업적을 남겼다.4·19혁명 뒤 허정(許政)과 함께 과도정부 수립에 공헌한 인연으로 상공부장관에 오르기도 하였으나, 35일간의 단명으로 끝났다. 정부는 그의 국민경제발전에 기여한 공적과 민간경제외교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하였다.

우리는 저렴한 노동력을 이용해 수공업, 가내공업으로 중소기업을 급속히 발전시키는 것이 적은 자본을 가진 우리가 조속한 시일 내에 실업자를 구제하고 국제수지를 개선시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전제하고 나서 그는 일본과 홍콩으로부터 기술을 도입해서 섬유제품, 2차가공품, 부품생산공장의 설치를 해야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그밖에도 크리스마스 장식업, 조화, 가발, 농구화, 메리야스, 양말, 수예품 등 할일이 얼마든지 있다고 역설했다. 우리국민이 공것을 바라지 말고 우리의 힘으로 우리의 경제난을 타개해 보겠다는 굳은 결의를 가지고 노력한다면 수년내에 억대의 외화를 벌것이 틀림없다고 외쳤다.

그리하여 설봉은 그당시 상공부장관, 재무부장관과 논의해 가칭 ‘가공무역추진위원회’라는 단체를 발기시켰다.이 위원회의 취지는 우리나라에 없는 원료를 외국에서 도입해 이것을 가공해 수출하는 업체를 돕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천우사사장 전택보씨(사진)가 19일 상오11시25분 서울 신교동자택에서 심장마비로 급사했다.향년 80세. 고전사장은 일본신호고상을 졸업, 일찌기 실업계에 투신하여 보세가공무역을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개척하는등 한국경제계에 큰기여를 했다.

 1947년 3월 8일 천우사(天友社)를 세우고 무역업에 뛰어들었다.

천우사를 설립한지 얼마 안돼서인데, 일본 유학시절 때부터 잘 알고 지냈던 박찬빈 이란 친구가 설봉을 찾아왔다.

자기는 중국CIC(중국 군대의 비밀단체)의 책임자인 조자청과 손잡고 일하는데 ,중국에서 물건을 가지고 올테니 팔아 달라는 것이었다설봉은 그러마고 했더니 얼마 후에 그는 복사지 한 배를 가득 싣고 들어왔다. 복사지는 그 당시 매우 귀한 물건이었기 때문에 쉽게 팔 수 있었다. 그리고 복사지 대금조로 중석(重石)을 한 배 실어주었다.

그러니까 두 번 장사를 한 셈이었다.

당시 중석은 일본인들이 채광해 놓고 미쳐 실어가지 못한 것이 전국 곳곳에 방치 된 것이 많이 있었음으로 어렵지 않게 실어 줄 수 있었다.이것이 천우사의 첫 번째 큰 장사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장사에서 설봉은 수백만원을 벌었다.

때는 1947년 여름쯤이었고, 천우사 간판을 건지 불과 3,4개월 밖에 안된 때였다.

그러나 매번 행운만이 따르는 것은 아니었다. 1947년 초가을 쯤이었는데 봉명석이라는 사람이 찾아와서 자기는 상해에서 신문용지를 구해 올 수 있다고 했다.  

그때는 신문 용지가 아주 귀한 때라 천우사는 곧 그와 손을 잡고 신문용지 거래를 시작하기로 했다. 그는 신문용지를 구하기 위해서는 선금이 필요하다고 해서 설봉은 선금 600만원 외에도 동아일보의 600만을 비롯해 여러 사람에게서 모두 6000만원을 마련해 그에게 넘겨줬다.

그러나 그가 상해로 돌아간지 석 달이 넘도록 감감 무소식이었다. 사기를 당한 것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봉명석은 그 돈을 모두 유흥비로 탕진해 버렸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설봉은 자기 돈 600만원 뿐만 아니라 6000만원의 큰 빚쟁이가 되고 말았다. 천우사는 이때 완전 파산 상태에 빠지게 됐으며 이화재단 김활란씨에게서 빌린 돈 500만원의 밑천까지 전부 날려버렸던 것이다.

이때부터 설봉은 날마다 빚 독촉을 받게 됐는데 하루는 모 명문학교 사친회 회장이 천우사 사무실을 찾아와서 ‘내 돈 500만원을 내놓으시오’ 안 내면 죽이겠다고 설봉의 멱살을 잡고 차마 입으로 할 수 없는 욕설을 마구 퍼부어 댔다.

이때 사원들이 달려들어 떼어놓긴 했으나, 이때 설봉이 받은 고통과 마음의 상처는 이루 형언할 수 없었다.

옷을 찢긴 채 (조선일보)3층 천우사 사무실에 멍하니 앉아있던 설봉은 ‘저기 전찻길에 뛰어내려 죽고싶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때 간부 사원들은 자칫하면 사장이 자살이라도 하지 않을까 걱정이 돼 의논 끝에 사장을 해외로 피신 시키기로 결정을 했다.

‘사장님 6개월 동안만 해외에 나가서 피신해 계십시오. 그동안 우리가 국내에서 뒷 처리를 할테니, 사장님은 해외에서 활약해 주십시오’ 하고 출국을 간곡히 권했다.

이리하여 설봉은 비밀리에 서울을 빠져나와 홍콩 행 비행기를 타게 됐다.

때는 1948년 4월 설봉은 해방 후 처음으로 해외에 나가게 됐던 것이다.

빚에 몰린 설봉은 비밀리에 서울을 빠져나와 홍콩 행 비행기를 탔다.

때는 1948년 4월, 설봉은 해방후 처음으로 해외 여행을 하는 셈이었다. 설봉은 홍콩에 도착하자 우선 뉴욕 내셔날 시티뱅크 홍콩 지점을 찾아갔다. 이 은행은 설봉이 일본 고베에 있을 때 근무한 경험이 있는 은행이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은행 고문으로부터 미리 소개장을 받아왔기 때문이었다.

설봉은 소개장을 내어놓고 협력을 구했다. 그랬더니 지점장은 선뜻 홍콩에서 가장 실력있는 지물상인 치생공사(治生公司)를 소개해 주는 것이 아닌가.

홍콩 지점장은 설봉에 대한 첫 인상을 좋게 느꼈던 모양이다. 그 즉시로 설봉은 홍콩의 치생공사와 계약을 체결하고 무역을 시작했다. 방법은 물물교환방식이었는데 치생공사가 지물을 선적해 서울에 보내면 천우사는 대신 오징어를 사서 그 배에다 실어 보낸다는 조건이었다.

그러니까 지물 대금을 먼저 치를 필요없이 오징어를 사서 실으면 되는 장사였다.

드디어 신문용지 50톤을 실은 첫 배가 부산에 도착하였다. 그러자 국내에 있던 천우사 사원들은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해서 지물을 팔고 그 돈으로 오징어를 구해 그 배에 실어 보냈다.

이러기를 3개월동안 계속하니 빚의 3분의 1을 갚을 수 있게 됐다.

설봉은 홍콩에 피신해 있으면서 계속 지물을 실어 보냈다. 한편 치생공사는 황옥당이라는 사람을 한국에 파견해 천우사의 무역업무를 감독케 하였다.

이런 식으로 무역을 6개월간 계속한 결과 빚의 절반을 갚을 수 있었다.물물 교환단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무역이었지만 서로 믿고 했기 때문에 번거롭지도 않고 사업도 잘 돼 좋았다, 치생공사는 천우사의 은인이나 다름없었다.

날이 갈수록 치생공사와의 무역은 더욱 번창해져서 한때는 전국 지물 수입량의 거의 절반을 천우사가 차지 했다.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한국의 무역에도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홍콩 일변도의 무역에서 대일 무역이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행운이 설봉을 찾아왔다. 어느날 유동석이란 사람이 찾아와서 조선농회(朝鮮農會, 오늘날 농협과 비슷한 기관)에서 수집한 가마니 수십만장을 일본에 수출할 수 있는 허가를 받아 줄 수 있으니 그걸 한 번 해 보라고했다.

그런데 그 때 조선농회 농회장을 최태용씨라는 사람이 하고 있었는데 최태용씨는 영흥 사람이었고 설봉이 영흥에서 금융조합이사로 있을 때 어느정도 안면이 있는 사이여서 어렵지 않게 천우사가 대일 가마니 수출업자로 지명될 수 있었다.

당시 농회에서 수집해 놓은 가마니를 체크해 보니 그 양을 다 일본으로 실어 나르려면 배가 17척이나 필요한 방대한 양이었다.일본의 수입상은 제일물산이었는데 1949년 한 해는 온통 가마니 수출로 돈을 벌다 시피했다. 해방 후 민간 무역으로 일본과의 교역은 이것이 처음이었으며 그때 가마니 수출대금은 약 30만 달러에 이르렀다.

천우사는 1950년 6월 24일 인천항에 신문지와 양복지 등 대규모 물자를 수입해 놓고 있었다. 그날은 토요일이어서 통관을 26일 월요일로 미루고 있었는데 뜻밖에도 6·25전쟁이 터지고 말았다.부산 부두에는 천우사 화물도 잔뜩 쌓여 있었다. 군의 통고를 받은 전택보는 화물 처리 문제로 고심했다.전택보는 전쟁이 끝나기만을 마냥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남포동에 전세로 점포를 얻어 다시 무역업을 시작했다.

출처 : 주간조선(http://weekly.chosun.com)

그는 천우사의 무역업만으로는 발전에 한계가 있음을 깨닫고 생산업체를 건설할 생각을 굳혔다. 이것이 1954년 대성목재공업주식회사·조선피혁주식회사를 인수하게 된 동기이다. 그는 국내 동업자끼리의 경쟁보다는 해외시장 개척에 더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래서 1960년 3월 한국 최초로 합판을 수출하게 되었다. 그 뒤 합판은 한국 수출의 주요 품목으로 각광을 받게 되었다. 1964년 신진완구주식회사·신진수출주식회사를 세웠고 그해 천우사는 552만달러를 수출, 국내 민간기업 제1위를 차지했다.

그는 1965년에는 조선피혁을 강남공업으로 개칭, 한국축산개발주식회사와 삼익선박을 설립했으며, 제2회 수출의 날 대한민국 수출실적 제1위로 동탑산업훈장을 받았다. 이 기록은 1967년까지 이어졌다. 천우사의 전성기를 맞은 것이다

동물원 준비 과정에서 가장 어려웠던 것은 달러를 바꾸는 일이었다. 그때는 암시세와 공정환율의 차이가 많아서 공정환율로 바꾸지 않으면 준비에 큰 문제가 생겼다. 전택보는 재무부를 서너 차례나 드나들며 사정해야 했다.

4·19혁명 뒤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 성명을 발표한 이튿날 4월 27일부터 과도정부의 내각 조직이 시작되었다.

전택보는 대기업가 중심의 새로운 단체를 구성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김용완, 최태섭, 김항복 등도 마찬가지 생각이어서, 그들은 천우사 사장실에 모여서 새 조직을 의논했다. 김용완은 처음 새 단체를 뜻 맞는 사람들끼리만 발족, 차츰 확대해 가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그러나 나중 전국을 대표하는 단체가 되려면 아무래도 대기업가를 모두 참여시키는 것이 좋겠다는 전택보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마침내 한국경제협의회가 발족되었다.

천우사는 1960년대 6년 동안이나 줄곧 수출 최고상을 수상, 해외 시장 개척에서 ‘한국의 신용’으로 통했다. 1970년대 들어 천우사는 무역업에서 쌓은 경험과 미국 시장에서의 기반을 토대로 스튜어트데이비스사(社)와 손잡고 보잉 707기를 빌려 미국과 서울 간 항공화물 수송을 시작했다.

또한 세계적 전자회사인 필립스와 합작으로 전자제품은 물론 컴퓨터 부품까지 수출해 생산했다. 이미 천우사는 1950년 9·28 서울수복 직후 필립스의 도움을 받아 한국에서 처음으로 탁상용 라디오를 만들어낸 일이 있었으며, 그 인연이 이어져 필립스와 기술제휴로 김포 등촌동 공장에서 전자제품과 부품을 생산해 대미·대일 수출을 계속해 왔다. 1970년에는 상공부로부터 TV 부품 수입을 승인받아 오류동에 5만4638㎡(1만6528평) 공장 대지를 마련하고 한 해 3만대 생산 목표를 세웠다. 그 무렵 한국의 TV 생산업체는 모두 도시바·히타치·샤프·산요 등 일본업체와 기술 합작을 하고 있었는데, 천우사는 필립스와 기술제휴를 함으로써 유럽 회사와 제휴한 첫 업체가 되었다.

전택보가 주장했던 보세가공 무역은 부두의 보세창고에서 수입한 물품을 가공처리해 재수출하자는 것은 아니었다. 세관의 감시가 가능한 곳이면 어디에서나 확대해서 실시하자는 것이었다. 5·16 혁명정부가 보세가공 무역을 국책으로 결정했다고 해서 전택보의 임무가 끝난 것이 아니었다. 전택보는 학자도 아니고 정치가도 아닌 실업인이었으므로, 보세가공 무역이 그의 제안에 의해 정책으로 채택되었다 해서 그 책임을 다한 게 아니라 당장 그것을 실천에 옮겨야 했다.

그는 맨 먼저 조화(造花)에 손을 댔다. 일본에서 기술자 다카하시를 초빙하고, 천우사 6층 강당을 이용해 기술을 배울 부녀자를 모았다. 그리고 부산에 내려가서 의류공장 17곳과 계약, 일본에서 기술자 오오키(大木)를 데려와 미국에 수출하기 위해 의류 생산을 시작했다. 그 밖에도 완구 공장, 양탄자 공장도 세워 나갔다. 1970년대 초반 천우사는 의류 가공 수출만으로 한 해 500만달러를 벌어들이며 명실상부한 한국 최고 의류 제작 수출업체로 이름을 드날렸다.

그 무렵에는 수출산업에 대한 정부의 금융 세제상의 지원도 없었다. 미국에 대한 수출 실적도 없었으므로 확보해 놓은 쿼터도 없었다. 쿼터 문제 교섭차 전택보는 미국을 두 번 방문해서 미 상무부 차관보인 로보를 만나 이 문제를 놓고 교섭을 벌이기도 했다. 이 일은 전택보의 힘으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보세가공 무역만 하더라도 정부에서 이를 국책으로 채택, 여러 혜택과 지원을 아끼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날처럼 성장한 것이다. 특히 박정희 대통령이 다달이 확대무역회의를 주재했기에 수출을 토대로 한 경제 성장을 이룩할 수 있었다. 1947년 이화여자대학교 이사 취임을 비롯해서 1953년 조선일보사 대표취체역, 1957년 유네스코후원회 회장, 1961년 포플러협회 회장, 1963년 국제법학회 부회장, 1963년 한국신학대학 이사 등 각계에서 눈부신 활동을 벌였다.

전택보는 만년에 세상 사는 지혜를 이렇게 말한다.

“국가 대 국가, 민족 대 민족, 개인 대 개인의 끝없는 다툼과 경쟁 속에서 인류 역사와 문명은 발전해 왔다. 오늘날 우리나라도 적자생존의 법칙에 얽매여 있다. 초등학교 입학 때부터 대학 졸업 때까지 수많은 시험을 치르며 경쟁한다. 바늘구멍 취업문을 뚫는 데 성공해도 끝이 아니며, 일터에서도 치열한 경쟁을 해나가야 한다. 더욱이 우리나라는 외적으로 북한과 맞서고 있으며 중국·일본·러시아 등 강국들과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또 내적으로는 협소하고 각박한 국토에서 5000만 인구가 선진국 수준의 정치·경제·교육·문화의 욕망을 갖고 있기에 경쟁은 더욱 극심하다.

한국에서의 경쟁은 남을 거꾸러뜨리고 자신만 살아남겠다는 경쟁이 대부분이다. 정치인들은 국민을 잘살게 하겠다는 뚜렷한 정책 발표는커녕 그저 경쟁자를 쓰러뜨리기 위한 반대와 공격에만 급급한다. 기업인들도 국가 경제 발전에 어떻게 공헌할까를 생각하기보다 동업자를 해치는 데 열중하는 예가 많다. 그러나 오늘날은 세계가 하나가 되어가고 있으며, 우리의 활동 무대는 온 세계에 걸쳐 있다. 남을 짓눌러 없애는 경쟁이 아닌 남보다 커져서 잘살게 되고, 경쟁에서 뒤처진 무리까지 끌어안는 인의(仁義)의 경쟁이 되어야 한다.

우리의 욕망은 무엇인가. 큰 부자가 되고 싶기도 하고, 절대권력을 갖고 싶기도 하다. 큰 재산이 있으면 자신의 의식주를 해결한 뒤에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고, 큰 권력이 있다면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을 도움으로써 행복을 느끼는 게 가장 이상적일 것이다. 더욱이 우리나라같이 빈곤과 부정이 심한 나라에서 빈곤을 없애고 정의를 구현한다면 이보다 더 큰 기쁨이 어디 있겠는가. 사도 바울은 ‘내가 선한 싸움을 하고 나의 갈 길을 다 달렸다’고 말했다. 세상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승리자로서의 만족감을 가질 수 있다면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행복을 느낄 것이다.”

1980년 7월 18일 전택보는 지인들과 골프를 치던 중 갑자기 쓰러진다. 차로 근처 병원으로 옮겼으나 일흔아홉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아내와 자식들이 마지막을 지켜보지 못한 정말 뜻밖의 죽음이었기에 애석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전택보는 이런 말을 남겼다.

“이만큼 살아오는 동안 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빚을 졌다. 그 빚을 갚을 길은 내가 눈을 감을 때까지 일을 계속하는 것이다. 나는 보잘것없지만, 일생 동안 내가 가진 능력과 지식을 모두 짜내어 살아왔다. 다시 태어나더라도 내가 살아왔던 대로 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성장비화·부침야사(재벌이력서:8)
입력 1991.12.31 00:00 0 0
◎「마카오무역」 열풍… 수입품 장사 “노다지”/면사·양복지등 생필품 취급 수십배 이득/중석·화약원료등 전략물자로 대금지불/강익하·김규면·신영균등 자본축적 기반닦아정크무역이 절정을 이루던 46년 6월초. 정오께부터 인천항 부두를 서성이던 서른살 남짓한 젊은 사내는 석양을 등지고 미끄러지듯 수평선을 넘어오고 있는 배 한척을 보고 걸음을 멈추었다. 배가 항구에 가까워 광성호라는 이름이 육안에 들어오자 그 사내는 중국말로 큰 소리를 질렀다. 돛배에서도 서너명의 선원들이 손을 흔들며 중국말로 응답해 왔다. 부두에 닻을 내리자 젊은이는 배에 뛰어올라 갑판을 열어제쳤다. 콩기름 낙화생 당면 시계 사카린 빙초산 광목 양잿물 소금 등 20여종류의 물건들이 가득했다.

이 배가 바로 우리나라와 중국을 오가던 정크선 광성호. 광성호를 기다리던 젊은이는 화업무역공사라는 간판을 내걸고 정크무역에 참여한 김병환이었다. 『당시에는 수출 수입이라는 말 대신 일제시대의 이입이출이라는 말을 그대로 쓰고 있었지요. 광성호가 도착한 뒤 인천해관(지금의 인천세관)을 찾았더니 시청으로 가라고 했어요. 시청에 갔더니 다시 항만사령부로 가 보라는 거예요. 그곳엔 미군정 주재관 길버트상사가 입출항을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배가 도착했다고 알리니 그 사람이 직접 조사를 나와 아편과 무기가 있느냐고만 물었어요. 없다고 하니까「오케이」,그것으로 끝이었어요. 관세고 뭐고 물론 없었지요』 무역협회 창립이후 현재까지 비상근 이사를 지내며 경기도 부천에서 알파소닉코리아라는 전자회사를 차려 회장을 맡고 있는 김병환씨의 회고다.

관세도 없고 특별한 제약도 없었던 정크무역은 거의 10배가 남는 노다지 장사였다. 김병환씨의 증언. 『국내에서 구하기 힘든 물건들이었기 때문에 정크선이 들어왔다 하면 바로 동이 났다…』 당시 정크무역을 하면서 얼마나 이익이 남느냐를 결정한 것은 오로지 무역행정의 실권을 쥐고 있던 미 군정청 상무부 소속 거윈준위의 사인에 달렸다. 정크무역이 활기를 띠자 미 군정청은 과세를 부과하고 수입허가서를 발급했다. 서울에 주재한 거윈준위가 책임자였으므로 그에게서 얼마나 빨리 수입허가서를 받는냐에 따라 큰 돈이 왔다가다 했던 것이다. 따라서 자연스레 인천과 서울을 오가는 총알택시가 등장했고 인천­서울간 트럭운송업자들도 덩달아 큰몫을 잡았다. 인천에서 트럭운송업을 하고 있던 조중훈도 이 시기에 기반을 잡았다.

국내에 무역업을 본격 태동시킨 정크무역은 47년 3월17일 마카오에서 무역선인 페어리드호가 인천항에 입항,이른바 「마카오무역」을 전개하기 전까지 이어졌다. 국내 기업인들이 무역 열풍에 본격 휩싸이게 된 것은 바로 마카오 무역때문이었다.

마카오무역은 영국계 2천톤급 선박인 페어리드호가 인천항에 들어 온 이후 6개월여 계속된 시기의 무역을 말한다. 중국대륙이 모택동의 남진으로 어수선해지자 중국화주들은 홍콩에서 물건을 선적,우리나라로 가져오려 했다. 그러나 영국정청이 이를 허가하지 않자 홍콩서 물건을 선적한 뒤 마카오로 수출하는 양 꾸며 우회,인천항으로 입항하면서 마카오무역이라는 별명이 붙게 됐다. 이때 들어서야 비로소 국가간 제도적인 무역이 나타났다. 포르투갈령인 마카오정청은 한국으로 가는 물자에 수출승인서를 발급했던 것이다.

페어리드호와 큰 거래를 한 국내기업인은 김익통상의 강익하와 삼양무역의 김규면이었다. 처음 입항한 페어리드호는 생고무 양복지 신문용지 등 고급물품을 가득 싣고 들어왔다. 당시엔 고급품은 모두 마카오제라하여 마카오양복 마카오신사라는 말들이 나돌았다.

마카오 무역선은 우리나라에 시계 양복지 면사 모사 페니실린 사카린 등을 싣고 왔고 그대신 폭약제조용인 헤로중석과 화약원료,미군이 불하한 지프차 및 중고차의 부품을 싣고 갔다. 당시 장개석군과 모택동군간에 전쟁을 치르던 중국은 비싼 값으로 이들 전략물자를 사들였고 마카오무역선은 일본이 우리나라에 놓고 간 전략물자를 모으는 일로 재미를 보고 있었다. 국내 기업인들은 일본이 버리고 간 당시로선 하잘 것 없는 물자들을 주고 수십배 이득을 붙여 팔 수 있는 각종 생필품을 받아 잇속을 차릴 수 있었다.

마카오무역선이 싣고간 헤로중석은 지금의 대한중석 전신인 소림광업에서 흘러나온 것이고 화약원료는 한국화약 전신인 조선화약에서 유출된 것이다. 따라서 소림광업의 재고품을 불하받았던 영화물산의 신영균을 비롯,전략물자를 불하받은 국내 기업인들은 이를 계기로 재산을 축적할 수 있었고 영풍상사가 철광석을 수출해 기반을 잡은 것도 이 시기였다.

마카오무역 6개월동안 국내에 남아있던 전략물자재고는 바닥이 났다. 바깥시세를 모르고 있던 당시 국내 기업인들은 결국 6·25를 맞은 뒤에야 당시 황금을 내주고 설탕을 사 먹은 것을 깨닫게 됐다.<이종재기자>

해방전까지는 만주지방에서 무역업을 하고 있던 사람들도 거의 다 서울로 몰려들었다. 최태섭(한국유리),이한원(동아상사),서선하(삼흥실업),전택보(천우사) 등은 만주에서 서울로와 막바로 무역업을 시작했다. 만주의 봉천에서 동화공창이라는 유지공장과 무역업을 하는 삼흥상회를 경영하고 있던 최태섭씨는 일본 미쓰비시상사의 무역업까지 대행할 정도로 호황을 누렸었다. 팔로군이 만주를 장악한 45년 종업원인 중국인들의 도움으로 만주를 무사히 빠져 나와 우선 평안도 철산에서 모나자이트라는 광석을 생산,광업진흥공사에 납품하는 일을 했다. 그는 자식을 키우려면 서울로 가야한다는 생각으로 남하,서울의 중림동에 있는 고무공장을 매입,만주에서 사용한 삼흥실업 간판을 내걸었다. 그는 다시 무역업을 시작했다

서울로 올라온 기업인들은 당시에 번창하던 정크무역 마카오무역 등 거센 무역의 열풍속에서 값비싼 수업료를 내며 사업을 배웠고,또 번창시켰다. 해방후 혼란했던 서울은 기업들에게 꿈의 보금자리였고 희망의 일터였다

특히 기업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줄을 잘 잡아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고 나아가서는 적산불하,원조물자 불하,은행대출 같은 큰 이권을 챙길 수 있었다.그도 그럴것이 해방후 6·25 이전까지의 우리나라 기업인들은 자본이나 사업 경험이 보잘 것 없었던 만큼 일본이 남기고 간 귀속재산의 불하나 원조자금 배정,미 군정의 힘이 필요한 마카오무역 등 경영외적인 요인들에 의해 그 성장속도와 규모가 결정되는 기형적인 과정을 밟고 있었다. 이 때문에 경영풍토가 기업내적인 기술개발이나 창의력,경영합리화에 의존하기보다는 권력과 밀착,특혜에 집착하는 경향을 띠게 됐다.

해방이후 이만한 거금을 가진 사람은 최창학 이외에는 없었다. 그는 이 돈으로 돈놀이를 했다. 해방후 크게 휘몰아쳤던 정크무역과 마카오무역 시절 그의 돈에 의지하지 않은 기업인은 거의 없을 정도였다.

이들 기업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달러였다. 오늘날 기업인들이 땅을 찾듯 당시의 기업인들은 달러를 찾아 분주히 뛰었다. 달러가 있어야 수입이 가능했고 수입은 곧 돈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의 달러는 정부의 뒷심이 없으면 불가능했고 달러배정은 곧 특혜였다

/이 대통령 은행보유불은 직접 통제/「치부직통 코스」… 수단방법 안가려/배정불로 물자수입 또 “돈방석” 재계판도 큰 영향해외에서 물건을 사오기 위해서는 달러가 필요한데 전쟁중이던 50년대초에 달러가 흔할 리 없었다. 그래서 당시의 기업인들은 달러를 구하기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무역회사가 이용할 수 있는 달러는 직접 수출해서 벌어들인 달러 이외에 중석달러·종교달러·암달러·원조불 등이 있었다. 중석달러는 전략물자인 중석을 수출해 획득한 외화인데,이 돈은 기계류·선박·화물자동차 등 산업 부흥자재를 수입하는데만 쓸 수 있었다. 중석달러는 중석수출을 맡고 있던 대한중석이 직접 수입할 때 사용했으나 극히 제한된 무역회사에 특혜불로 배당되기도 했다.

암달러로 유통된 시중달러는 주로 주한 미군들로부터 흘러나왔는데 환율도 높고 거래량도 적어 수입자금으로는 큰 기여를 하지 못했다.

종교달러 역시 그림의 떡이었다. 종교달러는 기독교 선교·전시구호·교회사업 등을 위해 외국에서 송금된 외화로 기독교계통과 깊은 관계를 가진 무역상이 아니면 얻어쓸 수 없었다.

이밖에 원조불과 UN군 대여금 상환불이 있었다. 원조불은 전쟁 복구기에 국내 산업의 판도를 결정하는 자금이 됐다. 상환불이란 정부가 UN군에게 국내에서 사용할 돈을 원화로 대여해 주고 그 대전으로 받은 달러인데 당시 국내 부족물자를 수입하는데 긴요하게 쓰였다.

결국 달러의 대부분은 정부가 배정했고 자연히 달러를 따려는 기업인들의 로비가 성행했다. 더욱이 정부가 배정하는 달러의 환율은 지나치게 낮게 평가돼 달러를 딴다는 것 자체가 치부의 직통코스였다. 정부가 배정하는 달러로 정부가 지정하는 물자를 수입해서 국내에 풀어만 놓으면 그대로 돈방석에 앉았다. 당시의 환율이 비현실적으로 낮게 평가된 원인은 상환불이었다. 원화를 대여해 주고 달러를 받기 위해서는 낮은 환율이 유리했기 때문이다.

당시 환율문제는 그 누구도 입에 올릴 수 없었다. 달러라면 벌벌 떨던 이승만대통령에게 환율을 현실화시키자는 건의를 했다가 목이 달아난 장관이 있을 정도였다. 오랜 망명생활을 통해 가난에 이골이 난 대통령이었다. 51년 12월15일에는 은행보유불 사용에 대해 액수의 다과를 막론하고 대통령이 인가하도록 하는 규정이 만들어져 달러에 관한한 1달러라도 대통령의 결제가 필요했다. 달러에 대한 집착은 프란체스카 여사도 마찬가지였다.

해운공사를 설립하고 무역업에도 참여하다 전쟁중에 일본공사를 지낸 김용주의 회고다.

『50년 7월중순 대전방위선이 흔들릴 때였다. 대한적십자사 총재였던 이기붕이 전화를 걸어 부산시내에 부상병들이 몰려오고 있으나 약이 없어 손을 쓸 수가 없다면서 약품조달을 요청했다. 당시 주일대표부에 달러가 있을 리 없었다. 생각다 못해 한국은행 동경지점의 김진형 부총재에게 요청,동경지점의 정부보유불 1만달러를 풀기로 하고 백방으로 뛰어 약품을 구했다. 그러나 달러사용에 대한 재가가 문제였다. 의약품을 급송한 후 대통령의 재가를 기다렸으나 기다리던 대통령의 재가대신 프란체스카 여사의 전화가 걸려왔다. 누구 마음대로 정부보유불을 썼느냐는 노기 띤 추궁이었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사정얘기를 제대로 듣지도 않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경무대 안팎이 관리하는 달러를 기업인들이 사용하기는 그만큼 어려웠다. 그래서 정치권에 대한 기업인의 곡예가 시작됐다. 해방후 혼란기에 줄을 잘 잡았던 백낙승의 괴력이 발휘된 것이 이즈음이었다. 재계 판도는 곧 정부의 달러를 따느냐 못따느냐에 달려있었다. 정부가 실시한 경매에서 달러만 잡으면 돈방석에 앉았으며 그렇지 못하면 뒷전으로 밀릴 수 밖에 없었다. 해방후 대권의 향배를 가늠할 수 없던 시기에 벌어졌던 기업인들의 줄잡기 경쟁과 귀속재산 불하전이 정경유착의 1기라면 당시의 로비는 정경유착 2기인 셈이다.

재벌과 정치와의 관계는 이후 전쟁 복구기의 원조불 경쟁과 경제발전 과정에서의 차관전쟁,각종 정부주도 사업권 획득 등으로 이어져 국내 재벌사의 뚜렷한 특징으로 남는다.

한국의 기업사가 정경유착의 역사로 점철되고 재벌들이 오늘날 국민들의 따가운 시선을 받게 된 이유는 바로 여기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정치곡예의 테크닉이 기업의 흥망성쇠와 직결됐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재벌이 봉쇄적인 가족경영의 형태를 띠게 된 것도 같은 맥락이다.달러를 놓고 벌어진 정치권과 기업의 관계는 급기야 국내 최초의 대형 경제사건인 중석불 사건을 낳고 말았다.<이종재기자>


한국목재인물사 | 대성목재공업(주) 전택보(全澤珤) 회장 편(65)

브라질에 합판공장 설립도 추진

설봉은 전자사업과 섬유사업 외에도 기발한 아이디어로 사업을 창출해 낸 것이 많았는데, 대리점 개설의 경우 부실기업으로 정비되기 전부터 의 대리점을 이미 하고 있었으며, 부실기업으로 정리된 이후인 1971년에는 세계3위의 대선박회사인 <가와사끼 기선 회사>의 대리점을 개설했고, <타이 인터내셔날 항공>의 대리점도 개설하였다. 그리하여 1972년에는 한국선박대리점협회 회장직도 역임했다. 해외시장개척의 선구자로 정평이 나있던 설봉은 1971년부터는 중동진출을 계획하였는데, 그 결과 1976년에는 오만에 시멘트 1만 여 톤과 타이어튜브를 처녀 수출하는데 성공하였다.

컨테이너 하치장 사업도 하였는데, 수출입화물의 하치장(container yard)과 CFS(container Freight station)의 시설 없이는 해운업과 해운대리점사업이 발전할 수 없다고 보고, 1971년에 부산에서 이 사업을 시작하였다. 이에 대하여 1971년 1월5일자 <산업경제신문>은 ‘천우사 컨테이너 화물선 취항’이란 제목으로 ‘천우사는 국내 최초로 컨테이너 선박 3척을 도입하여 서울~시애틀~로스앤젤레스 간을 매월 3회씩 운항하기 시작했다. 컨테이너 운송이란 항구에 도착한 화물을 보세구역에서 일단 모두 꺼낸 다음 일일이 수속을 밝아 개별통관하는 재래식 통관과는 달리 컨테이너 자체와 함께 그 안에 실은 화물을 목적지까지 운송한 다음 화물을 통관하는 방식을 말한다’고 보도하였다.

신용카드 사업도 하였는데, 1964년 크레딧카드(credit card)란 말조차 생소하던 때에 신용카드 사업을 시작한 것으로 미국 최대의 여행사인 <아메리칸 익스프레스(American Express)>회사의 한국 총대리점을 하였다. 이 사업이야말로 신용 하나만으로 이루어낸 사업이었는데, 이것이 오늘날의 한국신용카드 주식회사가 된 것이다.

또한 브라질에 합판공장 설립을 추진하기도 하였다. 1977년 6월18일자 <무역통신>의 기사를 보면 ‘브라질에 합판공장, 천우사서 합작 건설키로’란 제목으로 ‘천우사(대표 전택보)는 남미 아마존강 유역에 브라질과 합작으로 합판공장을 건설키로 하고 국내에서는 최초로 합판공장의 해외진출을 추진하고 있다. 천우사는 북부 브라질 아마존강 유역의 마나우스에 자본금 400만 달러, 생산능력 일산 1만2000매 규모의 합판 공장을 50:50의 비율로 현지법인으로 설립하여 내년 하반기부터 생산을 시작할 예정이라고 한다’고 보도하였다. 그러나 브라질의 합판공장 설립은 브라질 당국의 법적 규제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설봉은 탁월한 ‘아이디어 메이커’

천우사가 부실기업으로 정비된지 불과 4년만인 1975년 말 현재 ‘정상을 달리는 대기업’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발전하였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부실기업으로 정비될 당시 700명의 간부사원들과 6000여 명의 공원들이 모두 떠나가고 불과 90여 명의 간부사원들만 가지고 새출발을 했던 천우사는 이제 다시 500여 명의 간부사원과 2500여 명의 공원을 가진 대기업으로 성장한 것이다.

천우사가 이렇게 빠른 시일 내에 대기업으로 재등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겠지만, 첫째로 설봉의 신용을 꼽아야 할 것이다.   <조선일보>가 1971년 8월17일자 신문에 천우사의 재기를 ‘신용간판 전택보, 활기찾는 천우사’란 제목으로 표현한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설봉의 신용은 천우사가 재기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천우사가 이토록 빨리 재기할 수 있었던 것은 설봉이 탁월한 ‘아이디어 메이커’였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설봉은 항상 말하기를 “아이디어에서는 2등을 해서는 안된다. 항상 1등을 해야한다. 2등은 패배자일 뿐이다”라고 했는데, 그만큼 아이디어에 대해서는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었다. 설봉은 항상 기발한 아이디어로 사업을 창출해 내었는데, 전자사업의 경우 TV생산사업부문은 1967년부터 착상한 것이었다. 그 착상이 네덜란드 필립스(Phillips)사와 기술제휴를 체결하게 하였고, 1971년 8월에 이르러서는 TV 첫 생산품을 시장에 내 놓을 수 있었으며, 1972년 10월경에는 3억 원을 투입, 구로공단에 부지 1만2000평을 확보하여 건평 1500평의 공장을 짓고 진공관 TV에서 TR-TV로의 기술전환을 했다. 이때만해도 한국의 TV생산기술은 기술제휴 없이는 불가능했으므로 재력에 있어서 열세에 있던 천우사는 기술전환으로 다른 회사와 경쟁하는 길밖에 없었다. 천우사는 국내업체로서는 처음으로 TR-TV를 생산한 회사로서 TV판매량에 있어서는 ‘금성사’와 ‘대한전선’에 이어 3위로 랭크되었다. 그리고 1974년에는 이란 고성능 카세트를 시중에 내놓았고, 컬러TV 개발도 완전무결한 단계로까지 준비해 놓고 있었다.

섬유사업의 경우 설봉은 자체공장이 있어야 하겠다는 생각에서 가리봉동 수출공단 대지 위에 3층짜리 봉제공장을 짓고 수출목표를 1000만 달러로 세웠다. 공장은 12라인으로 직원수만 해도 1000명이 되었고, 섬유공장 단일공장으로는 국내 최대 규모의 공장이었다.

출처 : 한국목재신문(https://www.woodkorea.co.kr)

한국목재인물사  |   대성목재공업(주)  전택보(全澤珤) 회장 편(64)
천우사의 재기(再起)

천우사만 남기고 그 계열이 부실기업으로 무너진 지 어언 4년이 지났다. 이 4년간은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여간 복잡하고 험난한 시기가 아니었다. 이 기간 동안 있었던 사건들을 대강 열거해 보면 1969년에는 위장간첩 이수근 사건, 무장공비침투만행사건, 미해군정찰기 피추사건, KAL여객기 납북사건이 있었다.  1970년에는 와우아파트 붕괴사건, 김대중 씨 대통령 후보출마, 1971년에는 박정희 씨 7대 대통령당선, 8대 국회의원 선거, 대연각 호텔 화재가 있었다. 1972년에는 7.4남북공동성명발표, 8.3조치(모든 기업체 사채동결), 국회해산 및 비상계엄령 선포, 개헌국민투표실시, 유신헌법확정과 공표 등이 있었다. 1973년에는 제9대 국회의원선거, 통일주체 국민회의에서 박정희 씨 대통령선출, 유류파동 그리고 이듬해인 1974년에는 새해 벽두부터 박 대통령의 긴급조치1호 발표(1월 8일), 이어 2호, 3호, 4호가 계속 발표되었다.  8.15광복절 기념식에서 육영수 여사가 흉탄에 맞아 세상을 떠나는 불상사, 땅굴발견사건 등 온 국민을 경악케 하는 사건들이 끊일 줄 모르게 일어났다.

설봉은 이러한 엄청난 사건들이 회오리바람처럼 휘몰아치는 속에서도 천우사를 재건하기 위하여 처절한 노력을 계속하였다.

1973년 5월27일자 <조선일보>는 ‘유신(維新)과 8.3조치 이후의 재계’라는 제목으로 재계의 내막을 소개하는 특별시리즈에서 전자공업 등으로 사업 확장에 열을 올리는 천우사의 기사를 싣고 있다.

‘1960년대 6년 동안이나 줄곧 수출최고상을 수상하고 해외시장개척에서 한때 ‘한국의 신용’으로 통했던 전택보 씨가 부실기업정리로 대성목재 등 5개 업체를 은행에 넘겨주고 나머지 천우사만 가지고서 기업을 운영하며 차츰 옛날의 영광을 되찾아 가고 있다. 30억 원에 가까운 사채를 안고 산하업체(대성목재, 조선피역, 삼익선박, 한국축산개발, 신진완구)들을 은행관리로 넘겨주었을 때만 해도 재계는 천우사의 재기를 어려운 것으로 내다 봤다.

당시 재계에서는 전택보 씨가 사회사업가이지 결코 기업가는 될 수 없는 사람이라고 그의 사업비운을 동정하기도 하고 비웃기도 했다. 그러한 전택보 씨의 천우사가 요즈음 사업 확장에 열을 올리고 있다. 천우사는 지난 4월말, 구로동 공업단지에 건평 2500(8250㎡)평의 섬유공장과 1200(3960㎡)평의 전자제품공장의 증설을 마쳤다’고 소개했다.

출처 : 한국목재신문(https://www.woodkorea.co.kr)

조흥은행, 대성목재 윤 전무를 파면결정
조흥은행이 대성목재 전무로 근무하고 있는 윤순선 씨를 파면키로 결정했다는 소식을 들은 전택보 사장은 급히 윤순선 전무를 서울 천우사 사무실로 오게하여 윤전무와 함께 조흥은행 행장을 찾아갔다.
자기가 이렇게 된 것은 그렇다치고 자기때문에 함께 일해온 전무가 희생당하는 것을 보고는 참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성명서 발표 주모자를 윤전무로 생각하는 것은 조흥은행의 오해일 뿐이라고 설명하고 파면결정을 취소시켰다.

이에 대하여 윤순선 전무는 그당시 일을 다음과 같이 회상하였다. “수백억의 재산과 기업이 부실로 정리당해 보통사람 같으면 절망과 허탈에 빠져 있을 형편인데도 전택보 사장님은 자기의 부하직원이 파면 당하는 것을 걱정한 나머지 보기도 싫은 은행장을 만나러 가자고 내게 명령했던 것입니다.
나는 노사장의 명령을 어길 수가 없어서 사장님을 따라 조흥은행 행장실을 찾아갔습니다. 행장은 먼저 온 손님들을 대하고 있어서 우리는 약 30분동안 대기 응접실에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때 손님 두분이 대기실로 들어왔습니다. 한 분은 삼성물산 전무로 기억됩니다.
그는 전 사장님을 보더니 겸손한 태도로 ‘얼마나 심려가 되십니까?’하고 정중히 인사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전 사장님은 크게 웃으시면서 ‘나는 종교인이기 때문에 사주팔자 같은 것을 별로 본 일은 없지만, 내 운명이 70까지라 하더군요. 그런데 지금 내 나이가 70이 다되었는데도 죽지 않아요. 건강에도 아무 이상이 없고 골프도 점점 더 잘 맞아요.
그래서 사주팔자란 미신이다. 맞지 않는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번에 부실기업이 되고 보니 사주팔자가 맞는구나 싶더군요!’ 하면서 크게 웃으시던 모습…. 또 계속해서 ‘사람이 아무리 위대하다 해도 죽으면 부고 한장이면 끝인데 내 경우는 그렇지가 않단 말이요, 대성목재 부실기업의 여파는 어찌나 큰지 일주일이 지나도 신문·잡지 등에서 부고가 계속되고 있으니 이렇게 굉장한 부고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 이렇게 담소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또 들어온 다른 손님들과 이야기하는 중에 ‘내 나이 70이 되어도 죽지 않는 것을 보니 아마 80까지는 더 일하라는 것 같아요. 앞으로 10년은 틀림없이 더 살겁니다. 더 힘차게 일해야지요’하면서 당당한 표정을 짓고 계셨던 것입니다.”

출처 : 한국목재신문(https://www.woodkorea.co.kr)

막내아들 순재는 집 한 채도 없어
1969년 6월24일, 전택보 씨의 대성목재 등 5개 업체가 부실기업으로 처리될 때 설봉은 이미 70세의 노인, 보통사람 같으면 까무라쳐 넘어지거나 아주 인생을 포기하고 말았을 것이다. 사실 정부의 이러한 처사는 이미 70노구가 된 설봉에 대해 너무 가혹한 처사였다.

그 때 항간에는 정부 당국이 천우사 계열 5개 업체를 부실기업으로 처리한 것은 사업이 부실해서 뿐만 아니라 전택보 사장이 외국차관을 들여와 사업에는 안 쓰고 고리채 놀이를 했기 때문이고, 막대한 재산을 외국으로 빼돌렸다는 풍설이 떠돌았는데,
설봉은 이 풍설을 듣고 박정희 대통령에게 “이러이러한 사실을 박대통령께서도 인정하고 계시는 모양인데 사실 그러한 일이 있었는지의 여부를 조사해 주십시요”라는 내용의 서한을 보냈던 것이다.

그 뒤 정부 측에서는 실제로  조사를 해 보았던 모양인데 전택보 씨의 막내아들 순재는 집 한 채도 장만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는 이러한 소문은 전연 사실이 아닌 중상모략임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설봉은 박 대통령에게 ‘한국축산개발’만은 돌려달라고 요청을 했다.
“한국축산개발은 제가 꿈과 애착을 가지고 일으킨 사업일뿐 아니라 개인의 이익보다 나라의 이익을 위해 온갖 정성을 다해 이루어 놓은 사업이니 한국축산개발만은 돌려주십시요”라고 요청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축산개발은 전택보가 아니면 못한단 말인가”라고 하면서 일언지하에 거절했다는 것이었다.

당시 대성목재 전무로 있었던 윤순선 씨의 말에 의하면 대성목재가 부실기업으로 처리되자 5600여명의 직원들은 “대성목재가 왜 부실기업체냐? 우리끼리 10억을 증자하여 대성목재를 인수하겠다”면서 성명서를 발표하는 동시에 증자위원회를 조직했다고 한다.
그러자 관리은행인 조흥은행은 아무래도 전무인 윤순선 씨가 주모자일 것임으로 그 주모자인 윤순선 씨를 파면키로 결정했다고 통보해 왔다고 한다. 그 때가 1969년 8월 어느날이었고 그러니까 부실기업으로 처리된지는 약 2개월 뒤였다고 한다. 이 사실을 들은 전택보 사장은 걱정이 되었다.

자기가 당한 것은 관계없으나 자기 때문에 함께 일하던 전무가 주모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주모자로 몰려 파면 당하는 것을 보고는 침묵을 지킬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설봉은 급히 윤 전무와 함께 조흥은행 행장을 찾아갔다.

출처 : 한국목재신문(https://www.woodkorea.co.kr)

대성목재 전 직원들 “우리가 맡겠다”

대성목재가 부실기업으로 정리된 사실이 발표되자 가장 충격을 받은 것은 당사자인 대성목재의 직원들이었다.
대성목재의 5600여명의 직원과 공원들은 대성목재가 부실기업으로 정리되는 것을 반대하는 성명서를 6월27일자 신문에 냈다.

신문지 절반 크기의 대대적인 것이었는데 그 내용도 너무 절실하고 대담한 것이어서 어느 신문사는 이 막대한 광고비를 종업원들이 어떻게 낼 수 있겠느냐면서 선뜻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고 한다. 사태가 이쯤 되자 각 신문들은 이를 크게 보도했다.

6월29일자 <주간조선>은 ‘부실기업체의 충실한 종업원 궐기’라는 제호로 특집보도를 하기도 했다. ‘40만 인천시민의 10% 가까이 되는 사람의 입을 먹여살렸고, 월급이 하루 늦고 이른데 따라 인천시민의 물가에 영향을 끼치는 대성목재주식회사가 당국에 의해 부실기업체로 단정돼 관리은행에 인수처리될 운명에 놓였다’로 시작해 대성목재의 실정과 종업원들의 성명서 내용을 예리하게 분석 보도했다.

대성목재가 이처럼 부실기업체라는 보도는 일반 국민들로서는 그 부실의 자세한 내용을 이해할 수도 없고 또 당국이 한 일이니까 이건 정책적인 문제라고 만 이해하고 있었다. 다만 대성목재를 살리려는 5600여 명에 달하는 종업원들의 자세가 대단하다는 것이다.

대성목재가 딴 사람에게 넘어간다할지라도 일은 계속될 것이고 따라서 대부분의 종업원들도 그대로 있게 될 텐데, 그렇다면 무엇때문에 종업원들이 이처럼 어려운 일을 자청하고 나선 것일까?

이 어려운 일이란 부실기업체로 단정된데 대한 그들의 공식반응에서 나타나고 있다. 그래서 이 성명서의 골자를 나열해 보면 △우리들은 이 회사의 각 분야에서 일하고 있음으로 이 회사가 부실기업체인가 아닌가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이번 정부 결정에 대해서는 정부의 권위를 위해 그 결정을 번복하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우리가 알고 믿기에는 대성목재가 부실업체가 아닌 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이 업체는 타인에게 처분될 수 없고 우리 5600명 전체 종업원들이 인수할 것을 선언한다. △우리들은 비장한 각오와 결심으로 각자의 전 재산을 바쳐 일금 10여억 원을 갹출하기로 결의했다고 돼 있다.

출처 : 한국목재신문(https://www.woodkorea.co.kr)

정치바람 타기 싫어하는 기업인

이 밖에도 거의 모든 신문들이 사설란에서 이 문제를 다루면서 천우사(대성목재의 모체)를 동정했는데,
6월26일자 <서울경제신문>은 ‘새로운 기업관, 성실해야 발전할 수 있는 환경의 조성’이란 제하의 사설에서 “전택보 씨는 국가와 은행에 미안한 마음을 금할 길 없음을 피력한 바 있다.
이 비운의 기업인이 이 나라 무역증진에 이바지한 과거를 회상하며 천우사의 앞날을 축복해야 할 것이다. 그가 남긴 쓰라린 교훈이 이 나라 산업계에 새 기풍을 진작시키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했고, 같은 날자 <조선일보>는 ‘정치 모르는 전택보 씨에 동정’이란 제하에 “전택보 씨의 대성목재 등 5개 업체가 주 채권자인 조흥은행으로 넘어간다는 발표가 있자 경제계 인사들은 가슴아픈 일이라고 동정어린 한마디씩을 했다.
전 씨에게 동정이 집중된 까닭은 그가 정치바람을 타기 싫어하는 기업인이었다는 점과 우리나라 보세 가공업의 선구자였다는 데에 있는 듯 했다. 전 씨는 조화, 완구 등 보세가공의 각 분야에 거의 손 안댄 곳이 없으며 가공수출분야를 리드해 왔다.

이러한 새 분야의 개척, 확장에 주력했기 때문에 다른 사업에는 관심을 둘 수가 없어 해체를 당하는 쓰라림을 맛보게 된 것이라고, 특히 전씨가 덴마크 명예총영사를 비롯한 많은 국제 단체의 임원을 겸하고 있는데, 한국경제인의 국제적 위상이 내려갈지도 모른다고 몹시 걱정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했다.

적힌 글은 짧으나 매우 의미 심장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6월27일자 <현대 경제일보>는 ‘천우사 계열 5개 업체의 정비가 뜻하는 것’이라는 제목으로, 6월28일자 <서울경제신문>은 ‘영광 사라진 비운의 전택보 씨, 수출의 개척자 끝내 정비 당해’라는 제목으로 이 문제를 다루었으며 아울러 천우사의 역사와 업적과 함께 이 사건의 언저리를 파헤쳐 놓았다.

이 밖에도 이에 관한 많은 기사들이 있는데 그 중에는 ‘비운의 수출왕 전택보 씨’, ‘전경련, 정부의 천우사 정비 방안에 맞서 정면 반발’등 자극적인 표현의 기사제목들을 여러군데서 찾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부실기업의 정리 사실이 발표되자 가장 충격을 받은 것은 무엇보다도 당사자인 천우사계열 5개 업체의 직원들이었다.

글/ 김상혁  shkim@woodkorea.co.kr

출처 : 한국목재신문(https://www.woodkorea.co.kr)

국내 모든 신문들은 이 사실을 경제란 또는 사설란에 10여 일간 대서특필 했다. 한편 전경련(전국경제인연합회)은 그 해 6월26일 긴급이사회를 소집, 연 이틀간의 긴급대책위원회를 열고 부실기업문제에 대한 건의서를 채택해 정부당국에 제출했다.

그 건의서의 내용은 ①민간 상업차관에 대한 투자에 있어 정부의 ‘지불보증제도’를 지양하고 ②부실기업정비반에는 당해 기업주 및 경제분야의 권위자를 참여토록 개편하고 ③갱생이 가능한 기업에는 일정기간의 여유를 줘야 할 것이며 ④부실기업 정리기준을 자본구성 비율에만 치우칠 것이 아니라 산업성, 전망, 국제경쟁력, 대외신용도에 중점을 둬야 한다고 돼 있다.

제②항에 부실기업정비반에 당해 기업주를 참여시켜야 한다는 말은 천우사의 경우 사전에 아무런 예고도 없이 일방적으로 집행했다는 말이며 제④항에 자본구성비율에 치울칠 것이 아니라는 말은 천우사(대성목재의 모체)가 부채를 많이 진것은 사실이나 산업성, 전망, 국제경쟁력, 대외신용도가 있어왔는데 어찌 자본구성비율 그것만이 부실기업의 조건이 될 수 있겠냐는 말이기도 했다.

<중앙일보>는 소집 이틀 후인 6월28일자 신문에 ‘아이러니한 천우사계열 정비, 전경련이 호신운동’이란 제하에 ‘국내 굴지의 기업인 천우사계열 5개 업체가 부실기업체로 몰려 주 채권자인 조흥은행으로 넘어가는 비운을 맞게 되자 전령련이 긴급사후대책을 논의하는 등 비상사태에 돌입한 느낌’이라고 보도했다.

<동아일보>는 ‘부실기업과 부실경제’라는 사설을 통해 ‘자본구성이 부실하지 않은 기업은 천우사 외에 얼마나 될 것인가? 부실기업의 발생은 기업인에게도 문제가 있지만 따지고 보면 정부당국에 더 큰 잘못이 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부실기업정리정책이 객관적기준에 의해 일정한 원칙이 있어야 하는데 그 대상과 범위가 어떠한 기준에 의해 결정되는 것인지 도무지 알려지지 않고 있다’고 논평했다.

글/ 김상혁  shkim@woodkorea.co.kr

출처 : 한국목재신문(https://www.woodkorea.co.kr)

비운의 수출왕, 마침내 부실기업으로 정비돼
설봉은 그날(1969년 6월24일) 집에 돌아와 밤을 꼬박 뜬 눈으로 지새야 했다. 이튿날 아침, 그제야 비로소 자세한 정비 내용을 알 수 있었다. 이 날 국내 7대 일간 신문들은 일제히 이 내용을 크게 보도했는데 그 중 <한국일보>에 개제된 기사 내용을 보면, ‘천우사계열 대성목재 등 6개 업체 정비… 부채늘고 상환어려워, 청와대 내에 설치돼어 있는 부실기업체 정비반(반장 장덕진 씨: 재무부 이재국장)은 6월24일 오전, 전택보 씨가 소유하고 있는 대성목재, 조선피혁, 한국축산, 삼익선박, 신진완구 등 6개 업체의 정비방안을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 확정했다.이날 공화당 정책위원장 백남억 씨, 부총리겸 경제기획원장 김학열 씨, 재무부장관 황종율 씨, 상공부 장관 김정열 씨, 청와대비서실장 이후락 씨 등이 배석한 가운데 확정된 천우사 계열 정비방안은

1)6개 업체 중 천우사를 제외한 5개업체는 주 채권자인 조흥은행이 인수하여 정리 처분하고, 전택보 씨로 부터 완전히 인연을 끊게 하는 동시에
2)천우사는 전택보 씨 소유로 그대로 존속시키며 종합무역상사로 육성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당시 대성목재는 자산규모가 108억, 천우사는 18억, 조선피혁은 19억, 한국축산은 3억, 삼익선박은 6억, 신진완구는 1억 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날 전택보 씨 계열 6개 업체의 정비 방안을 승인하는 자리에서
“1)기업은 자기 자본 조달 능력이 있는 사람이 해야하며 과거와 같이 사채를 쓰더라도 공장만 지어 놓으면 돈을 벌 수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2)그 기업이 잘못되면 그 기업체가 망할 뿐 아니라 그 기업인도 함께 책임지는 기업윤리의 확립이 소망된다.”
고 말했다.

6월25일자에 보도된 기사내용은 각 신문이 거의 같았으나 유독 <경향신문>만은 기사 외에 ‘기자석’이라는 코너에 ‘2개월전까지만 해도 1000만 달러의 현금차관을 들여올 만큼 건전기업인으로 알려진 전택보 씨가 20년간 길러온 대성목재 등 5개 업체를 내놓게 된 데 대해 일부 업계에서는 ‘가혹하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지만, 자기자본 4억7000만원으로 162억원의 대기업을 굴려 왔다는 것이 오히려 불가사의 하다는게 중론’이라고 논평했다.
글/ 김상혁  shkim@woodkorea.co.kr

출처 : 한국목재신문(https://www.woodkorea.co.kr)

한국목재인물사  |   대성목재공업(주)  전택보(全澤珤) 회장 편(50)
청천벽력 같은 뉴스, 부실기업정비

1969년 6월24일, 그날도 설봉은 예전과 다름없이 아침 일찍 일어나 산책을 하고 소공동에 있는 천우사(대성목재의 모체) 사무실로 나갔다. 책상에 앉아 내일이 바로 6·25라는 생각이 들면서 19년전 그날에 있었던 일들, 부산 피난시절, 민족의 수난과 경제파탄에 얽힌 쓰라린 일들을 주마등처럼 되새기며 과거를 회상하고 있었다.
그리고 설봉은 앞으로 천우사가 할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고 있엇다.
이제 천우사가 은행관리로 넘어간지도 어느덧 반년이란 세월이 지났다. 그동안 부끄럽기도 했고, 부자유스럽기도 했고, 또 유능한 사원들이 하나 둘 자기 곁을 떠날 때면 낙심하여 괴로울 때도 한 두번이 아니었으나, 그래도 1000만 달러의 외국차관을 얻어다가 30여 억원의 사채를 은행부채로 대치시키게 되었고 다년간 질질 끌려오며 숙제로 남아 있던 P.L480 잉여농산물 수입물자도 불원간 도착하게 되어 있는 것은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었다.

이런 생각을 하던 설봉은 “천우사의 장래도 반드시 어둡지 많은 않구먼! 한 달에 근 1억원의 사채이자를 꼬박 꼬박 물어야 했는데 이제 이것도 해결되었고, 이제 모든 사원이 한데 뭉쳐 힘써 일하면 회사운영은 다시 호전될 수 있으리라.

그리고 한창 공사 중에 있는 대성목재의 월미도 공장만 완공된다면 거기서 연간 10억여원의 순이익은 어렵지 않게 날 것이고 이렇게만 된다면 적어도 5년 내에 모든 것을 정리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 이르러서는 가슴이 뜨거워 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그날 정오쯤 사무실에 전화가 걸려왔다. 친구인 김성곤 씨로부터 걸려온 전화였다. 전화를 건네받은 설봉은 김성곤 씨의 음성이 심상치가 않음을 직감했다.

그의 목소리는 매우 심각했다. 그 내용인즉슨, 이날 상오 청와대에서 박정희 대통령 주재로 부실업체정비 관계관 회의가 열렸는데 이때, 장덕진 씨(당시 재무부 이재국장)가 제출한 천우사 계열에 대한 정비방안이 승인되었다는 것이었다. 이 전화를 받은 설봉은 눈앞이 캄캄해지고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이 소리는 바로 천우사와 모든 방계업체가 부실기업으로 정비된다는 폭탄선언이었다.
“무슨 소니냐? 우리회사가 하루 아침에 무너져 내린단 말인가!” 정말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글/ 김상혁 shkim@woodkorea.co.kr

출처 : 한국목재신문(https://www.woodkorea.co.kr)

한국목재인물사  |   대성목재공업(주) 전택보(全澤珤) 회장 편 (47)

1968년. 그 해 여름을 설봉은 무겁고 우울한 마음으로 보내야 했다. 그 해는 극심한 가뭄으로 국민전체가 일기예보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는데다가 설봉은 개인적으로 사업상 여러가지로 어려운 문제들이 산적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업상의 문제들은 잘 풀리지 않은 채 여름은 지나가고 가을이 찾아왔다. 설봉에게는 이 가을이 유난히도 슬쓸하게 느껴졌다.

설봉이 잠을 잘 이룰 수가 없어 뜬 눈으로 누워있노라면 자그마한 정원 구석에서 찌르륵대는 귀뚜라미 소리가 그의 마음을 더욱 처량하게 만들었다.
바람소리와 함께 우수수 떨어지는 낙엽소리도 설봉으로 하여금 잠을 못 이루게 했고 ‘나도 이제 많이 늙었구나’하는 생각에 잠기게 하였다. ‘농민들은 몸에 씨를 뿌리고 여름에 김매어 가을에 거두어 들인 것을 겨울에 꺼내먹으면서 인생을 즐기겠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무엇으로 인생을 즐길 수 있단 말인가? 혹시 내가 바로 그런 부류의 사람이 아닐까? 젊었을 때의 이상도 꿈도 이제는 다 사라져 버린 그런 사람은 아닐까?’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설봉은 자기 자신과 지난 날들을 돌이켜 보며 잠을 잘 이루지 못했다.
하지만 설봉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자기의 삶은 조금이라도 남에게 보탬이 돼 주려고 노력했던 삶이었지 결코 자신의 출세나 치부만을 위해 살아온 삶은 아니었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사는 것이 사람답게 사는 것이지 자기 혼자만 잘 살고 제 욕심만 채우려고 한다면 부끄러운 삶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도 해 보았다.

그리고 그는 ‘오늘 날과 같이 사회가 공동체화 돼 가는 세상에 있어서는 개인주의는 용납될 수 없다. 아무리 자유경제체제라 할 지라도 개개인이 제멋대로 벌어 멋대로 쓰라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인생관도 이제는 많이 달라져야 할 것이다’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런데 천우사의 형편은 10월에 접어들면서 더욱 어려워졌다. 재정난이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오랫동안의 사채부담으로 영업이익은 거의 이자로 지불해야 했고 최근에 이르러서는 영업실적마저 부진하여 이자에 이자가 붙어 사업유지를 아주 어렵게 만들었다.

1968년 12월, 마침내 천우사는 은행관리회사가 되고 말았다. 은행관리란 어찌보면 특혜조치다. 왜냐하면 정부당국이 몇가지 이유를 들어 은행으로 하여금 그 기업의 부채를 맡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천우사의 경우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주어졌다.

첫째, 천우사는 다년간 가장 많은 수출실적을 올린 회사로서 국제적 신용도에 있어서도 무시 못할 존재임으로 이를 붙들어 줘야 한다. 둘째, 천우사는 한 고비만 넘기면 다시 살아나서 수출진흥에 공헌을 할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이것은 하나의 특혜조치가 틀림없었다. 그러나 설봉은 마음이 아팠다. 이렇게 정부의 혜택을 받는다는 것이 자기의 신념과 자존심을 무너뜨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때 설봉은 “나라는 존재는 없어지고 마는 것만 같았다. 돌이켜 생각하면 이것이 내 운명이요, 팔자가 아닌가 한다”고 탄식하며 은행관리사가 된것을 몹시 가슴아파 했다.

출처 : 한국목재신문(https://www.woodkorea.co.kr)

1947년에 무역회사 천우사를 설립하여 경영하였다. 이후 대성목재공업주식회사·조선피혁주식회사를 인수하기도 했다.

전쟁은 파괴를 의미한다. 남한은 무에서 출발했다.

그랬더니 朴장관께서 ‘그거 내가 만든 것 아니야. 허정 (許政) 과도정부 때 상공부장관하던 전택보씨 알지. 천우사 사장 말이야. 그 양반이 제일 먼저 사용했어. 들어보니까 좋은 것같아 내가 쓴 거지’ 라고 대답하더군요. ” 이 무렵 朴대통령의 수출에 대한 인식을 보여주는 일화 한토막. 어느 날 朴장관은 朴대통령의 지방순시에 동행했다가 기차안에서 느닷없는 질문을 받았다.”朴장관, 우리나라 옛말에 사농공상 (士農工商) 이라는 말이 있지 않소. 내가 보기에 우리나라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상공농사’ 가 돼야 할 것같아. 朴장관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 당황한 朴장관은 얼떨결에 “각하, ‘상’ 이 ‘공’ 보다 앞서야 한다구요” 하고 되물으며 잠시 생각을 가다듬은 다음 “제 생각에는 ‘공상농사’ 가 더 맞을 것같은데요” 라고 대답했다.그러자 朴대통령은 “물건만 만들면 뭣해요. 팔지 못하면 아무리 많이 만들어도 소용없어요. 수출이 제일이야” 라고 설명했다.

전택보(1901~1980) 보세가공무역

1967년은 박정희 정권의 제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 시작되는 해였다.제1차 경제개발계획도 무역정책에 중점을 두었었지만, 제2차 경제계발계획의 무역정책특색도 첫째는 수출 제1주의의 지속, 둘째는 무역자유화 정책의 촉구, 셋째는 수출 진흥정책의 다양화였다.수출 제1주의의 제3공화국정부는 제2차 계획초년도인 1967년의 수출목표를 3억6천만달러로 책정하였다.
그런데 그해 천우사(사장 전택보)는 1513만 달러의 수출실적을 올려 65년, 66년에 이어 67년에도 또다시 훈장을 탔다. 3년 연속 훈장을 타게 된 설봉은 <천우사 사내보 12월호>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는데 이 글에서 그가 얼마나 보람을 느끼며 흐뭇해하였는지를 엿볼 수 있다.

“금년에도 총 수출액 3억6천만 달러의 정부 목표 중에 합판이 4200만 달러, 피목 및 기타 보세가공품이 3000만 달러, 스웨터가 2500만 달러, 도합 1억 달러에 해당하는 품목이 모두 우리가 개척한 상품들의 수출실적입니다.그 중에서도 자랑스러운 것은 합판수출이었습니다. 처음에는 클레임을 받기도 하는 등 수출에 애로가 많았었으나 차차 품질을 인정받기 시작하면서 수출량이 늘어난 합판수출. 천우사는 대성목재 합판수출 덕분에 1963년 제1회 수출의 날에는 전국 수출업체 중에서 1위를 기록할 수 있었고, 64년 2위를 제외하고는 65년, 66년, 67년 연달아 수출실적순위에서 1위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의 이러한 감회는 그가 평소 주장했던 보세가공과 자신이 직접 개척한 합판수출이 수출진흥에 큰 역할을 한 것에 대한 자부심이기도 하였다.

설봉은 보세가공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설봉이 보세가공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게된 것은 6·25 전란후 수복된 서울에서 수많은 실업자들이 방황하고 있는 것을 본 이후였다.

전쟁으로 생명을 잃은 사람이야 어쩔 수 없다치더라도 살아남은 사람들조차 앞으로 살아갈 길이 막막하게 느껴질 정도로 수복된 수도 서울의 모습은 참담했다.
거리에는 수많은 실업자들이 우글거렸고 전쟁미망인, 고아들은 이리저리 방황하고 있었다. 신문지상에는 연일 생활고로 인한 일가족 집단 자살, 강도, 살인, 사기 등의 사회악 기사가 가득차 있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국민은 극심한 빈곤 때문에 살기가 어려웠고 돈있는 사람들은 그들대로 불안감때문에 하루하루를 떨면서 살아가는 무서운 세상이었다.

세상형편이 이렇게 돌아가는 것을 본 설봉은 우리나라가 잘 살 수 있는 좋은 방법이 없을까 곰곰히 생각하게 됐다. 우리나라는 자원도 없고 변변한 기술도 없다. 약간의 생산시설마져도 6·25전란으로 잿더미 속에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나 아직도 사람은 많다. 그 노동력을 잘만 활용하면 활로가 트일 것이다. 생각이 여기까지에 이르자 설봉은 우리나라가 살길은 보세가공뿐이라고 느끼게 됐다. 지하자원개발이니 수산자원개발이니 개발 대상이 많겠지만 인적자원을 어떻게 개발하느냐가 우선과제이다. 북한 피난민들의 대거 월남, 거기에 인구의 자연증가는 거대한 인적자원을 구성하고 있으나 이 자원을 개방하지 못하고 있다. 이 많은 사람을 잘 활용하면 선진 제국과 경쟁해 이길 수 있다. 공장을 세워놓고도 노동자가 없어서 쩔쩔매는 나라의 기업인이 본다면 부러워할만큼 우리에게는 노동력이 풍부하다. 이 노동력을 이용 못한다는 것은 기업인의 역량부족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저렴한 노동력을 이용해 수공업, 가내공업으로 중소기업을 급속히 발전시키는 것이 적은 자본을 가진 우리가 조속한 시일 내에 실업자를 구제하고 국제수지를 개선시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전제하고 나서 그는 일본과 홍콩으로부터 기술을 도입해서 섬유제품, 2차가공품, 부품생산공장의 설치를 해야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그밖에도 크리스마스 장식업, 조화, 가발, 농구화, 메리야스, 양말, 수예품 등 할일이 얼마든지 있다고 역설했다. 우리국민이 공것을 바라지 말고 우리의 힘으로 우리의 경제난을 타개해 보겠다는 굳은 결의를 가지고 노력한다면 수년내에 억대의 외화를 벌것이 틀림없다고 외쳤다.

그리하여 설봉은 그당시 상공부장관, 재무부장관과 논의해 가칭 ‘가공무역추진위원회’라는 단체를 발기시켰다. 이 위원회의 취지는 우리나라에 없는 원료를 외국에서 도입해 이것을 가공해 수출하는 업체를 돕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합판사업/대성목재

대성목재공업은 일제강점기였던 지난 1936년 조선목재로 출발, 1945년 해방과 함께 손병도씨에게 경영권이 넘어갔다가 1955년 천우사를 새 주인으로 맞은 후 1960년대 합판 1억달러 수출을 주도했다.1936년 조선목재공업로 시작해 86년 동안 인천 향토기업으로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대성목재공업이 동화기업에 흡수합병된다.

1936년 인천 만석동에 “조선목재 공업주식회사”라는 제재소 자리에, 1942년 “대성목재공업주식회사”라는 합판공장을 만든 것이 오늘날의 대형합판공장이 된 것의 효시라고 할 수 있다.대성목재 공업주식회사는 초창기 소규모의 합판공장으로서 콩풀을 사용해서 합판을 만들다가 60년 일산 10,000매 공장으로 늘리고 61년 천우사 전택보씨가 인수하면서부터 일산 42,000매 규모의 큰 합판공장이 되었고, 65년에는 최초로 필리핀에 주재원을 파견하기도 했다.당시에는 필리핀에서 주로 원목을 구입하였는데, 오늘날 우리가 상상하기에는 힘들은 직경 1m정도 되는 불그스레한 라왕원목이 한 달에 4배씩이나 인천 앞바다에 들어오곤 하였다.그 때는 내노라 하는 종합상사도 없었고, 서울상대 출신들이 은행보다 천우사라는 무역회사를 더 선호하는 시절이었는데, 천우사에 입사한 엘리트들이 대성목재에 근무하였던 것이다.

필리핀을 필두로 해서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에 주재원을 파견하기 시작하였고 모두 서울 상대 출신들이 주재원으로 나가는 게, 통상화 되다시피 했다. 그 때는 외국에 나가기도 힘들은 시절이었고, 주재원으로 나가는 것이 영광이기도 한 시절이었다. 대성목재는 근로자가 3,500여명이었는데, 대성목재 월급날이면 인천시내가 술렁이고, 술집, 음식점들이 좋아하던 시절이었다. 65~66년 당시 3,500여명 이면, 90년대초 삼익악기, 영창악기 등이 5,000명인 것과는 대조가 안 되는 것이었다.

전택보 회장 대성목재 월미공장 건설
당시 대성목재에 일반공으로 취직하려면, 브로커에게 일만원씩 주고 취직을 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당시 종업원 월급이 삼만원 정도 할 때이니 알만도 하지 않은가. 당시에는 미국이 엄청난 양의 합판을 수입하였는데 필리핀, 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는 원재료는 있으나, 합판공업을 할 만한 수준이 아니었으므로 비교적 원재료 국가와 거리가 가까운 일본, 한국, 대만 등에 합판공업을 육성시켜, 합판을 만들게 하고, 자기들은 그 합판을 수입해 갔던 것이다.

합판공업이 육성될려면, 그 주위공업도 같이 발달되어야만 한다, 예를 들면, 수지공업, 샌드페이퍼공업, 나이프공업 등등, 당시 일본은 합판기계공업도 함께 육성되어, 우리나라 합판공장의 기계들은 거의 일본에서 수입되었다. 66년에는 일본은 올림픽을 개최하였고, 당시 동경에는 지하철이 동서남북으로 빽빽히 있었던 시절이었다. 합판산업이 한창 잘 될 무렵인 66년~68년 무렵인 것 같다. 당시 대성목재는 천우사의 전택보씨가 운영하고 있었는데, 미국에서 주문량이 폭주하자, 일산42,000매 규모의 만석동 공장으로서는 감당하기가 힘들게 되었고, 이렇게 돈벌이가 잘 되고, 국가산업에도 보탬이 되는 사업이 어디 있느냐고 정부에 건의하여 월미도에 일산 55,000매 규모의 합판공장을 차관을 받아서 건설하게 된다.

건설이 거의 완료되어가는 시점인 69年에 미국은 점차 주문량을 줄이기 시작하였고, 전사장은 차관 이자에 허덕이게 되었다. 정부에서는 장덕진씨(후일 농림부장관)를 팀장으로 하는 부실기업정리팀을 만들어, 대성목재를 조흥은행 관리업체로 만들고, 군부팀인 황필주 사장을 영입하여 운영하게끔 하였다. 그 후로 전택보 회장은 합판산업에서 손을 띄게 된다.

고도성장기 부산 합판산업의 성장과 쇠퇴(1960-1980)

합판은 한국에서 6.25전쟁 후의 복구수요를 기반으로 성장하였다. 그리고 1950년대 중·후반에는 유엔군의 군납수요도 합판산업의 성장에 자극을 주었다. 군납을 통해 품질을 인정받은 한국합판은 1961년부터 미국시장에 수출을 하기 시작하였다. 마침 인건비의 상승과 공해우려로 일본이 합판수출에서 철수하는 시기와 맞물리면서 한국의 합판산업은 1960년대 중반 이후 급속한 성장을 하였다. 1970년대에는 세계 5위의 합판생산국에 세계 1위의 합판수출국이 되었다. 합판산업의 중심은 부산이었다. 1960년대 중반부터 부산은 한국 최대의 합판도시가 되었다. 그리고 세계적인 합판도시가 되었다. 합판이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절 부산은 한국산업의 중심도시였다. 한때 한국수출의 29.2%의 수출을 담당하던 도시가 부산이었다. 여기에는 합판이 절대적인 역할을 하였다. 1970년대 부산에는 당시 세계최대의 합판기업이었던 동명목재를 비롯하여 6개의 대규모 수출합판업체들이 있었는데, 이들 기업은 한국합판생산의 절반을 상회하는 생산을 하였다. 그리고 1970년 동명목재의 생산량은 우리나라 전체 합판생산량의 31.2%를 차지하였다.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 중반까지는 이른바 합판의 시대였고, 부산의 시대였고 또 동명의 시대였다. 그러나 우리나라 합판산업의 성장기반은 취약하였다. 원목의 도입이 안정적으로 이루어져야 했고 저임금이 유지되어야 하는 구조였다. 그런 조건 속에서도 실제로 수익을 내기는 어려웠다. 생산가에서 차지하는 원재료의 비중이 너무 높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한계를 넘어서게 한 것은 정부의 각종 지원이었다. 각종 수출지원으로 합판기업들은 흑자를 볼 수 있었고 성장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외화가득률은 낮았다. 1970년대 말까지 합판은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그러나 제1차 석유파동 이후 등장하기 시작한 자원민족주의로 인해 원목의 구입이 어려워지면서 한국 합판산업은 위기에 직면하였다. 합판가격보다 빠르게 오르는 원목가격과 함께 수출길이 막히면서 합판산업은 위기에 빠져들었다. 마침내 1980년 세계 최대의 합판기업 동명목재가 도산을 하였고 잇달아 기업들이 쓰러졌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에 의한 합판산업의 구조조정이 시행되었다. 동명목재에 이어 부산에서는 태창목재, 반도목재, 광명목재, 대명목재가 퇴출되었다. 6개의 합판수출대기업 가운데 성창기업만이 부산에서 살아남았다. 일반적으로 과잉설비의 정리가 지역별로 균등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관례라고 보면 부산기업들의 집중 퇴출은 이례적인 것이었다. 합판산업의 구조조정 이후 우리나라 합판산업의 중심은 부산에서 인천으로 이동하였다.

합병 후 존속회사는 동화기업이고 대성목재공업은 소멸해 ‘대성목재공업’ 간판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됐다.동화기업은 대성목재공업을 흡수합병한다는 내용의 공시를 지난주 실시했다고 12일 밝혔다. 합병 목적은 경영효율성 증대 및 사업 경쟁력 강화를 통한 기업가치, 주주가치 제고다. 합병기일은 2022년 12월1일이다.동화기업과 대성목재공업의 합병비율은 1대 0이다. 합병법인인 동화기업은 피합병법인인 대성목재공업의 주식을 100% 소유하고 있으며, 합병 시 합병법인은 피합병법인의 주식에 대해 신주를 발행하지 않으므로 합병비율을 1대 0으로 산출했다는 설명이다.

1960년대 중반 이후에는 수출길이 막히면서 수요부족과 설비과잉으로 침체의 늪에 빠져들기 시작해 1968년 조흥은행 주도의 은행관리를 거쳐 1973년 신동아, 1978년 효성그룹으로 사주가 변경된다.

이후 지난 1986년에는 산업합리화 업체로 지정되면서 유원건설과 인연을 맺어 재기의 가능성을 보였으나 1990년대 들어 지급보증을 섰던 모기업이 경영난에 처하면서 1995년에는 경영권이 다시 한보그룹으로 넘어간다. 이후 한보사태가 벌어져 2000년 동화기업이 인수, 창업 이래 사주가 무려 9번 바뀌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한편, 대성목재공업을 흡수합병한 동화기업은 1948년 서울 왕십리에서 제재소를 연 뒤 1960년대 말 인천지역에 36만평 규모 한국제재공업단지를 조성하며 국내 목재산업 발전의 발판을 제공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대성목재공업을 인수하면서 국내 1위 목재기업으로 발돋움했다.

출처 : 인천일보(https://www.incheonilbo.com)

출처 : 인천일보(https://www.incheonilbo.com)

또한 그해 <한국일보>에 게재한 ‘나의 이력서’란 글에서는 그 당시를 회고하며 “당시 대미 합판수출량은 일본이 제일 많았고 그 다음이 대만이었다. 그러나 대성목재가 합판수출을 개척한 이래 한국의 합판수출은 점점 늘어나 오늘에 와서는 원목 한 톨도 안나는 한국이 합판수출 세계1위국가로 성장하게 되었다.그 후 대성목재는 수출호조에 힘입어 확장에 확장을 거듭하였고, 합판수출을 처음 했을 때에 비해 시설은 100%가 늘었다. 최근에는 월미도에 있는 매립지 땅 7만여 평을 매입하여 대규모 합판공장을 건설하고 있다”고 말하였다.

이와 같이 당시 천우사의 수출실적은 대단하였는데 여타 수출업체의 실적과 비교해 보면 1964년도 천우사 수출실적 552만 달러는 국내기업으로서는 대한중석에 이어 2위에 해당하는 수출실적이었다. 그러난 대한중석은 국영기업체였던 만큼 사기업체로는 천우사가 1위를 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1965년도에는 수출실적 825만 달러로 국영기업인 대한중석도 제치고 당당 1위에 올라섰고, 그 후 66년, 67년 계속 수출실적1위를 차지하였던 것이다.

합판은 한국에서 6.25전쟁 후의 복구수요를 기반으로 성장하였다. 그리고 1950년대 중·후반에는 유엔군의 군납수요도 합판산업의 성장에 자극을 주었다. 군납을 통해 품질을 인정받은 한국합판은 1961년부터 미국시장에 수출을 하기 시작하였다. 마침 인건비의 상승과 공해우려로 일본이 합판수출에서 철수하는 시기와 맞물리면서 한국의 합판산업은 1960년대 중반 이후 급속한 성장을 하였다. 1970년대에는 세계 5위의 합판생산국에 세계 1위의 합판수출국이 되었다. 합판산업의 중심은 부산이었다. 1960년대 중반부터 부산은 한국 최대의 합판도시가 되었다. 그리고 세계적인 합판도시가 되었다. 합판이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절 부산은 한국산업의 중심도시였다. 한때 한국수출의 29.2%의 수출을 담당하던 도시가 부산이었다. 여기에는 합판이 절대적인 역할을 하였다. 1970년대 부산에는 당시 세계최대의 합판기업이었던 동명목재를 비롯하여 6개의 대규모 수출합판업체들이 있었는데, 이들 기업은 한국합판생산의 절반을 상회하는 생산을 하였다. 그리고 1970년 동명목재의 생산량은 우리나라 전체 합판생산량의 31.2%를 차지하였다.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 중반까지는 이른바 합판의 시대였고, 부산의 시대였고 또 동명의 시대였다. 그러나 우리나라 합판산업의 성장기반은 취약하였다. 원목의 도입이 안정적으로 이루어져야 했고 저임금이 유지되어야 하는 구조였다. 그런 조건 속에서도 실제로 수익을 내기는 어려웠다. 생산가에서 차지하는 원재료의 비중이 너무 높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한계를 넘어서게 한 것은 정부의 각종 지원이었다. 각종 수출지원으로 합판기업들은 흑자를 볼 수 있었고 성장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외화가득률은 낮았다. 1970년대 말까지 합판은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그러나 제1차 석유파동 이후 등장하기 시작한 자원민족주의로 인해 원목의 구입이 어려워지면서 한국 합판산업은 위기에 직면하였다. 합판가격보다 빠르게 오르는 원목가격과 함께 수출길이 막히면서 합판산업은 위기에 빠져들었다. 마침내 1980년 세계 최대의 합판기업 동명목재가 도산을 하였고 잇달아 기업들이 쓰러졌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에 의한 합판산업의 구조조정이 시행되었다. 동명목재에 이어 부산에서는 태창목재, 반도목재, 광명목재, 대명목재가 퇴출되었다. 6개의 합판수출대기업 가운데 성창기업만이 부산에서 살아남았다. 일반적으로 과잉설비의 정리가 지역별로 균등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관례라고 보면 부산기업들의 집중 퇴출은 이례적인 것이었다. 합판산업의 구조조정 이후 우리나라 합판산업의 중심은 부산에서 인천으로 이동하였다.

대성목재공업(주) 전택보(全澤珤) 회장 편 (42)
1964년 사상처음으로 수출 1억 달러를 돌파한 11월30일을 기념하기 위해 그날을 수출의 날로 정한지 3년 째 되는 1966년 11월30일, 그러니까 제3회 수출의 날 기념식에서는 수출 무역에 공로가 많은 43개 업체가 선정돼 시상되었는데 그 가운데 천우사(사장 전택보)는 수출실적이 제일 많아 금탑산업훈장을 받는 영광을 차지하였다.이해 정부는 총 수출 목표액을 2억5000만 달러로 책정했는데 기업체별 실적을 보면 천우사가 1073만 달러로 선두를 달렸고 그 뒤로 대한중석이 1014만 달러, 그 다음은 동명목재(980만 달러), 성창기업(810만 달러), 영흥상사(645만 달러), 대창기업(573만 달러)의 순위를 이루었다.
이에 대해 <현대경제일보>는 ‘조국 근대화의 수출역군’이란 제목 하에 천우사를 포함한 우수수출 업체에 대한 기사를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지난 1964년 11월30일 이래 주목할 만한 일은 수출이 양적인 면에서 증가현상과 더불어 질적인 면에서 수출 구조가 점차 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1965년 이전만 해도 수출 상품의 구성비율은 공산품 보다는 농산품 위주로 돼 있었으나 1965년 부터 정부에 의한 수출 정책이 크게 효과를 보여 공산품의 수출이 1억달러선으로 상승되었다.

특히 지난 1964년 11월30일 이래 1966년 11월30일까지 3년 동안 수출생산업의 기수로서 줄곧 1위를 달려 그 위치를 한번도 다른 사람에게 뺐기지 않은 천우사의 경우만 봐도 올해의 수출목표액 1300만 달러로 지난 10월 말 현재 1073만 달러의 실적을 올려 단위 수출 상사별로는 수위를 차지하고 있는데… 그 중 합판은 천우사 수출고의 주축을 이루고 있는 품목이며 나머지는 섬유제품을 비롯해 잡화, 완구, 트랜지스터, 라디오 등으로 돼 있다. … 천우사는 일반 가공무역과 보세가공무역이 2대 산맥으로 그 위치를 더욱 높이고 있다.…그런데 천우사의 경우 오늘날과 같은 영광의 자리를 구준히 쌓아온 것은 현재 천우사가 고용하고 있는 5, 6천명의 공원(工員)들이 노력한 결과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사장 전택보 씨의 기업인으로서의 뚜렷한 기업이념이 강력히 뒷바침하고 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바이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전택보 사장은 항상 우리나라는 과잉 인구에 의한 유휴노동력이 많은 대신 이와는 대조적으로 원자재의 부족 내지 고갈상태를 언제나 주장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와같은 여건을 타개하기 위해 자본이 많이 소요되는 대기업보다는 돈을 많이 필요로 하지 않고 유휴노동인구를 보다 많이 흡수할 수 있는 중소기업의 가공무역과 보세가공산업을 육성하면서 가까이는 사업에 종사하는 사람의 생활향상을 도모하고 멀리는 국민경제의 발전에 기여해야 한다고 주의 사람들에게 곧잘 말한다는 사실을 보아도 그의 기업이념이 어떤 목적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쉽게 상상할 수 있다’라고 적어 놓고 있다.

1914년 문천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그 해 말 부모를 따라 북간도(北間島)로 이주, 용정(龍井)에 있는 영신학교(永新學校) 고등과를 1918년에 졸업하고, 이듬해 모교인 영신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1920년 용정중앙교회에서 김정신과 결혼 현재·억재·순재 3남을 두었다.고학생은 인삼장사란 인삼 엑기스를 파는 장사를 하는 것을 말한다. 인삼 엑기스 제조 공장에서 인삼 엑기스를 도매가격으로 사서 순경이나 공장직공들에게 파는 것이 인삼장사였다. 설봉도 처음에는 인삼장사를 했다.

설봉은 정측영어학교에서 영어실력이 점점 붙어갔다. 남보다 비교적 암기력이 뛰어났던 설봉은 그날 배운 것을 그다지 복습을 하지 않아도 단어를 외울 수가 있었다.
후일 설봉은 영어의 기초를 이곳에서 닦았다고 말하였다

고베 고등상업학교 입학한다. 고베는 일본의 대표적인 국제항구 도시였다. 국제도시에 걸맞게 외국인 거주자들도 상당히 많은 편이었고, 인종 차별도 다른 곳과 비교하면 별로 심하지가 않았다.

이듬해 봄(1924년) 설봉은 고베고상에 응시를 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낙방이 되었다. 동경 대지진 난리통에 별다른 준비없이 시험에 응했기 때문이었다. 떨어지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설봉은 그 이듬해(1925년) 다시 시험을 치뤘고 이번에는 합격을 했다

그가 고베고상을 졸업할 무렵 심한 불경기여서 조선인이 취직자리를 구하기란 하늘의 별따기였다. 그는 재학 시절 여선교사의 도움으로, 뉴욕내셔널시티은행 고베지점에 겨우 취직할 수 있었다. 그곳에는 미국인 15명과 일본인·중국인 30여명이 있었고 조선인은 전택보 혼자였다.

1929년 간도로 돌아왔다. 아내와는 9년 만에 함께 살게 된 것이었다.전택보는 다시 만주 영신학교 교사로 교편을 잡았다가, 고향으로 돌아와 함경남도 금융조합에서 일했다. 간도 교하현부근의 500정보를 구입, 선만주식회사 라는 대규모 농장을 경영하다가 8·15 광복을 맞이하여, 1945년 10월 단신 월남하였다.

전택보가 만주에서 농장 경영을 시작했을 무렵에도 벼농사는 수익성이 좋았다. 그러나 이때 그는 밤새우기 일쑤인 조선일보사 근무 때 얻은 지병인 심장경련증이 악화되었다. 한번 발작하면 숨이 막혀 죽을 것만 같았다. 그는 서른아홉 살 되던 해 12월 만주 지린(吉林)병원에 입원해 6개월 동안 병상에 누워 있어야 했다. 그가 조금씩 건강을 되찾으면서 농장도 차츰 궤도에 올랐다. 그의 농장이 큰 집단취락으로 되고 보니 자녀교육 문제가 시급한 과제로 떠올랐다. 그래서 전택보는 농장 안에 중국인 학교를 세우는 한편 조선인 교사를 초빙해 조선인 자녀들을 따로 가르치게 했다.

이런 상황에서 설봉은 고베고상 동창인 지우선씨와 사업을 하기로 결심했다. 잣을 가을에 사서 저장해 뒀다가 이듬해 봄에 팔면 이익을 보지 않을까 생각해서, 금융조합을 그만둘 때 받았던 퇴직금을 출자해 잣장사를 시작해 보았다. 그로서는 첫 사업인 셈이다.

그러나 이 첫 사업에서 그리 재미를 보지 못했다. 예상한 만큼 잣값도 오르지 않고 품질도 변질되고해서 실패를 하고 말았다. 다음에는 쌀 장사에 손을 대어 보았다.

추수기의 쌀값과 다음해 여름철 쌀값의 가격차이를 노린 장사였는데 이 장사에서는 상당한 재미를 보았다. 이제까지 기껏해야 100원 남짓한 월급을 받아왔던 그가 한달에 천여원하는 거금을 손에 쥐게되니 세상이 온통 제것만 같았다.쌀 장사에 재미를 본 설봉은 소장사에도 손을 뻗쳤다. 남만주 지방의 소값은 싼 반면에 용정의 소값은 상당히 비싸다는 것에 착안해서 소장사에 투자했던 것이다.

소장사에 투자를 한 것이 예상한 대로 이득이 많이 남아 돈을 많이 벌었다.

그러나 이것은 살아움직이는 생명을 다루는 장사였기 때문에 예상밖의 귀찮은 일들이 많았다. 그래서 좀 더 안정성있는 사업을 하기로 마음먹고 길림성 근처의 교하현으로 이사가서 정미소를 차렸다.

이 사업은 시설만 있으면 별로 자금이 없어도 된다는데 착안하여 시작한 사업이었다. 당시 길림성 교하현 근처에는 상당수의 우리나라 농민들이 벼농사를 주로 하며 살고 있었다.

농민들은 추수때 거두어 들인 벼를 마당에 쌓아둔채 저장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이 근처 정미소에 맡겨두었다가 필요한 때에 팔아 쓰고 있었다. 정미할 쌀은 맡겨둔 농민들의 요구에 따라 그때에 시세에 맞춰 결재를 해주면 되었는데, 농민들에게서 위탁받은 쌀을 하얼삔으로 보내어 바꾼 돈을 농민들이 결재를 요구할 때까지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는 이점이 있었다.

정미소를 하면서 설봉은 톡톡히 재미를 보았다. 그리하여 설봉은 이곳에다 아담한 새집을 짓고 부모님과 동생들을 데려다가 같이 지낼수 있게 되었다. 평생동안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자기돈으로 자기집을 지은 것이었다.

정미소 사업이 일단 본 궤도에 오르자 정미소는 동생 택완에게 물려주고 설봉은 북만주 지지하루에 가서 중국인이 경영하던 좁쌀 정미사업을 인수하였다. 지지하루는 겨울이 되면 기온이 영하 40~50도까지 떨어지는 추운지방이었다.

집밖에만 나가면 엄청난 추위 때문에 몇 겹의 옷을 입고도 두툼한 털옷으로 또다시 무장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다닐수가 없는 지방이었다.

이런곳을 설봉은 바쁘게 돌아다니며 좁쌀장사를 했다. 그 다음으로 손댄 것이 농장건설이었다. 농장건설에 관한 계획은 즉흥적인 발상이 아니었다.

그는 고베고상 시절에 이미 만주 전역의 농업조사 보고서까지 쓴 경험이 있었다.

고베고상에서는 매년 성적이 우수한 학생 10여명을 선발하여 만주, 중국 등지로 해외여행을 시켰는데 설봉도 고베고상 시절에 우수학생으로 뽑혀 여순, 대련, 북경, 장춘, 하얼삔 등을 다녀오는 여행을 한 일이 있었다.

그때 만주전역의 농업보고서를 쓴 것이 농장건설을 해야되겠다는 생각을 하게했던 것이다.

벼란 것은 원래 남방작물이므로 만주에서는 기껏해야 일본인들이 안동현에서 조금 심고 있었을 뿐 다른데는 벼동사가 전여 없었다. 만주벌판에 벼 농사가 보급되기는 순전히 조선인 이주자들에 의하여 이뤄졌던 것이다.

조선 농민들은 벼가 원래 기후와 환경에 비교적 잘 적응하는 작물인 것을 알고 점차 북만주에까지 보급했던 것이다.

당시 일제의 식민정책으로 문전옥답을 억울하게 빼앗기고 고향을 떠나온 우리 농민들은 근 100여만명이나 되었는데 그들의 노력으로 벼 농사가 소련 영내에까지 보급되었다는 사실을 설봉은 그의 학창시절 조사보고서에서 지적해 냈던 것이다.

농사도 잘되었고 농민 수입도 괜찮았지만 만주 특유의 기후 탓으로 문제가 있었다. 만주는 겨울이 길고 여름이 짧기 때문에 농민들은 여름에 번 수입을 겨울에 다 없애버렸다. 전택보는 농민들이 농사만 지어 가지고는 재산을 만들기가 어렵다고 판단해 농민들에게 축산을 장려했다. 또한 만주에서는 해산물이 귀했으므로 만주 토문(土門)에다 ‘동만(東滿)상회’라는 회사를 차리고 수산물 판매사업을 시작했다. 만주 생필(生必)주식회사를 통해 주로 명태를 팔았다.

설봉은 신참에서 멀지 않은 육가자(六家子)라는 역에서 약 10리를 들어간 곳에 약 5백정보의 무인지답을 샀다. 이 땅은 예전에 청나라 사람들이 살던 곳으로 만주사변때에 일본군에 의해 점령된 곳이었다.

설봉은 여기에다 대단위 농장을 건설하기로 결심하고 일에 착수했다. 당시 만주에는 마적들의 횡포가 심하였으므로 마을을 만들려면 토성이나 석성을 쌓고 망대를 세우는 것이 우선적인 일이었다. 우선 넓이 12척, 높이 12척의 토성을 쌓았다.

그리고 농민들에게 집 지을 자금을 대 준다고 하니까 청나라 사람 130호가 들어왔다. 조선 농민들에게는 집 지을 자금 외에 농우까지 마련해주고 약 30호를 입주시켰다.

만주는 겨울이 긴탓으로 가을에 추수한 뒤로는 기나긴 겨울을 술먹고 노름을 하는 것으로 재산을 탕진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를 생각하고 설봉은 농장 농민들에게 축산을 권장했다.

이러는 중 전쟁은 막바지에 접어들고 전세는 일본이 패배할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다. 일본이 패망하면 이제껏 해왔던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기에 설봉은 농장을 정리하고자 했다.

그러나 원매자가 선뜻 나서지 않았다. 겨우 만철에 교섭해 50만원에 팔기로 결정했다. 대금지불기일이 8월8일이었는데 일본의 패전으로 돈을 받아내지 못했다.

정미소와 농장경영에 몰두하며 북만주를 누비고 다니던 설봉은 우연한 기회에 명태장사에도 손을 댔다. 이때가 1941년이었는데 만주에서는 해산물이 매우 귀한 때문이었다. 더욱이 전쟁이 가열되면서 만주에서는 해산물을 찾아볼 수가 없을 정도로 해산물이 귀했다.

당시 만주의 큰 도시에는 지금의 고시가격과 비슷한 제도가 있어서 일정가격 이상 받을 수 없도록 돼있었고 이를 위반할 때에는 처벌을 받도록 돼 있었다.

그런데 번양(藩陽)역에서는 고시가격제도가 없어서 그 곳으로 해산물을 수출해서 팔기도 했다. 그러다가 철도경찰에 끌려가 유치장 신세를 지기도 했다. 번양이 봉천시에 편입된 사실을 모르고 장사를 하다가 고시가격위반으로 붙잡혀갔던 것이다.

이런 일이 있은 후 얼마 지나서 북경이나 천진에는 고시가격제도가 없다는 것을 알아내고 북경이나 천진 등으로 수출을 하기로 했다.

수출절차가 까다로왔으나 화신과 교섭을 해서 천진출장소 명의로 명태 수출허가를 얻어 수출하는데 성공했다. 14차분의 건명태를 천진에 끌어내리니 굉장한 분량이었다. 모두들 깜짝 놀랐다.

그러자 소문이 사방에 퍼지면서 천진과 북경에 있는 조선인 거간꾼들이 저마다 팔겠다고 나서는 것이었다. 한 쾌를 8원씩 팔아주면 구전으로 거기에서 1원씩 주기로 약속했다.

그래서 팔기 시작한 것이 며칠 사이에 전량을 모두 팔아 치울 수가 있었다. 명태 한쾌에 투자된 돈이 운송비까지 합쳐 1원15전이었으니까 구전을 제하고도 엄청난 돈이 들어오게 되었다. 명태장사로 번 돈이 70만원이란 거액이 됐다.

1945년 미군정청 이재과장을 맡았다 그만두고, 1947년에 천우사(天友社)를 설립하여 본격적으로 사업에 투신, 무역업을 개척하였다. 서울로 환도한 뒤 천우사의 무역업만으로는 발전의 한계가 있음을 느끼고 생산업체를 건설할 생각을 굳혔다.

그러니까 천우사의 간판이 걸린 것이 1947년 3월 8일이었고, 천우사가 간판을 내걸고 제일 먼저 손을 댄 것이 ‘종이 장사’였다.

1945년 10월8일, 드디어 설봉은 가족을 함흥에 남겨둔 채 남쪽행 기차에 올랐다. 기차는 화물차였는데 사람이 어찌나 많았던지 기차가 38선 근처에 도착하기까지 시종 화물차 지붕 위에 올라 있어야 했다.

그 당시만 해도 그리 감시가 심하지 않았기 때문에 38선을 걸어서 넘었다. 서울에 도착해 소복여관(현 도큐호텔 자리)에 숙소를 정했다.

그리고 나서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이 전에 몸담고 있던 조선일보사였다. 그 당시 조선일보사는 극심한 경영난으로 방응모씨는 소유주식의 절반을 이중문이라는 사람에게 125만원에 팔아 그와함께 공동경영을 하고 있었다.

설봉은 여관에 들어앉아 앞으로의 할일을 놓고 생각해 보다가 당시 미군정의 경무부장으로 있는 조병욱씨를 찾아갔다. 다른 사람의 취직자리를 부탁하러 찾아갔던 것인데 도리어 그에게 붙잡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즉 설봉은 경무부장 밑에 이재국장이 됐다.

미군정 시대라 이재국장은 미국인 한명, 한국인 한명 이렇게 둘을 두고 있었다. 이재국장을 한 6개월 하고 있는데 조병욱 부장이 이번에는 자기와 같이 정치를 하는 것이 어떠냐는 부탁을 하길래 거절하고 이재국장 자리도 뿌리치고 나와버렸다.

그후 1946년 봄에 온가족을 데리고 38선을 넘었다. 그때는 38선을 넘기가 조금 힘들어져 있었다. 서울에 와서는 잠시 효자동에 있는 효자여관에 묵으면서 집을 구하러 다녔다. 그때 마침 청운동에 있는 조그만 기와집을 일금 10만원에 살 수 있었다.

청운동 집에서 온가족이 오랜만에 함께 모여 살림을 꾸미고 들어앉으니 마음이 여간 기쁘지 않았다.

이 무렵 우연히 고베고상의 동창생 김인형씨를 만났다. 그는 대한상사라는 무역업을 하고 있었는데 자기는 장사할 줄을 잘 모르니 같이 해 보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설봉은 그 회사의 부사장이 됐다.

설봉은 부사장으로 일을 하고 있으면서도  단독으로 대외 무역을 할 수 없을까 고민하며 돈줄을 물색하고 있었다. 그때 김상필씨로부터 이화대학 총장 김활란씨를 소개받았다.

김활란 총장은 학교재단 기금 중 500만원을 선뜻 빌려주었다. 설봉은 이 돈을 장사 밑천으로 하여 조선일보 사옥 3층에 방 하나를 빌려 사무실을 차렸다.

이것이 바로 지금의 <천우사>의 시작이었다. 그러니까 천우사의 간판이 걸린 것이 1947년 3월 8일이었고, 천우사가 간판을 내걸고 제일 먼저 손을 댄 것이 ‘종이 장사’였다.

조선일보사에 사무실이 있었던 만큼 창고도 마음대로 얻어 쓸 수 있었고, 판매처를 얻기도 안성맞춤이었다. 당시의 무역은 마카오 중심이었다.

국산품이란 말조차 생소하던 시절이었으니까 국민들 생활필수품은 대부분 마카오에서 조달됐다. 그때 신사들이 마카오 양복에다 마카오 구두를 신어야 행세를 할 수 있었던 시절이었다. 

이런 시절에 천우사는 마카오 무역선에 싣고 온 양복지 지물류 등을 가지고 장사를 시작했다. 적은 자본이라 마카오까지 가서 무역을 할 수는 없었고, 상인들이 가지고 들어오는 물건을 사서 팔았다.국산품이란 말조차 생소하던 시절이었으니까 국민들 생활필수품은 대부분 마카오에서 조달됐다. 그때 신사들이 마카오 양복에다 마카오 구두를 신어야 행세를 할 수 있었던 시절이었다. 이런 시절에 천우사는 마카오 무역선에 싣고 온 양복지 지물류 등을 가지고 장사를 시작했다. 적은 자본이라 마카오까지 가서 무역을 할 수는 없었고, 상인들이 가지고 들어오는 물건을 사서 팔았다.

1954년 마닐라, 1960년 누욕과 도쿄 수출거점 설치, 한국축산 개발 설립

이것이 1954년 대성목재공업주식회사(大成木材工業株式會社)·조선피혁주식회사를 인수하게 된 동기이다. 그는 국내 동업자끼리의 경쟁보다는 해외시장 개척에 더 적극적으로 나섰다.그래서 1960년 3월 우리 나라 최초로 합판을 수출하게 되었다. 그 뒤, 합판 수출은 우리나라 수출의 주품목으로 각광을 받게 되었다. 1964년 신진완구주식회사·신진수출주식회사(新進輸出株式會社)를 설립하였고, 그 해 천우사는 552만 달러를 수출하여 국내 민간기업 중 1위를 차지하였다.

1965년에는 조선피혁을 강남공업(江南工業)으로 개칭하고, 한국축산개발주식회사와 삼익선박(三益船舶)을 설립하였고, 제2회 수출의 날 수출실적 제1위로 동탑산업훈장을 수상하였는데, 이 기록은 1967년까지 이어졌다. 천우사의 전성기를 맞은 것이다.

기독교 가정에서 성장한 탓으로 신앙심이 두터웠고, 독실한 기독교인으로서 그는 폭넓은 사회활동을 하였다. 1947년 이화여자대학교 이사로 취임한 것을 비롯해서, 1953년 조선일보사 대표취체역, 1957년 유네스코후원회 회장, 1959년 주한 덴마크 명예영사, 1961년 포풀라협회 회장, 1963년 국제법학회 부회장, 1963년 한국신학대학 이사 등 각계에서 눈부신 활약을 하였다.

한편, 재계에서도 8·15광복 후 대한상의(大韓商議) 재건운동, 한국무역협회 창립, 한국경제협의회 창립 등에 주도적 역할을 하여 경제계의 지도자로서 큰 업적을 남겼다.

4·19혁명 뒤 허정(許政)과 함께 과도정부 수립에 공헌한 인연으로 상공부장관에 오르기도 하였으나, 35일간의 단명으로 끝났다. 정부는 그의 국민경제발전에 기여한 공적과 민간경제외교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하였다.

우리는 저렴한 노동력을 이용해 수공업, 가내공업으로 중소기업을 급속히 발전시키는 것이 적은 자본을 가진 우리가 조속한 시일 내에 실업자를 구제하고 국제수지를 개선시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전제하고 나서 그는 일본과 홍콩으로부터 기술을 도입해서 섬유제품, 2차가공품, 부품생산공장의 설치를 해야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그밖에도 크리스마스 장식업, 조화, 가발, 농구화, 메리야스, 양말, 수예품 등 할일이 얼마든지 있다고 역설했다. 우리국민이 공것을 바라지 말고 우리의 힘으로 우리의 경제난을 타개해 보겠다는 굳은 결의를 가지고 노력한다면 수년내에 억대의 외화를 벌것이 틀림없다고 외쳤다.

그리하여 설봉은 그당시 상공부장관, 재무부장관과 논의해 가칭 ‘가공무역추진위원회’라는 단체를 발기시켰다.
이 위원회의 취지는 우리나라에 없는 원료를 외국에서 도입해 이것을 가공해 수출하는 업체를 돕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천우사사장 전택보씨(사진)가 19일 상오11시25분 서울 신교동자택에서 심장마비로 급사했다.
향년 80세. 고전사장은 일본신호고상을 졸업, 일찌기 실업계에 투신하여 보세가공무역을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개척하는등 한국경제계에 큰기여를 했다.

1924년 봄 전택보는 고베고상(神戶高商)에 응시했다. 결과는 낙방이었으나 이듬해 다시 시험을 쳐서 합격했다. 그가 고베고상을 졸업할 무렵 심한 불경기여서 조선인이 취직자리를 구하기란 하늘의 별따기였다. 그는 재학 시절 여선교사의 도움으로, 뉴욕내셔널시티은행 고베지점에 겨우 취직할 수 있었다. 그곳에는 미국인 15명과 일본인·중국인 30여명이 있었고 조선인은 전택보 혼자였다. 그는 민족 자긍심을 지킨다는 마음으로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다. 항구도시 고베에는 조선인 막노동자가 몰려와 살고 있었다. 조선인이 경제적 하층구조의 태반을 차지하자 ‘조센징’ 차별도 노골적으로 바뀌어 갔다. 그것이 전택보에게 고민거리를 던져주었다. 취직을 했으니 아내를 룽징에서 데려올까 생각했지만, 아내에게 조센징이란 비아냥거림을 듣게 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아내와 떨어져 마냥 고베에서 일할 수도 없었기에 고민 끝에 그는 룽징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몇 달만 참으면 하얼빈이나 펑텐 지점으로 보내주겠다는 지점장의 만류도 뿌리치고 1929년 간도로 돌아왔다. 아내와는 9년 만에 함께 살게 된 것이었다.

 1947년 3월 8일 천우사(天友社)를 세우고 무역업에 뛰어들었다.

천우사를 설립한지 얼마 안돼서인데, 일본 유학시절 때부터 잘 알고 지냈던 박찬빈 이란 친구가 설봉을 찾아왔다.

자기는 중국CIC(중국 군대의 비밀단체)의 책임자인 조자청과 손잡고 일하는데 ,중국에서 물건을 가지고 올테니 팔아 달라는 것이었다.

설봉은 그러마고 했더니 얼마 후에 그는 복사지 한 배를 가득 싣고 들어왔다. 복사지는 그 당시 매우 귀한 물건이었기 때문에 쉽게 팔 수 있었다. 그리고 복사지 대금조로 중석(重石)을 한 배 실어주었다.

그러니까 두 번 장사를 한 셈이었다.

당시 중석은 일본인들이 채광해 놓고 미쳐 실어가지 못한 것이 전국 곳곳에 방치 된 것이 많이 있었음으로 어렵지 않게 실어 줄 수 있었다.이것이 천우사의 첫 번째 큰 장사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장사에서 설봉은 수백만원을 벌었다.

때는 1947년 여름쯤이었고, 천우사 간판을 건지 불과 3,4개월 밖에 안된 때였다.

그러나 매번 행운만이 따르는 것은 아니었다. 1947년 초가을 쯤이었는데 봉명석이라는 사람이 찾아와서 자기는 상해에서 신문용지를 구해 올 수 있다고 했다.  

그때는 신문 용지가 아주 귀한 때라 천우사는 곧 그와 손을 잡고 신문용지 거래를 시작하기로 했다. 그는 신문용지를 구하기 위해서는 선금이 필요하다고 해서 설봉은 선금 600만원 외에도 동아일보의 600만을 비롯해 여러 사람에게서 모두 6000만원을 마련해 그에게 넘겨줬다.

그러나 그가 상해로 돌아간지 석 달이 넘도록 감감 무소식이었다. 사기를 당한 것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봉명석은 그 돈을 모두 유흥비로 탕진해 버렸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설봉은 자기 돈 600만원 뿐만 아니라 6000만원의 큰 빚쟁이가 되고 말았다. 천우사는 이때 완전 파산 상태에 빠지게 됐으며 이화재단 김활란씨에게서 빌린 돈 500만원의 밑천까지 전부 날려버렸던 것이다.

이때부터 설봉은 날마다 빚 독촉을 받게 됐는데 하루는 모 명문학교 사친회 회장이 천우사 사무실을 찾아와서 ‘내 돈 500만원을 내놓으시오’ 안 내면 죽이겠다고 설봉의 멱살을 잡고 차마 입으로 할 수 없는 욕설을 마구 퍼부어 댔다.

이때 사원들이 달려들어 떼어놓긴 했으나, 이때 설봉이 받은 고통과 마음의 상처는 이루 형언할 수 없었다.

옷을 찢긴 채 (조선일보)3층 천우사 사무실에 멍하니 앉아있던 설봉은 ‘저기 전찻길에 뛰어내려 죽고싶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때 간부 사원들은 자칫하면 사장이 자살이라도 하지 않을까 걱정이 돼 의논 끝에 사장을 해외로 피신 시키기로 결정을 했다.

‘사장님 6개월 동안만 해외에 나가서 피신해 계십시오. 그동안 우리가 국내에서 뒷 처리를 할테니, 사장님은 해외에서 활약해 주십시오’ 하고 출국을 간곡히 권했다.이리하여 설봉은 비밀리에 서울을 빠져나와 홍콩 행 비행기를 타게 됐다.때는 1948년 4월 설봉은 해방 후 처음으로 해외에 나가게 됐던 것이다.

빚에 몰린 설봉은 비밀리에 서울을 빠져나와 홍콩 행 비행기를 탔다.

때는 1948년 4월, 설봉은 해방후 처음으로 해외 여행을 하는 셈이었다. 설봉은 홍콩에 도착하자 우선 뉴욕 내셔날 시티뱅크 홍콩 지점을 찾아갔다. 이 은행은 설봉이 일본 고베에 있을 때 근무한 경험이 있는 은행이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은행 고문으로부터 미리 소개장을 받아왔기 때문이었다.

설봉은 소개장을 내어놓고 협력을 구했다. 그랬더니 지점장은 선뜻 홍콩에서 가장 실력있는 지물상인 치생공사(治生公司)를 소개해 주는 것이 아닌가.

홍콩 지점장은 설봉에 대한 첫 인상을 좋게 느꼈던 모양이다. 그 즉시로 설봉은 홍콩의 치생공사와 계약을 체결하고 무역을 시작했다. 방법은 물물교환방식이었는데 치생공사가 지물을 선적해 서울에 보내면 천우사는 대신 오징어를 사서 그 배에다 실어 보낸다는 조건이었다.

그러니까 지물 대금을 먼저 치를 필요없이 오징어를 사서 실으면 되는 장사였다.

드디어 신문용지 50톤을 실은 첫 배가 부산에 도착하였다. 그러자 국내에 있던 천우사 사원들은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해서 지물을 팔고 그 돈으로 오징어를 구해 그 배에 실어 보냈다.

이러기를 3개월동안 계속하니 빚의 3분의 1을 갚을 수 있게 됐다.

설봉은 홍콩에 피신해 있으면서 계속 지물을 실어 보냈다. 한편 치생공사는 황옥당이라는 사람을 한국에 파견해 천우사의 무역업무를 감독케 하였다.

이런 식으로 무역을 6개월간 계속한 결과 빚의 절반을 갚을 수 있었다.물물 교환단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무역이었지만 서로 믿고 했기 때문에 번거롭지도 않고 사업도 잘 돼 좋았다, 치생공사는 천우사의 은인이나 다름없었다.

날이 갈수록 치생공사와의 무역은 더욱 번창해져서 한때는 전국 지물 수입량의 거의 절반을 천우사가 차지 했다.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한국의 무역에도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홍콩 일변도의 무역에서 대일 무역이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행운이 설봉을 찾아왔다. 어느날 유동석이란 사람이 찾아와서 조선농회(朝鮮農會, 오늘날 농협과 비슷한 기관)에서 수집한 가마니 수십만장을 일본에 수출할 수 있는 허가를 받아 줄 수 있으니 그걸 한 번 해 보라고했다.

그런데 그 때 조선농회 농회장을 최태용씨라는 사람이 하고 있었는데 최태용씨는 영흥 사람이었고 설봉이 영흥에서 금융조합이사로 있을 때 어느정도 안면이 있는 사이여서 어렵지 않게 천우사가 대일 가마니 수출업자로 지명될 수 있었다.

당시 농회에서 수집해 놓은 가마니를 체크해 보니 그 양을 다 일본으로 실어 나르려면 배가 17척이나 필요한 방대한 양이었다.

일본의 수입상은 제일물산이었는데 1949년 한 해는 온통 가마니 수출로 돈을 벌다 시피했다. 해방 후 민간 무역으로 일본과의 교역은 이것이 처음이었으며 그때 가마니 수출대금은 약 30만 달러에 이르렀다.

천우사는 1950년 6월 24일 인천항에 신문지와 양복지 등 대규모 물자를 수입해 놓고 있었다. 그날은 토요일이어서 통관을 26일 월요일로 미루고 있었는데 뜻밖에도 6·25전쟁이 터지고 말았다.부산 부두에는 천우사 화물도 잔뜩 쌓여 있었다. 군의 통고를 받은 전택보는 화물 처리 문제로 고심했다.

전택보는 전쟁이 끝나기만을 마냥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남포동에 전세로 점포를 얻어 다시 무역업을 시작했다.

출처 : 주간조선(http://weekly.chosun.com)

그는 천우사의 무역업만으로는 발전에 한계가 있음을 깨닫고 생산업체를 건설할 생각을 굳혔다. 이것이 1954년 대성목재공업주식회사·조선피혁주식회사를 인수하게 된 동기이다. 그는 국내 동업자끼리의 경쟁보다는 해외시장 개척에 더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래서 1960년 3월 한국 최초로 합판을 수출하게 되었다. 그 뒤 합판은 한국 수출의 주요 품목으로 각광을 받게 되었다. 1964년 신진완구주식회사·신진수출주식회사를 세웠고 그해 천우사는 552만달러를 수출, 국내 민간기업 제1위를 차지했다.

그는 1965년에는 조선피혁을 강남공업으로 개칭, 한국축산개발주식회사와 삼익선박을 설립했으며, 제2회 수출의 날 대한민국 수출실적 제1위로 동탑산업훈장을 받았다. 이 기록은 1967년까지 이어졌다. 천우사의 전성기를 맞은 것이다

동물원 준비 과정에서 가장 어려웠던 것은 달러를 바꾸는 일이었다. 그때는 암시세와 공정환율의 차이가 많아서 공정환율로 바꾸지 않으면 준비에 큰 문제가 생겼다. 전택보는 재무부를 서너 차례나 드나들며 사정해야 했다.

4·19혁명 뒤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 성명을 발표한 이튿날 4월 27일부터 과도정부의 내각 조직이 시작되었다.

전택보는 대기업가 중심의 새로운 단체를 구성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김용완, 최태섭, 김항복 등도 마찬가지 생각이어서, 그들은 천우사 사장실에 모여서 새 조직을 의논했다. 김용완은 처음 새 단체를 뜻 맞는 사람들끼리만 발족, 차츰 확대해 가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그러나 나중 전국을 대표하는 단체가 되려면 아무래도 대기업가를 모두 참여시키는 것이 좋겠다는 전택보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마침내 한국경제협의회가 발족되었다.

천우사는 1960년대 6년 동안이나 줄곧 수출 최고상을 수상, 해외 시장 개척에서 ‘한국의 신용’으로 통했다. 1970년대 들어 천우사는 무역업에서 쌓은 경험과 미국 시장에서의 기반을 토대로 스튜어트데이비스사(社)와 손잡고 보잉 707기를 빌려 미국과 서울 간 항공화물 수송을 시작했다.

또한 세계적 전자회사인 필립스와 합작으로 전자제품은 물론 컴퓨터 부품까지 수출해 생산했다. 이미 천우사는 1950년 9·28 서울수복 직후 필립스의 도움을 받아 한국에서 처음으로 탁상용 라디오를 만들어낸 일이 있었으며, 그 인연이 이어져 필립스와 기술제휴로 김포 등촌동 공장에서 전자제품과 부품을 생산해 대미·대일 수출을 계속해 왔다. 1970년에는 상공부로부터 TV 부품 수입을 승인받아 오류동에 5만4638㎡(1만6528평) 공장 대지를 마련하고 한 해 3만대 생산 목표를 세웠다. 그 무렵 한국의 TV 생산업체는 모두 도시바·히타치·샤프·산요 등 일본업체와 기술 합작을 하고 있었는데, 천우사는 필립스와 기술제휴를 함으로써 유럽 회사와 제휴한 첫 업체가 되었다.

전택보가 주장했던 보세가공 무역은 부두의 보세창고에서 수입한 물품을 가공처리해 재수출하자는 것은 아니었다. 세관의 감시가 가능한 곳이면 어디에서나 확대해서 실시하자는 것이었다. 5·16 혁명정부가 보세가공 무역을 국책으로 결정했다고 해서 전택보의 임무가 끝난 것이 아니었다. 전택보는 학자도 아니고 정치가도 아닌 실업인이었으므로, 보세가공 무역이 그의 제안에 의해 정책으로 채택되었다 해서 그 책임을 다한 게 아니라 당장 그것을 실천에 옮겨야 했다.

그는 맨 먼저 조화(造花)에 손을 댔다. 일본에서 기술자 다카하시(高橋)를 초빙하고, 천우사 6층 강당을 이용해 기술을 배울 부녀자를 모았다. 그리고 부산에 내려가서 의류공장 17곳과 계약, 일본에서 기술자 오오키(大木)를 데려와 미국에 수출하기 위해 의류 생산을 시작했다. 그 밖에도 완구 공장, 양탄자 공장도 세워 나갔다. 1970년대 초반 천우사는 의류 가공 수출만으로 한 해 500만달러를 벌어들이며 명실상부한 한국 최고 의류 제작 수출업체로 이름을 드날렸다.

그 무렵에는 수출산업에 대한 정부의 금융 세제상의 지원도 없었다. 미국에 대한 수출 실적도 없었으므로 확보해 놓은 쿼터도 없었다. 쿼터 문제 교섭차 전택보는 미국을 두 번 방문해서 미 상무부 차관보인 로보를 만나 이 문제를 놓고 교섭을 벌이기도 했다. 이 일은 전택보의 힘으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보세가공 무역만 하더라도 정부에서 이를 국책으로 채택, 여러 혜택과 지원을 아끼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날처럼 성장한 것이다. 특히 박정희 대통령이 다달이 확대무역회의를 주재했기에 수출을 토대로 한 경제 성장을 이룩할 수 있었다. 1947년 이화여자대학교 이사 취임을 비롯해서 1953년 조선일보사 대표취체역, 1957년 유네스코후원회 회장, 1961년 포플러협회 회장, 1963년 국제법학회 부회장, 1963년 한국신학대학 이사 등 각계에서 눈부신 활동을 벌였다.

전택보는 만년에 세상 사는 지혜를 이렇게 말한다.

“국가 대 국가, 민족 대 민족, 개인 대 개인의 끝없는 다툼과 경쟁 속에서 인류 역사와 문명은 발전해 왔다. 오늘날 우리나라도 적자생존의 법칙에 얽매여 있다. 초등학교 입학 때부터 대학 졸업 때까지 수많은 시험을 치르며 경쟁한다. 바늘구멍 취업문을 뚫는 데 성공해도 끝이 아니며, 일터에서도 치열한 경쟁을 해나가야 한다. 더욱이 우리나라는 외적으로 북한과 맞서고 있으며 중국·일본·러시아 등 강국들과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또 내적으로는 협소하고 각박한 국토에서 5000만 인구가 선진국 수준의 정치·경제·교육·문화의 욕망을 갖고 있기에 경쟁은 더욱 극심하다.

한국에서의 경쟁은 남을 거꾸러뜨리고 자신만 살아남겠다는 경쟁이 대부분이다. 정치인들은 국민을 잘살게 하겠다는 뚜렷한 정책 발표는커녕 그저 경쟁자를 쓰러뜨리기 위한 반대와 공격에만 급급한다. 기업인들도 국가 경제 발전에 어떻게 공헌할까를 생각하기보다 동업자를 해치는 데 열중하는 예가 많다. 그러나 오늘날은 세계가 하나가 되어가고 있으며, 우리의 활동 무대는 온 세계에 걸쳐 있다. 남을 짓눌러 없애는 경쟁이 아닌 남보다 커져서 잘살게 되고, 경쟁에서 뒤처진 무리까지 끌어안는 인의(仁義)의 경쟁이 되어야 한다.

우리의 욕망은 무엇인가. 큰 부자가 되고 싶기도 하고, 절대권력을 갖고 싶기도 하다. 큰 재산이 있으면 자신의 의식주를 해결한 뒤에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고, 큰 권력이 있다면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을 도움으로써 행복을 느끼는 게 가장 이상적일 것이다. 더욱이 우리나라같이 빈곤과 부정이 심한 나라에서 빈곤을 없애고 정의를 구현한다면 이보다 더 큰 기쁨이 어디 있겠는가. 사도 바울은 ‘내가 선한 싸움을 하고 나의 갈 길을 다 달렸다’고 말했다. 세상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승리자로서의 만족감을 가질 수 있다면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행복을 느낄 것이다.”

1980년 7월 18일 전택보는 지인들과 골프를 치던 중 갑자기 쓰러진다. 차로 근처 병원으로 옮겼으나 일흔아홉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아내와 자식들이 마지막을 지켜보지 못한 정말 뜻밖의 죽음이었기에 애석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전택보는 이런 말을 남겼다.

“이만큼 살아오는 동안 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빚을 졌다. 그 빚을 갚을 길은 내가 눈을 감을 때까지 일을 계속하는 것이다. 나는 보잘것없지만, 일생 동안 내가 가진 능력과 지식을 모두 짜내어 살아왔다. 다시 태어나더라도 내가 살아왔던 대로 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성장비화·부침야사(재벌이력서:8)
입력 1991.12.31 00:00 0 0
◎「마카오무역」 열풍… 수입품 장사 “노다지”/면사·양복지등 생필품 취급 수십배 이득/중석·화약원료등 전략물자로 대금지불/강익하·김규면·신영균등 자본축적 기반닦아정크무역이 절정을 이루던 46년 6월초. 정오께부터 인천항 부두를 서성이던 서른살 남짓한 젊은 사내는 석양을 등지고 미끄러지듯 수평선을 넘어오고 있는 배 한척을 보고 걸음을 멈추었다. 배가 항구에 가까워 광성호라는 이름이 육안에 들어오자 그 사내는 중국말로 큰 소리를 질렀다. 돛배에서도 서너명의 선원들이 손을 흔들며 중국말로 응답해 왔다. 부두에 닻을 내리자 젊은이는 배에 뛰어올라 갑판을 열어제쳤다. 콩기름 낙화생 당면 시계 사카린 빙초산 광목 양잿물 소금 등 20여종류의 물건들이 가득했다.

이 배가 바로 우리나라와 중국을 오가던 정크선 광성호. 광성호를 기다리던 젊은이는 화업무역공사라는 간판을 내걸고 정크무역에 참여한 김병환이었다. 『당시에는 수출 수입이라는 말 대신 일제시대의 이입이출이라는 말을 그대로 쓰고 있었지요. 광성호가 도착한 뒤 인천해관(지금의 인천세관)을 찾았더니 시청으로 가라고 했어요. 시청에 갔더니 다시 항만사령부로 가 보라는 거예요. 그곳엔 미군정 주재관 길버트상사가 입출항을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배가 도착했다고 알리니 그 사람이 직접 조사를 나와 아편과 무기가 있느냐고만 물었어요. 없다고 하니까「오케이」,그것으로 끝이었어요. 관세고 뭐고 물론 없었지요』 무역협회 창립이후 현재까지 비상근 이사를 지내며 경기도 부천에서 알파소닉코리아라는 전자회사를 차려 회장을 맡고 있는 김병환씨의 회고다.

관세도 없고 특별한 제약도 없었던 정크무역은 거의 10배가 남는 노다지 장사였다. 김병환씨의 증언. 『국내에서 구하기 힘든 물건들이었기 때문에 정크선이 들어왔다 하면 바로 동이 났다…』 당시 정크무역을 하면서 얼마나 이익이 남느냐를 결정한 것은 오로지 무역행정의 실권을 쥐고 있던 미 군정청 상무부 소속 거윈준위의 사인에 달렸다. 정크무역이 활기를 띠자 미 군정청은 과세를 부과하고 수입허가서를 발급했다. 서울에 주재한 거윈준위가 책임자였으므로 그에게서 얼마나 빨리 수입허가서를 받는냐에 따라 큰 돈이 왔다가다 했던 것이다. 따라서 자연스레 인천과 서울을 오가는 총알택시가 등장했고 인천­서울간 트럭운송업자들도 덩달아 큰몫을 잡았다. 인천에서 트럭운송업을 하고 있던 조중훈도 이 시기에 기반을 잡았다.

국내에 무역업을 본격 태동시킨 정크무역은 47년 3월17일 마카오에서 무역선인 페어리드호가 인천항에 입항,이른바 「마카오무역」을 전개하기 전까지 이어졌다. 국내 기업인들이 무역 열풍에 본격 휩싸이게 된 것은 바로 마카오 무역때문이었다.

마카오무역은 영국계 2천톤급 선박인 페어리드호가 인천항에 들어 온 이후 6개월여 계속된 시기의 무역을 말한다. 중국대륙이 모택동의 남진으로 어수선해지자 중국화주들은 홍콩에서 물건을 선적,우리나라로 가져오려 했다. 그러나 영국정청이 이를 허가하지 않자 홍콩서 물건을 선적한 뒤 마카오로 수출하는 양 꾸며 우회,인천항으로 입항하면서 마카오무역이라는 별명이 붙게 됐다. 이때 들어서야 비로소 국가간 제도적인 무역이 나타났다. 포르투갈령인 마카오정청은 한국으로 가는 물자에 수출승인서를 발급했던 것이다.

페어리드호와 큰 거래를 한 국내기업인은 김익통상의 강익하와 삼양무역의 김규면이었다. 처음 입항한 페어리드호는 생고무 양복지 신문용지 등 고급물품을 가득 싣고 들어왔다. 당시엔 고급품은 모두 마카오제라하여 마카오양복 마카오신사라는 말들이 나돌았다.

마카오 무역선은 우리나라에 시계 양복지 면사 모사 페니실린 사카린 등을 싣고 왔고 그대신 폭약제조용인 헤로중석과 화약원료,미군이 불하한 지프차 및 중고차의 부품을 싣고 갔다. 당시 장개석군과 모택동군간에 전쟁을 치르던 중국은 비싼 값으로 이들 전략물자를 사들였고 마카오무역선은 일본이 우리나라에 놓고 간 전략물자를 모으는 일로 재미를 보고 있었다. 국내 기업인들은 일본이 버리고 간 당시로선 하잘 것 없는 물자들을 주고 수십배 이득을 붙여 팔 수 있는 각종 생필품을 받아 잇속을 차릴 수 있었다.

마카오무역선이 싣고간 헤로중석은 지금의 대한중석 전신인 소림광업에서 흘러나온 것이고 화약원료는 한국화약 전신인 조선화약에서 유출된 것이다. 따라서 소림광업의 재고품을 불하받았던 영화물산의 신영균을 비롯,전략물자를 불하받은 국내 기업인들은 이를 계기로 재산을 축적할 수 있었고 영풍상사가 철광석을 수출해 기반을 잡은 것도 이 시기였다.

마카오무역 6개월동안 국내에 남아있던 전략물자재고는 바닥이 났다. 바깥시세를 모르고 있던 당시 국내 기업인들은 결국 6·25를 맞은 뒤에야 당시 황금을 내주고 설탕을 사 먹은 것을 깨닫게 됐다.<이종재기자>

해방전까지는 만주지방에서 무역업을 하고 있던 사람들도 거의 다 서울로 몰려들었다. 최태섭(한국유리),이한원(동아상사),서선하(삼흥실업),전택보(천우사) 등은 만주에서 서울로와 막바로 무역업을 시작했다. 만주의 봉천에서 동화공창이라는 유지공장과 무역업을 하는 삼흥상회를 경영하고 있던 최태섭씨는 일본 미쓰비시상사의 무역업까지 대행할 정도로 호황을 누렸었다. 팔로군이 만주를 장악한 45년 종업원인 중국인들의 도움으로 만주를 무사히 빠져 나와 우선 평안도 철산에서 모나자이트라는 광석을 생산,광업진흥공사에 납품하는 일을 했다. 그는 자식을 키우려면 서울로 가야한다는 생각으로 남하,서울의 중림동에 있는 고무공장을 매입,만주에서 사용한 삼흥실업 간판을 내걸었다. 그는 다시 무역업을 시작했다

서울로 올라온 기업인들은 당시에 번창하던 정크무역 마카오무역 등 거센 무역의 열풍속에서 값비싼 수업료를 내며 사업을 배웠고,또 번창시켰다. 해방후 혼란했던 서울은 기업들에게 꿈의 보금자리였고 희망의 일터였다

특히 기업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줄을 잘 잡아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고 나아가서는 적산불하,원조물자 불하,은행대출 같은 큰 이권을 챙길 수 있었다.그도 그럴것이 해방후 6·25 이전까지의 우리나라 기업인들은 자본이나 사업 경험이 보잘 것 없었던 만큼 일본이 남기고 간 귀속재산의 불하나 원조자금 배정,미 군정의 힘이 필요한 마카오무역 등 경영외적인 요인들에 의해 그 성장속도와 규모가 결정되는 기형적인 과정을 밟고 있었다. 이 때문에 경영풍토가 기업내적인 기술개발이나 창의력,경영합리화에 의존하기보다는 권력과 밀착,특혜에 집착하는 경향을 띠게 됐다.

해방이후 이만한 거금을 가진 사람은 최창학 이외에는 없었다. 그는 이 돈으로 돈놀이를 했다. 해방후 크게 휘몰아쳤던 정크무역과 마카오무역 시절 그의 돈에 의지하지 않은 기업인은 거의 없을 정도였다.

이들 기업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달러였다. 오늘날 기업인들이 땅을 찾듯 당시의 기업인들은 달러를 찾아 분주히 뛰었다. 달러가 있어야 수입이 가능했고 수입은 곧 돈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의 달러는 정부의 뒷심이 없으면 불가능했고 달러배정은 곧 특혜였다

/이 대통령 은행보유불은 직접 통제/「치부직통 코스」… 수단방법 안가려/배정불로 물자수입 또 “돈방석” 재계판도 큰 영향해외에서 물건을 사오기 위해서는 달러가 필요한데 전쟁중이던 50년대초에 달러가 흔할 리 없었다. 그래서 당시의 기업인들은 달러를 구하기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무역회사가 이용할 수 있는 달러는 직접 수출해서 벌어들인 달러 이외에 중석달러·종교달러·암달러·원조불 등이 있었다. 중석달러는 전략물자인 중석을 수출해 획득한 외화인데,이 돈은 기계류·선박·화물자동차 등 산업 부흥자재를 수입하는데만 쓸 수 있었다. 중석달러는 중석수출을 맡고 있던 대한중석이 직접 수입할 때 사용했으나 극히 제한된 무역회사에 특혜불로 배당되기도 했다.

암달러로 유통된 시중달러는 주로 주한 미군들로부터 흘러나왔는데 환율도 높고 거래량도 적어 수입자금으로는 큰 기여를 하지 못했다.

종교달러 역시 그림의 떡이었다. 종교달러는 기독교 선교·전시구호·교회사업 등을 위해 외국에서 송금된 외화로 기독교계통과 깊은 관계를 가진 무역상이 아니면 얻어쓸 수 없었다.

이밖에 원조불과 UN군 대여금 상환불이 있었다. 원조불은 전쟁 복구기에 국내 산업의 판도를 결정하는 자금이 됐다. 상환불이란 정부가 UN군에게 국내에서 사용할 돈을 원화로 대여해 주고 그 대전으로 받은 달러인데 당시 국내 부족물자를 수입하는데 긴요하게 쓰였다.

결국 달러의 대부분은 정부가 배정했고 자연히 달러를 따려는 기업인들의 로비가 성행했다. 더욱이 정부가 배정하는 달러의 환율은 지나치게 낮게 평가돼 달러를 딴다는 것 자체가 치부의 직통코스였다. 정부가 배정하는 달러로 정부가 지정하는 물자를 수입해서 국내에 풀어만 놓으면 그대로 돈방석에 앉았다. 당시의 환율이 비현실적으로 낮게 평가된 원인은 상환불이었다. 원화를 대여해 주고 달러를 받기 위해서는 낮은 환율이 유리했기 때문이다.

당시 환율문제는 그 누구도 입에 올릴 수 없었다. 달러라면 벌벌 떨던 이승만대통령에게 환율을 현실화시키자는 건의를 했다가 목이 달아난 장관이 있을 정도였다. 오랜 망명생활을 통해 가난에 이골이 난 대통령이었다. 51년 12월15일에는 은행보유불 사용에 대해 액수의 다과를 막론하고 대통령이 인가하도록 하는 규정이 만들어져 달러에 관한한 1달러라도 대통령의 결제가 필요했다. 달러에 대한 집착은 프란체스카 여사도 마찬가지였다.

해운공사를 설립하고 무역업에도 참여하다 전쟁중에 일본공사를 지낸 김용주의 회고다.

『50년 7월중순 대전방위선이 흔들릴 때였다. 대한적십자사 총재였던 이기붕이 전화를 걸어 부산시내에 부상병들이 몰려오고 있으나 약이 없어 손을 쓸 수가 없다면서 약품조달을 요청했다. 당시 주일대표부에 달러가 있을 리 없었다. 생각다 못해 한국은행 동경지점의 김진형 부총재에게 요청,동경지점의 정부보유불 1만달러를 풀기로 하고 백방으로 뛰어 약품을 구했다. 그러나 달러사용에 대한 재가가 문제였다. 의약품을 급송한 후 대통령의 재가를 기다렸으나 기다리던 대통령의 재가대신 프란체스카 여사의 전화가 걸려왔다. 누구 마음대로 정부보유불을 썼느냐는 노기 띤 추궁이었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사정얘기를 제대로 듣지도 않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경무대 안팎이 관리하는 달러를 기업인들이 사용하기는 그만큼 어려웠다. 그래서 정치권에 대한 기업인의 곡예가 시작됐다. 해방후 혼란기에 줄을 잘 잡았던 백낙승의 괴력이 발휘된 것이 이즈음이었다. 재계 판도는 곧 정부의 달러를 따느냐 못따느냐에 달려있었다. 정부가 실시한 경매에서 달러만 잡으면 돈방석에 앉았으며 그렇지 못하면 뒷전으로 밀릴 수 밖에 없었다. 해방후 대권의 향배를 가늠할 수 없던 시기에 벌어졌던 기업인들의 줄잡기 경쟁과 귀속재산 불하전이 정경유착의 1기라면 당시의 로비는 정경유착 2기인 셈이다.

재벌과 정치와의 관계는 이후 전쟁 복구기의 원조불 경쟁과 경제발전 과정에서의 차관전쟁,각종 정부주도 사업권 획득 등으로 이어져 국내 재벌사의 뚜렷한 특징으로 남는다.

한국의 기업사가 정경유착의 역사로 점철되고 재벌들이 오늘날 국민들의 따가운 시선을 받게 된 이유는 바로 여기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정치곡예의 테크닉이 기업의 흥망성쇠와 직결됐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재벌이 봉쇄적인 가족경영의 형태를 띠게 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달러를 놓고 벌어진 정치권과 기업의 관계는 급기야 국내 최초의 대형 경제사건인 중석불 사건을 낳고 말았다.<이종재기자>


한국목재인물사 | 대성목재공업(주) 전택보(全澤珤) 회장 편(65)

브라질에 합판공장 설립도 추진

설봉은 전자사업과 섬유사업 외에도 기발한 아이디어로 사업을 창출해 낸 것이 많았는데, 대리점 개설의 경우 부실기업으로 정비되기 전부터 의 대리점을 이미 하고 있었으며, 부실기업으로 정리된 이후인 1971년에는 세계3위의 대선박회사인 <가와사끼 기선 회사>의 대리점을 개설했고, <타이 인터내셔날 항공>의 대리점도 개설하였다. 그리하여 1972년에는 한국선박대리점협회 회장직도 역임했다. 해외시장개척의 선구자로 정평이 나있던 설봉은 1971년부터는 중동진출을 계획하였는데, 그 결과 1976년에는 오만에 시멘트 1만 여 톤과 타이어튜브를 처녀 수출하는데 성공하였다.

컨테이너 하치장 사업도 하였는데, 수출입화물의 하치장(container yard)과 CFS(container Freight station)의 시설 없이는 해운업과 해운대리점사업이 발전할 수 없다고 보고, 1971년에 부산에서 이 사업을 시작하였다. 이에 대하여 1971년 1월5일자 <산업경제신문>은 ‘천우사 컨테이너 화물선 취항’이란 제목으로 ‘천우사는 국내 최초로 컨테이너 선박 3척을 도입하여 서울~시애틀~로스앤젤레스 간을 매월 3회씩 운항하기 시작했다. 컨테이너 운송이란 항구에 도착한 화물을 보세구역에서 일단 모두 꺼낸 다음 일일이 수속을 밝아 개별통관하는 재래식 통관과는 달리 컨테이너 자체와 함께 그 안에 실은 화물을 목적지까지 운송한 다음 화물을 통관하는 방식을 말한다’고 보도하였다.

신용카드 사업도 하였는데, 1964년 크레딧카드(credit card)란 말조차 생소하던 때에 신용카드 사업을 시작한 것으로 미국 최대의 여행사인 <아메리칸 익스프레스(American Express)>회사의 한국 총대리점을 하였다. 이 사업이야말로 신용 하나만으로 이루어낸 사업이었는데, 이것이 오늘날의 한국신용카드 주식회사가 된 것이다.

또한 브라질에 합판공장 설립을 추진하기도 하였다. 1977년 6월18일자 <무역통신>의 기사를 보면 ‘브라질에 합판공장, 천우사서 합작 건설키로’란 제목으로 ‘천우사(대표 전택보)는 남미 아마존강 유역에 브라질과 합작으로 합판공장을 건설키로 하고 국내에서는 최초로 합판공장의 해외진출을 추진하고 있다. 천우사는 북부 브라질 아마존강 유역의 마나우스에 자본금 400만 달러, 생산능력 일산 1만2000매 규모의 합판 공장을 50:50의 비율로 현지법인으로 설립하여 내년 하반기부터 생산을 시작할 예정이라고 한다’고 보도하였다. 그러나 브라질의 합판공장 설립은 브라질 당국의 법적 규제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설봉은 탁월한 ‘아이디어 메이커’

천우사가 부실기업으로 정비된지 불과 4년만인 1975년 말 현재 ‘정상을 달리는 대기업’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발전하였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부실기업으로 정비될 당시 700명의 간부사원들과 6000여 명의 공원들이 모두 떠나가고 불과 90여 명의 간부사원들만 가지고 새출발을 했던 천우사는 이제 다시 500여 명의 간부사원과 2500여 명의 공원을 가진 대기업으로 성장한 것이다.

천우사가 이렇게 빠른 시일 내에 대기업으로 재등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겠지만, 첫째로 설봉의 신용을 꼽아야 할 것이다.   <조선일보>가 1971년 8월17일자 신문에 천우사의 재기를 ‘신용간판 전택보, 활기찾는 천우사’란 제목으로 표현한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설봉의 신용은 천우사가 재기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천우사가 이토록 빨리 재기할 수 있었던 것은 설봉이 탁월한 ‘아이디어 메이커’였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설봉은 항상 말하기를 “아이디어에서는 2등을 해서는 안된다. 항상 1등을 해야한다. 2등은 패배자일 뿐이다”라고 했는데, 그만큼 아이디어에 대해서는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었다. 설봉은 항상 기발한 아이디어로 사업을 창출해 내었는데, 전자사업의 경우 TV생산사업부문은 1967년부터 착상한 것이었다. 그 착상이 네덜란드 필립스(Phillips)사와 기술제휴를 체결하게 하였고, 1971년 8월에 이르러서는 TV 첫 생산품을 시장에 내 놓을 수 있었으며, 1972년 10월경에는 3억 원을 투입, 구로공단에 부지 1만2000평을 확보하여 건평 1500평의 공장을 짓고 진공관 TV에서 TR-TV로의 기술전환을 했다. 이때만해도 한국의 TV생산기술은 기술제휴 없이는 불가능했으므로 재력에 있어서 열세에 있던 천우사는 기술전환으로 다른 회사와 경쟁하는 길밖에 없었다. 천우사는 국내업체로서는 처음으로 TR-TV를 생산한 회사로서 TV판매량에 있어서는 ‘금성사’와 ‘대한전선’에 이어 3위로 랭크되었다. 그리고 1974년에는 이란 고성능 카세트를 시중에 내놓았고, 컬러TV 개발도 완전무결한 단계로까지 준비해 놓고 있었다.

섬유사업의 경우 설봉은 자체공장이 있어야 하겠다는 생각에서 가리봉동 수출공단 대지 위에 3층짜리 봉제공장을 짓고 수출목표를 1000만 달러로 세웠다. 공장은 12라인으로 직원수만 해도 1000명이 되었고, 섬유공장 단일공장으로는 국내 최대 규모의 공장이었다.

출처 : 한국목재신문(https://www.woodkorea.co.kr)

한국목재인물사  |   대성목재공업(주)  전택보(全澤珤) 회장 편(64)
천우사의 재기(再起)

천우사만 남기고 그 계열이 부실기업으로 무너진 지 어언 4년이 지났다. 이 4년간은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여간 복잡하고 험난한 시기가 아니었다. 이 기간 동안 있었던 사건들을 대강 열거해 보면 1969년에는 위장간첩 이수근 사건, 무장공비침투만행사건, 미해군정찰기 피추사건, KAL여객기 납북사건이 있었다.  1970년에는 와우아파트 붕괴사건, 김대중 씨 대통령 후보출마, 1971년에는 박정희 씨 7대 대통령당선, 8대 국회의원 선거, 대연각 호텔 화재가 있었다. 1972년에는 7.4남북공동성명발표, 8.3조치(모든 기업체 사채동결), 국회해산 및 비상계엄령 선포, 개헌국민투표실시, 유신헌법확정과 공표 등이 있었다. 1973년에는 제9대 국회의원선거, 통일주체 국민회의에서 박정희 씨 대통령선출, 유류파동 그리고 이듬해인 1974년에는 새해 벽두부터 박 대통령의 긴급조치1호 발표(1월 8일), 이어 2호, 3호, 4호가 계속 발표되었다.  8.15광복절 기념식에서 육영수 여사가 흉탄에 맞아 세상을 떠나는 불상사, 땅굴발견사건 등 온 국민을 경악케 하는 사건들이 끊일 줄 모르게 일어났다.

설봉은 이러한 엄청난 사건들이 회오리바람처럼 휘몰아치는 속에서도 천우사를 재건하기 위하여 처절한 노력을 계속하였다.

1973년 5월27일자 <조선일보>는 ‘유신(維新)과 8.3조치 이후의 재계’라는 제목으로 재계의 내막을 소개하는 특별시리즈에서 전자공업 등으로 사업 확장에 열을 올리는 천우사의 기사를 싣고 있다.

‘1960년대 6년 동안이나 줄곧 수출최고상을 수상하고 해외시장개척에서 한때 ‘한국의 신용’으로 통했던 전택보 씨가 부실기업정리로 대성목재 등 5개 업체를 은행에 넘겨주고 나머지 천우사만 가지고서 기업을 운영하며 차츰 옛날의 영광을 되찾아 가고 있다. 30억 원에 가까운 사채를 안고 산하업체(대성목재, 조선피역, 삼익선박, 한국축산개발, 신진완구)들을 은행관리로 넘겨주었을 때만 해도 재계는 천우사의 재기를 어려운 것으로 내다 봤다.

당시 재계에서는 전택보 씨가 사회사업가이지 결코 기업가는 될 수 없는 사람이라고 그의 사업비운을 동정하기도 하고 비웃기도 했다. 그러한 전택보 씨의 천우사가 요즈음 사업 확장에 열을 올리고 있다. 천우사는 지난 4월말, 구로동 공업단지에 건평 2500(8250㎡)평의 섬유공장과 1200(3960㎡)평의 전자제품공장의 증설을 마쳤다’고 소개했다.

출처 : 한국목재신문(https://www.woodkorea.co.kr)

조흥은행, 대성목재 윤 전무를 파면결정
조흥은행이 대성목재 전무로 근무하고 있는 윤순선 씨를 파면키로 결정했다는 소식을 들은 전택보 사장은 급히 윤순선 전무를 서울 천우사 사무실로 오게하여 윤전무와 함께 조흥은행 행장을 찾아갔다.
자기가 이렇게 된 것은 그렇다치고 자기때문에 함께 일해온 전무가 희생당하는 것을 보고는 참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성명서 발표 주모자를 윤전무로 생각하는 것은 조흥은행의 오해일 뿐이라고 설명하고 파면결정을 취소시켰다.

이에 대하여 윤순선 전무는 그당시 일을 다음과 같이 회상하였다. “수백억의 재산과 기업이 부실로 정리당해 보통사람 같으면 절망과 허탈에 빠져 있을 형편인데도 전택보 사장님은 자기의 부하직원이 파면 당하는 것을 걱정한 나머지 보기도 싫은 은행장을 만나러 가자고 내게 명령했던 것입니다.
나는 노사장의 명령을 어길 수가 없어서 사장님을 따라 조흥은행 행장실을 찾아갔습니다. 행장은 먼저 온 손님들을 대하고 있어서 우리는 약 30분동안 대기 응접실에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때 손님 두분이 대기실로 들어왔습니다. 한 분은 삼성물산 전무로 기억됩니다.
그는 전 사장님을 보더니 겸손한 태도로 ‘얼마나 심려가 되십니까?’하고 정중히 인사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전 사장님은 크게 웃으시면서 ‘나는 종교인이기 때문에 사주팔자 같은 것을 별로 본 일은 없지만, 내 운명이 70까지라 하더군요. 그런데 지금 내 나이가 70이 다되었는데도 죽지 않아요. 건강에도 아무 이상이 없고 골프도 점점 더 잘 맞아요.
그래서 사주팔자란 미신이다. 맞지 않는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번에 부실기업이 되고 보니 사주팔자가 맞는구나 싶더군요!’ 하면서 크게 웃으시던 모습…. 또 계속해서 ‘사람이 아무리 위대하다 해도 죽으면 부고 한장이면 끝인데 내 경우는 그렇지가 않단 말이요, 대성목재 부실기업의 여파는 어찌나 큰지 일주일이 지나도 신문·잡지 등에서 부고가 계속되고 있으니 이렇게 굉장한 부고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 이렇게 담소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또 들어온 다른 손님들과 이야기하는 중에 ‘내 나이 70이 되어도 죽지 않는 것을 보니 아마 80까지는 더 일하라는 것 같아요. 앞으로 10년은 틀림없이 더 살겁니다. 더 힘차게 일해야지요’하면서 당당한 표정을 짓고 계셨던 것입니다.”

출처 : 한국목재신문(https://www.woodkorea.co.kr)

막내아들 순재는 집 한 채도 없어
1969년 6월24일, 전택보 씨의 대성목재 등 5개 업체가 부실기업으로 처리될 때 설봉은 이미 70세의 노인, 보통사람 같으면 까무라쳐 넘어지거나 아주 인생을 포기하고 말았을 것이다. 사실 정부의 이러한 처사는 이미 70노구가 된 설봉에 대해 너무 가혹한 처사였다.

그 때 항간에는 정부 당국이 천우사 계열 5개 업체를 부실기업으로 처리한 것은 사업이 부실해서 뿐만 아니라 전택보 사장이 외국차관을 들여와 사업에는 안 쓰고 고리채 놀이를 했기 때문이고, 막대한 재산을 외국으로 빼돌렸다는 풍설이 떠돌았는데,
설봉은 이 풍설을 듣고 박정희 대통령에게 “이러이러한 사실을 박대통령께서도 인정하고 계시는 모양인데 사실 그러한 일이 있었는지의 여부를 조사해 주십시요”라는 내용의 서한을 보냈던 것이다.

그 뒤 정부 측에서는 실제로  조사를 해 보았던 모양인데 전택보 씨의 막내아들 순재는 집 한 채도 장만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는 이러한 소문은 전연 사실이 아닌 중상모략임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설봉은 박 대통령에게 ‘한국축산개발’만은 돌려달라고 요청을 했다.
“한국축산개발은 제가 꿈과 애착을 가지고 일으킨 사업일뿐 아니라 개인의 이익보다 나라의 이익을 위해 온갖 정성을 다해 이루어 놓은 사업이니 한국축산개발만은 돌려주십시요”라고 요청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축산개발은 전택보가 아니면 못한단 말인가”라고 하면서 일언지하에 거절했다는 것이었다.

당시 대성목재 전무로 있었던 윤순선 씨의 말에 의하면 대성목재가 부실기업으로 처리되자 5600여명의 직원들은 “대성목재가 왜 부실기업체냐? 우리끼리 10억을 증자하여 대성목재를 인수하겠다”면서 성명서를 발표하는 동시에 증자위원회를 조직했다고 한다.
그러자 관리은행인 조흥은행은 아무래도 전무인 윤순선 씨가 주모자일 것임으로 그 주모자인 윤순선 씨를 파면키로 결정했다고 통보해 왔다고 한다. 그 때가 1969년 8월 어느날이었고 그러니까 부실기업으로 처리된지는 약 2개월 뒤였다고 한다. 이 사실을 들은 전택보 사장은 걱정이 되었다.

자기가 당한 것은 관계없으나 자기 때문에 함께 일하던 전무가 주모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주모자로 몰려 파면 당하는 것을 보고는 침묵을 지킬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설봉은 급히 윤 전무와 함께 조흥은행 행장을 찾아갔다.

출처 : 한국목재신문(https://www.woodkorea.co.kr)

대성목재 전 직원들 “우리가 맡겠다”

대성목재가 부실기업으로 정리된 사실이 발표되자 가장 충격을 받은 것은 당사자인 대성목재의 직원들이었다.
대성목재의 5600여명의 직원과 공원들은 대성목재가 부실기업으로 정리되는 것을 반대하는 성명서를 6월27일자 신문에 냈다.

신문지 절반 크기의 대대적인 것이었는데 그 내용도 너무 절실하고 대담한 것이어서 어느 신문사는 이 막대한 광고비를 종업원들이 어떻게 낼 수 있겠느냐면서 선뜻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고 한다. 사태가 이쯤 되자 각 신문들은 이를 크게 보도했다.

6월29일자 <주간조선>은 ‘부실기업체의 충실한 종업원 궐기’라는 제호로 특집보도를 하기도 했다. ‘40만 인천시민의 10% 가까이 되는 사람의 입을 먹여살렸고, 월급이 하루 늦고 이른데 따라 인천시민의 물가에 영향을 끼치는 대성목재주식회사가 당국에 의해 부실기업체로 단정돼 관리은행에 인수처리될 운명에 놓였다’로 시작해 대성목재의 실정과 종업원들의 성명서 내용을 예리하게 분석 보도했다.

대성목재가 이처럼 부실기업체라는 보도는 일반 국민들로서는 그 부실의 자세한 내용을 이해할 수도 없고 또 당국이 한 일이니까 이건 정책적인 문제라고 만 이해하고 있었다. 다만 대성목재를 살리려는 5600여 명에 달하는 종업원들의 자세가 대단하다는 것이다.

대성목재가 딴 사람에게 넘어간다할지라도 일은 계속될 것이고 따라서 대부분의 종업원들도 그대로 있게 될 텐데, 그렇다면 무엇때문에 종업원들이 이처럼 어려운 일을 자청하고 나선 것일까?

이 어려운 일이란 부실기업체로 단정된데 대한 그들의 공식반응에서 나타나고 있다. 그래서 이 성명서의 골자를 나열해 보면 △우리들은 이 회사의 각 분야에서 일하고 있음으로 이 회사가 부실기업체인가 아닌가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이번 정부 결정에 대해서는 정부의 권위를 위해 그 결정을 번복하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우리가 알고 믿기에는 대성목재가 부실업체가 아닌 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이 업체는 타인에게 처분될 수 없고 우리 5600명 전체 종업원들이 인수할 것을 선언한다. △우리들은 비장한 각오와 결심으로 각자의 전 재산을 바쳐 일금 10여억 원을 갹출하기로 결의했다고 돼 있다.

출처 : 한국목재신문(https://www.woodkorea.co.kr)

정치바람 타기 싫어하는 기업인

이 밖에도 거의 모든 신문들이 사설란에서 이 문제를 다루면서 천우사(대성목재의 모체)를 동정했는데,
6월26일자 <서울경제신문>은 ‘새로운 기업관, 성실해야 발전할 수 있는 환경의 조성’이란 제하의 사설에서 “전택보 씨는 국가와 은행에 미안한 마음을 금할 길 없음을 피력한 바 있다.
이 비운의 기업인이 이 나라 무역증진에 이바지한 과거를 회상하며 천우사의 앞날을 축복해야 할 것이다. 그가 남긴 쓰라린 교훈이 이 나라 산업계에 새 기풍을 진작시키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했고, 같은 날자 <조선일보>는 ‘정치 모르는 전택보 씨에 동정’이란 제하에 “전택보 씨의 대성목재 등 5개 업체가 주 채권자인 조흥은행으로 넘어간다는 발표가 있자 경제계 인사들은 가슴아픈 일이라고 동정어린 한마디씩을 했다.
전 씨에게 동정이 집중된 까닭은 그가 정치바람을 타기 싫어하는 기업인이었다는 점과 우리나라 보세 가공업의 선구자였다는 데에 있는 듯 했다. 전 씨는 조화, 완구 등 보세가공의 각 분야에 거의 손 안댄 곳이 없으며 가공수출분야를 리드해 왔다.

이러한 새 분야의 개척, 확장에 주력했기 때문에 다른 사업에는 관심을 둘 수가 없어 해체를 당하는 쓰라림을 맛보게 된 것이라고, 특히 전씨가 덴마크 명예총영사를 비롯한 많은 국제 단체의 임원을 겸하고 있는데, 한국경제인의 국제적 위상이 내려갈지도 모른다고 몹시 걱정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했다.

적힌 글은 짧으나 매우 의미 심장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6월27일자 <현대 경제일보>는 ‘천우사 계열 5개 업체의 정비가 뜻하는 것’이라는 제목으로, 6월28일자 <서울경제신문>은 ‘영광 사라진 비운의 전택보 씨, 수출의 개척자 끝내 정비 당해’라는 제목으로 이 문제를 다루었으며 아울러 천우사의 역사와 업적과 함께 이 사건의 언저리를 파헤쳐 놓았다.

이 밖에도 이에 관한 많은 기사들이 있는데 그 중에는 ‘비운의 수출왕 전택보 씨’, ‘전경련, 정부의 천우사 정비 방안에 맞서 정면 반발’등 자극적인 표현의 기사제목들을 여러군데서 찾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부실기업의 정리 사실이 발표되자 가장 충격을 받은 것은 무엇보다도 당사자인 천우사계열 5개 업체의 직원들이었다.

글/ 김상혁  shkim@woodkorea.co.kr

출처 : 한국목재신문(https://www.woodkorea.co.kr)

국내 모든 신문들은 이 사실을 경제란 또는 사설란에 10여 일간 대서특필 했다. 한편 전경련(전국경제인연합회)은 그 해 6월26일 긴급이사회를 소집, 연 이틀간의 긴급대책위원회를 열고 부실기업문제에 대한 건의서를 채택해 정부당국에 제출했다.

그 건의서의 내용은 ①민간 상업차관에 대한 투자에 있어 정부의 ‘지불보증제도’를 지양하고 ②부실기업정비반에는 당해 기업주 및 경제분야의 권위자를 참여토록 개편하고 ③갱생이 가능한 기업에는 일정기간의 여유를 줘야 할 것이며 ④부실기업 정리기준을 자본구성 비율에만 치우칠 것이 아니라 산업성, 전망, 국제경쟁력, 대외신용도에 중점을 둬야 한다고 돼 있다.

제②항에 부실기업정비반에 당해 기업주를 참여시켜야 한다는 말은 천우사의 경우 사전에 아무런 예고도 없이 일방적으로 집행했다는 말이며 제④항에 자본구성비율에 치울칠 것이 아니라는 말은 천우사(대성목재의 모체)가 부채를 많이 진것은 사실이나 산업성, 전망, 국제경쟁력, 대외신용도가 있어왔는데 어찌 자본구성비율 그것만이 부실기업의 조건이 될 수 있겠냐는 말이기도 했다.

<중앙일보>는 소집 이틀 후인 6월28일자 신문에 ‘아이러니한 천우사계열 정비, 전경련이 호신운동’이란 제하에 ‘국내 굴지의 기업인 천우사계열 5개 업체가 부실기업체로 몰려 주 채권자인 조흥은행으로 넘어가는 비운을 맞게 되자 전령련이 긴급사후대책을 논의하는 등 비상사태에 돌입한 느낌’이라고 보도했다.

<동아일보>는 ‘부실기업과 부실경제’라는 사설을 통해 ‘자본구성이 부실하지 않은 기업은 천우사 외에 얼마나 될 것인가? 부실기업의 발생은 기업인에게도 문제가 있지만 따지고 보면 정부당국에 더 큰 잘못이 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부실기업정리정책이 객관적기준에 의해 일정한 원칙이 있어야 하는데 그 대상과 범위가 어떠한 기준에 의해 결정되는 것인지 도무지 알려지지 않고 있다’고 논평했다.

글/ 김상혁  shkim@woodkorea.co.kr

출처 : 한국목재신문(https://www.woodkorea.co.kr)

비운의 수출왕, 마침내 부실기업으로 정비돼
설봉은 그날(1969년 6월24일) 집에 돌아와 밤을 꼬박 뜬 눈으로 지새야 했다. 이튿날 아침, 그제야 비로소 자세한 정비 내용을 알 수 있었다. 이 날 국내 7대 일간 신문들은 일제히 이 내용을 크게 보도했는데 그 중 <한국일보>에 개제된 기사 내용을 보면, ‘천우사계열 대성목재 등 6개 업체 정비… 부채늘고 상환어려워, 청와대 내에 설치돼어 있는 부실기업체 정비반(반장 장덕진 씨: 재무부 이재국장)은 6월24일 오전, 전택보 씨가 소유하고 있는 대성목재, 조선피혁, 한국축산, 삼익선박, 신진완구 등 6개 업체의 정비방안을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 확정했다.
이날 공화당 정책위원장 백남억 씨, 부총리겸 경제기획원장 김학열 씨, 재무부장관 황종율 씨, 상공부 장관 김정열 씨, 청와대비서실장 이후락 씨 등이 배석한 가운데 확정된 천우사 계열 정비방안은

1)6개 업체 중 천우사를 제외한 5개업체는 주 채권자인 조흥은행이 인수하여 정리 처분하고, 전택보 씨로 부터 완전히 인연을 끊게 하는 동시에
2)천우사는 전택보 씨 소유로 그대로 존속시키며 종합무역상사로 육성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당시 대성목재는 자산규모가 108억, 천우사는 18억, 조선피혁은 19억, 한국축산은 3억, 삼익선박은 6억, 신진완구는 1억 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날 전택보 씨 계열 6개 업체의 정비 방안을 승인하는 자리에서
“1)기업은 자기 자본 조달 능력이 있는 사람이 해야하며 과거와 같이 사채를 쓰더라도 공장만 지어 놓으면 돈을 벌 수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2)그 기업이 잘못되면 그 기업체가 망할 뿐 아니라 그 기업인도 함께 책임지는 기업윤리의 확립이 소망된다.”
고 말했다.

6월25일자에 보도된 기사내용은 각 신문이 거의 같았으나 유독 <경향신문>만은 기사 외에 ‘기자석’이라는 코너에 ‘2개월전까지만 해도 1000만 달러의 현금차관을 들여올 만큼 건전기업인으로 알려진 전택보 씨가 20년간 길러온 대성목재 등 5개 업체를 내놓게 된 데 대해 일부 업계에서는 ‘가혹하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지만, 자기자본 4억7000만원으로 162억원의 대기업을 굴려 왔다는 것이 오히려 불가사의 하다는게 중론’이라고 논평했다.
글/ 김상혁  shkim@woodkorea.co.kr

출처 : 한국목재신문(https://www.woodkorea.co.kr)

한국목재인물사  |   대성목재공업(주)  전택보(全澤珤) 회장 편(50)
청천벽력 같은 뉴스, 부실기업정비

1969년 6월24일, 그날도 설봉은 예전과 다름없이 아침 일찍 일어나 산책을 하고 소공동에 있는 천우사(대성목재의 모체) 사무실로 나갔다. 책상에 앉아 내일이 바로 6·25라는 생각이 들면서 19년전 그날에 있었던 일들, 부산 피난시절, 민족의 수난과 경제파탄에 얽힌 쓰라린 일들을 주마등처럼 되새기며 과거를 회상하고 있었다.
그리고 설봉은 앞으로 천우사가 할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고 있엇다.
이제 천우사가 은행관리로 넘어간지도 어느덧 반년이란 세월이 지났다. 그동안 부끄럽기도 했고, 부자유스럽기도 했고, 또 유능한 사원들이 하나 둘 자기 곁을 떠날 때면 낙심하여 괴로울 때도 한 두번이 아니었으나, 그래도 1000만 달러의 외국차관을 얻어다가 30여 억원의 사채를 은행부채로 대치시키게 되었고 다년간 질질 끌려오며 숙제로 남아 있던 P.L480 잉여농산물 수입물자도 불원간 도착하게 되어 있는 것은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었다.

이런 생각을 하던 설봉은 “천우사의 장래도 반드시 어둡지 많은 않구먼! 한 달에 근 1억원의 사채이자를 꼬박 꼬박 물어야 했는데 이제 이것도 해결되었고, 이제 모든 사원이 한데 뭉쳐 힘써 일하면 회사운영은 다시 호전될 수 있으리라.

그리고 한창 공사 중에 있는 대성목재의 월미도 공장만 완공된다면 거기서 연간 10억여원의 순이익은 어렵지 않게 날 것이고 이렇게만 된다면 적어도 5년 내에 모든 것을 정리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 이르러서는 가슴이 뜨거워 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그날 정오쯤 사무실에 전화가 걸려왔다. 친구인 김성곤 씨로부터 걸려온 전화였다. 전화를 건네받은 설봉은 김성곤 씨의 음성이 심상치가 않음을 직감했다.

그의 목소리는 매우 심각했다. 그 내용인즉슨, 이날 상오 청와대에서 박정희 대통령 주재로 부실업체정비 관계관 회의가 열렸는데 이때, 장덕진 씨(당시 재무부 이재국장)가 제출한 천우사 계열에 대한 정비방안이 승인되었다는 것이었다. 이 전화를 받은 설봉은 눈앞이 캄캄해지고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이 소리는 바로 천우사와 모든 방계업체가 부실기업으로 정비된다는 폭탄선언이었다.
“무슨 소니냐? 우리회사가 하루 아침에 무너져 내린단 말인가!” 정말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글/ 김상혁 shkim@woodkorea.co.kr

출처 : 한국목재신문(https://www.woodkorea.co.kr)

한국목재인물사  |   대성목재공업(주) 전택보(全澤珤) 회장 편 (47)

1968년. 그 해 여름을 설봉은 무겁고 우울한 마음으로 보내야 했다. 그 해는 극심한 가뭄으로 국민전체가 일기예보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는데다가 설봉은 개인적으로 사업상 여러가지로 어려운 문제들이 산적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업상의 문제들은 잘 풀리지 않은 채 여름은 지나가고 가을이 찾아왔다. 설봉에게는 이 가을이 유난히도 슬쓸하게 느껴졌다.

설봉이 잠을 잘 이룰 수가 없어 뜬 눈으로 누워있노라면 자그마한 정원 구석에서 찌르륵대는 귀뚜라미 소리가 그의 마음을 더욱 처량하게 만들었다.
바람소리와 함께 우수수 떨어지는 낙엽소리도 설봉으로 하여금 잠을 못 이루게 했고 ‘나도 이제 많이 늙었구나’하는 생각에 잠기게 하였다. ‘농민들은 몸에 씨를 뿌리고 여름에 김매어 가을에 거두어 들인 것을 겨울에 꺼내먹으면서 인생을 즐기겠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무엇으로 인생을 즐길 수 있단 말인가? 혹시 내가 바로 그런 부류의 사람이 아닐까? 젊었을 때의 이상도 꿈도 이제는 다 사라져 버린 그런 사람은 아닐까?’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설봉은 자기 자신과 지난 날들을 돌이켜 보며 잠을 잘 이루지 못했다.
하지만 설봉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자기의 삶은 조금이라도 남에게 보탬이 돼 주려고 노력했던 삶이었지 결코 자신의 출세나 치부만을 위해 살아온 삶은 아니었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사는 것이 사람답게 사는 것이지 자기 혼자만 잘 살고 제 욕심만 채우려고 한다면 부끄러운 삶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도 해 보았다.

그리고 그는 ‘오늘 날과 같이 사회가 공동체화 돼 가는 세상에 있어서는 개인주의는 용납될 수 없다. 아무리 자유경제체제라 할 지라도 개개인이 제멋대로 벌어 멋대로 쓰라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인생관도 이제는 많이 달라져야 할 것이다’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런데 천우사의 형편은 10월에 접어들면서 더욱 어려워졌다. 재정난이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오랫동안의 사채부담으로 영업이익은 거의 이자로 지불해야 했고 최근에 이르러서는 영업실적마저 부진하여 이자에 이자가 붙어 사업유지를 아주 어렵게 만들었다.

1968년 12월, 마침내 천우사는 은행관리회사가 되고 말았다. 은행관리란 어찌보면 특혜조치다.
왜냐하면 정부당국이 몇가지 이유를 들어 은행으로 하여금 그 기업의 부채를 맡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천우사의 경우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주어졌다.

첫째, 천우사는 다년간 가장 많은 수출실적을 올린 회사로서 국제적 신용도에 있어서도 무시 못할 존재임으로 이를 붙들어 줘야 한다. 둘째, 천우사는 한 고비만 넘기면 다시 살아나서 수출진흥에 공헌을 할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이것은 하나의 특혜조치가 틀림없었다. 그러나 설봉은 마음이 아팠다. 이렇게 정부의 혜택을 받는다는 것이 자기의 신념과 자존심을 무너뜨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때 설봉은 “나라는 존재는 없어지고 마는 것만 같았다. 돌이켜 생각하면 이것이 내 운명이요, 팔자가 아닌가 한다”고 탄식하며 은행관리사가 된것을 몹시 가슴아파 했다.

출처 : 한국목재신문(https://www.woodkorea.co.kr)

1947년에 무역회사 천우사를 설립하여 경영하였다. 이후 대성목재공업주식회사·조선피혁주식회사를 인수하기도 했다.

전쟁은 파괴를 의미한다. 남한은 무에서 출발했다.

그랬더니 朴장관께서 ‘그거 내가 만든 것 아니야. 허정 (許政) 과도정부 때 상공부장관하던 전택보 (全澤珤.작고) 씨 알지. 천우사 사장 말이야. 그 양반이 제일 먼저 사용했어. 들어보니까 좋은 것같아 내가 쓴 거지’ 라고 대답하더군요. ” 이 무렵 朴대통령의 수출에 대한 인식을 보여주는 일화 한토막. 어느 날 朴장관은 朴대통령의 지방순시에 동행했다가 기차안에서 느닷없는 질문을 받았다.

“朴장관, 우리나라 옛말에 사농공상 (士農工商) 이라는 말이 있지 않소. 내가 보기에 우리나라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상공농사’ 가 돼야 할 것같아. 朴장관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 당황한 朴장관은 얼떨결에 “각하, ‘상’ 이 ‘공’ 보다 앞서야 한다구요” 하고 되물으며 잠시 생각을 가다듬은 다음 “제 생각에는 ‘공상농사’ 가 더 맞을 것같은데요” 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朴대통령은 “물건만 만들면 뭣해요. 팔지 못하면 아무리 많이 만들어도 소용없어요. 수출이 제일이야” 라고 설명했다.

전택보(1901~1980) 보세가공무역

1967년은 박정희 정권의 제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 시작되는 해였다.제1차 경제개발계획도 무역정책에 중점을 두었었지만, 제2차 경제계발계획의 무역정책특색도 첫째는 수출 제1주의의 지속, 둘째는 무역자유화 정책의 촉구, 셋째는 수출 진흥정책의 다양화였다.수출 제1주의의 제3공화국정부는 제2차 계획초년도인 1967년의 수출목표를 3억6천만달러로 책정하였다.
그런데 그해 천우사(사장 전택보)는 1513만 달러의 수출실적을 올려 65년, 66년에 이어 67년에도 또다시 훈장을 탔다. 3년 연속 훈장을 타게 된 설봉은 <천우사 사내보 12월호>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는데 이 글에서 그가 얼마나 보람을 느끼며 흐뭇해하였는지를 엿볼 수 있다.

“금년에도 총 수출액 3억6천만 달러의 정부 목표 중에 합판이 4200만 달러, 피목 및 기타 보세가공품이 3000만 달러, 스웨터가 2500만 달러, 도합 1억 달러에 해당하는 품목이 모두 우리가 개척한 상품들의 수출실적입니다.그 중에서도 자랑스러운 것은 합판수출이었습니다. 처음에는 클레임을 받기도 하는 등 수출에 애로가 많았었으나 차차 품질을 인정받기 시작하면서 수출량이 늘어난 합판수출. 천우사는 대성목재 합판수출 덕분에 1963년 제1회 수출의 날에는 전국 수출업체 중에서 1위를 기록할 수 있었고, 64년 2위를 제외하고는 65년, 66년, 67년 연달아 수출실적순위에서 1위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의 이러한 감회는 그가 평소 주장했던 보세가공과 자신이 직접 개척한 합판수출이 수출진흥에 큰 역할을 한 것에 대한 자부심이기도 하였다.

설봉은 보세가공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설봉이 보세가공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게된 것은 6·25 전란후 수복된 서울에서 수많은 실업자들이 방황하고 있는 것을 본 이후였다.

전쟁으로 생명을 잃은 사람이야 어쩔 수 없다치더라도 살아남은 사람들조차 앞으로 살아갈 길이 막막하게 느껴질 정도로 수복된 수도 서울의 모습은 참담했다.
거리에는 수많은 실업자들이 우글거렸고 전쟁미망인, 고아들은 이리저리 방황하고 있었다. 신문지상에는 연일 생활고로 인한 일가족 집단 자살, 강도, 살인, 사기 등의 사회악 기사가 가득차 있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국민은 극심한 빈곤 때문에 살기가 어려웠고 돈있는 사람들은 그들대로 불안감때문에 하루하루를 떨면서 살아가는 무서운 세상이었다.

세상형편이 이렇게 돌아가는 것을 본 설봉은 우리나라가 잘 살 수 있는 좋은 방법이 없을까 곰곰히 생각하게 됐다. 우리나라는 자원도 없고 변변한 기술도 없다. 약간의 생산시설마져도 6·25전란으로 잿더미 속에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나 아직도 사람은 많다. 그 노동력을 잘만 활용하면 활로가 트일 것이다. 생각이 여기까지에 이르자 설봉은 우리나라가 살길은 보세가공뿐이라고 느끼게 됐다. 지하자원개발이니 수산자원개발이니 개발 대상이 많겠지만 인적자원을 어떻게 개발하느냐가 우선과제이다. 북한 피난민들의 대거 월남, 거기에 인구의 자연증가는 거대한 인적자원을 구성하고 있으나 이 자원을 개방하지 못하고 있다. 이 많은 사람을 잘 활용하면 선진 제국과 경쟁해 이길 수 있다. 공장을 세워놓고도 노동자가 없어서 쩔쩔매는 나라의 기업인이 본다면 부러워할만큼 우리에게는 노동력이 풍부하다. 이 노동력을 이용 못한다는 것은 기업인의 역량부족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저렴한 노동력을 이용해 수공업, 가내공업으로 중소기업을 급속히 발전시키는 것이 적은 자본을 가진 우리가 조속한 시일 내에 실업자를 구제하고 국제수지를 개선시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전제하고 나서 그는 일본과 홍콩으로부터 기술을 도입해서 섬유제품, 2차가공품, 부품생산공장의 설치를 해야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그밖에도 크리스마스 장식업, 조화, 가발, 농구화, 메리야스, 양말, 수예품 등 할일이 얼마든지 있다고 역설했다. 우리국민이 공것을 바라지 말고 우리의 힘으로 우리의 경제난을 타개해 보겠다는 굳은 결의를 가지고 노력한다면 수년내에 억대의 외화를 벌것이 틀림없다고 외쳤다.

그리하여 설봉은 그당시 상공부장관, 재무부장관과 논의해 가칭 ‘가공무역추진위원회’라는 단체를 발기시켰다. 이 위원회의 취지는 우리나라에 없는 원료를 외국에서 도입해 이것을 가공해 수출하는 업체를 돕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출처 : 한국목재신문(https://www.woodkorea.co.kr)

합판사업/대성목재

대성목재공업은 일제강점기였던 지난 1936년 조선목재로 출발, 1945년 해방과 함께 손병도씨에게 경영권이 넘어갔다가 1955년 천우사를 새 주인으로 맞은 후 1960년대 합판 1억달러 수출을 주도했다.1936년 조선목재공업로 시작해 86년 동안 인천 향토기업으로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대성목재공업이 동화기업에 흡수합병된다.

1936년 인천 만석동에 “조선목재 공업주식회사”라는 제재소 자리에, 1942년 “대성목재공업주식회사”라는 합판공장을 만든 것이 오늘날의 대형합판공장이 된 것의 효시라고 할 수 있다.

대성목재 공업주식회사는 초창기 소규모의 합판공장으로서 콩풀을 사용해서 합판을 만들다가 60년 일산 10,000매 공장으로 늘리고 61년 천우사 전택보씨가 인수하면서부터 일산 42,000매 규모의 큰 합판공장이 되었고, 65년에는 최초로 필리핀에 주재원을 파견하기도 했다.

당시에는 필리핀에서 주로 원목을 구입하였는데, 오늘날 우리가 상상하기에는 힘들은 직경 1m정도 되는 불그스레한 라왕원목이 한 달에 4배씩이나 인천 앞바다에 들어오곤 하였다.그 때는 내노라 하는 종합상사도 없었고, 서울상대 출신들이 은행보다 천우사라는 무역회사를 더 선호하는 시절이었는데, 천우사에 입사한 엘리트들이 대성목재에 근무하였던 것이다.

필리핀을 필두로 해서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에 주재원을 파견하기 시작하였고 모두 서울 상대 출신들이 주재원으로 나가는 게, 통상화 되다시피 했다. 그 때는 외국에 나가기도 힘들은 시절이었고, 주재원으로 나가는 것이 영광이기도 한 시절이었다. 대성목재는 근로자가 3,500여명이었는데, 대성목재 월급날이면 인천시내가 술렁이고, 술집, 음식점들이 좋아하던 시절이었다. 65~66년 당시 3,500여명 이면, 90년대초 삼익악기, 영창악기 등이 5,000명인 것과는 대조가 안 되는 것이었다.

전택보 회장 대성목재 월미공장 건설
당시 대성목재에 일반공으로 취직하려면, 브로커에게 일만원씩 주고 취직을 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당시 종업원 월급이 삼만원 정도 할 때이니 알만도 하지 않은가. 당시에는 미국이 엄청난 양의 합판을 수입하였는데 필리핀, 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는 원재료는 있으나, 합판공업을 할 만한 수준이 아니었으므로 비교적 원재료 국가와 거리가 가까운 일본, 한국, 대만 등에 합판공업을 육성시켜, 합판을 만들게 하고, 자기들은 그 합판을 수입해 갔던 것이다.

합판공업이 육성될려면, 그 주위공업도 같이 발달되어야만 한다, 예를 들면, 수지공업, 샌드페이퍼공업, 나이프공업 등등, 당시 일본은 합판기계공업도 함께 육성되어, 우리나라 합판공장의 기계들은 거의 일본에서 수입되었다. 66년에는 일본은 올림픽을 개최하였고, 당시 동경에는 지하철이 동서남북으로 빽빽히 있었던 시절이었다. 합판산업이 한창 잘 될 무렵인 66년~68년 무렵인 것 같다. 당시 대성목재는 천우사의 전택보씨가 운영하고 있었는데, 미국에서 주문량이 폭주하자, 일산42,000매 규모의 만석동 공장으로서는 감당하기가 힘들게 되었고, 이렇게 돈벌이가 잘 되고, 국가산업에도 보탬이 되는 사업이 어디 있느냐고 정부에 건의하여 월미도에 일산 55,000매 규모의 합판공장을 차관을 받아서 건설하게 된다.

건설이 거의 완료되어가는 시점인 69年에 미국은 점차 주문량을 줄이기 시작하였고, 전사장은 차관 이자에 허덕이게 되었다. 정부에서는 장덕진씨(후일 농림부장관)를 팀장으로 하는 부실기업정리팀을 만들어, 대성목재를 조흥은행 관리업체로 만들고, 군부팀인 황필주 사장을 영입하여 운영하게끔 하였다. 그 후로 전택보 회장은 합판산업에서 손을 띄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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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성장기 부산 합판산업의 성장과 쇠퇴(1960-1980)

합판은 한국에서 6.25전쟁 후의 복구수요를 기반으로 성장하였다. 그리고 1950년대 중·후반에는 유엔군의 군납수요도 합판산업의 성장에 자극을 주었다. 군납을 통해 품질을 인정받은 한국합판은 1961년부터 미국시장에 수출을 하기 시작하였다. 마침 인건비의 상승과 공해우려로 일본이 합판수출에서 철수하는 시기와 맞물리면서 한국의 합판산업은 1960년대 중반 이후 급속한 성장을 하였다. 1970년대에는 세계 5위의 합판생산국에 세계 1위의 합판수출국이 되었다. 합판산업의 중심은 부산이었다. 1960년대 중반부터 부산은 한국 최대의 합판도시가 되었다. 그리고 세계적인 합판도시가 되었다. 합판이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절 부산은 한국산업의 중심도시였다. 한때 한국수출의 29.2%의 수출을 담당하던 도시가 부산이었다. 여기에는 합판이 절대적인 역할을 하였다. 1970년대 부산에는 당시 세계최대의 합판기업이었던 동명목재를 비롯하여 6개의 대규모 수출합판업체들이 있었는데, 이들 기업은 한국합판생산의 절반을 상회하는 생산을 하였다. 그리고 1970년 동명목재의 생산량은 우리나라 전체 합판생산량의 31.2%를 차지하였다.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 중반까지는 이른바 합판의 시대였고, 부산의 시대였고 또 동명의 시대였다. 그러나 우리나라 합판산업의 성장기반은 취약하였다. 원목의 도입이 안정적으로 이루어져야 했고 저임금이 유지되어야 하는 구조였다. 그런 조건 속에서도 실제로 수익을 내기는 어려웠다. 생산가에서 차지하는 원재료의 비중이 너무 높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한계를 넘어서게 한 것은 정부의 각종 지원이었다. 각종 수출지원으로 합판기업들은 흑자를 볼 수 있었고 성장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외화가득률은 낮았다. 1970년대 말까지 합판은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그러나 제1차 석유파동 이후 등장하기 시작한 자원민족주의로 인해 원목의 구입이 어려워지면서 한국 합판산업은 위기에 직면하였다. 합판가격보다 빠르게 오르는 원목가격과 함께 수출길이 막히면서 합판산업은 위기에 빠져들었다. 마침내 1980년 세계 최대의 합판기업 동명목재가 도산을 하였고 잇달아 기업들이 쓰러졌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에 의한 합판산업의 구조조정이 시행되었다. 동명목재에 이어 부산에서는 태창목재, 반도목재, 광명목재, 대명목재가 퇴출되었다. 6개의 합판수출대기업 가운데 성창기업만이 부산에서 살아남았다. 일반적으로 과잉설비의 정리가 지역별로 균등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관례라고 보면 부산기업들의 집중 퇴출은 이례적인 것이었다. 합판산업의 구조조정 이후 우리나라 합판산업의 중심은 부산에서 인천으로 이동하였다.

합병 후 존속회사는 동화기업이고 대성목재공업은 소멸해 ‘대성목재공업’ 간판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됐다.동화기업은 대성목재공업을 흡수합병한다는 내용의 공시를 지난주 실시했다고 12일 밝혔다. 합병 목적은 경영효율성 증대 및 사업 경쟁력 강화를 통한 기업가치, 주주가치 제고다. 합병기일은 2022년 12월1일이다.

동화기업과 대성목재공업의 합병비율은 1대 0이다. 합병법인인 동화기업은 피합병법인인 대성목재공업의 주식을 100% 소유하고 있으며, 합병 시 합병법인은 피합병법인의 주식에 대해 신주를 발행하지 않으므로 합병비율을 1대 0으로 산출했다는 설명이다.

1960년대 중반 이후에는 수출길이 막히면서 수요부족과 설비과잉으로 침체의 늪에 빠져들기 시작해 1968년 조흥은행 주도의 은행관리를 거쳐 1973년 신동아, 1978년 효성그룹으로 사주가 변경된다.

이후 지난 1986년에는 산업합리화 업체로 지정되면서 유원건설과 인연을 맺어 재기의 가능성을 보였으나 1990년대 들어 지급보증을 섰던 모기업이 경영난에 처하면서 1995년에는 경영권이 다시 한보그룹으로 넘어간다. 이후 한보사태가 벌어져 2000년 동화기업이 인수, 창업 이래 사주가 무려 9번 바뀌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한편, 대성목재공업을 흡수합병한 동화기업은 1948년 서울 왕십리에서 제재소를 연 뒤 1960년대 말 인천지역에 36만평 규모 한국제재공업단지를 조성하며 국내 목재산업 발전의 발판을 제공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대성목재공업을 인수하면서 국내 1위 목재기업으로 발돋움했다.

출처 : 인천일보(https://www.incheonilbo.com)

출처 : 인천일보(https://www.incheonilbo.com)

또한 그해 <한국일보>에 게재한 ‘나의 이력서’란 글에서는 그 당시를 회고하며 “당시 대미 합판수출량은 일본이 제일 많았고 그 다음이 대만이었다. 그러나 대성목재가 합판수출을 개척한 이래 한국의 합판수출은 점점 늘어나 오늘에 와서는 원목 한 톨도 안나는 한국이 합판수출 세계1위국가로 성장하게 되었다.그 후 대성목재는 수출호조에 힘입어 확장에 확장을 거듭하였고, 합판수출을 처음 했을 때에 비해 시설은 100%가 늘었다. 최근에는 월미도에 있는 매립지 땅 7만여 평을 매입하여 대규모 합판공장을 건설하고 있다”고 말하였다.

이와 같이 당시 천우사의 수출실적은 대단하였는데 여타 수출업체의 실적과 비교해 보면 1964년도 천우사 수출실적 552만 달러는 국내기업으로서는 대한중석에 이어 2위에 해당하는 수출실적이었다. 그러난 대한중석은 국영기업체였던 만큼 사기업체로는 천우사가 1위를 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1965년도에는 수출실적 825만 달러로 국영기업인 대한중석도 제치고 당당 1위에 올라섰고, 그 후 66년, 67년 계속 수출실적1위를 차지하였던 것이다.

합판은 한국에서 6.25전쟁 후의 복구수요를 기반으로 성장하였다. 그리고 1950년대 중·후반에는 유엔군의 군납수요도 합판산업의 성장에 자극을 주었다. 군납을 통해 품질을 인정받은 한국합판은 1961년부터 미국시장에 수출을 하기 시작하였다. 마침 인건비의 상승과 공해우려로 일본이 합판수출에서 철수하는 시기와 맞물리면서 한국의 합판산업은 1960년대 중반 이후 급속한 성장을 하였다. 1970년대에는 세계 5위의 합판생산국에 세계 1위의 합판수출국이 되었다. 합판산업의 중심은 부산이었다. 1960년대 중반부터 부산은 한국 최대의 합판도시가 되었다. 그리고 세계적인 합판도시가 되었다. 합판이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절 부산은 한국산업의 중심도시였다. 한때 한국수출의 29.2%의 수출을 담당하던 도시가 부산이었다. 여기에는 합판이 절대적인 역할을 하였다. 1970년대 부산에는 당시 세계최대의 합판기업이었던 동명목재를 비롯하여 6개의 대규모 수출합판업체들이 있었는데, 이들 기업은 한국합판생산의 절반을 상회하는 생산을 하였다. 그리고 1970년 동명목재의 생산량은 우리나라 전체 합판생산량의 31.2%를 차지하였다.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 중반까지는 이른바 합판의 시대였고, 부산의 시대였고 또 동명의 시대였다. 그러나 우리나라 합판산업의 성장기반은 취약하였다. 원목의 도입이 안정적으로 이루어져야 했고 저임금이 유지되어야 하는 구조였다. 그런 조건 속에서도 실제로 수익을 내기는 어려웠다. 생산가에서 차지하는 원재료의 비중이 너무 높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한계를 넘어서게 한 것은 정부의 각종 지원이었다. 각종 수출지원으로 합판기업들은 흑자를 볼 수 있었고 성장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외화가득률은 낮았다. 1970년대 말까지 합판은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그러나 제1차 석유파동 이후 등장하기 시작한 자원민족주의로 인해 원목의 구입이 어려워지면서 한국 합판산업은 위기에 직면하였다. 합판가격보다 빠르게 오르는 원목가격과 함께 수출길이 막히면서 합판산업은 위기에 빠져들었다. 마침내 1980년 세계 최대의 합판기업 동명목재가 도산을 하였고 잇달아 기업들이 쓰러졌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에 의한 합판산업의 구조조정이 시행되었다. 동명목재에 이어 부산에서는 태창목재, 반도목재, 광명목재, 대명목재가 퇴출되었다. 6개의 합판수출대기업 가운데 성창기업만이 부산에서 살아남았다. 일반적으로 과잉설비의 정리가 지역별로 균등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관례라고 보면 부산기업들의 집중 퇴출은 이례적인 것이었다. 합판산업의 구조조정 이후 우리나라 합판산업의 중심은 부산에서 인천으로 이동하였다.

대성목재공업(주) 전택보(全澤珤) 회장 편 (42)
1964년 사상처음으로 수출 1억 달러를 돌파한 11월30일을 기념하기 위해 그날을 수출의 날로 정한지 3년 째 되는 1966년 11월30일, 그러니까 제3회 수출의 날 기념식에서는 수출 무역에 공로가 많은 43개 업체가 선정돼 시상되었는데 그 가운데 천우사(사장 전택보)는 수출실적이 제일 많아 금탑산업훈장을 받는 영광을 차지하였다.

이해 정부는 총 수출 목표액을 2억5000만 달러로 책정했는데 기업체별 실적을 보면 천우사가 1073만 달러로 선두를 달렸고 그 뒤로 대한중석이 1014만 달러, 그 다음은 동명목재(980만 달러), 성창기업(810만 달러), 영흥상사(645만 달러), 대창기업(573만 달러)의 순위를 이루었다.
이에 대해 <현대경제일보>는 ‘조국 근대화의 수출역군’이란 제목 하에 천우사를 포함한 우수수출 업체에 대한 기사를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지난 1964년 11월30일 이래 주목할 만한 일은 수출이 양적인 면에서 증가현상과 더불어 질적인 면에서 수출 구조가 점차 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1965년 이전만 해도 수출 상품의 구성비율은 공산품 보다는 농산품 위주로 돼 있었으나 1965년 부터 정부에 의한 수출 정책이 크게 효과를 보여 공산품의 수출이 1억달러선으로 상승되었다.

특히 지난 1964년 11월30일 이래 1966년 11월30일까지 3년 동안 수출생산업의 기수로서 줄곧 1위를 달려 그 위치를 한번도 다른 사람에게 뺐기지 않은 천우사의 경우만 봐도 올해의 수출목표액 1300만 달러로 지난 10월 말 현재 1073만 달러의 실적을 올려 단위 수출 상사별로는 수위를 차지하고 있는데… 그 중 합판은 천우사 수출고의 주축을 이루고 있는 품목이며 나머지는 섬유제품을 비롯해 잡화, 완구, 트랜지스터, 라디오 등으로 돼 있다. … 천우사는 일반 가공무역과 보세가공무역이 2대 산맥으로 그 위치를 더욱 높이고 있다.…그런데 천우사의 경우 오늘날과 같은 영광의 자리를 구준히 쌓아온 것은 현재 천우사가 고용하고 있는 5, 6천명의 공원(工員)들이 노력한 결과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사장 전택보 씨의 기업인으로서의 뚜렷한 기업이념이 강력히 뒷바침하고 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바이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전택보 사장은 항상 우리나라는 과잉 인구에 의한 유휴노동력이 많은 대신 이와는 대조적으로 원자재의 부족 내지 고갈상태를 언제나 주장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와같은 여건을 타개하기 위해 자본이 많이 소요되는 대기업보다는 돈을 많이 필요로 하지 않고 유휴노동인구를 보다 많이 흡수할 수 있는 중소기업의 가공무역과 보세가공산업을 육성하면서 가까이는 사업에 종사하는 사람의 생활향상을 도모하고 멀리는 국민경제의 발전에 기여해야 한다고 주의 사람들에게 곧잘 말한다는 사실을 보아도 그의 기업이념이 어떤 목적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쉽게 상상할 수 있다’라고 적어 놓고 있다.

1914년 문천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그 해 말 부모를 따라 북간도(北間島)로 이주, 용정(龍井)에 있는 영신학교(永新學校) 고등과를 1918년에 졸업하고, 이듬해 모교인 영신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1920년 용정중앙교회에서 김정신과 결혼 현재·억재·순재 3남을 두었다.

고학생은 인삼장사란 인삼 엑기스를 파는 장사를 하는 것을 말한다. 인삼 엑기스 제조 공장에서 인삼 엑기스를 도매가격으로 사서 순경이나 공장직공들에게 파는 것이 인삼장사였다. 설봉도 처음에는 인삼장사를 했다.

설봉은 정측영어학교에서 영어실력이 점점 붙어갔다. 남보다 비교적 암기력이 뛰어났던 설봉은 그날 배운 것을 그다지 복습을 하지 않아도 단어를 외울 수가 있었다.
후일 설봉은 영어의 기초를 이곳에서 닦았다고 말하였다

고베 고등상업학교 입학한다. 고베는 일본의 대표적인 국제항구 도시였다. 국제도시에 걸맞게 외국인 거주자들도 상당히 많은 편이었고, 인종 차별도 다른 곳과 비교하면 별로 심하지가 않았다.

이듬해 봄(1924년) 설봉은 고베고상에 응시를 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낙방이 되었다. 동경 대지진 난리통에 별다른 준비없이 시험에 응했기 때문이었다. 떨어지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설봉은 그 이듬해(1925년) 다시 시험을 치뤘고 이번에는 합격을 했다

그가 고베고상을 졸업할 무렵 심한 불경기여서 조선인이 취직자리를 구하기란 하늘의 별따기였다. 그는 재학 시절 여선교사의 도움으로, 뉴욕내셔널시티은행 고베지점에 겨우 취직할 수 있었다. 그곳에는 미국인 15명과 일본인·중국인 30여명이 있었고 조선인은 전택보 혼자였다.

1929년 간도로 돌아왔다. 아내와는 9년 만에 함께 살게 된 것이었다.전택보는 다시 만주 영신학교 교사로 교편을 잡았다가, 고향으로 돌아와 함경남도 금융조합에서 일했다. 간도 교하현부근의 500정보를 구입, 선만주식회사 라는 대규모 농장을 경영하다가 8·15 광복을 맞이하여, 1945년 10월 단신 월남하였다.

전택보가 만주에서 농장 경영을 시작했을 무렵에도 벼농사는 수익성이 좋았다. 그러나 이때 그는 밤새우기 일쑤인 조선일보사 근무 때 얻은 지병인 심장경련증이 악화되었다. 한번 발작하면 숨이 막혀 죽을 것만 같았다. 그는 서른아홉 살 되던 해 12월 만주 지린(吉林)병원에 입원해 6개월 동안 병상에 누워 있어야 했다. 그가 조금씩 건강을 되찾으면서 농장도 차츰 궤도에 올랐다. 그의 농장이 큰 집단취락으로 되고 보니 자녀교육 문제가 시급한 과제로 떠올랐다. 그래서 전택보는 농장 안에 중국인 학교를 세우는 한편 조선인 교사를 초빙해 조선인 자녀들을 따로 가르치게 했다.

이런 상황에서 설봉은 고베고상 동창인 지우선씨와 사업을 하기로 결심했다. 잣을 가을에 사서 저장해 뒀다가 이듬해 봄에 팔면 이익을 보지 않을까 생각해서, 금융조합을 그만둘 때 받았던 퇴직금을 출자해 잣장사를 시작해 보았다. 그로서는 첫 사업인 셈이다.

그러나 이 첫 사업에서 그리 재미를 보지 못했다. 예상한 만큼 잣값도 오르지 않고 품질도 변질되고해서 실패를 하고 말았다. 다음에는 쌀 장사에 손을 대어 보았다.

추수기의 쌀값과 다음해 여름철 쌀값의 가격차이를 노린 장사였는데 이 장사에서는 상당한 재미를 보았다. 이제까지 기껏해야 100원 남짓한 월급을 받아왔던 그가 한달에 천여원하는 거금을 손에 쥐게되니 세상이 온통 제것만 같았다.쌀 장사에 재미를 본 설봉은 소장사에도 손을 뻗쳤다. 남만주 지방의 소값은 싼 반면에 용정의 소값은 상당히 비싸다는 것에 착안해서 소장사에 투자했던 것이다.

소장사에 투자를 한 것이 예상한 대로 이득이 많이 남아 돈을 많이 벌었다.

그러나 이것은 살아움직이는 생명을 다루는 장사였기 때문에 예상밖의 귀찮은 일들이 많았다. 그래서 좀 더 안정성있는 사업을 하기로 마음먹고 길림성 근처의 교하현으로 이사가서 정미소를 차렸다.

이 사업은 시설만 있으면 별로 자금이 없어도 된다는데 착안하여 시작한 사업이었다. 당시 길림성 교하현 근처에는 상당수의 우리나라 농민들이 벼농사를 주로 하며 살고 있었다.

농민들은 추수때 거두어 들인 벼를 마당에 쌓아둔채 저장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이 근처 정미소에 맡겨두었다가 필요한 때에 팔아 쓰고 있었다. 정미할 쌀은 맡겨둔 농민들의 요구에 따라 그때에 시세에 맞춰 결재를 해주면 되었는데, 농민들에게서 위탁받은 쌀을 하얼삔으로 보내어 바꾼 돈을 농민들이 결재를 요구할 때까지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는 이점이 있었다.

정미소를 하면서 설봉은 톡톡히 재미를 보았다. 그리하여 설봉은 이곳에다 아담한 새집을 짓고 부모님과 동생들을 데려다가 같이 지낼수 있게 되었다. 평생동안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자기돈으로 자기집을 지은 것이었다.

정미소 사업이 일단 본 궤도에 오르자 정미소는 동생 택완에게 물려주고 설봉은 북만주 지지하루에 가서 중국인이 경영하던 좁쌀 정미사업을 인수하였다. 지지하루는 겨울이 되면 기온이 영하 40~50도까지 떨어지는 추운지방이었다.

집밖에만 나가면 엄청난 추위 때문에 몇 겹의 옷을 입고도 두툼한 털옷으로 또다시 무장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다닐수가 없는 지방이었다.

이런곳을 설봉은 바쁘게 돌아다니며 좁쌀장사를 했다. 그 다음으로 손댄 것이 농장건설이었다. 농장건설에 관한 계획은 즉흥적인 발상이 아니었다.

그는 고베고상 시절에 이미 만주 전역의 농업조사 보고서까지 쓴 경험이 있었다.

고베고상에서는 매년 성적이 우수한 학생 10여명을 선발하여 만주, 중국 등지로 해외여행을 시켰는데 설봉도 고베고상 시절에 우수학생으로 뽑혀 여순, 대련, 북경, 장춘, 하얼삔 등을 다녀오는 여행을 한 일이 있었다.

그때 만주전역의 농업보고서를 쓴 것이 농장건설을 해야되겠다는 생각을 하게했던 것이다.

벼란 것은 원래 남방작물이므로 만주에서는 기껏해야 일본인들이 안동현에서 조금 심고 있었을 뿐 다른데는 벼동사가 전여 없었다. 만주벌판에 벼 농사가 보급되기는 순전히 조선인 이주자들에 의하여 이뤄졌던 것이다.

조선 농민들은 벼가 원래 기후와 환경에 비교적 잘 적응하는 작물인 것을 알고 점차 북만주에까지 보급했던 것이다.

당시 일제의 식민정책으로 문전옥답을 억울하게 빼앗기고 고향을 떠나온 우리 농민들은 근 100여만명이나 되었는데 그들의 노력으로 벼 농사가 소련 영내에까지 보급되었다는 사실을 설봉은 그의 학창시절 조사보고서에서 지적해 냈던 것이다.

농사도 잘되었고 농민 수입도 괜찮았지만 만주 특유의 기후 탓으로 문제가 있었다. 만주는 겨울이 길고 여름이 짧기 때문에 농민들은 여름에 번 수입을 겨울에 다 없애버렸다. 전택보는 농민들이 농사만 지어 가지고는 재산을 만들기가 어렵다고 판단해 농민들에게 축산을 장려했다. 또한 만주에서는 해산물이 귀했으므로 만주 토문(土門)에다 ‘동만(東滿)상회’라는 회사를 차리고 수산물 판매사업을 시작했다. 만주 생필(生必)주식회사를 통해 주로 명태를 팔았다.

설봉은 신참에서 멀지 않은 육가자(六家子)라는 역에서 약 10리를 들어간 곳에 약 5백정보의 무인지답을 샀다. 이 땅은 예전에 청나라 사람들이 살던 곳으로 만주사변때에 일본군에 의해 점령된 곳이었다.

설봉은 여기에다 대단위 농장을 건설하기로 결심하고 일에 착수했다. 당시 만주에는 마적들의 횡포가 심하였으므로 마을을 만들려면 토성이나 석성을 쌓고 망대를 세우는 것이 우선적인 일이었다. 우선 넓이 12척, 높이 12척의 토성을 쌓았다.

그리고 농민들에게 집 지을 자금을 대 준다고 하니까 청나라 사람 130호가 들어왔다. 조선 농민들에게는 집 지을 자금 외에 농우까지 마련해주고 약 30호를 입주시켰다.

만주는 겨울이 긴탓으로 가을에 추수한 뒤로는 기나긴 겨울을 술먹고 노름을 하는 것으로 재산을 탕진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를 생각하고 설봉은 농장 농민들에게 축산을 권장했다.

이러는 중 전쟁은 막바지에 접어들고 전세는 일본이 패배할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다. 일본이 패망하면 이제껏 해왔던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기에 설봉은 농장을 정리하고자 했다.

그러나 원매자가 선뜻 나서지 않았다. 겨우 만철에 교섭해 50만원에 팔기로 결정했다. 대금지불기일이 8월8일이었는데 일본의 패전으로 돈을 받아내지 못했다.

정미소와 농장경영에 몰두하며 북만주를 누비고 다니던 설봉은 우연한 기회에 명태장사에도 손을 댔다. 이때가 1941년이었는데 만주에서는 해산물이 매우 귀한 때문이었다. 더욱이 전쟁이 가열되면서 만주에서는 해산물을 찾아볼 수가 없을 정도로 해산물이 귀했다.

당시 만주의 큰 도시에는 지금의 고시가격과 비슷한 제도가 있어서 일정가격 이상 받을 수 없도록 돼있었고 이를 위반할 때에는 처벌을 받도록 돼 있었다.

그런데 번양(藩陽)역에서는 고시가격제도가 없어서 그 곳으로 해산물을 수출해서 팔기도 했다. 그러다가 철도경찰에 끌려가 유치장 신세를 지기도 했다. 번양이 봉천시에 편입된 사실을 모르고 장사를 하다가 고시가격위반으로 붙잡혀갔던 것이다.

이런 일이 있은 후 얼마 지나서 북경이나 천진에는 고시가격제도가 없다는 것을 알아내고 북경이나 천진 등으로 수출을 하기로 했다.

수출절차가 까다로왔으나 화신과 교섭을 해서 천진출장소 명의로 명태 수출허가를 얻어 수출하는데 성공했다. 14차분의 건명태를 천진에 끌어내리니 굉장한 분량이었다. 모두들 깜짝 놀랐다.

그러자 소문이 사방에 퍼지면서 천진과 북경에 있는 조선인 거간꾼들이 저마다 팔겠다고 나서는 것이었다. 한 쾌를 8원씩 팔아주면 구전으로 거기에서 1원씩 주기로 약속했다.

그래서 팔기 시작한 것이 며칠 사이에 전량을 모두 팔아 치울 수가 있었다. 명태 한쾌에 투자된 돈이 운송비까지 합쳐 1원15전이었으니까 구전을 제하고도 엄청난 돈이 들어오게 되었다. 명태장사로 번 돈이 70만원이란 거액이 됐다.

1945년 미군정청 이재과장을 맡았다 그만두고, 1947년에 천우사(天友社)를 설립하여 본격적으로 사업에 투신, 무역업을 개척하였다. 서울로 환도한 뒤 천우사의 무역업만으로는 발전의 한계가 있음을 느끼고 생산업체를 건설할 생각을 굳혔다.

그러니까 천우사의 간판이 걸린 것이 1947년 3월 8일이었고, 천우사가 간판을 내걸고 제일 먼저 손을 댄 것이 ‘종이 장사’였다.

1945년 10월8일, 드디어 설봉은 가족을 함흥에 남겨둔 채 남쪽행 기차에 올랐다. 기차는 화물차였는데 사람이 어찌나 많았던지 기차가 38선 근처에 도착하기까지 시종 화물차 지붕 위에 올라 있어야 했다.

그 당시만 해도 그리 감시가 심하지 않았기 때문에 38선을 걸어서 넘었다. 서울에 도착해 소복여관(현 도큐호텔 자리)에 숙소를 정했다.

그리고 나서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이 전에 몸담고 있던 조선일보사였다. 그 당시 조선일보사는 극심한 경영난으로 방응모씨는 소유주식의 절반을 이중문이라는 사람에게 125만원에 팔아 그와함께 공동경영을 하고 있었다.

설봉은 여관에 들어앉아 앞으로의 할일을 놓고 생각해 보다가 당시 미군정의 경무부장으로 있는 조병욱씨를 찾아갔다. 다른 사람의 취직자리를 부탁하러 찾아갔던 것인데 도리어 그에게 붙잡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즉 설봉은 경무부장 밑에 이재국장이 됐다.

미군정 시대라 이재국장은 미국인 한명, 한국인 한명 이렇게 둘을 두고 있었다. 이재국장을 한 6개월 하고 있는데 조병욱 부장이 이번에는 자기와 같이 정치를 하는 것이 어떠냐는 부탁을 하길래 거절하고 이재국장 자리도 뿌리치고 나와버렸다.

그후 1946년 봄에 온가족을 데리고 38선을 넘었다. 그때는 38선을 넘기가 조금 힘들어져 있었다. 서울에 와서는 잠시 효자동에 있는 효자여관에 묵으면서 집을 구하러 다녔다. 그때 마침 청운동에 있는 조그만 기와집을 일금 10만원에 살 수 있었다.

청운동 집에서 온가족이 오랜만에 함께 모여 살림을 꾸미고 들어앉으니 마음이 여간 기쁘지 않았다.

이 무렵 우연히 고베고상의 동창생 김인형씨를 만났다. 그는 대한상사라는 무역업을 하고 있었는데 자기는 장사할 줄을 잘 모르니 같이 해 보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설봉은 그 회사의 부사장이 됐다.

설봉은 부사장으로 일을 하고 있으면서도  단독으로 대외 무역을 할 수 없을까 고민하며 돈줄을 물색하고 있었다. 그때 김상필씨로부터 이화대학 총장 김활란씨를 소개받았다.

김활란 총장은 학교재단 기금 중 500만원을 선뜻 빌려주었다. 설봉은 이 돈을 장사 밑천으로 하여 조선일보 사옥 3층에 방 하나를 빌려 사무실을 차렸다.

이것이 바로 지금의 <천우사>의 시작이었다. 그러니까 천우사의 간판이 걸린 것이 1947년 3월 8일이었고, 천우사가 간판을 내걸고 제일 먼저 손을 댄 것이 ‘종이 장사’였다.

조선일보사에 사무실이 있었던 만큼 창고도 마음대로 얻어 쓸 수 있었고, 판매처를 얻기도 안성맞춤이었다. 당시의 무역은 마카오 중심이었다.

국산품이란 말조차 생소하던 시절이었으니까 국민들 생활필수품은 대부분 마카오에서 조달됐다. 그때 신사들이 마카오 양복에다 마카오 구두를 신어야 행세를 할 수 있었던 시절이었다. 

이런 시절에 천우사는 마카오 무역선에 싣고 온 양복지 지물류 등을 가지고 장사를 시작했다. 적은 자본이라 마카오까지 가서 무역을 할 수는 없었고, 상인들이 가지고 들어오는 물건을 사서 팔았다.

국산품이란 말조차 생소하던 시절이었으니까 국민들 생활필수품은 대부분 마카오에서 조달됐다. 그때 신사들이 마카오 양복에다 마카오 구두를 신어야 행세를 할 수 있었던 시절이었다. 

이런 시절에 천우사는 마카오 무역선에 싣고 온 양복지 지물류 등을 가지고 장사를 시작했다. 적은 자본이라 마카오까지 가서 무역을 할 수는 없었고, 상인들이 가지고 들어오는 물건을 사서 팔았다.

1954년 마닐라, 1960년 누욕과 도쿄 수출거점 설치, 한국축산 개발 설립

이것이 1954년 대성목재공업주식회사(大成木材工業株式會社)·조선피혁주식회사를 인수하게 된 동기이다. 그는 국내 동업자끼리의 경쟁보다는 해외시장 개척에 더 적극적으로 나섰다.그래서 1960년 3월 우리 나라 최초로 합판을 수출하게 되었다. 그 뒤, 합판 수출은 우리나라 수출의 주품목으로 각광을 받게 되었다. 1964년 신진완구주식회사·신진수출주식회사(新進輸出株式會社)를 설립하였고, 그 해 천우사는 552만 달러를 수출하여 국내 민간기업 중 1위를 차지하였다.

1965년에는 조선피혁을 강남공업(江南工業)으로 개칭하고, 한국축산개발주식회사와 삼익선박(三益船舶)을 설립하였고, 제2회 수출의 날 수출실적 제1위로 동탑산업훈장을 수상하였는데, 이 기록은 1967년까지 이어졌다. 천우사의 전성기를 맞은 것이다.

기독교 가정에서 성장한 탓으로 신앙심이 두터웠고, 독실한 기독교인으로서 그는 폭넓은 사회활동을 하였다. 1947년 이화여자대학교 이사로 취임한 것을 비롯해서, 1953년 조선일보사 대표취체역, 1957년 유네스코후원회 회장, 1959년 주한 덴마크 명예영사, 1961년 포풀라협회 회장, 1963년 국제법학회 부회장, 1963년 한국신학대학 이사 등 각계에서 눈부신 활약을 하였다.

한편, 재계에서도 8·15광복 후 대한상의(大韓商議) 재건운동, 한국무역협회 창립, 한국경제협의회 창립 등에 주도적 역할을 하여 경제계의 지도자로서 큰 업적을 남겼다.

4·19혁명 뒤 허정(許政)과 함께 과도정부 수립에 공헌한 인연으로 상공부장관에 오르기도 하였으나, 35일간의 단명으로 끝났다. 정부는 그의 국민경제발전에 기여한 공적과 민간경제외교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하였다.

우리는 저렴한 노동력을 이용해 수공업, 가내공업으로 중소기업을 급속히 발전시키는 것이 적은 자본을 가진 우리가 조속한 시일 내에 실업자를 구제하고 국제수지를 개선시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전제하고 나서 그는 일본과 홍콩으로부터 기술을 도입해서 섬유제품, 2차가공품, 부품생산공장의 설치를 해야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그밖에도 크리스마스 장식업, 조화, 가발, 농구화, 메리야스, 양말, 수예품 등 할일이 얼마든지 있다고 역설했다. 우리국민이 공것을 바라지 말고 우리의 힘으로 우리의 경제난을 타개해 보겠다는 굳은 결의를 가지고 노력한다면 수년내에 억대의 외화를 벌것이 틀림없다고 외쳤다.

그리하여 설봉은 그당시 상공부장관, 재무부장관과 논의해 가칭 ‘가공무역추진위원회’라는 단체를 발기시켰다.
이 위원회의 취지는 우리나라에 없는 원료를 외국에서 도입해 이것을 가공해 수출하는 업체를 돕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천우사사장 전택보씨(사진)가 19일 상오11시25분 서울 신교동자택에서 심장마비로 급사했다.
향년 80세. 고전사장은 일본신호고상을 졸업, 일찌기 실업계에 투신하여 보세가공무역을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개척하는등 한국경제계에 큰기여를 했다.

1924년 봄 전택보는 고베고상(神戶高商)에 응시했다. 결과는 낙방이었으나 이듬해 다시 시험을 쳐서 합격했다. 그가 고베고상을 졸업할 무렵 심한 불경기여서 조선인이 취직자리를 구하기란 하늘의 별따기였다. 그는 재학 시절 여선교사의 도움으로, 뉴욕내셔널시티은행 고베지점에 겨우 취직할 수 있었다. 그곳에는 미국인 15명과 일본인·중국인 30여명이 있었고 조선인은 전택보 혼자였다. 그는 민족 자긍심을 지킨다는 마음으로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다. 항구도시 고베에는 조선인 막노동자가 몰려와 살고 있었다. 조선인이 경제적 하층구조의 태반을 차지하자 ‘조센징’ 차별도 노골적으로 바뀌어 갔다. 그것이 전택보에게 고민거리를 던져주었다. 취직을 했으니 아내를 룽징에서 데려올까 생각했지만, 아내에게 조센징이란 비아냥거림을 듣게 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아내와 떨어져 마냥 고베에서 일할 수도 없었기에 고민 끝에 그는 룽징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몇 달만 참으면 하얼빈이나 펑텐 지점으로 보내주겠다는 지점장의 만류도 뿌리치고 1929년 간도로 돌아왔다. 아내와는 9년 만에 함께 살게 된 것이었다.

 1947년 3월 8일 천우사(天友社)를 세우고 무역업에 뛰어들었다.

천우사를 설립한지 얼마 안돼서인데, 일본 유학시절 때부터 잘 알고 지냈던 박찬빈 이란 친구가 설봉을 찾아왔다.

자기는 중국CIC(중국 군대의 비밀단체)의 책임자인 조자청과 손잡고 일하는데 ,중국에서 물건을 가지고 올테니 팔아 달라는 것이었다.

설봉은 그러마고 했더니 얼마 후에 그는 복사지 한 배를 가득 싣고 들어왔다. 복사지는 그 당시 매우 귀한 물건이었기 때문에 쉽게 팔 수 있었다. 그리고 복사지 대금조로 중석(重石)을 한 배 실어주었다.

그러니까 두 번 장사를 한 셈이었다.

당시 중석은 일본인들이 채광해 놓고 미쳐 실어가지 못한 것이 전국 곳곳에 방치 된 것이 많이 있었음으로 어렵지 않게 실어 줄 수 있었다.이것이 천우사의 첫 번째 큰 장사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장사에서 설봉은 수백만원을 벌었다.

때는 1947년 여름쯤이었고, 천우사 간판을 건지 불과 3,4개월 밖에 안된 때였다.

그러나 매번 행운만이 따르는 것은 아니었다. 1947년 초가을 쯤이었는데 봉명석이라는 사람이 찾아와서 자기는 상해에서 신문용지를 구해 올 수 있다고 했다.  

그때는 신문 용지가 아주 귀한 때라 천우사는 곧 그와 손을 잡고 신문용지 거래를 시작하기로 했다. 그는 신문용지를 구하기 위해서는 선금이 필요하다고 해서 설봉은 선금 600만원 외에도 동아일보의 600만을 비롯해 여러 사람에게서 모두 6000만원을 마련해 그에게 넘겨줬다.

그러나 그가 상해로 돌아간지 석 달이 넘도록 감감 무소식이었다. 사기를 당한 것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봉명석은 그 돈을 모두 유흥비로 탕진해 버렸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설봉은 자기 돈 600만원 뿐만 아니라 6000만원의 큰 빚쟁이가 되고 말았다. 천우사는 이때 완전 파산 상태에 빠지게 됐으며 이화재단 김활란씨에게서 빌린 돈 500만원의 밑천까지 전부 날려버렸던 것이다.

이때부터 설봉은 날마다 빚 독촉을 받게 됐는데 하루는 모 명문학교 사친회 회장이 천우사 사무실을 찾아와서 ‘내 돈 500만원을 내놓으시오’ 안 내면 죽이겠다고 설봉의 멱살을 잡고 차마 입으로 할 수 없는 욕설을 마구 퍼부어 댔다.

이때 사원들이 달려들어 떼어놓긴 했으나, 이때 설봉이 받은 고통과 마음의 상처는 이루 형언할 수 없었다.

옷을 찢긴 채 (조선일보)3층 천우사 사무실에 멍하니 앉아있던 설봉은 ‘저기 전찻길에 뛰어내려 죽고싶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때 간부 사원들은 자칫하면 사장이 자살이라도 하지 않을까 걱정이 돼 의논 끝에 사장을 해외로 피신 시키기로 결정을 했다.

‘사장님 6개월 동안만 해외에 나가서 피신해 계십시오. 그동안 우리가 국내에서 뒷 처리를 할테니, 사장님은 해외에서 활약해 주십시오’ 하고 출국을 간곡히 권했다.

이리하여 설봉은 비밀리에 서울을 빠져나와 홍콩 행 비행기를 타게 됐다.

때는 1948년 4월 설봉은 해방 후 처음으로 해외에 나가게 됐던 것이다.

빚에 몰린 설봉은 비밀리에 서울을 빠져나와 홍콩 행 비행기를 탔다.

때는 1948년 4월, 설봉은 해방후 처음으로 해외 여행을 하는 셈이었다. 설봉은 홍콩에 도착하자 우선 뉴욕 내셔날 시티뱅크 홍콩 지점을 찾아갔다. 이 은행은 설봉이 일본 고베에 있을 때 근무한 경험이 있는 은행이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은행 고문으로부터 미리 소개장을 받아왔기 때문이었다.

설봉은 소개장을 내어놓고 협력을 구했다. 그랬더니 지점장은 선뜻 홍콩에서 가장 실력있는 지물상인 치생공사(治生公司)를 소개해 주는 것이 아닌가.

홍콩 지점장은 설봉에 대한 첫 인상을 좋게 느꼈던 모양이다. 그 즉시로 설봉은 홍콩의 치생공사와 계약을 체결하고 무역을 시작했다. 방법은 물물교환방식이었는데 치생공사가 지물을 선적해 서울에 보내면 천우사는 대신 오징어를 사서 그 배에다 실어 보낸다는 조건이었다.

그러니까 지물 대금을 먼저 치를 필요없이 오징어를 사서 실으면 되는 장사였다.

드디어 신문용지 50톤을 실은 첫 배가 부산에 도착하였다. 그러자 국내에 있던 천우사 사원들은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해서 지물을 팔고 그 돈으로 오징어를 구해 그 배에 실어 보냈다.

이러기를 3개월동안 계속하니 빚의 3분의 1을 갚을 수 있게 됐다.

설봉은 홍콩에 피신해 있으면서 계속 지물을 실어 보냈다. 한편 치생공사는 황옥당이라는 사람을 한국에 파견해 천우사의 무역업무를 감독케 하였다.

이런 식으로 무역을 6개월간 계속한 결과 빚의 절반을 갚을 수 있었다.물물 교환단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무역이었지만 서로 믿고 했기 때문에 번거롭지도 않고 사업도 잘 돼 좋았다, 치생공사는 천우사의 은인이나 다름없었다.

날이 갈수록 치생공사와의 무역은 더욱 번창해져서 한때는 전국 지물 수입량의 거의 절반을 천우사가 차지 했다.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한국의 무역에도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홍콩 일변도의 무역에서 대일 무역이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행운이 설봉을 찾아왔다. 어느날 유동석이란 사람이 찾아와서 조선농회(朝鮮農會, 오늘날 농협과 비슷한 기관)에서 수집한 가마니 수십만장을 일본에 수출할 수 있는 허가를 받아 줄 수 있으니 그걸 한 번 해 보라고했다.

그런데 그 때 조선농회 농회장을 최태용씨라는 사람이 하고 있었는데 최태용씨는 영흥 사람이었고 설봉이 영흥에서 금융조합이사로 있을 때 어느정도 안면이 있는 사이여서 어렵지 않게 천우사가 대일 가마니 수출업자로 지명될 수 있었다.

당시 농회에서 수집해 놓은 가마니를 체크해 보니 그 양을 다 일본으로 실어 나르려면 배가 17척이나 필요한 방대한 양이었다.

일본의 수입상은 제일물산이었는데 1949년 한 해는 온통 가마니 수출로 돈을 벌다 시피했다. 해방 후 민간 무역으로 일본과의 교역은 이것이 처음이었으며 그때 가마니 수출대금은 약 30만 달러에 이르렀다.

천우사는 1950년 6월 24일 인천항에 신문지와 양복지 등 대규모 물자를 수입해 놓고 있었다. 그날은 토요일이어서 통관을 26일 월요일로 미루고 있었는데 뜻밖에도 6·25전쟁이 터지고 말았다.부산 부두에는 천우사 화물도 잔뜩 쌓여 있었다. 군의 통고를 받은 전택보는 화물 처리 문제로 고심했다.

전택보는 전쟁이 끝나기만을 마냥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남포동에 전세로 점포를 얻어 다시 무역업을 시작했다.

출처 : 주간조선(http://weekly.chosun.com)

그는 천우사의 무역업만으로는 발전에 한계가 있음을 깨닫고 생산업체를 건설할 생각을 굳혔다. 이것이 1954년 대성목재공업주식회사·조선피혁주식회사를 인수하게 된 동기이다. 그는 국내 동업자끼리의 경쟁보다는 해외시장 개척에 더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래서 1960년 3월 한국 최초로 합판을 수출하게 되었다. 그 뒤 합판은 한국 수출의 주요 품목으로 각광을 받게 되었다. 1964년 신진완구주식회사·신진수출주식회사를 세웠고 그해 천우사는 552만달러를 수출, 국내 민간기업 제1위를 차지했다.

그는 1965년에는 조선피혁을 강남공업으로 개칭, 한국축산개발주식회사와 삼익선박을 설립했으며, 제2회 수출의 날 대한민국 수출실적 제1위로 동탑산업훈장을 받았다. 이 기록은 1967년까지 이어졌다. 천우사의 전성기를 맞은 것이다

동물원 준비 과정에서 가장 어려웠던 것은 달러를 바꾸는 일이었다. 그때는 암시세와 공정환율의 차이가 많아서 공정환율로 바꾸지 않으면 준비에 큰 문제가 생겼다. 전택보는 재무부를 서너 차례나 드나들며 사정해야 했다.

4·19혁명 뒤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 성명을 발표한 이튿날 4월 27일부터 과도정부의 내각 조직이 시작되었다.

전택보는 대기업가 중심의 새로운 단체를 구성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김용완, 최태섭, 김항복 등도 마찬가지 생각이어서, 그들은 천우사 사장실에 모여서 새 조직을 의논했다. 김용완은 처음 새 단체를 뜻 맞는 사람들끼리만 발족, 차츰 확대해 가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그러나 나중 전국을 대표하는 단체가 되려면 아무래도 대기업가를 모두 참여시키는 것이 좋겠다는 전택보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마침내 한국경제협의회가 발족되었다.

천우사는 1960년대 6년 동안이나 줄곧 수출 최고상을 수상, 해외 시장 개척에서 ‘한국의 신용’으로 통했다. 1970년대 들어 천우사는 무역업에서 쌓은 경험과 미국 시장에서의 기반을 토대로 스튜어트데이비스사(社)와 손잡고 보잉 707기를 빌려 미국과 서울 간 항공화물 수송을 시작했다.

또한 세계적 전자회사인 필립스와 합작으로 전자제품은 물론 컴퓨터 부품까지 수출해 생산했다. 이미 천우사는 1950년 9·28 서울수복 직후 필립스의 도움을 받아 한국에서 처음으로 탁상용 라디오를 만들어낸 일이 있었으며, 그 인연이 이어져 필립스와 기술제휴로 김포 등촌동 공장에서 전자제품과 부품을 생산해 대미·대일 수출을 계속해 왔다. 1970년에는 상공부로부터 TV 부품 수입을 승인받아 오류동에 5만4638㎡(1만6528평) 공장 대지를 마련하고 한 해 3만대 생산 목표를 세웠다. 그 무렵 한국의 TV 생산업체는 모두 도시바·히타치·샤프·산요 등 일본업체와 기술 합작을 하고 있었는데, 천우사는 필립스와 기술제휴를 함으로써 유럽 회사와 제휴한 첫 업체가 되었다.

전택보가 주장했던 보세가공 무역은 부두의 보세창고에서 수입한 물품을 가공처리해 재수출하자는 것은 아니었다. 세관의 감시가 가능한 곳이면 어디에서나 확대해서 실시하자는 것이었다. 5·16 혁명정부가 보세가공 무역을 국책으로 결정했다고 해서 전택보의 임무가 끝난 것이 아니었다. 전택보는 학자도 아니고 정치가도 아닌 실업인이었으므로, 보세가공 무역이 그의 제안에 의해 정책으로 채택되었다 해서 그 책임을 다한 게 아니라 당장 그것을 실천에 옮겨야 했다.

그는 맨 먼저 조화(造花)에 손을 댔다. 일본에서 기술자 다카하시(高橋)를 초빙하고, 천우사 6층 강당을 이용해 기술을 배울 부녀자를 모았다. 그리고 부산에 내려가서 의류공장 17곳과 계약, 일본에서 기술자 오오키(大木)를 데려와 미국에 수출하기 위해 의류 생산을 시작했다. 그 밖에도 완구 공장, 양탄자 공장도 세워 나갔다. 1970년대 초반 천우사는 의류 가공 수출만으로 한 해 500만달러를 벌어들이며 명실상부한 한국 최고 의류 제작 수출업체로 이름을 드날렸다.

그 무렵에는 수출산업에 대한 정부의 금융 세제상의 지원도 없었다. 미국에 대한 수출 실적도 없었으므로 확보해 놓은 쿼터도 없었다. 쿼터 문제 교섭차 전택보는 미국을 두 번 방문해서 미 상무부 차관보인 로보를 만나 이 문제를 놓고 교섭을 벌이기도 했다. 이 일은 전택보의 힘으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보세가공 무역만 하더라도 정부에서 이를 국책으로 채택, 여러 혜택과 지원을 아끼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날처럼 성장한 것이다. 특히 박정희 대통령이 다달이 확대무역회의를 주재했기에 수출을 토대로 한 경제 성장을 이룩할 수 있었다. 1947년 이화여자대학교 이사 취임을 비롯해서 1953년 조선일보사 대표취체역, 1957년 유네스코후원회 회장, 1961년 포플러협회 회장, 1963년 국제법학회 부회장, 1963년 한국신학대학 이사 등 각계에서 눈부신 활동을 벌였다.

전택보는 만년에 세상 사는 지혜를 이렇게 말한다.

“국가 대 국가, 민족 대 민족, 개인 대 개인의 끝없는 다툼과 경쟁 속에서 인류 역사와 문명은 발전해 왔다. 오늘날 우리나라도 적자생존의 법칙에 얽매여 있다. 초등학교 입학 때부터 대학 졸업 때까지 수많은 시험을 치르며 경쟁한다. 바늘구멍 취업문을 뚫는 데 성공해도 끝이 아니며, 일터에서도 치열한 경쟁을 해나가야 한다. 더욱이 우리나라는 외적으로 북한과 맞서고 있으며 중국·일본·러시아 등 강국들과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또 내적으로는 협소하고 각박한 국토에서 5000만 인구가 선진국 수준의 정치·경제·교육·문화의 욕망을 갖고 있기에 경쟁은 더욱 극심하다.

한국에서의 경쟁은 남을 거꾸러뜨리고 자신만 살아남겠다는 경쟁이 대부분이다. 정치인들은 국민을 잘살게 하겠다는 뚜렷한 정책 발표는커녕 그저 경쟁자를 쓰러뜨리기 위한 반대와 공격에만 급급한다. 기업인들도 국가 경제 발전에 어떻게 공헌할까를 생각하기보다 동업자를 해치는 데 열중하는 예가 많다. 그러나 오늘날은 세계가 하나가 되어가고 있으며, 우리의 활동 무대는 온 세계에 걸쳐 있다. 남을 짓눌러 없애는 경쟁이 아닌 남보다 커져서 잘살게 되고, 경쟁에서 뒤처진 무리까지 끌어안는 인의(仁義)의 경쟁이 되어야 한다.

우리의 욕망은 무엇인가. 큰 부자가 되고 싶기도 하고, 절대권력을 갖고 싶기도 하다. 큰 재산이 있으면 자신의 의식주를 해결한 뒤에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고, 큰 권력이 있다면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을 도움으로써 행복을 느끼는 게 가장 이상적일 것이다. 더욱이 우리나라같이 빈곤과 부정이 심한 나라에서 빈곤을 없애고 정의를 구현한다면 이보다 더 큰 기쁨이 어디 있겠는가. 사도 바울은 ‘내가 선한 싸움을 하고 나의 갈 길을 다 달렸다’고 말했다. 세상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승리자로서의 만족감을 가질 수 있다면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행복을 느낄 것이다.”

1980년 7월 18일 전택보는 지인들과 골프를 치던 중 갑자기 쓰러진다. 차로 근처 병원으로 옮겼으나 일흔아홉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아내와 자식들이 마지막을 지켜보지 못한 정말 뜻밖의 죽음이었기에 애석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전택보는 이런 말을 남겼다.

“이만큼 살아오는 동안 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빚을 졌다. 그 빚을 갚을 길은 내가 눈을 감을 때까지 일을 계속하는 것이다. 나는 보잘것없지만, 일생 동안 내가 가진 능력과 지식을 모두 짜내어 살아왔다. 다시 태어나더라도 내가 살아왔던 대로 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성장비화·부침야사(재벌이력서:8)
입력 1991.12.31 00:00 0 0
◎「마카오무역」 열풍… 수입품 장사 “노다지”/면사·양복지등 생필품 취급 수십배 이득/중석·화약원료등 전략물자로 대금지불/강익하·김규면·신영균등 자본축적 기반닦아정크무역이 절정을 이루던 46년 6월초. 정오께부터 인천항 부두를 서성이던 서른살 남짓한 젊은 사내는 석양을 등지고 미끄러지듯 수평선을 넘어오고 있는 배 한척을 보고 걸음을 멈추었다. 배가 항구에 가까워 광성호라는 이름이 육안에 들어오자 그 사내는 중국말로 큰 소리를 질렀다. 돛배에서도 서너명의 선원들이 손을 흔들며 중국말로 응답해 왔다. 부두에 닻을 내리자 젊은이는 배에 뛰어올라 갑판을 열어제쳤다. 콩기름 낙화생 당면 시계 사카린 빙초산 광목 양잿물 소금 등 20여종류의 물건들이 가득했다.

이 배가 바로 우리나라와 중국을 오가던 정크선 광성호. 광성호를 기다리던 젊은이는 화업무역공사라는 간판을 내걸고 정크무역에 참여한 김병환이었다. 『당시에는 수출 수입이라는 말 대신 일제시대의 이입이출이라는 말을 그대로 쓰고 있었지요. 광성호가 도착한 뒤 인천해관(지금의 인천세관)을 찾았더니 시청으로 가라고 했어요. 시청에 갔더니 다시 항만사령부로 가 보라는 거예요. 그곳엔 미군정 주재관 길버트상사가 입출항을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배가 도착했다고 알리니 그 사람이 직접 조사를 나와 아편과 무기가 있느냐고만 물었어요. 없다고 하니까「오케이」,그것으로 끝이었어요. 관세고 뭐고 물론 없었지요』 무역협회 창립이후 현재까지 비상근 이사를 지내며 경기도 부천에서 알파소닉코리아라는 전자회사를 차려 회장을 맡고 있는 김병환씨의 회고다.

관세도 없고 특별한 제약도 없었던 정크무역은 거의 10배가 남는 노다지 장사였다. 김병환씨의 증언. 『국내에서 구하기 힘든 물건들이었기 때문에 정크선이 들어왔다 하면 바로 동이 났다…』 당시 정크무역을 하면서 얼마나 이익이 남느냐를 결정한 것은 오로지 무역행정의 실권을 쥐고 있던 미 군정청 상무부 소속 거윈준위의 사인에 달렸다. 정크무역이 활기를 띠자 미 군정청은 과세를 부과하고 수입허가서를 발급했다. 서울에 주재한 거윈준위가 책임자였으므로 그에게서 얼마나 빨리 수입허가서를 받는냐에 따라 큰 돈이 왔다가다 했던 것이다. 따라서 자연스레 인천과 서울을 오가는 총알택시가 등장했고 인천­서울간 트럭운송업자들도 덩달아 큰몫을 잡았다. 인천에서 트럭운송업을 하고 있던 조중훈도 이 시기에 기반을 잡았다.

국내에 무역업을 본격 태동시킨 정크무역은 47년 3월17일 마카오에서 무역선인 페어리드호가 인천항에 입항,이른바 「마카오무역」을 전개하기 전까지 이어졌다. 국내 기업인들이 무역 열풍에 본격 휩싸이게 된 것은 바로 마카오 무역때문이었다.

마카오무역은 영국계 2천톤급 선박인 페어리드호가 인천항에 들어 온 이후 6개월여 계속된 시기의 무역을 말한다. 중국대륙이 모택동의 남진으로 어수선해지자 중국화주들은 홍콩에서 물건을 선적,우리나라로 가져오려 했다. 그러나 영국정청이 이를 허가하지 않자 홍콩서 물건을 선적한 뒤 마카오로 수출하는 양 꾸며 우회,인천항으로 입항하면서 마카오무역이라는 별명이 붙게 됐다. 이때 들어서야 비로소 국가간 제도적인 무역이 나타났다. 포르투갈령인 마카오정청은 한국으로 가는 물자에 수출승인서를 발급했던 것이다.

페어리드호와 큰 거래를 한 국내기업인은 김익통상의 강익하와 삼양무역의 김규면이었다. 처음 입항한 페어리드호는 생고무 양복지 신문용지 등 고급물품을 가득 싣고 들어왔다. 당시엔 고급품은 모두 마카오제라하여 마카오양복 마카오신사라는 말들이 나돌았다.

마카오 무역선은 우리나라에 시계 양복지 면사 모사 페니실린 사카린 등을 싣고 왔고 그대신 폭약제조용인 헤로중석과 화약원료,미군이 불하한 지프차 및 중고차의 부품을 싣고 갔다. 당시 장개석군과 모택동군간에 전쟁을 치르던 중국은 비싼 값으로 이들 전략물자를 사들였고 마카오무역선은 일본이 우리나라에 놓고 간 전략물자를 모으는 일로 재미를 보고 있었다. 국내 기업인들은 일본이 버리고 간 당시로선 하잘 것 없는 물자들을 주고 수십배 이득을 붙여 팔 수 있는 각종 생필품을 받아 잇속을 차릴 수 있었다.

마카오무역선이 싣고간 헤로중석은 지금의 대한중석 전신인 소림광업에서 흘러나온 것이고 화약원료는 한국화약 전신인 조선화약에서 유출된 것이다. 따라서 소림광업의 재고품을 불하받았던 영화물산의 신영균을 비롯,전략물자를 불하받은 국내 기업인들은 이를 계기로 재산을 축적할 수 있었고 영풍상사가 철광석을 수출해 기반을 잡은 것도 이 시기였다.

마카오무역 6개월동안 국내에 남아있던 전략물자재고는 바닥이 났다. 바깥시세를 모르고 있던 당시 국내 기업인들은 결국 6·25를 맞은 뒤에야 당시 황금을 내주고 설탕을 사 먹은 것을 깨닫게 됐다.<이종재기자>

해방전까지는 만주지방에서 무역업을 하고 있던 사람들도 거의 다 서울로 몰려들었다. 최태섭(한국유리),이한원(동아상사),서선하(삼흥실업),전택보(천우사) 등은 만주에서 서울로와 막바로 무역업을 시작했다. 만주의 봉천에서 동화공창이라는 유지공장과 무역업을 하는 삼흥상회를 경영하고 있던 최태섭씨는 일본 미쓰비시상사의 무역업까지 대행할 정도로 호황을 누렸었다. 팔로군이 만주를 장악한 45년 종업원인 중국인들의 도움으로 만주를 무사히 빠져 나와 우선 평안도 철산에서 모나자이트라는 광석을 생산,광업진흥공사에 납품하는 일을 했다. 그는 자식을 키우려면 서울로 가야한다는 생각으로 남하,서울의 중림동에 있는 고무공장을 매입,만주에서 사용한 삼흥실업 간판을 내걸었다. 그는 다시 무역업을 시작했다

서울로 올라온 기업인들은 당시에 번창하던 정크무역 마카오무역 등 거센 무역의 열풍속에서 값비싼 수업료를 내며 사업을 배웠고,또 번창시켰다. 해방후 혼란했던 서울은 기업들에게 꿈의 보금자리였고 희망의 일터였다

특히 기업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줄을 잘 잡아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고 나아가서는 적산불하,원조물자 불하,은행대출 같은 큰 이권을 챙길 수 있었다.그도 그럴것이 해방후 6·25 이전까지의 우리나라 기업인들은 자본이나 사업 경험이 보잘 것 없었던 만큼 일본이 남기고 간 귀속재산의 불하나 원조자금 배정,미 군정의 힘이 필요한 마카오무역 등 경영외적인 요인들에 의해 그 성장속도와 규모가 결정되는 기형적인 과정을 밟고 있었다. 이 때문에 경영풍토가 기업내적인 기술개발이나 창의력,경영합리화에 의존하기보다는 권력과 밀착,특혜에 집착하는 경향을 띠게 됐다.

해방이후 이만한 거금을 가진 사람은 최창학 이외에는 없었다. 그는 이 돈으로 돈놀이를 했다. 해방후 크게 휘몰아쳤던 정크무역과 마카오무역 시절 그의 돈에 의지하지 않은 기업인은 거의 없을 정도였다.

이들 기업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달러였다. 오늘날 기업인들이 땅을 찾듯 당시의 기업인들은 달러를 찾아 분주히 뛰었다. 달러가 있어야 수입이 가능했고 수입은 곧 돈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의 달러는 정부의 뒷심이 없으면 불가능했고 달러배정은 곧 특혜였다

/이 대통령 은행보유불은 직접 통제/「치부직통 코스」… 수단방법 안가려/배정불로 물자수입 또 “돈방석” 재계판도 큰 영향해외에서 물건을 사오기 위해서는 달러가 필요한데 전쟁중이던 50년대초에 달러가 흔할 리 없었다. 그래서 당시의 기업인들은 달러를 구하기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무역회사가 이용할 수 있는 달러는 직접 수출해서 벌어들인 달러 이외에 중석달러·종교달러·암달러·원조불 등이 있었다. 중석달러는 전략물자인 중석을 수출해 획득한 외화인데,이 돈은 기계류·선박·화물자동차 등 산업 부흥자재를 수입하는데만 쓸 수 있었다. 중석달러는 중석수출을 맡고 있던 대한중석이 직접 수입할 때 사용했으나 극히 제한된 무역회사에 특혜불로 배당되기도 했다.

암달러로 유통된 시중달러는 주로 주한 미군들로부터 흘러나왔는데 환율도 높고 거래량도 적어 수입자금으로는 큰 기여를 하지 못했다.

종교달러 역시 그림의 떡이었다. 종교달러는 기독교 선교·전시구호·교회사업 등을 위해 외국에서 송금된 외화로 기독교계통과 깊은 관계를 가진 무역상이 아니면 얻어쓸 수 없었다.

이밖에 원조불과 UN군 대여금 상환불이 있었다. 원조불은 전쟁 복구기에 국내 산업의 판도를 결정하는 자금이 됐다. 상환불이란 정부가 UN군에게 국내에서 사용할 돈을 원화로 대여해 주고 그 대전으로 받은 달러인데 당시 국내 부족물자를 수입하는데 긴요하게 쓰였다.

결국 달러의 대부분은 정부가 배정했고 자연히 달러를 따려는 기업인들의 로비가 성행했다. 더욱이 정부가 배정하는 달러의 환율은 지나치게 낮게 평가돼 달러를 딴다는 것 자체가 치부의 직통코스였다. 정부가 배정하는 달러로 정부가 지정하는 물자를 수입해서 국내에 풀어만 놓으면 그대로 돈방석에 앉았다. 당시의 환율이 비현실적으로 낮게 평가된 원인은 상환불이었다. 원화를 대여해 주고 달러를 받기 위해서는 낮은 환율이 유리했기 때문이다.

당시 환율문제는 그 누구도 입에 올릴 수 없었다. 달러라면 벌벌 떨던 이승만대통령에게 환율을 현실화시키자는 건의를 했다가 목이 달아난 장관이 있을 정도였다. 오랜 망명생활을 통해 가난에 이골이 난 대통령이었다. 51년 12월15일에는 은행보유불 사용에 대해 액수의 다과를 막론하고 대통령이 인가하도록 하는 규정이 만들어져 달러에 관한한 1달러라도 대통령의 결제가 필요했다. 달러에 대한 집착은 프란체스카 여사도 마찬가지였다.

해운공사를 설립하고 무역업에도 참여하다 전쟁중에 일본공사를 지낸 김용주의 회고다.

『50년 7월중순 대전방위선이 흔들릴 때였다. 대한적십자사 총재였던 이기붕이 전화를 걸어 부산시내에 부상병들이 몰려오고 있으나 약이 없어 손을 쓸 수가 없다면서 약품조달을 요청했다. 당시 주일대표부에 달러가 있을 리 없었다. 생각다 못해 한국은행 동경지점의 김진형 부총재에게 요청,동경지점의 정부보유불 1만달러를 풀기로 하고 백방으로 뛰어 약품을 구했다. 그러나 달러사용에 대한 재가가 문제였다. 의약품을 급송한 후 대통령의 재가를 기다렸으나 기다리던 대통령의 재가대신 프란체스카 여사의 전화가 걸려왔다. 누구 마음대로 정부보유불을 썼느냐는 노기 띤 추궁이었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사정얘기를 제대로 듣지도 않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경무대 안팎이 관리하는 달러를 기업인들이 사용하기는 그만큼 어려웠다. 그래서 정치권에 대한 기업인의 곡예가 시작됐다. 해방후 혼란기에 줄을 잘 잡았던 백낙승의 괴력이 발휘된 것이 이즈음이었다. 재계 판도는 곧 정부의 달러를 따느냐 못따느냐에 달려있었다. 정부가 실시한 경매에서 달러만 잡으면 돈방석에 앉았으며 그렇지 못하면 뒷전으로 밀릴 수 밖에 없었다. 해방후 대권의 향배를 가늠할 수 없던 시기에 벌어졌던 기업인들의 줄잡기 경쟁과 귀속재산 불하전이 정경유착의 1기라면 당시의 로비는 정경유착 2기인 셈이다.

재벌과 정치와의 관계는 이후 전쟁 복구기의 원조불 경쟁과 경제발전 과정에서의 차관전쟁,각종 정부주도 사업권 획득 등으로 이어져 국내 재벌사의 뚜렷한 특징으로 남는다.

한국의 기업사가 정경유착의 역사로 점철되고 재벌들이 오늘날 국민들의 따가운 시선을 받게 된 이유는 바로 여기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정치곡예의 테크닉이 기업의 흥망성쇠와 직결됐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재벌이 봉쇄적인 가족경영의 형태를 띠게 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달러를 놓고 벌어진 정치권과 기업의 관계는 급기야 국내 최초의 대형 경제사건인 중석불 사건을 낳고 말았다.<이종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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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목재인물사 | 대성목재공업(주) 전택보(全澤珤) 회장 편(65)

브라질에 합판공장 설립도 추진

설봉은 전자사업과 섬유사업 외에도 기발한 아이디어로 사업을 창출해 낸 것이 많았는데, 대리점 개설의 경우 부실기업으로 정비되기 전부터 의 대리점을 이미 하고 있었으며, 부실기업으로 정리된 이후인 1971년에는 세계3위의 대선박회사인 <가와사끼 기선 회사>의 대리점을 개설했고, <타이 인터내셔날 항공>의 대리점도 개설하였다. 그리하여 1972년에는 한국선박대리점협회 회장직도 역임했다. 해외시장개척의 선구자로 정평이 나있던 설봉은 1971년부터는 중동진출을 계획하였는데, 그 결과 1976년에는 오만에 시멘트 1만 여 톤과 타이어튜브를 처녀 수출하는데 성공하였다.

컨테이너 하치장 사업도 하였는데, 수출입화물의 하치장(container yard)과 CFS(container Freight station)의 시설 없이는 해운업과 해운대리점사업이 발전할 수 없다고 보고, 1971년에 부산에서 이 사업을 시작하였다. 이에 대하여 1971년 1월5일자 <산업경제신문>은 ‘천우사 컨테이너 화물선 취항’이란 제목으로 ‘천우사는 국내 최초로 컨테이너 선박 3척을 도입하여 서울~시애틀~로스앤젤레스 간을 매월 3회씩 운항하기 시작했다. 컨테이너 운송이란 항구에 도착한 화물을 보세구역에서 일단 모두 꺼낸 다음 일일이 수속을 밝아 개별통관하는 재래식 통관과는 달리 컨테이너 자체와 함께 그 안에 실은 화물을 목적지까지 운송한 다음 화물을 통관하는 방식을 말한다’고 보도하였다.

신용카드 사업도 하였는데, 1964년 크레딧카드(credit card)란 말조차 생소하던 때에 신용카드 사업을 시작한 것으로 미국 최대의 여행사인 <아메리칸 익스프레스(American Express)>회사의 한국 총대리점을 하였다. 이 사업이야말로 신용 하나만으로 이루어낸 사업이었는데, 이것이 오늘날의 한국신용카드 주식회사가 된 것이다.

또한 브라질에 합판공장 설립을 추진하기도 하였다. 1977년 6월18일자 <무역통신>의 기사를 보면 ‘브라질에 합판공장, 천우사서 합작 건설키로’란 제목으로 ‘천우사(대표 전택보)는 남미 아마존강 유역에 브라질과 합작으로 합판공장을 건설키로 하고 국내에서는 최초로 합판공장의 해외진출을 추진하고 있다. 천우사는 북부 브라질 아마존강 유역의 마나우스에 자본금 400만 달러, 생산능력 일산 1만2000매 규모의 합판 공장을 50:50의 비율로 현지법인으로 설립하여 내년 하반기부터 생산을 시작할 예정이라고 한다’고 보도하였다. 그러나 브라질의 합판공장 설립은 브라질 당국의 법적 규제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설봉은 탁월한 ‘아이디어 메이커’

천우사가 부실기업으로 정비된지 불과 4년만인 1975년 말 현재 ‘정상을 달리는 대기업’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발전하였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부실기업으로 정비될 당시 700명의 간부사원들과 6000여 명의 공원들이 모두 떠나가고 불과 90여 명의 간부사원들만 가지고 새출발을 했던 천우사는 이제 다시 500여 명의 간부사원과 2500여 명의 공원을 가진 대기업으로 성장한 것이다.

천우사가 이렇게 빠른 시일 내에 대기업으로 재등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겠지만, 첫째로 설봉의 신용을 꼽아야 할 것이다.   <조선일보>가 1971년 8월17일자 신문에 천우사의 재기를 ‘신용간판 전택보, 활기찾는 천우사’란 제목으로 표현한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설봉의 신용은 천우사가 재기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천우사가 이토록 빨리 재기할 수 있었던 것은 설봉이 탁월한 ‘아이디어 메이커’였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설봉은 항상 말하기를 “아이디어에서는 2등을 해서는 안된다. 항상 1등을 해야한다. 2등은 패배자일 뿐이다”라고 했는데, 그만큼 아이디어에 대해서는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었다. 설봉은 항상 기발한 아이디어로 사업을 창출해 내었는데, 전자사업의 경우 TV생산사업부문은 1967년부터 착상한 것이었다. 그 착상이 네덜란드 필립스(Phillips)사와 기술제휴를 체결하게 하였고, 1971년 8월에 이르러서는 TV 첫 생산품을 시장에 내 놓을 수 있었으며, 1972년 10월경에는 3억 원을 투입, 구로공단에 부지 1만2000평을 확보하여 건평 1500평의 공장을 짓고 진공관 TV에서 TR-TV로의 기술전환을 했다. 이때만해도 한국의 TV생산기술은 기술제휴 없이는 불가능했으므로 재력에 있어서 열세에 있던 천우사는 기술전환으로 다른 회사와 경쟁하는 길밖에 없었다. 천우사는 국내업체로서는 처음으로 TR-TV를 생산한 회사로서 TV판매량에 있어서는 ‘금성사’와 ‘대한전선’에 이어 3위로 랭크되었다. 그리고 1974년에는 이란 고성능 카세트를 시중에 내놓았고, 컬러TV 개발도 완전무결한 단계로까지 준비해 놓고 있었다.

섬유사업의 경우 설봉은 자체공장이 있어야 하겠다는 생각에서 가리봉동 수출공단 대지 위에 3층짜리 봉제공장을 짓고 수출목표를 1000만 달러로 세웠다. 공장은 12라인으로 직원수만 해도 1000명이 되었고, 섬유공장 단일공장으로는 국내 최대 규모의 공장이었다.

출처 : 한국목재신문(https://www.woodkorea.co.kr)

한국목재인물사  |   대성목재공업(주)  전택보(全澤珤) 회장 편(64)
천우사의 재기(再起)

천우사만 남기고 그 계열이 부실기업으로 무너진 지 어언 4년이 지났다. 이 4년간은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여간 복잡하고 험난한 시기가 아니었다. 이 기간 동안 있었던 사건들을 대강 열거해 보면 1969년에는 위장간첩 이수근 사건, 무장공비침투만행사건, 미해군정찰기 피추사건, KAL여객기 납북사건이 있었다.  1970년에는 와우아파트 붕괴사건, 김대중 씨 대통령 후보출마, 1971년에는 박정희 씨 7대 대통령당선, 8대 국회의원 선거, 대연각 호텔 화재가 있었다. 1972년에는 7.4남북공동성명발표, 8.3조치(모든 기업체 사채동결), 국회해산 및 비상계엄령 선포, 개헌국민투표실시, 유신헌법확정과 공표 등이 있었다. 1973년에는 제9대 국회의원선거, 통일주체 국민회의에서 박정희 씨 대통령선출, 유류파동 그리고 이듬해인 1974년에는 새해 벽두부터 박 대통령의 긴급조치1호 발표(1월 8일), 이어 2호, 3호, 4호가 계속 발표되었다.  8.15광복절 기념식에서 육영수 여사가 흉탄에 맞아 세상을 떠나는 불상사, 땅굴발견사건 등 온 국민을 경악케 하는 사건들이 끊일 줄 모르게 일어났다.

설봉은 이러한 엄청난 사건들이 회오리바람처럼 휘몰아치는 속에서도 천우사를 재건하기 위하여 처절한 노력을 계속하였다.

1973년 5월27일자 <조선일보>는 ‘유신(維新)과 8.3조치 이후의 재계’라는 제목으로 재계의 내막을 소개하는 특별시리즈에서 전자공업 등으로 사업 확장에 열을 올리는 천우사의 기사를 싣고 있다.

‘1960년대 6년 동안이나 줄곧 수출최고상을 수상하고 해외시장개척에서 한때 ‘한국의 신용’으로 통했던 전택보 씨가 부실기업정리로 대성목재 등 5개 업체를 은행에 넘겨주고 나머지 천우사만 가지고서 기업을 운영하며 차츰 옛날의 영광을 되찾아 가고 있다. 30억 원에 가까운 사채를 안고 산하업체(대성목재, 조선피역, 삼익선박, 한국축산개발, 신진완구)들을 은행관리로 넘겨주었을 때만 해도 재계는 천우사의 재기를 어려운 것으로 내다 봤다.

당시 재계에서는 전택보 씨가 사회사업가이지 결코 기업가는 될 수 없는 사람이라고 그의 사업비운을 동정하기도 하고 비웃기도 했다. 그러한 전택보 씨의 천우사가 요즈음 사업 확장에 열을 올리고 있다. 천우사는 지난 4월말, 구로동 공업단지에 건평 2500(8250㎡)평의 섬유공장과 1200(3960㎡)평의 전자제품공장의 증설을 마쳤다’고 소개했다.

출처 : 한국목재신문(https://www.woodkorea.co.kr)

조흥은행, 대성목재 윤 전무를 파면결정
조흥은행이 대성목재 전무로 근무하고 있는 윤순선 씨를 파면키로 결정했다는 소식을 들은 전택보 사장은 급히 윤순선 전무를 서울 천우사 사무실로 오게하여 윤전무와 함께 조흥은행 행장을 찾아갔다.
자기가 이렇게 된 것은 그렇다치고 자기때문에 함께 일해온 전무가 희생당하는 것을 보고는 참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성명서 발표 주모자를 윤전무로 생각하는 것은 조흥은행의 오해일 뿐이라고 설명하고 파면결정을 취소시켰다.

이에 대하여 윤순선 전무는 그당시 일을 다음과 같이 회상하였다. “수백억의 재산과 기업이 부실로 정리당해 보통사람 같으면 절망과 허탈에 빠져 있을 형편인데도 전택보 사장님은 자기의 부하직원이 파면 당하는 것을 걱정한 나머지 보기도 싫은 은행장을 만나러 가자고 내게 명령했던 것입니다.
나는 노사장의 명령을 어길 수가 없어서 사장님을 따라 조흥은행 행장실을 찾아갔습니다. 행장은 먼저 온 손님들을 대하고 있어서 우리는 약 30분동안 대기 응접실에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때 손님 두분이 대기실로 들어왔습니다. 한 분은 삼성물산 전무로 기억됩니다.
그는 전 사장님을 보더니 겸손한 태도로 ‘얼마나 심려가 되십니까?’하고 정중히 인사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전 사장님은 크게 웃으시면서 ‘나는 종교인이기 때문에 사주팔자 같은 것을 별로 본 일은 없지만, 내 운명이 70까지라 하더군요. 그런데 지금 내 나이가 70이 다되었는데도 죽지 않아요. 건강에도 아무 이상이 없고 골프도 점점 더 잘 맞아요.
그래서 사주팔자란 미신이다. 맞지 않는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번에 부실기업이 되고 보니 사주팔자가 맞는구나 싶더군요!’ 하면서 크게 웃으시던 모습…. 또 계속해서 ‘사람이 아무리 위대하다 해도 죽으면 부고 한장이면 끝인데 내 경우는 그렇지가 않단 말이요, 대성목재 부실기업의 여파는 어찌나 큰지 일주일이 지나도 신문·잡지 등에서 부고가 계속되고 있으니 이렇게 굉장한 부고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 이렇게 담소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또 들어온 다른 손님들과 이야기하는 중에 ‘내 나이 70이 되어도 죽지 않는 것을 보니 아마 80까지는 더 일하라는 것 같아요. 앞으로 10년은 틀림없이 더 살겁니다. 더 힘차게 일해야지요’하면서 당당한 표정을 짓고 계셨던 것입니다.”

출처 : 한국목재신문(https://www.woodkorea.co.kr)

막내아들 순재는 집 한 채도 없어
1969년 6월24일, 전택보 씨의 대성목재 등 5개 업체가 부실기업으로 처리될 때 설봉은 이미 70세의 노인, 보통사람 같으면 까무라쳐 넘어지거나 아주 인생을 포기하고 말았을 것이다. 사실 정부의 이러한 처사는 이미 70노구가 된 설봉에 대해 너무 가혹한 처사였다.

그 때 항간에는 정부 당국이 천우사 계열 5개 업체를 부실기업으로 처리한 것은 사업이 부실해서 뿐만 아니라 전택보 사장이 외국차관을 들여와 사업에는 안 쓰고 고리채 놀이를 했기 때문이고, 막대한 재산을 외국으로 빼돌렸다는 풍설이 떠돌았는데,
설봉은 이 풍설을 듣고 박정희 대통령에게 “이러이러한 사실을 박대통령께서도 인정하고 계시는 모양인데 사실 그러한 일이 있었는지의 여부를 조사해 주십시요”라는 내용의 서한을 보냈던 것이다.

그 뒤 정부 측에서는 실제로  조사를 해 보았던 모양인데 전택보 씨의 막내아들 순재는 집 한 채도 장만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는 이러한 소문은 전연 사실이 아닌 중상모략임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설봉은 박 대통령에게 ‘한국축산개발’만은 돌려달라고 요청을 했다.
“한국축산개발은 제가 꿈과 애착을 가지고 일으킨 사업일뿐 아니라 개인의 이익보다 나라의 이익을 위해 온갖 정성을 다해 이루어 놓은 사업이니 한국축산개발만은 돌려주십시요”라고 요청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축산개발은 전택보가 아니면 못한단 말인가”라고 하면서 일언지하에 거절했다는 것이었다.

당시 대성목재 전무로 있었던 윤순선 씨의 말에 의하면 대성목재가 부실기업으로 처리되자 5600여명의 직원들은 “대성목재가 왜 부실기업체냐? 우리끼리 10억을 증자하여 대성목재를 인수하겠다”면서 성명서를 발표하는 동시에 증자위원회를 조직했다고 한다.
그러자 관리은행인 조흥은행은 아무래도 전무인 윤순선 씨가 주모자일 것임으로 그 주모자인 윤순선 씨를 파면키로 결정했다고 통보해 왔다고 한다. 그 때가 1969년 8월 어느날이었고 그러니까 부실기업으로 처리된지는 약 2개월 뒤였다고 한다. 이 사실을 들은 전택보 사장은 걱정이 되었다.

자기가 당한 것은 관계없으나 자기 때문에 함께 일하던 전무가 주모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주모자로 몰려 파면 당하는 것을 보고는 침묵을 지킬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설봉은 급히 윤 전무와 함께 조흥은행 행장을 찾아갔다.

출처 : 한국목재신문(https://www.woodkorea.co.kr)

대성목재 전 직원들 “우리가 맡겠다”

대성목재가 부실기업으로 정리된 사실이 발표되자 가장 충격을 받은 것은 당사자인 대성목재의 직원들이었다.
대성목재의 5600여명의 직원과 공원들은 대성목재가 부실기업으로 정리되는 것을 반대하는 성명서를 6월27일자 신문에 냈다.

신문지 절반 크기의 대대적인 것이었는데 그 내용도 너무 절실하고 대담한 것이어서 어느 신문사는 이 막대한 광고비를 종업원들이 어떻게 낼 수 있겠느냐면서 선뜻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고 한다. 사태가 이쯤 되자 각 신문들은 이를 크게 보도했다.

6월29일자 <주간조선>은 ‘부실기업체의 충실한 종업원 궐기’라는 제호로 특집보도를 하기도 했다. ‘40만 인천시민의 10% 가까이 되는 사람의 입을 먹여살렸고, 월급이 하루 늦고 이른데 따라 인천시민의 물가에 영향을 끼치는 대성목재주식회사가 당국에 의해 부실기업체로 단정돼 관리은행에 인수처리될 운명에 놓였다’로 시작해 대성목재의 실정과 종업원들의 성명서 내용을 예리하게 분석 보도했다.

대성목재가 이처럼 부실기업체라는 보도는 일반 국민들로서는 그 부실의 자세한 내용을 이해할 수도 없고 또 당국이 한 일이니까 이건 정책적인 문제라고 만 이해하고 있었다. 다만 대성목재를 살리려는 5600여 명에 달하는 종업원들의 자세가 대단하다는 것이다.

대성목재가 딴 사람에게 넘어간다할지라도 일은 계속될 것이고 따라서 대부분의 종업원들도 그대로 있게 될 텐데, 그렇다면 무엇때문에 종업원들이 이처럼 어려운 일을 자청하고 나선 것일까?

이 어려운 일이란 부실기업체로 단정된데 대한 그들의 공식반응에서 나타나고 있다. 그래서 이 성명서의 골자를 나열해 보면 △우리들은 이 회사의 각 분야에서 일하고 있음으로 이 회사가 부실기업체인가 아닌가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이번 정부 결정에 대해서는 정부의 권위를 위해 그 결정을 번복하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우리가 알고 믿기에는 대성목재가 부실업체가 아닌 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이 업체는 타인에게 처분될 수 없고 우리 5600명 전체 종업원들이 인수할 것을 선언한다. △우리들은 비장한 각오와 결심으로 각자의 전 재산을 바쳐 일금 10여억 원을 갹출하기로 결의했다고 돼 있다.

출처 : 한국목재신문(https://www.woodkorea.co.kr)

정치바람 타기 싫어하는 기업인

이 밖에도 거의 모든 신문들이 사설란에서 이 문제를 다루면서 천우사(대성목재의 모체)를 동정했는데,
6월26일자 <서울경제신문>은 ‘새로운 기업관, 성실해야 발전할 수 있는 환경의 조성’이란 제하의 사설에서 “전택보 씨는 국가와 은행에 미안한 마음을 금할 길 없음을 피력한 바 있다.
이 비운의 기업인이 이 나라 무역증진에 이바지한 과거를 회상하며 천우사의 앞날을 축복해야 할 것이다. 그가 남긴 쓰라린 교훈이 이 나라 산업계에 새 기풍을 진작시키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했고, 같은 날자 <조선일보>는 ‘정치 모르는 전택보 씨에 동정’이란 제하에 “전택보 씨의 대성목재 등 5개 업체가 주 채권자인 조흥은행으로 넘어간다는 발표가 있자 경제계 인사들은 가슴아픈 일이라고 동정어린 한마디씩을 했다.
전 씨에게 동정이 집중된 까닭은 그가 정치바람을 타기 싫어하는 기업인이었다는 점과 우리나라 보세 가공업의 선구자였다는 데에 있는 듯 했다. 전 씨는 조화, 완구 등 보세가공의 각 분야에 거의 손 안댄 곳이 없으며 가공수출분야를 리드해 왔다.

이러한 새 분야의 개척, 확장에 주력했기 때문에 다른 사업에는 관심을 둘 수가 없어 해체를 당하는 쓰라림을 맛보게 된 것이라고, 특히 전씨가 덴마크 명예총영사를 비롯한 많은 국제 단체의 임원을 겸하고 있는데, 한국경제인의 국제적 위상이 내려갈지도 모른다고 몹시 걱정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했다.

적힌 글은 짧으나 매우 의미 심장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6월27일자 <현대 경제일보>는 ‘천우사 계열 5개 업체의 정비가 뜻하는 것’이라는 제목으로, 6월28일자 <서울경제신문>은 ‘영광 사라진 비운의 전택보 씨, 수출의 개척자 끝내 정비 당해’라는 제목으로 이 문제를 다루었으며 아울러 천우사의 역사와 업적과 함께 이 사건의 언저리를 파헤쳐 놓았다.

이 밖에도 이에 관한 많은 기사들이 있는데 그 중에는 ‘비운의 수출왕 전택보 씨’, ‘전경련, 정부의 천우사 정비 방안에 맞서 정면 반발’등 자극적인 표현의 기사제목들을 여러군데서 찾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부실기업의 정리 사실이 발표되자 가장 충격을 받은 것은 무엇보다도 당사자인 천우사계열 5개 업체의 직원들이었다.

글/ 김상혁  shkim@woodkorea.co.kr

출처 : 한국목재신문(https://www.woodkorea.co.kr)

국내 모든 신문들은 이 사실을 경제란 또는 사설란에 10여 일간 대서특필 했다. 한편 전경련(전국경제인연합회)은 그 해 6월26일 긴급이사회를 소집, 연 이틀간의 긴급대책위원회를 열고 부실기업문제에 대한 건의서를 채택해 정부당국에 제출했다.

그 건의서의 내용은 ①민간 상업차관에 대한 투자에 있어 정부의 ‘지불보증제도’를 지양하고 ②부실기업정비반에는 당해 기업주 및 경제분야의 권위자를 참여토록 개편하고 ③갱생이 가능한 기업에는 일정기간의 여유를 줘야 할 것이며 ④부실기업 정리기준을 자본구성 비율에만 치우칠 것이 아니라 산업성, 전망, 국제경쟁력, 대외신용도에 중점을 둬야 한다고 돼 있다.

제②항에 부실기업정비반에 당해 기업주를 참여시켜야 한다는 말은 천우사의 경우 사전에 아무런 예고도 없이 일방적으로 집행했다는 말이며 제④항에 자본구성비율에 치울칠 것이 아니라는 말은 천우사(대성목재의 모체)가 부채를 많이 진것은 사실이나 산업성, 전망, 국제경쟁력, 대외신용도가 있어왔는데 어찌 자본구성비율 그것만이 부실기업의 조건이 될 수 있겠냐는 말이기도 했다.

<중앙일보>는 소집 이틀 후인 6월28일자 신문에 ‘아이러니한 천우사계열 정비, 전경련이 호신운동’이란 제하에 ‘국내 굴지의 기업인 천우사계열 5개 업체가 부실기업체로 몰려 주 채권자인 조흥은행으로 넘어가는 비운을 맞게 되자 전령련이 긴급사후대책을 논의하는 등 비상사태에 돌입한 느낌’이라고 보도했다.

<동아일보>는 ‘부실기업과 부실경제’라는 사설을 통해 ‘자본구성이 부실하지 않은 기업은 천우사 외에 얼마나 될 것인가? 부실기업의 발생은 기업인에게도 문제가 있지만 따지고 보면 정부당국에 더 큰 잘못이 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부실기업정리정책이 객관적기준에 의해 일정한 원칙이 있어야 하는데 그 대상과 범위가 어떠한 기준에 의해 결정되는 것인지 도무지 알려지지 않고 있다’고 논평했다.

글/ 김상혁  shkim@woodkorea.co.kr

출처 : 한국목재신문(https://www.woodkorea.co.kr)

비운의 수출왕, 마침내 부실기업으로 정비돼
설봉은 그날(1969년 6월24일) 집에 돌아와 밤을 꼬박 뜬 눈으로 지새야 했다. 이튿날 아침, 그제야 비로소 자세한 정비 내용을 알 수 있었다. 이 날 국내 7대 일간 신문들은 일제히 이 내용을 크게 보도했는데 그 중 <한국일보>에 개제된 기사 내용을 보면, ‘천우사계열 대성목재 등 6개 업체 정비… 부채늘고 상환어려워, 청와대 내에 설치돼어 있는 부실기업체 정비반(반장 장덕진 씨: 재무부 이재국장)은 6월24일 오전, 전택보 씨가 소유하고 있는 대성목재, 조선피혁, 한국축산, 삼익선박, 신진완구 등 6개 업체의 정비방안을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 확정했다.
이날 공화당 정책위원장 백남억 씨, 부총리겸 경제기획원장 김학열 씨, 재무부장관 황종율 씨, 상공부 장관 김정열 씨, 청와대비서실장 이후락 씨 등이 배석한 가운데 확정된 천우사 계열 정비방안은

1)6개 업체 중 천우사를 제외한 5개업체는 주 채권자인 조흥은행이 인수하여 정리 처분하고, 전택보 씨로 부터 완전히 인연을 끊게 하는 동시에
2)천우사는 전택보 씨 소유로 그대로 존속시키며 종합무역상사로 육성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당시 대성목재는 자산규모가 108억, 천우사는 18억, 조선피혁은 19억, 한국축산은 3억, 삼익선박은 6억, 신진완구는 1억 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날 전택보 씨 계열 6개 업체의 정비 방안을 승인하는 자리에서
“1)기업은 자기 자본 조달 능력이 있는 사람이 해야하며 과거와 같이 사채를 쓰더라도 공장만 지어 놓으면 돈을 벌 수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2)그 기업이 잘못되면 그 기업체가 망할 뿐 아니라 그 기업인도 함께 책임지는 기업윤리의 확립이 소망된다.”
고 말했다.

6월25일자에 보도된 기사내용은 각 신문이 거의 같았으나 유독 <경향신문>만은 기사 외에 ‘기자석’이라는 코너에 ‘2개월전까지만 해도 1000만 달러의 현금차관을 들여올 만큼 건전기업인으로 알려진 전택보 씨가 20년간 길러온 대성목재 등 5개 업체를 내놓게 된 데 대해 일부 업계에서는 ‘가혹하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지만, 자기자본 4억7000만원으로 162억원의 대기업을 굴려 왔다는 것이 오히려 불가사의 하다는게 중론’이라고 논평했다.
글/ 김상혁  shkim@woodkorea.co.kr

출처 : 한국목재신문(https://www.woodkorea.co.kr)

한국목재인물사  |   대성목재공업(주)  전택보(全澤珤) 회장 편(50)
청천벽력 같은 뉴스, 부실기업정비

1969년 6월24일, 그날도 설봉은 예전과 다름없이 아침 일찍 일어나 산책을 하고 소공동에 있는 천우사(대성목재의 모체) 사무실로 나갔다. 책상에 앉아 내일이 바로 6·25라는 생각이 들면서 19년전 그날에 있었던 일들, 부산 피난시절, 민족의 수난과 경제파탄에 얽힌 쓰라린 일들을 주마등처럼 되새기며 과거를 회상하고 있었다.
그리고 설봉은 앞으로 천우사가 할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고 있엇다.
이제 천우사가 은행관리로 넘어간지도 어느덧 반년이란 세월이 지났다. 그동안 부끄럽기도 했고, 부자유스럽기도 했고, 또 유능한 사원들이 하나 둘 자기 곁을 떠날 때면 낙심하여 괴로울 때도 한 두번이 아니었으나, 그래도 1000만 달러의 외국차관을 얻어다가 30여 억원의 사채를 은행부채로 대치시키게 되었고 다년간 질질 끌려오며 숙제로 남아 있던 P.L480 잉여농산물 수입물자도 불원간 도착하게 되어 있는 것은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었다.

이런 생각을 하던 설봉은 “천우사의 장래도 반드시 어둡지 많은 않구먼! 한 달에 근 1억원의 사채이자를 꼬박 꼬박 물어야 했는데 이제 이것도 해결되었고, 이제 모든 사원이 한데 뭉쳐 힘써 일하면 회사운영은 다시 호전될 수 있으리라.

그리고 한창 공사 중에 있는 대성목재의 월미도 공장만 완공된다면 거기서 연간 10억여원의 순이익은 어렵지 않게 날 것이고 이렇게만 된다면 적어도 5년 내에 모든 것을 정리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 이르러서는 가슴이 뜨거워 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그날 정오쯤 사무실에 전화가 걸려왔다. 친구인 김성곤 씨로부터 걸려온 전화였다. 전화를 건네받은 설봉은 김성곤 씨의 음성이 심상치가 않음을 직감했다.

그의 목소리는 매우 심각했다. 그 내용인즉슨, 이날 상오 청와대에서 박정희 대통령 주재로 부실업체정비 관계관 회의가 열렸는데 이때, 장덕진 씨(당시 재무부 이재국장)가 제출한 천우사 계열에 대한 정비방안이 승인되었다는 것이었다. 이 전화를 받은 설봉은 눈앞이 캄캄해지고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이 소리는 바로 천우사와 모든 방계업체가 부실기업으로 정비된다는 폭탄선언이었다.
“무슨 소니냐? 우리회사가 하루 아침에 무너져 내린단 말인가!” 정말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글/ 김상혁 shkim@woodkorea.co.kr

출처 : 한국목재신문(https://www.woodkorea.co.kr)

한국목재인물사  |   대성목재공업(주) 전택보(全澤珤) 회장 편 (47)

1968년. 그 해 여름을 설봉은 무겁고 우울한 마음으로 보내야 했다. 그 해는 극심한 가뭄으로 국민전체가 일기예보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는데다가 설봉은 개인적으로 사업상 여러가지로 어려운 문제들이 산적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업상의 문제들은 잘 풀리지 않은 채 여름은 지나가고 가을이 찾아왔다. 설봉에게는 이 가을이 유난히도 슬쓸하게 느껴졌다.

설봉이 잠을 잘 이룰 수가 없어 뜬 눈으로 누워있노라면 자그마한 정원 구석에서 찌르륵대는 귀뚜라미 소리가 그의 마음을 더욱 처량하게 만들었다.
바람소리와 함께 우수수 떨어지는 낙엽소리도 설봉으로 하여금 잠을 못 이루게 했고 ‘나도 이제 많이 늙었구나’하는 생각에 잠기게 하였다. ‘농민들은 몸에 씨를 뿌리고 여름에 김매어 가을에 거두어 들인 것을 겨울에 꺼내먹으면서 인생을 즐기겠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무엇으로 인생을 즐길 수 있단 말인가? 혹시 내가 바로 그런 부류의 사람이 아닐까? 젊었을 때의 이상도 꿈도 이제는 다 사라져 버린 그런 사람은 아닐까?’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설봉은 자기 자신과 지난 날들을 돌이켜 보며 잠을 잘 이루지 못했다.
하지만 설봉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자기의 삶은 조금이라도 남에게 보탬이 돼 주려고 노력했던 삶이었지 결코 자신의 출세나 치부만을 위해 살아온 삶은 아니었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사는 것이 사람답게 사는 것이지 자기 혼자만 잘 살고 제 욕심만 채우려고 한다면 부끄러운 삶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도 해 보았다.

그리고 그는 ‘오늘 날과 같이 사회가 공동체화 돼 가는 세상에 있어서는 개인주의는 용납될 수 없다. 아무리 자유경제체제라 할 지라도 개개인이 제멋대로 벌어 멋대로 쓰라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인생관도 이제는 많이 달라져야 할 것이다’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런데 천우사의 형편은 10월에 접어들면서 더욱 어려워졌다. 재정난이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오랫동안의 사채부담으로 영업이익은 거의 이자로 지불해야 했고 최근에 이르러서는 영업실적마저 부진하여 이자에 이자가 붙어 사업유지를 아주 어렵게 만들었다.

1968년 12월, 마침내 천우사는 은행관리회사가 되고 말았다. 은행관리란 어찌보면 특혜조치다.
왜냐하면 정부당국이 몇가지 이유를 들어 은행으로 하여금 그 기업의 부채를 맡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천우사의 경우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주어졌다.

첫째, 천우사는 다년간 가장 많은 수출실적을 올린 회사로서 국제적 신용도에 있어서도 무시 못할 존재임으로 이를 붙들어 줘야 한다. 둘째, 천우사는 한 고비만 넘기면 다시 살아나서 수출진흥에 공헌을 할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이것은 하나의 특혜조치가 틀림없었다. 그러나 설봉은 마음이 아팠다. 이렇게 정부의 혜택을 받는다는 것이 자기의 신념과 자존심을 무너뜨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때 설봉은 “나라는 존재는 없어지고 마는 것만 같았다. 돌이켜 생각하면 이것이 내 운명이요, 팔자가 아닌가 한다”고 탄식하며 은행관리사가 된것을 몹시 가슴아파 했다.

출처 : 한국목재신문(https://www.woodkorea.co.kr)


전택보 회장<29>우리의 살길은 보세가공뿐이라고 외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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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봉은 보세가공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설봉이 보세가공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게된 것은 6·25 전란후 수복된 서울에서 수많은 실업자들이 방황하고 있는 것을 본 이후였다.

전쟁으로 생명을 잃은 사람이야 어쩔 수 없다치더라도 살아남은 사람들조차 앞으로 살아갈 길이 막막하게 느껴질 정도로 수복된 수도 서울의 모습은 참담했다.
거리에는 수많은 실업자들이 우글거렸고 전쟁미망인, 고아들은 이리저리 방황하고 있었다. 신문지상에는 연일 생활고로 인한 일가족 집단 자살, 강도, 살인, 사기 등의 사회악 기사가 가득차 있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국민은 극심한 빈곤 때문에 살기가 어려웠고 돈있는 사람들은 그들대로 불안감때문에 하루하루를 떨면서 살아가는 무서운 세상이었다.

세상형편이 이렇게 돌아가는 것을 본 설봉은 우리나라가 잘 살 수 있는 좋은 방법이 없을까 곰곰히 생각하게 됐다. 우리나라는 자원도 없고 변변한 기술도 없다. 약간의 생산시설마져도 6·25전란으로 잿더미 속에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나 아직도 사람은 많다. 그 노동력을 잘만 활용하면 활로가 트일 것이다. 생각이 여기까지에 이르자 설봉은 우리나라가 살길은 보세가공뿐이라고 느끼게 됐다. 지하자원개발이니 수산자원개발이니 개발 대상이 많겠지만 인적자원을 어떻게 개발하느냐가 우선과제이다. 북한 피난민들의 대거 월남, 거기에 인구의 자연증가는 거대한 인적자원을 구성하고 있으나 이 자원을 개방하지 못하고 있다. 이 많은 사람을 잘 활용하면 선진 제국과 경쟁해 이길 수 있다. 공장을 세워놓고도 노동자가 없어서 쩔쩔매는 나라의 기업인이 본다면 부러워할만큼 우리에게는 노동력이 풍부하다. 이 노동력을 이용 못한다는 것은 기업인의 역량부족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저렴한 노동력을 이용해 수공업, 가내공업으로 중소기업을 급속히 발전시키는 것이 적은 자본을 가진 우리가 조속한 시일 내에 실업자를 구제하고 국제수지를 개선시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전제하고 나서 그는 일본과 홍콩으로부터 기술을 도입해서 섬유제품, 2차가공품, 부품생산공장의 설치를 해야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그밖에도 크리스마스 장식업, 조화, 가발, 농구화, 메리야스, 양말, 수예품 등 할일이 얼마든지 있다고 역설했다. 우리국민이 공것을 바라지 말고 우리의 힘으로 우리의 경제난을 타개해 보겠다는 굳은 결의를 가지고 노력한다면 수년내에 억대의 외화를 벌것이 틀림없다고 외쳤다.

그리하여 설봉은 그당시 상공부장관, 재무부장관과 논의해 가칭 ‘가공무역추진위원회’라는 단체를 발기시켰다.
이 위원회의 취지는 우리나라에 없는 원료를 외국에서 도입해 이것을 가공해 수출하는 업체를 돕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기자명이상욱

  • 입력 2007.09.04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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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목재인물사  |   대성목재공업(주)  전택보(全澤珤) 회장 편(64)

천우사의 재기(再起)


천우사만 남기고 그 계열이 부실기업으로 무너진 지 어언 4년이 지났다. 이 4년간은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여간 복잡하고 험난한 시기가 아니었다. 이 기간 동안 있었던 사건들을 대강 열거해 보면 1969년에는 위장간첩 이수근 사건, 무장공비침투만행사건, 미해군정찰기 피추사건, KAL여객기 납북사건이 있었다.  1970년에는 와우아파트 붕괴사건, 김대중 씨 대통령 후보출마, 1971년에는 박정희 씨 7대 대통령당선, 8대 국회의원 선거, 대연각 호텔 화재가 있었다. 1972년에는 7.4남북공동성명발표, 8.3조치(모든 기업체 사채동결), 국회해산 및 비상계엄령 선포, 개헌국민투표실시, 유신헌법확정과 공표 등이 있었다. 1973년에는 제9대 국회의원선거, 통일주체 국민회의에서 박정희 씨 대통령선출, 유류파동 그리고 이듬해인 1974년에는 새해 벽두부터 박 대통령의 긴급조치1호 발표(1월 8일), 이어 2호, 3호, 4호가 계속 발표되었다.  8.15광복절 기념식에서 육영수 여사가 흉탄에 맞아 세상을 떠나는 불상사, 땅굴발견사건 등 온 국민을 경악케 하는 사건들이 끊일 줄 모르게 일어났다.


설봉은 이러한 엄청난 사건들이 회오리바람처럼 휘몰아치는 속에서도 천우사를 재건하기 위하여 처절한 노력을 계속하였다.


1973년 5월27일자 <조선일보>는 ‘유신(維新)과 8.3조치 이후의 재계’라는 제목으로 재계의 내막을 소개하는 특별시리즈에서 전자공업 등으로 사업 확장에 열을 올리는 천우사의 기사를 싣고 있다.


‘1960년대 6년 동안이나 줄곧 수출최고상을 수상하고 해외시장개척에서 한때 ‘한국의 신용’으로 통했던 전택보 씨가 부실기업정리로 대성목재 등 5개 업체를 은행에 넘겨주고 나머지 천우사만 가지고서 기업을 운영하며 차츰 옛날의 영광을 되찾아 가고 있다. 30억 원에 가까운 사채를 안고 산하업체(대성목재, 조선피역, 삼익선박, 한국축산개발, 신진완구)들을 은행관리로 넘겨주었을 때만 해도 재계는 천우사의 재기를 어려운 것으로 내다 봤다.


당시 재계에서는 전택보 씨가 사회사업가이지 결코 기업가는 될 수 없는 사람이라고 그의 사업비운을 동정하기도 하고 비웃기도 했다. 그러한 전택보 씨의 천우사가 요즈음 사업 확장에 열을 올리고 있다. 천우사는 지난 4월말, 구로동 공업단지에 건평 2500(8250㎡)평의 섬유공장과 1200(3960㎡)평의 전자제품공장의 증설을 마쳤다’고 소개했다.

1936년 인천 만석동에 “조선목재 공업주식회사”라는 제재소 자리에, 1942년 “대성목재공업주식회사”라는 합판공장을 만든 것이 오늘날의 대형합판공장이 된 것의 효시라고 할 수 있다.

대성목재 공업주식회사는 초창기 소규모의 합판공장으로서 콩풀을 사용해서 합판을 만들다가 60년 일산 10,000매 공장으로 늘리고 61년 천우사 전택보씨가 인수하면서부터 일산 42,000매 규모의 큰 합판공장이 되었고, 65년에는 최초로 필리핀에 주재원을 파견하기도 했다.

당시에는 필리핀에서 주로 원목을 구입하였는데, 오늘날 우리가 상상하기에는 힘들은 직경 1m정도 되는 불그스레한 라왕원목이 한 달에 4배씩이나 인천 앞바다에 들어오곤 하였다.그 때는 내노라 하는 종합상사도 없었고, 서울상대 출신들이 은행보다 천우사라는 무역회사를 더 선호하는 시절이었는데, 천우사에 입사한 엘리트들이 대성목재에 근무하였던 것이다.


필리핀을 필두로 해서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에 주재원을 파견하기 시작하였고 모두 서울 상대 출신들이 주재원으로 나가는 게, 통상화 되다시피 했다. 그 때는 외국에 나가기도 힘들은 시절이었고, 주재원으로 나가는 것이 영광이기도 한 시절이었다. 대성목재는 근로자가 3,500여명이었는데, 대성목재 월급날이면 인천시내가 술렁이고, 술집, 음식점들이 좋아하던 시절이었다. 65~66년 당시 3,500여명 이면, 90년대초 삼익악기, 영창악기 등이 5,000명인 것과는 대조가 안 되는 것이었다.

전택보 회장 대성목재 월미공장 건설
당시 대성목재에 일반공으로 취직하려면, 브로커에게 일만원씩 주고 취직을 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당시 종업원 월급이 삼만원 정도 할 때이니 알만도 하지 않은가. 당시에는 미국이 엄청난 양의 합판을 수입하였는데 필리핀, 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는 원재료는 있으나, 합판공업을 할 만한 수준이 아니었으므로 비교적 원재료 국가와 거리가 가까운 일본, 한국, 대만 등에 합판공업을 육성시켜, 합판을 만들게 하고, 자기들은 그 합판을 수입해 갔던 것이다.

합판공업이 육성될려면, 그 주위공업도 같이 발달되어야만 한다, 예를 들면, 수지공업, 샌드페이퍼공업, 나이프공업 등등, 당시 일본은 합판기계공업도 함께 육성되어, 우리나라 합판공장의 기계들은 거의 일본에서 수입되었다. 66년에는 일본은 올림픽을 개최하였고, 당시 동경에는 지하철이 동서남북으로 빽빽히 있었던 시절이었다. 합판산업이 한창 잘 될 무렵인 66년~68년 무렵인 것 같다. 당시 대성목재는 천우사의 전택보씨가 운영하고 있었는데, 미국에서 주문량이 폭주하자, 일산42,000매 규모의 만석동 공장으로서는 감당하기가 힘들게 되었고, 이렇게 돈벌이가 잘 되고, 국가산업에도 보탬이 되는 사업이 어디 있느냐고 정부에 건의하여 월미도에 일산 55,000매 규모의 합판공장을 차관을 받아서 건설하게 된다.

건설이 거의 완료되어가는 시점인 69年에 미국은 점차 주문량을 줄이기 시작하였고, 전사장은 차관 이자에 허덕이게 되었다. 정부에서는 장덕진씨(후일 농림부장관)를 팀장으로 하는 부실기업정리팀을 만들어, 대성목재를 조흥은행 관리업체로 만들고, 군부팀인 황필주 사장을 영입하여 운영하게끔 하였다. 그 후로 전택보 회장은 합판산업에서 손을 띄게 된다.



출처 : 한국목재신문(https://www.woodkorea.co.kr)

함경도 출신인 전택보는 1947년에 무역회사 천우사를 설립하여 경영하였다. 이후 대성목재공업주식회사·조선피혁주식회사를 인수하기도 했다.

전쟁은 파괴를 의미한다. 남한은 무에서 출발했다.

그랬더니 朴장관께서 ‘그거 내가 만든 것 아니야. 허정 (許政) 과도정부 때 상공부장관하던 전택보 (全澤珤.작고) 씨 알지. 천우사 사장 말이야. 그 양반이 제일 먼저 사용했어. 들어보니까 좋은 것같아 내가 쓴 거지’ 라고 대답하더군요. ” 이 무렵 朴대통령의 수출에 대한 인식을 보여주는 일화 한토막. 어느 날 朴장관은 朴대통령의 지방순시에 동행했다가 기차안에서 느닷없는 질문을 받았다.

“朴장관, 우리나라 옛말에 사농공상 (士農工商) 이라는 말이 있지 않소. 내가 보기에 우리나라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상공농사’ 가 돼야 할 것같아. 朴장관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 당황한 朴장관은 얼떨결에 “각하, ‘상’ 이 ‘공’ 보다 앞서야 한다구요” 하고 되물으며 잠시 생각을 가다듬은 다음 “제 생각에는 ‘공상농사’ 가 더 맞을 것같은데요” 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朴대통령은 “물건만 만들면 뭣해요. 팔지 못하면 아무리 많이 만들어도 소용없어요. 수출이 제일이야” 라고 설명했다.

전택보(1901~1980) 보세가공무역

1967년은 박정희 정권의 제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 시작되는 해였다.제1차 경제개발계획도 무역정책에 중점을 두었었지만, 제2차 경제계발계획의 무역정책특색도 첫째는 수출 제1주의의 지속, 둘째는 무역자유화 정책의 촉구, 셋째는 수출 진흥정책의 다양화였다.수출 제1주의의 제3공화국정부는 제2차 계획초년도인 1967년의 수출목표를 3억6천만달러로 책정하였다.
그런데 그해 천우사(사장 전택보)는 1513만 달러의 수출실적을 올려 65년, 66년에 이어 67년에도 또다시 훈장을 탔다. 3년 연속 훈장을 타게 된 설봉은 <천우사 사내보 12월호>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는데 이 글에서 그가 얼마나 보람을 느끼며 흐뭇해하였는지를 엿볼 수 있다.

“금년에도 총 수출액 3억6천만 달러의 정부 목표 중에 합판이 4200만 달러, 피목 및 기타 보세가공품이 3000만 달러, 스웨터가 2500만 달러, 도합 1억 달러에 해당하는 품목이 모두 우리가 개척한 상품들의 수출실적입니다.그 중에서도 자랑스러운 것은 합판수출이었습니다. 처음에는 클레임을 받기도 하는 등 수출에 애로가 많았었으나 차차 품질을 인정받기 시작하면서 수출량이 늘어난 합판수출. 천우사는 대성목재 합판수출 덕분에 1963년 제1회 수출의 날에는 전국 수출업체 중에서 1위를 기록할 수 있었고, 64년 2위를 제외하고는 65년, 66년, 67년 연달아 수출실적순위에서 1위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의 이러한 감회는 그가 평소 주장했던 보세가공과 자신이 직접 개척한 합판수출이 수출진흥에 큰 역할을 한 것에 대한 자부심이기도 하였다.

설봉은 보세가공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설봉이 보세가공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게된 것은 6·25 전란후 수복된 서울에서 수많은 실업자들이 방황하고 있는 것을 본 이후였다.

전쟁으로 생명을 잃은 사람이야 어쩔 수 없다치더라도 살아남은 사람들조차 앞으로 살아갈 길이 막막하게 느껴질 정도로 수복된 수도 서울의 모습은 참담했다.
거리에는 수많은 실업자들이 우글거렸고 전쟁미망인, 고아들은 이리저리 방황하고 있었다. 신문지상에는 연일 생활고로 인한 일가족 집단 자살, 강도, 살인, 사기 등의 사회악 기사가 가득차 있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국민은 극심한 빈곤 때문에 살기가 어려웠고 돈있는 사람들은 그들대로 불안감때문에 하루하루를 떨면서 살아가는 무서운 세상이었다.

세상형편이 이렇게 돌아가는 것을 본 설봉은 우리나라가 잘 살 수 있는 좋은 방법이 없을까 곰곰히 생각하게 됐다. 우리나라는 자원도 없고 변변한 기술도 없다. 약간의 생산시설마져도 6·25전란으로 잿더미 속에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나 아직도 사람은 많다. 그 노동력을 잘만 활용하면 활로가 트일 것이다. 생각이 여기까지에 이르자 설봉은 우리나라가 살길은 보세가공뿐이라고 느끼게 됐다. 지하자원개발이니 수산자원개발이니 개발 대상이 많겠지만 인적자원을 어떻게 개발하느냐가 우선과제이다. 북한 피난민들의 대거 월남, 거기에 인구의 자연증가는 거대한 인적자원을 구성하고 있으나 이 자원을 개방하지 못하고 있다. 이 많은 사람을 잘 활용하면 선진 제국과 경쟁해 이길 수 있다. 공장을 세워놓고도 노동자가 없어서 쩔쩔매는 나라의 기업인이 본다면 부러워할만큼 우리에게는 노동력이 풍부하다. 이 노동력을 이용 못한다는 것은 기업인의 역량부족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저렴한 노동력을 이용해 수공업, 가내공업으로 중소기업을 급속히 발전시키는 것이 적은 자본을 가진 우리가 조속한 시일 내에 실업자를 구제하고 국제수지를 개선시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전제하고 나서 그는 일본과 홍콩으로부터 기술을 도입해서 섬유제품, 2차가공품, 부품생산공장의 설치를 해야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그밖에도 크리스마스 장식업, 조화, 가발, 농구화, 메리야스, 양말, 수예품 등 할일이 얼마든지 있다고 역설했다. 우리국민이 공것을 바라지 말고 우리의 힘으로 우리의 경제난을 타개해 보겠다는 굳은 결의를 가지고 노력한다면 수년내에 억대의 외화를 벌것이 틀림없다고 외쳤다.

그리하여 설봉은 그당시 상공부장관, 재무부장관과 논의해 가칭 ‘가공무역추진위원회’라는 단체를 발기시켰다. 이 위원회의 취지는 우리나라에 없는 원료를 외국에서 도입해 이것을 가공해 수출하는 업체를 돕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출처 : 한국목재신문(https://www.woodkorea.co.kr)

합판사업/대성목재

대성목재공업은 일제강점기였던 지난 1936년 조선목재로 출발, 1945년 해방과 함께 손병도씨에게 경영권이 넘어갔다가 1955년 천우사를 새 주인으로 맞은 후 1960년대 합판 1억달러 수출을 주도했다.1936년 조선목재공업로 시작해 86년 동안 인천 향토기업으로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대성목재공업이 동화기업에 흡수합병된다.

1936년 인천 만석동에 “조선목재 공업주식회사”라는 제재소 자리에, 1942년 “대성목재공업주식회사”라는 합판공장을 만든 것이 오늘날의 대형합판공장이 된 것의 효시라고 할 수 있다.

대성목재 공업주식회사는 초창기 소규모의 합판공장으로서 콩풀을 사용해서 합판을 만들다가 60년 일산 10,000매 공장으로 늘리고 61년 천우사 전택보씨가 인수하면서부터 일산 42,000매 규모의 큰 합판공장이 되었고, 65년에는 최초로 필리핀에 주재원을 파견하기도 했다.

당시에는 필리핀에서 주로 원목을 구입하였는데, 오늘날 우리가 상상하기에는 힘들은 직경 1m정도 되는 불그스레한 라왕원목이 한 달에 4배씩이나 인천 앞바다에 들어오곤 하였다.그 때는 내노라 하는 종합상사도 없었고, 서울상대 출신들이 은행보다 천우사라는 무역회사를 더 선호하는 시절이었는데, 천우사에 입사한 엘리트들이 대성목재에 근무하였던 것이다.

필리핀을 필두로 해서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에 주재원을 파견하기 시작하였고 모두 서울 상대 출신들이 주재원으로 나가는 게, 통상화 되다시피 했다. 그 때는 외국에 나가기도 힘들은 시절이었고, 주재원으로 나가는 것이 영광이기도 한 시절이었다. 대성목재는 근로자가 3,500여명이었는데, 대성목재 월급날이면 인천시내가 술렁이고, 술집, 음식점들이 좋아하던 시절이었다. 65~66년 당시 3,500여명 이면, 90년대초 삼익악기, 영창악기 등이 5,000명인 것과는 대조가 안 되는 것이었다.

전택보 회장 대성목재 월미공장 건설
당시 대성목재에 일반공으로 취직하려면, 브로커에게 일만원씩 주고 취직을 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당시 종업원 월급이 삼만원 정도 할 때이니 알만도 하지 않은가. 당시에는 미국이 엄청난 양의 합판을 수입하였는데 필리핀, 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는 원재료는 있으나, 합판공업을 할 만한 수준이 아니었으므로 비교적 원재료 국가와 거리가 가까운 일본, 한국, 대만 등에 합판공업을 육성시켜, 합판을 만들게 하고, 자기들은 그 합판을 수입해 갔던 것이다.

합판공업이 육성될려면, 그 주위공업도 같이 발달되어야만 한다, 예를 들면, 수지공업, 샌드페이퍼공업, 나이프공업 등등, 당시 일본은 합판기계공업도 함께 육성되어, 우리나라 합판공장의 기계들은 거의 일본에서 수입되었다. 66년에는 일본은 올림픽을 개최하였고, 당시 동경에는 지하철이 동서남북으로 빽빽히 있었던 시절이었다. 합판산업이 한창 잘 될 무렵인 66년~68년 무렵인 것 같다. 당시 대성목재는 천우사의 전택보씨가 운영하고 있었는데, 미국에서 주문량이 폭주하자, 일산42,000매 규모의 만석동 공장으로서는 감당하기가 힘들게 되었고, 이렇게 돈벌이가 잘 되고, 국가산업에도 보탬이 되는 사업이 어디 있느냐고 정부에 건의하여 월미도에 일산 55,000매 규모의 합판공장을 차관을 받아서 건설하게 된다.

건설이 거의 완료되어가는 시점인 69年에 미국은 점차 주문량을 줄이기 시작하였고, 전사장은 차관 이자에 허덕이게 되었다. 정부에서는 장덕진씨(후일 농림부장관)를 팀장으로 하는 부실기업정리팀을 만들어, 대성목재를 조흥은행 관리업체로 만들고, 군부팀인 황필주 사장을 영입하여 운영하게끔 하였다. 그 후로 전택보 회장은 합판산업에서 손을 띄게 된다.

출처 : 한국목재신문(https://www.woodkorea.co.kr)

고도성장기 부산 합판산업의 성장과 쇠퇴(1960-1980)

합판은 한국에서 6.25전쟁 후의 복구수요를 기반으로 성장하였다. 그리고 1950년대 중·후반에는 유엔군의 군납수요도 합판산업의 성장에 자극을 주었다. 군납을 통해 품질을 인정받은 한국합판은 1961년부터 미국시장에 수출을 하기 시작하였다. 마침 인건비의 상승과 공해우려로 일본이 합판수출에서 철수하는 시기와 맞물리면서 한국의 합판산업은 1960년대 중반 이후 급속한 성장을 하였다. 1970년대에는 세계 5위의 합판생산국에 세계 1위의 합판수출국이 되었다. 합판산업의 중심은 부산이었다. 1960년대 중반부터 부산은 한국 최대의 합판도시가 되었다. 그리고 세계적인 합판도시가 되었다. 합판이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절 부산은 한국산업의 중심도시였다. 한때 한국수출의 29.2%의 수출을 담당하던 도시가 부산이었다. 여기에는 합판이 절대적인 역할을 하였다. 1970년대 부산에는 당시 세계최대의 합판기업이었던 동명목재를 비롯하여 6개의 대규모 수출합판업체들이 있었는데, 이들 기업은 한국합판생산의 절반을 상회하는 생산을 하였다. 그리고 1970년 동명목재의 생산량은 우리나라 전체 합판생산량의 31.2%를 차지하였다.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 중반까지는 이른바 합판의 시대였고, 부산의 시대였고 또 동명의 시대였다. 그러나 우리나라 합판산업의 성장기반은 취약하였다. 원목의 도입이 안정적으로 이루어져야 했고 저임금이 유지되어야 하는 구조였다. 그런 조건 속에서도 실제로 수익을 내기는 어려웠다. 생산가에서 차지하는 원재료의 비중이 너무 높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한계를 넘어서게 한 것은 정부의 각종 지원이었다. 각종 수출지원으로 합판기업들은 흑자를 볼 수 있었고 성장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외화가득률은 낮았다. 1970년대 말까지 합판은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그러나 제1차 석유파동 이후 등장하기 시작한 자원민족주의로 인해 원목의 구입이 어려워지면서 한국 합판산업은 위기에 직면하였다. 합판가격보다 빠르게 오르는 원목가격과 함께 수출길이 막히면서 합판산업은 위기에 빠져들었다. 마침내 1980년 세계 최대의 합판기업 동명목재가 도산을 하였고 잇달아 기업들이 쓰러졌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에 의한 합판산업의 구조조정이 시행되었다. 동명목재에 이어 부산에서는 태창목재, 반도목재, 광명목재, 대명목재가 퇴출되었다. 6개의 합판수출대기업 가운데 성창기업만이 부산에서 살아남았다. 일반적으로 과잉설비의 정리가 지역별로 균등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관례라고 보면 부산기업들의 집중 퇴출은 이례적인 것이었다. 합판산업의 구조조정 이후 우리나라 합판산업의 중심은 부산에서 인천으로 이동하였다.

합병 후 존속회사는 동화기업이고 대성목재공업은 소멸해 ‘대성목재공업’ 간판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됐다.동화기업은 대성목재공업을 흡수합병한다는 내용의 공시를 지난주 실시했다고 12일 밝혔다. 합병 목적은 경영효율성 증대 및 사업 경쟁력 강화를 통한 기업가치, 주주가치 제고다. 합병기일은 2022년 12월1일이다.

동화기업과 대성목재공업의 합병비율은 1대 0이다. 합병법인인 동화기업은 피합병법인인 대성목재공업의 주식을 100% 소유하고 있으며, 합병 시 합병법인은 피합병법인의 주식에 대해 신주를 발행하지 않으므로 합병비율을 1대 0으로 산출했다는 설명이다.

1960년대 중반 이후에는 수출길이 막히면서 수요부족과 설비과잉으로 침체의 늪에 빠져들기 시작해 1968년 조흥은행 주도의 은행관리를 거쳐 1973년 신동아, 1978년 효성그룹으로 사주가 변경된다.

이후 지난 1986년에는 산업합리화 업체로 지정되면서 유원건설과 인연을 맺어 재기의 가능성을 보였으나 1990년대 들어 지급보증을 섰던 모기업이 경영난에 처하면서 1995년에는 경영권이 다시 한보그룹으로 넘어간다. 이후 한보사태가 벌어져 2000년 동화기업이 인수, 창업 이래 사주가 무려 9번 바뀌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한편, 대성목재공업을 흡수합병한 동화기업은 1948년 서울 왕십리에서 제재소를 연 뒤 1960년대 말 인천지역에 36만평 규모 한국제재공업단지를 조성하며 국내 목재산업 발전의 발판을 제공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대성목재공업을 인수하면서 국내 1위 목재기업으로 발돋움했다.

출처 : 인천일보(https://www.incheonilbo.com)

출처 : 인천일보(https://www.incheonilbo.com)

또한 그해 <한국일보>에 게재한 ‘나의 이력서’란 글에서는 그 당시를 회고하며 “당시 대미 합판수출량은 일본이 제일 많았고 그 다음이 대만이었다. 그러나 대성목재가 합판수출을 개척한 이래 한국의 합판수출은 점점 늘어나 오늘에 와서는 원목 한 톨도 안나는 한국이 합판수출 세계1위국가로 성장하게 되었다.그 후 대성목재는 수출호조에 힘입어 확장에 확장을 거듭하였고, 합판수출을 처음 했을 때에 비해 시설은 100%가 늘었다. 최근에는 월미도에 있는 매립지 땅 7만여 평을 매입하여 대규모 합판공장을 건설하고 있다”고 말하였다.

이와 같이 당시 천우사의 수출실적은 대단하였는데 여타 수출업체의 실적과 비교해 보면 1964년도 천우사 수출실적 552만 달러는 국내기업으로서는 대한중석에 이어 2위에 해당하는 수출실적이었다. 그러난 대한중석은 국영기업체였던 만큼 사기업체로는 천우사가 1위를 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1965년도에는 수출실적 825만 달러로 국영기업인 대한중석도 제치고 당당 1위에 올라섰고, 그 후 66년, 67년 계속 수출실적1위를 차지하였던 것이다.

합판은 한국에서 6.25전쟁 후의 복구수요를 기반으로 성장하였다. 그리고 1950년대 중·후반에는 유엔군의 군납수요도 합판산업의 성장에 자극을 주었다. 군납을 통해 품질을 인정받은 한국합판은 1961년부터 미국시장에 수출을 하기 시작하였다. 마침 인건비의 상승과 공해우려로 일본이 합판수출에서 철수하는 시기와 맞물리면서 한국의 합판산업은 1960년대 중반 이후 급속한 성장을 하였다. 1970년대에는 세계 5위의 합판생산국에 세계 1위의 합판수출국이 되었다. 합판산업의 중심은 부산이었다. 1960년대 중반부터 부산은 한국 최대의 합판도시가 되었다. 그리고 세계적인 합판도시가 되었다. 합판이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절 부산은 한국산업의 중심도시였다. 한때 한국수출의 29.2%의 수출을 담당하던 도시가 부산이었다. 여기에는 합판이 절대적인 역할을 하였다. 1970년대 부산에는 당시 세계최대의 합판기업이었던 동명목재를 비롯하여 6개의 대규모 수출합판업체들이 있었는데, 이들 기업은 한국합판생산의 절반을 상회하는 생산을 하였다. 그리고 1970년 동명목재의 생산량은 우리나라 전체 합판생산량의 31.2%를 차지하였다.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 중반까지는 이른바 합판의 시대였고, 부산의 시대였고 또 동명의 시대였다. 그러나 우리나라 합판산업의 성장기반은 취약하였다. 원목의 도입이 안정적으로 이루어져야 했고 저임금이 유지되어야 하는 구조였다. 그런 조건 속에서도 실제로 수익을 내기는 어려웠다. 생산가에서 차지하는 원재료의 비중이 너무 높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한계를 넘어서게 한 것은 정부의 각종 지원이었다. 각종 수출지원으로 합판기업들은 흑자를 볼 수 있었고 성장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외화가득률은 낮았다. 1970년대 말까지 합판은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그러나 제1차 석유파동 이후 등장하기 시작한 자원민족주의로 인해 원목의 구입이 어려워지면서 한국 합판산업은 위기에 직면하였다. 합판가격보다 빠르게 오르는 원목가격과 함께 수출길이 막히면서 합판산업은 위기에 빠져들었다. 마침내 1980년 세계 최대의 합판기업 동명목재가 도산을 하였고 잇달아 기업들이 쓰러졌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에 의한 합판산업의 구조조정이 시행되었다. 동명목재에 이어 부산에서는 태창목재, 반도목재, 광명목재, 대명목재가 퇴출되었다. 6개의 합판수출대기업 가운데 성창기업만이 부산에서 살아남았다. 일반적으로 과잉설비의 정리가 지역별로 균등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관례라고 보면 부산기업들의 집중 퇴출은 이례적인 것이었다. 합판산업의 구조조정 이후 우리나라 합판산업의 중심은 부산에서 인천으로 이동하였다.

대성목재공업(주) 전택보(全澤珤) 회장 편 (42)
1964년 사상처음으로 수출 1억 달러를 돌파한 11월30일을 기념하기 위해 그날을 수출의 날로 정한지 3년 째 되는 1966년 11월30일, 그러니까 제3회 수출의 날 기념식에서는 수출 무역에 공로가 많은 43개 업체가 선정돼 시상되었는데 그 가운데 천우사(사장 전택보)는 수출실적이 제일 많아 금탑산업훈장을 받는 영광을 차지하였다.

이해 정부는 총 수출 목표액을 2억5000만 달러로 책정했는데 기업체별 실적을 보면 천우사가 1073만 달러로 선두를 달렸고 그 뒤로 대한중석이 1014만 달러, 그 다음은 동명목재(980만 달러), 성창기업(810만 달러), 영흥상사(645만 달러), 대창기업(573만 달러)의 순위를 이루었다.
이에 대해 <현대경제일보>는 ‘조국 근대화의 수출역군’이란 제목 하에 천우사를 포함한 우수수출 업체에 대한 기사를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지난 1964년 11월30일 이래 주목할 만한 일은 수출이 양적인 면에서 증가현상과 더불어 질적인 면에서 수출 구조가 점차 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1965년 이전만 해도 수출 상품의 구성비율은 공산품 보다는 농산품 위주로 돼 있었으나 1965년 부터 정부에 의한 수출 정책이 크게 효과를 보여 공산품의 수출이 1억달러선으로 상승되었다.

특히 지난 1964년 11월30일 이래 1966년 11월30일까지 3년 동안 수출생산업의 기수로서 줄곧 1위를 달려 그 위치를 한번도 다른 사람에게 뺐기지 않은 천우사의 경우만 봐도 올해의 수출목표액 1300만 달러로 지난 10월 말 현재 1073만 달러의 실적을 올려 단위 수출 상사별로는 수위를 차지하고 있는데… 그 중 합판은 천우사 수출고의 주축을 이루고 있는 품목이며 나머지는 섬유제품을 비롯해 잡화, 완구, 트랜지스터, 라디오 등으로 돼 있다. … 천우사는 일반 가공무역과 보세가공무역이 2대 산맥으로 그 위치를 더욱 높이고 있다.…그런데 천우사의 경우 오늘날과 같은 영광의 자리를 구준히 쌓아온 것은 현재 천우사가 고용하고 있는 5, 6천명의 공원(工員)들이 노력한 결과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사장 전택보 씨의 기업인으로서의 뚜렷한 기업이념이 강력히 뒷바침하고 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바이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전택보 사장은 항상 우리나라는 과잉 인구에 의한 유휴노동력이 많은 대신 이와는 대조적으로 원자재의 부족 내지 고갈상태를 언제나 주장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와같은 여건을 타개하기 위해 자본이 많이 소요되는 대기업보다는 돈을 많이 필요로 하지 않고 유휴노동인구를 보다 많이 흡수할 수 있는 중소기업의 가공무역과 보세가공산업을 육성하면서 가까이는 사업에 종사하는 사람의 생활향상을 도모하고 멀리는 국민경제의 발전에 기여해야 한다고 주의 사람들에게 곧잘 말한다는 사실을 보아도 그의 기업이념이 어떤 목적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쉽게 상상할 수 있다’라고 적어 놓고 있다.

1914년 문천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그 해 말 부모를 따라 북간도(北間島)로 이주, 용정(龍井)에 있는 영신학교(永新學校) 고등과를 1918년에 졸업하고, 이듬해 모교인 영신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1920년 용정중앙교회에서 김정신과 결혼 현재·억재·순재 3남을 두었다.

고학생은 인삼장사란 인삼 엑기스를 파는 장사를 하는 것을 말한다. 인삼 엑기스 제조 공장에서 인삼 엑기스를 도매가격으로 사서 순경이나 공장직공들에게 파는 것이 인삼장사였다. 설봉도 처음에는 인삼장사를 했다.

설봉은 정측영어학교에서 영어실력이 점점 붙어갔다. 남보다 비교적 암기력이 뛰어났던 설봉은 그날 배운 것을 그다지 복습을 하지 않아도 단어를 외울 수가 있었다.
후일 설봉은 영어의 기초를 이곳에서 닦았다고 말하였다

고베 고등상업학교 입학한다. 고베는 일본의 대표적인 국제항구 도시였다. 국제도시에 걸맞게 외국인 거주자들도 상당히 많은 편이었고, 인종 차별도 다른 곳과 비교하면 별로 심하지가 않았다.

이듬해 봄(1924년) 설봉은 고베고상에 응시를 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낙방이 되었다. 동경 대지진 난리통에 별다른 준비없이 시험에 응했기 때문이었다. 떨어지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설봉은 그 이듬해(1925년) 다시 시험을 치뤘고 이번에는 합격을 했다

그가 고베고상을 졸업할 무렵 심한 불경기여서 조선인이 취직자리를 구하기란 하늘의 별따기였다. 그는 재학 시절 여선교사의 도움으로, 뉴욕내셔널시티은행 고베지점에 겨우 취직할 수 있었다. 그곳에는 미국인 15명과 일본인·중국인 30여명이 있었고 조선인은 전택보 혼자였다.

1929년 간도로 돌아왔다. 아내와는 9년 만에 함께 살게 된 것이었다.전택보는 다시 만주 영신학교 교사로 교편을 잡았다가, 고향으로 돌아와 함경남도 금융조합에서 일했다. 간도 교하현부근의 500정보를 구입, 선만주식회사 라는 대규모 농장을 경영하다가 8·15 광복을 맞이하여, 1945년 10월 단신 월남하였다.

전택보가 만주에서 농장 경영을 시작했을 무렵에도 벼농사는 수익성이 좋았다. 그러나 이때 그는 밤새우기 일쑤인 조선일보사 근무 때 얻은 지병인 심장경련증이 악화되었다. 한번 발작하면 숨이 막혀 죽을 것만 같았다. 그는 서른아홉 살 되던 해 12월 만주 지린(吉林)병원에 입원해 6개월 동안 병상에 누워 있어야 했다. 그가 조금씩 건강을 되찾으면서 농장도 차츰 궤도에 올랐다. 그의 농장이 큰 집단취락으로 되고 보니 자녀교육 문제가 시급한 과제로 떠올랐다. 그래서 전택보는 농장 안에 중국인 학교를 세우는 한편 조선인 교사를 초빙해 조선인 자녀들을 따로 가르치게 했다.

이런 상황에서 설봉은 고베고상 동창인 지우선씨와 사업을 하기로 결심했다. 잣을 가을에 사서 저장해 뒀다가 이듬해 봄에 팔면 이익을 보지 않을까 생각해서, 금융조합을 그만둘 때 받았던 퇴직금을 출자해 잣장사를 시작해 보았다. 그로서는 첫 사업인 셈이다.

그러나 이 첫 사업에서 그리 재미를 보지 못했다. 예상한 만큼 잣값도 오르지 않고 품질도 변질되고해서 실패를 하고 말았다. 다음에는 쌀 장사에 손을 대어 보았다.

추수기의 쌀값과 다음해 여름철 쌀값의 가격차이를 노린 장사였는데 이 장사에서는 상당한 재미를 보았다. 이제까지 기껏해야 100원 남짓한 월급을 받아왔던 그가 한달에 천여원하는 거금을 손에 쥐게되니 세상이 온통 제것만 같았다.쌀 장사에 재미를 본 설봉은 소장사에도 손을 뻗쳤다. 남만주 지방의 소값은 싼 반면에 용정의 소값은 상당히 비싸다는 것에 착안해서 소장사에 투자했던 것이다.

소장사에 투자를 한 것이 예상한 대로 이득이 많이 남아 돈을 많이 벌었다.

그러나 이것은 살아움직이는 생명을 다루는 장사였기 때문에 예상밖의 귀찮은 일들이 많았다. 그래서 좀 더 안정성있는 사업을 하기로 마음먹고 길림성 근처의 교하현으로 이사가서 정미소를 차렸다.

이 사업은 시설만 있으면 별로 자금이 없어도 된다는데 착안하여 시작한 사업이었다. 당시 길림성 교하현 근처에는 상당수의 우리나라 농민들이 벼농사를 주로 하며 살고 있었다.

농민들은 추수때 거두어 들인 벼를 마당에 쌓아둔채 저장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이 근처 정미소에 맡겨두었다가 필요한 때에 팔아 쓰고 있었다. 정미할 쌀은 맡겨둔 농민들의 요구에 따라 그때에 시세에 맞춰 결재를 해주면 되었는데, 농민들에게서 위탁받은 쌀을 하얼삔으로 보내어 바꾼 돈을 농민들이 결재를 요구할 때까지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는 이점이 있었다.

정미소를 하면서 설봉은 톡톡히 재미를 보았다. 그리하여 설봉은 이곳에다 아담한 새집을 짓고 부모님과 동생들을 데려다가 같이 지낼수 있게 되었다. 평생동안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자기돈으로 자기집을 지은 것이었다.

정미소 사업이 일단 본 궤도에 오르자 정미소는 동생 택완에게 물려주고 설봉은 북만주 지지하루에 가서 중국인이 경영하던 좁쌀 정미사업을 인수하였다. 지지하루는 겨울이 되면 기온이 영하 40~50도까지 떨어지는 추운지방이었다.

집밖에만 나가면 엄청난 추위 때문에 몇 겹의 옷을 입고도 두툼한 털옷으로 또다시 무장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다닐수가 없는 지방이었다.

이런곳을 설봉은 바쁘게 돌아다니며 좁쌀장사를 했다. 그 다음으로 손댄 것이 농장건설이었다. 농장건설에 관한 계획은 즉흥적인 발상이 아니었다.

그는 고베고상 시절에 이미 만주 전역의 농업조사 보고서까지 쓴 경험이 있었다.

고베고상에서는 매년 성적이 우수한 학생 10여명을 선발하여 만주, 중국 등지로 해외여행을 시켰는데 설봉도 고베고상 시절에 우수학생으로 뽑혀 여순, 대련, 북경, 장춘, 하얼삔 등을 다녀오는 여행을 한 일이 있었다.

그때 만주전역의 농업보고서를 쓴 것이 농장건설을 해야되겠다는 생각을 하게했던 것이다.

벼란 것은 원래 남방작물이므로 만주에서는 기껏해야 일본인들이 안동현에서 조금 심고 있었을 뿐 다른데는 벼동사가 전여 없었다. 만주벌판에 벼 농사가 보급되기는 순전히 조선인 이주자들에 의하여 이뤄졌던 것이다.

조선 농민들은 벼가 원래 기후와 환경에 비교적 잘 적응하는 작물인 것을 알고 점차 북만주에까지 보급했던 것이다.

당시 일제의 식민정책으로 문전옥답을 억울하게 빼앗기고 고향을 떠나온 우리 농민들은 근 100여만명이나 되었는데 그들의 노력으로 벼 농사가 소련 영내에까지 보급되었다는 사실을 설봉은 그의 학창시절 조사보고서에서 지적해 냈던 것이다.

농사도 잘되었고 농민 수입도 괜찮았지만 만주 특유의 기후 탓으로 문제가 있었다. 만주는 겨울이 길고 여름이 짧기 때문에 농민들은 여름에 번 수입을 겨울에 다 없애버렸다. 전택보는 농민들이 농사만 지어 가지고는 재산을 만들기가 어렵다고 판단해 농민들에게 축산을 장려했다. 또한 만주에서는 해산물이 귀했으므로 만주 토문(土門)에다 ‘동만(東滿)상회’라는 회사를 차리고 수산물 판매사업을 시작했다. 만주 생필(生必)주식회사를 통해 주로 명태를 팔았다.

설봉은 신참에서 멀지 않은 육가자(六家子)라는 역에서 약 10리를 들어간 곳에 약 5백정보의 무인지답을 샀다. 이 땅은 예전에 청나라 사람들이 살던 곳으로 만주사변때에 일본군에 의해 점령된 곳이었다.

설봉은 여기에다 대단위 농장을 건설하기로 결심하고 일에 착수했다. 당시 만주에는 마적들의 횡포가 심하였으므로 마을을 만들려면 토성이나 석성을 쌓고 망대를 세우는 것이 우선적인 일이었다. 우선 넓이 12척, 높이 12척의 토성을 쌓았다.

그리고 농민들에게 집 지을 자금을 대 준다고 하니까 청나라 사람 130호가 들어왔다. 조선 농민들에게는 집 지을 자금 외에 농우까지 마련해주고 약 30호를 입주시켰다.

만주는 겨울이 긴탓으로 가을에 추수한 뒤로는 기나긴 겨울을 술먹고 노름을 하는 것으로 재산을 탕진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를 생각하고 설봉은 농장 농민들에게 축산을 권장했다.

이러는 중 전쟁은 막바지에 접어들고 전세는 일본이 패배할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다. 일본이 패망하면 이제껏 해왔던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기에 설봉은 농장을 정리하고자 했다.

그러나 원매자가 선뜻 나서지 않았다. 겨우 만철에 교섭해 50만원에 팔기로 결정했다. 대금지불기일이 8월8일이었는데 일본의 패전으로 돈을 받아내지 못했다.

정미소와 농장경영에 몰두하며 북만주를 누비고 다니던 설봉은 우연한 기회에 명태장사에도 손을 댔다. 이때가 1941년이었는데 만주에서는 해산물이 매우 귀한 때문이었다. 더욱이 전쟁이 가열되면서 만주에서는 해산물을 찾아볼 수가 없을 정도로 해산물이 귀했다.

당시 만주의 큰 도시에는 지금의 고시가격과 비슷한 제도가 있어서 일정가격 이상 받을 수 없도록 돼있었고 이를 위반할 때에는 처벌을 받도록 돼 있었다.

그런데 번양(藩陽)역에서는 고시가격제도가 없어서 그 곳으로 해산물을 수출해서 팔기도 했다. 그러다가 철도경찰에 끌려가 유치장 신세를 지기도 했다. 번양이 봉천시에 편입된 사실을 모르고 장사를 하다가 고시가격위반으로 붙잡혀갔던 것이다.

이런 일이 있은 후 얼마 지나서 북경이나 천진에는 고시가격제도가 없다는 것을 알아내고 북경이나 천진 등으로 수출을 하기로 했다.

수출절차가 까다로왔으나 화신과 교섭을 해서 천진출장소 명의로 명태 수출허가를 얻어 수출하는데 성공했다. 14차분의 건명태를 천진에 끌어내리니 굉장한 분량이었다. 모두들 깜짝 놀랐다.

그러자 소문이 사방에 퍼지면서 천진과 북경에 있는 조선인 거간꾼들이 저마다 팔겠다고 나서는 것이었다. 한 쾌를 8원씩 팔아주면 구전으로 거기에서 1원씩 주기로 약속했다.

그래서 팔기 시작한 것이 며칠 사이에 전량을 모두 팔아 치울 수가 있었다. 명태 한쾌에 투자된 돈이 운송비까지 합쳐 1원15전이었으니까 구전을 제하고도 엄청난 돈이 들어오게 되었다. 명태장사로 번 돈이 70만원이란 거액이 됐다.

1945년 미군정청 이재과장을 맡았다 그만두고, 1947년에 천우사(天友社)를 설립하여 본격적으로 사업에 투신, 무역업을 개척하였다. 서울로 환도한 뒤 천우사의 무역업만으로는 발전의 한계가 있음을 느끼고 생산업체를 건설할 생각을 굳혔다.

그러니까 천우사의 간판이 걸린 것이 1947년 3월 8일이었고, 천우사가 간판을 내걸고 제일 먼저 손을 댄 것이 ‘종이 장사’였다.

1945년 10월8일, 드디어 설봉은 가족을 함흥에 남겨둔 채 남쪽행 기차에 올랐다. 기차는 화물차였는데 사람이 어찌나 많았던지 기차가 38선 근처에 도착하기까지 시종 화물차 지붕 위에 올라 있어야 했다.

그 당시만 해도 그리 감시가 심하지 않았기 때문에 38선을 걸어서 넘었다. 서울에 도착해 소복여관(현 도큐호텔 자리)에 숙소를 정했다.

그리고 나서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이 전에 몸담고 있던 조선일보사였다. 그 당시 조선일보사는 극심한 경영난으로 방응모씨는 소유주식의 절반을 이중문이라는 사람에게 125만원에 팔아 그와함께 공동경영을 하고 있었다.

설봉은 여관에 들어앉아 앞으로의 할일을 놓고 생각해 보다가 당시 미군정의 경무부장으로 있는 조병욱씨를 찾아갔다. 다른 사람의 취직자리를 부탁하러 찾아갔던 것인데 도리어 그에게 붙잡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즉 설봉은 경무부장 밑에 이재국장이 됐다.

미군정 시대라 이재국장은 미국인 한명, 한국인 한명 이렇게 둘을 두고 있었다. 이재국장을 한 6개월 하고 있는데 조병욱 부장이 이번에는 자기와 같이 정치를 하는 것이 어떠냐는 부탁을 하길래 거절하고 이재국장 자리도 뿌리치고 나와버렸다.

그후 1946년 봄에 온가족을 데리고 38선을 넘었다. 그때는 38선을 넘기가 조금 힘들어져 있었다. 서울에 와서는 잠시 효자동에 있는 효자여관에 묵으면서 집을 구하러 다녔다. 그때 마침 청운동에 있는 조그만 기와집을 일금 10만원에 살 수 있었다.

청운동 집에서 온가족이 오랜만에 함께 모여 살림을 꾸미고 들어앉으니 마음이 여간 기쁘지 않았다.

이 무렵 우연히 고베고상의 동창생 김인형씨를 만났다. 그는 대한상사라는 무역업을 하고 있었는데 자기는 장사할 줄을 잘 모르니 같이 해 보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설봉은 그 회사의 부사장이 됐다.

설봉은 부사장으로 일을 하고 있으면서도  단독으로 대외 무역을 할 수 없을까 고민하며 돈줄을 물색하고 있었다. 그때 김상필씨로부터 이화대학 총장 김활란씨를 소개받았다.

김활란 총장은 학교재단 기금 중 500만원을 선뜻 빌려주었다. 설봉은 이 돈을 장사 밑천으로 하여 조선일보 사옥 3층에 방 하나를 빌려 사무실을 차렸다.

이것이 바로 지금의 <천우사>의 시작이었다. 그러니까 천우사의 간판이 걸린 것이 1947년 3월 8일이었고, 천우사가 간판을 내걸고 제일 먼저 손을 댄 것이 ‘종이 장사’였다.

조선일보사에 사무실이 있었던 만큼 창고도 마음대로 얻어 쓸 수 있었고, 판매처를 얻기도 안성맞춤이었다. 당시의 무역은 마카오 중심이었다.

국산품이란 말조차 생소하던 시절이었으니까 국민들 생활필수품은 대부분 마카오에서 조달됐다. 그때 신사들이 마카오 양복에다 마카오 구두를 신어야 행세를 할 수 있었던 시절이었다. 

이런 시절에 천우사는 마카오 무역선에 싣고 온 양복지 지물류 등을 가지고 장사를 시작했다. 적은 자본이라 마카오까지 가서 무역을 할 수는 없었고, 상인들이 가지고 들어오는 물건을 사서 팔았다.

국산품이란 말조차 생소하던 시절이었으니까 국민들 생활필수품은 대부분 마카오에서 조달됐다. 그때 신사들이 마카오 양복에다 마카오 구두를 신어야 행세를 할 수 있었던 시절이었다. 

이런 시절에 천우사는 마카오 무역선에 싣고 온 양복지 지물류 등을 가지고 장사를 시작했다. 적은 자본이라 마카오까지 가서 무역을 할 수는 없었고, 상인들이 가지고 들어오는 물건을 사서 팔았다.

1954년 마닐라, 1960년 누욕과 도쿄 수출거점 설치, 한국축산 개발 설립

이것이 1954년 대성목재공업주식회사(大成木材工業株式會社)·조선피혁주식회사를 인수하게 된 동기이다. 그는 국내 동업자끼리의 경쟁보다는 해외시장 개척에 더 적극적으로 나섰다.그래서 1960년 3월 우리 나라 최초로 합판을 수출하게 되었다. 그 뒤, 합판 수출은 우리나라 수출의 주품목으로 각광을 받게 되었다. 1964년 신진완구주식회사·신진수출주식회사(新進輸出株式會社)를 설립하였고, 그 해 천우사는 552만 달러를 수출하여 국내 민간기업 중 1위를 차지하였다.

1965년에는 조선피혁을 강남공업(江南工業)으로 개칭하고, 한국축산개발주식회사와 삼익선박(三益船舶)을 설립하였고, 제2회 수출의 날 수출실적 제1위로 동탑산업훈장을 수상하였는데, 이 기록은 1967년까지 이어졌다. 천우사의 전성기를 맞은 것이다.

기독교 가정에서 성장한 탓으로 신앙심이 두터웠고, 독실한 기독교인으로서 그는 폭넓은 사회활동을 하였다. 1947년 이화여자대학교 이사로 취임한 것을 비롯해서, 1953년 조선일보사 대표취체역, 1957년 유네스코후원회 회장, 1959년 주한 덴마크 명예영사, 1961년 포풀라협회 회장, 1963년 국제법학회 부회장, 1963년 한국신학대학 이사 등 각계에서 눈부신 활약을 하였다.

한편, 재계에서도 8·15광복 후 대한상의(大韓商議) 재건운동, 한국무역협회 창립, 한국경제협의회 창립 등에 주도적 역할을 하여 경제계의 지도자로서 큰 업적을 남겼다.

4·19혁명 뒤 허정(許政)과 함께 과도정부 수립에 공헌한 인연으로 상공부장관에 오르기도 하였으나, 35일간의 단명으로 끝났다. 정부는 그의 국민경제발전에 기여한 공적과 민간경제외교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하였다.

우리는 저렴한 노동력을 이용해 수공업, 가내공업으로 중소기업을 급속히 발전시키는 것이 적은 자본을 가진 우리가 조속한 시일 내에 실업자를 구제하고 국제수지를 개선시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전제하고 나서 그는 일본과 홍콩으로부터 기술을 도입해서 섬유제품, 2차가공품, 부품생산공장의 설치를 해야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그밖에도 크리스마스 장식업, 조화, 가발, 농구화, 메리야스, 양말, 수예품 등 할일이 얼마든지 있다고 역설했다. 우리국민이 공것을 바라지 말고 우리의 힘으로 우리의 경제난을 타개해 보겠다는 굳은 결의를 가지고 노력한다면 수년내에 억대의 외화를 벌것이 틀림없다고 외쳤다.

그리하여 설봉은 그당시 상공부장관, 재무부장관과 논의해 가칭 ‘가공무역추진위원회’라는 단체를 발기시켰다.
이 위원회의 취지는 우리나라에 없는 원료를 외국에서 도입해 이것을 가공해 수출하는 업체를 돕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천우사사장 전택보씨(사진)가 19일 상오11시25분 서울 신교동자택에서 심장마비로 급사했다.
향년 80세. 고전사장은 일본신호고상을 졸업, 일찌기 실업계에 투신하여 보세가공무역을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개척하는등 한국경제계에 큰기여를 했다.

1924년 봄 전택보는 고베고상(神戶高商)에 응시했다. 결과는 낙방이었으나 이듬해 다시 시험을 쳐서 합격했다. 그가 고베고상을 졸업할 무렵 심한 불경기여서 조선인이 취직자리를 구하기란 하늘의 별따기였다. 그는 재학 시절 여선교사의 도움으로, 뉴욕내셔널시티은행 고베지점에 겨우 취직할 수 있었다. 그곳에는 미국인 15명과 일본인·중국인 30여명이 있었고 조선인은 전택보 혼자였다. 그는 민족 자긍심을 지킨다는 마음으로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다. 항구도시 고베에는 조선인 막노동자가 몰려와 살고 있었다. 조선인이 경제적 하층구조의 태반을 차지하자 ‘조센징’ 차별도 노골적으로 바뀌어 갔다. 그것이 전택보에게 고민거리를 던져주었다. 취직을 했으니 아내를 룽징에서 데려올까 생각했지만, 아내에게 조센징이란 비아냥거림을 듣게 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아내와 떨어져 마냥 고베에서 일할 수도 없었기에 고민 끝에 그는 룽징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몇 달만 참으면 하얼빈이나 펑텐 지점으로 보내주겠다는 지점장의 만류도 뿌리치고 1929년 간도로 돌아왔다. 아내와는 9년 만에 함께 살게 된 것이었다.

 1947년 3월 8일 천우사(天友社)를 세우고 무역업에 뛰어들었다.

천우사를 설립한지 얼마 안돼서인데, 일본 유학시절 때부터 잘 알고 지냈던 박찬빈 이란 친구가 설봉을 찾아왔다.

자기는 중국CIC(중국 군대의 비밀단체)의 책임자인 조자청과 손잡고 일하는데 ,중국에서 물건을 가지고 올테니 팔아 달라는 것이었다.

설봉은 그러마고 했더니 얼마 후에 그는 복사지 한 배를 가득 싣고 들어왔다. 복사지는 그 당시 매우 귀한 물건이었기 때문에 쉽게 팔 수 있었다. 그리고 복사지 대금조로 중석(重石)을 한 배 실어주었다.

그러니까 두 번 장사를 한 셈이었다.

당시 중석은 일본인들이 채광해 놓고 미쳐 실어가지 못한 것이 전국 곳곳에 방치 된 것이 많이 있었음으로 어렵지 않게 실어 줄 수 있었다.이것이 천우사의 첫 번째 큰 장사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장사에서 설봉은 수백만원을 벌었다.

때는 1947년 여름쯤이었고, 천우사 간판을 건지 불과 3,4개월 밖에 안된 때였다.

그러나 매번 행운만이 따르는 것은 아니었다. 1947년 초가을 쯤이었는데 봉명석이라는 사람이 찾아와서 자기는 상해에서 신문용지를 구해 올 수 있다고 했다.  

그때는 신문 용지가 아주 귀한 때라 천우사는 곧 그와 손을 잡고 신문용지 거래를 시작하기로 했다. 그는 신문용지를 구하기 위해서는 선금이 필요하다고 해서 설봉은 선금 600만원 외에도 동아일보의 600만을 비롯해 여러 사람에게서 모두 6000만원을 마련해 그에게 넘겨줬다.

그러나 그가 상해로 돌아간지 석 달이 넘도록 감감 무소식이었다. 사기를 당한 것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봉명석은 그 돈을 모두 유흥비로 탕진해 버렸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설봉은 자기 돈 600만원 뿐만 아니라 6000만원의 큰 빚쟁이가 되고 말았다. 천우사는 이때 완전 파산 상태에 빠지게 됐으며 이화재단 김활란씨에게서 빌린 돈 500만원의 밑천까지 전부 날려버렸던 것이다.

이때부터 설봉은 날마다 빚 독촉을 받게 됐는데 하루는 모 명문학교 사친회 회장이 천우사 사무실을 찾아와서 ‘내 돈 500만원을 내놓으시오’ 안 내면 죽이겠다고 설봉의 멱살을 잡고 차마 입으로 할 수 없는 욕설을 마구 퍼부어 댔다.

이때 사원들이 달려들어 떼어놓긴 했으나, 이때 설봉이 받은 고통과 마음의 상처는 이루 형언할 수 없었다.

옷을 찢긴 채 (조선일보)3층 천우사 사무실에 멍하니 앉아있던 설봉은 ‘저기 전찻길에 뛰어내려 죽고싶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때 간부 사원들은 자칫하면 사장이 자살이라도 하지 않을까 걱정이 돼 의논 끝에 사장을 해외로 피신 시키기로 결정을 했다.

‘사장님 6개월 동안만 해외에 나가서 피신해 계십시오. 그동안 우리가 국내에서 뒷 처리를 할테니, 사장님은 해외에서 활약해 주십시오’ 하고 출국을 간곡히 권했다.

이리하여 설봉은 비밀리에 서울을 빠져나와 홍콩 행 비행기를 타게 됐다.

때는 1948년 4월 설봉은 해방 후 처음으로 해외에 나가게 됐던 것이다.

빚에 몰린 설봉은 비밀리에 서울을 빠져나와 홍콩 행 비행기를 탔다.

때는 1948년 4월, 설봉은 해방후 처음으로 해외 여행을 하는 셈이었다. 설봉은 홍콩에 도착하자 우선 뉴욕 내셔날 시티뱅크 홍콩 지점을 찾아갔다. 이 은행은 설봉이 일본 고베에 있을 때 근무한 경험이 있는 은행이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은행 고문으로부터 미리 소개장을 받아왔기 때문이었다.

설봉은 소개장을 내어놓고 협력을 구했다. 그랬더니 지점장은 선뜻 홍콩에서 가장 실력있는 지물상인 치생공사(治生公司)를 소개해 주는 것이 아닌가.

홍콩 지점장은 설봉에 대한 첫 인상을 좋게 느꼈던 모양이다. 그 즉시로 설봉은 홍콩의 치생공사와 계약을 체결하고 무역을 시작했다. 방법은 물물교환방식이었는데 치생공사가 지물을 선적해 서울에 보내면 천우사는 대신 오징어를 사서 그 배에다 실어 보낸다는 조건이었다.

그러니까 지물 대금을 먼저 치를 필요없이 오징어를 사서 실으면 되는 장사였다.

드디어 신문용지 50톤을 실은 첫 배가 부산에 도착하였다. 그러자 국내에 있던 천우사 사원들은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해서 지물을 팔고 그 돈으로 오징어를 구해 그 배에 실어 보냈다.

이러기를 3개월동안 계속하니 빚의 3분의 1을 갚을 수 있게 됐다.

설봉은 홍콩에 피신해 있으면서 계속 지물을 실어 보냈다. 한편 치생공사는 황옥당이라는 사람을 한국에 파견해 천우사의 무역업무를 감독케 하였다.

이런 식으로 무역을 6개월간 계속한 결과 빚의 절반을 갚을 수 있었다.물물 교환단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무역이었지만 서로 믿고 했기 때문에 번거롭지도 않고 사업도 잘 돼 좋았다, 치생공사는 천우사의 은인이나 다름없었다.

날이 갈수록 치생공사와의 무역은 더욱 번창해져서 한때는 전국 지물 수입량의 거의 절반을 천우사가 차지 했다.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한국의 무역에도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홍콩 일변도의 무역에서 대일 무역이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행운이 설봉을 찾아왔다. 어느날 유동석이란 사람이 찾아와서 조선농회(朝鮮農會, 오늘날 농협과 비슷한 기관)에서 수집한 가마니 수십만장을 일본에 수출할 수 있는 허가를 받아 줄 수 있으니 그걸 한 번 해 보라고했다.

그런데 그 때 조선농회 농회장을 최태용씨라는 사람이 하고 있었는데 최태용씨는 영흥 사람이었고 설봉이 영흥에서 금융조합이사로 있을 때 어느정도 안면이 있는 사이여서 어렵지 않게 천우사가 대일 가마니 수출업자로 지명될 수 있었다.

당시 농회에서 수집해 놓은 가마니를 체크해 보니 그 양을 다 일본으로 실어 나르려면 배가 17척이나 필요한 방대한 양이었다.

일본의 수입상은 제일물산이었는데 1949년 한 해는 온통 가마니 수출로 돈을 벌다 시피했다. 해방 후 민간 무역으로 일본과의 교역은 이것이 처음이었으며 그때 가마니 수출대금은 약 30만 달러에 이르렀다.

천우사는 1950년 6월 24일 인천항에 신문지와 양복지 등 대규모 물자를 수입해 놓고 있었다. 그날은 토요일이어서 통관을 26일 월요일로 미루고 있었는데 뜻밖에도 6·25전쟁이 터지고 말았다.부산 부두에는 천우사 화물도 잔뜩 쌓여 있었다. 군의 통고를 받은 전택보는 화물 처리 문제로 고심했다.

전택보는 전쟁이 끝나기만을 마냥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남포동에 전세로 점포를 얻어 다시 무역업을 시작했다.

출처 : 주간조선(http://weekly.chosun.com)

그는 천우사의 무역업만으로는 발전에 한계가 있음을 깨닫고 생산업체를 건설할 생각을 굳혔다. 이것이 1954년 대성목재공업주식회사·조선피혁주식회사를 인수하게 된 동기이다. 그는 국내 동업자끼리의 경쟁보다는 해외시장 개척에 더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래서 1960년 3월 한국 최초로 합판을 수출하게 되었다. 그 뒤 합판은 한국 수출의 주요 품목으로 각광을 받게 되었다. 1964년 신진완구주식회사·신진수출주식회사를 세웠고 그해 천우사는 552만달러를 수출, 국내 민간기업 제1위를 차지했다.

그는 1965년에는 조선피혁을 강남공업으로 개칭, 한국축산개발주식회사와 삼익선박을 설립했으며, 제2회 수출의 날 대한민국 수출실적 제1위로 동탑산업훈장을 받았다. 이 기록은 1967년까지 이어졌다. 천우사의 전성기를 맞은 것이다

동물원 준비 과정에서 가장 어려웠던 것은 달러를 바꾸는 일이었다. 그때는 암시세와 공정환율의 차이가 많아서 공정환율로 바꾸지 않으면 준비에 큰 문제가 생겼다. 전택보는 재무부를 서너 차례나 드나들며 사정해야 했다.

4·19혁명 뒤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 성명을 발표한 이튿날 4월 27일부터 과도정부의 내각 조직이 시작되었다.

전택보는 대기업가 중심의 새로운 단체를 구성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김용완, 최태섭, 김항복 등도 마찬가지 생각이어서, 그들은 천우사 사장실에 모여서 새 조직을 의논했다. 김용완은 처음 새 단체를 뜻 맞는 사람들끼리만 발족, 차츰 확대해 가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그러나 나중 전국을 대표하는 단체가 되려면 아무래도 대기업가를 모두 참여시키는 것이 좋겠다는 전택보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마침내 한국경제협의회가 발족되었다.

천우사는 1960년대 6년 동안이나 줄곧 수출 최고상을 수상, 해외 시장 개척에서 ‘한국의 신용’으로 통했다. 1970년대 들어 천우사는 무역업에서 쌓은 경험과 미국 시장에서의 기반을 토대로 스튜어트데이비스사(社)와 손잡고 보잉 707기를 빌려 미국과 서울 간 항공화물 수송을 시작했다.

또한 세계적 전자회사인 필립스와 합작으로 전자제품은 물론 컴퓨터 부품까지 수출해 생산했다. 이미 천우사는 1950년 9·28 서울수복 직후 필립스의 도움을 받아 한국에서 처음으로 탁상용 라디오를 만들어낸 일이 있었으며, 그 인연이 이어져 필립스와 기술제휴로 김포 등촌동 공장에서 전자제품과 부품을 생산해 대미·대일 수출을 계속해 왔다. 1970년에는 상공부로부터 TV 부품 수입을 승인받아 오류동에 5만4638㎡(1만6528평) 공장 대지를 마련하고 한 해 3만대 생산 목표를 세웠다. 그 무렵 한국의 TV 생산업체는 모두 도시바·히타치·샤프·산요 등 일본업체와 기술 합작을 하고 있었는데, 천우사는 필립스와 기술제휴를 함으로써 유럽 회사와 제휴한 첫 업체가 되었다.

전택보가 주장했던 보세가공 무역은 부두의 보세창고에서 수입한 물품을 가공처리해 재수출하자는 것은 아니었다. 세관의 감시가 가능한 곳이면 어디에서나 확대해서 실시하자는 것이었다. 5·16 혁명정부가 보세가공 무역을 국책으로 결정했다고 해서 전택보의 임무가 끝난 것이 아니었다. 전택보는 학자도 아니고 정치가도 아닌 실업인이었으므로, 보세가공 무역이 그의 제안에 의해 정책으로 채택되었다 해서 그 책임을 다한 게 아니라 당장 그것을 실천에 옮겨야 했다.

그는 맨 먼저 조화(造花)에 손을 댔다. 일본에서 기술자 다카하시(高橋)를 초빙하고, 천우사 6층 강당을 이용해 기술을 배울 부녀자를 모았다. 그리고 부산에 내려가서 의류공장 17곳과 계약, 일본에서 기술자 오오키(大木)를 데려와 미국에 수출하기 위해 의류 생산을 시작했다. 그 밖에도 완구 공장, 양탄자 공장도 세워 나갔다. 1970년대 초반 천우사는 의류 가공 수출만으로 한 해 500만달러를 벌어들이며 명실상부한 한국 최고 의류 제작 수출업체로 이름을 드날렸다.

그 무렵에는 수출산업에 대한 정부의 금융 세제상의 지원도 없었다. 미국에 대한 수출 실적도 없었으므로 확보해 놓은 쿼터도 없었다. 쿼터 문제 교섭차 전택보는 미국을 두 번 방문해서 미 상무부 차관보인 로보를 만나 이 문제를 놓고 교섭을 벌이기도 했다. 이 일은 전택보의 힘으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보세가공 무역만 하더라도 정부에서 이를 국책으로 채택, 여러 혜택과 지원을 아끼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날처럼 성장한 것이다. 특히 박정희 대통령이 다달이 확대무역회의를 주재했기에 수출을 토대로 한 경제 성장을 이룩할 수 있었다. 1947년 이화여자대학교 이사 취임을 비롯해서 1953년 조선일보사 대표취체역, 1957년 유네스코후원회 회장, 1961년 포플러협회 회장, 1963년 국제법학회 부회장, 1963년 한국신학대학 이사 등 각계에서 눈부신 활동을 벌였다.

전택보는 만년에 세상 사는 지혜를 이렇게 말한다.

“국가 대 국가, 민족 대 민족, 개인 대 개인의 끝없는 다툼과 경쟁 속에서 인류 역사와 문명은 발전해 왔다. 오늘날 우리나라도 적자생존의 법칙에 얽매여 있다. 초등학교 입학 때부터 대학 졸업 때까지 수많은 시험을 치르며 경쟁한다. 바늘구멍 취업문을 뚫는 데 성공해도 끝이 아니며, 일터에서도 치열한 경쟁을 해나가야 한다. 더욱이 우리나라는 외적으로 북한과 맞서고 있으며 중국·일본·러시아 등 강국들과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또 내적으로는 협소하고 각박한 국토에서 5000만 인구가 선진국 수준의 정치·경제·교육·문화의 욕망을 갖고 있기에 경쟁은 더욱 극심하다.

한국에서의 경쟁은 남을 거꾸러뜨리고 자신만 살아남겠다는 경쟁이 대부분이다. 정치인들은 국민을 잘살게 하겠다는 뚜렷한 정책 발표는커녕 그저 경쟁자를 쓰러뜨리기 위한 반대와 공격에만 급급한다. 기업인들도 국가 경제 발전에 어떻게 공헌할까를 생각하기보다 동업자를 해치는 데 열중하는 예가 많다. 그러나 오늘날은 세계가 하나가 되어가고 있으며, 우리의 활동 무대는 온 세계에 걸쳐 있다. 남을 짓눌러 없애는 경쟁이 아닌 남보다 커져서 잘살게 되고, 경쟁에서 뒤처진 무리까지 끌어안는 인의(仁義)의 경쟁이 되어야 한다.

우리의 욕망은 무엇인가. 큰 부자가 되고 싶기도 하고, 절대권력을 갖고 싶기도 하다. 큰 재산이 있으면 자신의 의식주를 해결한 뒤에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고, 큰 권력이 있다면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을 도움으로써 행복을 느끼는 게 가장 이상적일 것이다. 더욱이 우리나라같이 빈곤과 부정이 심한 나라에서 빈곤을 없애고 정의를 구현한다면 이보다 더 큰 기쁨이 어디 있겠는가. 사도 바울은 ‘내가 선한 싸움을 하고 나의 갈 길을 다 달렸다’고 말했다. 세상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승리자로서의 만족감을 가질 수 있다면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행복을 느낄 것이다.”

1980년 7월 18일 전택보는 지인들과 골프를 치던 중 갑자기 쓰러진다. 차로 근처 병원으로 옮겼으나 일흔아홉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아내와 자식들이 마지막을 지켜보지 못한 정말 뜻밖의 죽음이었기에 애석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전택보는 이런 말을 남겼다.

“이만큼 살아오는 동안 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빚을 졌다. 그 빚을 갚을 길은 내가 눈을 감을 때까지 일을 계속하는 것이다. 나는 보잘것없지만, 일생 동안 내가 가진 능력과 지식을 모두 짜내어 살아왔다. 다시 태어나더라도 내가 살아왔던 대로 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성장비화·부침야사(재벌이력서:8)
입력 1991.12.31 00:00 0 0
◎「마카오무역」 열풍… 수입품 장사 “노다지”/면사·양복지등 생필품 취급 수십배 이득/중석·화약원료등 전략물자로 대금지불/강익하·김규면·신영균등 자본축적 기반닦아정크무역이 절정을 이루던 46년 6월초. 정오께부터 인천항 부두를 서성이던 서른살 남짓한 젊은 사내는 석양을 등지고 미끄러지듯 수평선을 넘어오고 있는 배 한척을 보고 걸음을 멈추었다. 배가 항구에 가까워 광성호라는 이름이 육안에 들어오자 그 사내는 중국말로 큰 소리를 질렀다. 돛배에서도 서너명의 선원들이 손을 흔들며 중국말로 응답해 왔다. 부두에 닻을 내리자 젊은이는 배에 뛰어올라 갑판을 열어제쳤다. 콩기름 낙화생 당면 시계 사카린 빙초산 광목 양잿물 소금 등 20여종류의 물건들이 가득했다.

이 배가 바로 우리나라와 중국을 오가던 정크선 광성호. 광성호를 기다리던 젊은이는 화업무역공사라는 간판을 내걸고 정크무역에 참여한 김병환이었다. 『당시에는 수출 수입이라는 말 대신 일제시대의 이입이출이라는 말을 그대로 쓰고 있었지요. 광성호가 도착한 뒤 인천해관(지금의 인천세관)을 찾았더니 시청으로 가라고 했어요. 시청에 갔더니 다시 항만사령부로 가 보라는 거예요. 그곳엔 미군정 주재관 길버트상사가 입출항을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배가 도착했다고 알리니 그 사람이 직접 조사를 나와 아편과 무기가 있느냐고만 물었어요. 없다고 하니까「오케이」,그것으로 끝이었어요. 관세고 뭐고 물론 없었지요』 무역협회 창립이후 현재까지 비상근 이사를 지내며 경기도 부천에서 알파소닉코리아라는 전자회사를 차려 회장을 맡고 있는 김병환씨의 회고다.

관세도 없고 특별한 제약도 없었던 정크무역은 거의 10배가 남는 노다지 장사였다. 김병환씨의 증언. 『국내에서 구하기 힘든 물건들이었기 때문에 정크선이 들어왔다 하면 바로 동이 났다…』 당시 정크무역을 하면서 얼마나 이익이 남느냐를 결정한 것은 오로지 무역행정의 실권을 쥐고 있던 미 군정청 상무부 소속 거윈준위의 사인에 달렸다. 정크무역이 활기를 띠자 미 군정청은 과세를 부과하고 수입허가서를 발급했다. 서울에 주재한 거윈준위가 책임자였으므로 그에게서 얼마나 빨리 수입허가서를 받는냐에 따라 큰 돈이 왔다가다 했던 것이다. 따라서 자연스레 인천과 서울을 오가는 총알택시가 등장했고 인천­서울간 트럭운송업자들도 덩달아 큰몫을 잡았다. 인천에서 트럭운송업을 하고 있던 조중훈도 이 시기에 기반을 잡았다.

국내에 무역업을 본격 태동시킨 정크무역은 47년 3월17일 마카오에서 무역선인 페어리드호가 인천항에 입항,이른바 「마카오무역」을 전개하기 전까지 이어졌다. 국내 기업인들이 무역 열풍에 본격 휩싸이게 된 것은 바로 마카오 무역때문이었다.

마카오무역은 영국계 2천톤급 선박인 페어리드호가 인천항에 들어 온 이후 6개월여 계속된 시기의 무역을 말한다. 중국대륙이 모택동의 남진으로 어수선해지자 중국화주들은 홍콩에서 물건을 선적,우리나라로 가져오려 했다. 그러나 영국정청이 이를 허가하지 않자 홍콩서 물건을 선적한 뒤 마카오로 수출하는 양 꾸며 우회,인천항으로 입항하면서 마카오무역이라는 별명이 붙게 됐다. 이때 들어서야 비로소 국가간 제도적인 무역이 나타났다. 포르투갈령인 마카오정청은 한국으로 가는 물자에 수출승인서를 발급했던 것이다.

페어리드호와 큰 거래를 한 국내기업인은 김익통상의 강익하와 삼양무역의 김규면이었다. 처음 입항한 페어리드호는 생고무 양복지 신문용지 등 고급물품을 가득 싣고 들어왔다. 당시엔 고급품은 모두 마카오제라하여 마카오양복 마카오신사라는 말들이 나돌았다.

마카오 무역선은 우리나라에 시계 양복지 면사 모사 페니실린 사카린 등을 싣고 왔고 그대신 폭약제조용인 헤로중석과 화약원료,미군이 불하한 지프차 및 중고차의 부품을 싣고 갔다. 당시 장개석군과 모택동군간에 전쟁을 치르던 중국은 비싼 값으로 이들 전략물자를 사들였고 마카오무역선은 일본이 우리나라에 놓고 간 전략물자를 모으는 일로 재미를 보고 있었다. 국내 기업인들은 일본이 버리고 간 당시로선 하잘 것 없는 물자들을 주고 수십배 이득을 붙여 팔 수 있는 각종 생필품을 받아 잇속을 차릴 수 있었다.

마카오무역선이 싣고간 헤로중석은 지금의 대한중석 전신인 소림광업에서 흘러나온 것이고 화약원료는 한국화약 전신인 조선화약에서 유출된 것이다. 따라서 소림광업의 재고품을 불하받았던 영화물산의 신영균을 비롯,전략물자를 불하받은 국내 기업인들은 이를 계기로 재산을 축적할 수 있었고 영풍상사가 철광석을 수출해 기반을 잡은 것도 이 시기였다.

마카오무역 6개월동안 국내에 남아있던 전략물자재고는 바닥이 났다. 바깥시세를 모르고 있던 당시 국내 기업인들은 결국 6·25를 맞은 뒤에야 당시 황금을 내주고 설탕을 사 먹은 것을 깨닫게 됐다.<이종재기자>

해방전까지는 만주지방에서 무역업을 하고 있던 사람들도 거의 다 서울로 몰려들었다. 최태섭(한국유리),이한원(동아상사),서선하(삼흥실업),전택보(천우사) 등은 만주에서 서울로와 막바로 무역업을 시작했다. 만주의 봉천에서 동화공창이라는 유지공장과 무역업을 하는 삼흥상회를 경영하고 있던 최태섭씨는 일본 미쓰비시상사의 무역업까지 대행할 정도로 호황을 누렸었다. 팔로군이 만주를 장악한 45년 종업원인 중국인들의 도움으로 만주를 무사히 빠져 나와 우선 평안도 철산에서 모나자이트라는 광석을 생산,광업진흥공사에 납품하는 일을 했다. 그는 자식을 키우려면 서울로 가야한다는 생각으로 남하,서울의 중림동에 있는 고무공장을 매입,만주에서 사용한 삼흥실업 간판을 내걸었다. 그는 다시 무역업을 시작했다

서울로 올라온 기업인들은 당시에 번창하던 정크무역 마카오무역 등 거센 무역의 열풍속에서 값비싼 수업료를 내며 사업을 배웠고,또 번창시켰다. 해방후 혼란했던 서울은 기업들에게 꿈의 보금자리였고 희망의 일터였다

특히 기업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줄을 잘 잡아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고 나아가서는 적산불하,원조물자 불하,은행대출 같은 큰 이권을 챙길 수 있었다.그도 그럴것이 해방후 6·25 이전까지의 우리나라 기업인들은 자본이나 사업 경험이 보잘 것 없었던 만큼 일본이 남기고 간 귀속재산의 불하나 원조자금 배정,미 군정의 힘이 필요한 마카오무역 등 경영외적인 요인들에 의해 그 성장속도와 규모가 결정되는 기형적인 과정을 밟고 있었다. 이 때문에 경영풍토가 기업내적인 기술개발이나 창의력,경영합리화에 의존하기보다는 권력과 밀착,특혜에 집착하는 경향을 띠게 됐다.

해방이후 이만한 거금을 가진 사람은 최창학 이외에는 없었다. 그는 이 돈으로 돈놀이를 했다. 해방후 크게 휘몰아쳤던 정크무역과 마카오무역 시절 그의 돈에 의지하지 않은 기업인은 거의 없을 정도였다.

이들 기업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달러였다. 오늘날 기업인들이 땅을 찾듯 당시의 기업인들은 달러를 찾아 분주히 뛰었다. 달러가 있어야 수입이 가능했고 수입은 곧 돈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의 달러는 정부의 뒷심이 없으면 불가능했고 달러배정은 곧 특혜였다

/이 대통령 은행보유불은 직접 통제/「치부직통 코스」… 수단방법 안가려/배정불로 물자수입 또 “돈방석” 재계판도 큰 영향해외에서 물건을 사오기 위해서는 달러가 필요한데 전쟁중이던 50년대초에 달러가 흔할 리 없었다. 그래서 당시의 기업인들은 달러를 구하기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무역회사가 이용할 수 있는 달러는 직접 수출해서 벌어들인 달러 이외에 중석달러·종교달러·암달러·원조불 등이 있었다. 중석달러는 전략물자인 중석을 수출해 획득한 외화인데,이 돈은 기계류·선박·화물자동차 등 산업 부흥자재를 수입하는데만 쓸 수 있었다. 중석달러는 중석수출을 맡고 있던 대한중석이 직접 수입할 때 사용했으나 극히 제한된 무역회사에 특혜불로 배당되기도 했다.

암달러로 유통된 시중달러는 주로 주한 미군들로부터 흘러나왔는데 환율도 높고 거래량도 적어 수입자금으로는 큰 기여를 하지 못했다.

종교달러 역시 그림의 떡이었다. 종교달러는 기독교 선교·전시구호·교회사업 등을 위해 외국에서 송금된 외화로 기독교계통과 깊은 관계를 가진 무역상이 아니면 얻어쓸 수 없었다.

이밖에 원조불과 UN군 대여금 상환불이 있었다. 원조불은 전쟁 복구기에 국내 산업의 판도를 결정하는 자금이 됐다. 상환불이란 정부가 UN군에게 국내에서 사용할 돈을 원화로 대여해 주고 그 대전으로 받은 달러인데 당시 국내 부족물자를 수입하는데 긴요하게 쓰였다.

결국 달러의 대부분은 정부가 배정했고 자연히 달러를 따려는 기업인들의 로비가 성행했다. 더욱이 정부가 배정하는 달러의 환율은 지나치게 낮게 평가돼 달러를 딴다는 것 자체가 치부의 직통코스였다. 정부가 배정하는 달러로 정부가 지정하는 물자를 수입해서 국내에 풀어만 놓으면 그대로 돈방석에 앉았다. 당시의 환율이 비현실적으로 낮게 평가된 원인은 상환불이었다. 원화를 대여해 주고 달러를 받기 위해서는 낮은 환율이 유리했기 때문이다.

당시 환율문제는 그 누구도 입에 올릴 수 없었다. 달러라면 벌벌 떨던 이승만대통령에게 환율을 현실화시키자는 건의를 했다가 목이 달아난 장관이 있을 정도였다. 오랜 망명생활을 통해 가난에 이골이 난 대통령이었다. 51년 12월15일에는 은행보유불 사용에 대해 액수의 다과를 막론하고 대통령이 인가하도록 하는 규정이 만들어져 달러에 관한한 1달러라도 대통령의 결제가 필요했다. 달러에 대한 집착은 프란체스카 여사도 마찬가지였다.

해운공사를 설립하고 무역업에도 참여하다 전쟁중에 일본공사를 지낸 김용주의 회고다.

『50년 7월중순 대전방위선이 흔들릴 때였다. 대한적십자사 총재였던 이기붕이 전화를 걸어 부산시내에 부상병들이 몰려오고 있으나 약이 없어 손을 쓸 수가 없다면서 약품조달을 요청했다. 당시 주일대표부에 달러가 있을 리 없었다. 생각다 못해 한국은행 동경지점의 김진형 부총재에게 요청,동경지점의 정부보유불 1만달러를 풀기로 하고 백방으로 뛰어 약품을 구했다. 그러나 달러사용에 대한 재가가 문제였다. 의약품을 급송한 후 대통령의 재가를 기다렸으나 기다리던 대통령의 재가대신 프란체스카 여사의 전화가 걸려왔다. 누구 마음대로 정부보유불을 썼느냐는 노기 띤 추궁이었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사정얘기를 제대로 듣지도 않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경무대 안팎이 관리하는 달러를 기업인들이 사용하기는 그만큼 어려웠다. 그래서 정치권에 대한 기업인의 곡예가 시작됐다. 해방후 혼란기에 줄을 잘 잡았던 백낙승의 괴력이 발휘된 것이 이즈음이었다. 재계 판도는 곧 정부의 달러를 따느냐 못따느냐에 달려있었다. 정부가 실시한 경매에서 달러만 잡으면 돈방석에 앉았으며 그렇지 못하면 뒷전으로 밀릴 수 밖에 없었다. 해방후 대권의 향배를 가늠할 수 없던 시기에 벌어졌던 기업인들의 줄잡기 경쟁과 귀속재산 불하전이 정경유착의 1기라면 당시의 로비는 정경유착 2기인 셈이다.

재벌과 정치와의 관계는 이후 전쟁 복구기의 원조불 경쟁과 경제발전 과정에서의 차관전쟁,각종 정부주도 사업권 획득 등으로 이어져 국내 재벌사의 뚜렷한 특징으로 남는다.

한국의 기업사가 정경유착의 역사로 점철되고 재벌들이 오늘날 국민들의 따가운 시선을 받게 된 이유는 바로 여기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정치곡예의 테크닉이 기업의 흥망성쇠와 직결됐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재벌이 봉쇄적인 가족경영의 형태를 띠게 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달러를 놓고 벌어진 정치권과 기업의 관계는 급기야 국내 최초의 대형 경제사건인 중석불 사건을 낳고 말았다.<이종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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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목재인물사 | 대성목재공업(주) 전택보(全澤珤) 회장 편(65)

브라질에 합판공장 설립도 추진

설봉은 전자사업과 섬유사업 외에도 기발한 아이디어로 사업을 창출해 낸 것이 많았는데, 대리점 개설의 경우 부실기업으로 정비되기 전부터 의 대리점을 이미 하고 있었으며, 부실기업으로 정리된 이후인 1971년에는 세계3위의 대선박회사인 <가와사끼 기선 회사>의 대리점을 개설했고, <타이 인터내셔날 항공>의 대리점도 개설하였다. 그리하여 1972년에는 한국선박대리점협회 회장직도 역임했다. 해외시장개척의 선구자로 정평이 나있던 설봉은 1971년부터는 중동진출을 계획하였는데, 그 결과 1976년에는 오만에 시멘트 1만 여 톤과 타이어튜브를 처녀 수출하는데 성공하였다.

컨테이너 하치장 사업도 하였는데, 수출입화물의 하치장(container yard)과 CFS(container Freight station)의 시설 없이는 해운업과 해운대리점사업이 발전할 수 없다고 보고, 1971년에 부산에서 이 사업을 시작하였다. 이에 대하여 1971년 1월5일자 <산업경제신문>은 ‘천우사 컨테이너 화물선 취항’이란 제목으로 ‘천우사는 국내 최초로 컨테이너 선박 3척을 도입하여 서울~시애틀~로스앤젤레스 간을 매월 3회씩 운항하기 시작했다. 컨테이너 운송이란 항구에 도착한 화물을 보세구역에서 일단 모두 꺼낸 다음 일일이 수속을 밝아 개별통관하는 재래식 통관과는 달리 컨테이너 자체와 함께 그 안에 실은 화물을 목적지까지 운송한 다음 화물을 통관하는 방식을 말한다’고 보도하였다.

신용카드 사업도 하였는데, 1964년 크레딧카드(credit card)란 말조차 생소하던 때에 신용카드 사업을 시작한 것으로 미국 최대의 여행사인 <아메리칸 익스프레스(American Express)>회사의 한국 총대리점을 하였다. 이 사업이야말로 신용 하나만으로 이루어낸 사업이었는데, 이것이 오늘날의 한국신용카드 주식회사가 된 것이다.

또한 브라질에 합판공장 설립을 추진하기도 하였다. 1977년 6월18일자 <무역통신>의 기사를 보면 ‘브라질에 합판공장, 천우사서 합작 건설키로’란 제목으로 ‘천우사(대표 전택보)는 남미 아마존강 유역에 브라질과 합작으로 합판공장을 건설키로 하고 국내에서는 최초로 합판공장의 해외진출을 추진하고 있다. 천우사는 북부 브라질 아마존강 유역의 마나우스에 자본금 400만 달러, 생산능력 일산 1만2000매 규모의 합판 공장을 50:50의 비율로 현지법인으로 설립하여 내년 하반기부터 생산을 시작할 예정이라고 한다’고 보도하였다. 그러나 브라질의 합판공장 설립은 브라질 당국의 법적 규제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설봉은 탁월한 ‘아이디어 메이커’

천우사가 부실기업으로 정비된지 불과 4년만인 1975년 말 현재 ‘정상을 달리는 대기업’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발전하였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부실기업으로 정비될 당시 700명의 간부사원들과 6000여 명의 공원들이 모두 떠나가고 불과 90여 명의 간부사원들만 가지고 새출발을 했던 천우사는 이제 다시 500여 명의 간부사원과 2500여 명의 공원을 가진 대기업으로 성장한 것이다.

천우사가 이렇게 빠른 시일 내에 대기업으로 재등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겠지만, 첫째로 설봉의 신용을 꼽아야 할 것이다.   <조선일보>가 1971년 8월17일자 신문에 천우사의 재기를 ‘신용간판 전택보, 활기찾는 천우사’란 제목으로 표현한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설봉의 신용은 천우사가 재기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천우사가 이토록 빨리 재기할 수 있었던 것은 설봉이 탁월한 ‘아이디어 메이커’였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설봉은 항상 말하기를 “아이디어에서는 2등을 해서는 안된다. 항상 1등을 해야한다. 2등은 패배자일 뿐이다”라고 했는데, 그만큼 아이디어에 대해서는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었다. 설봉은 항상 기발한 아이디어로 사업을 창출해 내었는데, 전자사업의 경우 TV생산사업부문은 1967년부터 착상한 것이었다. 그 착상이 네덜란드 필립스(Phillips)사와 기술제휴를 체결하게 하였고, 1971년 8월에 이르러서는 TV 첫 생산품을 시장에 내 놓을 수 있었으며, 1972년 10월경에는 3억 원을 투입, 구로공단에 부지 1만2000평을 확보하여 건평 1500평의 공장을 짓고 진공관 TV에서 TR-TV로의 기술전환을 했다. 이때만해도 한국의 TV생산기술은 기술제휴 없이는 불가능했으므로 재력에 있어서 열세에 있던 천우사는 기술전환으로 다른 회사와 경쟁하는 길밖에 없었다. 천우사는 국내업체로서는 처음으로 TR-TV를 생산한 회사로서 TV판매량에 있어서는 ‘금성사’와 ‘대한전선’에 이어 3위로 랭크되었다. 그리고 1974년에는 이란 고성능 카세트를 시중에 내놓았고, 컬러TV 개발도 완전무결한 단계로까지 준비해 놓고 있었다.

섬유사업의 경우 설봉은 자체공장이 있어야 하겠다는 생각에서 가리봉동 수출공단 대지 위에 3층짜리 봉제공장을 짓고 수출목표를 1000만 달러로 세웠다. 공장은 12라인으로 직원수만 해도 1000명이 되었고, 섬유공장 단일공장으로는 국내 최대 규모의 공장이었다.

출처 : 한국목재신문(https://www.woodkorea.co.kr)

한국목재인물사  |   대성목재공업(주)  전택보(全澤珤) 회장 편(64)
천우사의 재기(再起)

천우사만 남기고 그 계열이 부실기업으로 무너진 지 어언 4년이 지났다. 이 4년간은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여간 복잡하고 험난한 시기가 아니었다. 이 기간 동안 있었던 사건들을 대강 열거해 보면 1969년에는 위장간첩 이수근 사건, 무장공비침투만행사건, 미해군정찰기 피추사건, KAL여객기 납북사건이 있었다.  1970년에는 와우아파트 붕괴사건, 김대중 씨 대통령 후보출마, 1971년에는 박정희 씨 7대 대통령당선, 8대 국회의원 선거, 대연각 호텔 화재가 있었다. 1972년에는 7.4남북공동성명발표, 8.3조치(모든 기업체 사채동결), 국회해산 및 비상계엄령 선포, 개헌국민투표실시, 유신헌법확정과 공표 등이 있었다. 1973년에는 제9대 국회의원선거, 통일주체 국민회의에서 박정희 씨 대통령선출, 유류파동 그리고 이듬해인 1974년에는 새해 벽두부터 박 대통령의 긴급조치1호 발표(1월 8일), 이어 2호, 3호, 4호가 계속 발표되었다.  8.15광복절 기념식에서 육영수 여사가 흉탄에 맞아 세상을 떠나는 불상사, 땅굴발견사건 등 온 국민을 경악케 하는 사건들이 끊일 줄 모르게 일어났다.

설봉은 이러한 엄청난 사건들이 회오리바람처럼 휘몰아치는 속에서도 천우사를 재건하기 위하여 처절한 노력을 계속하였다.

1973년 5월27일자 <조선일보>는 ‘유신(維新)과 8.3조치 이후의 재계’라는 제목으로 재계의 내막을 소개하는 특별시리즈에서 전자공업 등으로 사업 확장에 열을 올리는 천우사의 기사를 싣고 있다.

‘1960년대 6년 동안이나 줄곧 수출최고상을 수상하고 해외시장개척에서 한때 ‘한국의 신용’으로 통했던 전택보 씨가 부실기업정리로 대성목재 등 5개 업체를 은행에 넘겨주고 나머지 천우사만 가지고서 기업을 운영하며 차츰 옛날의 영광을 되찾아 가고 있다. 30억 원에 가까운 사채를 안고 산하업체(대성목재, 조선피역, 삼익선박, 한국축산개발, 신진완구)들을 은행관리로 넘겨주었을 때만 해도 재계는 천우사의 재기를 어려운 것으로 내다 봤다.

당시 재계에서는 전택보 씨가 사회사업가이지 결코 기업가는 될 수 없는 사람이라고 그의 사업비운을 동정하기도 하고 비웃기도 했다. 그러한 전택보 씨의 천우사가 요즈음 사업 확장에 열을 올리고 있다. 천우사는 지난 4월말, 구로동 공업단지에 건평 2500(8250㎡)평의 섬유공장과 1200(3960㎡)평의 전자제품공장의 증설을 마쳤다’고 소개했다.

출처 : 한국목재신문(https://www.woodkorea.co.kr)

조흥은행, 대성목재 윤 전무를 파면결정
조흥은행이 대성목재 전무로 근무하고 있는 윤순선 씨를 파면키로 결정했다는 소식을 들은 전택보 사장은 급히 윤순선 전무를 서울 천우사 사무실로 오게하여 윤전무와 함께 조흥은행 행장을 찾아갔다.
자기가 이렇게 된 것은 그렇다치고 자기때문에 함께 일해온 전무가 희생당하는 것을 보고는 참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성명서 발표 주모자를 윤전무로 생각하는 것은 조흥은행의 오해일 뿐이라고 설명하고 파면결정을 취소시켰다.

이에 대하여 윤순선 전무는 그당시 일을 다음과 같이 회상하였다. “수백억의 재산과 기업이 부실로 정리당해 보통사람 같으면 절망과 허탈에 빠져 있을 형편인데도 전택보 사장님은 자기의 부하직원이 파면 당하는 것을 걱정한 나머지 보기도 싫은 은행장을 만나러 가자고 내게 명령했던 것입니다.
나는 노사장의 명령을 어길 수가 없어서 사장님을 따라 조흥은행 행장실을 찾아갔습니다. 행장은 먼저 온 손님들을 대하고 있어서 우리는 약 30분동안 대기 응접실에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때 손님 두분이 대기실로 들어왔습니다. 한 분은 삼성물산 전무로 기억됩니다.
그는 전 사장님을 보더니 겸손한 태도로 ‘얼마나 심려가 되십니까?’하고 정중히 인사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전 사장님은 크게 웃으시면서 ‘나는 종교인이기 때문에 사주팔자 같은 것을 별로 본 일은 없지만, 내 운명이 70까지라 하더군요. 그런데 지금 내 나이가 70이 다되었는데도 죽지 않아요. 건강에도 아무 이상이 없고 골프도 점점 더 잘 맞아요.
그래서 사주팔자란 미신이다. 맞지 않는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번에 부실기업이 되고 보니 사주팔자가 맞는구나 싶더군요!’ 하면서 크게 웃으시던 모습…. 또 계속해서 ‘사람이 아무리 위대하다 해도 죽으면 부고 한장이면 끝인데 내 경우는 그렇지가 않단 말이요, 대성목재 부실기업의 여파는 어찌나 큰지 일주일이 지나도 신문·잡지 등에서 부고가 계속되고 있으니 이렇게 굉장한 부고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 이렇게 담소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또 들어온 다른 손님들과 이야기하는 중에 ‘내 나이 70이 되어도 죽지 않는 것을 보니 아마 80까지는 더 일하라는 것 같아요. 앞으로 10년은 틀림없이 더 살겁니다. 더 힘차게 일해야지요’하면서 당당한 표정을 짓고 계셨던 것입니다.”

출처 : 한국목재신문(https://www.woodkorea.co.kr)

막내아들 순재는 집 한 채도 없어
1969년 6월24일, 전택보 씨의 대성목재 등 5개 업체가 부실기업으로 처리될 때 설봉은 이미 70세의 노인, 보통사람 같으면 까무라쳐 넘어지거나 아주 인생을 포기하고 말았을 것이다. 사실 정부의 이러한 처사는 이미 70노구가 된 설봉에 대해 너무 가혹한 처사였다.

그 때 항간에는 정부 당국이 천우사 계열 5개 업체를 부실기업으로 처리한 것은 사업이 부실해서 뿐만 아니라 전택보 사장이 외국차관을 들여와 사업에는 안 쓰고 고리채 놀이를 했기 때문이고, 막대한 재산을 외국으로 빼돌렸다는 풍설이 떠돌았는데,
설봉은 이 풍설을 듣고 박정희 대통령에게 “이러이러한 사실을 박대통령께서도 인정하고 계시는 모양인데 사실 그러한 일이 있었는지의 여부를 조사해 주십시요”라는 내용의 서한을 보냈던 것이다.

그 뒤 정부 측에서는 실제로  조사를 해 보았던 모양인데 전택보 씨의 막내아들 순재는 집 한 채도 장만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는 이러한 소문은 전연 사실이 아닌 중상모략임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설봉은 박 대통령에게 ‘한국축산개발’만은 돌려달라고 요청을 했다.
“한국축산개발은 제가 꿈과 애착을 가지고 일으킨 사업일뿐 아니라 개인의 이익보다 나라의 이익을 위해 온갖 정성을 다해 이루어 놓은 사업이니 한국축산개발만은 돌려주십시요”라고 요청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축산개발은 전택보가 아니면 못한단 말인가”라고 하면서 일언지하에 거절했다는 것이었다.

당시 대성목재 전무로 있었던 윤순선 씨의 말에 의하면 대성목재가 부실기업으로 처리되자 5600여명의 직원들은 “대성목재가 왜 부실기업체냐? 우리끼리 10억을 증자하여 대성목재를 인수하겠다”면서 성명서를 발표하는 동시에 증자위원회를 조직했다고 한다.
그러자 관리은행인 조흥은행은 아무래도 전무인 윤순선 씨가 주모자일 것임으로 그 주모자인 윤순선 씨를 파면키로 결정했다고 통보해 왔다고 한다. 그 때가 1969년 8월 어느날이었고 그러니까 부실기업으로 처리된지는 약 2개월 뒤였다고 한다. 이 사실을 들은 전택보 사장은 걱정이 되었다.

자기가 당한 것은 관계없으나 자기 때문에 함께 일하던 전무가 주모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주모자로 몰려 파면 당하는 것을 보고는 침묵을 지킬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설봉은 급히 윤 전무와 함께 조흥은행 행장을 찾아갔다.

출처 : 한국목재신문(https://www.woodkorea.co.kr)

대성목재 전 직원들 “우리가 맡겠다”

대성목재가 부실기업으로 정리된 사실이 발표되자 가장 충격을 받은 것은 당사자인 대성목재의 직원들이었다.
대성목재의 5600여명의 직원과 공원들은 대성목재가 부실기업으로 정리되는 것을 반대하는 성명서를 6월27일자 신문에 냈다.

신문지 절반 크기의 대대적인 것이었는데 그 내용도 너무 절실하고 대담한 것이어서 어느 신문사는 이 막대한 광고비를 종업원들이 어떻게 낼 수 있겠느냐면서 선뜻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고 한다. 사태가 이쯤 되자 각 신문들은 이를 크게 보도했다.

6월29일자 <주간조선>은 ‘부실기업체의 충실한 종업원 궐기’라는 제호로 특집보도를 하기도 했다. ‘40만 인천시민의 10% 가까이 되는 사람의 입을 먹여살렸고, 월급이 하루 늦고 이른데 따라 인천시민의 물가에 영향을 끼치는 대성목재주식회사가 당국에 의해 부실기업체로 단정돼 관리은행에 인수처리될 운명에 놓였다’로 시작해 대성목재의 실정과 종업원들의 성명서 내용을 예리하게 분석 보도했다.

대성목재가 이처럼 부실기업체라는 보도는 일반 국민들로서는 그 부실의 자세한 내용을 이해할 수도 없고 또 당국이 한 일이니까 이건 정책적인 문제라고 만 이해하고 있었다. 다만 대성목재를 살리려는 5600여 명에 달하는 종업원들의 자세가 대단하다는 것이다.

대성목재가 딴 사람에게 넘어간다할지라도 일은 계속될 것이고 따라서 대부분의 종업원들도 그대로 있게 될 텐데, 그렇다면 무엇때문에 종업원들이 이처럼 어려운 일을 자청하고 나선 것일까?

이 어려운 일이란 부실기업체로 단정된데 대한 그들의 공식반응에서 나타나고 있다. 그래서 이 성명서의 골자를 나열해 보면 △우리들은 이 회사의 각 분야에서 일하고 있음으로 이 회사가 부실기업체인가 아닌가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이번 정부 결정에 대해서는 정부의 권위를 위해 그 결정을 번복하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우리가 알고 믿기에는 대성목재가 부실업체가 아닌 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이 업체는 타인에게 처분될 수 없고 우리 5600명 전체 종업원들이 인수할 것을 선언한다. △우리들은 비장한 각오와 결심으로 각자의 전 재산을 바쳐 일금 10여억 원을 갹출하기로 결의했다고 돼 있다.

출처 : 한국목재신문(https://www.woodkorea.co.kr)

정치바람 타기 싫어하는 기업인

이 밖에도 거의 모든 신문들이 사설란에서 이 문제를 다루면서 천우사(대성목재의 모체)를 동정했는데,
6월26일자 <서울경제신문>은 ‘새로운 기업관, 성실해야 발전할 수 있는 환경의 조성’이란 제하의 사설에서 “전택보 씨는 국가와 은행에 미안한 마음을 금할 길 없음을 피력한 바 있다.
이 비운의 기업인이 이 나라 무역증진에 이바지한 과거를 회상하며 천우사의 앞날을 축복해야 할 것이다. 그가 남긴 쓰라린 교훈이 이 나라 산업계에 새 기풍을 진작시키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했고, 같은 날자 <조선일보>는 ‘정치 모르는 전택보 씨에 동정’이란 제하에 “전택보 씨의 대성목재 등 5개 업체가 주 채권자인 조흥은행으로 넘어간다는 발표가 있자 경제계 인사들은 가슴아픈 일이라고 동정어린 한마디씩을 했다.
전 씨에게 동정이 집중된 까닭은 그가 정치바람을 타기 싫어하는 기업인이었다는 점과 우리나라 보세 가공업의 선구자였다는 데에 있는 듯 했다. 전 씨는 조화, 완구 등 보세가공의 각 분야에 거의 손 안댄 곳이 없으며 가공수출분야를 리드해 왔다.

이러한 새 분야의 개척, 확장에 주력했기 때문에 다른 사업에는 관심을 둘 수가 없어 해체를 당하는 쓰라림을 맛보게 된 것이라고, 특히 전씨가 덴마크 명예총영사를 비롯한 많은 국제 단체의 임원을 겸하고 있는데, 한국경제인의 국제적 위상이 내려갈지도 모른다고 몹시 걱정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했다.

적힌 글은 짧으나 매우 의미 심장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6월27일자 <현대 경제일보>는 ‘천우사 계열 5개 업체의 정비가 뜻하는 것’이라는 제목으로, 6월28일자 <서울경제신문>은 ‘영광 사라진 비운의 전택보 씨, 수출의 개척자 끝내 정비 당해’라는 제목으로 이 문제를 다루었으며 아울러 천우사의 역사와 업적과 함께 이 사건의 언저리를 파헤쳐 놓았다.

이 밖에도 이에 관한 많은 기사들이 있는데 그 중에는 ‘비운의 수출왕 전택보 씨’, ‘전경련, 정부의 천우사 정비 방안에 맞서 정면 반발’등 자극적인 표현의 기사제목들을 여러군데서 찾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부실기업의 정리 사실이 발표되자 가장 충격을 받은 것은 무엇보다도 당사자인 천우사계열 5개 업체의 직원들이었다.

글/ 김상혁  shkim@woodkorea.co.kr

출처 : 한국목재신문(https://www.woodkorea.co.kr)

국내 모든 신문들은 이 사실을 경제란 또는 사설란에 10여 일간 대서특필 했다. 한편 전경련(전국경제인연합회)은 그 해 6월26일 긴급이사회를 소집, 연 이틀간의 긴급대책위원회를 열고 부실기업문제에 대한 건의서를 채택해 정부당국에 제출했다.

그 건의서의 내용은 ①민간 상업차관에 대한 투자에 있어 정부의 ‘지불보증제도’를 지양하고 ②부실기업정비반에는 당해 기업주 및 경제분야의 권위자를 참여토록 개편하고 ③갱생이 가능한 기업에는 일정기간의 여유를 줘야 할 것이며 ④부실기업 정리기준을 자본구성 비율에만 치우칠 것이 아니라 산업성, 전망, 국제경쟁력, 대외신용도에 중점을 둬야 한다고 돼 있다.

제②항에 부실기업정비반에 당해 기업주를 참여시켜야 한다는 말은 천우사의 경우 사전에 아무런 예고도 없이 일방적으로 집행했다는 말이며 제④항에 자본구성비율에 치울칠 것이 아니라는 말은 천우사(대성목재의 모체)가 부채를 많이 진것은 사실이나 산업성, 전망, 국제경쟁력, 대외신용도가 있어왔는데 어찌 자본구성비율 그것만이 부실기업의 조건이 될 수 있겠냐는 말이기도 했다.

<중앙일보>는 소집 이틀 후인 6월28일자 신문에 ‘아이러니한 천우사계열 정비, 전경련이 호신운동’이란 제하에 ‘국내 굴지의 기업인 천우사계열 5개 업체가 부실기업체로 몰려 주 채권자인 조흥은행으로 넘어가는 비운을 맞게 되자 전령련이 긴급사후대책을 논의하는 등 비상사태에 돌입한 느낌’이라고 보도했다.

<동아일보>는 ‘부실기업과 부실경제’라는 사설을 통해 ‘자본구성이 부실하지 않은 기업은 천우사 외에 얼마나 될 것인가? 부실기업의 발생은 기업인에게도 문제가 있지만 따지고 보면 정부당국에 더 큰 잘못이 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부실기업정리정책이 객관적기준에 의해 일정한 원칙이 있어야 하는데 그 대상과 범위가 어떠한 기준에 의해 결정되는 것인지 도무지 알려지지 않고 있다’고 논평했다.

글/ 김상혁  shkim@woodkorea.co.kr

출처 : 한국목재신문(https://www.woodkorea.co.kr)

비운의 수출왕, 마침내 부실기업으로 정비돼
설봉은 그날(1969년 6월24일) 집에 돌아와 밤을 꼬박 뜬 눈으로 지새야 했다. 이튿날 아침, 그제야 비로소 자세한 정비 내용을 알 수 있었다. 이 날 국내 7대 일간 신문들은 일제히 이 내용을 크게 보도했는데 그 중 <한국일보>에 개제된 기사 내용을 보면, ‘천우사계열 대성목재 등 6개 업체 정비… 부채늘고 상환어려워, 청와대 내에 설치돼어 있는 부실기업체 정비반(반장 장덕진 씨: 재무부 이재국장)은 6월24일 오전, 전택보 씨가 소유하고 있는 대성목재, 조선피혁, 한국축산, 삼익선박, 신진완구 등 6개 업체의 정비방안을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 확정했다.
이날 공화당 정책위원장 백남억 씨, 부총리겸 경제기획원장 김학열 씨, 재무부장관 황종율 씨, 상공부 장관 김정열 씨, 청와대비서실장 이후락 씨 등이 배석한 가운데 확정된 천우사 계열 정비방안은

1)6개 업체 중 천우사를 제외한 5개업체는 주 채권자인 조흥은행이 인수하여 정리 처분하고, 전택보 씨로 부터 완전히 인연을 끊게 하는 동시에
2)천우사는 전택보 씨 소유로 그대로 존속시키며 종합무역상사로 육성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당시 대성목재는 자산규모가 108억, 천우사는 18억, 조선피혁은 19억, 한국축산은 3억, 삼익선박은 6억, 신진완구는 1억 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날 전택보 씨 계열 6개 업체의 정비 방안을 승인하는 자리에서
“1)기업은 자기 자본 조달 능력이 있는 사람이 해야하며 과거와 같이 사채를 쓰더라도 공장만 지어 놓으면 돈을 벌 수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2)그 기업이 잘못되면 그 기업체가 망할 뿐 아니라 그 기업인도 함께 책임지는 기업윤리의 확립이 소망된다.”
고 말했다.

6월25일자에 보도된 기사내용은 각 신문이 거의 같았으나 유독 <경향신문>만은 기사 외에 ‘기자석’이라는 코너에 ‘2개월전까지만 해도 1000만 달러의 현금차관을 들여올 만큼 건전기업인으로 알려진 전택보 씨가 20년간 길러온 대성목재 등 5개 업체를 내놓게 된 데 대해 일부 업계에서는 ‘가혹하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지만, 자기자본 4억7000만원으로 162억원의 대기업을 굴려 왔다는 것이 오히려 불가사의 하다는게 중론’이라고 논평했다.
글/ 김상혁  shkim@woodkorea.co.kr

출처 : 한국목재신문(https://www.woodkorea.co.kr)

한국목재인물사  |   대성목재공업(주)  전택보(全澤珤) 회장 편(50)
청천벽력 같은 뉴스, 부실기업정비

1969년 6월24일, 그날도 설봉은 예전과 다름없이 아침 일찍 일어나 산책을 하고 소공동에 있는 천우사(대성목재의 모체) 사무실로 나갔다. 책상에 앉아 내일이 바로 6·25라는 생각이 들면서 19년전 그날에 있었던 일들, 부산 피난시절, 민족의 수난과 경제파탄에 얽힌 쓰라린 일들을 주마등처럼 되새기며 과거를 회상하고 있었다.
그리고 설봉은 앞으로 천우사가 할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고 있엇다.
이제 천우사가 은행관리로 넘어간지도 어느덧 반년이란 세월이 지났다. 그동안 부끄럽기도 했고, 부자유스럽기도 했고, 또 유능한 사원들이 하나 둘 자기 곁을 떠날 때면 낙심하여 괴로울 때도 한 두번이 아니었으나, 그래도 1000만 달러의 외국차관을 얻어다가 30여 억원의 사채를 은행부채로 대치시키게 되었고 다년간 질질 끌려오며 숙제로 남아 있던 P.L480 잉여농산물 수입물자도 불원간 도착하게 되어 있는 것은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었다.

이런 생각을 하던 설봉은 “천우사의 장래도 반드시 어둡지 많은 않구먼! 한 달에 근 1억원의 사채이자를 꼬박 꼬박 물어야 했는데 이제 이것도 해결되었고, 이제 모든 사원이 한데 뭉쳐 힘써 일하면 회사운영은 다시 호전될 수 있으리라.

그리고 한창 공사 중에 있는 대성목재의 월미도 공장만 완공된다면 거기서 연간 10억여원의 순이익은 어렵지 않게 날 것이고 이렇게만 된다면 적어도 5년 내에 모든 것을 정리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 이르러서는 가슴이 뜨거워 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그날 정오쯤 사무실에 전화가 걸려왔다. 친구인 김성곤 씨로부터 걸려온 전화였다. 전화를 건네받은 설봉은 김성곤 씨의 음성이 심상치가 않음을 직감했다.

그의 목소리는 매우 심각했다. 그 내용인즉슨, 이날 상오 청와대에서 박정희 대통령 주재로 부실업체정비 관계관 회의가 열렸는데 이때, 장덕진 씨(당시 재무부 이재국장)가 제출한 천우사 계열에 대한 정비방안이 승인되었다는 것이었다. 이 전화를 받은 설봉은 눈앞이 캄캄해지고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이 소리는 바로 천우사와 모든 방계업체가 부실기업으로 정비된다는 폭탄선언이었다.
“무슨 소니냐? 우리회사가 하루 아침에 무너져 내린단 말인가!” 정말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글/ 김상혁 shkim@woodkorea.co.kr

출처 : 한국목재신문(https://www.woodkorea.co.kr)

한국목재인물사  |   대성목재공업(주) 전택보(全澤珤) 회장 편 (47)

1968년. 그 해 여름을 설봉은 무겁고 우울한 마음으로 보내야 했다. 그 해는 극심한 가뭄으로 국민전체가 일기예보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는데다가 설봉은 개인적으로 사업상 여러가지로 어려운 문제들이 산적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업상의 문제들은 잘 풀리지 않은 채 여름은 지나가고 가을이 찾아왔다. 설봉에게는 이 가을이 유난히도 슬쓸하게 느껴졌다.

설봉이 잠을 잘 이룰 수가 없어 뜬 눈으로 누워있노라면 자그마한 정원 구석에서 찌르륵대는 귀뚜라미 소리가 그의 마음을 더욱 처량하게 만들었다.
바람소리와 함께 우수수 떨어지는 낙엽소리도 설봉으로 하여금 잠을 못 이루게 했고 ‘나도 이제 많이 늙었구나’하는 생각에 잠기게 하였다. ‘농민들은 몸에 씨를 뿌리고 여름에 김매어 가을에 거두어 들인 것을 겨울에 꺼내먹으면서 인생을 즐기겠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무엇으로 인생을 즐길 수 있단 말인가? 혹시 내가 바로 그런 부류의 사람이 아닐까? 젊었을 때의 이상도 꿈도 이제는 다 사라져 버린 그런 사람은 아닐까?’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설봉은 자기 자신과 지난 날들을 돌이켜 보며 잠을 잘 이루지 못했다.
하지만 설봉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자기의 삶은 조금이라도 남에게 보탬이 돼 주려고 노력했던 삶이었지 결코 자신의 출세나 치부만을 위해 살아온 삶은 아니었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사는 것이 사람답게 사는 것이지 자기 혼자만 잘 살고 제 욕심만 채우려고 한다면 부끄러운 삶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도 해 보았다.

그리고 그는 ‘오늘 날과 같이 사회가 공동체화 돼 가는 세상에 있어서는 개인주의는 용납될 수 없다. 아무리 자유경제체제라 할 지라도 개개인이 제멋대로 벌어 멋대로 쓰라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인생관도 이제는 많이 달라져야 할 것이다’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런데 천우사의 형편은 10월에 접어들면서 더욱 어려워졌다. 재정난이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오랫동안의 사채부담으로 영업이익은 거의 이자로 지불해야 했고 최근에 이르러서는 영업실적마저 부진하여 이자에 이자가 붙어 사업유지를 아주 어렵게 만들었다.

1968년 12월, 마침내 천우사는 은행관리회사가 되고 말았다. 은행관리란 어찌보면 특혜조치다.
왜냐하면 정부당국이 몇가지 이유를 들어 은행으로 하여금 그 기업의 부채를 맡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천우사의 경우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주어졌다.

첫째, 천우사는 다년간 가장 많은 수출실적을 올린 회사로서 국제적 신용도에 있어서도 무시 못할 존재임으로 이를 붙들어 줘야 한다. 둘째, 천우사는 한 고비만 넘기면 다시 살아나서 수출진흥에 공헌을 할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이것은 하나의 특혜조치가 틀림없었다. 그러나 설봉은 마음이 아팠다. 이렇게 정부의 혜택을 받는다는 것이 자기의 신념과 자존심을 무너뜨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때 설봉은 “나라는 존재는 없어지고 마는 것만 같았다. 돌이켜 생각하면 이것이 내 운명이요, 팔자가 아닌가 한다”고 탄식하며 은행관리사가 된것을 몹시 가슴아파 했다.

출처 : 한국목재신문(https://www.woodkorea.co.kr)

1947년에 무역회사 천우사를 설립하여 경영하였다. 이후 대성목재공업주식회사·조선피혁주식회사를 인수하기도 했다.

전쟁은 파괴를 의미한다. 남한은 무에서 출발했다.

그랬더니 朴장관께서 ‘그거 내가 만든 것 아니야. 허정 (許政) 과도정부 때 상공부장관하던 전택보 (全澤珤.작고) 씨 알지. 천우사 사장 말이야. 그 양반이 제일 먼저 사용했어. 들어보니까 좋은 것같아 내가 쓴 거지’ 라고 대답하더군요. ” 이 무렵 朴대통령의 수출에 대한 인식을 보여주는 일화 한토막. 어느 날 朴장관은 朴대통령의 지방순시에 동행했다가 기차안에서 느닷없는 질문을 받았다.

“朴장관, 우리나라 옛말에 사농공상 (士農工商) 이라는 말이 있지 않소. 내가 보기에 우리나라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상공농사’ 가 돼야 할 것같아. 朴장관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 당황한 朴장관은 얼떨결에 “각하, ‘상’ 이 ‘공’ 보다 앞서야 한다구요” 하고 되물으며 잠시 생각을 가다듬은 다음 “제 생각에는 ‘공상농사’ 가 더 맞을 것같은데요” 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朴대통령은 “물건만 만들면 뭣해요. 팔지 못하면 아무리 많이 만들어도 소용없어요. 수출이 제일이야” 라고 설명했다.

전택보(1901~1980) 보세가공무역

1967년은 박정희 정권의 제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 시작되는 해였다.제1차 경제개발계획도 무역정책에 중점을 두었었지만, 제2차 경제계발계획의 무역정책특색도 첫째는 수출 제1주의의 지속, 둘째는 무역자유화 정책의 촉구, 셋째는 수출 진흥정책의 다양화였다.수출 제1주의의 제3공화국정부는 제2차 계획초년도인 1967년의 수출목표를 3억6천만달러로 책정하였다.
그런데 그해 천우사(사장 전택보)는 1513만 달러의 수출실적을 올려 65년, 66년에 이어 67년에도 또다시 훈장을 탔다. 3년 연속 훈장을 타게 된 설봉은 <천우사 사내보 12월호>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는데 이 글에서 그가 얼마나 보람을 느끼며 흐뭇해하였는지를 엿볼 수 있다.

“금년에도 총 수출액 3억6천만 달러의 정부 목표 중에 합판이 4200만 달러, 피목 및 기타 보세가공품이 3000만 달러, 스웨터가 2500만 달러, 도합 1억 달러에 해당하는 품목이 모두 우리가 개척한 상품들의 수출실적입니다.그 중에서도 자랑스러운 것은 합판수출이었습니다. 처음에는 클레임을 받기도 하는 등 수출에 애로가 많았었으나 차차 품질을 인정받기 시작하면서 수출량이 늘어난 합판수출. 천우사는 대성목재 합판수출 덕분에 1963년 제1회 수출의 날에는 전국 수출업체 중에서 1위를 기록할 수 있었고, 64년 2위를 제외하고는 65년, 66년, 67년 연달아 수출실적순위에서 1위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의 이러한 감회는 그가 평소 주장했던 보세가공과 자신이 직접 개척한 합판수출이 수출진흥에 큰 역할을 한 것에 대한 자부심이기도 하였다.

설봉은 보세가공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설봉이 보세가공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게된 것은 6·25 전란후 수복된 서울에서 수많은 실업자들이 방황하고 있는 것을 본 이후였다.

전쟁으로 생명을 잃은 사람이야 어쩔 수 없다치더라도 살아남은 사람들조차 앞으로 살아갈 길이 막막하게 느껴질 정도로 수복된 수도 서울의 모습은 참담했다.
거리에는 수많은 실업자들이 우글거렸고 전쟁미망인, 고아들은 이리저리 방황하고 있었다. 신문지상에는 연일 생활고로 인한 일가족 집단 자살, 강도, 살인, 사기 등의 사회악 기사가 가득차 있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국민은 극심한 빈곤 때문에 살기가 어려웠고 돈있는 사람들은 그들대로 불안감때문에 하루하루를 떨면서 살아가는 무서운 세상이었다.

세상형편이 이렇게 돌아가는 것을 본 설봉은 우리나라가 잘 살 수 있는 좋은 방법이 없을까 곰곰히 생각하게 됐다. 우리나라는 자원도 없고 변변한 기술도 없다. 약간의 생산시설마져도 6·25전란으로 잿더미 속에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나 아직도 사람은 많다. 그 노동력을 잘만 활용하면 활로가 트일 것이다. 생각이 여기까지에 이르자 설봉은 우리나라가 살길은 보세가공뿐이라고 느끼게 됐다. 지하자원개발이니 수산자원개발이니 개발 대상이 많겠지만 인적자원을 어떻게 개발하느냐가 우선과제이다. 북한 피난민들의 대거 월남, 거기에 인구의 자연증가는 거대한 인적자원을 구성하고 있으나 이 자원을 개방하지 못하고 있다. 이 많은 사람을 잘 활용하면 선진 제국과 경쟁해 이길 수 있다. 공장을 세워놓고도 노동자가 없어서 쩔쩔매는 나라의 기업인이 본다면 부러워할만큼 우리에게는 노동력이 풍부하다. 이 노동력을 이용 못한다는 것은 기업인의 역량부족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저렴한 노동력을 이용해 수공업, 가내공업으로 중소기업을 급속히 발전시키는 것이 적은 자본을 가진 우리가 조속한 시일 내에 실업자를 구제하고 국제수지를 개선시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전제하고 나서 그는 일본과 홍콩으로부터 기술을 도입해서 섬유제품, 2차가공품, 부품생산공장의 설치를 해야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그밖에도 크리스마스 장식업, 조화, 가발, 농구화, 메리야스, 양말, 수예품 등 할일이 얼마든지 있다고 역설했다. 우리국민이 공것을 바라지 말고 우리의 힘으로 우리의 경제난을 타개해 보겠다는 굳은 결의를 가지고 노력한다면 수년내에 억대의 외화를 벌것이 틀림없다고 외쳤다.

그리하여 설봉은 그당시 상공부장관, 재무부장관과 논의해 가칭 ‘가공무역추진위원회’라는 단체를 발기시켰다. 이 위원회의 취지는 우리나라에 없는 원료를 외국에서 도입해 이것을 가공해 수출하는 업체를 돕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합판사업/대성목재

대성목재공업은 일제강점기였던 지난 1936년 조선목재로 출발, 1945년 해방과 함께 손병도씨에게 경영권이 넘어갔다가 1955년 천우사를 새 주인으로 맞은 후 1960년대 합판 1억달러 수출을 주도했다.1936년 조선목재공업로 시작해 86년 동안 인천 향토기업으로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대성목재공업이 동화기업에 흡수합병된다.

1936년 인천 만석동에 “조선목재 공업주식회사”라는 제재소 자리에, 1942년 “대성목재공업주식회사”라는 합판공장을 만든 것이 오늘날의 대형합판공장이 된 것의 효시라고 할 수 있다.

대성목재 공업주식회사는 초창기 소규모의 합판공장으로서 콩풀을 사용해서 합판을 만들다가 60년 일산 10,000매 공장으로 늘리고 61년 천우사 전택보씨가 인수하면서부터 일산 42,000매 규모의 큰 합판공장이 되었고, 65년에는 최초로 필리핀에 주재원을 파견하기도 했다.

당시에는 필리핀에서 주로 원목을 구입하였는데, 오늘날 우리가 상상하기에는 힘들은 직경 1m정도 되는 불그스레한 라왕원목이 한 달에 4배씩이나 인천 앞바다에 들어오곤 하였다.그 때는 내노라 하는 종합상사도 없었고, 서울상대 출신들이 은행보다 천우사라는 무역회사를 더 선호하는 시절이었는데, 천우사에 입사한 엘리트들이 대성목재에 근무하였던 것이다.

필리핀을 필두로 해서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에 주재원을 파견하기 시작하였고 모두 서울 상대 출신들이 주재원으로 나가는 게, 통상화 되다시피 했다. 그 때는 외국에 나가기도 힘들은 시절이었고, 주재원으로 나가는 것이 영광이기도 한 시절이었다. 대성목재는 근로자가 3,500여명이었는데, 대성목재 월급날이면 인천시내가 술렁이고, 술집, 음식점들이 좋아하던 시절이었다. 65~66년 당시 3,500여명 이면, 90년대초 삼익악기, 영창악기 등이 5,000명인 것과는 대조가 안 되는 것이었다.

전택보 회장 대성목재 월미공장 건설
당시 대성목재에 일반공으로 취직하려면, 브로커에게 일만원씩 주고 취직을 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당시 종업원 월급이 삼만원 정도 할 때이니 알만도 하지 않은가. 당시에는 미국이 엄청난 양의 합판을 수입하였는데 필리핀, 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는 원재료는 있으나, 합판공업을 할 만한 수준이 아니었으므로 비교적 원재료 국가와 거리가 가까운 일본, 한국, 대만 등에 합판공업을 육성시켜, 합판을 만들게 하고, 자기들은 그 합판을 수입해 갔던 것이다.

합판공업이 육성될려면, 그 주위공업도 같이 발달되어야만 한다, 예를 들면, 수지공업, 샌드페이퍼공업, 나이프공업 등등, 당시 일본은 합판기계공업도 함께 육성되어, 우리나라 합판공장의 기계들은 거의 일본에서 수입되었다. 66년에는 일본은 올림픽을 개최하였고, 당시 동경에는 지하철이 동서남북으로 빽빽히 있었던 시절이었다. 합판산업이 한창 잘 될 무렵인 66년~68년 무렵인 것 같다. 당시 대성목재는 천우사의 전택보씨가 운영하고 있었는데, 미국에서 주문량이 폭주하자, 일산42,000매 규모의 만석동 공장으로서는 감당하기가 힘들게 되었고, 이렇게 돈벌이가 잘 되고, 국가산업에도 보탬이 되는 사업이 어디 있느냐고 정부에 건의하여 월미도에 일산 55,000매 규모의 합판공장을 차관을 받아서 건설하게 된다.

건설이 거의 완료되어가는 시점인 69年에 미국은 점차 주문량을 줄이기 시작하였고, 전사장은 차관 이자에 허덕이게 되었다. 정부에서는 장덕진씨(후일 농림부장관)를 팀장으로 하는 부실기업정리팀을 만들어, 대성목재를 조흥은행 관리업체로 만들고, 군부팀인 황필주 사장을 영입하여 운영하게끔 하였다. 그 후로 전택보 회장은 합판산업에서 손을 띄게 된다.

출처 : 한국목재신문(https://www.woodkorea.co.kr)

고도성장기 부산 합판산업의 성장과 쇠퇴(1960-1980)

합판은 한국에서 6.25전쟁 후의 복구수요를 기반으로 성장하였다. 그리고 1950년대 중·후반에는 유엔군의 군납수요도 합판산업의 성장에 자극을 주었다. 군납을 통해 품질을 인정받은 한국합판은 1961년부터 미국시장에 수출을 하기 시작하였다. 마침 인건비의 상승과 공해우려로 일본이 합판수출에서 철수하는 시기와 맞물리면서 한국의 합판산업은 1960년대 중반 이후 급속한 성장을 하였다. 1970년대에는 세계 5위의 합판생산국에 세계 1위의 합판수출국이 되었다. 합판산업의 중심은 부산이었다. 1960년대 중반부터 부산은 한국 최대의 합판도시가 되었다. 그리고 세계적인 합판도시가 되었다. 합판이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절 부산은 한국산업의 중심도시였다. 한때 한국수출의 29.2%의 수출을 담당하던 도시가 부산이었다. 여기에는 합판이 절대적인 역할을 하였다. 1970년대 부산에는 당시 세계최대의 합판기업이었던 동명목재를 비롯하여 6개의 대규모 수출합판업체들이 있었는데, 이들 기업은 한국합판생산의 절반을 상회하는 생산을 하였다. 그리고 1970년 동명목재의 생산량은 우리나라 전체 합판생산량의 31.2%를 차지하였다.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 중반까지는 이른바 합판의 시대였고, 부산의 시대였고 또 동명의 시대였다. 그러나 우리나라 합판산업의 성장기반은 취약하였다. 원목의 도입이 안정적으로 이루어져야 했고 저임금이 유지되어야 하는 구조였다. 그런 조건 속에서도 실제로 수익을 내기는 어려웠다. 생산가에서 차지하는 원재료의 비중이 너무 높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한계를 넘어서게 한 것은 정부의 각종 지원이었다. 각종 수출지원으로 합판기업들은 흑자를 볼 수 있었고 성장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외화가득률은 낮았다. 1970년대 말까지 합판은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그러나 제1차 석유파동 이후 등장하기 시작한 자원민족주의로 인해 원목의 구입이 어려워지면서 한국 합판산업은 위기에 직면하였다. 합판가격보다 빠르게 오르는 원목가격과 함께 수출길이 막히면서 합판산업은 위기에 빠져들었다. 마침내 1980년 세계 최대의 합판기업 동명목재가 도산을 하였고 잇달아 기업들이 쓰러졌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에 의한 합판산업의 구조조정이 시행되었다. 동명목재에 이어 부산에서는 태창목재, 반도목재, 광명목재, 대명목재가 퇴출되었다. 6개의 합판수출대기업 가운데 성창기업만이 부산에서 살아남았다. 일반적으로 과잉설비의 정리가 지역별로 균등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관례라고 보면 부산기업들의 집중 퇴출은 이례적인 것이었다. 합판산업의 구조조정 이후 우리나라 합판산업의 중심은 부산에서 인천으로 이동하였다.

합병 후 존속회사는 동화기업이고 대성목재공업은 소멸해 ‘대성목재공업’ 간판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됐다.동화기업은 대성목재공업을 흡수합병한다는 내용의 공시를 지난주 실시했다고 12일 밝혔다. 합병 목적은 경영효율성 증대 및 사업 경쟁력 강화를 통한 기업가치, 주주가치 제고다. 합병기일은 2022년 12월1일이다.

동화기업과 대성목재공업의 합병비율은 1대 0이다. 합병법인인 동화기업은 피합병법인인 대성목재공업의 주식을 100% 소유하고 있으며, 합병 시 합병법인은 피합병법인의 주식에 대해 신주를 발행하지 않으므로 합병비율을 1대 0으로 산출했다는 설명이다.

1960년대 중반 이후에는 수출길이 막히면서 수요부족과 설비과잉으로 침체의 늪에 빠져들기 시작해 1968년 조흥은행 주도의 은행관리를 거쳐 1973년 신동아, 1978년 효성그룹으로 사주가 변경된다.

이후 지난 1986년에는 산업합리화 업체로 지정되면서 유원건설과 인연을 맺어 재기의 가능성을 보였으나 1990년대 들어 지급보증을 섰던 모기업이 경영난에 처하면서 1995년에는 경영권이 다시 한보그룹으로 넘어간다. 이후 한보사태가 벌어져 2000년 동화기업이 인수, 창업 이래 사주가 무려 9번 바뀌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한편, 대성목재공업을 흡수합병한 동화기업은 1948년 서울 왕십리에서 제재소를 연 뒤 1960년대 말 인천지역에 36만평 규모 한국제재공업단지를 조성하며 국내 목재산업 발전의 발판을 제공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대성목재공업을 인수하면서 국내 1위 목재기업으로 발돋움했다.

출처 : 인천일보(https://www.inche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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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그해 <한국일보>에 게재한 ‘나의 이력서’란 글에서는 그 당시를 회고하며 “당시 대미 합판수출량은 일본이 제일 많았고 그 다음이 대만이었다. 그러나 대성목재가 합판수출을 개척한 이래 한국의 합판수출은 점점 늘어나 오늘에 와서는 원목 한 톨도 안나는 한국이 합판수출 세계1위국가로 성장하게 되었다.그 후 대성목재는 수출호조에 힘입어 확장에 확장을 거듭하였고, 합판수출을 처음 했을 때에 비해 시설은 100%가 늘었다. 최근에는 월미도에 있는 매립지 땅 7만여 평을 매입하여 대규모 합판공장을 건설하고 있다”고 말하였다.

이와 같이 당시 천우사의 수출실적은 대단하였는데 여타 수출업체의 실적과 비교해 보면 1964년도 천우사 수출실적 552만 달러는 국내기업으로서는 대한중석에 이어 2위에 해당하는 수출실적이었다. 그러난 대한중석은 국영기업체였던 만큼 사기업체로는 천우사가 1위를 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1965년도에는 수출실적 825만 달러로 국영기업인 대한중석도 제치고 당당 1위에 올라섰고, 그 후 66년, 67년 계속 수출실적1위를 차지하였던 것이다.

합판은 한국에서 6.25전쟁 후의 복구수요를 기반으로 성장하였다. 그리고 1950년대 중·후반에는 유엔군의 군납수요도 합판산업의 성장에 자극을 주었다. 군납을 통해 품질을 인정받은 한국합판은 1961년부터 미국시장에 수출을 하기 시작하였다. 마침 인건비의 상승과 공해우려로 일본이 합판수출에서 철수하는 시기와 맞물리면서 한국의 합판산업은 1960년대 중반 이후 급속한 성장을 하였다. 1970년대에는 세계 5위의 합판생산국에 세계 1위의 합판수출국이 되었다. 합판산업의 중심은 부산이었다. 1960년대 중반부터 부산은 한국 최대의 합판도시가 되었다. 그리고 세계적인 합판도시가 되었다. 합판이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절 부산은 한국산업의 중심도시였다. 한때 한국수출의 29.2%의 수출을 담당하던 도시가 부산이었다. 여기에는 합판이 절대적인 역할을 하였다. 1970년대 부산에는 당시 세계최대의 합판기업이었던 동명목재를 비롯하여 6개의 대규모 수출합판업체들이 있었는데, 이들 기업은 한국합판생산의 절반을 상회하는 생산을 하였다. 그리고 1970년 동명목재의 생산량은 우리나라 전체 합판생산량의 31.2%를 차지하였다.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 중반까지는 이른바 합판의 시대였고, 부산의 시대였고 또 동명의 시대였다. 그러나 우리나라 합판산업의 성장기반은 취약하였다. 원목의 도입이 안정적으로 이루어져야 했고 저임금이 유지되어야 하는 구조였다. 그런 조건 속에서도 실제로 수익을 내기는 어려웠다. 생산가에서 차지하는 원재료의 비중이 너무 높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한계를 넘어서게 한 것은 정부의 각종 지원이었다. 각종 수출지원으로 합판기업들은 흑자를 볼 수 있었고 성장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외화가득률은 낮았다. 1970년대 말까지 합판은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그러나 제1차 석유파동 이후 등장하기 시작한 자원민족주의로 인해 원목의 구입이 어려워지면서 한국 합판산업은 위기에 직면하였다. 합판가격보다 빠르게 오르는 원목가격과 함께 수출길이 막히면서 합판산업은 위기에 빠져들었다. 마침내 1980년 세계 최대의 합판기업 동명목재가 도산을 하였고 잇달아 기업들이 쓰러졌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에 의한 합판산업의 구조조정이 시행되었다. 동명목재에 이어 부산에서는 태창목재, 반도목재, 광명목재, 대명목재가 퇴출되었다. 6개의 합판수출대기업 가운데 성창기업만이 부산에서 살아남았다. 일반적으로 과잉설비의 정리가 지역별로 균등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관례라고 보면 부산기업들의 집중 퇴출은 이례적인 것이었다. 합판산업의 구조조정 이후 우리나라 합판산업의 중심은 부산에서 인천으로 이동하였다.

대성목재공업(주) 전택보(全澤珤) 회장 편 (42)
1964년 사상처음으로 수출 1억 달러를 돌파한 11월30일을 기념하기 위해 그날을 수출의 날로 정한지 3년 째 되는 1966년 11월30일, 그러니까 제3회 수출의 날 기념식에서는 수출 무역에 공로가 많은 43개 업체가 선정돼 시상되었는데 그 가운데 천우사(사장 전택보)는 수출실적이 제일 많아 금탑산업훈장을 받는 영광을 차지하였다.

이해 정부는 총 수출 목표액을 2억5000만 달러로 책정했는데 기업체별 실적을 보면 천우사가 1073만 달러로 선두를 달렸고 그 뒤로 대한중석이 1014만 달러, 그 다음은 동명목재(980만 달러), 성창기업(810만 달러), 영흥상사(645만 달러), 대창기업(573만 달러)의 순위를 이루었다.
이에 대해 <현대경제일보>는 ‘조국 근대화의 수출역군’이란 제목 하에 천우사를 포함한 우수수출 업체에 대한 기사를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지난 1964년 11월30일 이래 주목할 만한 일은 수출이 양적인 면에서 증가현상과 더불어 질적인 면에서 수출 구조가 점차 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1965년 이전만 해도 수출 상품의 구성비율은 공산품 보다는 농산품 위주로 돼 있었으나 1965년 부터 정부에 의한 수출 정책이 크게 효과를 보여 공산품의 수출이 1억달러선으로 상승되었다.

특히 지난 1964년 11월30일 이래 1966년 11월30일까지 3년 동안 수출생산업의 기수로서 줄곧 1위를 달려 그 위치를 한번도 다른 사람에게 뺐기지 않은 천우사의 경우만 봐도 올해의 수출목표액 1300만 달러로 지난 10월 말 현재 1073만 달러의 실적을 올려 단위 수출 상사별로는 수위를 차지하고 있는데… 그 중 합판은 천우사 수출고의 주축을 이루고 있는 품목이며 나머지는 섬유제품을 비롯해 잡화, 완구, 트랜지스터, 라디오 등으로 돼 있다. … 천우사는 일반 가공무역과 보세가공무역이 2대 산맥으로 그 위치를 더욱 높이고 있다.…그런데 천우사의 경우 오늘날과 같은 영광의 자리를 구준히 쌓아온 것은 현재 천우사가 고용하고 있는 5, 6천명의 공원(工員)들이 노력한 결과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사장 전택보 씨의 기업인으로서의 뚜렷한 기업이념이 강력히 뒷바침하고 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바이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전택보 사장은 항상 우리나라는 과잉 인구에 의한 유휴노동력이 많은 대신 이와는 대조적으로 원자재의 부족 내지 고갈상태를 언제나 주장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와같은 여건을 타개하기 위해 자본이 많이 소요되는 대기업보다는 돈을 많이 필요로 하지 않고 유휴노동인구를 보다 많이 흡수할 수 있는 중소기업의 가공무역과 보세가공산업을 육성하면서 가까이는 사업에 종사하는 사람의 생활향상을 도모하고 멀리는 국민경제의 발전에 기여해야 한다고 주의 사람들에게 곧잘 말한다는 사실을 보아도 그의 기업이념이 어떤 목적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쉽게 상상할 수 있다’라고 적어 놓고 있다.

1914년 문천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그 해 말 부모를 따라 북간도(北間島)로 이주, 용정(龍井)에 있는 영신학교(永新學校) 고등과를 1918년에 졸업하고, 이듬해 모교인 영신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1920년 용정중앙교회에서 김정신과 결혼 현재·억재·순재 3남을 두었다.

고학생은 인삼장사란 인삼 엑기스를 파는 장사를 하는 것을 말한다. 인삼 엑기스 제조 공장에서 인삼 엑기스를 도매가격으로 사서 순경이나 공장직공들에게 파는 것이 인삼장사였다. 설봉도 처음에는 인삼장사를 했다.

설봉은 정측영어학교에서 영어실력이 점점 붙어갔다. 남보다 비교적 암기력이 뛰어났던 설봉은 그날 배운 것을 그다지 복습을 하지 않아도 단어를 외울 수가 있었다.
후일 설봉은 영어의 기초를 이곳에서 닦았다고 말하였다

고베 고등상업학교 입학한다. 고베는 일본의 대표적인 국제항구 도시였다. 국제도시에 걸맞게 외국인 거주자들도 상당히 많은 편이었고, 인종 차별도 다른 곳과 비교하면 별로 심하지가 않았다.

이듬해 봄(1924년) 설봉은 고베고상에 응시를 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낙방이 되었다. 동경 대지진 난리통에 별다른 준비없이 시험에 응했기 때문이었다. 떨어지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설봉은 그 이듬해(1925년) 다시 시험을 치뤘고 이번에는 합격을 했다

그가 고베고상을 졸업할 무렵 심한 불경기여서 조선인이 취직자리를 구하기란 하늘의 별따기였다. 그는 재학 시절 여선교사의 도움으로, 뉴욕내셔널시티은행 고베지점에 겨우 취직할 수 있었다. 그곳에는 미국인 15명과 일본인·중국인 30여명이 있었고 조선인은 전택보 혼자였다.

1929년 간도로 돌아왔다. 아내와는 9년 만에 함께 살게 된 것이었다.전택보는 다시 만주 영신학교 교사로 교편을 잡았다가, 고향으로 돌아와 함경남도 금융조합에서 일했다. 간도 교하현부근의 500정보를 구입, 선만주식회사 라는 대규모 농장을 경영하다가 8·15 광복을 맞이하여, 1945년 10월 단신 월남하였다.

전택보가 만주에서 농장 경영을 시작했을 무렵에도 벼농사는 수익성이 좋았다. 그러나 이때 그는 밤새우기 일쑤인 조선일보사 근무 때 얻은 지병인 심장경련증이 악화되었다. 한번 발작하면 숨이 막혀 죽을 것만 같았다. 그는 서른아홉 살 되던 해 12월 만주 지린(吉林)병원에 입원해 6개월 동안 병상에 누워 있어야 했다. 그가 조금씩 건강을 되찾으면서 농장도 차츰 궤도에 올랐다. 그의 농장이 큰 집단취락으로 되고 보니 자녀교육 문제가 시급한 과제로 떠올랐다. 그래서 전택보는 농장 안에 중국인 학교를 세우는 한편 조선인 교사를 초빙해 조선인 자녀들을 따로 가르치게 했다.

이런 상황에서 설봉은 고베고상 동창인 지우선씨와 사업을 하기로 결심했다. 잣을 가을에 사서 저장해 뒀다가 이듬해 봄에 팔면 이익을 보지 않을까 생각해서, 금융조합을 그만둘 때 받았던 퇴직금을 출자해 잣장사를 시작해 보았다. 그로서는 첫 사업인 셈이다.

그러나 이 첫 사업에서 그리 재미를 보지 못했다. 예상한 만큼 잣값도 오르지 않고 품질도 변질되고해서 실패를 하고 말았다. 다음에는 쌀 장사에 손을 대어 보았다.

추수기의 쌀값과 다음해 여름철 쌀값의 가격차이를 노린 장사였는데 이 장사에서는 상당한 재미를 보았다. 이제까지 기껏해야 100원 남짓한 월급을 받아왔던 그가 한달에 천여원하는 거금을 손에 쥐게되니 세상이 온통 제것만 같았다.쌀 장사에 재미를 본 설봉은 소장사에도 손을 뻗쳤다. 남만주 지방의 소값은 싼 반면에 용정의 소값은 상당히 비싸다는 것에 착안해서 소장사에 투자했던 것이다.

소장사에 투자를 한 것이 예상한 대로 이득이 많이 남아 돈을 많이 벌었다.

그러나 이것은 살아움직이는 생명을 다루는 장사였기 때문에 예상밖의 귀찮은 일들이 많았다. 그래서 좀 더 안정성있는 사업을 하기로 마음먹고 길림성 근처의 교하현으로 이사가서 정미소를 차렸다.

이 사업은 시설만 있으면 별로 자금이 없어도 된다는데 착안하여 시작한 사업이었다. 당시 길림성 교하현 근처에는 상당수의 우리나라 농민들이 벼농사를 주로 하며 살고 있었다.

농민들은 추수때 거두어 들인 벼를 마당에 쌓아둔채 저장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이 근처 정미소에 맡겨두었다가 필요한 때에 팔아 쓰고 있었다. 정미할 쌀은 맡겨둔 농민들의 요구에 따라 그때에 시세에 맞춰 결재를 해주면 되었는데, 농민들에게서 위탁받은 쌀을 하얼삔으로 보내어 바꾼 돈을 농민들이 결재를 요구할 때까지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는 이점이 있었다.

정미소를 하면서 설봉은 톡톡히 재미를 보았다. 그리하여 설봉은 이곳에다 아담한 새집을 짓고 부모님과 동생들을 데려다가 같이 지낼수 있게 되었다. 평생동안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자기돈으로 자기집을 지은 것이었다.

정미소 사업이 일단 본 궤도에 오르자 정미소는 동생 택완에게 물려주고 설봉은 북만주 지지하루에 가서 중국인이 경영하던 좁쌀 정미사업을 인수하였다. 지지하루는 겨울이 되면 기온이 영하 40~50도까지 떨어지는 추운지방이었다.

집밖에만 나가면 엄청난 추위 때문에 몇 겹의 옷을 입고도 두툼한 털옷으로 또다시 무장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다닐수가 없는 지방이었다.

이런곳을 설봉은 바쁘게 돌아다니며 좁쌀장사를 했다. 그 다음으로 손댄 것이 농장건설이었다. 농장건설에 관한 계획은 즉흥적인 발상이 아니었다.

그는 고베고상 시절에 이미 만주 전역의 농업조사 보고서까지 쓴 경험이 있었다.

고베고상에서는 매년 성적이 우수한 학생 10여명을 선발하여 만주, 중국 등지로 해외여행을 시켰는데 설봉도 고베고상 시절에 우수학생으로 뽑혀 여순, 대련, 북경, 장춘, 하얼삔 등을 다녀오는 여행을 한 일이 있었다.

그때 만주전역의 농업보고서를 쓴 것이 농장건설을 해야되겠다는 생각을 하게했던 것이다.

벼란 것은 원래 남방작물이므로 만주에서는 기껏해야 일본인들이 안동현에서 조금 심고 있었을 뿐 다른데는 벼동사가 전여 없었다. 만주벌판에 벼 농사가 보급되기는 순전히 조선인 이주자들에 의하여 이뤄졌던 것이다.

조선 농민들은 벼가 원래 기후와 환경에 비교적 잘 적응하는 작물인 것을 알고 점차 북만주에까지 보급했던 것이다.

당시 일제의 식민정책으로 문전옥답을 억울하게 빼앗기고 고향을 떠나온 우리 농민들은 근 100여만명이나 되었는데 그들의 노력으로 벼 농사가 소련 영내에까지 보급되었다는 사실을 설봉은 그의 학창시절 조사보고서에서 지적해 냈던 것이다.

농사도 잘되었고 농민 수입도 괜찮았지만 만주 특유의 기후 탓으로 문제가 있었다. 만주는 겨울이 길고 여름이 짧기 때문에 농민들은 여름에 번 수입을 겨울에 다 없애버렸다. 전택보는 농민들이 농사만 지어 가지고는 재산을 만들기가 어렵다고 판단해 농민들에게 축산을 장려했다. 또한 만주에서는 해산물이 귀했으므로 만주 토문(土門)에다 ‘동만(東滿)상회’라는 회사를 차리고 수산물 판매사업을 시작했다. 만주 생필(生必)주식회사를 통해 주로 명태를 팔았다.

설봉은 신참에서 멀지 않은 육가자(六家子)라는 역에서 약 10리를 들어간 곳에 약 5백정보의 무인지답을 샀다. 이 땅은 예전에 청나라 사람들이 살던 곳으로 만주사변때에 일본군에 의해 점령된 곳이었다.

설봉은 여기에다 대단위 농장을 건설하기로 결심하고 일에 착수했다. 당시 만주에는 마적들의 횡포가 심하였으므로 마을을 만들려면 토성이나 석성을 쌓고 망대를 세우는 것이 우선적인 일이었다. 우선 넓이 12척, 높이 12척의 토성을 쌓았다.

그리고 농민들에게 집 지을 자금을 대 준다고 하니까 청나라 사람 130호가 들어왔다. 조선 농민들에게는 집 지을 자금 외에 농우까지 마련해주고 약 30호를 입주시켰다.

만주는 겨울이 긴탓으로 가을에 추수한 뒤로는 기나긴 겨울을 술먹고 노름을 하는 것으로 재산을 탕진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를 생각하고 설봉은 농장 농민들에게 축산을 권장했다.

이러는 중 전쟁은 막바지에 접어들고 전세는 일본이 패배할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다. 일본이 패망하면 이제껏 해왔던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기에 설봉은 농장을 정리하고자 했다.

그러나 원매자가 선뜻 나서지 않았다. 겨우 만철에 교섭해 50만원에 팔기로 결정했다. 대금지불기일이 8월8일이었는데 일본의 패전으로 돈을 받아내지 못했다.

정미소와 농장경영에 몰두하며 북만주를 누비고 다니던 설봉은 우연한 기회에 명태장사에도 손을 댔다. 이때가 1941년이었는데 만주에서는 해산물이 매우 귀한 때문이었다. 더욱이 전쟁이 가열되면서 만주에서는 해산물을 찾아볼 수가 없을 정도로 해산물이 귀했다.

당시 만주의 큰 도시에는 지금의 고시가격과 비슷한 제도가 있어서 일정가격 이상 받을 수 없도록 돼있었고 이를 위반할 때에는 처벌을 받도록 돼 있었다.

그런데 번양(藩陽)역에서는 고시가격제도가 없어서 그 곳으로 해산물을 수출해서 팔기도 했다. 그러다가 철도경찰에 끌려가 유치장 신세를 지기도 했다. 번양이 봉천시에 편입된 사실을 모르고 장사를 하다가 고시가격위반으로 붙잡혀갔던 것이다.

이런 일이 있은 후 얼마 지나서 북경이나 천진에는 고시가격제도가 없다는 것을 알아내고 북경이나 천진 등으로 수출을 하기로 했다.

수출절차가 까다로왔으나 화신과 교섭을 해서 천진출장소 명의로 명태 수출허가를 얻어 수출하는데 성공했다. 14차분의 건명태를 천진에 끌어내리니 굉장한 분량이었다. 모두들 깜짝 놀랐다.

그러자 소문이 사방에 퍼지면서 천진과 북경에 있는 조선인 거간꾼들이 저마다 팔겠다고 나서는 것이었다. 한 쾌를 8원씩 팔아주면 구전으로 거기에서 1원씩 주기로 약속했다.

그래서 팔기 시작한 것이 며칠 사이에 전량을 모두 팔아 치울 수가 있었다. 명태 한쾌에 투자된 돈이 운송비까지 합쳐 1원15전이었으니까 구전을 제하고도 엄청난 돈이 들어오게 되었다. 명태장사로 번 돈이 70만원이란 거액이 됐다.

1945년 미군정청 이재과장을 맡았다 그만두고, 1947년에 천우사(天友社)를 설립하여 본격적으로 사업에 투신, 무역업을 개척하였다. 서울로 환도한 뒤 천우사의 무역업만으로는 발전의 한계가 있음을 느끼고 생산업체를 건설할 생각을 굳혔다.

그러니까 천우사의 간판이 걸린 것이 1947년 3월 8일이었고, 천우사가 간판을 내걸고 제일 먼저 손을 댄 것이 ‘종이 장사’였다.

1945년 10월8일, 드디어 설봉은 가족을 함흥에 남겨둔 채 남쪽행 기차에 올랐다. 기차는 화물차였는데 사람이 어찌나 많았던지 기차가 38선 근처에 도착하기까지 시종 화물차 지붕 위에 올라 있어야 했다.

그 당시만 해도 그리 감시가 심하지 않았기 때문에 38선을 걸어서 넘었다. 서울에 도착해 소복여관(현 도큐호텔 자리)에 숙소를 정했다.

그리고 나서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이 전에 몸담고 있던 조선일보사였다. 그 당시 조선일보사는 극심한 경영난으로 방응모씨는 소유주식의 절반을 이중문이라는 사람에게 125만원에 팔아 그와함께 공동경영을 하고 있었다.

설봉은 여관에 들어앉아 앞으로의 할일을 놓고 생각해 보다가 당시 미군정의 경무부장으로 있는 조병욱씨를 찾아갔다. 다른 사람의 취직자리를 부탁하러 찾아갔던 것인데 도리어 그에게 붙잡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즉 설봉은 경무부장 밑에 이재국장이 됐다.

미군정 시대라 이재국장은 미국인 한명, 한국인 한명 이렇게 둘을 두고 있었다. 이재국장을 한 6개월 하고 있는데 조병욱 부장이 이번에는 자기와 같이 정치를 하는 것이 어떠냐는 부탁을 하길래 거절하고 이재국장 자리도 뿌리치고 나와버렸다.

그후 1946년 봄에 온가족을 데리고 38선을 넘었다. 그때는 38선을 넘기가 조금 힘들어져 있었다. 서울에 와서는 잠시 효자동에 있는 효자여관에 묵으면서 집을 구하러 다녔다. 그때 마침 청운동에 있는 조그만 기와집을 일금 10만원에 살 수 있었다.

청운동 집에서 온가족이 오랜만에 함께 모여 살림을 꾸미고 들어앉으니 마음이 여간 기쁘지 않았다.

이 무렵 우연히 고베고상의 동창생 김인형씨를 만났다. 그는 대한상사라는 무역업을 하고 있었는데 자기는 장사할 줄을 잘 모르니 같이 해 보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설봉은 그 회사의 부사장이 됐다.

설봉은 부사장으로 일을 하고 있으면서도  단독으로 대외 무역을 할 수 없을까 고민하며 돈줄을 물색하고 있었다. 그때 김상필씨로부터 이화대학 총장 김활란씨를 소개받았다.

김활란 총장은 학교재단 기금 중 500만원을 선뜻 빌려주었다. 설봉은 이 돈을 장사 밑천으로 하여 조선일보 사옥 3층에 방 하나를 빌려 사무실을 차렸다.

이것이 바로 지금의 <천우사>의 시작이었다. 그러니까 천우사의 간판이 걸린 것이 1947년 3월 8일이었고, 천우사가 간판을 내걸고 제일 먼저 손을 댄 것이 ‘종이 장사’였다.

조선일보사에 사무실이 있었던 만큼 창고도 마음대로 얻어 쓸 수 있었고, 판매처를 얻기도 안성맞춤이었다. 당시의 무역은 마카오 중심이었다.

국산품이란 말조차 생소하던 시절이었으니까 국민들 생활필수품은 대부분 마카오에서 조달됐다. 그때 신사들이 마카오 양복에다 마카오 구두를 신어야 행세를 할 수 있었던 시절이었다. 

이런 시절에 천우사는 마카오 무역선에 싣고 온 양복지 지물류 등을 가지고 장사를 시작했다. 적은 자본이라 마카오까지 가서 무역을 할 수는 없었고, 상인들이 가지고 들어오는 물건을 사서 팔았다.

국산품이란 말조차 생소하던 시절이었으니까 국민들 생활필수품은 대부분 마카오에서 조달됐다. 그때 신사들이 마카오 양복에다 마카오 구두를 신어야 행세를 할 수 있었던 시절이었다. 

이런 시절에 천우사는 마카오 무역선에 싣고 온 양복지 지물류 등을 가지고 장사를 시작했다. 적은 자본이라 마카오까지 가서 무역을 할 수는 없었고, 상인들이 가지고 들어오는 물건을 사서 팔았다.

1954년 마닐라, 1960년 누욕과 도쿄 수출거점 설치, 한국축산 개발 설립

이것이 1954년 대성목재공업주식회사(大成木材工業株式會社)·조선피혁주식회사를 인수하게 된 동기이다. 그는 국내 동업자끼리의 경쟁보다는 해외시장 개척에 더 적극적으로 나섰다.그래서 1960년 3월 우리 나라 최초로 합판을 수출하게 되었다. 그 뒤, 합판 수출은 우리나라 수출의 주품목으로 각광을 받게 되었다. 1964년 신진완구주식회사·신진수출주식회사(新進輸出株式會社)를 설립하였고, 그 해 천우사는 552만 달러를 수출하여 국내 민간기업 중 1위를 차지하였다.

1965년에는 조선피혁을 강남공업(江南工業)으로 개칭하고, 한국축산개발주식회사와 삼익선박(三益船舶)을 설립하였고, 제2회 수출의 날 수출실적 제1위로 동탑산업훈장을 수상하였는데, 이 기록은 1967년까지 이어졌다. 천우사의 전성기를 맞은 것이다.

기독교 가정에서 성장한 탓으로 신앙심이 두터웠고, 독실한 기독교인으로서 그는 폭넓은 사회활동을 하였다. 1947년 이화여자대학교 이사로 취임한 것을 비롯해서, 1953년 조선일보사 대표취체역, 1957년 유네스코후원회 회장, 1959년 주한 덴마크 명예영사, 1961년 포풀라협회 회장, 1963년 국제법학회 부회장, 1963년 한국신학대학 이사 등 각계에서 눈부신 활약을 하였다.

한편, 재계에서도 8·15광복 후 대한상의(大韓商議) 재건운동, 한국무역협회 창립, 한국경제협의회 창립 등에 주도적 역할을 하여 경제계의 지도자로서 큰 업적을 남겼다.

4·19혁명 뒤 허정(許政)과 함께 과도정부 수립에 공헌한 인연으로 상공부장관에 오르기도 하였으나, 35일간의 단명으로 끝났다. 정부는 그의 국민경제발전에 기여한 공적과 민간경제외교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하였다.

우리는 저렴한 노동력을 이용해 수공업, 가내공업으로 중소기업을 급속히 발전시키는 것이 적은 자본을 가진 우리가 조속한 시일 내에 실업자를 구제하고 국제수지를 개선시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전제하고 나서 그는 일본과 홍콩으로부터 기술을 도입해서 섬유제품, 2차가공품, 부품생산공장의 설치를 해야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그밖에도 크리스마스 장식업, 조화, 가발, 농구화, 메리야스, 양말, 수예품 등 할일이 얼마든지 있다고 역설했다. 우리국민이 공것을 바라지 말고 우리의 힘으로 우리의 경제난을 타개해 보겠다는 굳은 결의를 가지고 노력한다면 수년내에 억대의 외화를 벌것이 틀림없다고 외쳤다.

그리하여 설봉은 그당시 상공부장관, 재무부장관과 논의해 가칭 ‘가공무역추진위원회’라는 단체를 발기시켰다.
이 위원회의 취지는 우리나라에 없는 원료를 외국에서 도입해 이것을 가공해 수출하는 업체를 돕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천우사사장 전택보씨(사진)가 19일 상오11시25분 서울 신교동자택에서 심장마비로 급사했다.
향년 80세. 고전사장은 일본신호고상을 졸업, 일찌기 실업계에 투신하여 보세가공무역을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개척하는등 한국경제계에 큰기여를 했다.

1924년 봄 전택보는 고베고상(神戶高商)에 응시했다. 결과는 낙방이었으나 이듬해 다시 시험을 쳐서 합격했다. 그가 고베고상을 졸업할 무렵 심한 불경기여서 조선인이 취직자리를 구하기란 하늘의 별따기였다. 그는 재학 시절 여선교사의 도움으로, 뉴욕내셔널시티은행 고베지점에 겨우 취직할 수 있었다. 그곳에는 미국인 15명과 일본인·중국인 30여명이 있었고 조선인은 전택보 혼자였다. 그는 민족 자긍심을 지킨다는 마음으로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다. 항구도시 고베에는 조선인 막노동자가 몰려와 살고 있었다. 조선인이 경제적 하층구조의 태반을 차지하자 ‘조센징’ 차별도 노골적으로 바뀌어 갔다. 그것이 전택보에게 고민거리를 던져주었다. 취직을 했으니 아내를 룽징에서 데려올까 생각했지만, 아내에게 조센징이란 비아냥거림을 듣게 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아내와 떨어져 마냥 고베에서 일할 수도 없었기에 고민 끝에 그는 룽징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몇 달만 참으면 하얼빈이나 펑텐 지점으로 보내주겠다는 지점장의 만류도 뿌리치고 1929년 간도로 돌아왔다. 아내와는 9년 만에 함께 살게 된 것이었다.

 1947년 3월 8일 천우사(天友社)를 세우고 무역업에 뛰어들었다.

천우사를 설립한지 얼마 안돼서인데, 일본 유학시절 때부터 잘 알고 지냈던 박찬빈 이란 친구가 설봉을 찾아왔다.

자기는 중국CIC(중국 군대의 비밀단체)의 책임자인 조자청과 손잡고 일하는데 ,중국에서 물건을 가지고 올테니 팔아 달라는 것이었다.

설봉은 그러마고 했더니 얼마 후에 그는 복사지 한 배를 가득 싣고 들어왔다. 복사지는 그 당시 매우 귀한 물건이었기 때문에 쉽게 팔 수 있었다. 그리고 복사지 대금조로 중석(重石)을 한 배 실어주었다.

그러니까 두 번 장사를 한 셈이었다.

당시 중석은 일본인들이 채광해 놓고 미쳐 실어가지 못한 것이 전국 곳곳에 방치 된 것이 많이 있었음으로 어렵지 않게 실어 줄 수 있었다.이것이 천우사의 첫 번째 큰 장사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장사에서 설봉은 수백만원을 벌었다.

때는 1947년 여름쯤이었고, 천우사 간판을 건지 불과 3,4개월 밖에 안된 때였다.

그러나 매번 행운만이 따르는 것은 아니었다. 1947년 초가을 쯤이었는데 봉명석이라는 사람이 찾아와서 자기는 상해에서 신문용지를 구해 올 수 있다고 했다.  

그때는 신문 용지가 아주 귀한 때라 천우사는 곧 그와 손을 잡고 신문용지 거래를 시작하기로 했다. 그는 신문용지를 구하기 위해서는 선금이 필요하다고 해서 설봉은 선금 600만원 외에도 동아일보의 600만을 비롯해 여러 사람에게서 모두 6000만원을 마련해 그에게 넘겨줬다.

그러나 그가 상해로 돌아간지 석 달이 넘도록 감감 무소식이었다. 사기를 당한 것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봉명석은 그 돈을 모두 유흥비로 탕진해 버렸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설봉은 자기 돈 600만원 뿐만 아니라 6000만원의 큰 빚쟁이가 되고 말았다. 천우사는 이때 완전 파산 상태에 빠지게 됐으며 이화재단 김활란씨에게서 빌린 돈 500만원의 밑천까지 전부 날려버렸던 것이다.

이때부터 설봉은 날마다 빚 독촉을 받게 됐는데 하루는 모 명문학교 사친회 회장이 천우사 사무실을 찾아와서 ‘내 돈 500만원을 내놓으시오’ 안 내면 죽이겠다고 설봉의 멱살을 잡고 차마 입으로 할 수 없는 욕설을 마구 퍼부어 댔다.

이때 사원들이 달려들어 떼어놓긴 했으나, 이때 설봉이 받은 고통과 마음의 상처는 이루 형언할 수 없었다.

옷을 찢긴 채 (조선일보)3층 천우사 사무실에 멍하니 앉아있던 설봉은 ‘저기 전찻길에 뛰어내려 죽고싶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때 간부 사원들은 자칫하면 사장이 자살이라도 하지 않을까 걱정이 돼 의논 끝에 사장을 해외로 피신 시키기로 결정을 했다.

‘사장님 6개월 동안만 해외에 나가서 피신해 계십시오. 그동안 우리가 국내에서 뒷 처리를 할테니, 사장님은 해외에서 활약해 주십시오’ 하고 출국을 간곡히 권했다.

이리하여 설봉은 비밀리에 서울을 빠져나와 홍콩 행 비행기를 타게 됐다.

때는 1948년 4월 설봉은 해방 후 처음으로 해외에 나가게 됐던 것이다.

빚에 몰린 설봉은 비밀리에 서울을 빠져나와 홍콩 행 비행기를 탔다.

때는 1948년 4월, 설봉은 해방후 처음으로 해외 여행을 하는 셈이었다. 설봉은 홍콩에 도착하자 우선 뉴욕 내셔날 시티뱅크 홍콩 지점을 찾아갔다. 이 은행은 설봉이 일본 고베에 있을 때 근무한 경험이 있는 은행이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은행 고문으로부터 미리 소개장을 받아왔기 때문이었다.

설봉은 소개장을 내어놓고 협력을 구했다. 그랬더니 지점장은 선뜻 홍콩에서 가장 실력있는 지물상인 치생공사(治生公司)를 소개해 주는 것이 아닌가.

홍콩 지점장은 설봉에 대한 첫 인상을 좋게 느꼈던 모양이다. 그 즉시로 설봉은 홍콩의 치생공사와 계약을 체결하고 무역을 시작했다. 방법은 물물교환방식이었는데 치생공사가 지물을 선적해 서울에 보내면 천우사는 대신 오징어를 사서 그 배에다 실어 보낸다는 조건이었다.

그러니까 지물 대금을 먼저 치를 필요없이 오징어를 사서 실으면 되는 장사였다.

드디어 신문용지 50톤을 실은 첫 배가 부산에 도착하였다. 그러자 국내에 있던 천우사 사원들은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해서 지물을 팔고 그 돈으로 오징어를 구해 그 배에 실어 보냈다.

이러기를 3개월동안 계속하니 빚의 3분의 1을 갚을 수 있게 됐다.

설봉은 홍콩에 피신해 있으면서 계속 지물을 실어 보냈다. 한편 치생공사는 황옥당이라는 사람을 한국에 파견해 천우사의 무역업무를 감독케 하였다.

이런 식으로 무역을 6개월간 계속한 결과 빚의 절반을 갚을 수 있었다.물물 교환단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무역이었지만 서로 믿고 했기 때문에 번거롭지도 않고 사업도 잘 돼 좋았다, 치생공사는 천우사의 은인이나 다름없었다.

날이 갈수록 치생공사와의 무역은 더욱 번창해져서 한때는 전국 지물 수입량의 거의 절반을 천우사가 차지 했다.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한국의 무역에도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홍콩 일변도의 무역에서 대일 무역이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행운이 설봉을 찾아왔다. 어느날 유동석이란 사람이 찾아와서 조선농회(朝鮮農會, 오늘날 농협과 비슷한 기관)에서 수집한 가마니 수십만장을 일본에 수출할 수 있는 허가를 받아 줄 수 있으니 그걸 한 번 해 보라고했다.

그런데 그 때 조선농회 농회장을 최태용씨라는 사람이 하고 있었는데 최태용씨는 영흥 사람이었고 설봉이 영흥에서 금융조합이사로 있을 때 어느정도 안면이 있는 사이여서 어렵지 않게 천우사가 대일 가마니 수출업자로 지명될 수 있었다.

당시 농회에서 수집해 놓은 가마니를 체크해 보니 그 양을 다 일본으로 실어 나르려면 배가 17척이나 필요한 방대한 양이었다.

일본의 수입상은 제일물산이었는데 1949년 한 해는 온통 가마니 수출로 돈을 벌다 시피했다. 해방 후 민간 무역으로 일본과의 교역은 이것이 처음이었으며 그때 가마니 수출대금은 약 30만 달러에 이르렀다.

천우사는 1950년 6월 24일 인천항에 신문지와 양복지 등 대규모 물자를 수입해 놓고 있었다. 그날은 토요일이어서 통관을 26일 월요일로 미루고 있었는데 뜻밖에도 6·25전쟁이 터지고 말았다.부산 부두에는 천우사 화물도 잔뜩 쌓여 있었다. 군의 통고를 받은 전택보는 화물 처리 문제로 고심했다.

전택보는 전쟁이 끝나기만을 마냥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남포동에 전세로 점포를 얻어 다시 무역업을 시작했다.

출처 : 주간조선(http://weekly.chosun.com)

그는 천우사의 무역업만으로는 발전에 한계가 있음을 깨닫고 생산업체를 건설할 생각을 굳혔다. 이것이 1954년 대성목재공업주식회사·조선피혁주식회사를 인수하게 된 동기이다. 그는 국내 동업자끼리의 경쟁보다는 해외시장 개척에 더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래서 1960년 3월 한국 최초로 합판을 수출하게 되었다. 그 뒤 합판은 한국 수출의 주요 품목으로 각광을 받게 되었다. 1964년 신진완구주식회사·신진수출주식회사를 세웠고 그해 천우사는 552만달러를 수출, 국내 민간기업 제1위를 차지했다.

그는 1965년에는 조선피혁을 강남공업으로 개칭, 한국축산개발주식회사와 삼익선박을 설립했으며, 제2회 수출의 날 대한민국 수출실적 제1위로 동탑산업훈장을 받았다. 이 기록은 1967년까지 이어졌다. 천우사의 전성기를 맞은 것이다

동물원 준비 과정에서 가장 어려웠던 것은 달러를 바꾸는 일이었다. 그때는 암시세와 공정환율의 차이가 많아서 공정환율로 바꾸지 않으면 준비에 큰 문제가 생겼다. 전택보는 재무부를 서너 차례나 드나들며 사정해야 했다.

4·19혁명 뒤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 성명을 발표한 이튿날 4월 27일부터 과도정부의 내각 조직이 시작되었다.

전택보는 대기업가 중심의 새로운 단체를 구성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김용완, 최태섭, 김항복 등도 마찬가지 생각이어서, 그들은 천우사 사장실에 모여서 새 조직을 의논했다. 김용완은 처음 새 단체를 뜻 맞는 사람들끼리만 발족, 차츰 확대해 가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그러나 나중 전국을 대표하는 단체가 되려면 아무래도 대기업가를 모두 참여시키는 것이 좋겠다는 전택보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마침내 한국경제협의회가 발족되었다.

천우사는 1960년대 6년 동안이나 줄곧 수출 최고상을 수상, 해외 시장 개척에서 ‘한국의 신용’으로 통했다. 1970년대 들어 천우사는 무역업에서 쌓은 경험과 미국 시장에서의 기반을 토대로 스튜어트데이비스사(社)와 손잡고 보잉 707기를 빌려 미국과 서울 간 항공화물 수송을 시작했다.

또한 세계적 전자회사인 필립스와 합작으로 전자제품은 물론 컴퓨터 부품까지 수출해 생산했다. 이미 천우사는 1950년 9·28 서울수복 직후 필립스의 도움을 받아 한국에서 처음으로 탁상용 라디오를 만들어낸 일이 있었으며, 그 인연이 이어져 필립스와 기술제휴로 김포 등촌동 공장에서 전자제품과 부품을 생산해 대미·대일 수출을 계속해 왔다. 1970년에는 상공부로부터 TV 부품 수입을 승인받아 오류동에 5만4638㎡(1만6528평) 공장 대지를 마련하고 한 해 3만대 생산 목표를 세웠다. 그 무렵 한국의 TV 생산업체는 모두 도시바·히타치·샤프·산요 등 일본업체와 기술 합작을 하고 있었는데, 천우사는 필립스와 기술제휴를 함으로써 유럽 회사와 제휴한 첫 업체가 되었다.

전택보가 주장했던 보세가공 무역은 부두의 보세창고에서 수입한 물품을 가공처리해 재수출하자는 것은 아니었다. 세관의 감시가 가능한 곳이면 어디에서나 확대해서 실시하자는 것이었다. 5·16 혁명정부가 보세가공 무역을 국책으로 결정했다고 해서 전택보의 임무가 끝난 것이 아니었다. 전택보는 학자도 아니고 정치가도 아닌 실업인이었으므로, 보세가공 무역이 그의 제안에 의해 정책으로 채택되었다 해서 그 책임을 다한 게 아니라 당장 그것을 실천에 옮겨야 했다.

그는 맨 먼저 조화(造花)에 손을 댔다. 일본에서 기술자 다카하시(高橋)를 초빙하고, 천우사 6층 강당을 이용해 기술을 배울 부녀자를 모았다. 그리고 부산에 내려가서 의류공장 17곳과 계약, 일본에서 기술자 오오키(大木)를 데려와 미국에 수출하기 위해 의류 생산을 시작했다. 그 밖에도 완구 공장, 양탄자 공장도 세워 나갔다. 1970년대 초반 천우사는 의류 가공 수출만으로 한 해 500만달러를 벌어들이며 명실상부한 한국 최고 의류 제작 수출업체로 이름을 드날렸다.

그 무렵에는 수출산업에 대한 정부의 금융 세제상의 지원도 없었다. 미국에 대한 수출 실적도 없었으므로 확보해 놓은 쿼터도 없었다. 쿼터 문제 교섭차 전택보는 미국을 두 번 방문해서 미 상무부 차관보인 로보를 만나 이 문제를 놓고 교섭을 벌이기도 했다. 이 일은 전택보의 힘으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보세가공 무역만 하더라도 정부에서 이를 국책으로 채택, 여러 혜택과 지원을 아끼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날처럼 성장한 것이다. 특히 박정희 대통령이 다달이 확대무역회의를 주재했기에 수출을 토대로 한 경제 성장을 이룩할 수 있었다. 1947년 이화여자대학교 이사 취임을 비롯해서 1953년 조선일보사 대표취체역, 1957년 유네스코후원회 회장, 1961년 포플러협회 회장, 1963년 국제법학회 부회장, 1963년 한국신학대학 이사 등 각계에서 눈부신 활동을 벌였다.

전택보는 만년에 세상 사는 지혜를 이렇게 말한다.

“국가 대 국가, 민족 대 민족, 개인 대 개인의 끝없는 다툼과 경쟁 속에서 인류 역사와 문명은 발전해 왔다. 오늘날 우리나라도 적자생존의 법칙에 얽매여 있다. 초등학교 입학 때부터 대학 졸업 때까지 수많은 시험을 치르며 경쟁한다. 바늘구멍 취업문을 뚫는 데 성공해도 끝이 아니며, 일터에서도 치열한 경쟁을 해나가야 한다. 더욱이 우리나라는 외적으로 북한과 맞서고 있으며 중국·일본·러시아 등 강국들과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또 내적으로는 협소하고 각박한 국토에서 5000만 인구가 선진국 수준의 정치·경제·교육·문화의 욕망을 갖고 있기에 경쟁은 더욱 극심하다.

한국에서의 경쟁은 남을 거꾸러뜨리고 자신만 살아남겠다는 경쟁이 대부분이다. 정치인들은 국민을 잘살게 하겠다는 뚜렷한 정책 발표는커녕 그저 경쟁자를 쓰러뜨리기 위한 반대와 공격에만 급급한다. 기업인들도 국가 경제 발전에 어떻게 공헌할까를 생각하기보다 동업자를 해치는 데 열중하는 예가 많다. 그러나 오늘날은 세계가 하나가 되어가고 있으며, 우리의 활동 무대는 온 세계에 걸쳐 있다. 남을 짓눌러 없애는 경쟁이 아닌 남보다 커져서 잘살게 되고, 경쟁에서 뒤처진 무리까지 끌어안는 인의(仁義)의 경쟁이 되어야 한다.

우리의 욕망은 무엇인가. 큰 부자가 되고 싶기도 하고, 절대권력을 갖고 싶기도 하다. 큰 재산이 있으면 자신의 의식주를 해결한 뒤에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고, 큰 권력이 있다면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을 도움으로써 행복을 느끼는 게 가장 이상적일 것이다. 더욱이 우리나라같이 빈곤과 부정이 심한 나라에서 빈곤을 없애고 정의를 구현한다면 이보다 더 큰 기쁨이 어디 있겠는가. 사도 바울은 ‘내가 선한 싸움을 하고 나의 갈 길을 다 달렸다’고 말했다. 세상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승리자로서의 만족감을 가질 수 있다면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행복을 느낄 것이다.”

1980년 7월 18일 전택보는 지인들과 골프를 치던 중 갑자기 쓰러진다. 차로 근처 병원으로 옮겼으나 일흔아홉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아내와 자식들이 마지막을 지켜보지 못한 정말 뜻밖의 죽음이었기에 애석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전택보는 이런 말을 남겼다.

“이만큼 살아오는 동안 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빚을 졌다. 그 빚을 갚을 길은 내가 눈을 감을 때까지 일을 계속하는 것이다. 나는 보잘것없지만, 일생 동안 내가 가진 능력과 지식을 모두 짜내어 살아왔다. 다시 태어나더라도 내가 살아왔던 대로 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성장비화·부침야사(재벌이력서:8)
입력 1991.12.31 00:00 0 0
◎「마카오무역」 열풍… 수입품 장사 “노다지”/면사·양복지등 생필품 취급 수십배 이득/중석·화약원료등 전략물자로 대금지불/강익하·김규면·신영균등 자본축적 기반닦아정크무역이 절정을 이루던 46년 6월초. 정오께부터 인천항 부두를 서성이던 서른살 남짓한 젊은 사내는 석양을 등지고 미끄러지듯 수평선을 넘어오고 있는 배 한척을 보고 걸음을 멈추었다. 배가 항구에 가까워 광성호라는 이름이 육안에 들어오자 그 사내는 중국말로 큰 소리를 질렀다. 돛배에서도 서너명의 선원들이 손을 흔들며 중국말로 응답해 왔다. 부두에 닻을 내리자 젊은이는 배에 뛰어올라 갑판을 열어제쳤다. 콩기름 낙화생 당면 시계 사카린 빙초산 광목 양잿물 소금 등 20여종류의 물건들이 가득했다.

이 배가 바로 우리나라와 중국을 오가던 정크선 광성호. 광성호를 기다리던 젊은이는 화업무역공사라는 간판을 내걸고 정크무역에 참여한 김병환이었다. 『당시에는 수출 수입이라는 말 대신 일제시대의 이입이출이라는 말을 그대로 쓰고 있었지요. 광성호가 도착한 뒤 인천해관(지금의 인천세관)을 찾았더니 시청으로 가라고 했어요. 시청에 갔더니 다시 항만사령부로 가 보라는 거예요. 그곳엔 미군정 주재관 길버트상사가 입출항을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배가 도착했다고 알리니 그 사람이 직접 조사를 나와 아편과 무기가 있느냐고만 물었어요. 없다고 하니까「오케이」,그것으로 끝이었어요. 관세고 뭐고 물론 없었지요』 무역협회 창립이후 현재까지 비상근 이사를 지내며 경기도 부천에서 알파소닉코리아라는 전자회사를 차려 회장을 맡고 있는 김병환씨의 회고다.

관세도 없고 특별한 제약도 없었던 정크무역은 거의 10배가 남는 노다지 장사였다. 김병환씨의 증언. 『국내에서 구하기 힘든 물건들이었기 때문에 정크선이 들어왔다 하면 바로 동이 났다…』 당시 정크무역을 하면서 얼마나 이익이 남느냐를 결정한 것은 오로지 무역행정의 실권을 쥐고 있던 미 군정청 상무부 소속 거윈준위의 사인에 달렸다. 정크무역이 활기를 띠자 미 군정청은 과세를 부과하고 수입허가서를 발급했다. 서울에 주재한 거윈준위가 책임자였으므로 그에게서 얼마나 빨리 수입허가서를 받는냐에 따라 큰 돈이 왔다가다 했던 것이다. 따라서 자연스레 인천과 서울을 오가는 총알택시가 등장했고 인천­서울간 트럭운송업자들도 덩달아 큰몫을 잡았다. 인천에서 트럭운송업을 하고 있던 조중훈도 이 시기에 기반을 잡았다.

국내에 무역업을 본격 태동시킨 정크무역은 47년 3월17일 마카오에서 무역선인 페어리드호가 인천항에 입항,이른바 「마카오무역」을 전개하기 전까지 이어졌다. 국내 기업인들이 무역 열풍에 본격 휩싸이게 된 것은 바로 마카오 무역때문이었다.

마카오무역은 영국계 2천톤급 선박인 페어리드호가 인천항에 들어 온 이후 6개월여 계속된 시기의 무역을 말한다. 중국대륙이 모택동의 남진으로 어수선해지자 중국화주들은 홍콩에서 물건을 선적,우리나라로 가져오려 했다. 그러나 영국정청이 이를 허가하지 않자 홍콩서 물건을 선적한 뒤 마카오로 수출하는 양 꾸며 우회,인천항으로 입항하면서 마카오무역이라는 별명이 붙게 됐다. 이때 들어서야 비로소 국가간 제도적인 무역이 나타났다. 포르투갈령인 마카오정청은 한국으로 가는 물자에 수출승인서를 발급했던 것이다.

페어리드호와 큰 거래를 한 국내기업인은 김익통상의 강익하와 삼양무역의 김규면이었다. 처음 입항한 페어리드호는 생고무 양복지 신문용지 등 고급물품을 가득 싣고 들어왔다. 당시엔 고급품은 모두 마카오제라하여 마카오양복 마카오신사라는 말들이 나돌았다.

마카오 무역선은 우리나라에 시계 양복지 면사 모사 페니실린 사카린 등을 싣고 왔고 그대신 폭약제조용인 헤로중석과 화약원료,미군이 불하한 지프차 및 중고차의 부품을 싣고 갔다. 당시 장개석군과 모택동군간에 전쟁을 치르던 중국은 비싼 값으로 이들 전략물자를 사들였고 마카오무역선은 일본이 우리나라에 놓고 간 전략물자를 모으는 일로 재미를 보고 있었다. 국내 기업인들은 일본이 버리고 간 당시로선 하잘 것 없는 물자들을 주고 수십배 이득을 붙여 팔 수 있는 각종 생필품을 받아 잇속을 차릴 수 있었다.

마카오무역선이 싣고간 헤로중석은 지금의 대한중석 전신인 소림광업에서 흘러나온 것이고 화약원료는 한국화약 전신인 조선화약에서 유출된 것이다. 따라서 소림광업의 재고품을 불하받았던 영화물산의 신영균을 비롯,전략물자를 불하받은 국내 기업인들은 이를 계기로 재산을 축적할 수 있었고 영풍상사가 철광석을 수출해 기반을 잡은 것도 이 시기였다.

마카오무역 6개월동안 국내에 남아있던 전략물자재고는 바닥이 났다. 바깥시세를 모르고 있던 당시 국내 기업인들은 결국 6·25를 맞은 뒤에야 당시 황금을 내주고 설탕을 사 먹은 것을 깨닫게 됐다.<이종재기자>

해방전까지는 만주지방에서 무역업을 하고 있던 사람들도 거의 다 서울로 몰려들었다. 최태섭(한국유리),이한원(동아상사),서선하(삼흥실업),전택보(천우사) 등은 만주에서 서울로와 막바로 무역업을 시작했다. 만주의 봉천에서 동화공창이라는 유지공장과 무역업을 하는 삼흥상회를 경영하고 있던 최태섭씨는 일본 미쓰비시상사의 무역업까지 대행할 정도로 호황을 누렸었다. 팔로군이 만주를 장악한 45년 종업원인 중국인들의 도움으로 만주를 무사히 빠져 나와 우선 평안도 철산에서 모나자이트라는 광석을 생산,광업진흥공사에 납품하는 일을 했다. 그는 자식을 키우려면 서울로 가야한다는 생각으로 남하,서울의 중림동에 있는 고무공장을 매입,만주에서 사용한 삼흥실업 간판을 내걸었다. 그는 다시 무역업을 시작했다

서울로 올라온 기업인들은 당시에 번창하던 정크무역 마카오무역 등 거센 무역의 열풍속에서 값비싼 수업료를 내며 사업을 배웠고,또 번창시켰다. 해방후 혼란했던 서울은 기업들에게 꿈의 보금자리였고 희망의 일터였다

특히 기업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줄을 잘 잡아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고 나아가서는 적산불하,원조물자 불하,은행대출 같은 큰 이권을 챙길 수 있었다.그도 그럴것이 해방후 6·25 이전까지의 우리나라 기업인들은 자본이나 사업 경험이 보잘 것 없었던 만큼 일본이 남기고 간 귀속재산의 불하나 원조자금 배정,미 군정의 힘이 필요한 마카오무역 등 경영외적인 요인들에 의해 그 성장속도와 규모가 결정되는 기형적인 과정을 밟고 있었다. 이 때문에 경영풍토가 기업내적인 기술개발이나 창의력,경영합리화에 의존하기보다는 권력과 밀착,특혜에 집착하는 경향을 띠게 됐다.

해방이후 이만한 거금을 가진 사람은 최창학 이외에는 없었다. 그는 이 돈으로 돈놀이를 했다. 해방후 크게 휘몰아쳤던 정크무역과 마카오무역 시절 그의 돈에 의지하지 않은 기업인은 거의 없을 정도였다.

이들 기업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달러였다. 오늘날 기업인들이 땅을 찾듯 당시의 기업인들은 달러를 찾아 분주히 뛰었다. 달러가 있어야 수입이 가능했고 수입은 곧 돈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의 달러는 정부의 뒷심이 없으면 불가능했고 달러배정은 곧 특혜였다

/이 대통령 은행보유불은 직접 통제/「치부직통 코스」… 수단방법 안가려/배정불로 물자수입 또 “돈방석” 재계판도 큰 영향해외에서 물건을 사오기 위해서는 달러가 필요한데 전쟁중이던 50년대초에 달러가 흔할 리 없었다. 그래서 당시의 기업인들은 달러를 구하기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무역회사가 이용할 수 있는 달러는 직접 수출해서 벌어들인 달러 이외에 중석달러·종교달러·암달러·원조불 등이 있었다. 중석달러는 전략물자인 중석을 수출해 획득한 외화인데,이 돈은 기계류·선박·화물자동차 등 산업 부흥자재를 수입하는데만 쓸 수 있었다. 중석달러는 중석수출을 맡고 있던 대한중석이 직접 수입할 때 사용했으나 극히 제한된 무역회사에 특혜불로 배당되기도 했다.

암달러로 유통된 시중달러는 주로 주한 미군들로부터 흘러나왔는데 환율도 높고 거래량도 적어 수입자금으로는 큰 기여를 하지 못했다.

종교달러 역시 그림의 떡이었다. 종교달러는 기독교 선교·전시구호·교회사업 등을 위해 외국에서 송금된 외화로 기독교계통과 깊은 관계를 가진 무역상이 아니면 얻어쓸 수 없었다.

이밖에 원조불과 UN군 대여금 상환불이 있었다. 원조불은 전쟁 복구기에 국내 산업의 판도를 결정하는 자금이 됐다. 상환불이란 정부가 UN군에게 국내에서 사용할 돈을 원화로 대여해 주고 그 대전으로 받은 달러인데 당시 국내 부족물자를 수입하는데 긴요하게 쓰였다.

결국 달러의 대부분은 정부가 배정했고 자연히 달러를 따려는 기업인들의 로비가 성행했다. 더욱이 정부가 배정하는 달러의 환율은 지나치게 낮게 평가돼 달러를 딴다는 것 자체가 치부의 직통코스였다. 정부가 배정하는 달러로 정부가 지정하는 물자를 수입해서 국내에 풀어만 놓으면 그대로 돈방석에 앉았다. 당시의 환율이 비현실적으로 낮게 평가된 원인은 상환불이었다. 원화를 대여해 주고 달러를 받기 위해서는 낮은 환율이 유리했기 때문이다.

당시 환율문제는 그 누구도 입에 올릴 수 없었다. 달러라면 벌벌 떨던 이승만대통령에게 환율을 현실화시키자는 건의를 했다가 목이 달아난 장관이 있을 정도였다. 오랜 망명생활을 통해 가난에 이골이 난 대통령이었다. 51년 12월15일에는 은행보유불 사용에 대해 액수의 다과를 막론하고 대통령이 인가하도록 하는 규정이 만들어져 달러에 관한한 1달러라도 대통령의 결제가 필요했다. 달러에 대한 집착은 프란체스카 여사도 마찬가지였다.

해운공사를 설립하고 무역업에도 참여하다 전쟁중에 일본공사를 지낸 김용주의 회고다.

『50년 7월중순 대전방위선이 흔들릴 때였다. 대한적십자사 총재였던 이기붕이 전화를 걸어 부산시내에 부상병들이 몰려오고 있으나 약이 없어 손을 쓸 수가 없다면서 약품조달을 요청했다. 당시 주일대표부에 달러가 있을 리 없었다. 생각다 못해 한국은행 동경지점의 김진형 부총재에게 요청,동경지점의 정부보유불 1만달러를 풀기로 하고 백방으로 뛰어 약품을 구했다. 그러나 달러사용에 대한 재가가 문제였다. 의약품을 급송한 후 대통령의 재가를 기다렸으나 기다리던 대통령의 재가대신 프란체스카 여사의 전화가 걸려왔다. 누구 마음대로 정부보유불을 썼느냐는 노기 띤 추궁이었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사정얘기를 제대로 듣지도 않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경무대 안팎이 관리하는 달러를 기업인들이 사용하기는 그만큼 어려웠다. 그래서 정치권에 대한 기업인의 곡예가 시작됐다. 해방후 혼란기에 줄을 잘 잡았던 백낙승의 괴력이 발휘된 것이 이즈음이었다. 재계 판도는 곧 정부의 달러를 따느냐 못따느냐에 달려있었다. 정부가 실시한 경매에서 달러만 잡으면 돈방석에 앉았으며 그렇지 못하면 뒷전으로 밀릴 수 밖에 없었다. 해방후 대권의 향배를 가늠할 수 없던 시기에 벌어졌던 기업인들의 줄잡기 경쟁과 귀속재산 불하전이 정경유착의 1기라면 당시의 로비는 정경유착 2기인 셈이다.

재벌과 정치와의 관계는 이후 전쟁 복구기의 원조불 경쟁과 경제발전 과정에서의 차관전쟁,각종 정부주도 사업권 획득 등으로 이어져 국내 재벌사의 뚜렷한 특징으로 남는다.

한국의 기업사가 정경유착의 역사로 점철되고 재벌들이 오늘날 국민들의 따가운 시선을 받게 된 이유는 바로 여기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정치곡예의 테크닉이 기업의 흥망성쇠와 직결됐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재벌이 봉쇄적인 가족경영의 형태를 띠게 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달러를 놓고 벌어진 정치권과 기업의 관계는 급기야 국내 최초의 대형 경제사건인 중석불 사건을 낳고 말았다.<이종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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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목재인물사 | 대성목재공업(주) 전택보(全澤珤) 회장 편(65)

브라질에 합판공장 설립도 추진

설봉은 전자사업과 섬유사업 외에도 기발한 아이디어로 사업을 창출해 낸 것이 많았는데, 대리점 개설의 경우 부실기업으로 정비되기 전부터 의 대리점을 이미 하고 있었으며, 부실기업으로 정리된 이후인 1971년에는 세계3위의 대선박회사인 <가와사끼 기선 회사>의 대리점을 개설했고, <타이 인터내셔날 항공>의 대리점도 개설하였다. 그리하여 1972년에는 한국선박대리점협회 회장직도 역임했다. 해외시장개척의 선구자로 정평이 나있던 설봉은 1971년부터는 중동진출을 계획하였는데, 그 결과 1976년에는 오만에 시멘트 1만 여 톤과 타이어튜브를 처녀 수출하는데 성공하였다.

컨테이너 하치장 사업도 하였는데, 수출입화물의 하치장(container yard)과 CFS(container Freight station)의 시설 없이는 해운업과 해운대리점사업이 발전할 수 없다고 보고, 1971년에 부산에서 이 사업을 시작하였다. 이에 대하여 1971년 1월5일자 <산업경제신문>은 ‘천우사 컨테이너 화물선 취항’이란 제목으로 ‘천우사는 국내 최초로 컨테이너 선박 3척을 도입하여 서울~시애틀~로스앤젤레스 간을 매월 3회씩 운항하기 시작했다. 컨테이너 운송이란 항구에 도착한 화물을 보세구역에서 일단 모두 꺼낸 다음 일일이 수속을 밝아 개별통관하는 재래식 통관과는 달리 컨테이너 자체와 함께 그 안에 실은 화물을 목적지까지 운송한 다음 화물을 통관하는 방식을 말한다’고 보도하였다.

신용카드 사업도 하였는데, 1964년 크레딧카드(credit card)란 말조차 생소하던 때에 신용카드 사업을 시작한 것으로 미국 최대의 여행사인 <아메리칸 익스프레스(American Express)>회사의 한국 총대리점을 하였다. 이 사업이야말로 신용 하나만으로 이루어낸 사업이었는데, 이것이 오늘날의 한국신용카드 주식회사가 된 것이다.

또한 브라질에 합판공장 설립을 추진하기도 하였다. 1977년 6월18일자 <무역통신>의 기사를 보면 ‘브라질에 합판공장, 천우사서 합작 건설키로’란 제목으로 ‘천우사(대표 전택보)는 남미 아마존강 유역에 브라질과 합작으로 합판공장을 건설키로 하고 국내에서는 최초로 합판공장의 해외진출을 추진하고 있다. 천우사는 북부 브라질 아마존강 유역의 마나우스에 자본금 400만 달러, 생산능력 일산 1만2000매 규모의 합판 공장을 50:50의 비율로 현지법인으로 설립하여 내년 하반기부터 생산을 시작할 예정이라고 한다’고 보도하였다. 그러나 브라질의 합판공장 설립은 브라질 당국의 법적 규제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설봉은 탁월한 ‘아이디어 메이커’

천우사가 부실기업으로 정비된지 불과 4년만인 1975년 말 현재 ‘정상을 달리는 대기업’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발전하였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부실기업으로 정비될 당시 700명의 간부사원들과 6000여 명의 공원들이 모두 떠나가고 불과 90여 명의 간부사원들만 가지고 새출발을 했던 천우사는 이제 다시 500여 명의 간부사원과 2500여 명의 공원을 가진 대기업으로 성장한 것이다.

천우사가 이렇게 빠른 시일 내에 대기업으로 재등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겠지만, 첫째로 설봉의 신용을 꼽아야 할 것이다.   <조선일보>가 1971년 8월17일자 신문에 천우사의 재기를 ‘신용간판 전택보, 활기찾는 천우사’란 제목으로 표현한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설봉의 신용은 천우사가 재기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천우사가 이토록 빨리 재기할 수 있었던 것은 설봉이 탁월한 ‘아이디어 메이커’였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설봉은 항상 말하기를 “아이디어에서는 2등을 해서는 안된다. 항상 1등을 해야한다. 2등은 패배자일 뿐이다”라고 했는데, 그만큼 아이디어에 대해서는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었다. 설봉은 항상 기발한 아이디어로 사업을 창출해 내었는데, 전자사업의 경우 TV생산사업부문은 1967년부터 착상한 것이었다. 그 착상이 네덜란드 필립스(Phillips)사와 기술제휴를 체결하게 하였고, 1971년 8월에 이르러서는 TV 첫 생산품을 시장에 내 놓을 수 있었으며, 1972년 10월경에는 3억 원을 투입, 구로공단에 부지 1만2000평을 확보하여 건평 1500평의 공장을 짓고 진공관 TV에서 TR-TV로의 기술전환을 했다. 이때만해도 한국의 TV생산기술은 기술제휴 없이는 불가능했으므로 재력에 있어서 열세에 있던 천우사는 기술전환으로 다른 회사와 경쟁하는 길밖에 없었다. 천우사는 국내업체로서는 처음으로 TR-TV를 생산한 회사로서 TV판매량에 있어서는 ‘금성사’와 ‘대한전선’에 이어 3위로 랭크되었다. 그리고 1974년에는 이란 고성능 카세트를 시중에 내놓았고, 컬러TV 개발도 완전무결한 단계로까지 준비해 놓고 있었다.

섬유사업의 경우 설봉은 자체공장이 있어야 하겠다는 생각에서 가리봉동 수출공단 대지 위에 3층짜리 봉제공장을 짓고 수출목표를 1000만 달러로 세웠다. 공장은 12라인으로 직원수만 해도 1000명이 되었고, 섬유공장 단일공장으로는 국내 최대 규모의 공장이었다.

출처 : 한국목재신문(https://www.woodkorea.co.kr)

한국목재인물사  |   대성목재공업(주)  전택보(全澤珤) 회장 편(64)
천우사의 재기(再起)

천우사만 남기고 그 계열이 부실기업으로 무너진 지 어언 4년이 지났다. 이 4년간은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여간 복잡하고 험난한 시기가 아니었다. 이 기간 동안 있었던 사건들을 대강 열거해 보면 1969년에는 위장간첩 이수근 사건, 무장공비침투만행사건, 미해군정찰기 피추사건, KAL여객기 납북사건이 있었다.  1970년에는 와우아파트 붕괴사건, 김대중 씨 대통령 후보출마, 1971년에는 박정희 씨 7대 대통령당선, 8대 국회의원 선거, 대연각 호텔 화재가 있었다. 1972년에는 7.4남북공동성명발표, 8.3조치(모든 기업체 사채동결), 국회해산 및 비상계엄령 선포, 개헌국민투표실시, 유신헌법확정과 공표 등이 있었다. 1973년에는 제9대 국회의원선거, 통일주체 국민회의에서 박정희 씨 대통령선출, 유류파동 그리고 이듬해인 1974년에는 새해 벽두부터 박 대통령의 긴급조치1호 발표(1월 8일), 이어 2호, 3호, 4호가 계속 발표되었다.  8.15광복절 기념식에서 육영수 여사가 흉탄에 맞아 세상을 떠나는 불상사, 땅굴발견사건 등 온 국민을 경악케 하는 사건들이 끊일 줄 모르게 일어났다.

설봉은 이러한 엄청난 사건들이 회오리바람처럼 휘몰아치는 속에서도 천우사를 재건하기 위하여 처절한 노력을 계속하였다.

1973년 5월27일자 <조선일보>는 ‘유신(維新)과 8.3조치 이후의 재계’라는 제목으로 재계의 내막을 소개하는 특별시리즈에서 전자공업 등으로 사업 확장에 열을 올리는 천우사의 기사를 싣고 있다.

‘1960년대 6년 동안이나 줄곧 수출최고상을 수상하고 해외시장개척에서 한때 ‘한국의 신용’으로 통했던 전택보 씨가 부실기업정리로 대성목재 등 5개 업체를 은행에 넘겨주고 나머지 천우사만 가지고서 기업을 운영하며 차츰 옛날의 영광을 되찾아 가고 있다. 30억 원에 가까운 사채를 안고 산하업체(대성목재, 조선피역, 삼익선박, 한국축산개발, 신진완구)들을 은행관리로 넘겨주었을 때만 해도 재계는 천우사의 재기를 어려운 것으로 내다 봤다.

당시 재계에서는 전택보 씨가 사회사업가이지 결코 기업가는 될 수 없는 사람이라고 그의 사업비운을 동정하기도 하고 비웃기도 했다. 그러한 전택보 씨의 천우사가 요즈음 사업 확장에 열을 올리고 있다. 천우사는 지난 4월말, 구로동 공업단지에 건평 2500(8250㎡)평의 섬유공장과 1200(3960㎡)평의 전자제품공장의 증설을 마쳤다’고 소개했다.

출처 : 한국목재신문(https://www.woodkorea.co.kr)

조흥은행, 대성목재 윤 전무를 파면결정
조흥은행이 대성목재 전무로 근무하고 있는 윤순선 씨를 파면키로 결정했다는 소식을 들은 전택보 사장은 급히 윤순선 전무를 서울 천우사 사무실로 오게하여 윤전무와 함께 조흥은행 행장을 찾아갔다.
자기가 이렇게 된 것은 그렇다치고 자기때문에 함께 일해온 전무가 희생당하는 것을 보고는 참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성명서 발표 주모자를 윤전무로 생각하는 것은 조흥은행의 오해일 뿐이라고 설명하고 파면결정을 취소시켰다.

이에 대하여 윤순선 전무는 그당시 일을 다음과 같이 회상하였다. “수백억의 재산과 기업이 부실로 정리당해 보통사람 같으면 절망과 허탈에 빠져 있을 형편인데도 전택보 사장님은 자기의 부하직원이 파면 당하는 것을 걱정한 나머지 보기도 싫은 은행장을 만나러 가자고 내게 명령했던 것입니다.
나는 노사장의 명령을 어길 수가 없어서 사장님을 따라 조흥은행 행장실을 찾아갔습니다. 행장은 먼저 온 손님들을 대하고 있어서 우리는 약 30분동안 대기 응접실에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때 손님 두분이 대기실로 들어왔습니다. 한 분은 삼성물산 전무로 기억됩니다.
그는 전 사장님을 보더니 겸손한 태도로 ‘얼마나 심려가 되십니까?’하고 정중히 인사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전 사장님은 크게 웃으시면서 ‘나는 종교인이기 때문에 사주팔자 같은 것을 별로 본 일은 없지만, 내 운명이 70까지라 하더군요. 그런데 지금 내 나이가 70이 다되었는데도 죽지 않아요. 건강에도 아무 이상이 없고 골프도 점점 더 잘 맞아요.
그래서 사주팔자란 미신이다. 맞지 않는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번에 부실기업이 되고 보니 사주팔자가 맞는구나 싶더군요!’ 하면서 크게 웃으시던 모습…. 또 계속해서 ‘사람이 아무리 위대하다 해도 죽으면 부고 한장이면 끝인데 내 경우는 그렇지가 않단 말이요, 대성목재 부실기업의 여파는 어찌나 큰지 일주일이 지나도 신문·잡지 등에서 부고가 계속되고 있으니 이렇게 굉장한 부고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 이렇게 담소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또 들어온 다른 손님들과 이야기하는 중에 ‘내 나이 70이 되어도 죽지 않는 것을 보니 아마 80까지는 더 일하라는 것 같아요. 앞으로 10년은 틀림없이 더 살겁니다. 더 힘차게 일해야지요’하면서 당당한 표정을 짓고 계셨던 것입니다.”

출처 : 한국목재신문(https://www.woodkorea.co.kr)

막내아들 순재는 집 한 채도 없어
1969년 6월24일, 전택보 씨의 대성목재 등 5개 업체가 부실기업으로 처리될 때 설봉은 이미 70세의 노인, 보통사람 같으면 까무라쳐 넘어지거나 아주 인생을 포기하고 말았을 것이다. 사실 정부의 이러한 처사는 이미 70노구가 된 설봉에 대해 너무 가혹한 처사였다.

그 때 항간에는 정부 당국이 천우사 계열 5개 업체를 부실기업으로 처리한 것은 사업이 부실해서 뿐만 아니라 전택보 사장이 외국차관을 들여와 사업에는 안 쓰고 고리채 놀이를 했기 때문이고, 막대한 재산을 외국으로 빼돌렸다는 풍설이 떠돌았는데,
설봉은 이 풍설을 듣고 박정희 대통령에게 “이러이러한 사실을 박대통령께서도 인정하고 계시는 모양인데 사실 그러한 일이 있었는지의 여부를 조사해 주십시요”라는 내용의 서한을 보냈던 것이다.

그 뒤 정부 측에서는 실제로  조사를 해 보았던 모양인데 전택보 씨의 막내아들 순재는 집 한 채도 장만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는 이러한 소문은 전연 사실이 아닌 중상모략임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설봉은 박 대통령에게 ‘한국축산개발’만은 돌려달라고 요청을 했다.
“한국축산개발은 제가 꿈과 애착을 가지고 일으킨 사업일뿐 아니라 개인의 이익보다 나라의 이익을 위해 온갖 정성을 다해 이루어 놓은 사업이니 한국축산개발만은 돌려주십시요”라고 요청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축산개발은 전택보가 아니면 못한단 말인가”라고 하면서 일언지하에 거절했다는 것이었다.

당시 대성목재 전무로 있었던 윤순선 씨의 말에 의하면 대성목재가 부실기업으로 처리되자 5600여명의 직원들은 “대성목재가 왜 부실기업체냐? 우리끼리 10억을 증자하여 대성목재를 인수하겠다”면서 성명서를 발표하는 동시에 증자위원회를 조직했다고 한다.
그러자 관리은행인 조흥은행은 아무래도 전무인 윤순선 씨가 주모자일 것임으로 그 주모자인 윤순선 씨를 파면키로 결정했다고 통보해 왔다고 한다. 그 때가 1969년 8월 어느날이었고 그러니까 부실기업으로 처리된지는 약 2개월 뒤였다고 한다. 이 사실을 들은 전택보 사장은 걱정이 되었다.

자기가 당한 것은 관계없으나 자기 때문에 함께 일하던 전무가 주모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주모자로 몰려 파면 당하는 것을 보고는 침묵을 지킬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설봉은 급히 윤 전무와 함께 조흥은행 행장을 찾아갔다.

출처 : 한국목재신문(https://www.woodkorea.co.kr)

대성목재 전 직원들 “우리가 맡겠다”

대성목재가 부실기업으로 정리된 사실이 발표되자 가장 충격을 받은 것은 당사자인 대성목재의 직원들이었다.
대성목재의 5600여명의 직원과 공원들은 대성목재가 부실기업으로 정리되는 것을 반대하는 성명서를 6월27일자 신문에 냈다.

신문지 절반 크기의 대대적인 것이었는데 그 내용도 너무 절실하고 대담한 것이어서 어느 신문사는 이 막대한 광고비를 종업원들이 어떻게 낼 수 있겠느냐면서 선뜻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고 한다. 사태가 이쯤 되자 각 신문들은 이를 크게 보도했다.

6월29일자 <주간조선>은 ‘부실기업체의 충실한 종업원 궐기’라는 제호로 특집보도를 하기도 했다. ‘40만 인천시민의 10% 가까이 되는 사람의 입을 먹여살렸고, 월급이 하루 늦고 이른데 따라 인천시민의 물가에 영향을 끼치는 대성목재주식회사가 당국에 의해 부실기업체로 단정돼 관리은행에 인수처리될 운명에 놓였다’로 시작해 대성목재의 실정과 종업원들의 성명서 내용을 예리하게 분석 보도했다.

대성목재가 이처럼 부실기업체라는 보도는 일반 국민들로서는 그 부실의 자세한 내용을 이해할 수도 없고 또 당국이 한 일이니까 이건 정책적인 문제라고 만 이해하고 있었다. 다만 대성목재를 살리려는 5600여 명에 달하는 종업원들의 자세가 대단하다는 것이다.

대성목재가 딴 사람에게 넘어간다할지라도 일은 계속될 것이고 따라서 대부분의 종업원들도 그대로 있게 될 텐데, 그렇다면 무엇때문에 종업원들이 이처럼 어려운 일을 자청하고 나선 것일까?

이 어려운 일이란 부실기업체로 단정된데 대한 그들의 공식반응에서 나타나고 있다. 그래서 이 성명서의 골자를 나열해 보면 △우리들은 이 회사의 각 분야에서 일하고 있음으로 이 회사가 부실기업체인가 아닌가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이번 정부 결정에 대해서는 정부의 권위를 위해 그 결정을 번복하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우리가 알고 믿기에는 대성목재가 부실업체가 아닌 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이 업체는 타인에게 처분될 수 없고 우리 5600명 전체 종업원들이 인수할 것을 선언한다. △우리들은 비장한 각오와 결심으로 각자의 전 재산을 바쳐 일금 10여억 원을 갹출하기로 결의했다고 돼 있다.

출처 : 한국목재신문(https://www.woodkorea.co.kr)

정치바람 타기 싫어하는 기업인

이 밖에도 거의 모든 신문들이 사설란에서 이 문제를 다루면서 천우사(대성목재의 모체)를 동정했는데,
6월26일자 <서울경제신문>은 ‘새로운 기업관, 성실해야 발전할 수 있는 환경의 조성’이란 제하의 사설에서 “전택보 씨는 국가와 은행에 미안한 마음을 금할 길 없음을 피력한 바 있다.
이 비운의 기업인이 이 나라 무역증진에 이바지한 과거를 회상하며 천우사의 앞날을 축복해야 할 것이다. 그가 남긴 쓰라린 교훈이 이 나라 산업계에 새 기풍을 진작시키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했고, 같은 날자 <조선일보>는 ‘정치 모르는 전택보 씨에 동정’이란 제하에 “전택보 씨의 대성목재 등 5개 업체가 주 채권자인 조흥은행으로 넘어간다는 발표가 있자 경제계 인사들은 가슴아픈 일이라고 동정어린 한마디씩을 했다.
전 씨에게 동정이 집중된 까닭은 그가 정치바람을 타기 싫어하는 기업인이었다는 점과 우리나라 보세 가공업의 선구자였다는 데에 있는 듯 했다. 전 씨는 조화, 완구 등 보세가공의 각 분야에 거의 손 안댄 곳이 없으며 가공수출분야를 리드해 왔다.

이러한 새 분야의 개척, 확장에 주력했기 때문에 다른 사업에는 관심을 둘 수가 없어 해체를 당하는 쓰라림을 맛보게 된 것이라고, 특히 전씨가 덴마크 명예총영사를 비롯한 많은 국제 단체의 임원을 겸하고 있는데, 한국경제인의 국제적 위상이 내려갈지도 모른다고 몹시 걱정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했다.

적힌 글은 짧으나 매우 의미 심장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6월27일자 <현대 경제일보>는 ‘천우사 계열 5개 업체의 정비가 뜻하는 것’이라는 제목으로, 6월28일자 <서울경제신문>은 ‘영광 사라진 비운의 전택보 씨, 수출의 개척자 끝내 정비 당해’라는 제목으로 이 문제를 다루었으며 아울러 천우사의 역사와 업적과 함께 이 사건의 언저리를 파헤쳐 놓았다.

이 밖에도 이에 관한 많은 기사들이 있는데 그 중에는 ‘비운의 수출왕 전택보 씨’, ‘전경련, 정부의 천우사 정비 방안에 맞서 정면 반발’등 자극적인 표현의 기사제목들을 여러군데서 찾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부실기업의 정리 사실이 발표되자 가장 충격을 받은 것은 무엇보다도 당사자인 천우사계열 5개 업체의 직원들이었다.

글/ 김상혁  shkim@woodkorea.co.kr

출처 : 한국목재신문(https://www.woodkorea.co.kr)

국내 모든 신문들은 이 사실을 경제란 또는 사설란에 10여 일간 대서특필 했다. 한편 전경련(전국경제인연합회)은 그 해 6월26일 긴급이사회를 소집, 연 이틀간의 긴급대책위원회를 열고 부실기업문제에 대한 건의서를 채택해 정부당국에 제출했다.

그 건의서의 내용은 ①민간 상업차관에 대한 투자에 있어 정부의 ‘지불보증제도’를 지양하고 ②부실기업정비반에는 당해 기업주 및 경제분야의 권위자를 참여토록 개편하고 ③갱생이 가능한 기업에는 일정기간의 여유를 줘야 할 것이며 ④부실기업 정리기준을 자본구성 비율에만 치우칠 것이 아니라 산업성, 전망, 국제경쟁력, 대외신용도에 중점을 둬야 한다고 돼 있다.

제②항에 부실기업정비반에 당해 기업주를 참여시켜야 한다는 말은 천우사의 경우 사전에 아무런 예고도 없이 일방적으로 집행했다는 말이며 제④항에 자본구성비율에 치울칠 것이 아니라는 말은 천우사(대성목재의 모체)가 부채를 많이 진것은 사실이나 산업성, 전망, 국제경쟁력, 대외신용도가 있어왔는데 어찌 자본구성비율 그것만이 부실기업의 조건이 될 수 있겠냐는 말이기도 했다.

<중앙일보>는 소집 이틀 후인 6월28일자 신문에 ‘아이러니한 천우사계열 정비, 전경련이 호신운동’이란 제하에 ‘국내 굴지의 기업인 천우사계열 5개 업체가 부실기업체로 몰려 주 채권자인 조흥은행으로 넘어가는 비운을 맞게 되자 전령련이 긴급사후대책을 논의하는 등 비상사태에 돌입한 느낌’이라고 보도했다.

<동아일보>는 ‘부실기업과 부실경제’라는 사설을 통해 ‘자본구성이 부실하지 않은 기업은 천우사 외에 얼마나 될 것인가? 부실기업의 발생은 기업인에게도 문제가 있지만 따지고 보면 정부당국에 더 큰 잘못이 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부실기업정리정책이 객관적기준에 의해 일정한 원칙이 있어야 하는데 그 대상과 범위가 어떠한 기준에 의해 결정되는 것인지 도무지 알려지지 않고 있다’고 논평했다.

글/ 김상혁  shkim@woodkorea.co.kr

출처 : 한국목재신문(https://www.woodkorea.co.kr)

비운의 수출왕, 마침내 부실기업으로 정비돼
설봉은 그날(1969년 6월24일) 집에 돌아와 밤을 꼬박 뜬 눈으로 지새야 했다. 이튿날 아침, 그제야 비로소 자세한 정비 내용을 알 수 있었다. 이 날 국내 7대 일간 신문들은 일제히 이 내용을 크게 보도했는데 그 중 <한국일보>에 개제된 기사 내용을 보면, ‘천우사계열 대성목재 등 6개 업체 정비… 부채늘고 상환어려워, 청와대 내에 설치돼어 있는 부실기업체 정비반(반장 장덕진 씨: 재무부 이재국장)은 6월24일 오전, 전택보 씨가 소유하고 있는 대성목재, 조선피혁, 한국축산, 삼익선박, 신진완구 등 6개 업체의 정비방안을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 확정했다.
이날 공화당 정책위원장 백남억 씨, 부총리겸 경제기획원장 김학열 씨, 재무부장관 황종율 씨, 상공부 장관 김정열 씨, 청와대비서실장 이후락 씨 등이 배석한 가운데 확정된 천우사 계열 정비방안은

1)6개 업체 중 천우사를 제외한 5개업체는 주 채권자인 조흥은행이 인수하여 정리 처분하고, 전택보 씨로 부터 완전히 인연을 끊게 하는 동시에
2)천우사는 전택보 씨 소유로 그대로 존속시키며 종합무역상사로 육성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당시 대성목재는 자산규모가 108억, 천우사는 18억, 조선피혁은 19억, 한국축산은 3억, 삼익선박은 6억, 신진완구는 1억 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날 전택보 씨 계열 6개 업체의 정비 방안을 승인하는 자리에서
“1)기업은 자기 자본 조달 능력이 있는 사람이 해야하며 과거와 같이 사채를 쓰더라도 공장만 지어 놓으면 돈을 벌 수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2)그 기업이 잘못되면 그 기업체가 망할 뿐 아니라 그 기업인도 함께 책임지는 기업윤리의 확립이 소망된다.”
고 말했다.

6월25일자에 보도된 기사내용은 각 신문이 거의 같았으나 유독 <경향신문>만은 기사 외에 ‘기자석’이라는 코너에 ‘2개월전까지만 해도 1000만 달러의 현금차관을 들여올 만큼 건전기업인으로 알려진 전택보 씨가 20년간 길러온 대성목재 등 5개 업체를 내놓게 된 데 대해 일부 업계에서는 ‘가혹하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지만, 자기자본 4억7000만원으로 162억원의 대기업을 굴려 왔다는 것이 오히려 불가사의 하다는게 중론’이라고 논평했다.
글/ 김상혁  shkim@woodkorea.co.kr

출처 : 한국목재신문(https://www.woodkorea.co.kr)

한국목재인물사  |   대성목재공업(주)  전택보(全澤珤) 회장 편(50)
청천벽력 같은 뉴스, 부실기업정비

1969년 6월24일, 그날도 설봉은 예전과 다름없이 아침 일찍 일어나 산책을 하고 소공동에 있는 천우사(대성목재의 모체) 사무실로 나갔다. 책상에 앉아 내일이 바로 6·25라는 생각이 들면서 19년전 그날에 있었던 일들, 부산 피난시절, 민족의 수난과 경제파탄에 얽힌 쓰라린 일들을 주마등처럼 되새기며 과거를 회상하고 있었다.
그리고 설봉은 앞으로 천우사가 할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고 있엇다.
이제 천우사가 은행관리로 넘어간지도 어느덧 반년이란 세월이 지났다. 그동안 부끄럽기도 했고, 부자유스럽기도 했고, 또 유능한 사원들이 하나 둘 자기 곁을 떠날 때면 낙심하여 괴로울 때도 한 두번이 아니었으나, 그래도 1000만 달러의 외국차관을 얻어다가 30여 억원의 사채를 은행부채로 대치시키게 되었고 다년간 질질 끌려오며 숙제로 남아 있던 P.L480 잉여농산물 수입물자도 불원간 도착하게 되어 있는 것은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었다.

이런 생각을 하던 설봉은 “천우사의 장래도 반드시 어둡지 많은 않구먼! 한 달에 근 1억원의 사채이자를 꼬박 꼬박 물어야 했는데 이제 이것도 해결되었고, 이제 모든 사원이 한데 뭉쳐 힘써 일하면 회사운영은 다시 호전될 수 있으리라.

그리고 한창 공사 중에 있는 대성목재의 월미도 공장만 완공된다면 거기서 연간 10억여원의 순이익은 어렵지 않게 날 것이고 이렇게만 된다면 적어도 5년 내에 모든 것을 정리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 이르러서는 가슴이 뜨거워 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그날 정오쯤 사무실에 전화가 걸려왔다. 친구인 김성곤 씨로부터 걸려온 전화였다. 전화를 건네받은 설봉은 김성곤 씨의 음성이 심상치가 않음을 직감했다.

그의 목소리는 매우 심각했다. 그 내용인즉슨, 이날 상오 청와대에서 박정희 대통령 주재로 부실업체정비 관계관 회의가 열렸는데 이때, 장덕진 씨(당시 재무부 이재국장)가 제출한 천우사 계열에 대한 정비방안이 승인되었다는 것이었다. 이 전화를 받은 설봉은 눈앞이 캄캄해지고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이 소리는 바로 천우사와 모든 방계업체가 부실기업으로 정비된다는 폭탄선언이었다.
“무슨 소니냐? 우리회사가 하루 아침에 무너져 내린단 말인가!” 정말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글/ 김상혁 shkim@woodkorea.co.kr

출처 : 한국목재신문(https://www.woodkorea.co.kr)

한국목재인물사  |   대성목재공업(주) 전택보(全澤珤) 회장 편 (47)

1968년. 그 해 여름을 설봉은 무겁고 우울한 마음으로 보내야 했다. 그 해는 극심한 가뭄으로 국민전체가 일기예보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는데다가 설봉은 개인적으로 사업상 여러가지로 어려운 문제들이 산적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업상의 문제들은 잘 풀리지 않은 채 여름은 지나가고 가을이 찾아왔다. 설봉에게는 이 가을이 유난히도 슬쓸하게 느껴졌다.

설봉이 잠을 잘 이룰 수가 없어 뜬 눈으로 누워있노라면 자그마한 정원 구석에서 찌르륵대는 귀뚜라미 소리가 그의 마음을 더욱 처량하게 만들었다.
바람소리와 함께 우수수 떨어지는 낙엽소리도 설봉으로 하여금 잠을 못 이루게 했고 ‘나도 이제 많이 늙었구나’하는 생각에 잠기게 하였다. ‘농민들은 몸에 씨를 뿌리고 여름에 김매어 가을에 거두어 들인 것을 겨울에 꺼내먹으면서 인생을 즐기겠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무엇으로 인생을 즐길 수 있단 말인가? 혹시 내가 바로 그런 부류의 사람이 아닐까? 젊었을 때의 이상도 꿈도 이제는 다 사라져 버린 그런 사람은 아닐까?’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설봉은 자기 자신과 지난 날들을 돌이켜 보며 잠을 잘 이루지 못했다.
하지만 설봉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자기의 삶은 조금이라도 남에게 보탬이 돼 주려고 노력했던 삶이었지 결코 자신의 출세나 치부만을 위해 살아온 삶은 아니었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사는 것이 사람답게 사는 것이지 자기 혼자만 잘 살고 제 욕심만 채우려고 한다면 부끄러운 삶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도 해 보았다.

그리고 그는 ‘오늘 날과 같이 사회가 공동체화 돼 가는 세상에 있어서는 개인주의는 용납될 수 없다. 아무리 자유경제체제라 할 지라도 개개인이 제멋대로 벌어 멋대로 쓰라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인생관도 이제는 많이 달라져야 할 것이다’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런데 천우사의 형편은 10월에 접어들면서 더욱 어려워졌다. 재정난이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오랫동안의 사채부담으로 영업이익은 거의 이자로 지불해야 했고 최근에 이르러서는 영업실적마저 부진하여 이자에 이자가 붙어 사업유지를 아주 어렵게 만들었다.

1968년 12월, 마침내 천우사는 은행관리회사가 되고 말았다. 은행관리란 어찌보면 특혜조치다.
왜냐하면 정부당국이 몇가지 이유를 들어 은행으로 하여금 그 기업의 부채를 맡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천우사의 경우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주어졌다.

첫째, 천우사는 다년간 가장 많은 수출실적을 올린 회사로서 국제적 신용도에 있어서도 무시 못할 존재임으로 이를 붙들어 줘야 한다. 둘째, 천우사는 한 고비만 넘기면 다시 살아나서 수출진흥에 공헌을 할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이것은 하나의 특혜조치가 틀림없었다. 그러나 설봉은 마음이 아팠다. 이렇게 정부의 혜택을 받는다는 것이 자기의 신념과 자존심을 무너뜨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때 설봉은 “나라는 존재는 없어지고 마는 것만 같았다. 돌이켜 생각하면 이것이 내 운명이요, 팔자가 아닌가 한다”고 탄식하며 은행관리사가 된것을 몹시 가슴아파 했다.

출처 : 한국목재신문(https://www.woodkorea.co.kr)

1947년에 무역회사 천우사를 설립하여 경영하였다. 이후 대성목재공업주식회사·조선피혁주식회사를 인수하기도 했다.

전쟁은 파괴를 의미한다. 남한은 무에서 출발했다.

그랬더니 朴장관께서 ‘그거 내가 만든 것 아니야. 허정 (許政) 과도정부 때 상공부장관하던 전택보 (全澤珤.작고) 씨 알지. 천우사 사장 말이야. 그 양반이 제일 먼저 사용했어. 들어보니까 좋은 것같아 내가 쓴 거지’ 라고 대답하더군요. ” 이 무렵 朴대통령의 수출에 대한 인식을 보여주는 일화 한토막. 어느 날 朴장관은 朴대통령의 지방순시에 동행했다가 기차안에서 느닷없는 질문을 받았다.

“朴장관, 우리나라 옛말에 사농공상 (士農工商) 이라는 말이 있지 않소. 내가 보기에 우리나라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상공농사’ 가 돼야 할 것같아. 朴장관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 당황한 朴장관은 얼떨결에 “각하, ‘상’ 이 ‘공’ 보다 앞서야 한다구요” 하고 되물으며 잠시 생각을 가다듬은 다음 “제 생각에는 ‘공상농사’ 가 더 맞을 것같은데요” 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朴대통령은 “물건만 만들면 뭣해요. 팔지 못하면 아무리 많이 만들어도 소용없어요. 수출이 제일이야” 라고 설명했다.

전택보(1901~1980) 보세가공무역

1967년은 박정희 정권의 제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 시작되는 해였다.제1차 경제개발계획도 무역정책에 중점을 두었었지만, 제2차 경제계발계획의 무역정책특색도 첫째는 수출 제1주의의 지속, 둘째는 무역자유화 정책의 촉구, 셋째는 수출 진흥정책의 다양화였다.수출 제1주의의 제3공화국정부는 제2차 계획초년도인 1967년의 수출목표를 3억6천만달러로 책정하였다.
그런데 그해 천우사(사장 전택보)는 1513만 달러의 수출실적을 올려 65년, 66년에 이어 67년에도 또다시 훈장을 탔다. 3년 연속 훈장을 타게 된 설봉은 <천우사 사내보 12월호>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는데 이 글에서 그가 얼마나 보람을 느끼며 흐뭇해하였는지를 엿볼 수 있다.

“금년에도 총 수출액 3억6천만 달러의 정부 목표 중에 합판이 4200만 달러, 피목 및 기타 보세가공품이 3000만 달러, 스웨터가 2500만 달러, 도합 1억 달러에 해당하는 품목이 모두 우리가 개척한 상품들의 수출실적입니다.그 중에서도 자랑스러운 것은 합판수출이었습니다. 처음에는 클레임을 받기도 하는 등 수출에 애로가 많았었으나 차차 품질을 인정받기 시작하면서 수출량이 늘어난 합판수출. 천우사는 대성목재 합판수출 덕분에 1963년 제1회 수출의 날에는 전국 수출업체 중에서 1위를 기록할 수 있었고, 64년 2위를 제외하고는 65년, 66년, 67년 연달아 수출실적순위에서 1위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의 이러한 감회는 그가 평소 주장했던 보세가공과 자신이 직접 개척한 합판수출이 수출진흥에 큰 역할을 한 것에 대한 자부심이기도 하였다.

설봉은 보세가공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설봉이 보세가공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게된 것은 6·25 전란후 수복된 서울에서 수많은 실업자들이 방황하고 있는 것을 본 이후였다.

전쟁으로 생명을 잃은 사람이야 어쩔 수 없다치더라도 살아남은 사람들조차 앞으로 살아갈 길이 막막하게 느껴질 정도로 수복된 수도 서울의 모습은 참담했다.
거리에는 수많은 실업자들이 우글거렸고 전쟁미망인, 고아들은 이리저리 방황하고 있었다. 신문지상에는 연일 생활고로 인한 일가족 집단 자살, 강도, 살인, 사기 등의 사회악 기사가 가득차 있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국민은 극심한 빈곤 때문에 살기가 어려웠고 돈있는 사람들은 그들대로 불안감때문에 하루하루를 떨면서 살아가는 무서운 세상이었다.

세상형편이 이렇게 돌아가는 것을 본 설봉은 우리나라가 잘 살 수 있는 좋은 방법이 없을까 곰곰히 생각하게 됐다. 우리나라는 자원도 없고 변변한 기술도 없다. 약간의 생산시설마져도 6·25전란으로 잿더미 속에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나 아직도 사람은 많다. 그 노동력을 잘만 활용하면 활로가 트일 것이다. 생각이 여기까지에 이르자 설봉은 우리나라가 살길은 보세가공뿐이라고 느끼게 됐다. 지하자원개발이니 수산자원개발이니 개발 대상이 많겠지만 인적자원을 어떻게 개발하느냐가 우선과제이다. 북한 피난민들의 대거 월남, 거기에 인구의 자연증가는 거대한 인적자원을 구성하고 있으나 이 자원을 개방하지 못하고 있다. 이 많은 사람을 잘 활용하면 선진 제국과 경쟁해 이길 수 있다. 공장을 세워놓고도 노동자가 없어서 쩔쩔매는 나라의 기업인이 본다면 부러워할만큼 우리에게는 노동력이 풍부하다. 이 노동력을 이용 못한다는 것은 기업인의 역량부족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저렴한 노동력을 이용해 수공업, 가내공업으로 중소기업을 급속히 발전시키는 것이 적은 자본을 가진 우리가 조속한 시일 내에 실업자를 구제하고 국제수지를 개선시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전제하고 나서 그는 일본과 홍콩으로부터 기술을 도입해서 섬유제품, 2차가공품, 부품생산공장의 설치를 해야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그밖에도 크리스마스 장식업, 조화, 가발, 농구화, 메리야스, 양말, 수예품 등 할일이 얼마든지 있다고 역설했다. 우리국민이 공것을 바라지 말고 우리의 힘으로 우리의 경제난을 타개해 보겠다는 굳은 결의를 가지고 노력한다면 수년내에 억대의 외화를 벌것이 틀림없다고 외쳤다.

그리하여 설봉은 그당시 상공부장관, 재무부장관과 논의해 가칭 ‘가공무역추진위원회’라는 단체를 발기시켰다. 이 위원회의 취지는 우리나라에 없는 원료를 외국에서 도입해 이것을 가공해 수출하는 업체를 돕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출처 : 한국목재신문(https://www.woodkorea.co.kr)

합판사업/대성목재

대성목재공업은 일제강점기였던 지난 1936년 조선목재로 출발, 1945년 해방과 함께 손병도씨에게 경영권이 넘어갔다가 1955년 천우사를 새 주인으로 맞은 후 1960년대 합판 1억달러 수출을 주도했다.1936년 조선목재공업로 시작해 86년 동안 인천 향토기업으로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대성목재공업이 동화기업에 흡수합병된다.

1936년 인천 만석동에 “조선목재 공업주식회사”라는 제재소 자리에, 1942년 “대성목재공업주식회사”라는 합판공장을 만든 것이 오늘날의 대형합판공장이 된 것의 효시라고 할 수 있다.

대성목재 공업주식회사는 초창기 소규모의 합판공장으로서 콩풀을 사용해서 합판을 만들다가 60년 일산 10,000매 공장으로 늘리고 61년 천우사 전택보씨가 인수하면서부터 일산 42,000매 규모의 큰 합판공장이 되었고, 65년에는 최초로 필리핀에 주재원을 파견하기도 했다.

당시에는 필리핀에서 주로 원목을 구입하였는데, 오늘날 우리가 상상하기에는 힘들은 직경 1m정도 되는 불그스레한 라왕원목이 한 달에 4배씩이나 인천 앞바다에 들어오곤 하였다.그 때는 내노라 하는 종합상사도 없었고, 서울상대 출신들이 은행보다 천우사라는 무역회사를 더 선호하는 시절이었는데, 천우사에 입사한 엘리트들이 대성목재에 근무하였던 것이다.

필리핀을 필두로 해서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에 주재원을 파견하기 시작하였고 모두 서울 상대 출신들이 주재원으로 나가는 게, 통상화 되다시피 했다. 그 때는 외국에 나가기도 힘들은 시절이었고, 주재원으로 나가는 것이 영광이기도 한 시절이었다. 대성목재는 근로자가 3,500여명이었는데, 대성목재 월급날이면 인천시내가 술렁이고, 술집, 음식점들이 좋아하던 시절이었다. 65~66년 당시 3,500여명 이면, 90년대초 삼익악기, 영창악기 등이 5,000명인 것과는 대조가 안 되는 것이었다.

전택보 회장 대성목재 월미공장 건설
당시 대성목재에 일반공으로 취직하려면, 브로커에게 일만원씩 주고 취직을 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당시 종업원 월급이 삼만원 정도 할 때이니 알만도 하지 않은가. 당시에는 미국이 엄청난 양의 합판을 수입하였는데 필리핀, 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는 원재료는 있으나, 합판공업을 할 만한 수준이 아니었으므로 비교적 원재료 국가와 거리가 가까운 일본, 한국, 대만 등에 합판공업을 육성시켜, 합판을 만들게 하고, 자기들은 그 합판을 수입해 갔던 것이다.

합판공업이 육성될려면, 그 주위공업도 같이 발달되어야만 한다, 예를 들면, 수지공업, 샌드페이퍼공업, 나이프공업 등등, 당시 일본은 합판기계공업도 함께 육성되어, 우리나라 합판공장의 기계들은 거의 일본에서 수입되었다. 66년에는 일본은 올림픽을 개최하였고, 당시 동경에는 지하철이 동서남북으로 빽빽히 있었던 시절이었다. 합판산업이 한창 잘 될 무렵인 66년~68년 무렵인 것 같다. 당시 대성목재는 천우사의 전택보씨가 운영하고 있었는데, 미국에서 주문량이 폭주하자, 일산42,000매 규모의 만석동 공장으로서는 감당하기가 힘들게 되었고, 이렇게 돈벌이가 잘 되고, 국가산업에도 보탬이 되는 사업이 어디 있느냐고 정부에 건의하여 월미도에 일산 55,000매 규모의 합판공장을 차관을 받아서 건설하게 된다.

건설이 거의 완료되어가는 시점인 69年에 미국은 점차 주문량을 줄이기 시작하였고, 전사장은 차관 이자에 허덕이게 되었다. 정부에서는 장덕진씨(후일 농림부장관)를 팀장으로 하는 부실기업정리팀을 만들어, 대성목재를 조흥은행 관리업체로 만들고, 군부팀인 황필주 사장을 영입하여 운영하게끔 하였다. 그 후로 전택보 회장은 합판산업에서 손을 띄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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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성장기 부산 합판산업의 성장과 쇠퇴(1960-1980)

합판은 한국에서 6.25전쟁 후의 복구수요를 기반으로 성장하였다. 그리고 1950년대 중·후반에는 유엔군의 군납수요도 합판산업의 성장에 자극을 주었다. 군납을 통해 품질을 인정받은 한국합판은 1961년부터 미국시장에 수출을 하기 시작하였다. 마침 인건비의 상승과 공해우려로 일본이 합판수출에서 철수하는 시기와 맞물리면서 한국의 합판산업은 1960년대 중반 이후 급속한 성장을 하였다. 1970년대에는 세계 5위의 합판생산국에 세계 1위의 합판수출국이 되었다. 합판산업의 중심은 부산이었다. 1960년대 중반부터 부산은 한국 최대의 합판도시가 되었다. 그리고 세계적인 합판도시가 되었다. 합판이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절 부산은 한국산업의 중심도시였다. 한때 한국수출의 29.2%의 수출을 담당하던 도시가 부산이었다. 여기에는 합판이 절대적인 역할을 하였다. 1970년대 부산에는 당시 세계최대의 합판기업이었던 동명목재를 비롯하여 6개의 대규모 수출합판업체들이 있었는데, 이들 기업은 한국합판생산의 절반을 상회하는 생산을 하였다. 그리고 1970년 동명목재의 생산량은 우리나라 전체 합판생산량의 31.2%를 차지하였다.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 중반까지는 이른바 합판의 시대였고, 부산의 시대였고 또 동명의 시대였다. 그러나 우리나라 합판산업의 성장기반은 취약하였다. 원목의 도입이 안정적으로 이루어져야 했고 저임금이 유지되어야 하는 구조였다. 그런 조건 속에서도 실제로 수익을 내기는 어려웠다. 생산가에서 차지하는 원재료의 비중이 너무 높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한계를 넘어서게 한 것은 정부의 각종 지원이었다. 각종 수출지원으로 합판기업들은 흑자를 볼 수 있었고 성장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외화가득률은 낮았다. 1970년대 말까지 합판은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그러나 제1차 석유파동 이후 등장하기 시작한 자원민족주의로 인해 원목의 구입이 어려워지면서 한국 합판산업은 위기에 직면하였다. 합판가격보다 빠르게 오르는 원목가격과 함께 수출길이 막히면서 합판산업은 위기에 빠져들었다. 마침내 1980년 세계 최대의 합판기업 동명목재가 도산을 하였고 잇달아 기업들이 쓰러졌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에 의한 합판산업의 구조조정이 시행되었다. 동명목재에 이어 부산에서는 태창목재, 반도목재, 광명목재, 대명목재가 퇴출되었다. 6개의 합판수출대기업 가운데 성창기업만이 부산에서 살아남았다. 일반적으로 과잉설비의 정리가 지역별로 균등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관례라고 보면 부산기업들의 집중 퇴출은 이례적인 것이었다. 합판산업의 구조조정 이후 우리나라 합판산업의 중심은 부산에서 인천으로 이동하였다.

합병 후 존속회사는 동화기업이고 대성목재공업은 소멸해 ‘대성목재공업’ 간판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됐다.동화기업은 대성목재공업을 흡수합병한다는 내용의 공시를 지난주 실시했다고 12일 밝혔다. 합병 목적은 경영효율성 증대 및 사업 경쟁력 강화를 통한 기업가치, 주주가치 제고다. 합병기일은 2022년 12월1일이다.

동화기업과 대성목재공업의 합병비율은 1대 0이다. 합병법인인 동화기업은 피합병법인인 대성목재공업의 주식을 100% 소유하고 있으며, 합병 시 합병법인은 피합병법인의 주식에 대해 신주를 발행하지 않으므로 합병비율을 1대 0으로 산출했다는 설명이다.

1960년대 중반 이후에는 수출길이 막히면서 수요부족과 설비과잉으로 침체의 늪에 빠져들기 시작해 1968년 조흥은행 주도의 은행관리를 거쳐 1973년 신동아, 1978년 효성그룹으로 사주가 변경된다.

이후 지난 1986년에는 산업합리화 업체로 지정되면서 유원건설과 인연을 맺어 재기의 가능성을 보였으나 1990년대 들어 지급보증을 섰던 모기업이 경영난에 처하면서 1995년에는 경영권이 다시 한보그룹으로 넘어간다. 이후 한보사태가 벌어져 2000년 동화기업이 인수, 창업 이래 사주가 무려 9번 바뀌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한편, 대성목재공업을 흡수합병한 동화기업은 1948년 서울 왕십리에서 제재소를 연 뒤 1960년대 말 인천지역에 36만평 규모 한국제재공업단지를 조성하며 국내 목재산업 발전의 발판을 제공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대성목재공업을 인수하면서 국내 1위 목재기업으로 발돋움했다.

출처 : 인천일보(https://www.inche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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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그해 <한국일보>에 게재한 ‘나의 이력서’란 글에서는 그 당시를 회고하며 “당시 대미 합판수출량은 일본이 제일 많았고 그 다음이 대만이었다. 그러나 대성목재가 합판수출을 개척한 이래 한국의 합판수출은 점점 늘어나 오늘에 와서는 원목 한 톨도 안나는 한국이 합판수출 세계1위국가로 성장하게 되었다.그 후 대성목재는 수출호조에 힘입어 확장에 확장을 거듭하였고, 합판수출을 처음 했을 때에 비해 시설은 100%가 늘었다. 최근에는 월미도에 있는 매립지 땅 7만여 평을 매입하여 대규모 합판공장을 건설하고 있다”고 말하였다.

이와 같이 당시 천우사의 수출실적은 대단하였는데 여타 수출업체의 실적과 비교해 보면 1964년도 천우사 수출실적 552만 달러는 국내기업으로서는 대한중석에 이어 2위에 해당하는 수출실적이었다. 그러난 대한중석은 국영기업체였던 만큼 사기업체로는 천우사가 1위를 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1965년도에는 수출실적 825만 달러로 국영기업인 대한중석도 제치고 당당 1위에 올라섰고, 그 후 66년, 67년 계속 수출실적1위를 차지하였던 것이다.

합판은 한국에서 6.25전쟁 후의 복구수요를 기반으로 성장하였다. 그리고 1950년대 중·후반에는 유엔군의 군납수요도 합판산업의 성장에 자극을 주었다. 군납을 통해 품질을 인정받은 한국합판은 1961년부터 미국시장에 수출을 하기 시작하였다. 마침 인건비의 상승과 공해우려로 일본이 합판수출에서 철수하는 시기와 맞물리면서 한국의 합판산업은 1960년대 중반 이후 급속한 성장을 하였다. 1970년대에는 세계 5위의 합판생산국에 세계 1위의 합판수출국이 되었다. 합판산업의 중심은 부산이었다. 1960년대 중반부터 부산은 한국 최대의 합판도시가 되었다. 그리고 세계적인 합판도시가 되었다. 합판이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절 부산은 한국산업의 중심도시였다. 한때 한국수출의 29.2%의 수출을 담당하던 도시가 부산이었다. 여기에는 합판이 절대적인 역할을 하였다. 1970년대 부산에는 당시 세계최대의 합판기업이었던 동명목재를 비롯하여 6개의 대규모 수출합판업체들이 있었는데, 이들 기업은 한국합판생산의 절반을 상회하는 생산을 하였다. 그리고 1970년 동명목재의 생산량은 우리나라 전체 합판생산량의 31.2%를 차지하였다.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 중반까지는 이른바 합판의 시대였고, 부산의 시대였고 또 동명의 시대였다. 그러나 우리나라 합판산업의 성장기반은 취약하였다. 원목의 도입이 안정적으로 이루어져야 했고 저임금이 유지되어야 하는 구조였다. 그런 조건 속에서도 실제로 수익을 내기는 어려웠다. 생산가에서 차지하는 원재료의 비중이 너무 높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한계를 넘어서게 한 것은 정부의 각종 지원이었다. 각종 수출지원으로 합판기업들은 흑자를 볼 수 있었고 성장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외화가득률은 낮았다. 1970년대 말까지 합판은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그러나 제1차 석유파동 이후 등장하기 시작한 자원민족주의로 인해 원목의 구입이 어려워지면서 한국 합판산업은 위기에 직면하였다. 합판가격보다 빠르게 오르는 원목가격과 함께 수출길이 막히면서 합판산업은 위기에 빠져들었다. 마침내 1980년 세계 최대의 합판기업 동명목재가 도산을 하였고 잇달아 기업들이 쓰러졌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에 의한 합판산업의 구조조정이 시행되었다. 동명목재에 이어 부산에서는 태창목재, 반도목재, 광명목재, 대명목재가 퇴출되었다. 6개의 합판수출대기업 가운데 성창기업만이 부산에서 살아남았다. 일반적으로 과잉설비의 정리가 지역별로 균등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관례라고 보면 부산기업들의 집중 퇴출은 이례적인 것이었다. 합판산업의 구조조정 이후 우리나라 합판산업의 중심은 부산에서 인천으로 이동하였다.

대성목재공업(주) 전택보(全澤珤) 회장 편 (42)
1964년 사상처음으로 수출 1억 달러를 돌파한 11월30일을 기념하기 위해 그날을 수출의 날로 정한지 3년 째 되는 1966년 11월30일, 그러니까 제3회 수출의 날 기념식에서는 수출 무역에 공로가 많은 43개 업체가 선정돼 시상되었는데 그 가운데 천우사(사장 전택보)는 수출실적이 제일 많아 금탑산업훈장을 받는 영광을 차지하였다.

이해 정부는 총 수출 목표액을 2억5000만 달러로 책정했는데 기업체별 실적을 보면 천우사가 1073만 달러로 선두를 달렸고 그 뒤로 대한중석이 1014만 달러, 그 다음은 동명목재(980만 달러), 성창기업(810만 달러), 영흥상사(645만 달러), 대창기업(573만 달러)의 순위를 이루었다.
이에 대해 <현대경제일보>는 ‘조국 근대화의 수출역군’이란 제목 하에 천우사를 포함한 우수수출 업체에 대한 기사를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지난 1964년 11월30일 이래 주목할 만한 일은 수출이 양적인 면에서 증가현상과 더불어 질적인 면에서 수출 구조가 점차 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1965년 이전만 해도 수출 상품의 구성비율은 공산품 보다는 농산품 위주로 돼 있었으나 1965년 부터 정부에 의한 수출 정책이 크게 효과를 보여 공산품의 수출이 1억달러선으로 상승되었다.

특히 지난 1964년 11월30일 이래 1966년 11월30일까지 3년 동안 수출생산업의 기수로서 줄곧 1위를 달려 그 위치를 한번도 다른 사람에게 뺐기지 않은 천우사의 경우만 봐도 올해의 수출목표액 1300만 달러로 지난 10월 말 현재 1073만 달러의 실적을 올려 단위 수출 상사별로는 수위를 차지하고 있는데… 그 중 합판은 천우사 수출고의 주축을 이루고 있는 품목이며 나머지는 섬유제품을 비롯해 잡화, 완구, 트랜지스터, 라디오 등으로 돼 있다. … 천우사는 일반 가공무역과 보세가공무역이 2대 산맥으로 그 위치를 더욱 높이고 있다.…그런데 천우사의 경우 오늘날과 같은 영광의 자리를 구준히 쌓아온 것은 현재 천우사가 고용하고 있는 5, 6천명의 공원(工員)들이 노력한 결과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사장 전택보 씨의 기업인으로서의 뚜렷한 기업이념이 강력히 뒷바침하고 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바이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전택보 사장은 항상 우리나라는 과잉 인구에 의한 유휴노동력이 많은 대신 이와는 대조적으로 원자재의 부족 내지 고갈상태를 언제나 주장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와같은 여건을 타개하기 위해 자본이 많이 소요되는 대기업보다는 돈을 많이 필요로 하지 않고 유휴노동인구를 보다 많이 흡수할 수 있는 중소기업의 가공무역과 보세가공산업을 육성하면서 가까이는 사업에 종사하는 사람의 생활향상을 도모하고 멀리는 국민경제의 발전에 기여해야 한다고 주의 사람들에게 곧잘 말한다는 사실을 보아도 그의 기업이념이 어떤 목적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쉽게 상상할 수 있다’라고 적어 놓고 있다.

1914년 문천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그 해 말 부모를 따라 북간도(北間島)로 이주, 용정(龍井)에 있는 영신학교(永新學校) 고등과를 1918년에 졸업하고, 이듬해 모교인 영신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1920년 용정중앙교회에서 김정신과 결혼 현재·억재·순재 3남을 두었다.

고학생은 인삼장사란 인삼 엑기스를 파는 장사를 하는 것을 말한다. 인삼 엑기스 제조 공장에서 인삼 엑기스를 도매가격으로 사서 순경이나 공장직공들에게 파는 것이 인삼장사였다. 설봉도 처음에는 인삼장사를 했다.

설봉은 정측영어학교에서 영어실력이 점점 붙어갔다. 남보다 비교적 암기력이 뛰어났던 설봉은 그날 배운 것을 그다지 복습을 하지 않아도 단어를 외울 수가 있었다.
후일 설봉은 영어의 기초를 이곳에서 닦았다고 말하였다

고베 고등상업학교 입학한다. 고베는 일본의 대표적인 국제항구 도시였다. 국제도시에 걸맞게 외국인 거주자들도 상당히 많은 편이었고, 인종 차별도 다른 곳과 비교하면 별로 심하지가 않았다.

이듬해 봄(1924년) 설봉은 고베고상에 응시를 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낙방이 되었다. 동경 대지진 난리통에 별다른 준비없이 시험에 응했기 때문이었다. 떨어지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설봉은 그 이듬해(1925년) 다시 시험을 치뤘고 이번에는 합격을 했다

그가 고베고상을 졸업할 무렵 심한 불경기여서 조선인이 취직자리를 구하기란 하늘의 별따기였다. 그는 재학 시절 여선교사의 도움으로, 뉴욕내셔널시티은행 고베지점에 겨우 취직할 수 있었다. 그곳에는 미국인 15명과 일본인·중국인 30여명이 있었고 조선인은 전택보 혼자였다.

1929년 간도로 돌아왔다. 아내와는 9년 만에 함께 살게 된 것이었다.전택보는 다시 만주 영신학교 교사로 교편을 잡았다가, 고향으로 돌아와 함경남도 금융조합에서 일했다. 간도 교하현부근의 500정보를 구입, 선만주식회사 라는 대규모 농장을 경영하다가 8·15 광복을 맞이하여, 1945년 10월 단신 월남하였다.

전택보가 만주에서 농장 경영을 시작했을 무렵에도 벼농사는 수익성이 좋았다. 그러나 이때 그는 밤새우기 일쑤인 조선일보사 근무 때 얻은 지병인 심장경련증이 악화되었다. 한번 발작하면 숨이 막혀 죽을 것만 같았다. 그는 서른아홉 살 되던 해 12월 만주 지린(吉林)병원에 입원해 6개월 동안 병상에 누워 있어야 했다. 그가 조금씩 건강을 되찾으면서 농장도 차츰 궤도에 올랐다. 그의 농장이 큰 집단취락으로 되고 보니 자녀교육 문제가 시급한 과제로 떠올랐다. 그래서 전택보는 농장 안에 중국인 학교를 세우는 한편 조선인 교사를 초빙해 조선인 자녀들을 따로 가르치게 했다.

이런 상황에서 설봉은 고베고상 동창인 지우선씨와 사업을 하기로 결심했다. 잣을 가을에 사서 저장해 뒀다가 이듬해 봄에 팔면 이익을 보지 않을까 생각해서, 금융조합을 그만둘 때 받았던 퇴직금을 출자해 잣장사를 시작해 보았다. 그로서는 첫 사업인 셈이다.

그러나 이 첫 사업에서 그리 재미를 보지 못했다. 예상한 만큼 잣값도 오르지 않고 품질도 변질되고해서 실패를 하고 말았다. 다음에는 쌀 장사에 손을 대어 보았다.

추수기의 쌀값과 다음해 여름철 쌀값의 가격차이를 노린 장사였는데 이 장사에서는 상당한 재미를 보았다. 이제까지 기껏해야 100원 남짓한 월급을 받아왔던 그가 한달에 천여원하는 거금을 손에 쥐게되니 세상이 온통 제것만 같았다.쌀 장사에 재미를 본 설봉은 소장사에도 손을 뻗쳤다. 남만주 지방의 소값은 싼 반면에 용정의 소값은 상당히 비싸다는 것에 착안해서 소장사에 투자했던 것이다.

소장사에 투자를 한 것이 예상한 대로 이득이 많이 남아 돈을 많이 벌었다.

그러나 이것은 살아움직이는 생명을 다루는 장사였기 때문에 예상밖의 귀찮은 일들이 많았다. 그래서 좀 더 안정성있는 사업을 하기로 마음먹고 길림성 근처의 교하현으로 이사가서 정미소를 차렸다.

이 사업은 시설만 있으면 별로 자금이 없어도 된다는데 착안하여 시작한 사업이었다. 당시 길림성 교하현 근처에는 상당수의 우리나라 농민들이 벼농사를 주로 하며 살고 있었다.

농민들은 추수때 거두어 들인 벼를 마당에 쌓아둔채 저장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이 근처 정미소에 맡겨두었다가 필요한 때에 팔아 쓰고 있었다. 정미할 쌀은 맡겨둔 농민들의 요구에 따라 그때에 시세에 맞춰 결재를 해주면 되었는데, 농민들에게서 위탁받은 쌀을 하얼삔으로 보내어 바꾼 돈을 농민들이 결재를 요구할 때까지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는 이점이 있었다.

정미소를 하면서 설봉은 톡톡히 재미를 보았다. 그리하여 설봉은 이곳에다 아담한 새집을 짓고 부모님과 동생들을 데려다가 같이 지낼수 있게 되었다. 평생동안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자기돈으로 자기집을 지은 것이었다.

정미소 사업이 일단 본 궤도에 오르자 정미소는 동생 택완에게 물려주고 설봉은 북만주 지지하루에 가서 중국인이 경영하던 좁쌀 정미사업을 인수하였다. 지지하루는 겨울이 되면 기온이 영하 40~50도까지 떨어지는 추운지방이었다.

집밖에만 나가면 엄청난 추위 때문에 몇 겹의 옷을 입고도 두툼한 털옷으로 또다시 무장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다닐수가 없는 지방이었다.

이런곳을 설봉은 바쁘게 돌아다니며 좁쌀장사를 했다. 그 다음으로 손댄 것이 농장건설이었다. 농장건설에 관한 계획은 즉흥적인 발상이 아니었다.

그는 고베고상 시절에 이미 만주 전역의 농업조사 보고서까지 쓴 경험이 있었다.

고베고상에서는 매년 성적이 우수한 학생 10여명을 선발하여 만주, 중국 등지로 해외여행을 시켰는데 설봉도 고베고상 시절에 우수학생으로 뽑혀 여순, 대련, 북경, 장춘, 하얼삔 등을 다녀오는 여행을 한 일이 있었다.

그때 만주전역의 농업보고서를 쓴 것이 농장건설을 해야되겠다는 생각을 하게했던 것이다.

벼란 것은 원래 남방작물이므로 만주에서는 기껏해야 일본인들이 안동현에서 조금 심고 있었을 뿐 다른데는 벼동사가 전여 없었다. 만주벌판에 벼 농사가 보급되기는 순전히 조선인 이주자들에 의하여 이뤄졌던 것이다.

조선 농민들은 벼가 원래 기후와 환경에 비교적 잘 적응하는 작물인 것을 알고 점차 북만주에까지 보급했던 것이다.

당시 일제의 식민정책으로 문전옥답을 억울하게 빼앗기고 고향을 떠나온 우리 농민들은 근 100여만명이나 되었는데 그들의 노력으로 벼 농사가 소련 영내에까지 보급되었다는 사실을 설봉은 그의 학창시절 조사보고서에서 지적해 냈던 것이다.

농사도 잘되었고 농민 수입도 괜찮았지만 만주 특유의 기후 탓으로 문제가 있었다. 만주는 겨울이 길고 여름이 짧기 때문에 농민들은 여름에 번 수입을 겨울에 다 없애버렸다. 전택보는 농민들이 농사만 지어 가지고는 재산을 만들기가 어렵다고 판단해 농민들에게 축산을 장려했다. 또한 만주에서는 해산물이 귀했으므로 만주 토문(土門)에다 ‘동만(東滿)상회’라는 회사를 차리고 수산물 판매사업을 시작했다. 만주 생필(生必)주식회사를 통해 주로 명태를 팔았다.

설봉은 신참에서 멀지 않은 육가자(六家子)라는 역에서 약 10리를 들어간 곳에 약 5백정보의 무인지답을 샀다. 이 땅은 예전에 청나라 사람들이 살던 곳으로 만주사변때에 일본군에 의해 점령된 곳이었다.

설봉은 여기에다 대단위 농장을 건설하기로 결심하고 일에 착수했다. 당시 만주에는 마적들의 횡포가 심하였으므로 마을을 만들려면 토성이나 석성을 쌓고 망대를 세우는 것이 우선적인 일이었다. 우선 넓이 12척, 높이 12척의 토성을 쌓았다.

그리고 농민들에게 집 지을 자금을 대 준다고 하니까 청나라 사람 130호가 들어왔다. 조선 농민들에게는 집 지을 자금 외에 농우까지 마련해주고 약 30호를 입주시켰다.

만주는 겨울이 긴탓으로 가을에 추수한 뒤로는 기나긴 겨울을 술먹고 노름을 하는 것으로 재산을 탕진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를 생각하고 설봉은 농장 농민들에게 축산을 권장했다.

이러는 중 전쟁은 막바지에 접어들고 전세는 일본이 패배할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다. 일본이 패망하면 이제껏 해왔던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기에 설봉은 농장을 정리하고자 했다.

그러나 원매자가 선뜻 나서지 않았다. 겨우 만철에 교섭해 50만원에 팔기로 결정했다. 대금지불기일이 8월8일이었는데 일본의 패전으로 돈을 받아내지 못했다.

정미소와 농장경영에 몰두하며 북만주를 누비고 다니던 설봉은 우연한 기회에 명태장사에도 손을 댔다. 이때가 1941년이었는데 만주에서는 해산물이 매우 귀한 때문이었다. 더욱이 전쟁이 가열되면서 만주에서는 해산물을 찾아볼 수가 없을 정도로 해산물이 귀했다.

당시 만주의 큰 도시에는 지금의 고시가격과 비슷한 제도가 있어서 일정가격 이상 받을 수 없도록 돼있었고 이를 위반할 때에는 처벌을 받도록 돼 있었다.

그런데 번양(藩陽)역에서는 고시가격제도가 없어서 그 곳으로 해산물을 수출해서 팔기도 했다. 그러다가 철도경찰에 끌려가 유치장 신세를 지기도 했다. 번양이 봉천시에 편입된 사실을 모르고 장사를 하다가 고시가격위반으로 붙잡혀갔던 것이다.

이런 일이 있은 후 얼마 지나서 북경이나 천진에는 고시가격제도가 없다는 것을 알아내고 북경이나 천진 등으로 수출을 하기로 했다.

수출절차가 까다로왔으나 화신과 교섭을 해서 천진출장소 명의로 명태 수출허가를 얻어 수출하는데 성공했다. 14차분의 건명태를 천진에 끌어내리니 굉장한 분량이었다. 모두들 깜짝 놀랐다.

그러자 소문이 사방에 퍼지면서 천진과 북경에 있는 조선인 거간꾼들이 저마다 팔겠다고 나서는 것이었다. 한 쾌를 8원씩 팔아주면 구전으로 거기에서 1원씩 주기로 약속했다.

그래서 팔기 시작한 것이 며칠 사이에 전량을 모두 팔아 치울 수가 있었다. 명태 한쾌에 투자된 돈이 운송비까지 합쳐 1원15전이었으니까 구전을 제하고도 엄청난 돈이 들어오게 되었다. 명태장사로 번 돈이 70만원이란 거액이 됐다.

1945년 미군정청 이재과장을 맡았다 그만두고, 1947년에 천우사(天友社)를 설립하여 본격적으로 사업에 투신, 무역업을 개척하였다. 서울로 환도한 뒤 천우사의 무역업만으로는 발전의 한계가 있음을 느끼고 생산업체를 건설할 생각을 굳혔다.

그러니까 천우사의 간판이 걸린 것이 1947년 3월 8일이었고, 천우사가 간판을 내걸고 제일 먼저 손을 댄 것이 ‘종이 장사’였다.

1945년 10월8일, 드디어 설봉은 가족을 함흥에 남겨둔 채 남쪽행 기차에 올랐다. 기차는 화물차였는데 사람이 어찌나 많았던지 기차가 38선 근처에 도착하기까지 시종 화물차 지붕 위에 올라 있어야 했다.

그 당시만 해도 그리 감시가 심하지 않았기 때문에 38선을 걸어서 넘었다. 서울에 도착해 소복여관(현 도큐호텔 자리)에 숙소를 정했다.

그리고 나서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이 전에 몸담고 있던 조선일보사였다. 그 당시 조선일보사는 극심한 경영난으로 방응모씨는 소유주식의 절반을 이중문이라는 사람에게 125만원에 팔아 그와함께 공동경영을 하고 있었다.

설봉은 여관에 들어앉아 앞으로의 할일을 놓고 생각해 보다가 당시 미군정의 경무부장으로 있는 조병욱씨를 찾아갔다. 다른 사람의 취직자리를 부탁하러 찾아갔던 것인데 도리어 그에게 붙잡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즉 설봉은 경무부장 밑에 이재국장이 됐다.

미군정 시대라 이재국장은 미국인 한명, 한국인 한명 이렇게 둘을 두고 있었다. 이재국장을 한 6개월 하고 있는데 조병욱 부장이 이번에는 자기와 같이 정치를 하는 것이 어떠냐는 부탁을 하길래 거절하고 이재국장 자리도 뿌리치고 나와버렸다.

그후 1946년 봄에 온가족을 데리고 38선을 넘었다. 그때는 38선을 넘기가 조금 힘들어져 있었다. 서울에 와서는 잠시 효자동에 있는 효자여관에 묵으면서 집을 구하러 다녔다. 그때 마침 청운동에 있는 조그만 기와집을 일금 10만원에 살 수 있었다.

청운동 집에서 온가족이 오랜만에 함께 모여 살림을 꾸미고 들어앉으니 마음이 여간 기쁘지 않았다.

이 무렵 우연히 고베고상의 동창생 김인형씨를 만났다. 그는 대한상사라는 무역업을 하고 있었는데 자기는 장사할 줄을 잘 모르니 같이 해 보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설봉은 그 회사의 부사장이 됐다.

설봉은 부사장으로 일을 하고 있으면서도  단독으로 대외 무역을 할 수 없을까 고민하며 돈줄을 물색하고 있었다. 그때 김상필씨로부터 이화대학 총장 김활란씨를 소개받았다.

김활란 총장은 학교재단 기금 중 500만원을 선뜻 빌려주었다. 설봉은 이 돈을 장사 밑천으로 하여 조선일보 사옥 3층에 방 하나를 빌려 사무실을 차렸다.

이것이 바로 지금의 <천우사>의 시작이었다. 그러니까 천우사의 간판이 걸린 것이 1947년 3월 8일이었고, 천우사가 간판을 내걸고 제일 먼저 손을 댄 것이 ‘종이 장사’였다.

조선일보사에 사무실이 있었던 만큼 창고도 마음대로 얻어 쓸 수 있었고, 판매처를 얻기도 안성맞춤이었다. 당시의 무역은 마카오 중심이었다.

국산품이란 말조차 생소하던 시절이었으니까 국민들 생활필수품은 대부분 마카오에서 조달됐다. 그때 신사들이 마카오 양복에다 마카오 구두를 신어야 행세를 할 수 있었던 시절이었다. 

이런 시절에 천우사는 마카오 무역선에 싣고 온 양복지 지물류 등을 가지고 장사를 시작했다. 적은 자본이라 마카오까지 가서 무역을 할 수는 없었고, 상인들이 가지고 들어오는 물건을 사서 팔았다.

국산품이란 말조차 생소하던 시절이었으니까 국민들 생활필수품은 대부분 마카오에서 조달됐다. 그때 신사들이 마카오 양복에다 마카오 구두를 신어야 행세를 할 수 있었던 시절이었다. 

이런 시절에 천우사는 마카오 무역선에 싣고 온 양복지 지물류 등을 가지고 장사를 시작했다. 적은 자본이라 마카오까지 가서 무역을 할 수는 없었고, 상인들이 가지고 들어오는 물건을 사서 팔았다.

1954년 마닐라, 1960년 누욕과 도쿄 수출거점 설치, 한국축산 개발 설립

이것이 1954년 대성목재공업주식회사(大成木材工業株式會社)·조선피혁주식회사를 인수하게 된 동기이다. 그는 국내 동업자끼리의 경쟁보다는 해외시장 개척에 더 적극적으로 나섰다.그래서 1960년 3월 우리 나라 최초로 합판을 수출하게 되었다. 그 뒤, 합판 수출은 우리나라 수출의 주품목으로 각광을 받게 되었다. 1964년 신진완구주식회사·신진수출주식회사(新進輸出株式會社)를 설립하였고, 그 해 천우사는 552만 달러를 수출하여 국내 민간기업 중 1위를 차지하였다.

1965년에는 조선피혁을 강남공업(江南工業)으로 개칭하고, 한국축산개발주식회사와 삼익선박(三益船舶)을 설립하였고, 제2회 수출의 날 수출실적 제1위로 동탑산업훈장을 수상하였는데, 이 기록은 1967년까지 이어졌다. 천우사의 전성기를 맞은 것이다.

기독교 가정에서 성장한 탓으로 신앙심이 두터웠고, 독실한 기독교인으로서 그는 폭넓은 사회활동을 하였다. 1947년 이화여자대학교 이사로 취임한 것을 비롯해서, 1953년 조선일보사 대표취체역, 1957년 유네스코후원회 회장, 1959년 주한 덴마크 명예영사, 1961년 포풀라협회 회장, 1963년 국제법학회 부회장, 1963년 한국신학대학 이사 등 각계에서 눈부신 활약을 하였다.

한편, 재계에서도 8·15광복 후 대한상의(大韓商議) 재건운동, 한국무역협회 창립, 한국경제협의회 창립 등에 주도적 역할을 하여 경제계의 지도자로서 큰 업적을 남겼다.

4·19혁명 뒤 허정(許政)과 함께 과도정부 수립에 공헌한 인연으로 상공부장관에 오르기도 하였으나, 35일간의 단명으로 끝났다. 정부는 그의 국민경제발전에 기여한 공적과 민간경제외교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하였다.

우리는 저렴한 노동력을 이용해 수공업, 가내공업으로 중소기업을 급속히 발전시키는 것이 적은 자본을 가진 우리가 조속한 시일 내에 실업자를 구제하고 국제수지를 개선시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전제하고 나서 그는 일본과 홍콩으로부터 기술을 도입해서 섬유제품, 2차가공품, 부품생산공장의 설치를 해야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그밖에도 크리스마스 장식업, 조화, 가발, 농구화, 메리야스, 양말, 수예품 등 할일이 얼마든지 있다고 역설했다. 우리국민이 공것을 바라지 말고 우리의 힘으로 우리의 경제난을 타개해 보겠다는 굳은 결의를 가지고 노력한다면 수년내에 억대의 외화를 벌것이 틀림없다고 외쳤다.

그리하여 설봉은 그당시 상공부장관, 재무부장관과 논의해 가칭 ‘가공무역추진위원회’라는 단체를 발기시켰다.
이 위원회의 취지는 우리나라에 없는 원료를 외국에서 도입해 이것을 가공해 수출하는 업체를 돕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천우사사장 전택보씨(사진)가 19일 상오11시25분 서울 신교동자택에서 심장마비로 급사했다.
향년 80세. 고전사장은 일본신호고상을 졸업, 일찌기 실업계에 투신하여 보세가공무역을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개척하는등 한국경제계에 큰기여를 했다.

1924년 봄 전택보는 고베고상(神戶高商)에 응시했다. 결과는 낙방이었으나 이듬해 다시 시험을 쳐서 합격했다. 그가 고베고상을 졸업할 무렵 심한 불경기여서 조선인이 취직자리를 구하기란 하늘의 별따기였다. 그는 재학 시절 여선교사의 도움으로, 뉴욕내셔널시티은행 고베지점에 겨우 취직할 수 있었다. 그곳에는 미국인 15명과 일본인·중국인 30여명이 있었고 조선인은 전택보 혼자였다. 그는 민족 자긍심을 지킨다는 마음으로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다. 항구도시 고베에는 조선인 막노동자가 몰려와 살고 있었다. 조선인이 경제적 하층구조의 태반을 차지하자 ‘조센징’ 차별도 노골적으로 바뀌어 갔다. 그것이 전택보에게 고민거리를 던져주었다. 취직을 했으니 아내를 룽징에서 데려올까 생각했지만, 아내에게 조센징이란 비아냥거림을 듣게 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아내와 떨어져 마냥 고베에서 일할 수도 없었기에 고민 끝에 그는 룽징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몇 달만 참으면 하얼빈이나 펑텐 지점으로 보내주겠다는 지점장의 만류도 뿌리치고 1929년 간도로 돌아왔다. 아내와는 9년 만에 함께 살게 된 것이었다.

 1947년 3월 8일 천우사(天友社)를 세우고 무역업에 뛰어들었다.

천우사를 설립한지 얼마 안돼서인데, 일본 유학시절 때부터 잘 알고 지냈던 박찬빈 이란 친구가 설봉을 찾아왔다.

자기는 중국CIC(중국 군대의 비밀단체)의 책임자인 조자청과 손잡고 일하는데 ,중국에서 물건을 가지고 올테니 팔아 달라는 것이었다.

설봉은 그러마고 했더니 얼마 후에 그는 복사지 한 배를 가득 싣고 들어왔다. 복사지는 그 당시 매우 귀한 물건이었기 때문에 쉽게 팔 수 있었다. 그리고 복사지 대금조로 중석(重石)을 한 배 실어주었다.

그러니까 두 번 장사를 한 셈이었다.

당시 중석은 일본인들이 채광해 놓고 미쳐 실어가지 못한 것이 전국 곳곳에 방치 된 것이 많이 있었음으로 어렵지 않게 실어 줄 수 있었다.이것이 천우사의 첫 번째 큰 장사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장사에서 설봉은 수백만원을 벌었다.

때는 1947년 여름쯤이었고, 천우사 간판을 건지 불과 3,4개월 밖에 안된 때였다.

그러나 매번 행운만이 따르는 것은 아니었다. 1947년 초가을 쯤이었는데 봉명석이라는 사람이 찾아와서 자기는 상해에서 신문용지를 구해 올 수 있다고 했다.  

그때는 신문 용지가 아주 귀한 때라 천우사는 곧 그와 손을 잡고 신문용지 거래를 시작하기로 했다. 그는 신문용지를 구하기 위해서는 선금이 필요하다고 해서 설봉은 선금 600만원 외에도 동아일보의 600만을 비롯해 여러 사람에게서 모두 6000만원을 마련해 그에게 넘겨줬다.

그러나 그가 상해로 돌아간지 석 달이 넘도록 감감 무소식이었다. 사기를 당한 것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봉명석은 그 돈을 모두 유흥비로 탕진해 버렸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설봉은 자기 돈 600만원 뿐만 아니라 6000만원의 큰 빚쟁이가 되고 말았다. 천우사는 이때 완전 파산 상태에 빠지게 됐으며 이화재단 김활란씨에게서 빌린 돈 500만원의 밑천까지 전부 날려버렸던 것이다.

이때부터 설봉은 날마다 빚 독촉을 받게 됐는데 하루는 모 명문학교 사친회 회장이 천우사 사무실을 찾아와서 ‘내 돈 500만원을 내놓으시오’ 안 내면 죽이겠다고 설봉의 멱살을 잡고 차마 입으로 할 수 없는 욕설을 마구 퍼부어 댔다.

이때 사원들이 달려들어 떼어놓긴 했으나, 이때 설봉이 받은 고통과 마음의 상처는 이루 형언할 수 없었다.

옷을 찢긴 채 (조선일보)3층 천우사 사무실에 멍하니 앉아있던 설봉은 ‘저기 전찻길에 뛰어내려 죽고싶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때 간부 사원들은 자칫하면 사장이 자살이라도 하지 않을까 걱정이 돼 의논 끝에 사장을 해외로 피신 시키기로 결정을 했다.

‘사장님 6개월 동안만 해외에 나가서 피신해 계십시오. 그동안 우리가 국내에서 뒷 처리를 할테니, 사장님은 해외에서 활약해 주십시오’ 하고 출국을 간곡히 권했다.

이리하여 설봉은 비밀리에 서울을 빠져나와 홍콩 행 비행기를 타게 됐다.

때는 1948년 4월 설봉은 해방 후 처음으로 해외에 나가게 됐던 것이다.

빚에 몰린 설봉은 비밀리에 서울을 빠져나와 홍콩 행 비행기를 탔다.

때는 1948년 4월, 설봉은 해방후 처음으로 해외 여행을 하는 셈이었다. 설봉은 홍콩에 도착하자 우선 뉴욕 내셔날 시티뱅크 홍콩 지점을 찾아갔다. 이 은행은 설봉이 일본 고베에 있을 때 근무한 경험이 있는 은행이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은행 고문으로부터 미리 소개장을 받아왔기 때문이었다.

설봉은 소개장을 내어놓고 협력을 구했다. 그랬더니 지점장은 선뜻 홍콩에서 가장 실력있는 지물상인 치생공사(治生公司)를 소개해 주는 것이 아닌가.

홍콩 지점장은 설봉에 대한 첫 인상을 좋게 느꼈던 모양이다. 그 즉시로 설봉은 홍콩의 치생공사와 계약을 체결하고 무역을 시작했다. 방법은 물물교환방식이었는데 치생공사가 지물을 선적해 서울에 보내면 천우사는 대신 오징어를 사서 그 배에다 실어 보낸다는 조건이었다.

그러니까 지물 대금을 먼저 치를 필요없이 오징어를 사서 실으면 되는 장사였다.

드디어 신문용지 50톤을 실은 첫 배가 부산에 도착하였다. 그러자 국내에 있던 천우사 사원들은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해서 지물을 팔고 그 돈으로 오징어를 구해 그 배에 실어 보냈다.

이러기를 3개월동안 계속하니 빚의 3분의 1을 갚을 수 있게 됐다.

설봉은 홍콩에 피신해 있으면서 계속 지물을 실어 보냈다. 한편 치생공사는 황옥당이라는 사람을 한국에 파견해 천우사의 무역업무를 감독케 하였다.

이런 식으로 무역을 6개월간 계속한 결과 빚의 절반을 갚을 수 있었다.물물 교환단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무역이었지만 서로 믿고 했기 때문에 번거롭지도 않고 사업도 잘 돼 좋았다, 치생공사는 천우사의 은인이나 다름없었다.

날이 갈수록 치생공사와의 무역은 더욱 번창해져서 한때는 전국 지물 수입량의 거의 절반을 천우사가 차지 했다.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한국의 무역에도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홍콩 일변도의 무역에서 대일 무역이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행운이 설봉을 찾아왔다. 어느날 유동석이란 사람이 찾아와서 조선농회(朝鮮農會, 오늘날 농협과 비슷한 기관)에서 수집한 가마니 수십만장을 일본에 수출할 수 있는 허가를 받아 줄 수 있으니 그걸 한 번 해 보라고했다.

그런데 그 때 조선농회 농회장을 최태용씨라는 사람이 하고 있었는데 최태용씨는 영흥 사람이었고 설봉이 영흥에서 금융조합이사로 있을 때 어느정도 안면이 있는 사이여서 어렵지 않게 천우사가 대일 가마니 수출업자로 지명될 수 있었다.

당시 농회에서 수집해 놓은 가마니를 체크해 보니 그 양을 다 일본으로 실어 나르려면 배가 17척이나 필요한 방대한 양이었다.

일본의 수입상은 제일물산이었는데 1949년 한 해는 온통 가마니 수출로 돈을 벌다 시피했다. 해방 후 민간 무역으로 일본과의 교역은 이것이 처음이었으며 그때 가마니 수출대금은 약 30만 달러에 이르렀다.

천우사는 1950년 6월 24일 인천항에 신문지와 양복지 등 대규모 물자를 수입해 놓고 있었다. 그날은 토요일이어서 통관을 26일 월요일로 미루고 있었는데 뜻밖에도 6·25전쟁이 터지고 말았다.부산 부두에는 천우사 화물도 잔뜩 쌓여 있었다. 군의 통고를 받은 전택보는 화물 처리 문제로 고심했다.

전택보는 전쟁이 끝나기만을 마냥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남포동에 전세로 점포를 얻어 다시 무역업을 시작했다.

출처 : 주간조선(http://weekly.chosun.com)

그는 천우사의 무역업만으로는 발전에 한계가 있음을 깨닫고 생산업체를 건설할 생각을 굳혔다. 이것이 1954년 대성목재공업주식회사·조선피혁주식회사를 인수하게 된 동기이다. 그는 국내 동업자끼리의 경쟁보다는 해외시장 개척에 더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래서 1960년 3월 한국 최초로 합판을 수출하게 되었다. 그 뒤 합판은 한국 수출의 주요 품목으로 각광을 받게 되었다. 1964년 신진완구주식회사·신진수출주식회사를 세웠고 그해 천우사는 552만달러를 수출, 국내 민간기업 제1위를 차지했다.

그는 1965년에는 조선피혁을 강남공업으로 개칭, 한국축산개발주식회사와 삼익선박을 설립했으며, 제2회 수출의 날 대한민국 수출실적 제1위로 동탑산업훈장을 받았다. 이 기록은 1967년까지 이어졌다. 천우사의 전성기를 맞은 것이다

동물원 준비 과정에서 가장 어려웠던 것은 달러를 바꾸는 일이었다. 그때는 암시세와 공정환율의 차이가 많아서 공정환율로 바꾸지 않으면 준비에 큰 문제가 생겼다. 전택보는 재무부를 서너 차례나 드나들며 사정해야 했다.

4·19혁명 뒤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 성명을 발표한 이튿날 4월 27일부터 과도정부의 내각 조직이 시작되었다.

전택보는 대기업가 중심의 새로운 단체를 구성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김용완, 최태섭, 김항복 등도 마찬가지 생각이어서, 그들은 천우사 사장실에 모여서 새 조직을 의논했다. 김용완은 처음 새 단체를 뜻 맞는 사람들끼리만 발족, 차츰 확대해 가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그러나 나중 전국을 대표하는 단체가 되려면 아무래도 대기업가를 모두 참여시키는 것이 좋겠다는 전택보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마침내 한국경제협의회가 발족되었다.

천우사는 1960년대 6년 동안이나 줄곧 수출 최고상을 수상, 해외 시장 개척에서 ‘한국의 신용’으로 통했다. 1970년대 들어 천우사는 무역업에서 쌓은 경험과 미국 시장에서의 기반을 토대로 스튜어트데이비스사(社)와 손잡고 보잉 707기를 빌려 미국과 서울 간 항공화물 수송을 시작했다.

또한 세계적 전자회사인 필립스와 합작으로 전자제품은 물론 컴퓨터 부품까지 수출해 생산했다. 이미 천우사는 1950년 9·28 서울수복 직후 필립스의 도움을 받아 한국에서 처음으로 탁상용 라디오를 만들어낸 일이 있었으며, 그 인연이 이어져 필립스와 기술제휴로 김포 등촌동 공장에서 전자제품과 부품을 생산해 대미·대일 수출을 계속해 왔다. 1970년에는 상공부로부터 TV 부품 수입을 승인받아 오류동에 5만4638㎡(1만6528평) 공장 대지를 마련하고 한 해 3만대 생산 목표를 세웠다. 그 무렵 한국의 TV 생산업체는 모두 도시바·히타치·샤프·산요 등 일본업체와 기술 합작을 하고 있었는데, 천우사는 필립스와 기술제휴를 함으로써 유럽 회사와 제휴한 첫 업체가 되었다.

전택보가 주장했던 보세가공 무역은 부두의 보세창고에서 수입한 물품을 가공처리해 재수출하자는 것은 아니었다. 세관의 감시가 가능한 곳이면 어디에서나 확대해서 실시하자는 것이었다. 5·16 혁명정부가 보세가공 무역을 국책으로 결정했다고 해서 전택보의 임무가 끝난 것이 아니었다. 전택보는 학자도 아니고 정치가도 아닌 실업인이었으므로, 보세가공 무역이 그의 제안에 의해 정책으로 채택되었다 해서 그 책임을 다한 게 아니라 당장 그것을 실천에 옮겨야 했다.

그는 맨 먼저 조화(造花)에 손을 댔다. 일본에서 기술자 다카하시(高橋)를 초빙하고, 천우사 6층 강당을 이용해 기술을 배울 부녀자를 모았다. 그리고 부산에 내려가서 의류공장 17곳과 계약, 일본에서 기술자 오오키(大木)를 데려와 미국에 수출하기 위해 의류 생산을 시작했다. 그 밖에도 완구 공장, 양탄자 공장도 세워 나갔다. 1970년대 초반 천우사는 의류 가공 수출만으로 한 해 500만달러를 벌어들이며 명실상부한 한국 최고 의류 제작 수출업체로 이름을 드날렸다.

그 무렵에는 수출산업에 대한 정부의 금융 세제상의 지원도 없었다. 미국에 대한 수출 실적도 없었으므로 확보해 놓은 쿼터도 없었다. 쿼터 문제 교섭차 전택보는 미국을 두 번 방문해서 미 상무부 차관보인 로보를 만나 이 문제를 놓고 교섭을 벌이기도 했다. 이 일은 전택보의 힘으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보세가공 무역만 하더라도 정부에서 이를 국책으로 채택, 여러 혜택과 지원을 아끼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날처럼 성장한 것이다. 특히 박정희 대통령이 다달이 확대무역회의를 주재했기에 수출을 토대로 한 경제 성장을 이룩할 수 있었다. 1947년 이화여자대학교 이사 취임을 비롯해서 1953년 조선일보사 대표취체역, 1957년 유네스코후원회 회장, 1961년 포플러협회 회장, 1963년 국제법학회 부회장, 1963년 한국신학대학 이사 등 각계에서 눈부신 활동을 벌였다.

전택보는 만년에 세상 사는 지혜를 이렇게 말한다.

“국가 대 국가, 민족 대 민족, 개인 대 개인의 끝없는 다툼과 경쟁 속에서 인류 역사와 문명은 발전해 왔다. 오늘날 우리나라도 적자생존의 법칙에 얽매여 있다. 초등학교 입학 때부터 대학 졸업 때까지 수많은 시험을 치르며 경쟁한다. 바늘구멍 취업문을 뚫는 데 성공해도 끝이 아니며, 일터에서도 치열한 경쟁을 해나가야 한다. 더욱이 우리나라는 외적으로 북한과 맞서고 있으며 중국·일본·러시아 등 강국들과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또 내적으로는 협소하고 각박한 국토에서 5000만 인구가 선진국 수준의 정치·경제·교육·문화의 욕망을 갖고 있기에 경쟁은 더욱 극심하다.

한국에서의 경쟁은 남을 거꾸러뜨리고 자신만 살아남겠다는 경쟁이 대부분이다. 정치인들은 국민을 잘살게 하겠다는 뚜렷한 정책 발표는커녕 그저 경쟁자를 쓰러뜨리기 위한 반대와 공격에만 급급한다. 기업인들도 국가 경제 발전에 어떻게 공헌할까를 생각하기보다 동업자를 해치는 데 열중하는 예가 많다. 그러나 오늘날은 세계가 하나가 되어가고 있으며, 우리의 활동 무대는 온 세계에 걸쳐 있다. 남을 짓눌러 없애는 경쟁이 아닌 남보다 커져서 잘살게 되고, 경쟁에서 뒤처진 무리까지 끌어안는 인의(仁義)의 경쟁이 되어야 한다.

우리의 욕망은 무엇인가. 큰 부자가 되고 싶기도 하고, 절대권력을 갖고 싶기도 하다. 큰 재산이 있으면 자신의 의식주를 해결한 뒤에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고, 큰 권력이 있다면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을 도움으로써 행복을 느끼는 게 가장 이상적일 것이다. 더욱이 우리나라같이 빈곤과 부정이 심한 나라에서 빈곤을 없애고 정의를 구현한다면 이보다 더 큰 기쁨이 어디 있겠는가. 사도 바울은 ‘내가 선한 싸움을 하고 나의 갈 길을 다 달렸다’고 말했다. 세상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승리자로서의 만족감을 가질 수 있다면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행복을 느낄 것이다.”

1980년 7월 18일 전택보는 지인들과 골프를 치던 중 갑자기 쓰러진다. 차로 근처 병원으로 옮겼으나 일흔아홉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아내와 자식들이 마지막을 지켜보지 못한 정말 뜻밖의 죽음이었기에 애석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전택보는 이런 말을 남겼다.

“이만큼 살아오는 동안 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빚을 졌다. 그 빚을 갚을 길은 내가 눈을 감을 때까지 일을 계속하는 것이다. 나는 보잘것없지만, 일생 동안 내가 가진 능력과 지식을 모두 짜내어 살아왔다. 다시 태어나더라도 내가 살아왔던 대로 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성장비화·부침야사(재벌이력서:8)
입력 1991.12.31 00:00 0 0
◎「마카오무역」 열풍… 수입품 장사 “노다지”/면사·양복지등 생필품 취급 수십배 이득/중석·화약원료등 전략물자로 대금지불/강익하·김규면·신영균등 자본축적 기반닦아정크무역이 절정을 이루던 46년 6월초. 정오께부터 인천항 부두를 서성이던 서른살 남짓한 젊은 사내는 석양을 등지고 미끄러지듯 수평선을 넘어오고 있는 배 한척을 보고 걸음을 멈추었다. 배가 항구에 가까워 광성호라는 이름이 육안에 들어오자 그 사내는 중국말로 큰 소리를 질렀다. 돛배에서도 서너명의 선원들이 손을 흔들며 중국말로 응답해 왔다. 부두에 닻을 내리자 젊은이는 배에 뛰어올라 갑판을 열어제쳤다. 콩기름 낙화생 당면 시계 사카린 빙초산 광목 양잿물 소금 등 20여종류의 물건들이 가득했다.

이 배가 바로 우리나라와 중국을 오가던 정크선 광성호. 광성호를 기다리던 젊은이는 화업무역공사라는 간판을 내걸고 정크무역에 참여한 김병환이었다. 『당시에는 수출 수입이라는 말 대신 일제시대의 이입이출이라는 말을 그대로 쓰고 있었지요. 광성호가 도착한 뒤 인천해관(지금의 인천세관)을 찾았더니 시청으로 가라고 했어요. 시청에 갔더니 다시 항만사령부로 가 보라는 거예요. 그곳엔 미군정 주재관 길버트상사가 입출항을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배가 도착했다고 알리니 그 사람이 직접 조사를 나와 아편과 무기가 있느냐고만 물었어요. 없다고 하니까「오케이」,그것으로 끝이었어요. 관세고 뭐고 물론 없었지요』 무역협회 창립이후 현재까지 비상근 이사를 지내며 경기도 부천에서 알파소닉코리아라는 전자회사를 차려 회장을 맡고 있는 김병환씨의 회고다.

관세도 없고 특별한 제약도 없었던 정크무역은 거의 10배가 남는 노다지 장사였다. 김병환씨의 증언. 『국내에서 구하기 힘든 물건들이었기 때문에 정크선이 들어왔다 하면 바로 동이 났다…』 당시 정크무역을 하면서 얼마나 이익이 남느냐를 결정한 것은 오로지 무역행정의 실권을 쥐고 있던 미 군정청 상무부 소속 거윈준위의 사인에 달렸다. 정크무역이 활기를 띠자 미 군정청은 과세를 부과하고 수입허가서를 발급했다. 서울에 주재한 거윈준위가 책임자였으므로 그에게서 얼마나 빨리 수입허가서를 받는냐에 따라 큰 돈이 왔다가다 했던 것이다. 따라서 자연스레 인천과 서울을 오가는 총알택시가 등장했고 인천­서울간 트럭운송업자들도 덩달아 큰몫을 잡았다. 인천에서 트럭운송업을 하고 있던 조중훈도 이 시기에 기반을 잡았다.

국내에 무역업을 본격 태동시킨 정크무역은 47년 3월17일 마카오에서 무역선인 페어리드호가 인천항에 입항,이른바 「마카오무역」을 전개하기 전까지 이어졌다. 국내 기업인들이 무역 열풍에 본격 휩싸이게 된 것은 바로 마카오 무역때문이었다.

마카오무역은 영국계 2천톤급 선박인 페어리드호가 인천항에 들어 온 이후 6개월여 계속된 시기의 무역을 말한다. 중국대륙이 모택동의 남진으로 어수선해지자 중국화주들은 홍콩에서 물건을 선적,우리나라로 가져오려 했다. 그러나 영국정청이 이를 허가하지 않자 홍콩서 물건을 선적한 뒤 마카오로 수출하는 양 꾸며 우회,인천항으로 입항하면서 마카오무역이라는 별명이 붙게 됐다. 이때 들어서야 비로소 국가간 제도적인 무역이 나타났다. 포르투갈령인 마카오정청은 한국으로 가는 물자에 수출승인서를 발급했던 것이다.

페어리드호와 큰 거래를 한 국내기업인은 김익통상의 강익하와 삼양무역의 김규면이었다. 처음 입항한 페어리드호는 생고무 양복지 신문용지 등 고급물품을 가득 싣고 들어왔다. 당시엔 고급품은 모두 마카오제라하여 마카오양복 마카오신사라는 말들이 나돌았다.

마카오 무역선은 우리나라에 시계 양복지 면사 모사 페니실린 사카린 등을 싣고 왔고 그대신 폭약제조용인 헤로중석과 화약원료,미군이 불하한 지프차 및 중고차의 부품을 싣고 갔다. 당시 장개석군과 모택동군간에 전쟁을 치르던 중국은 비싼 값으로 이들 전략물자를 사들였고 마카오무역선은 일본이 우리나라에 놓고 간 전략물자를 모으는 일로 재미를 보고 있었다. 국내 기업인들은 일본이 버리고 간 당시로선 하잘 것 없는 물자들을 주고 수십배 이득을 붙여 팔 수 있는 각종 생필품을 받아 잇속을 차릴 수 있었다.

마카오무역선이 싣고간 헤로중석은 지금의 대한중석 전신인 소림광업에서 흘러나온 것이고 화약원료는 한국화약 전신인 조선화약에서 유출된 것이다. 따라서 소림광업의 재고품을 불하받았던 영화물산의 신영균을 비롯,전략물자를 불하받은 국내 기업인들은 이를 계기로 재산을 축적할 수 있었고 영풍상사가 철광석을 수출해 기반을 잡은 것도 이 시기였다.

마카오무역 6개월동안 국내에 남아있던 전략물자재고는 바닥이 났다. 바깥시세를 모르고 있던 당시 국내 기업인들은 결국 6·25를 맞은 뒤에야 당시 황금을 내주고 설탕을 사 먹은 것을 깨닫게 됐다.<이종재기자>

해방전까지는 만주지방에서 무역업을 하고 있던 사람들도 거의 다 서울로 몰려들었다. 최태섭(한국유리),이한원(동아상사),서선하(삼흥실업),전택보(천우사) 등은 만주에서 서울로와 막바로 무역업을 시작했다. 만주의 봉천에서 동화공창이라는 유지공장과 무역업을 하는 삼흥상회를 경영하고 있던 최태섭씨는 일본 미쓰비시상사의 무역업까지 대행할 정도로 호황을 누렸었다. 팔로군이 만주를 장악한 45년 종업원인 중국인들의 도움으로 만주를 무사히 빠져 나와 우선 평안도 철산에서 모나자이트라는 광석을 생산,광업진흥공사에 납품하는 일을 했다. 그는 자식을 키우려면 서울로 가야한다는 생각으로 남하,서울의 중림동에 있는 고무공장을 매입,만주에서 사용한 삼흥실업 간판을 내걸었다. 그는 다시 무역업을 시작했다

서울로 올라온 기업인들은 당시에 번창하던 정크무역 마카오무역 등 거센 무역의 열풍속에서 값비싼 수업료를 내며 사업을 배웠고,또 번창시켰다. 해방후 혼란했던 서울은 기업들에게 꿈의 보금자리였고 희망의 일터였다

특히 기업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줄을 잘 잡아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고 나아가서는 적산불하,원조물자 불하,은행대출 같은 큰 이권을 챙길 수 있었다.그도 그럴것이 해방후 6·25 이전까지의 우리나라 기업인들은 자본이나 사업 경험이 보잘 것 없었던 만큼 일본이 남기고 간 귀속재산의 불하나 원조자금 배정,미 군정의 힘이 필요한 마카오무역 등 경영외적인 요인들에 의해 그 성장속도와 규모가 결정되는 기형적인 과정을 밟고 있었다. 이 때문에 경영풍토가 기업내적인 기술개발이나 창의력,경영합리화에 의존하기보다는 권력과 밀착,특혜에 집착하는 경향을 띠게 됐다.

해방이후 이만한 거금을 가진 사람은 최창학 이외에는 없었다. 그는 이 돈으로 돈놀이를 했다. 해방후 크게 휘몰아쳤던 정크무역과 마카오무역 시절 그의 돈에 의지하지 않은 기업인은 거의 없을 정도였다.

이들 기업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달러였다. 오늘날 기업인들이 땅을 찾듯 당시의 기업인들은 달러를 찾아 분주히 뛰었다. 달러가 있어야 수입이 가능했고 수입은 곧 돈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의 달러는 정부의 뒷심이 없으면 불가능했고 달러배정은 곧 특혜였다

/이 대통령 은행보유불은 직접 통제/「치부직통 코스」… 수단방법 안가려/배정불로 물자수입 또 “돈방석” 재계판도 큰 영향해외에서 물건을 사오기 위해서는 달러가 필요한데 전쟁중이던 50년대초에 달러가 흔할 리 없었다. 그래서 당시의 기업인들은 달러를 구하기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무역회사가 이용할 수 있는 달러는 직접 수출해서 벌어들인 달러 이외에 중석달러·종교달러·암달러·원조불 등이 있었다. 중석달러는 전략물자인 중석을 수출해 획득한 외화인데,이 돈은 기계류·선박·화물자동차 등 산업 부흥자재를 수입하는데만 쓸 수 있었다. 중석달러는 중석수출을 맡고 있던 대한중석이 직접 수입할 때 사용했으나 극히 제한된 무역회사에 특혜불로 배당되기도 했다.

암달러로 유통된 시중달러는 주로 주한 미군들로부터 흘러나왔는데 환율도 높고 거래량도 적어 수입자금으로는 큰 기여를 하지 못했다.

종교달러 역시 그림의 떡이었다. 종교달러는 기독교 선교·전시구호·교회사업 등을 위해 외국에서 송금된 외화로 기독교계통과 깊은 관계를 가진 무역상이 아니면 얻어쓸 수 없었다.

이밖에 원조불과 UN군 대여금 상환불이 있었다. 원조불은 전쟁 복구기에 국내 산업의 판도를 결정하는 자금이 됐다. 상환불이란 정부가 UN군에게 국내에서 사용할 돈을 원화로 대여해 주고 그 대전으로 받은 달러인데 당시 국내 부족물자를 수입하는데 긴요하게 쓰였다.

결국 달러의 대부분은 정부가 배정했고 자연히 달러를 따려는 기업인들의 로비가 성행했다. 더욱이 정부가 배정하는 달러의 환율은 지나치게 낮게 평가돼 달러를 딴다는 것 자체가 치부의 직통코스였다. 정부가 배정하는 달러로 정부가 지정하는 물자를 수입해서 국내에 풀어만 놓으면 그대로 돈방석에 앉았다. 당시의 환율이 비현실적으로 낮게 평가된 원인은 상환불이었다. 원화를 대여해 주고 달러를 받기 위해서는 낮은 환율이 유리했기 때문이다.

당시 환율문제는 그 누구도 입에 올릴 수 없었다. 달러라면 벌벌 떨던 이승만대통령에게 환율을 현실화시키자는 건의를 했다가 목이 달아난 장관이 있을 정도였다. 오랜 망명생활을 통해 가난에 이골이 난 대통령이었다. 51년 12월15일에는 은행보유불 사용에 대해 액수의 다과를 막론하고 대통령이 인가하도록 하는 규정이 만들어져 달러에 관한한 1달러라도 대통령의 결제가 필요했다. 달러에 대한 집착은 프란체스카 여사도 마찬가지였다.

해운공사를 설립하고 무역업에도 참여하다 전쟁중에 일본공사를 지낸 김용주의 회고다.

『50년 7월중순 대전방위선이 흔들릴 때였다. 대한적십자사 총재였던 이기붕이 전화를 걸어 부산시내에 부상병들이 몰려오고 있으나 약이 없어 손을 쓸 수가 없다면서 약품조달을 요청했다. 당시 주일대표부에 달러가 있을 리 없었다. 생각다 못해 한국은행 동경지점의 김진형 부총재에게 요청,동경지점의 정부보유불 1만달러를 풀기로 하고 백방으로 뛰어 약품을 구했다. 그러나 달러사용에 대한 재가가 문제였다. 의약품을 급송한 후 대통령의 재가를 기다렸으나 기다리던 대통령의 재가대신 프란체스카 여사의 전화가 걸려왔다. 누구 마음대로 정부보유불을 썼느냐는 노기 띤 추궁이었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사정얘기를 제대로 듣지도 않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경무대 안팎이 관리하는 달러를 기업인들이 사용하기는 그만큼 어려웠다. 그래서 정치권에 대한 기업인의 곡예가 시작됐다. 해방후 혼란기에 줄을 잘 잡았던 백낙승의 괴력이 발휘된 것이 이즈음이었다. 재계 판도는 곧 정부의 달러를 따느냐 못따느냐에 달려있었다. 정부가 실시한 경매에서 달러만 잡으면 돈방석에 앉았으며 그렇지 못하면 뒷전으로 밀릴 수 밖에 없었다. 해방후 대권의 향배를 가늠할 수 없던 시기에 벌어졌던 기업인들의 줄잡기 경쟁과 귀속재산 불하전이 정경유착의 1기라면 당시의 로비는 정경유착 2기인 셈이다.

재벌과 정치와의 관계는 이후 전쟁 복구기의 원조불 경쟁과 경제발전 과정에서의 차관전쟁,각종 정부주도 사업권 획득 등으로 이어져 국내 재벌사의 뚜렷한 특징으로 남는다.

한국의 기업사가 정경유착의 역사로 점철되고 재벌들이 오늘날 국민들의 따가운 시선을 받게 된 이유는 바로 여기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정치곡예의 테크닉이 기업의 흥망성쇠와 직결됐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재벌이 봉쇄적인 가족경영의 형태를 띠게 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달러를 놓고 벌어진 정치권과 기업의 관계는 급기야 국내 최초의 대형 경제사건인 중석불 사건을 낳고 말았다.<이종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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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목재인물사 | 대성목재공업(주) 전택보(全澤珤) 회장 편(65)

브라질에 합판공장 설립도 추진

설봉은 전자사업과 섬유사업 외에도 기발한 아이디어로 사업을 창출해 낸 것이 많았는데, 대리점 개설의 경우 부실기업으로 정비되기 전부터 의 대리점을 이미 하고 있었으며, 부실기업으로 정리된 이후인 1971년에는 세계3위의 대선박회사인 <가와사끼 기선 회사>의 대리점을 개설했고, <타이 인터내셔날 항공>의 대리점도 개설하였다. 그리하여 1972년에는 한국선박대리점협회 회장직도 역임했다. 해외시장개척의 선구자로 정평이 나있던 설봉은 1971년부터는 중동진출을 계획하였는데, 그 결과 1976년에는 오만에 시멘트 1만 여 톤과 타이어튜브를 처녀 수출하는데 성공하였다.

컨테이너 하치장 사업도 하였는데, 수출입화물의 하치장(container yard)과 CFS(container Freight station)의 시설 없이는 해운업과 해운대리점사업이 발전할 수 없다고 보고, 1971년에 부산에서 이 사업을 시작하였다. 이에 대하여 1971년 1월5일자 <산업경제신문>은 ‘천우사 컨테이너 화물선 취항’이란 제목으로 ‘천우사는 국내 최초로 컨테이너 선박 3척을 도입하여 서울~시애틀~로스앤젤레스 간을 매월 3회씩 운항하기 시작했다. 컨테이너 운송이란 항구에 도착한 화물을 보세구역에서 일단 모두 꺼낸 다음 일일이 수속을 밝아 개별통관하는 재래식 통관과는 달리 컨테이너 자체와 함께 그 안에 실은 화물을 목적지까지 운송한 다음 화물을 통관하는 방식을 말한다’고 보도하였다.

신용카드 사업도 하였는데, 1964년 크레딧카드(credit card)란 말조차 생소하던 때에 신용카드 사업을 시작한 것으로 미국 최대의 여행사인 <아메리칸 익스프레스(American Express)>회사의 한국 총대리점을 하였다. 이 사업이야말로 신용 하나만으로 이루어낸 사업이었는데, 이것이 오늘날의 한국신용카드 주식회사가 된 것이다.

또한 브라질에 합판공장 설립을 추진하기도 하였다. 1977년 6월18일자 <무역통신>의 기사를 보면 ‘브라질에 합판공장, 천우사서 합작 건설키로’란 제목으로 ‘천우사(대표 전택보)는 남미 아마존강 유역에 브라질과 합작으로 합판공장을 건설키로 하고 국내에서는 최초로 합판공장의 해외진출을 추진하고 있다. 천우사는 북부 브라질 아마존강 유역의 마나우스에 자본금 400만 달러, 생산능력 일산 1만2000매 규모의 합판 공장을 50:50의 비율로 현지법인으로 설립하여 내년 하반기부터 생산을 시작할 예정이라고 한다’고 보도하였다. 그러나 브라질의 합판공장 설립은 브라질 당국의 법적 규제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설봉은 탁월한 ‘아이디어 메이커’

천우사가 부실기업으로 정비된지 불과 4년만인 1975년 말 현재 ‘정상을 달리는 대기업’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발전하였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부실기업으로 정비될 당시 700명의 간부사원들과 6000여 명의 공원들이 모두 떠나가고 불과 90여 명의 간부사원들만 가지고 새출발을 했던 천우사는 이제 다시 500여 명의 간부사원과 2500여 명의 공원을 가진 대기업으로 성장한 것이다.

천우사가 이렇게 빠른 시일 내에 대기업으로 재등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겠지만, 첫째로 설봉의 신용을 꼽아야 할 것이다.   <조선일보>가 1971년 8월17일자 신문에 천우사의 재기를 ‘신용간판 전택보, 활기찾는 천우사’란 제목으로 표현한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설봉의 신용은 천우사가 재기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천우사가 이토록 빨리 재기할 수 있었던 것은 설봉이 탁월한 ‘아이디어 메이커’였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설봉은 항상 말하기를 “아이디어에서는 2등을 해서는 안된다. 항상 1등을 해야한다. 2등은 패배자일 뿐이다”라고 했는데, 그만큼 아이디어에 대해서는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었다. 설봉은 항상 기발한 아이디어로 사업을 창출해 내었는데, 전자사업의 경우 TV생산사업부문은 1967년부터 착상한 것이었다. 그 착상이 네덜란드 필립스(Phillips)사와 기술제휴를 체결하게 하였고, 1971년 8월에 이르러서는 TV 첫 생산품을 시장에 내 놓을 수 있었으며, 1972년 10월경에는 3억 원을 투입, 구로공단에 부지 1만2000평을 확보하여 건평 1500평의 공장을 짓고 진공관 TV에서 TR-TV로의 기술전환을 했다. 이때만해도 한국의 TV생산기술은 기술제휴 없이는 불가능했으므로 재력에 있어서 열세에 있던 천우사는 기술전환으로 다른 회사와 경쟁하는 길밖에 없었다. 천우사는 국내업체로서는 처음으로 TR-TV를 생산한 회사로서 TV판매량에 있어서는 ‘금성사’와 ‘대한전선’에 이어 3위로 랭크되었다. 그리고 1974년에는 이란 고성능 카세트를 시중에 내놓았고, 컬러TV 개발도 완전무결한 단계로까지 준비해 놓고 있었다.

섬유사업의 경우 설봉은 자체공장이 있어야 하겠다는 생각에서 가리봉동 수출공단 대지 위에 3층짜리 봉제공장을 짓고 수출목표를 1000만 달러로 세웠다. 공장은 12라인으로 직원수만 해도 1000명이 되었고, 섬유공장 단일공장으로는 국내 최대 규모의 공장이었다.

출처 : 한국목재신문(https://www.woodkorea.co.kr)

한국목재인물사  |   대성목재공업(주)  전택보(全澤珤) 회장 편(64)
천우사의 재기(再起)

천우사만 남기고 그 계열이 부실기업으로 무너진 지 어언 4년이 지났다. 이 4년간은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여간 복잡하고 험난한 시기가 아니었다. 이 기간 동안 있었던 사건들을 대강 열거해 보면 1969년에는 위장간첩 이수근 사건, 무장공비침투만행사건, 미해군정찰기 피추사건, KAL여객기 납북사건이 있었다.  1970년에는 와우아파트 붕괴사건, 김대중 씨 대통령 후보출마, 1971년에는 박정희 씨 7대 대통령당선, 8대 국회의원 선거, 대연각 호텔 화재가 있었다. 1972년에는 7.4남북공동성명발표, 8.3조치(모든 기업체 사채동결), 국회해산 및 비상계엄령 선포, 개헌국민투표실시, 유신헌법확정과 공표 등이 있었다. 1973년에는 제9대 국회의원선거, 통일주체 국민회의에서 박정희 씨 대통령선출, 유류파동 그리고 이듬해인 1974년에는 새해 벽두부터 박 대통령의 긴급조치1호 발표(1월 8일), 이어 2호, 3호, 4호가 계속 발표되었다.  8.15광복절 기념식에서 육영수 여사가 흉탄에 맞아 세상을 떠나는 불상사, 땅굴발견사건 등 온 국민을 경악케 하는 사건들이 끊일 줄 모르게 일어났다.

설봉은 이러한 엄청난 사건들이 회오리바람처럼 휘몰아치는 속에서도 천우사를 재건하기 위하여 처절한 노력을 계속하였다.

1973년 5월27일자 <조선일보>는 ‘유신(維新)과 8.3조치 이후의 재계’라는 제목으로 재계의 내막을 소개하는 특별시리즈에서 전자공업 등으로 사업 확장에 열을 올리는 천우사의 기사를 싣고 있다.

‘1960년대 6년 동안이나 줄곧 수출최고상을 수상하고 해외시장개척에서 한때 ‘한국의 신용’으로 통했던 전택보 씨가 부실기업정리로 대성목재 등 5개 업체를 은행에 넘겨주고 나머지 천우사만 가지고서 기업을 운영하며 차츰 옛날의 영광을 되찾아 가고 있다. 30억 원에 가까운 사채를 안고 산하업체(대성목재, 조선피역, 삼익선박, 한국축산개발, 신진완구)들을 은행관리로 넘겨주었을 때만 해도 재계는 천우사의 재기를 어려운 것으로 내다 봤다.

당시 재계에서는 전택보 씨가 사회사업가이지 결코 기업가는 될 수 없는 사람이라고 그의 사업비운을 동정하기도 하고 비웃기도 했다. 그러한 전택보 씨의 천우사가 요즈음 사업 확장에 열을 올리고 있다. 천우사는 지난 4월말, 구로동 공업단지에 건평 2500(8250㎡)평의 섬유공장과 1200(3960㎡)평의 전자제품공장의 증설을 마쳤다’고 소개했다.

출처 : 한국목재신문(https://www.woodkorea.co.kr)

조흥은행, 대성목재 윤 전무를 파면결정
조흥은행이 대성목재 전무로 근무하고 있는 윤순선 씨를 파면키로 결정했다는 소식을 들은 전택보 사장은 급히 윤순선 전무를 서울 천우사 사무실로 오게하여 윤전무와 함께 조흥은행 행장을 찾아갔다.
자기가 이렇게 된 것은 그렇다치고 자기때문에 함께 일해온 전무가 희생당하는 것을 보고는 참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성명서 발표 주모자를 윤전무로 생각하는 것은 조흥은행의 오해일 뿐이라고 설명하고 파면결정을 취소시켰다.

이에 대하여 윤순선 전무는 그당시 일을 다음과 같이 회상하였다. “수백억의 재산과 기업이 부실로 정리당해 보통사람 같으면 절망과 허탈에 빠져 있을 형편인데도 전택보 사장님은 자기의 부하직원이 파면 당하는 것을 걱정한 나머지 보기도 싫은 은행장을 만나러 가자고 내게 명령했던 것입니다.
나는 노사장의 명령을 어길 수가 없어서 사장님을 따라 조흥은행 행장실을 찾아갔습니다. 행장은 먼저 온 손님들을 대하고 있어서 우리는 약 30분동안 대기 응접실에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때 손님 두분이 대기실로 들어왔습니다. 한 분은 삼성물산 전무로 기억됩니다.
그는 전 사장님을 보더니 겸손한 태도로 ‘얼마나 심려가 되십니까?’하고 정중히 인사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전 사장님은 크게 웃으시면서 ‘나는 종교인이기 때문에 사주팔자 같은 것을 별로 본 일은 없지만, 내 운명이 70까지라 하더군요. 그런데 지금 내 나이가 70이 다되었는데도 죽지 않아요. 건강에도 아무 이상이 없고 골프도 점점 더 잘 맞아요.
그래서 사주팔자란 미신이다. 맞지 않는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번에 부실기업이 되고 보니 사주팔자가 맞는구나 싶더군요!’ 하면서 크게 웃으시던 모습…. 또 계속해서 ‘사람이 아무리 위대하다 해도 죽으면 부고 한장이면 끝인데 내 경우는 그렇지가 않단 말이요, 대성목재 부실기업의 여파는 어찌나 큰지 일주일이 지나도 신문·잡지 등에서 부고가 계속되고 있으니 이렇게 굉장한 부고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 이렇게 담소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또 들어온 다른 손님들과 이야기하는 중에 ‘내 나이 70이 되어도 죽지 않는 것을 보니 아마 80까지는 더 일하라는 것 같아요. 앞으로 10년은 틀림없이 더 살겁니다. 더 힘차게 일해야지요’하면서 당당한 표정을 짓고 계셨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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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내아들 순재는 집 한 채도 없어
1969년 6월24일, 전택보 씨의 대성목재 등 5개 업체가 부실기업으로 처리될 때 설봉은 이미 70세의 노인, 보통사람 같으면 까무라쳐 넘어지거나 아주 인생을 포기하고 말았을 것이다. 사실 정부의 이러한 처사는 이미 70노구가 된 설봉에 대해 너무 가혹한 처사였다.

그 때 항간에는 정부 당국이 천우사 계열 5개 업체를 부실기업으로 처리한 것은 사업이 부실해서 뿐만 아니라 전택보 사장이 외국차관을 들여와 사업에는 안 쓰고 고리채 놀이를 했기 때문이고, 막대한 재산을 외국으로 빼돌렸다는 풍설이 떠돌았는데,
설봉은 이 풍설을 듣고 박정희 대통령에게 “이러이러한 사실을 박대통령께서도 인정하고 계시는 모양인데 사실 그러한 일이 있었는지의 여부를 조사해 주십시요”라는 내용의 서한을 보냈던 것이다.

그 뒤 정부 측에서는 실제로  조사를 해 보았던 모양인데 전택보 씨의 막내아들 순재는 집 한 채도 장만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는 이러한 소문은 전연 사실이 아닌 중상모략임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설봉은 박 대통령에게 ‘한국축산개발’만은 돌려달라고 요청을 했다.
“한국축산개발은 제가 꿈과 애착을 가지고 일으킨 사업일뿐 아니라 개인의 이익보다 나라의 이익을 위해 온갖 정성을 다해 이루어 놓은 사업이니 한국축산개발만은 돌려주십시요”라고 요청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축산개발은 전택보가 아니면 못한단 말인가”라고 하면서 일언지하에 거절했다는 것이었다.

당시 대성목재 전무로 있었던 윤순선 씨의 말에 의하면 대성목재가 부실기업으로 처리되자 5600여명의 직원들은 “대성목재가 왜 부실기업체냐? 우리끼리 10억을 증자하여 대성목재를 인수하겠다”면서 성명서를 발표하는 동시에 증자위원회를 조직했다고 한다.
그러자 관리은행인 조흥은행은 아무래도 전무인 윤순선 씨가 주모자일 것임으로 그 주모자인 윤순선 씨를 파면키로 결정했다고 통보해 왔다고 한다. 그 때가 1969년 8월 어느날이었고 그러니까 부실기업으로 처리된지는 약 2개월 뒤였다고 한다. 이 사실을 들은 전택보 사장은 걱정이 되었다.

자기가 당한 것은 관계없으나 자기 때문에 함께 일하던 전무가 주모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주모자로 몰려 파면 당하는 것을 보고는 침묵을 지킬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설봉은 급히 윤 전무와 함께 조흥은행 행장을 찾아갔다.

출처 : 한국목재신문(https://www.woodkorea.co.kr)

대성목재 전 직원들 “우리가 맡겠다”

대성목재가 부실기업으로 정리된 사실이 발표되자 가장 충격을 받은 것은 당사자인 대성목재의 직원들이었다.
대성목재의 5600여명의 직원과 공원들은 대성목재가 부실기업으로 정리되는 것을 반대하는 성명서를 6월27일자 신문에 냈다.

신문지 절반 크기의 대대적인 것이었는데 그 내용도 너무 절실하고 대담한 것이어서 어느 신문사는 이 막대한 광고비를 종업원들이 어떻게 낼 수 있겠느냐면서 선뜻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고 한다. 사태가 이쯤 되자 각 신문들은 이를 크게 보도했다.

6월29일자 <주간조선>은 ‘부실기업체의 충실한 종업원 궐기’라는 제호로 특집보도를 하기도 했다. ‘40만 인천시민의 10% 가까이 되는 사람의 입을 먹여살렸고, 월급이 하루 늦고 이른데 따라 인천시민의 물가에 영향을 끼치는 대성목재주식회사가 당국에 의해 부실기업체로 단정돼 관리은행에 인수처리될 운명에 놓였다’로 시작해 대성목재의 실정과 종업원들의 성명서 내용을 예리하게 분석 보도했다.

대성목재가 이처럼 부실기업체라는 보도는 일반 국민들로서는 그 부실의 자세한 내용을 이해할 수도 없고 또 당국이 한 일이니까 이건 정책적인 문제라고 만 이해하고 있었다. 다만 대성목재를 살리려는 5600여 명에 달하는 종업원들의 자세가 대단하다는 것이다.

대성목재가 딴 사람에게 넘어간다할지라도 일은 계속될 것이고 따라서 대부분의 종업원들도 그대로 있게 될 텐데, 그렇다면 무엇때문에 종업원들이 이처럼 어려운 일을 자청하고 나선 것일까?

이 어려운 일이란 부실기업체로 단정된데 대한 그들의 공식반응에서 나타나고 있다. 그래서 이 성명서의 골자를 나열해 보면 △우리들은 이 회사의 각 분야에서 일하고 있음으로 이 회사가 부실기업체인가 아닌가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이번 정부 결정에 대해서는 정부의 권위를 위해 그 결정을 번복하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우리가 알고 믿기에는 대성목재가 부실업체가 아닌 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이 업체는 타인에게 처분될 수 없고 우리 5600명 전체 종업원들이 인수할 것을 선언한다. △우리들은 비장한 각오와 결심으로 각자의 전 재산을 바쳐 일금 10여억 원을 갹출하기로 결의했다고 돼 있다.

출처 : 한국목재신문(https://www.woodkorea.co.kr)

정치바람 타기 싫어하는 기업인

이 밖에도 거의 모든 신문들이 사설란에서 이 문제를 다루면서 천우사(대성목재의 모체)를 동정했는데,
6월26일자 <서울경제신문>은 ‘새로운 기업관, 성실해야 발전할 수 있는 환경의 조성’이란 제하의 사설에서 “전택보 씨는 국가와 은행에 미안한 마음을 금할 길 없음을 피력한 바 있다.
이 비운의 기업인이 이 나라 무역증진에 이바지한 과거를 회상하며 천우사의 앞날을 축복해야 할 것이다. 그가 남긴 쓰라린 교훈이 이 나라 산업계에 새 기풍을 진작시키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했고, 같은 날자 <조선일보>는 ‘정치 모르는 전택보 씨에 동정’이란 제하에 “전택보 씨의 대성목재 등 5개 업체가 주 채권자인 조흥은행으로 넘어간다는 발표가 있자 경제계 인사들은 가슴아픈 일이라고 동정어린 한마디씩을 했다.
전 씨에게 동정이 집중된 까닭은 그가 정치바람을 타기 싫어하는 기업인이었다는 점과 우리나라 보세 가공업의 선구자였다는 데에 있는 듯 했다. 전 씨는 조화, 완구 등 보세가공의 각 분야에 거의 손 안댄 곳이 없으며 가공수출분야를 리드해 왔다.

이러한 새 분야의 개척, 확장에 주력했기 때문에 다른 사업에는 관심을 둘 수가 없어 해체를 당하는 쓰라림을 맛보게 된 것이라고, 특히 전씨가 덴마크 명예총영사를 비롯한 많은 국제 단체의 임원을 겸하고 있는데, 한국경제인의 국제적 위상이 내려갈지도 모른다고 몹시 걱정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했다.

적힌 글은 짧으나 매우 의미 심장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6월27일자 <현대 경제일보>는 ‘천우사 계열 5개 업체의 정비가 뜻하는 것’이라는 제목으로, 6월28일자 <서울경제신문>은 ‘영광 사라진 비운의 전택보 씨, 수출의 개척자 끝내 정비 당해’라는 제목으로 이 문제를 다루었으며 아울러 천우사의 역사와 업적과 함께 이 사건의 언저리를 파헤쳐 놓았다.

이 밖에도 이에 관한 많은 기사들이 있는데 그 중에는 ‘비운의 수출왕 전택보 씨’, ‘전경련, 정부의 천우사 정비 방안에 맞서 정면 반발’등 자극적인 표현의 기사제목들을 여러군데서 찾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부실기업의 정리 사실이 발표되자 가장 충격을 받은 것은 무엇보다도 당사자인 천우사계열 5개 업체의 직원들이었다.

글/ 김상혁  shkim@woodkorea.co.kr

출처 : 한국목재신문(https://www.woodkorea.co.kr)

국내 모든 신문들은 이 사실을 경제란 또는 사설란에 10여 일간 대서특필 했다. 한편 전경련(전국경제인연합회)은 그 해 6월26일 긴급이사회를 소집, 연 이틀간의 긴급대책위원회를 열고 부실기업문제에 대한 건의서를 채택해 정부당국에 제출했다.

그 건의서의 내용은 ①민간 상업차관에 대한 투자에 있어 정부의 ‘지불보증제도’를 지양하고 ②부실기업정비반에는 당해 기업주 및 경제분야의 권위자를 참여토록 개편하고 ③갱생이 가능한 기업에는 일정기간의 여유를 줘야 할 것이며 ④부실기업 정리기준을 자본구성 비율에만 치우칠 것이 아니라 산업성, 전망, 국제경쟁력, 대외신용도에 중점을 둬야 한다고 돼 있다.

제②항에 부실기업정비반에 당해 기업주를 참여시켜야 한다는 말은 천우사의 경우 사전에 아무런 예고도 없이 일방적으로 집행했다는 말이며 제④항에 자본구성비율에 치울칠 것이 아니라는 말은 천우사(대성목재의 모체)가 부채를 많이 진것은 사실이나 산업성, 전망, 국제경쟁력, 대외신용도가 있어왔는데 어찌 자본구성비율 그것만이 부실기업의 조건이 될 수 있겠냐는 말이기도 했다.

<중앙일보>는 소집 이틀 후인 6월28일자 신문에 ‘아이러니한 천우사계열 정비, 전경련이 호신운동’이란 제하에 ‘국내 굴지의 기업인 천우사계열 5개 업체가 부실기업체로 몰려 주 채권자인 조흥은행으로 넘어가는 비운을 맞게 되자 전령련이 긴급사후대책을 논의하는 등 비상사태에 돌입한 느낌’이라고 보도했다.

<동아일보>는 ‘부실기업과 부실경제’라는 사설을 통해 ‘자본구성이 부실하지 않은 기업은 천우사 외에 얼마나 될 것인가? 부실기업의 발생은 기업인에게도 문제가 있지만 따지고 보면 정부당국에 더 큰 잘못이 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부실기업정리정책이 객관적기준에 의해 일정한 원칙이 있어야 하는데 그 대상과 범위가 어떠한 기준에 의해 결정되는 것인지 도무지 알려지지 않고 있다’고 논평했다.

글/ 김상혁  shkim@woodkorea.co.kr

출처 : 한국목재신문(https://www.woodkorea.co.kr)

비운의 수출왕, 마침내 부실기업으로 정비돼
설봉은 그날(1969년 6월24일) 집에 돌아와 밤을 꼬박 뜬 눈으로 지새야 했다. 이튿날 아침, 그제야 비로소 자세한 정비 내용을 알 수 있었다. 이 날 국내 7대 일간 신문들은 일제히 이 내용을 크게 보도했는데 그 중 <한국일보>에 개제된 기사 내용을 보면, ‘천우사계열 대성목재 등 6개 업체 정비… 부채늘고 상환어려워, 청와대 내에 설치돼어 있는 부실기업체 정비반(반장 장덕진 씨: 재무부 이재국장)은 6월24일 오전, 전택보 씨가 소유하고 있는 대성목재, 조선피혁, 한국축산, 삼익선박, 신진완구 등 6개 업체의 정비방안을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 확정했다.
이날 공화당 정책위원장 백남억 씨, 부총리겸 경제기획원장 김학열 씨, 재무부장관 황종율 씨, 상공부 장관 김정열 씨, 청와대비서실장 이후락 씨 등이 배석한 가운데 확정된 천우사 계열 정비방안은

1)6개 업체 중 천우사를 제외한 5개업체는 주 채권자인 조흥은행이 인수하여 정리 처분하고, 전택보 씨로 부터 완전히 인연을 끊게 하는 동시에
2)천우사는 전택보 씨 소유로 그대로 존속시키며 종합무역상사로 육성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당시 대성목재는 자산규모가 108억, 천우사는 18억, 조선피혁은 19억, 한국축산은 3억, 삼익선박은 6억, 신진완구는 1억 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날 전택보 씨 계열 6개 업체의 정비 방안을 승인하는 자리에서
“1)기업은 자기 자본 조달 능력이 있는 사람이 해야하며 과거와 같이 사채를 쓰더라도 공장만 지어 놓으면 돈을 벌 수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2)그 기업이 잘못되면 그 기업체가 망할 뿐 아니라 그 기업인도 함께 책임지는 기업윤리의 확립이 소망된다.”
고 말했다.

6월25일자에 보도된 기사내용은 각 신문이 거의 같았으나 유독 <경향신문>만은 기사 외에 ‘기자석’이라는 코너에 ‘2개월전까지만 해도 1000만 달러의 현금차관을 들여올 만큼 건전기업인으로 알려진 전택보 씨가 20년간 길러온 대성목재 등 5개 업체를 내놓게 된 데 대해 일부 업계에서는 ‘가혹하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지만, 자기자본 4억7000만원으로 162억원의 대기업을 굴려 왔다는 것이 오히려 불가사의 하다는게 중론’이라고 논평했다.
글/ 김상혁  shkim@woodkorea.co.kr

출처 : 한국목재신문(https://www.woodkorea.co.kr)

한국목재인물사  |   대성목재공업(주)  전택보(全澤珤) 회장 편(50)
청천벽력 같은 뉴스, 부실기업정비

1969년 6월24일, 그날도 설봉은 예전과 다름없이 아침 일찍 일어나 산책을 하고 소공동에 있는 천우사(대성목재의 모체) 사무실로 나갔다. 책상에 앉아 내일이 바로 6·25라는 생각이 들면서 19년전 그날에 있었던 일들, 부산 피난시절, 민족의 수난과 경제파탄에 얽힌 쓰라린 일들을 주마등처럼 되새기며 과거를 회상하고 있었다.
그리고 설봉은 앞으로 천우사가 할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고 있엇다.
이제 천우사가 은행관리로 넘어간지도 어느덧 반년이란 세월이 지났다. 그동안 부끄럽기도 했고, 부자유스럽기도 했고, 또 유능한 사원들이 하나 둘 자기 곁을 떠날 때면 낙심하여 괴로울 때도 한 두번이 아니었으나, 그래도 1000만 달러의 외국차관을 얻어다가 30여 억원의 사채를 은행부채로 대치시키게 되었고 다년간 질질 끌려오며 숙제로 남아 있던 P.L480 잉여농산물 수입물자도 불원간 도착하게 되어 있는 것은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었다.

이런 생각을 하던 설봉은 “천우사의 장래도 반드시 어둡지 많은 않구먼! 한 달에 근 1억원의 사채이자를 꼬박 꼬박 물어야 했는데 이제 이것도 해결되었고, 이제 모든 사원이 한데 뭉쳐 힘써 일하면 회사운영은 다시 호전될 수 있으리라.

그리고 한창 공사 중에 있는 대성목재의 월미도 공장만 완공된다면 거기서 연간 10억여원의 순이익은 어렵지 않게 날 것이고 이렇게만 된다면 적어도 5년 내에 모든 것을 정리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 이르러서는 가슴이 뜨거워 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그날 정오쯤 사무실에 전화가 걸려왔다. 친구인 김성곤 씨로부터 걸려온 전화였다. 전화를 건네받은 설봉은 김성곤 씨의 음성이 심상치가 않음을 직감했다.

그의 목소리는 매우 심각했다. 그 내용인즉슨, 이날 상오 청와대에서 박정희 대통령 주재로 부실업체정비 관계관 회의가 열렸는데 이때, 장덕진 씨(당시 재무부 이재국장)가 제출한 천우사 계열에 대한 정비방안이 승인되었다는 것이었다. 이 전화를 받은 설봉은 눈앞이 캄캄해지고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이 소리는 바로 천우사와 모든 방계업체가 부실기업으로 정비된다는 폭탄선언이었다.
“무슨 소니냐? 우리회사가 하루 아침에 무너져 내린단 말인가!” 정말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글/ 김상혁 shkim@woodkorea.co.kr

출처 : 한국목재신문(https://www.woodkorea.co.kr)

한국목재인물사  |   대성목재공업(주) 전택보(全澤珤) 회장 편 (47)

1968년. 그 해 여름을 설봉은 무겁고 우울한 마음으로 보내야 했다. 그 해는 극심한 가뭄으로 국민전체가 일기예보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는데다가 설봉은 개인적으로 사업상 여러가지로 어려운 문제들이 산적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업상의 문제들은 잘 풀리지 않은 채 여름은 지나가고 가을이 찾아왔다. 설봉에게는 이 가을이 유난히도 슬쓸하게 느껴졌다.

설봉이 잠을 잘 이룰 수가 없어 뜬 눈으로 누워있노라면 자그마한 정원 구석에서 찌르륵대는 귀뚜라미 소리가 그의 마음을 더욱 처량하게 만들었다.
바람소리와 함께 우수수 떨어지는 낙엽소리도 설봉으로 하여금 잠을 못 이루게 했고 ‘나도 이제 많이 늙었구나’하는 생각에 잠기게 하였다. ‘농민들은 몸에 씨를 뿌리고 여름에 김매어 가을에 거두어 들인 것을 겨울에 꺼내먹으면서 인생을 즐기겠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무엇으로 인생을 즐길 수 있단 말인가? 혹시 내가 바로 그런 부류의 사람이 아닐까? 젊었을 때의 이상도 꿈도 이제는 다 사라져 버린 그런 사람은 아닐까?’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설봉은 자기 자신과 지난 날들을 돌이켜 보며 잠을 잘 이루지 못했다.
하지만 설봉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자기의 삶은 조금이라도 남에게 보탬이 돼 주려고 노력했던 삶이었지 결코 자신의 출세나 치부만을 위해 살아온 삶은 아니었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사는 것이 사람답게 사는 것이지 자기 혼자만 잘 살고 제 욕심만 채우려고 한다면 부끄러운 삶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도 해 보았다.

그리고 그는 ‘오늘 날과 같이 사회가 공동체화 돼 가는 세상에 있어서는 개인주의는 용납될 수 없다. 아무리 자유경제체제라 할 지라도 개개인이 제멋대로 벌어 멋대로 쓰라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인생관도 이제는 많이 달라져야 할 것이다’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런데 천우사의 형편은 10월에 접어들면서 더욱 어려워졌다. 재정난이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오랫동안의 사채부담으로 영업이익은 거의 이자로 지불해야 했고 최근에 이르러서는 영업실적마저 부진하여 이자에 이자가 붙어 사업유지를 아주 어렵게 만들었다.

1968년 12월, 마침내 천우사는 은행관리회사가 되고 말았다. 은행관리란 어찌보면 특혜조치다.
왜냐하면 정부당국이 몇가지 이유를 들어 은행으로 하여금 그 기업의 부채를 맡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천우사의 경우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주어졌다.

첫째, 천우사는 다년간 가장 많은 수출실적을 올린 회사로서 국제적 신용도에 있어서도 무시 못할 존재임으로 이를 붙들어 줘야 한다. 둘째, 천우사는 한 고비만 넘기면 다시 살아나서 수출진흥에 공헌을 할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이것은 하나의 특혜조치가 틀림없었다. 그러나 설봉은 마음이 아팠다. 이렇게 정부의 혜택을 받는다는 것이 자기의 신념과 자존심을 무너뜨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때 설봉은 “나라는 존재는 없어지고 마는 것만 같았다. 돌이켜 생각하면 이것이 내 운명이요, 팔자가 아닌가 한다”고 탄식하며 은행관리사가 된것을 몹시 가슴아파 했다.


전택보 회장<29>우리의 살길은 보세가공뿐이라고 외치다

전택보 회장<29>우리의 살길은 보세가공뿐이라고 외치다

대성목재공업(주) 전택보(全澤珤) 회장 편<29>

김용완추도사” 우리나라는 자본과 기술이 없는만큼 보세가공을 해서 수출하는 길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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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봉은 보세가공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설봉이 보세가공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게된 것은 6·25 전란후 수복된 서울에서 수많은 실업자들이 방황하고 있는 것을 본 이후였다.

전쟁으로 생명을 잃은 사람이야 어쩔 수 없다치더라도 살아남은 사람들조차 앞으로 살아갈 길이 막막하게 느껴질 정도로 수복된 수도 서울의 모습은 참담했다.
거리에는 수많은 실업자들이 우글거렸고 전쟁미망인, 고아들은 이리저리 방황하고 있었다. 신문지상에는 연일 생활고로 인한 일가족 집단 자살, 강도, 살인, 사기 등의 사회악 기사가 가득차 있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국민은 극심한 빈곤 때문에 살기가 어려웠고 돈있는 사람들은 그들대로 불안감때문에 하루하루를 떨면서 살아가는 무서운 세상이었다.

세상형편이 이렇게 돌아가는 것을 본 설봉은 우리나라가 잘 살 수 있는 좋은 방법이 없을까 곰곰히 생각하게 됐다. 우리나라는 자원도 없고 변변한 기술도 없다. 약간의 생산시설마져도 6·25전란으로 잿더미 속에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나 아직도 사람은 많다. 그 노동력을 잘만 활용하면 활로가 트일 것이다. 생각이 여기까지에 이르자 설봉은 우리나라가 살길은 보세가공뿐이라고 느끼게 됐다. 지하자원개발이니 수산자원개발이니 개발 대상이 많겠지만 인적자원을 어떻게 개발하느냐가 우선과제이다. 북한 피난민들의 대거 월남, 거기에 인구의 자연증가는 거대한 인적자원을 구성하고 있으나 이 자원을 개방하지 못하고 있다. 이 많은 사람을 잘 활용하면 선진 제국과 경쟁해 이길 수 있다. 공장을 세워놓고도 노동자가 없어서 쩔쩔매는 나라의 기업인이 본다면 부러워할만큼 우리에게는 노동력이 풍부하다. 이 노동력을 이용 못한다는 것은 기업인의 역량부족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저렴한 노동력을 이용해 수공업, 가내공업으로 중소기업을 급속히 발전시키는 것이 적은 자본을 가진 우리가 조속한 시일 내에 실업자를 구제하고 국제수지를 개선시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전제하고 나서 그는 일본과 홍콩으로부터 기술을 도입해서 섬유제품, 2차가공품, 부품생산공장의 설치를 해야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그밖에도 크리스마스 장식업, 조화, 가발, 농구화, 메리야스, 양말, 수예품 등 할일이 얼마든지 있다고 역설했다. 우리국민이 공것을 바라지 말고 우리의 힘으로 우리의 경제난을 타개해 보겠다는 굳은 결의를 가지고 노력한다면 수년내에 억대의 외화를 벌것이 틀림없다고 외쳤다.

그리하여 설봉은 그당시 상공부장관, 재무부장관과 논의해 가칭 ‘가공무역추진위원회’라는 단체를 발기시켰다.
이 위원회의 취지는 우리나라에 없는 원료를 외국에서 도입해 이것을 가공해 수출하는 업체를 돕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천우사의 재기(再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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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택보 다시 도전하다


천우사만 남기고 그 계열이 부실기업으로 무너진 지 어언 4년이 지났다. 이 4년간은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여간 복잡하고 험난한 시기가 아니었다. 이 기간 동안 있었던 사건들을 대강 열거해 보면 1969년에는 위장간첩 이수근 사건, 무장공비침투만행사건, 미해군정찰기 피추사건, KAL여객기 납북사건이 있었다.  1970년에는 와우아파트 붕괴사건, 김대중 씨 대통령 후보출마, 1971년에는 박정희 씨 7대 대통령당선, 8대 국회의원 선거, 대연각 호텔 화재가 있었다. 1972년에는 7.4남북공동성명발표, 8.3조치(모든 기업체 사채동결), 국회해산 및 비상계엄령 선포, 개헌국민투표실시, 유신헌법확정과 공표 등이 있었다. 1973년에는 제9대 국회의원선거, 통일주체 국민회의에서 박정희 씨 대통령선출, 유류파동 그리고 이듬해인 1974년에는 새해 벽두부터 박 대통령의 긴급조치1호 발표(1월 8일), 이어 2호, 3호, 4호가 계속 발표되었다.  8.15광복절 기념식에서 육영수 여사가 흉탄에 맞아 세상을 떠나는 불상사, 땅굴발견사건 등 온 국민을 경악케 하는 사건들이 끊일 줄 모르게 일어났다.


설봉은 이러한 엄청난 사건들이 회오리바람처럼 휘몰아치는 속에서도 천우사를 재건하기 위하여 처절한 노력을 계속하였다.


1973년 5월27일자 <조선일보>는 ‘유신(維新)과 8.3조치 이후의 재계’라는 제목으로 재계의 내막을 소개하는 특별시리즈에서 전자공업 등으로 사업 확장에 열을 올리는 천우사의 기사를 싣고 있다.


‘1960년대 6년 동안이나 줄곧 수출최고상을 수상하고 해외시장개척에서 한때 ‘한국의 신용’으로 통했던 전택보 씨가 부실기업정리로 대성목재 등 5개 업체를 은행에 넘겨주고 나머지 천우사만 가지고서 기업을 운영하며 차츰 옛날의 영광을 되찾아 가고 있다. 30억 원에 가까운 사채를 안고 산하업체(대성목재, 조선피역, 삼익선박, 한국축산개발, 신진완구)들을 은행관리로 넘겨주었을 때만 해도 재계는 천우사의 재기를 어려운 것으로 내다 봤다.


당시 재계에서는 전택보 씨가 사회사업가이지 결코 기업가는 될 수 없는 사람이라고 그의 사업비운을 동정하기도 하고 비웃기도 했다. 그러한 전택보 씨의 천우사가 요즈음 사업 확장에 열을 올리고 있다. 천우사는 지난 4월말, 구로동 공업단지에 건평 2500(8250㎡)평의 섬유공장과 1200(3960㎡)평의 전자제품공장의 증설을 마쳤다’고 소개했다.

김용완 추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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