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주1책]나라를 위해 일한다는 거짓말,보고서에 정답이 없다 편

노한동 작가의 ‘나라를 위해서 일한다는 거짓말’을 이번주 읽을 거리로 골랐습니다. 제목이 상당히 도발적입니다.

저자는 대학 재학시절 행정고시에 합격해 문화체육관광부에서 10년을 일하다가 스스로 사표를 내고, 이 책을 썼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저자가 공무원 사회를 르포하기 위해 10년동안 위장 근무를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내부 고발이 적나라합니다.

저자 스스로 5년미만 퇴직자는 공무원사회를 몰라서 고발하지 못하고, 30년 이상 오래 근무한 사람은 걸린게 많아 고발하지 못하는데 자신은 공무원 사회를 충분히 경험했고 또 빚진 것도 없어 이런 책을 쓸 수 있다고 밝힙니다.

저자는 상당한 수준의 글솜씨와 비판적 사고를 발휘해 책을 써내려갑니다. 무엇보다 공직 사회가 지니고 있는 구조적 문제를 생생한 사례를 통해 날카롭게 드러내는데 솜씨를 발휘합니다.

특히 중앙부처가 세종시로 내려간 이후 언론의 감시망에서 벗어난 공무원사회를 내부자가 고발함으로써, 오피니언 리더들에게 충격을 줍니다.

노작가의 책에서 보고서 부분을 뽑아서 정독했습니다. 형식적 보고서 문화는 공직사회뿐만 아니라 일반 기업에서도 뿌리깊게 자리를 잡고 있어 크게 공감하면서 읽었습니다.

1.보고서를 빼놓고 공직사회를 이야기할 수 있을까?

‘공무원은 보고서로 말한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보고서 작성은 공무원 업무의 알파이자 오메가이다. 그만큼 공직사회에는 보고서에 유독 예민한 사람이 많다.

1.1 과장의 빨간펜 첨삭

내가 겪었던 상급자들 역시 다른 건 몰라도 보고서 검토만큼은 대체로 깐깐하게 굴었다. 과장은 컴퓨터용 빨간 사인펜을 들고 첨삭을 몇시간동안 하다가 컴퓨터 모니터가 보이는 간이 의자에 나를 앉히고는 내용이 맞는 건지 확인해 가며 직접 보고서를 고쳤다.

1.2 국장의 불만

국장은 과장이 고쳐쓴 보고서를 보면서 “보고서 연습 좀 더해야겠어. 보고서 앞쪽에 필요 없는 말은 좀 줄이고, 뒤에 내용을 늘려. 이런 건 다 본문에 필요 없는 내용이니까 붙임 처리하라”면서 지적을 했다.

왕년에 보고서로 전 부처에 이름을 날렸다며 그토록 자신의 실력을 자랑하던 과장의 보고서가 국장의 눈엔 낙제에 가깝다는 점을 내 눈으로 확인하니 왠지 모르게 통쾌하기도 했다.

1.3 세가지 보고서 비교

자리로 돌아와 내가 처음 썼던 보고서와 과장이 쓴 보고서를 서로 비교해 가며 차분하게 읽었다. 국장은 내가 처음 쓴 보고서를 더 마음에 들어 했을까? 꼭 그렇지는 않았을 것 같다. 국장이 고친 보고서는 내가 쓴 보고서와는 또 다른 스타일이었으니까.

위로를 건네는 선배에게 국장이 과장의 보고서를 얼마나 잘근잘근 씹어댔는지 이야기보따리를 풀고 싶었지만, 괜히 이야기가 돌고 돌아 과장의 귀에 들어갈까 두려워 보고서 이야기는 영원히 나만의 비밀로 간직하기로 했다.

2.정부 보고서는 가독성에 목숨을 건 문서다.

보고서의 본문은 보통 한 장이며, 복잡한 통계나 보조 자료는 붙임으로 처리한다.

글자 크기는 15포인트로 일반적인 책자보다 상당히 큰 편이고, 개조식(個條式, 번호나 도형 등을 붙여 항목을 나누고 주요 단어 중심으로 기술하는 방식)으로 작성되어 있어 형식적으로 읽기가 매우 수월하다.

네모, 동그라미, 작대기, 별표 등의 활용은 본문 안에서도 중요한 내용과 중요하지 않은 내용 간의 위상을 한눈에 드러내 주는 역할을 하며, 하나의 문단이 두 줄을 넘지 않기 때문에 대충 봐도 문단 하나가 한눈에 들어온다.

2.1 정부 보고서 작성의 백미

하나의 단어가 줄을 바꿔 걸쳐 있으면 안 된다는 불문율을 철저하게 지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신속하게’라는 단어를 사용한다면 ‘신속’이 한 줄의 마지막, ‘하게’가 다음 줄의 처음에 걸치도록 편집하면 안 된다.

3.보고받는 상사 위주

정부의 보고서가 가독성에 목숨을 거는 이유는 보고받는 사람의 입장을 가장 크게 고려하기 때문이다.

장·차관 등 고위공무원일수록 항상 바쁘고 업무 범위도 넓기에, 그들이 제한된 시간 안에 핵심을 알아볼 수 있도록 보고서를 작성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사무관은 중앙공무원교육원에서 연수를 받을 때부터 ‘핵심만 간단하게’ 보고서를 쓰라고 귀가 따갑도록 교육받는다. 3.1‘핵심만 간단하게’라는 추상적 명제

아무리 복잡한 사안이라도 1장의 보고서로 상황을 요약하라는 구체적인 지시로 떨어진다.

제목 등을 제외하면 1장의 보고서는 20줄 남짓. 극히 제한된 분량 안에서도 보고해야 하는 핵심적인 내용을 빠짐없이 풀어놓는 기술은 그 나름대로는 예술에 가까운, 오랜 훈련으로 다져지는 정교한 스킬이다.

4.보고서 작성 능력 자랑

공직사회에서는 자신의 보고서 작성 능력을 자랑하는 사람을 심심치 않게 만날 수 있다.

하지만 보고서 작성은 일률적으로 줄 세우기 어려운 능력이다. 국장과 과장, 나의 보고서 스타일이 모두 달랐듯이 일정 수준 이상에서 보고서는 취향의 문제에 가깝다.

그 점을 깨닫지 못할 정도로 경험이 부족하거나 제대로 훈련받지 못한 공무원일수록 자신의 보고서 작성 능력을 떠벌린다.

능력이 부족한 사람일수록 자신의 능력을 과대평가하는 더닝-크루거 효과(Dunning-Kruger effect)의 좋은 예시다.

5. 정부 보고서에 대한 비판적 시각

비판의 초점은 대부분 지나친 형식주의에 대한 것이다. 한 장, 한 문단, 한 줄과 같은 형식에 과도하게 집착하느라 보고서에 담겨야 하는 핵심적인 내용에 제대로 신경 쓰지 못한다는 것이다.

5.1 개조식의 보고서 형식 그 자체에 대한 비판

개조식에선 문장의 주어가 분명치 않아 주술 관계가 모호해지는 경우가 있다. 시제 등이 모호해 저 문장의 기능이 명료하지 않을 수도 있다.

또한, 도형 등의 활용으로 문장의 위계가 한눈에 들어오기는 하지만 서로 다른 층위의 문장 간의 관계가 순접인지 역접인지 등을 알 수 없어 문장 간 논리적 연관성을 확인하기 어렵다. 무엇보다 개조식 글쓰기엔 내용을 전달하는 형식과 태도의 격조가 없다.

실제로 미국이나 영국 등 주요 선진국, 혹은 국제기구에서도 대개 개조식보다는 서술형으로 보고서를 쓴다.

6. 실무자에게 개조식이 편하다

조금만 숙달되면 형식을 맞추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은 일이며, 전임자들이 만들어 낸 보고서가 있는 경우엔 내용만 조금 변경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처럼 정형화된 형식이 일의 효율을 배가한다. 또한 개조식으로 작성하는 1장짜리 정부 보고서는 사건, 사고의 요약이나 행사계획과 같은 단발적인 정보를 쉽게 보고하기에 매우 유용한 틀이다. 육하원칙에 따른 일의 진행이 일목요연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7. 복잡한 문제의 평탄화

하지만 세상엔 1장짜리 보고서로 모두 담을 수 없는 문제들이 가득하다. 문제의 원인이 명확하지 않거나 다양한 요인이 얽혀 있으며, 해결 방안 역시 많은 논의가 필요한 사안들이 그것이다.

정부 보고서는 이런 문제를 다룰 때도 ‘핵심만 간단하게’라는 원칙에 경도된다.

보고서 1장에 모든 내용이 깔끔하게 담길 수 있도록 문제점과 원인, 해결 방안을 2~3가지의 맥락으로 포섭하고, 서로 조응되게 구성하여 현실을 의도적으로 평탄화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실타래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복잡한 현실의 이해관계는 몇 가지의 단순한 맥락으로, 의도적으로 치환된다.

7.1 현실 문제 단순화

효과성이 있는지 등 정책 수단의 유효성에 관한 심층적인 논의 자체가 생략되어 있는 탓이다. 하지만 정부의 보고서는 항상 이런 방식으로 작성된다.

보고서 작성의 목적이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깔끔한 문서 작성에 방점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장·차관 등 정무직에게 사안을 보고해야 하는 국장급 간부는 현실을 평탄화하여 보고하기에 수월한 짧고 간결한 보고서를 선호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런 보고서만으로는 현실의 문제를 정확하게 직시하거나, 문제의 적확한 해결을 위한 복잡하고 다양한 정책적 논의를 부처 내에서 촉발하기는 어렵다.

8.사무관의 문제인식 능력 저하

더군다나 현실을 의도적으로 평탄화하는 정부 보고서 작성법에 능해질수록, 정책의 실무를 직접 담당하는 사무관조차 문제를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으려는 습성을 갖게 된다.

복잡한 문제를 다양한 맥락으로 이해하고 설명하기에는 부적절한 정부 보고서의 형식상의 한계 때문에 문제를 깊이 탐구하기보다는 보고하기 쉬운 틀에 맞는 적당한 통계와 자료를 짜집기 하는 데 몰두한다

9.장차관의 이해 수준 문제

장·차관 등 고위공무원이 지나치게 바쁘고 업무 범위가 넓기에 핵심만 간단하게 보고서를 작성해야 한다는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주장이다.

바쁘고 업무 범위가 넓다고 해서 정무직이 일을 피상적으로 알아도 된다는 뜻은 전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실적인 제약 조건 아래에서도 장·차관은 그 분야에 능통하며 문제의 핵심을 꿰뚫어 보는 통찰력을 갖춘 사람이 맡아야 한다

9.1 장관과 차관의 인선

현재도 미래도 별로 희망적이진 않다. 해당 분야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는 사람들이 정치권에 줄을 대서 장·차관으로 임명되는 경우가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고 받는 사람이 분야에 대한 이해가 떨어질 경우 보고서는 문제에 대한 깊은 이해에 도달하지 못한 채 개념 설명과 단순한 도식화에 머물 수밖에 없다.

게다가 더 이상 쉽게 쓰기 어려울 정도로 보고서의 수준을 낮췄는데도, 아무리 봐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며 보고서 좀 쉽게 쓰라고 되려 역정을 내는 경우까지 있다.

하지만 문제는 보고서가 아니다. 진짜 문제는 애초에 그들이 갖고 있는 분야에 대한 미천한 이해도다.

10.보고서에 정답은 없다.

세상의 문제에 대한 정답도 없고, 잘 쓴 보고서를 정의하는 정답도 없다. 그럼에도 공직사회는 여전히 ‘핵심만 간결하게’라는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공무원은 보고하기 좋은 보고서를 만들기 위한 시간에, 복잡다단하게 변화하는 현실을 더욱 정밀히 이해하는 데 더 큰 노력을 들여야 한다. 또한 보고서를 예쁘게 쓰기 위해 복잡한 문제를 단순하게 평탄화하려는 유혹을 경계해야 한다. 실제의 상황을 왜곡하거나 단순화한 보고서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공직사회는 나라를 위해 일하는 곳이지, 보고서 예쁘게 쓰기 경연대회에 참가하는 곳이 아니다. 현실에 가닿지 않는 보고서는 그 자체로는 쓸모없는 아래아한글 문서에 불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