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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골의 명언

드골의 정치名言

  샤를 드골의 문장은 군더더기가 없고 짧다. 정치, 전쟁, 국민의 속성을 꿰뚫어 본 명언들을 모았다.

  *원자폭탄을 갖지 않은 나라는 진정으로 독립하였다고 할 수 없다.

  *‌위기만이 프랑스를 단결시킬 수 있다. 265가지나 되는 치즈를 가진 나라를 갑자기 단합시킬 순 없다.

  *내가 사람들을 더 많이 알게 될수록 개를 더욱 좋아하게 되었다.

  *침묵은 권력의 최종 병기이다.

  *‌용감한 사람은 난관(難關)에 특별한 매력을 느낀다. 곤경에 직면하였을 때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옳을 때 화를 내는데 처칠은 잘못할 때 화를 낸다. 우리는 서로 화를 낼 때가 많다.

  *‌애국심은 동족(同族)을 사랑하는 마음이 먼저이고, 민족주의란 이민족(異民族)을 미워하는 것이 먼저이다.

  *정치인은 주인이 되기 위하여 머슴 행세를 한다.

  *나는 누구한테도 속하지 않지만 모두에게 속하는 사람이다.

  *정치인들은 자신이 말한 것도 믿지 않기에 다른 사람들이 그를 믿으면 놀란다.

  *‌침묵만큼 권위를 만드는 데 기여하는 것은 없다. 침묵은 강자(强者)의 광휘(光輝)이고 약자(弱者)의 피난처이다.

  *신비함이 없으면 명성(名聲)도 없는 것은, 친숙함이 경멸을 부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이 심사숙고(深思熟考)하지만 행동하는 이는 혼자이다.   *‌‌정치에선 조국이나 유권자들을 배신해야 할 필요가 있다. 나는 (그럴 경우) 유권자들을 배신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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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vs. 중국

2023년 4월 안나레나 배어복 독일 외무장관이 처음으로 방문한 곳은 어디일까요? 중국 톈진에서 풍력 터빈용 부품을 만드는 독일의 중소기업 플렌더(Flender)의 중국 생산 현장입니다. 외무장관이 공장을 견학하는 것은 이례적이지만 독일과 중국 간 비즈니스 관계의 중요성을 보여줍니다. 중국은 독일의 가장 큰 무역 파트너이자 투자처입니다. 그렇지만 독일의 고민은 계속적으로 교역액이 증가하면서 무역적자는 더 커져간다는 점입니다.

이미 독일은 중국 공급업체에 크게 의존하고 있습니다.중국은 독일에 설치된 태양광 전지의 95%, 노트북의 80%, 기타 전자 제품의 대부분을 공급합니다. 독일은 또한 반도체와 리튬 이온 배터리를 만드는 데 필요한 희토류 금속과 항생제 및 기타 중요한 의약품을 중국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독일을 대표하는 주요한 산업도 중국에 진출하고 있습니다. 자동차 관련 기업, 화학기업 등이 중국의 새로운 생산 시설에 상당한 규모로 투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독일 기업들은 점점 더 중국을 위해, 중국에서 생산하고 있습니다. 외부장관이 방문한 플랜더 공장은 중국에만 공급하고 있습니다. 독일 기업들이 현지생산과 연구개발에 점점 더 많이 지출함에 따라 현지 수익의 대부분이 이제 중국에 재투자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장기적으로 보면, 독일의 일자리와 중국으로의 수출 모두에 타격을 줄 수 있습니다

지금 독일은 새로운 중국 전략을 만들고 있습니다. 독일산업을 부양하면서, 중국으로부터의 수입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려고 합니다. 그렇지만 뽀쪽한 방법은 없는 듯 합니다. 그럼에도 새로운 형태의 인센티브 정책을 만들지 않는 한 독일기업은 계속해서 중국에 수십억 달러를 투자할 수 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반도체 강국인 대만마저 흔들리면, 선택조차 없는 외통수만 남을 수 있습니다. 6월 20일 독일 수상과 와 중국 총리와 회담이 예정되어 있다고 합니다. 독일의 전략은 뭘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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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라 피츠제럴드

재즈의 전설 엘라 피츠제럴드는 1917년 4월에  버지니아 주 뉴포트 뉴스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는 “노래의 퍼스트레이디”라고 불렸는데, 그 의미는 작곡가 거쉬윈이 그녀에게 준 칭찬이 담겨 있습니다. 그녀의 목소리와는 별개로, 그 뒤에는 우울한 노래조차도 낙관주의로 기울어지게 만드는 따뜻함과 지성이 있습니다.빌리 홀리데이나 프랭크 시나트라는 센티멘탈한 노래의 깊은 우울함을 표현합니다. 반면에 피츠제럴드는 어떤 노래도 순수한 기쁨으로, 산소같은 청량한 멜로디로 부릅니다. 그것은 영원할 것같은 젊은소리입니다.

하지만 엘라 자신의 삶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그녀의 어머니는 엘라가 태어난 직후 뉴욕 북쪽으로 이주했습니다. 엘라는 그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댄서가 되고싶어했습니다. 그런데, 그녀의 어머니가 갑자기 1932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15세 된 엘라는 대공황이 발생한 바로 그 때에 고아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끼니때우기도 힘들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엘라는 매음굴에서 파수꾼으로 일합니다. 그녀는 곧 유색인종 고아 수용소에 수용되고, 다시 그 시설에서 도망쳤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훈련학교라 불리는 소년원으로 보내졌습니다.

1934년 11월 21일 저녁, 엘라는 아마추어 나이트에 참여하기 위해 할렘의 아폴로 극장 무대로 올라갔습니다. 모자에서 자신의 이름이 나온 후 순전히 우연의 결과로 무대에 오른 엘라는 그순간 댄서대신 가수가 되기로 결심합니다. 그리고 엘라는 아마추어 밤에서 우승을 해버립니다. 라이브의 여왕’이라는 칭호를 받은 엘라 피츠제럴드의 전설이 시작됩니다.

1950년대 중반, 프로듀서 노먼 그란츠와 레코딩 계약을 체결하고 미국의 위대한 작곡가들이 만든 ‘콘셉트 앨범’ 시리즈를 녹음했습니다. 1960년대 초반까지 콜 포터, 듀크 엘린턴, 거슈인 등의 작품들을 차례로 녹음하며 그녀의 실력과 재능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녀는 가장 테크닉이 좋고 리드미컬하며 스캣에 능한 가수입니다. 이후 스포트라이트는 엘라를 떠나지 않았고, 그의 명성은 점차 전 세계적으로 퍼져 재즈계를 넘어 대중의 큰 호응을 얻어습니다.

1917년 이날 태어난 엘라 피츠제럴드는 1996년 캘리포니아 베벌리힐스에서 7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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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4월 28일, 무솔리니 처형

1945년 4월 28일, 베니토 무솔리니와 그의 정부인 클라라 페타치는 스위스로 도망치려다 이탈리아 유격대에게 총을 맞았습니다.

61세의 무솔리니는 독재자는 독일 점령 기간 동안, 이탈리아의  꼭두각시 정부의 수장역할을 했습니다. 연합군이 이탈리아 반도까지 올라오면서 패배가 거의 확실해지자 무솔리니는 중립국으로 탈출을 시도합니다.

무솔리니와 그의 연인은 빨치산에 의해 발각되어 총에 맞았습니다. 그들의 시신은 트럭으로 밀라노로 옮겨져 거꾸로 매달려 공개적으로 전시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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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4월28일, 왕세자 이은 결혼

영친왕이라불리는이은(1897~1970)은 고종의 7번째 아들이자 순종의 이복동생입니다. 생모인 엄상궁은 이은을 낳은뒤, 순헌황귀비 자리에 올랐습니다. 이은은 10살 때인 1907년 순종의 뒤를 이을 황태자로 책봉되자, 곧바로 일본유학을 떠납니다. 1910년 한일 강제병합으로 조선이 망하자, 다시 왕세자로 격하됩니다. 그는 귀족학교 가쿠슈인 중등과를 거쳐 육사에 입학하게됩니다.

황세자 이은 일본왕족이던 마사코(이방자)와 정략결혼을 합니다. 1920년 4월, 도쿄 롯폰기에서 결혼식을 올립니다. 거행된 결혼식은 삼엄한 경계 속에서 거행됩니다. 1926년 4월 순종이 승하하자 이은은 이왕 작위를 계승하지만 계속 일본에 머물러야 했습니다. 주로 군인의 신분으로 지냈고, 마지막으로는 육군 제1항공군 사령관까지 올랐습니다.

 1963년 12월 고혈압과 뇌일혈로 혼수상태에 빠진 영친왕과 이방자 부부가 서울로 귀국합니다. 새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초청으로 1963년, 가족과 함께 귀국하여 한국 국적을 회복하고 창덕궁 낙선재에 기거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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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문 ‘젊음의 즐거움’

이백의 시 ‘소년행을 이인문(1745~1821)이 그려습니다.

오릉의 소년들 금시 동쪽을 지날 때
은안장 백마 타고 봄바람을 가르네
떨어진 꽃 짓밟고서 어디로 놀러가나
웃으면서 들어가니 호희의 술집이네

그림은 온통 봄색입니다. 복사꽃과 버드나무가 강줄기를 따라 끝없이 심어져 있다. 봄 기운에 말을 달리며 다리를 건너고 있는 젊은이는 어디로 가는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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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4월 27일, 남아공 다인종 선거 실시

1984년 8월,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흑인들을 제외하고 유색인종과 백인들만 참여하는 국민투표가 실시됩니다. 곧 흑인에게 투표권을 줄 것인지를 묻는 투표입니다.

투표가 진행되는 가운데 백인정부의 인종차별 정책에 항의하는 흑인들의 반정부 시위가 벌어집니다. 흑인들은 황인종 등 다른 유색 인종의 투표거부를 선동하고 동맹파업을 벌입니다. 남아공 정부는 경찰을 동원해 흑인들의 평화시위를 무자비하게 진압합니다.

이날로부터 10년 뒤인 1994년 4월 마침내 남아공 최초의 다인종 자유선거가 실시되면서 이 나라의 흑인들이 최초로 투표권을 행사하게 됩니다.

2,200만 명 이상의 남아공인들이 국내 최초의 다인종 의회 선거에서 투표에 참여했습니다. 압도적 다수는 반아파르트헤이트 지도자 넬슨 만델라를 그의 아프리카 민족회의와 다른 야당을 포함하는 새로운 연정을 이끌도록 선택했습니다. 5월에 만델라는 대통령으로 취임하여 남아공 최초의 흑인 국가 수반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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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4월 27일, 7대 대통령 선거

 

당시 법은 대통령의 중임을 1차로 제한했기에, 이미 연임중이던 박정희전 대통령은 본래 1971년 선거에 출마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전체의 민주공화당이 3선개헌을 벌의하고, 국민투표를 거쳐 3선개헌 개정이 확정됩니다. 박정희 후보는 혼란없는 안정속에 중단없는 정진을 내세웁니다. 그의 공약의 핵심은 8.5%이상의 경제성장이었습니다. 자력경제 기반, 국토종합개발계획, 노동자 복지정책 강화 등을 또한 내걸었습니다.

40대기수론을 내세운 신민당 경선에서 김영삼를 제치고, 김대중후보가 대선후보로 선출됐니다. 김대중은 ‘평화통일을 위한 남북 교류 실시’, ‘미국·일본·중국·소련 4대국의 한반도 평화 보장’, ‘자립경제와 빈부격차 완화를 위한 대중경제론 실시’ 등을 공약으로 내세웠습니다.

1971년 대선은 90만표 차이로 박정희가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박정희 후보의 득표수는 634만표, 김대중 후보의 총득표수는 약 540만표로 94만표 차이가 났니다. ‘번영의 70년대’를 약속한 박정희 대통령이 김대중 후보를 94만여 표차로 승리했습니다. 다만 제6대 대통령선거에 비해 서울·부산 등에서 지지율이 하락하며 정권의 지지 기반은 불안정해지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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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4월 26일,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

소련시대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에서 세계 최악의 원자력 발전소 사고가 발생합니다.  스웨덴 당국이 낙진을 보고한 후에야 소련 당국은 마지못해 사고가 발생했음을 인정했습니다.

체르노빌기지는 우크라이나 키예프에서 북쪽으로 약 65마일 떨어진 곳에 있었습니다. 1970년대 말 프리피야트 강둑에 건설된 체르노빌에는 4개의 원자로가 있었습니다. 초보적 수준의 엔지니어 그룹이 원자로에서 무모한 실험을 했고, 폭발과 이어진 화재로 인해 50톤 이상의 방사성 물질이 대기 중으로 방출되었습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의 몇 배나 되는 대기 중으로 빠져나간 방사선은 바람을 타고 북유럽과 동유럽으로 퍼져 수백만 에이커의 숲과 농지를 오염시켰습니다. 약 5,000명의 소련 시민이 결국 체르노빌 방사능 노출로 인한 암 및 기타 방사선 유발 질병으로 사망했으며 수백만 명이 건강에 악영향을 미쳤습니다. 2000년에 체르노빌의 마지막 가동 원자로가 폐쇄되었고 발전소는 공식적으로 폐쇄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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