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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왕당파

오늘날 미국인들은 독립전쟁을 혁명으로 생각하지만, 그것은 내전이기도 했습니다. 독립에 반대하고 여전히 영국왕에 충성하는 충성파(왕당파)들이 존재했습니다. 실제 이들은 반군에 대항하여 무기를 들었습니다. 충성파의 수는 식민지 백인 인구의 20%인 500,000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됩니다.

충성파도 인지세법과 강압법과 같은 영국의 행동을 비판했습니다. 다만 그들은 보다 평화적인 시위를 원했습니다. 그들은 또한 독립이 영국과의 교역을 제한하여 경제적 이익의 상실을 의미한다고 믿었습니다.

1783년 9월 영국과 미국은 파리에서 전쟁을 끝내는 조약을 체결합니다. 미국의 독립을 인정하고, 지금의 캐나다와 미국사이의 경계선도 설정했습니다. 승리한 혁명세력은 충성파(왕당파)가 영국왕을 계속 지원했기 때문에 그들의 땅과 소유물을 박탈합니다.

이에 영국은 뉴욕 왕당파를 당시 영국영토, 주로 캐나다로 대피시킵니다. 대부분의 이주자는 독립 전쟁 기간 동안 왕실의 통제하에 있던뉴욕출신입니다. 각 식민지의 충성파 수는 다양했습니다. 최근 추정에 따르면 뉴욕 인구의 절반이 충성주의자였습니다. 이들은 지금의 온타리오와 노바스코샤에 정착합니다. 충성파 난민들은 각각 200에이커를 받고, 재정적 독립을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영국 충성파의 캐나다 도착은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인구를 이주시키게 됩니다. 현재 퀘벡에 해당하는 캐나다동부에서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인구가 정착하게 됩니다. 이들을 제외하고는 캐나다는 영어를 사용하는 국가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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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5월22일, 올드보이 칸 수상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가 프랑스 칸에서 열린 칸 국제영화제 시상식에서 심사위원대상을 차지했습니다. 당초 비경쟁 부문 상영작으로 알려졌던 <올드보이>는 개막 직전 경쟁 부문으로 자리를 바꿔 초청되었습니다. 기자시사회를 통해 알려진 바에 의하면,경쟁 부문 심사위원장인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극찬이 큰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처음으로 3대 영화제에서 한국영화가 수상한 것은 1987년<씨받이>로 여우주연상을 차지한 강수연배우입니다. 2002년 <취화선>으로 임권택 감독이 칸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이창동감독이 <오아시스>로 베니스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했습니다.

김기덕 감독은 3대 영화제(칸, 베니스, 베를린)에서 모두 본상을 받았습니다. 2004년 《사마리아》로 베를린 영화제 감독상, 《빈집》으로 베니스영화제 감독상, 2011년 《아리랑》으로칸영화에서 주목할만한 시선상, 2012년 《피에타》로 베니스영화제 최고상인 황금사자상을 수상했습니다.

씨받이이후 30여년이 흐른, 2020년에는 영화 《기생충》이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고, 연이어 아카데미에서 작품·감독·국제장편영화·각본의 네 개 부문에서 상을 받았습니다.

지난 시절 3대 영화제에서 상을 받으면, 언론은 한국영화의 위상을 높인 쾌거라고 “애국적”으로 보도했습니다. 이제 박찬욱 감독은 말합니다 “앞으로 흥행에 실패해 투자자를 찾기 힘들 때 칸에서의 수상 이력이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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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5월19일,1회 미스코리아 선발대회

1957년 서울시립극장에서, 제 1회 미스코리아 선발대회가 열립니다. 한국일보·코리아타임스 주최로, 미스 유니버스 대회에 참여할 한국대표를 선발하는 공식적인 대회였습니다. 지원자가 없어 응모마감을 열흘 연기한 끝에 대회를 치렀습니다. 이날 우승자는 대한(국민)항공에서 근무하던 23세 박현옥씨입니다. 박씨는 상금과 함께 양단 치마, 저고리, 목걸이, 은수저 한 벌을 받았습니다.

1980년 7월, 서울에서 미스 유니버스 대회가 열립니다. 이 대회는 전세계에 컬러로 중계되었지만, 막상 한국에서는 흑백으로 중계됩니다.1980년 9월에 대통령으로 취임한 전두환이 컬러TV 방송을 전면 허용합니다. 그 후 컬러TV 방송은 1980년 12월1일 KBS 1TV 에서 처음으로시행됩니다. 완전한 컬러 방송이 시행된 것은 1981년 1월 1일입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미스코리아대회는 지상파 TV로 생중계되어 시청률이 제법 높았습니다. 어느덧 지탄의 대상이 된 미인대회는 2002년부터는 케이블TV를 통해서만 중계되고 있습니다. 이제 미스코리아 선발대회가 개최되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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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3년5월18일,미 왕당파 캐나다로 이주

오늘날 미국인들은 독립전쟁을 혁명으로 생각하지만, 그것은 내전이기도 했습니다. 독립에 반대하고 여전히 영국왕에 충성하는 충성파(왕당파)들이 존재했습니다. 실제 이들은 반군에 대항하여 무기를 들었습니다. 충성파의 수는 식민지 백인 인구의 20%인 500,000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됩니다.

충성파도 인지세법과 강압법과 같은 영국의 행동을 비판했습니다. 다만 그들은 보다 평화적인 시위를 원했습니다. 그들은 또한 독립이 영국과의 교역을 제한하여 경제적 이익의 상실을 의미한다고 믿었습니다.

1783년 9월 영국과 미국은 파리에서 전쟁을 끝내는 조약을 체결합니다. 미국의 독립을 인정하고, 지금의 캐나다와 미국사이의 경계선도 설정했습니다. 승리한 혁명세력은 충성파(왕당파)가 영국왕을 계속 지원했기 때문에 그들의 땅과 소유물을 박탈합니다.

이에 영국은 뉴욕 왕당파를 당시 영국영토, 주로 캐나다로 대피시킵니다. 대부분의 이주자는 독립 전쟁 기간 동안 왕실의 통제하에 있던뉴욕출신입니다. 각 식민지의 충성파 수는 다양했습니다. 최근 추정에 따르면 뉴욕 인구의 절반이 충성주의자였습니다. 이들은 지금의 온타리오와 노바스코샤에 정착합니다. 충성파 난민들은 각각 200에이커를 받고, 재정적 독립을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영국 충성파의 캐나다 도착은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인구를 이주시키게 됩니다. 현재 퀘벡에 해당하는 캐나다동부에서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인구가 정착하게 됩니다. 이들을 제외하고는 캐나다는 영어를 사용하는 국가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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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국가부채 ZERO @1835년 1월 8일

1835년 1월 8일, 7대 미국 대통령 앤드류 잭슨은 미국의 국가 부채를 전액 청산하겠다는 목표를 달성합니다. ‘대출이든 채권이든 빚을 다 갚아’ 미국은 채무에서 벗어났습니다.1월 8일은 잭슨이 전쟁영웅으로 부상한 뉴올리언스 전투 승전 20주년 기념일이기도 합니다.  앤드루 잭슨 대통령은 미국 역사상 유일하게 국가 부채가 없는 경험을 했고, 역사상 최악의 금융위를 촉발하기도 했습니다.

국가 부채 청산은 잭슨 개인의 문제이자, 오래된 정치적 목표였습니다. 혁명 이후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 국가의 부채에 대해 논쟁을 벌였습니다. 독립 후 연방 정부는 이전 식민지 통합의 일환으로 개별 주의 전쟁 부채를 떠맡는 데 동의했습니다. 또한 강력한 중앙 정부를 선호하는 연방주의자 들은 국립 은행을 설립하고, 부채가 새로운 국가의 경제를 부양하는 유용한 방법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의 반대자들, 특히 토머스 제퍼슨은 이러한 정책들이 농업에 종사하는 미국인들을 위한 정책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특히 부채를 국가 수치의 원천으로 보았습니다. 제퍼슨과 마찬가지로 포퓰리스트인 잭슨은 젊은 시절에 토지거래에서 사기를 당한 경험때문에 부채에 대한 개인적인 혐오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832년 재선을 위해 캠페인을 벌이던 잭슨은 국립 은행의 재허가를 거부하고 부채를 “도덕적 결함”과 “흑마술”이라고 불렀습다. 잭슨대통령은 재임 기간 동안, 국가부채를 유발하는 철도와 운하 등의 건설이 중단되었습니다. 잭슨은 서부에 있는 막대한 양의 정부 토지를 매각하여 부채를 갚았고, 1835년에 부채를 완전히 청산할 수 있었습니다. 다만 그 기간은 2년을 넘지 못했습니다.

건국 이래 처음인 ‘채무 제로(debt free)’ 를 발표한 1월 8일은 잭슨이 전쟁영웅으로 떠오른 뉴올리언스 전투 승전 20주년 기념일이었습니다. 전쟁영웅 잭슨의 승리는 안타깝게도 경제 파탄의 씨앗을 품고 있었습니다. 연방 토지 매각은 부동산 버블로 이어졌고, 국립 은행의 패쇄로 지역은행들의 무분별한 지출과 차입으로 이어졌습니다. 세계경제가 침체국면으로 들어가면서, 잭슨의 과격한 정책이 더해져 1837년 공황으로 이어졌습니다.

미국은 그 이후로 계속 빚을 지고 있습니다. 부채는 남북 전쟁 중에 급증했지만 20세기 초에 거의 갚았지만 제1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면서 다시 부풀어 올랐습니다. 수많은 대통령과 정치인들이 부채를 비난하고 심지어 그것을 없애겠다고 약속했으며, 보수주의자와 자유주의자들은 자주 잭슨을 반향했습니다.  그렇지만, 알랙산더 해밀턴은 말했습니다. ‘ 국가의 부채는 과도하지만 않다면, 국가의 축복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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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5월 17일 워터게이트 청문회

워싱턴에서 샘 어빈 상원의원이 이끄는 워터게이트 스캔들에 대한 텔레비전 청문회를 시작합니다. 일주일 후, 하버드 법대 교수인 아치볼드 콕스가 워터게이트 특별 검사로 임명됩니다.

1972년 6월 17일, 워싱턴의 워터게이트 단지에 있는 민주당 전국위원회 본부에 침입하여 불법적으로 도청한 혐의로 5명의 남성이 체포되었습니다. 용의자 중 한 명인 제임스 맥코드는 닉슨 대통령 재선 위원회에 참여했습니다. 전 백악관 보좌관인 호워드 헌트와 대통령 재선 위원회의 재무 고문인 고든 리디도 도청에 연루되었습니다. 고위급인사가 연루된 전례 없는 규모의 정치적 스캔들이 터졌습니다.

1973년 5월 상원 특별위원회는 워터게이트 사건에 대한 텔레비전 방송을 시작했습니다. 상원 청문회에서 전 백악관 법률고문 존 딘은 존 미첼 전 법무장관이 워터게이트 침입을 승인했다고 증언했습니다. 그 밖에 백악관 수석보좌관도, 무엇보다닉슨 대통령도 이를 알고 있었다고 증언했습니다. 워터게이트 검사 콕스는 닉슨 재선 위원회의 정치 스파이 활동, 행정부의 수천 명의 시민에 대한 불법 도청, 정치적 호의에 대한 대가로 공화당에 기부한 광범위한 증거를 밝히기 시작했습니다.

7월에는 상원 청문회에서 닉슨과 그의 참모들 사이의 백악관 대화를 공식 녹음한 워터게이트 테이프라고 불리는 증거가 드러났습니다. 콕스검사는 이 테이프를 증거로 요구했고, 3개월 후 닉슨 대통령은 녹음 요약본을 보내기로 동의했습니다. 콕스검사는 요약을 거부했고 N닉슨은 콕스검사를 해고했습니다. 1973년 11월 17일 플로리다주 올랜드에서 닉슨은 400명의 기자 앞에서 자신의 행위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사기꾼이 아닙니다. (I am not a crook.)”. 특별 검사가 다시 임명되어, 적법하게 조사하고, 유죄 판결을 받은 여러 고위 행정부 관리를 기소했습니다.

대통령에 대한 대중의 신뢰는 급격히 추락했습니다. 1974년 7월 말 하원 법사위원회는 닉슨 대통령에 대한 세 가지 탄핵 조항 ( 사법 방해, 대통령 권한 남용, 탄핵 절차 방해)을 채택했습니다. 7월 30일 대법원 의 압력으로 닉슨은 마침내 워터게이트 테이프를 공개했습니다. 8월 5일, 대통령이 FBI에게 워커게이트 조사를 중단하라고 지시하는 부분을 포함하여 녹취록이 공개되었습니다. 4일 후, 닉슨은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사임한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9월 8일, 그의 후계자인 제럴드 포드 대통령 은 그를 사면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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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5월 16일 군사정변

1961년 5월 16일 새벽, 2군 부사령관 박정희 소장 주도의 장교 250여 명과 사병 3,500여 명 이 한강을 건너 수도의 주요기관들을 점령하면서 국가권력을 장악해나갔다.

이들은 방송국을 점령, ‘ 군사혁명위원회’를 조직하여 이 위원회가 입법권·사법권·행정권의 3권을 통합·장악한다고 선언하고, 이날 새벽 ‘군사혁명’이 성공했다고 발표했다.

당시의 군사혁명위원회는 ‘혁명’에 필요한 조치로 금융동결, 항구와 공항의 폐쇄, 정권의 인수, 의회의 해산, 일체의 정치활동 금지 등을 선포했다. 또한 6개 항의 ‘혁명공약’을 내걸었다.

① 반공을 국시로 삼고 반공태세를 재정비·강화할 것,

② 미국을 위시한 자유우방과의 유대를 공고히 할 것,

③ 모든 부패와 구악을 일소하고 청렴한 기풍을 진작시킬 것,

④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자주재건에 총력을 경주할 것,

⑤ 국토통일을 위하여 공산주의와 대결할 수 있는 실력을 배양할 것,

⑥ 양심적인 정치인에게 정권을 이양하고 군은 본연의 임무에 복귀할 것 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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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와이 역사 훑어보기


1,500여 년 전, 폴리네시아인들이 별빛에만 의지해 바다를 건너 하와이에 도착해 살게 됩니다. 그들이 하와이 제도에 처음으로 정착했다고 여겨집니다.

1778년,  대항해시대의 끝을 장식한 제임스 쿡이 카우아이 섬에 유럽인으로는 처음 도착합니다. 쿡 선장은 샌드위치 백작의 이름을 따서 이곳을 ‘샌드위치 제도’라고 이름 지었습니다. 19세기 중반까지 하와이는 샌드위치 섬으로 불리웁니다. 원주민과의 분쟁으로 사망한 쿡선장의 하와이 방문은 짧게 끝났지만 하와이 역사에 커다란 변화를 일으켰습니다.

십여년이 흐른 1792년에  쿡선장과 함께 섬에 처음 온 조지 밴쿠버 대위가 다시 하와이에 도착합니다. 밴쿠버대위는 하와이 원주민들에게 다양한 형태의 전쟁과 정부를 소개했습니다. 1810년 카메하메하 1세는 유럽식 전쟁을 통해 하와이 제도 전체를 점령하고 통일합니다. 카메하메하 1세가 죽자 그의 아들 카메하메하 2세가 왕위를 계승합니다. 그의 치세인 1820년에는 하와이에 최초의 선교사가 도착합니다. 기독교 선교사들이 하와이에 도착한 이후로 섬 원주민들은 주권, 문화, 삶의 방식이 점점 더 위협받게 되었습니다.

1835년에는 카우아이에 최초의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이 생깁니다. 하와이 제도의 비옥한 토양이 인정을 받고 농업이 주요 산업이 됩니다. 1850년대에는 하와이의 플랜테이션 생산량이 증가하면서 노동력의 수요도 높아졌습니다. 최초의 외국인 노동자는 중국인들이었습니다. 이후 일본, 한국, 필리핀과 포르투갈에서도 일자리를 찾아 노동자들이 들어왔습니다.

1840년에는 카메하메하 3세의 주도 하에 헌법이 제정되어 입헌군주국이 되었습니다. 1843년에는 영국, 미국, 프랑스 등이 독립국으로 승인합니다. 카메하메하 3세는 서구의 토지사유지 제도를 도입합니다.  하와이를 셋으로 나누어 왕실, 족장, 백성이 동일하게 토지를 갖게 하지만, 실패합니다. 토지 소유의 개념 자체가 낯설었기 때문에, 토지 소유권을 얻은 백성은 1% 미만에 그쳤습니다. 1848년에 홍역과 백일해가 선교사와 선원들을 통해 하와이 왕국으로 유입되어 인구의 4분의 1이 사망했습니다

1887년에는 샌퍼드 밸러드 돌(Sanford Ballard Dole)을 비롯한 미국계 이민자들이 들고 일어나 무력으로 왕궁을 점령한 뒤 군주인 칼라카우아를 협박하여 헌법을 개정하게 합니다. 칼라카우아는 아무 실권이 없는 상징적 국가원수가 되었고, 1891년에 사망했습니다. 1893년에는 소수의 백인 농장주와 사업가들이 조직한 쿠데타로, 하와이 군주국을 아예 축출해버립니다. 헌법 채택을 위해 왕의 협조를 강압적으로 얻어내었기 때문에 바요네트(총검) 헌법이라고도 합니다.

5년 후, 미국은 하와이를 풍부한 농업 자원이자 태평양의 전략적 거점으로 간주하면서 하와이를 합병했습니다. 그리고 1959년에 미국 의회는 하와이를 미국의 50 번째 주로 편입합니다. 그 기간 동안 식민지 개척자들은 땅을 몰수하고 섬의 일부를 군사화했습니다. 그들은 전통적인 문화 및 영적 관행을 억압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학교와 정부에서 하와이어를 금지했습니다.

세월이 흘러 1978에는 하와이주 헌법제정 회의에서 하와이어를 주의 공식 언어로 채택했습니다. 하와이는 미국에서 영어가 아닌 언어를 공식어로 사용하는 유일한 곳이 됩니다. 2009년 하와이 호놀룰루 태생인 버락 오바마 상원의원이 미국 제44대 대통령에 취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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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생트의 역사


압생트의 기원은 의약 목적으로 쑥을 넣어 음료를 만든 고대 이집트인 들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현대 압생트의 전신은 1792년 스위스에서 처음으로 증류 되었습니다. 처음 만든 압생트는 증류주에 쑥, 아니스, 회향 등 허브를 첨가해 다시 증류하는 방식으로 제조 되었습니다.

녹색을 띤 압생트는 ‘녹색 요정’이라 불리기도 했습니다. 1840년대에 알제리에서 싸운 프랑스 군인들은 말라리아와 이질을 예방하기 위해 압생트를 투여 받았습니다. 실제 쑥은 가벼운 구충제 역할을 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19세기 후반 기생충이 프랑스의 포도밭을 황폐화시키면서 와인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았습니다. 그러자 압생트가 인기를 끌게 됩니다. 값이 저렴하고 알코올 함량이 높다는 특성 덕분이다. 알코올 도수가 45~74도로, 빨리 취할 수 있고 물에 희석해 여러 잔을 만들 수 있어 가성비가 좋았습니다.

다른 어떤 파리지앵보다 화가와 작가들이 녹색 요정이라 불리는 압생트를 즐겨 마셨습니다. 고흐의 경우, 압생트가 그의 정신 쇠약의 원인이었다고 여겨집니다. 그 밖에도 드가, 모네, 로트렉, 고갱 등 인상파 화가들도 압생트를 즐겨 마셨습니다. 시인 보들레르, 베를렌, 랭보도 압생트를 마시며 글을 썼다고 합니다. “압생트 한 잔은 세상 그 무엇보다 시적이다”라고 쓴 헤밍웨이와 마크 트웨인, 휘트먼 등 작가들도 19세기 중후반에 뉴올린언스의 술집에서 압생트를 즐겨 마셨습니다.

그런데, 압생트가 환각 작용이나 정신 착란을 유발한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결국 1910년 스위스가 판매 금지 조치를 취합니다. 이어 프랑스, 미국 등에서 금지 조치가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현대 연구에 따르면 쑥의 주요 활성 성분은 뇌의 인지 기능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지만, 압생트에서 발견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용량에서만 가능하다고 합니다. 

판매 금지 조치는 2005년에 와서야 풀렸습니다. 스위스에서 제조가 다시 허용됐고, 미국 식품의약국 승인도 이뤄져 지금은 세계적으로 다시 생산과 판매가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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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나르 아르노(1949~) 는?

2023년 프랑스명품그룹인 LVMH(이하 루이비통으로 칭함)의 시가총액은 5천억달러를 달성합니다. 시총기준 세계 10대 기업은 애플(1위), 마이크로소프트(2위), 알파벳(4위) 등 빅테크가 대부분입니다. 10위에 진입한 루이비통의 존재는 전통적인 기업의 가치를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루이비통은 호황과 불황의 부침속에서도 성장세가 유지된다는 점에서 미국의 ‘빅테크’와 같은 존재라고 블룸버그는 평가합니다.

그동안 기업은 차별화된 기술력이나 가격경쟁력, 덧붙이자면 참신한 마케팅 등으로 평가되었습니다. 그런데 루이비통의 존재는 그것과는 뭔가 다른 흥미로운 존재입니다. 아르노회장의 캐릭터때문입니다. 그는 스티브 잡스에게 아이폰은 30년후에 사라질지도 모르지만, 1921년 첫 빈티지가 나온 돈 페리뇽은 세월과 상관없이 여전히 마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어찌보면 흔한 소비재이나,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오래된 명품 브랜드가 진짜 유망사업이라고 아르노 회장은 애둘러 말합니다.

아르노가 처음부터 명품기업을 운영한 것은 아닙니다. 아버지의 건설업을 물려받은 아르노는 1980년대 초 미국으로 건너갑니다. 프랑스의 사회주의 싫어서 찾아간 뉴욕에서 아르노는 탐욕스러운 자본주의를 배웁니다. 그는 귀국하자 당시 월스트리트에서 익힌 기업합병의 방법을 시도합니다. 매수처의 자산을 담보로 빚을 내어 매수하는 레버리지드 바이아웃(Leveraged Buy-Out)입니다. 

그가 처음 인수한 기업은 디올입니다. 디올의 모기업 부삭 그룹이 어려움에 빠지자, 당시 사회당 로랑 파비위스 총리가 부삭그룹의 인수를 제안합니다. 창업 38년 된 “크리스천 디올”을 그렇게 패키지의 일부로 인수합니다. 부삭그룹의 이익이 나지 않는 부문을 매각해 정상화시킵니다.

아르노 회장은 명품이란 역사와 전통에 브랜드 가치가 있으므로, 새로 만드는 것보다는 인수합병이 훨씬 시너지 효과가 크다는 판단합니다. 1980년대 후반에는 모에헤네시와 루이뷔통이 합병할 때, 적대적 인수를 시도해 결국 성공합니다. 이후 아르노는 크리스챤 디올에서 벌어들인 수익으로, 수많은 명품 브랜드를 인수해 지금의 루이비통 그룹을 일구었습니다.

주로 가족기업이었던 명품기업은 아르노의 공격에 하나둘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오래된 유명 브랜드의 대차대조표를 교묘하게 이용해 인수하는 방법은 한결 같습니다. 그렇게 루이비통은 75개 이상의 브랜드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쇼킹하지 않으면 창조적이지 않다” 고 아르노 회장은 말합니다. 루이비통은 꿈과 환상을 소비자에게 심어주어야 합니다. 그 브랜드의 정체성은 디자이너로부터 소비자에게 훼손되지 않고 전달되어야 합니다. 고급진 마케팅을 위해 경쟁사보다 더 많은 돈을 투입합니다. 다양한 분야의 유명인의 명성을 이용해 루이비통 브랜드를 떠들석하게 전파합니다. 루이비통은 늘 시대에 맞춰 새롭게 움직입니다.

아르노는 또한 명품기업에 기계와 같은 효율성을 추구합니다. 제조 공정을 현대화해 라이선스 계약을 사용하지 않고 자사 제품을 주로 직영 점포에서 판매합니다. 지난 30년 동안 수십차례의 인수합병을 걸쳐 전 세계 5600여개 매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류부터 가죽제품, 보석에 이르기까지 모든 제품들을 판매하는 매장입니다. 매장을 욕망의 신전으로 바꾸는 방법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아르노회장입니다. 루이비통 매장의 영업이익률은 50%에 가깝다고 합니다. 

견고한 제국 루이비통이지만 미래를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베르나르 아르노 회장이 70세를 넘기면서, 4남 1녀의 경영권 승계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루이비통 본사 앞에서 지금도 시위가 있습니다.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노동자 은퇴 시점을 늦출 게 아니라 루이비통 같은 부자에 과세하라” 외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