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 생활자’를 자처하시는 손관승작가가 새 책을 냈습니다. ‘글로 생활자’는 손작가가 전업작가를 재치있게 표현한 것입니다.
2014년 가을 ‘여행자의 옛집’저자인 최범석작가의 집(학소도)에서 열렸던 작은 모임에서 손작가를 우연히 만났습니다. 페이스북을 통해 한 단계 건너 언론인 선배라는 정도만 알았을 뿐, 면식이 전혀 없었습니다.
학소도 모임에서 손작가가 건네준 책이 ‘괴테와 함께 한 이탈리아 여행’이었습니다. 이 책은 손작가가 방송사 최고경영자 자리에서 물러나 전업작가로서 처음 쓴 책입니다.
그후 손작가는 ‘그림 형제의 길’ ‘투아레그 직장인 학교’ ‘me,베를린에서 나를 만났다’ 등 발로 뛰어 쓴 책을 잇따라 출간했습니다. 새 책을 낼 때마다 손작가와 술잔을 기울이며 테마를 어떻게 발굴하는지, 테마를 뒷받침하는 팩트를 어떻게 수집하는지에 대해 궁금증을 풀곤 했습니다.
단행본을 쓰는 과정은 참 길고 험난합니다. 한 테마를 재탕 삼탕하지 않고 새 테마를 찾아 책으로 꾸미는 것은 더욱 어렵습니다. 남이 쓰지 않았거나, 미처 보지 못한 부분을 예리하게 주목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관련된 팩트를 꼼꼼하게 또 광범위하게 수집해서 흐름에 맞게 잘 녹여야 합니다.
손작가에게 하멜을 건진 계기를 물어봤습니다. 놀랍게도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출발했다고 합니다. 손작가는 조르바가 와인을 ‘빨간 물’이라고 비유하면서 와인 구라를 펼치는 대목을 주목했다고 합니다. 그는 이어 한국인과 와인 연결점을 찾다가 일암 이기지와 하멜 표류기를 만났습니다.
손작가의 작업 방식은 전형적인 저널리스틱 라이팅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셜록 홈즈처럼 작은 단서를 모아서 사건의 실체를 밝혀내는 홈즈식 저술 방식이기도 합니다. 손작가는 하멜이 배에 싣고온 와인을 단서로 삼아 동아시아 교역사와 조선과 네덜란드 민초의 미시 생활사를 입체적으로 복원했습니다.
또 제주도-한양-강진-여수-나가사키-암스테르담-레이든-바타비아(현재 자카르타) 등 하멜 표류기에 연결된 다양한 도시과 그 도시의 골목을 메타버스처럼 생생하게 그려냈습니다.
무엇보다 손작가는 역경을 이겨낸 탁월한 리더로서 하멜상을 새로 제시합니다.
그동안 한국인에게 하멜은 우연히 조선에 발을 디뎠다가 네덜란드로 돌아간 이방인 정도였습니다. 또는 그를 제대로 대접하고 활용했더라면 식민지신세를 면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을 주는 이름이었습니다.
손작가가 리더로서 하멜을 어떻게 그려냈는지 알기 위해 5장을 발췌 독서하였습니다.
10줄 요약_5장 강진 생활과 절밥
1.왕실에서 공식적으로 제공되는 쌀만으로 살아가기 힘들어 하멜 일행은 부지런히 돌아다니며 먹을 것과 일상용품을 얻어왔다. 그렇게 밖에 나가 “얻어온 것은 모두 공평하게 나눠가졌다”고 하멜은 적고 있다.
하멜일행이 보여준 단단한 연대의식은 상대에 대한 믿음에서 비롯된다.
장기간의 연대의식과 서로 매끄러운 소통 능력은 훌륭한 연구대상이다. 그것은 하멜을 비롯한 리더 그룹의 역할이 없었다면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었다.
2.네덜란드는 밖으로 외세 침략을 막아내고, 안으로는 열악한 자연과 싸워야 했다. 네덜란드 특유의 강인한 정신을 실감할 수 있는 ‘마크바하이드 Maakbaaheid’라는 단어가 있다. 이 단어는 환경을 길들여 새로게 만듦을 뜻한다. 평생 불운에서 벗어나 본 적이 없었던 하멜의 몸과 정신에도 마크바하이드 정신이 강하게 흐르고 있다.
3.하멜 일행은 산에 나무를 베러가면서 사찰의 승려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렸다. 하멜과 승려들 모두 조선시대의 주류가 아닌, 비주류, 다수가 아닌 소수에 속했다. 아웃사이더의 눈에 비치는 세상은 인사이더들의 시각과 다른 법이다. 비록 외진 시골이었지만, 절간이 오히려 세상을 향해 열린 시선의 최전선이었던 셈이었다.
4.하멜과 정약용 사이에는 150년의 시차가 있지만 연결되는 지점이 적지 않다. 정약용은 강진에서 제자들을 키우고 그들과 한 팀을 이뤄 500여권에 이르는 저술작업을 해냈다. 다산이 초라한 유배지에서 고안한 ‘분업적 집체저술’ 방식은 그 자체로 하나의 혁신적 지식 생산 방법이었다. 이로 인해 강진, 해남, 진도 같은 바닷가 외진 고을은 ‘문명향’이라는 명예를 얻었다.
5.강진의 병영에서 생활하던 하멜 일행은 시간이 지나면서 몇 명씩 분가해 나갔던 것 같다. 돈을 모아 집도 사고, 세간도 갖춰놓는 등 살림을 꾸린 것이다. 하멜표류기 행간의 의미로 볼 때 일행 중 일부는 탈출과 귀국을 체념하고 조선 여자와 살림을 차려 아이도 낳았던 모양이다.
6.미국 역사학자 리처드 화이트는 ‘중간지대 middle ground’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두 문화가 만나서 서로 교류하는 법을 배우는 문화의 교차 영역을 말한다.
하멜일행과 박연은 난파된 표류자이자 포로였다. 그들은 중간지대 존재자로서 조선과 서양, 동과 서를 잇는 이문화 소통에서 핵심 역할을 담당한 주역들이었다.
7.하멜 일행은 식량문제로 인해 강진에서 다른 곳으로 분산 수용된 이후에는 동료를 만나기 위해 혹은 다른 목적으로 서울과 부산 동래의 왜관을 제외하고는 어느 곳이든 방문이 허용되었다.
그들은 먹을 것이나 일용품을 구하기 위해, 경제적 이유로, 호기심때문에, 여러 곳에 흩어진 동료들을 만나기 위해 한반도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하멜은 이 경험을 구체적인 기록으로 남겼다. 내가 하멜을 조선에 온 최초의 서양인 골목 여행자라 부르는 이유다.
8.하멜표류기는 미시사라는 관점에서 흥미로운 부분이 많다. 왕조실록에서 눈여겨 보지 않아 그저 스쳐 지나가는 것들이지만, 일상의 역사 혹은 미시사를 통하면 그 작은 부분이 확대되어 당대의 삶을 생생히 들여다 볼 수 있다.
9.기록을 읽다보면 하멜과 그 일행이 마을 사람과 소통 가능할 정도로 한국어를 구사했음을 알 수 있다. 현대의 네덜란드 사람들은 평균 세 개 언어를 구사하고 초등학생만 되어도 유창하게 영어를 말한다.히딩크 감독은 대학을 다닌 적이 없지만, 4개 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한다.
10.하멜은 강진에서 7년, 여수까지 기간을 합치면 약 10년을 전라도에서 생활한다. 일행중 일부가 나중에 순천과 남원에 분산 수용되었기에 ‘하멜 표류기’에 적힌 지명에는 종종 전라도 사투리가 보이고, 귀국후 인터뷰를 통해 기록을 남긴 다른 일행의 기록속에도 전라도 발음이 적지 않다.
그러니 하멜을 가르켜 네덜란드 출신 전라도 남자라 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