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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4월 21일, 천안문 광장 학생시위

천안문 광장 시위는 1989년 중국의 민주주의, 표현의 자유,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는 학생 주도의 시위였습니다. 민주화 시위대는 1989년 4월 중국에서 민주화 개혁을 도입했던 후야오방이 사망한 후, 그를 애도한다는 명목으로 처음으로 천안문 광장으로 행진했습니다. 학생들은 행진하면서 전국적으로 보다 개방적이고 민주적인 정부를 요구했습니다. 결국 수천 명의 사람들이 천안문 광장에서 학생들과 합류했고 5월 중순까지 시위의 숫자는 수만 명으로 증가했습니다. 시위는 1989년 6월 4일과 5일에 중국 정부에 의해 천안문 광장 대학살로 알려진 치명적인 진압으로 중단되었습니다.

당초 1989년 5월에는 덩샤오핑과 고르바초프는 ‘30년 만의 중·소 화해 회담’ 예고되었습니다. 당시 베이징에는 전 세계에서 수많은 외국기자들이 몰려와 취재를 벌였다. 중국공산당에 불만을 갖고 있던 베이징대 학생들은 마침 외국기자들이 베이징에 와 있다는 점을 활용하기 위해 시위를 계획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4월 15일 후야오방 중국공산당 총서기가 심장마비로 갑자기 사망하자, 애도를 명목으로 시위를 시작했습니다.

대규모 시위에 대한 폭력적인 진압에 대한 정부의 경고를 무시하고 40개가 넘는 대학의 학생들이 4월 27일 천안문으로 행진하기 시작했습니다. 1949년 공산주의 지도자 마오쩌둥이 중화인민공화국을 선포한 장소가 천안문이었습니다. 5월 20일 정부는 공식적으로 베이징에 계엄령을 선포했고 반체제 인사를 해산하기 위해 군대와 탱크를 소집했습니다. 그러나 많은 학생과 시민들이 군대의 진격을 막았고, 5월 23일 정부군은 베이징 외곽으로 철수했습니다.

6월 시위를 종식시키기 위한 협상이 교착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중국 정부는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천안문을 되찾으라는 명령을 군대에 전달합니다. 중국군은 천안문 광장과 베이징 거리를 강제로 폐쇄하여 수백 명의 시위대를 죽이고, 반체제 용의자를 체포했습니다. 정부의 탄압이 있은 후 몇 주 동안 알려지지 않은 수의 반체제 인사들이 처형되었고 공산주의 강경파들이 국가를 확고히 장악했습니다.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이 10년째 되던 해에 발생한 시위였습니다. 시위를 유혈진압한 중국공산당 지도부는 더욱더 경제발전에 매달렸습니다. 그래야 체제의 정당성이 그래도 유지될수 있기 때문입니다. 국제사회는 이 사건에 격분하여, 미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의 경제제재로 중국 경제는 잠시 쇠퇴했습니다. 그러나 1990년 후반에는 중국이 수감된 반체제 인사 수백 명을 석방한 덕분에 국제 무역이 재개되었고, 경제발전은 계속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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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4월 21일, 두루봉 동굴유적 발견

1983년 충북 청원군에서 석회석 광산을 찾기 위해 산을 헤매던 김흥수 씨가 두루봉동굴을 발견한다. 그는 동굴 속을 살펴보다가 키가 110~120센티미터 가량 되는 어린아이의 뼈를 발견한다. 사람들은 발견자의 이름을 따서 이 뼈를 <흥수아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두루봉동굴은 1976년부터 83년까지 11차례 발굴을 했다. 두루봉동굴에는 처녀굴, 쌍코뿔소동굴곰 등의 화석이 나온 2굴, 두루봉 정상에서 새로 발굴된 새굴, 완전한 사람뼈가 발굴된 흥수굴, 집터가 발견된 15굴 등 여러 굴이 있었다.

특히 흥수굴은 완전한 사람뼈와 석기, 동물화석이 발굴된 구석기 유적지다. 이 굴에서 발견된 홍수아이는 일부러 시신을 바로 펴놓은 매장흔적과 가슴뼈 부분에서 나온 국화과 꽃가루 때문에 구석기인의 장례문화를 엿볼 수 있는 귀중한 흔적이었다.

약 4만 년 전의 후기구석기시대에 살았던 것으로 추정돼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는 흥수아이의 이름을 발견자이자 광업소 현장소장인 김흥수씨의 이름을 따서 붙였다는 것도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미라가 발굴 될 수 있었던 것도 이 지대가 알카리성의 석회암 지대라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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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4월 20일, 노태우 고르바초프 정상회담 @ 제주

 일본 공식 방문을 마치고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한국을공식 방문했다. 1988년 7월 7일 사회주의권과의 경제 교류를 촉진하는 내용의 7·7선언을 발표하며 북방외교에 나섰던 노태우 대통령은 ‘북방외교’에 관해서는 강한 의지를 보였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1990년 5월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사상 첫 한·소 정상회담이었다. 그 자리에서 두 정상은 한국과소련의 관계를 완전한 수교관계로 발전시켜 나갈 것과 외교, 정치, 경제, 과학기술 및 문화의 모든 분야에서 두 나라 간 교류를 더욱 발전시켜 나가기로 합의했다. 한국과 소련은 그해 10월 1일 정식으로 국교를 수립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12월 노태우 대통령은 한국 대통령으로는 최초로 모스크바를 방문했다. 제2차 정상회담에서는 ‘모스크바선언’을 채택, 한반도 문제 해결에 군사력 사용을 배제하고 평화적인 대화를 통해 신뢰를 구축하며 이를 바탕으로 단계적인 협력관계를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는데 의견을 모았다.

그로부터 4개월 만에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한국을 전격 방문한 것이다. 노태우 대통령의 모스크바 공식 방문에 대한 답방 형식이었지만, 전통적으로 우호관계에 있는 북한을 제치고 적대관계에 있던 한국을 먼저 찾아왔다는 점에서는 아주 이례적인 사건이었다.노태우 대통령과 고르바초프 대통령은 단독회담장에서 1시간 15분가량 한·소 협력 및 한반도 긴장완화, 북한 문제 등 핵심 현안을 논의하고, 장소를 옮겨 양측 공식수행원이 배석한 가운데 20분간 확대회담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두 정상은 한반도의 안정이 동북아는 물론 세계평화에 긴요하다는데 인식을 같이하고 한국의 유엔가입과 북한 핵 사찰문제에 공동보조를 취하기로 합의했다. 고르바초프 대통령은 ‘한·소 우호 및 협력 조약’ 체결을 제안하기도 했다. 비록소련이 같은 해 12월 완전히 해체되면서 조약 체결 문제는 신생 러시아 정부의 과제로 넘어갔지만, 고르바초프 대통령의 제안은 양국 관계 증진에 커다란 진전을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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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다 칼로

프리다칼로가 18세였을 때, 그녀는 자신이 상상했던 인생의 길을 도전하고 있었습니다. 독일인 예술가 아버지와 멕시코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칼로는 어렸을 때부터 의사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를 위해 멕시코시티 국립예비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그 당시에도 그녀는 분명히 재능 있는 예술가였지만, 예술은 그녀의 삶의 주변에 머물렀습니다.

1925년 9월 17일, 모든 것이 바뀌었습니다. 하루의 수업을 마치고 칼로와 그녀의 친구가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탔습니다. 그들이 나무 벤치에 앉은 지 몇 분 후, 버스는 모퉁이를 돌았고 전속력으로 달리는 전동 트롤리 차량과 들이받았습니다. 칼로는  “그 둔하고 느린 이상한 충돌”로심각한 부상을 입었습니다. 칼로의 부상은 너무 심해서 전신 석고 깁스를 해야 했습니다. 그녀의 평온한 어린 시절은 그렇게 갑작스럽게 끝났습니다. 사고 후 모든 것이 바뀌었고, 칼로는 그것을 번개와 같다고 말합니다.

교통사고이후 칼로는 자신이 알고 있던 모든 것이 바닥으로 떨어졌다고 느꼈습니다. 그녀의 몸은 예전과 같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도 점차 치유되면서, 삶과 예술에 대한 그녀의 관점은 근본적으로 바뀌었습니다. 침대에서 끝없는 나날을 보내는 동안 칼로를 지탱해 준 것은 그녀의 그림이었습니다. 그녀의 부모는 그녀가 회복하는 동안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무릎 이젤을 주었고, 그녀가 자신의 얼굴을 그리는 것을 돕기 위해 침대 캐노피에 거울을 설치했습니다.

침대에 누워 있는 동안 방문객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그녀는 점점 더 많은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외로움 때문에 그녀는 이전 에 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표현하기 시작했습니다. 칼로는 그림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작업의 중심은 고통과 회복이라는주제였습니다. 그녀는 고통을 이겨내고 그것을 숨기지 않고, 표현했습니다. 그 타협하지 않는 정직함은 그녀의 대표적인 예술적 특성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칼로가 천천히 회복되면서 그녀는 다시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지만, 그녀가 알고 있던 삶이 아니었습니다. 예술 창작의 즐거움에 푹 빠져 있던 칼로는 의사가 되려는 꿈을 접고 예술에 전념했습니다.

회복 중에 그린 칼로의 벨벳 드레스를 입은 자화상 (1926)은 그녀가 겪고 있는 주요한 변화를 보여줍니다. 배경의 거친 바다 풍경은 그녀의 삶의 격변을 의미했으며, 처음으로 그녀는 눈에 띄는 일자 눈썹으로 캔버스에 자신을 묘사했습니다. 한참 후, 칼로는 이 경험을’ 자신이 자신을 낳은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화가로서 자신감을 얻으면서, 자신이 견뎌온 다양한 트라우마에 대해 언급하기 시작했습니다. The Bus (1929) 에서 칼로와 닮은 젊은 여자가 대중 버스의 나무 좌석에 앉아 있습니다. 이 장면은 그녀의 운명적인 사고 전 마지막 순간을 연상시킵니다.

.Henry Ford Hospital (1932)에서는 그녀의 신체적, 심리적 고통을 더 적나라하게 묘사했습니다에서 칼로는 병원 침대에서 유산 후 피를 흘리며 얼굴에 눈물을 흘리는 자신을 묘사합니다. 

Henry Ford Hospital (The Flying Bed), 1932 by Frida Kahlo

그리고 칼로가 화가인 디에고 리베라와 이혼한 후 그린 The Two Fridas (1939)에서 그녀는 마음이 찢어진 채 다른 치유된 자신의 버전과 손을 잡고 앉아 있습니다. 

The Two Fridas, 1939 by Frida Kahlo

칼로는 말합니다. “내 인생에서 두 번의 심각한 사고를 겪었는데, 하나는 전차에 치인 것이고,다른 사고는 디에고였다”고…

고통에 대한 칼로의 묘사는 직접적이었고, 그래서 획기적이었습니다. 20세기 초, 여성 예술가는 자신의 개인적인 트라우마를 작품에 담지 않았습니다. 매우 개인적인 것 같지만, 정치적이기도 합니다. 여성은 그렇게 솔직하게 표현하면 안된다는 암묵적인 관습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급진적이었던 그녀 정직함은 수십 년 후, 미덕이 됩니다. 이제 자연스럽게 “고통스럽고 힘든 일을 숨기지 않고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내가 일어나서 있는 그대로의 내가 될 수 있다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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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프린스

2016년 4월 21일 아침, 일곱개의 그래미상을 수상한, 프린스가 자택에서 죽은 채 발견되었습니다. 그는 57세였습니다. 사망 원인은 오피오이드 펜타닐의 우발적 과다 복용이었습니다. 한국에서 마이클 잭슨 처럼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프린스(본명 프린스 로저스 넬슨) 음악성에서는 오히려 마이클 잭슨보다 한 수 위라는 견해도 있습니다.  

그의 죽움이 알려진 후 몇 시간, 며칠 동안 전 세계 팬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했습니다. 오바마 대통령은 성명 에서 “대중 음악의 사운드와 궤적에서, 프린스보다 더 뚜렷하게 영향을 미치고, 그보다 더 사람들을 감동시킨 아티스트는 없다”고 말했습니다.

프린스는는 1958년 6월, 미니애폴리스에서 음악가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렇지만 부모의 이혼과 재혼으로 그의 어린시절은 불우했습니다. 십대 때 프린스는 친구들과 밴드에서 연주했습니다. 스무 살이던 1978년 워너 브라더스와 첫 음반 계약을 맺고 같은 해 데뷔 앨범 For You 를 발매했다 . 그 후 거의 매년 그는 새 앨범을 발표했습니다.

1984년 발매된 프린스의  Purple Rain이정점을 찍었습니다.이 앨범은 1,300만 장을 판매하며, 빌보드 200 차트에서 24주 연속 1위를 차지했습니다. 퍼플레인 앨범과 영화의 성공으로 그는 세계적인 스타덤에 올랐습니다.

프린스는 처음부터 그냥 독특했습니다. 우울한 성장기를 거친 탓인지, 그의 음악은 가시가 돋힌 듯했습니다. 프린스는데뷔 초반부터 관능적인 분위기를 연출하여,  외설과 예술의 경계에 서있었습니다. 그의 야릇한 외모, 뭔가모를 몽환적 표정이 그만의 독특한 세계로 표현되었습니다. 프린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 모든 인생은 커튼으로 가려진 채 갇힌 마음의 연속이었다.”고

음악적으로는 모든 장르를 거부하고 초월했습니다. 그의 음악은 펑크, R&B, 록, 팝의 요소를 융합하여, 나중에 ‘미니애폴리스 사운드’로 불리며 하나의 장르가 됩니다. 그는 피아노에서 일렉트릭 기타, 핑거 심벌즈까지를 자신의 앨범(For You)에 있는 모든 악기를 직접 연주했습니다 .  무엇보다 특히 짜릿한 라이브 공연자로 알려졌습니다.

프린스가 세상을 떠난 지 6개월 후인 2016년 10월, 그의 마지막 앨범 그의 마지막 앨범( Hit n Run Phase Two)공개되었습니다.  프린스는 그해에 다른 어떤 아티스트보다  더 많은 앨범을 판매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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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 센강의 봄

봄이 되면 클로드 모네(1840~1926)가 떠오릅니다. 그는 봄을 그 누구보다도 즐겨 그렸습니다. 모네는 시시각각 변하는 빛을 응시하고, 그에 따라 미세하게 달라지는 자연의 변화를 그렸습니다. 그의 그림에서 봄이 더 화사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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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년 4월 20일, 퀴리의 라듐 분리성공

마리와 피에르 퀴리는 파리의 실험실에서 광물 피치블렌드에서 방사성 라듐 염을 성공적으로 분리했습니다. 1898년 퀴리 부부는 피치블렌드 연구에서 라듐과 폴로늄 원소의 존재를 발견했습니다. 라듐을 분리한 지 1년 후, 그들은 방사능에 대한 획기적인 연구로 1903년 노벨 물리학상을 공동 수상했습니다.

마리 퀴리는 1867년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태어났습니다. 물리학 교사의 딸인 그녀는 재능 있는 학생이었고 1891년 파리의 소르본에서 공부했습니다. 최고의 영예로 그녀는 1893년에 물리학 학위를, 1894년에는 수학 학위를 받았습니다. 그해에 그녀는 자력 분야에서 중요한 연구를 수행한 저명한 프랑스 물리학자이자 화학자인 피에르 퀴리를 만났습니다. 마리와 피에르는 1895년에 결혼하여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게 될 과학적 파트너십의 시작을 알렸습니다.

박사 논문의 주제를 찾던 마리 퀴리는 1896년 베크렐의 방사능 발견의 핵심이 된 우라늄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원자 붕괴로 인한 방사선 현상을 설명하는 방사능이라는 용어는 사실 마리 퀴리가 만들었습니다 . 남편의 실험실에서 그녀는 우라늄이 주요 원소인 광물 피치블렌드를 연구했고 광물에 하나 이상의 다른 방사성 원소가 존재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했습니다. 피에르 퀴리는 그녀의 연구에 합류했으며 1898년에 마리의 고향인 폴란드 이름을 딴 폴로늄과 라듐을 발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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셸비 반 펠트 ‘아쿠아리움이 문을 닫으면’

미국 워싱턴주의 작은 마을에 아쿠아리움이 있습니다. 그곳의 유명인사는 거대한 태평양문어 마셀러스입니다. 상처 입은 채 바다를 떠다니던 마셀러스는 극적으로 구조되어 회복된 후 수족관에 살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언제나 다시 드넓은 고향으로 돌아가 자유를 되찾는 꿈을 꿉니다. 모두 잠든 밤이면 마셀러스는 굳게 잠긴 아쿠아리움 안에서 자신만의 비밀스러운 모험을 즐깁니다.

마셀러스가 바라본 인간의 모습은 대체로 어리석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수백만 개의 단어를 갖고 있지만 서로 진정으로 소통할 수 없는 “최악의 의사소통 능력”을 가졌습니다. 더구나 진실을 거짓으로 말하기도 하는, 한마디로 “한 치도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 종입니다.

마셀러스의 그런 생각에 예외가 생긴 것은 노년의 야간 청소부 토바를 만나고부터입니다. 마셀러스의 야간 비밀 모험을 목격한 할머니토바가 그를 도움의 손길을 내밉니다. 그후 은밀한 공모를 함께 하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이제 그들은 서로를 특별한 존재로 인식합니다. 둘 사에는 ‘우정’과 비슷한 각별한 무언가를 키워나갑니다.

청소부 토바 할머니는 사랑하는 가족을 한순간에 잃어버린 슬픔이 있습니다. 노년의 삶이라것은 그날이 그날같은 무채색의 삶이었습니다. 그런데 아쿠아리움 속 문어 마셀러스를 만나 황홀한 색채의 삶을 경험합니다. 바다생물과 인간의 우정, 마을 공동체의 끈끈한 유대감, 세대를 넘나드는 공감을 드러내는 에피소드 들이 읽는 이의 마음에 잔잔한 파도를 일으깁니다.

“오늘 밤에는 특별한 냄새가 나를 유혹했다. 달고, 짜고, 맛있는 냄새의 주인공이 쓰레기통 속 하얀색 포장 용기에 떡하니 담겨 있는 것을 발견했다.무엇인지 몰라도 맛이 좋았다. 하지만 자칫 그것으로 파멸을 맞이할 뻔했다.청소하는 여자. 그녀가 내 목숨을 살렸다.”

“문어는 다 그렇다. 걸음을 멈추고 내 수조를 들여다본 모든 인간의 얼굴을 기억한다. 패턴을 기억하는 것은 쉽다. 동틀 녘, 일출이 시작되면 벽 위쪽으로 어떤 문양이 떠오르는데 계절이 변함에 따라 그게 매일 어떻게 달라지는지도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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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9년 4월 19일 바이런 사망하다.

바이런(1788~1824)은 어찌보면 왜 이리 유명한지 의아합니다. 그의 이름이 “Byronic”이라는 단어도 만들었습니다. 그 단어는 로맨틱 영웅을 상징합니다. 뿐만 아니라 버트란트 러셀의 ‘서양철학사’에도 그는 인용되었습니다. 사악한 귀족이던 종조부의 남작 작위를 승계한 이 시인이 “찬미할 자유란 독일 왕이나 체로키 인디언 추장의 자유이지, 일상의 평범한 사람들이 생각하거나 향유할 수 있는 열등한 자유가 아니었다” 그는 그만큼 특별했습니다.

그의 두권의 시집을 출판했고,  1809년에 학위를 받은 후 그는 2년 동안 포르투갈, 스페인, 근동을 여행했습니다. 그의 경험이 담은 ‘차일드 해롤드의 순례’ 등을 출판하여 주목을 끌었습니다. 그는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유명해졌습니다.” 그의 시, 매너, 패션, 취향은 널리 모방되었다. 결혼과 이혼, 방탕한 스캔들로 더 유명해졌습니다.

항상 자유주의 대의와 국가 독립을 열렬히 지지했던 바이런은 터키로부터 독립을 위한그리스 독립 전쟁을 지지했습니다. 그는 그리스에서 대의에 합류하여 군대를 훈련시켰고, 그곳에서 36세 생일 직후 사망했습니다. 오늘날에도 그는 그리스의 국가적 영웅으로 여겨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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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 첫인도 매장 오픈

다양한 인도언어를 구사하는 직원이 근무하는 인도 최초의 애플매장이 뭄바이에 문을 열었습니다. 애플 매장은 라자스탄의 석재와 델리의 목재 타일로 장식되었있습니다. 상대적으로 다른 나라의 애플매장보다 더 화려합니다. 이는 애플의 인도에 대한 높은 희망을 반영합니다.

인구 14억읜 인도는 소득이 올라가면서, 휴대폰도 업그레이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이폰의 시장점유율은 인도 스마트폰 시장의 5% 미만입니다. 그러므로 앞으로 수요가 빠르게 성장할 것으로 기대됩니다. 지난 2월 애플은 인도에서 두 자릿수 매출 성장을 기록했습니다. 팀쿡 도 “인도에 대해 매우 낙관적”이라고 말합니다.

뿐만 아니라 인도는 돋 아이폰의 제조공장이 될 것입니다. 현재 대부분의 애플 제품은 중국에서 만들어집니다. 그렇지만 코로나, 생산비용 증가, 미중갈등으로 인한 지정학적인 이슈때문에 중국은 이제 더이상 매력적인 생산기지가 아닙니다. 앞으로 2025년까지 아이폰의 4분의 1이 중국 밖에서 만들어 질 것이라고 합니다.  당연히 인도가 가장 큰 수혜자가 될 것입니다. 나렌드라 모디 총리는 금색 아이폰 모델을 이미 사용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인도에서 아이폰판매는 급성장할 것으로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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