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지인을 만나면 늘 읽을 거리를 추천받곤 합니다. 최근 서점을 경영하는 친구가 로버트 루빈의 ‘최고의 결정’을 추천했습니다.
전자책 서점에서 이 책을 사두고 다른 책을 읽느라 미처 듣지 못하고 있었습니다.(저는 전자책 듣기 기능을 이용해 귀독서를 합니다.) 예기치 못했던 정치사태를 맞아 정신없이 일하면서 문득 최고의 결정이 머릿속에 떠올랐습니다.
한치도 내다보기 어려운 불확실성의 시대, 어떻게 의사결정을 해야하는가에 대한 답을 줄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또는 도대체 어떻게 의사결정을 내렸기에 공동체를 위험에 내모는 결정을 했는가에 대한 답을 찾고 싶었습니다.
책으로 들어가는 순간 기대대로 통찰과 지혜가 가득했습니다. 아니 과학적이며 철학적인 의사결정론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특히 ‘반응하지 말고 대응하라’는 조언에 무릎을 탁 쳤습니다. 반응을 보이는 것은 찰나의 충동심으로 감정에 기초해 결정을 하는 것입니다.
반면 대응은 사고와 인내를 수반합니다. 뒤로 물러서서 상황을 판단하고 행동이 불러올 결과를 예상해보는 행동 방식입니다.
저자 로버트 루빈은 클린턴 정부 시절 재무부장관으로서 큰 업적을 거뒀습니다. 그에게 지적 영감을 줬던 라파엘 데모스 전 하버드대 교수가 누구인지를 이 책을 통해 알았습니다.
진영논리에 따라 증오와 분노에 찬 배설이 일상화된 한국의 공론장을 보면서 ‘반응하지 말고 대응을 하라’는 저자의 외침을 가슴속 깊이 새깁니다.
1.최고의 의사결정 비결은?
나는 시대를 풍미한 대단한 인물들과 알고 지내며 함께 일하며 수억 명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해 왔다. 사람들은 나처럼 살아가려면 어떤 준비를 해야 하는지 묻고는 한다.
내게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입문 철학 강의였다. 담당 교수님의 성함은 라파엘 데모스Raphael Demos였다. 나는 아직도 그분의 모습을 생생히 기억한다. 백발의 교수님은 자그만 체구에, 참 다정한 분이셨다. 강단에서 커다란 쓰레기통을 뒤집어 강의대로 사용하셨고, 강의실을 가득 채운 열정 넘치는 학생들을 가르치셨다.
2.라파엘 데모스의 가르침
내가 보기에 교수님의 근본적인 목표는그 어떤 것도 완벽하게 증명될 수 없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었다. 그런 시각 때문에 교수님이 냉소적이거나 허무주의적일 거라고 짐작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교수님은 비판적으로 사고함으로써, 세계의 복잡성을 인정하면서도 우리만의 길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셨다.
3.데모스 회고 에세이 열풍
대학을 졸업하고 58년이 지난 2018년 내 인생에 중대한 충격을 준 이 강의에 대한 에세이를 뉴욕타임스에 기고하였다.
글이 신문에 실리고 나자 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그 에세이는 지금까지 내가 써온 모든 글 중에 가장 널리 읽힌 글이 되었다. 타임스 웹사이트의 오피니언 섹션뿐 아니라 모든 카테고리에서 가장 인기 있는 기사로 올랐다.
그토록 뜨거운 반응을 보인 이유는 무엇일까?
4.최고의 결정
나는 교수님 한 분에게 들었던 한 개의 강의, 그 순간에 관해 썼을 뿐이지만, 내 모든 커리어와 삶을 통틀어 내가 늘 초점을 맞춘 질문을 다뤘기에 반응이 뜨거웠던 것이다.
대단히 복잡하고 불확실한 세계에서 어떻게 하면 마주한 문제를 최대한 깊이 이해할 수 있을까?
그리고 긴박한 순간에 어떻게 하면 최고의 결정을 내릴 수 있을까?
나는 50년이 넘도록 이 질문에 다양한 방법으로 접근했다.
5.불확실한 세상에서
우리가 이룩해 낸 커다란 발전에도 불구하고 상황은 그 어느 때보다 더 불안정하다. 정치적 혼란과 역기능은 좋아지기는 커녕 오히려 더 나빠졌다.
21세기 들어 그 어느 때보다 심각한 세계적 불황, 사회의 거의 모든 것을 뒤집어 놓은 글로벌 팬데믹, 2020년 대통령 선거의 인준을 막으려는 국회의사당 무력 점거 사건,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후 질서를 깨뜨리려 유럽에서 발발한 지상전에 전 세계가 뒤흔들리고 있다.
6.시스템의 기능 저하
하지만 내 자녀들과 손자들이 직면할 위협은 지금 세대가 겪었던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심각한 결과를 불러올 것이다. 동시에 내 세대가 위험 상황일 때 도움을 청할 수 있던 국가 및 초국가 정치 시스템의 기능은 오히려 떨어졌다.
7.번영과 낙관의 시기 망각
가장 우려되는 점은 오늘날 많은 젊은이가 평화와 번영이 당연하던 시기를 떠올릴 수 없다는 것이 아닐까 싶다.
즉 세계적인 변화와 불안, 위험이 넘쳐 나는 이 순간 위기를 당면하고 휘청거릴 때, 많은 미국인은 나라의 미래가 번영과 낙관주의로 가득하던 시기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8.다시 근본적 질문
민주주의가 과연 최선의 정치 형태인가, 그리고 앞으로도 지속될 것인가?
자본주의가 보편적이고 경제적인 복지와 성장 모두를 촉진하면서 그 역할을 잘 해낼 수 있을까?
사회에서 비즈니스의 역할은 무엇일까?
언론의 자유는 얼마나 중요한가?
21세기가 시작되고 내가 재무부를 떠났을 무렵, 세계 곳곳의 정치적 리더들은 이러한 질문에 이미 답했다고 믿는 듯했다. 하지만 지금, 오래된 논쟁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9.사고방식의 변화 여정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과 오랜 시간 동안 대화를 나눈 덕에 나의 사고방식은 지난 20여 년간 커다란 변화를 겪었다.
나는 언제나 가설들을 점검하고 나의 입장을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고 믿었다. 내가 지금까지 의심하지 않던 가설이라 해도 말이다. 대단히 혼란스러운 순간에는 특히 그렇다.
만약 우리가 커다란 논쟁을 해결하고 우리에게 닥친 문제를 풀어내려면 반드시 열린 마음, 진지한 목적의식, 그리고 지적 정직성이 필요하다.
10.지적 정직성 intellectual honesty
아이디어의 습득, 분석, 전달에서 정직한 것. 문
제 해결의 응용 방법이라 할 수 있으며 편견을 갖지 않고 정직한 태도로 사실만을 추구하기, 사실을 추구하는 데 개인적 신념이나 정치를 개입시키지 않기, 자신이 모르는 내용은 솔직히 모른다고 인정하며 실수를 기꺼이 인정하기, 전문가가 아닌 분야에 전문가처럼 행동하지 않기 등의 특징이 있다.
11.오늘날의 토론은?
상당히 과열되어 있기만 하고 딱히 건설적이지 않은 경우가 허다하다.
첫째로, 우리에겐 생각하는 법에 대한 효과적인 지적 프레임워크가 필요하다. 다시 말해 복잡함과 불확실성을 인지하면서도 최선의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접근법이 있어야 한다.
둘째로 비록 민주주의의 정치인들은 당파적, 정책적, 지적 분열을 넘어 함께 일하면서 사실과 분석에 집중할 수 있는 사람들이어야 한다.
12.모 아니면 도
우리는 손쉬운 해결책을 약속하는 리더들이 눈에 띄게 늘어나는 걸 목격했다. 워싱턴 정치계뿐 아니라 미국인의 일상 전반에서 양극화 현상 때문에 중요한 정책 과제를 적절히 다루지 못했다.
또 잘 타협하지도 못했으며 함께 토론하는 일을 두려워하거나 기피하게 되었다.
13.두개의 나쁜 선택지
우리 앞에는 두 개의 나쁜 선택지만 남은 것 같다. 우리에게 닥친 문제가 너무 복잡하니 무력해지거나 복잡성은 무시하고 절대적이고 단순한 접근법으로 향하는 형편없는 선택을 하는 것이다.
14.더 나은 방법 찾기
데모스 교수님의 강의에서 배운 가장 중요한 교훈은 더 나은 방법이 있다는 것이다.
돌아보면 나는 입문 철학 강의, 늦은 밤 다양한 주제를 놓고 벌이던 지적인 토론, 대학과 대학원, 로스쿨에서의 경험이 복잡한 세상을 충분히 숙려하도록 하는 기반이 됐다.
15.완전한 접근법이란 없다
불확실성과 살아가는 완벽한 접근법이란 없다. 하지만 오랜 세월 나에게 잘 통했던 접근법이니, 다른 사람에게도 유용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소개하려고 한다.
또한 미국에 닥친 주요 정책 과제 그리고 투자, 관리와 관련된 문제, 필연적인 스트레스와 삶의 굴곡에 대처할 때도 이 접근법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16.확률적 사고
복잡한 문제를 이해하기 위한 내 접근법의 기초는 ‘확률적 사고’이다.
확률적 사고의 본질은 만약 그 무엇도 온전히 확실하지 않다면 의견은 확률로만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인생에서, 마켓에서, 정계에서 절대적인 의미의 ‘옳은’ 길을 선택하는 건 결코 내 목표가 아니었다.
대신 나는 발생할 수 있는 다양한 결과를 고려하고, 각 경우의 확률을 계산해 비용 편익의 균형을 저울질한 다음, 최선의 결과가 나올 것 같은 선택지를 골랐다.
17.지적 정직성과 확률적 사고
하지만 내 경험상, 확률론적으로 사고하는 사람은 여전히 극소수다. 의사결정과 확률의 관계를 인지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어떤 이들은 확률의 중요성은 인지하나 자기 것으로 습득하지는 못하기도 한다.
확률적 사고는 지적 정직성을 활용해야 하고 완벽한 답은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는 일이라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의 본성은 복잡성과 불확실성을 받아들이기 싫어한다.
18.옐로우 노트 비법
세상을 확률적으로 분석하기 위해 꼭 필요한 도구는 옐로우 노트(Yellow Pad)다.
한쪽 열에는 가능한 결과들을, 다른 열에는 각 결과의 추정 확률들을 손으로 적어 내려갔다.
내가 주식 시장에서 일할 때는 예상 결과를 대개 달러로 표시할 수 있었다. 그래서 각각 가능한 결과에 확률을 곱하고 그 숫자들을 합산해 경제학자들이 ‘기댓값’이라고 하는 숫자를 계산해 냈다.
옐로우 노트는 서로 다른 신념과 우선순위가 갈등을 빚을 때 균형을 잡는 법, 그리고 다양한 의견을 가진 사람들과 의사결정 방안을 분석하는 공통의 프레임워크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옐로우 노트는 단순한 계산 도구 그 이상이다.
옐로우 노트는 데모스 교수님의 강의실에서 시작했던 다양한 의사결정의 개인적 철학을 표현하는 나만의 방식이며 내가 직면한 현실 세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접근법이다.
19.생각하는 방법에 대한 생각
옐로우 노트의 첫 번째 열에는 잠재적 결과를, 두 번째 열에는 연관된 확률을 적는다.
그리고 간단히 연산만 하면 된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 두 개의 열을 어떻게 구성할 것인지 결정할 때는 굉장히 어려운 문제를 고민해야 한다.
예를 들어, 가능한 결과의 현실적인 목록을 어떻게 생각해 낼 것인가?
확률에 대해 어떻게 판단을 내릴까?
우선순위를 두고 갈등할 때 어떻게 절충할 것인가?
그리고 숫자로 표현할 수 없는 잠재적인 시나리오는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이런 질문은 생각하는 방법에 대한 생각이다.
20.데모스 교수님에 바치는 책
어찌 보면 이 책이 교수님께 드리는 감사의 한 방법인지도 모르겠다. 라파엘 데모스 교수님을 기억하는 방법으로 책을 쓰는 것외에 더 나은 선택지는 없는 것 같다.
이성과 합리성에 대한 교수님의 주장은 그때보다 지금 더 호소력이 짙다는 것이 나의 의견이다. 훌륭한 판단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