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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7월 10일, 윌리엄스 윔블던 우승

캘리포니아 컴튼에서 힘든 어린 시절을 보낸 윌리엄스자매는 7개의 그랜드 슬램 단식 타이틀, 16개의 그랜드 슬램 복식 타이틀, 4개의 올림픽 금메달을 획득한 챔피언 여자 테니스 선수가 되었습니다. 비너스와 그녀의 여동생 세레나는 역대 최고의 테니스 선수로 간주됩니다.

윌리엄스는 1980년 6월 17일 캘리포니아 린우드에서 태어났습니다. 독학으로 테니스 코치였던 그녀의 아버지는 지역 코트에서 딸들을 훈련시켰습니다. 윌리엄스가 10살이었을 때 가족은 플로리다로 이사하여 두자매는 테니스 아카데미에 다닐 수 있었습니다.10세가 되었을 때 윌리엄스의 서브는 인상적인 시속 100마일을 기록했습니다. 법원에서의 서브와 운동 능력 덕분에 그녀는 미국 테니스 협회 주니어 투어에서 63-0을 기록했습니다.

윌리엄스가 2000년 윔블던에서 우승했을 때 그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밤에 잠자리에 들고 그랜드 슬램에서 우승하는 꿈을 꾸었지만, 깨어났을 때 악몽이 있었다. 이제 더 이상 그렇게 깨울 필요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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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7월 10일, 원숭이재판 시작

테네시 주 테이턴에서 이른바 스코프스의 원숭이 재판이 시작되었습니다. 주법을 위반하고 진화론을 가르친 고등학교 과학 교사 존 토마스 스코프스가 재판을 받게됩니다. 이른바 원숭이 재판이 진행되었고, 수많은 관중과 기자들이 데이턴에 몰려들었습니다. 

같은해 3월에 통과된 이 법은 “성경에서 가르치는 인간의 신성한 창조 이야기를 부정하고, 진화론을 가르치는 것을 벌금형에 처할 수 있는 경범죄로 규정했습니다. 스코프스가 체포되었고, 8분간의 심의 끝에 배심원단은 유죄 평결을 내렸습니다. 판사는 법이 허용하는 최소 금액인 $100의 벌금을 지불하도록 명령했습니다.

미국 역사상 가장 유명한 재판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재판 이후에도 진화론과 반진화론 운동은 대결을 거듭했습니다. 반진화론 운동은 미국 보수 기독교 하위문화에서 계속 성장했습니다. 1927년 테네시 대법원은 전문적인 면에서 원숭이 재판 판결을 뒤집었지만 헌법 문제는 1968년 미국 대법원이 수정헌법 제1조 를 위반했다는 이유로 상당기간 미해결 상태로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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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7월 8일, 김일성주석 사망

1994년 7월9일 정오 북측은 김일성이 82세의 나이로 심장마비로 사망했음을 발표합니다. 1994년은 다사다난한 역사적 순간이었습니다. 북한의 핵무기 개발에 대한 의혹으로 시작된 한반도 핵 위기가 절정에 치달았습니다. 1994년 6월15일 판문점을 넘어 북한을 방문한 카터 전 대통령은 메신저역할을 합니다. 김일성 주석과의 회담에서 미국 정부가 유엔에서 추진하고 있는 대북 제재를 중단한다면 북한도 핵개발을 동결하겠다는 제의를 받았습니다.

카터-김일성 합의는 빌 클린턴 당시 행정부도 받아들였습니다. 미국은 ‘김일성의 죽음’이라는 돌발 악재에도 불구하고, 공식 ‘조문 성명’을 발표하고 북-미 고위급회담 대표단의 조문을 승인했습니다. 이후 미 회담을 거쳐 ‘1차 북핵위기’를 봉인할 ‘제네바 기본합의로 가는 길을 열었습니다. 반면에 김영삼 대통령과의 남북정상회담을 보름여 앞둔 ‘김일성의 죽음’으로 남북관계의 한동안 공백기가 시작됩니다. 조문논쟁이 벌어지면서 정치와 외교가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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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7월 7일, 미국 소녀 스미스 소련방문

1981년에 초강경 성향의 레이건 행정부가 등장하면서 미국과 소련사이는 절정으로 치닫기 시작했습니다. 레이건은 취임사를 통해 “소련을 “범죄와 거짓말과 속임수를 일삼는” 집단으로 묘사하면서 대화 무용론을 강조했습니다. 이를 두고 <LA 타임즈>는 “지난 20년동안 백악관에서 나온 가장 강력한 냉전적 공격”이라고 평가하기도 했습니다. 

한편 소련은 1982년 11월 브레즈네프가 사망하고, 연로한 안드로포프가 서기장을 계승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1983년 4월 소련 정부는 미국 소녀 사만다 스미스가 학교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안드로포프에게 보낸 편지를 소련 공산당 기관지인 프라우다에 공개했습니다.

“친애하는 안드로포프 서기장 님께

제 이름은 서맨사 스미스이고 10살입니다. 새 직책을 축하드립니다. 저는 러시아와 미국이 핵전쟁을 할까봐 걱정해왔습니다. 서기장님은 정말 전쟁을 하실 건가요? 만약 그게 아니라면 전쟁을 막기 위해 무엇을 하실 건지 말해주세요. 굳이 답하지 않으셔도 되지만, 저는 서기장님이 세계 혹은 최소한 우리 미국을 정복하고 싶어하는 이유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신께서는 우리가 싸우지 말고 평화롭게 지내라고 이 세상을 만드셨습니다.

서맨사 스미스 올림”

 4월 26일 안드로포프는 답장을 보내어, 스미스에게 소련을 직접 방문하도록 초대했습니다.안드로포프는 서방과의 긴밀한 관계를 원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으며, 작은 소녀에 대한 그의 초대는 이러한 정치적 입장을 나타내는 한 가지 방법이었습니다.

러시아에서 2주 동안 스미스는 VIP 대접을 받았고 세심하게 계획된 소련 여행을 했습니다. 그래도 스미스는 소련이 직면한 일부 문제, 특히 식량 부족을 숨기려고 하지 않는 소련 시민들과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습니다. 2주 후 미국으로 돌아온 그녀는 소련이 “우리와 마찬가지로 세계에 해를 끼치고 싶지 않다”고 굳게 믿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러시아에서 살고 싶냐는 질문에 그녀는 공산주의자들을 칭찬하면서도 “차라리 내 나라에서 살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소녀 스미스의 삶은 너무도 짧게 끝났습니다. 1985년 TV 출연을 마치고 아버지와 함께 집으로 돌아오는 도중 비행기 사고로 숨졌습니다. 그래도 소녀의 소련 방문은 80년대 후반기 레이건과 고르바초프의 냉전종식에 하나의 밀알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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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7월 6일, 김어준 딴지일보 창간

딴지일보는 창간선언문을 통해 ‘한국 농담을 능가하며 B급 오락영화 수준을 지향하는 초절정 하이코메디 씨니컬 패러디 황색 싸이비 싸이버 루머 저널’을 지향하였습니다.

창간초기 김어준은 신문 인터뷰에서 진지하게 창간의 변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인터넷에서 아테네의 직접 민주주의를 실현해보고 싶었습니다”

“사람들이 그동안 정치 등 사회문제에 관해 직접 자신의 목소리 내기를 원했나 봅니다. 공식 매체는 아니지만 사회 이슈를 풍자하고 서로의 의견을 교환하는 공간에 이 정도로 관심이 높은 줄 몰랐습니다. “

딴지일보는 창간호를 낸 후, 한달만에 접속건수가 무려 12만건을 넘었습니다. 게다가 기자 모집공고에는 무려 3백여명이나 신청했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해킹사건, 재정악화 등으로 어려움을 겪기도했습니다.

총수 김어준은 2016년 9월부터 TBS 《김어준의 뉴스공장》을 진행하며 방송인으로 변모했습니다. 2018년 2월 라디오 청취율 시사 부문 1위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2022년 12월 30일 방송을 마지막으로 진행자 자리에서 하차했습니다. 이후 유튜브 방송《김어준의 겸손은 힘들다 뉴스공장》을 다시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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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니스커트의 원조, 가수 윤복희

가수 윤복희는 1967년 귀국하면서 미니스커트를 입고 비행기에서 내린 한국 미니스커트의 원조라고 알려졌다. 그렇지만 윤복희는 TV 토크프로그램에 출연해 “60년대 중반 김포공항으로 귀국하면서 미니스커트를 입었다는 기사는 오보”라고 말했다. 김포공항으로 귀국할 당시는 겨울이라 털 코트에 장화를 신었다고 한다. 곧 너무 추워서 미니스커트를 아예 입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1호 미니스커트 아이콘이다. 윤복희는 1960년대 초 미8군부대에서 노래를 불렀던 윤복희는 15살의 나이에 미국으로 건너가 활동했다. 이때 그녀는 미니스커트와 힙 슬렁 바지, 고고 부츠와 같은 60년대 서양식 젊은이들의 스타일을 많이 접할 기회를 가졌다. 윤복희가 귀국 당시 옷차림은 사실과 달랐어도 그녀가 처음으로 국내에 미니스커트 차림을 선보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최초가 아닐지라도 비키니를 즐겨입은 패션리더였던 것도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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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7월 5일, 첫선을 보인비키니수영복

1946년 서유럽인들은 전쟁 없는 여름을 반갑게 맞이했고, 프랑스 디자이너들은 해방된 대중의 분위기에 걸맞게 패션을 내놓았습니다. 1946년 7월1일, 남태평양의 작은 섬 비키니 환초에서는핵실험이 있었습니다.그로부터 나흘 뒤인 7월 5일에 , 프랑스 디자이너 루이 네야르가 파리의 수영장에서 비키니를 무대에 올렸습니다. 미국 원자 실험 에서 영감을 받아 “비키니”라고 명명한 작은 패션 “세계에서 가장 작은 수영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 여파는 가히 원자폭탄의 위력만한 돌풍을 전후 유럽세계에 몰고 왔습니다. 비키니는 특히 남성들 사이에서 히트를 쳤고, 비키니를 입은 패션모델은 약 50,000개의 팬레터를 받았다고 합니다.

오래지 않아 비키니를 입은 대담한 젊은 여성들이 지중해 연안을 따라 센세이션을 일으켰습니다. 스페인과 이탈리아는 공공 해변에서 비키니를 금지하는 법안을 통과시켰지만 이후 1950년대 수영복이 유럽 해변의 주류로 성장하면서 변화하는 시대에 굴복했습니다. 다소 신중한 미국에서 비키니는 1960년대 초반까지 널리 퍼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곧 젊음의 해방에 대한 새로운 강조가 미국 해변에 비키니를 퍼뜨렸습니다. 영화 “Beach Blanket Bingo” 그리고 록으로 찬미되는 캘리포니아 서핑 문화에 의해 불멸의 명성을 얻었습니다. 비치 보이즈 같은 그룹 이후로 비키니의 인기는 계속해서 커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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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소수자(LGBTQ) 권리 운동의 시작

1969년 어느 무더운 여름 밤, 경찰은 뉴욕시의 게이, 레즈비언, 트랜스젠더 커뮤니티의 안식처 역할을 했던 뉴욕 그리니치 빌리지에 위치한 바인 스톤월을 급습했습니다. 이로 인해 LGBTQ의 저항이 시작되었습니다.

1960년대 뉴욕시에서 게이 커뮤니티가 꽃을 피웠을 때, 회원들은 공개적으로 모일 장소가 거의 없었습니다. 주류문화에서 외면당하고 범죄자가 된 LGBT 사람들은 안전하게 모일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 간절히 원했습니다. 그러나 술집에 가는 것은 위험한 일이 될 수 있습니다. 그 당시에는 게이 후원자에게 술을 제공하거나 공공장소에서 동성애를 표현하거나 두 명의 게이가 함께 춤을 추는 것은 여전히 ​​불법이었습니다. 당시 동성애 행위는 일리노이를 제외한 모든 주에서 불법으로 남아 있었고 술집과 식당은 동성애자 직원이 있거나 동성애자 고객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면 문을 닫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법률이 일탈을 본 마피아는 절호의 사업 기회를 보았습니다. 뉴욕에 있는 대부분의 게이 바와 클럽은 마피아에 의해 운영되었습니다. 뉴욕의 조직범죄를 장악한 이른바 ‘다섯 가문’ 중 하나인 제노비스 가문은 성소수자 커뮤니티가 뿌리를 내리고 있던 그린니치 빌리지를 비롯한 맨해튼 웨스트사이드 술집을 장악했습니다. 마피아는 부패한 경찰을 매수하여 성소수자들이 놀 수 있는 공간을 제공했습니다. 게이 바에 대한 경찰의 급습은 흔한 일이었지만, 성소수자들이 즐길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이 또한 만들어였습니다. LGBT 고객에게 술을 제공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을 우회하기 위해 스톤월을 포함한 많은 게이 바는 표면적으로 회원들이 술을 가져오는 개인 클럽으로 운영되었습니다. 경찰이 여전히 LGBT 시설을 급습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먼저 그들은 방문하기 가장 좋은 시간을 알려주는 주인에게 정보를 제공했습니다. 단속은 고객이 거의 없는 이른 오후에 자주 발생했기 때문에 기업은 밤에 정상 운영을 재개할 충분한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1969년 6월 28일 저녁 경고없이 경찰이 스톤월을 급습합니다. 불법적인 음주, 무질서한 행위등을 이유로 고객들을 체포합니다. 더구나 경찰이 거칠게 폭행하자, 군중이 들고 일어섰습니다. 그날 밤 도시의 LGBTQ 커뮤니티 구성원들은 저항과 혁명의 새로운 시대를 열 봉기를 결정했습니다. 1969년 6월 뉴욕시 스톤월 여관에서 발생한 폭동은 LGBTQ 권리를 위한 싸움의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폭동에서 나온 두 개의 주요 동성애자 권리 단체인 게이 운동가 연합(Gay Activists Alliance)과 게이 해방 전선(Gay Liberation Front )은 게이 바에서 조직 범죄를 퇴치하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그들의 모든 노력은 스톤월 폭동 1주년 기념일인 1970년 6월 28일에 결실을 맺었습니다. 행진은 그린니치 빌리지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시민권 운동에 의해 대중화된 방법을 차용한 “게이-인”은 항의이자 축하였습니다. 뉴욕타임스 1 면에는 “수천 명의 동성애자들이 센트럴 파크에서 항의 집회를 열었다”는 제목이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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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7월 4일 남북공동성명 발표 (김일성)

남북공동성명은 남북한이 분단 이후 최초로 통일과 관련해 합의를·발표했습니니다. 합의 당사자는 박정희 당시 한국 대통령과 북측 김일성 주석입니다. 7.4 공동성명은 남북 간 자발적으로 이뤄진 첫 합의로, 비록 성명에 그쳤지만, 통일의 원칙을 정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1. 쌍방은 다음과 같은 조국 통일 원칙들에 합의를 보았습니다. 
첫째, 통일은 외세에 의존하거나 외세의 간섭을 받음이 없이 자주적으로 해결하여야 한다.
둘째, 통일은 서로 상대방을 반대하는 무력행사에 의거하지 않고 평화적 방법으로 실현하 여야 한다.
셋째, 사상과 이념, 제도의 차이를 초월하여 우선 하나의 민족으로서 민족적 대단결을 도모하여야 한다.

특히 7.4 공동성명 합의 이후 남북간 대화 채널과 통신연락선, 실무회담 등이 마련돼 이후에도 남북 정상회담에까지 이를 수 있는 절차가 만들어졌습니다. 2018년 이른 봄, 3차 남북 정상회담에서 남북 정상은 서로 손을 맞잡고 군사분계선을 가볍게 넘나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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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7월 4일, 남북공동성명 발표(박정희)

남북공동성명은 남북한이 분단 이후 최초로 통일과 관련해 합의를·발표했습니니다. 합의 당사자는 박정희 당시 한국 대통령과 북측 김일성 주석입니다. 7.4 공동성명은 남북 간 자발적으로 이뤄진 첫 합의로, 비록 성명에 그쳤지만, 통일의 원칙을 정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1. 쌍방은 다음과 같은 조국 통일 원칙들에 합의를 보았습니다. 
첫째, 통일은 외세에 의존하거나 외세의 간섭을 받음이 없이 자주적으로 해결하여야 한다.
둘째, 통일은 서로 상대방을 반대하는 무력행사에 의거하지 않고 평화적 방법으로 실현하 여야 한다.
셋째, 사상과 이념, 제도의 차이를 초월하여 우선 하나의 민족으로서 민족적 대단결을 도모하여야 한다.

특히 7.4 공동성명 합의 이후 남북간 대화 채널과 통신연락선, 실무회담 등이 마련돼 이후에도 남북 정상회담에까지 이를 수 있는 절차가 만들어졌습니다. 2018년 이른 봄, 3차 남북 정상회담에서 남북 정상은 서로 손을 맞잡고 군사분계선을 가볍게 넘나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