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 민주주의는 권력을 1인1표 투표를 통해 주기적으로 교체하는 것을 근간으로 삼습니다. 최고지도자도, 나를 대신해 이익을 추구해줄 국회의원, 지자체 단체장도 투표로 뽑습니다. 다수결에 의해 권력구조를 결정하는 민주주의 체제에서 이른바 중간층 또는 스윙보터(Swing Voter)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좌와 우가 나눠 이념을 무기로 권력 쟁투를 벌일 때 스윙보터는 양쪽 모두를 대상으로 시시비비를 가려주고 또 권력 균형추를 맞춰주는 역할을 합니다. 21세기 미국 민주주의에서 스윙보터는 양당체제가 극한으로 대립하지 않도록 하는 완충제 역할을 충실히 했습니다.
하지만 트럼프가 등장하면서 스윙보터의 역할은 급속도로 축소되었고 미국 민주주의 정치체제의 퇴행을 가져왔습니다. 이런 현상은 한국에서도 거의 유사하게 나타나 이른바 진영 정치가 한국 민주주의의 디폴트가 되었습니다.
민주주의에서 중간층 또는 스윙보터의 근간은 중산층입니다. 스윙보터의 쇠퇴는 경제적 중산층의 쇠퇴와 동전의 앞뒷면과 같습니다. 노영우 경제전문기자(경제학 박사)의 <<중산층 경제학>>은 한국의 중산층을 본격적으로 탐구합니다.
노기자는 저널리즘과 아카데미즘의 장점을 잘 활용하여 한국 중산층이 어떻게 변화했고, 현재 어떤 위기를 맞고 있는지를 구체적이면서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이 책에서 ‘AI가 가져올 양극화’편을 골라 10문단으로 요약하였습니다.
1.4차 산업혁명 취재 경험
2016년 1월 몹시 추운 날. 유럽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리는 ‘세계경제포럼(WEF)’을 취재한 적이 있었다. 다보스포럼이 내놓은 주제는 ‘4차 산업혁명의 이해’였다.
4차 산업혁명이라는 단어는 그때 당시엔 매우 생소했다. 이 용어는 당시 ‘인공지능을 통한 기술융합으로 생산을 포함한 사회시스템이 급속히 바뀌는 현상’으로 정의됐다.
1.1 그들이 세미나를 통해 토론 했던 것은 4차 산업혁명이 가져올 사회적 변화였다. 포럼은 4차 산업혁명이 필연적으로 양극화를 가져올 것으로 전망하고 양극화의 문제점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지를 다뤘다.취재를 하면서 앞으로 양극화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2.알파고-이세돌 대결 충격 2개월 뒤인 2016년 3월. 한국에서는 역사적인 바둑 대국이 열렸다. 천재 바둑기사 이세돌 9단과 알파고라는 인공지능 바둑프로그램이 대결해 4전 3승 1패로 알파고의 완벽한 승리였다.
이때부터 한국에서는 인공지능과 4차 산업혁명 열풍이 몰아쳤다.
2.1 한국의 4차 산업혁명 열풍은 주로 이 혁명이 가져올 기술변화에 집중됐다. 4차 산업혁명이 소개된 계기가 알파고라는 기술을 통해서였으니 어쩌면 당연한 현상인지도 모른다. 다보스포럼이 제기한 4차 산업혁명과 양극화와 관련한 논의는 4차 산업혁명이 가져올 기술변화 논의에 묻혔다.
2.2 양극화는 중산층의 몰락을 의미
기술변화가 몰고 올 양극화라는 화두는 우리가 반드시 해결해야 할 과제다. 양극화는 중산층의 몰락을 의미하고 중산층의 몰락은 경제사회시스템의 붕괴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3.AI와 중산층의 붕괴 현상
AI 기술이 발전한다면 AI는 인류에게 축복이다. 하지만 사람이 적응하기 어려운 속도로 빨리 진행되는 AI의 발전은 인류에게 재앙을 가져다줄 수도 있다. 그중 하나가 AI가 가져올 중산층의 붕괴 현상이다. AI가 가져올 중산층의 붕괴와 양극화 문제는 경제학 논리로 설명이 가능하다.
3.1
경제의 두 축은 생산과 소비다. 먼저 생산 영역에서 AI 기술이 사람이 적응하는 속도보다 빨리 도입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예를 들어, 옷을 만들어 파는 A라는 회사는 종전에 재봉틀 10개와 사람 10명을 고용해 옷을 만들어왔다. 재봉틀과 사람은 완전히 보완적인 관계다.
3.2
한 사람이 2개까지 관리가 가능한 재봉틀이 등장하면 기업가는 근로자 5명을 해고하고 새 재봉틀 10개를 들여오는 결정을 하게 된다. 사람 1명이 재봉틀 2개를 관리하는 방식으로 생산구조가 바뀌고 이런 방식이 도입되면 5명의 근로자는 일자리를 잃는다. 기업의 이익을 최우선시하는 기업주에게 근로자에 대한 자비를 바라는 것은 한계가 있다.
3.3
이제 재봉틀이 사람 없이도 옷을 만들 수 있는 수준까지 올라 가면 기업주는 AI재봉틀과 근로자를 놓고 선택의 문제에 놓이게 된다. AI재봉틀이 비용이 싸다면 대부분의 근로자를 해고하고 AI재봉틀 위주로 생산라인을 구성해 옷을 만들 수도 있게 된다.
3.4
근로자가 AI재봉틀로 대규모 교체되는 순간은 점진적으로 오지 않는다. 어느 한순간 기업의 결정에 따라 대량의 해고가 발생한다. 이때 사회 전체적으로 대규모 실업 문제가 대두된다. 재봉틀로 옷을 만드는 기업을 예로 들었지만 이런 상황은 모든 산업 분야에서 발생할 수 있다.
4.고학력 고소득 근로자 대체
실업이 발생하는 분야와 속도는 AI가 얼마나 빨리 노동을 대체할 것인지에 달려있다. 소프트웨어는 산업용 로봇보다는 고학력, 고임금 근로자를 대체했다. AI는 고학력 고소득 근로자를 대체하는 정도가 더 많아졌다. 학력이 높아질수록, 임금이 높아질수록 AI에 대한 노출 빈도가 높다는 얘기다.
5.AI는 중산층 직업부터 대체
AI는 반복되지 않는 노동과 스스로 판단해서 해야 하는 일을 대체하는 데 활용될 수 있다. 이것이 과거 산업용 로봇이나 소프트웨어와 다른 점이다.
직업별로도 과거 신기술이 대체하는 것과 다르다. 의사, 한의사 등 전문직이 AI에 의해 대체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직업으로 평가됐다.
다음이 건축가, 수의사, 회계사, 판검사, 간호사 등의 순이다. 모두가 우리 사회의 중산층 또는 중산층 이상이 갖고 있는 직업들이다.
6.구조적·항구적인 실업
AI가 인간 노동을 대체하면서 발생하는 실업은 단기적·마찰적 실업이 아닌 구조적·항구적인 실업이다. 일자리 자체가 없어져서 발생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거나 경기가 살아난다고 해서 새로 고용될 가능성이 없다.
특히 AI 실업의 최대 피해계층이 중산층이 될 것으로 보여 극심한 양극화라는 부작용을 더 안게 됐다.
7.독점이 일상화되는 시장
AI의 확산에 따른 중산층 붕괴 현상은 노동시장에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물건을 판매하는 생산물 시장에서의 변화로도 중산층은 위협받고 있다.
7.1
인공지능이 사람을 대체하면 전혀 다른 방식으로 가격이 책정된다. 이세돌 기사를 대신해서 알파고가 바둑서비스를 제공한다고 가정해보자. 알파고는 기계이기 때문에 바둑을 두 번 둔다고 해서 첫 번째 판보다 피로감이 더 크지 않다.
똑같이 전기만 제공해주면 바둑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 바둑서비스에 대한 수요가 늘어난다고 해도 비용이 늘어나지 않아 가격이 오를 이유가 없다.
7.2 생산 구조가 기계 중심으로 바뀌면 초기에 투자하는 자본의 비중은 높아지지만 물건을 더 많이 만든다고 해서 비용이 더 많이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이를 감안하면 초기에 대규모 투자를 할 수 있는 큰 기업들이 AI 기술을 도입하기에 용이하다. 규모가 작은 기업들이 창업하기가 더욱 어려워지는 구조가 된다.
8.플랫폼 기업의 독점
플랫폼 시장은 대규모 투자와 마케팅을 감당한 기업들의 독과점 체제로 편성된다.소비자들이 이탈하려고 해도 유사한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는 다른 플랫폼은 이미 사라진 상태다. 시장은 독과점체제로 이용되고 소비자들의 부담은 조금씩 늘어난다.
8.1독점은 양극화 심화
생산물 시장의 독점화로 많은 경쟁기업들이 도태되는 것은 양극화를 부추기는 요인이다. 아울러 독점 기업들의 가격 인상으로 소비자의 부담이 늘어나는 것도 중산층의 어려움을 가중시키는 요인이다.
9.중산층의 붕괴
AI경제가 가속화될 수록 개인들의 합리적인 결정이 경제 전체적으로 효율적인 결과를 가져오지 못할 수도 있다. 가격 경쟁을 통해 특정 기업이 살아남고 다른 기업이 도태되는 것 역시 시장 경제의 자연스러운 원리에 따른 것이다.
9.1
그럼 AI가 득세하는 자본주의 경제는 소수의 독과점 기업과 소수의 근로자만이 살아남는 형태로 바뀔 수 있을까? 문제가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다. 독점의 심화로 인해 시장의 수요가 대폭 줄어든다면 독점 기업은 대규모 손실을 입어 그동안 투자한 돈을 회수할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한다.
10.승자 없는 경쟁’의 현실화 생산자와 소비자가 각각 나름대로 합리적으로 의사 결정을 하면서 치열한 경쟁을 해온 결과 모두가 패자가 되는 ‘승자 없는 경쟁’이 현실화되는 것이다.
AI를 통한 기술개발과 이로 인한 중산층의 몰락이 가져오는 경제적인 디스토피아는 이런 과정에서 발생한다. 개인과 기업이라는 경제주체들의 합리적 선택의 결과가 경제 전체를 붕괴로 이끄는 역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