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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05월 09일, 증권시장재개

1962년 증권파동의 여파로 휴장했떤 증권시장이 73일 만에 드디어 재개했습니다. 영국의 ‘남해버블 사건 이후 최악’으로 말해지기도 합니다. 본질은 대통령 선거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주가조작 사건입니다.

국가재건최고회의는 경제발전을 위해 자본시장 육성을 발표하고, 1962년 1월 ‘증권거래법’을 제정합니다. 대한증권거래소가 주식회사로 전환됨에 따라 주식투자가 가능해졌습니다. 이 법이 통과되기 직전인 1961년 12월 26일 대한증권거래소 주식(대증주)와 한전주가 폭등합니다.

중앙정보부와 당시 투자의 달인 윤응상을 중심으로, 급하게 만든 통일·일흥·동명 등 3개의 증권사가 대증주를 대량으로 매집했기 때문입니다. 같은 날 정부는 증권시장을 적극 육성하겠다고 발표합니다. 이에 주당 5전에 거래되던 대증주는 1962년 4월 18일에는 21환 10전까지 폭등하게 됩니다.

주가 폭등을 의심한 투자자들이 주식을 매도하기 시작하고, 주가는 급락합니다. 주가 유지를 위해 작전세력이 매수를 거듭해도, 매도 물량이 워낙 많아 급락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마침내 자금부족으로 투자자들에게 주식을 현금으로 바꾸어 줄 수 없는 ‘결제 불능 사태’에 직면합니다. 결제불이행 상태에 빠져 증권거래소는 6월 1일부터 휴장에 들어갔습니다.이 사건은 증권시장을 운영에 필요한 제도상의 미비점을 드러냈습니다. 주식시장의 발전에도 오랫동안 역효과를 미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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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나마 운하의 파트너, 시어도어와모건

매킨리 대통령이 암살된후 시어도어 루즈벨트(1858-1919)가  42세의 나이로 대통령으로 취임한다. 미국의 26대 대통령 시어도어는 개혁적이며 제국주의적이었다. 그가 무엇을 할지 모르기 때문에, 당시 대기업들과 금융가는 긴장했다. JP 모건(1837-1913)이 당연히 첫번째 타격이 된다.윌가를 대표하는 JP모건은 기업의 트러스트를 만들고 있었고, 대통령 시어도어는 기업의 독점화에 반대했다. 시어도어는 1901년에 모건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석탄 및 철도 거대기업 그룹인 노던 시큐러티(Northern Securities)를 기소했고, 1904년 연방대법원은 해체를 명령했다. 연이어 미국 산업을 독과점하던 43개 독점 기업을 제소했다.

그런 시어도어도 파나마운하 때문에 JP모건이 필요했다. 대서양과 태평양을 연결하기 위해 파나마 지협을 가로지르는 운하를 만드는 꿈은 적어도 150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렇지만, 그 누구도 산악과 열대 지역을 가로지르는 운하를 실제로 만들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1800년대 내내 미국은 경제적, 군사적 이유로 대서양과 태평양을 연결하는 운하를 원했다. 마침내 그 기회가 프랑스로 부터 왔다. 프랑스는 운하건설을 시도한 최초의 국가였다. 이집트의 수에즈 운하 건설자인 드 레셉스가 이끄는 건설 팀은 1880년 해수면 운하를 건설하는 기공식을 가졌다.

그러나, 프랑스의 기념비적인 도전은 실패한다. 끊임없는 열대비는 계속 산사태를 일으켰다. 무엇보다 수천명의 건설노동자들이 황열병과 말라리아로 죽어나가고 있었다. 그렇지만 열대의 전염병을 퇴치할 효과적인 수단은 없었다. 드 레셉스는 해수면 운하가 너무 어렵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는다. 갑문 운하를 위한 노력을 다시 시작했지만 때를 놓쳤다. 에펠탑을 만든 에펠도 참여해서 만든 운하건설을 회사는 1889년에 그만 파산한다. 당시 프랑스는 운하사업에 2억 6천만 달러 이상을 투자했고, 7천만 입방야드 이상의 흙을 굴착했다. 운하 벤처의 붕괴는 프랑스에서 큰 스캔들을 일으켰다. 그이후 에펠은 사업을 그만두고 과학 연구에 전념했다.

프랑스의 경험에서 예상되는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시어도어 대통령은 파나마운하를 개발하고 싶었다. 그는 한때 해군차관보였고, 역사에 미치는 해상력의 영향에 대한 책을 쓰기도 했다. 시어도어 대통령은 바다에서 패권을 가지려면, 상업뿐만 아니라 군사적 역량도 필수적이라 굳게 믿었다. 따라서 대서양과 태평양을 잇는, 미국이 통제하는 운하를 절대로 포기할 수 없었다.

시어도어 대통령의 추진에 따라, 미국은 1902년에 운하 지역의 프랑스 자산을 4천만 달러에 매입했다. 운하건설을 위해서는 땅을 대여받아야 하는데, 콜롬비아가 거절한다. 그러자 미국은 군사적으로 개입하여, 1903년 11월 독립된 파나마 공화국을 인정한다. 그리고 파나마와 조약을 체결하여, 미국의 파나마 운하 지역의 독점적이고 영구적인 소유권을 보장받는다. 그 대가로 파나마는 1000만 달러와 25만 달러의 연금을 받았다. 

하나님조차도 만약 자금을 조달한다면 JP모건에게 의뢰할 수 밖에 없었다. 대통령 시어도어의 노력으로, 1902년 미국 의회가 드디어 프랑스 회사의 자산매입를 승인했다.이제 JP 모건의 시간이 왔다. 우선 운하건설을 시작하기 위해서 착수금이 당장 필요했다. 미국은 프랑스 자산을 매입하기 위해 4천만 달러가, 독립시킨 파나마의 영토를 사용하는 댓가로 천만 달러가 필요했다. 서로 다른 통화를 가진 국제적 돈거래는 말하자면 통화스왑을 해야했다. 이를 집행할 수 있는 사람은 국제 금융거래 네트워크안에서 다양한 거래를 하던 JP 모건밖에 없었다. 시어도어대통령은 그를 특별지급대리인으로임명한다.1904년에 J P 모건은 각 국가에 돈을 지불했고, 그 지불이 완결된 후 미국 재정부가 모건 앞으로 수표를 발행했다.

우여곡절 끝에 파나마 운하는 1904년 5월 건설을 시작하여, 1914년 8월에 완성된다. 건설 중이었던 1906년 11월 시어도어 대통령은 17일간의 파나마와 푸에르토리코 등 남미 순방을 시작한다. 그는 먼로주의를 넘어 미국 본토 밖에서 공식 외교 순방을 한 최초의 대통령이 되었다. 운하 프로젝트가 실패할 것처럼 보이던 바로 그 순간, 재해와 질병 등으로 차질을 겪고 있는 파나마 운하의 진행 상황을 점검했다. 그는 더 나은 근무 조건을 또한 보장했다. 건설 현장을 방문한 시어도어 대통령은 직접 중장비를 조종하는 사진을 찍어, 그의 운하에 대한 진심을 미국에 보여주었다.

20세기 초 파나마 운하의 건설은 미국의 제국화 과정을 집약적으로 보여준 사건이다. 파나마 운하는 미국이 가진 기술력의 우위와 생산력의 규모를 전세계에 보여주었다. 독보적인 공학적 성취인 동시에 라틴아메리카를 미국의 영향권에 두는 제국건설의 시작이었다. 파나마 운하로 미국은 아메리카 대륙의 가장 중요한 경제적ㆍ전략적 교차로에 제국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오늘날 파나마는역외금융의 중심지이다. 파나마 프로젝트에 자금을 투자한 JP모건이 아직도 그 역사뒤에 있다. 파나마가 역외금융 중심지로 발돋움하게 된 건 1927년 미국의 석유회사 스탠더드 오일이 세금을 회피하기 위해서 시작되었다. 세계가 대공황으로 고통받고 있을 때, 파나마는 또 다른 변신을 시도한다. 월스트리트의 도움과 안내를 받아 특히 선적 등록과 관련하여, 미로 같은 면세 법인 설립했다. 미국 은행들은 점차 파나마를 금융 중심지이자, 탈세 및 돈세탁의 안식처이자, 선적 통로로 바꾸는 데 앞장섰다.

JP 모건은 유럽에서 자본을 조달하고, 파산한 철도를 재편하고, 위기 상황에서 시장을 안정시키고, 지금은 당연하게 여기는 많은 기업 및 재무 구조의 스탠다드를 만들었다. 시어도어 루즈벨트는 정치적 영리함과 포괄적인 비전을 결합해 제국주의를 향한 미국을 건설했다. 그 이후 30년 동안 시어도어 루즈벨트가 “세계 경찰력의 행사”라고 불렀던 이름으로, 미국은 카리브해 유역에서 30번 이상의 군사 개입을 감행한다. 시어도어 루즈벨트와 JP모건은 새로운 국가 파나마를 수립하는 과정에서 직접적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 둘 사이는 비록 애증의 관계였지만, 그래도 그 둘은 목표지향적 파트너였다.

1915년 샌프란시스코에서 개최된 「파나마-태평양 국제박람회」의 공식 포스터는 한해 전 개통된 파나마 운하를 영웅 헤라클레스를 빚대어 표현했다. 이 포스터는 이 시대의 진짜 영웅은 미국이라고 말한다. 불가능 해보였던 인류의 숙원 사업을 완성시킨 것이 바로 미국의 힘, 미국의 기술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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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톤헨지는 왜, 어떻게?

1986년부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스톤헨지는 이집트읜 파리밋 못지않게 여전히 미스테리로 남아있습니다. 영국 윌트셔의 솔즈베리 평원에 세워진 스톤헨지를 거의 100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매년 방문합니다.

스톤헨지는 기원전 3000년에서 1500년 사이에 신석기 시대부터 청동기 시대까지 여러 단계에 걸쳐 건설되었습니다. 거대한 규모의 스톤헨지가 왜, 어떻게 세워졌는지는 수세기 동안 추측의 대상이었습니다. 영국 남부에 위치한 스톤헨지는 대략 100개의 거대한 직립 돌이 원형으로 배치되어 있습니다. 

그동안의 발굴과 연구로, 스톤헨지가 한때 매장지였다는 데 동의합니다. 그렇지만 스톤헨지의 다른 목적이 무엇인지, 그리고 현대 기술이 없는 문명이 어떻게 거대한 기념비를 만들었는지는 아직 추측만 할 뿐입니다. 17세기와 18세기에 많은 사람들은 스톤헨지가 고대 켈트 이교도들이 종교적 숭배의 중심지로 지은 드루이드 사원이라고 믿었습니다. 스톤헨지의 입구가 하지에 떠오르는 태양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근거로, 스톤헨지가 태양력 달력의 역할을 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그동안 작업을 통해, 매장되기 전에 화장된 흔적이 보이는 수백 개의 인간 뼈를 발굴했습니다. 이러한 유적의 존재는 스톤헨지가 고대 매장지이자 죽은 자의 사원 역할을 했을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스톤헨지에서 1마일 떨어진 곳에서귀족계층을 위한 사원으로 추측되는 유적이 발굴됩니다. 여전히 확실한 증거는 아니기 때문에, 스톤헨지의 존재이유는 여전히 추측의 문제로 남을 수 밖에 없습니다.  

현대 기술이 없는 문명, 심지어는 바퀴도 없는 문명이 어떻게 똑바로 세워진 거석 돌의 거대한 원형을 만들어냈는지 설명하지 못했습니다.5,000년 전에 이미 스톤헨지에서 착공한 인부들은 어떻게 이 4톤짜리 바위를 그렇게 먼 거리에 운반했을까요? 썰매, 롤러 및 보트, 빙하, 마법,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외계인 설이 있습니다.

중세부터 수세기 동안 스톤헨지는 개인 소유였습니다. 18세기부터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여 유적지에 피해를 입혔습니다. 땅주인 에드먼드 앤트로버스 경은 영국 정부에 매각을 거부했습니다. 1900년대 초, 그의 아들은 스톤헨지 주변에 울타리를 세우고, 방문객에게 입장료를 받았습니다. 스톤헨지 근처에 영국군의 군사시설을 만들기도 앴습니다. 1913년 고대 기념물 통합 및 수정법이 통과되면서 스톤헨지가 법적인 보호를 받을 수 있게 됩니다. 1915년, 경매에 나온 스톤헨지 땅을, 지역 주민인 처브가 입찰하여 Ce국가 정부에 기증했습니다. 이 공로를 인정받아 그는 로이드 조지 총리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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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경철 ‘질문하는 역사

“우리는 왜 강대국 역사만을 배우는가?”

“서구는 언제부터 역사의 주역이 되었으며, 중국은 왜 서쪽으로 가지 않았나?”

“권력이 늘 역사를 필요로 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주경철 서울대 교수(서양사)의 ‘질문하는 역사’는 2002년에 처음 나왔습니다. 주교수는 20년만에 다시 책을 내면서 역사에 던지는 질문의 의미를 재차 강조합니다.학문은 결국 묻고 또 묻는 지난한 과정입니다. 하지만 인문학의 경우 누구나 만족하는 답을 얻기 어렵습니다.  그래도 질문을 던지는 이유는 질문의 과정 자체가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즉 묻고 잠정적인 답을 찾고 다시 그 다음 질문을 던지는 과정에서 사고가 넓어지고 깊어집니다.주교수가 20년에 던졌던 질문은 현 시점에도 여전히 유효한 질문임을 느낍니다. 예를 들어 ‘중국이 서쪽으로 가지 않았을까’는 질문은 ‘시진핑은 왜 일대 일로를 밀어붙일까’와 연결됩니다.

중국이 서쪽으로 가지 않은 까닭은 편

근대 세계사에서 가장 중요한 현상은 무엇일까? 가장 유력한 후보중의 하나는 ‘유럽의 세계 팽창’일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유럽 세력이 15~16세기 이후 그 아류인 미국이 전 세계로 뻗어나가서 군사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온 지구를 지배하게 됐을까?

중세만 해도 서구는 압박받는 불쌍한 소수 민족에 가까웠다. 이슬람의 세력팽창으로 인해 죽을 고비를 넘긴 유럽이 처음 가까운 바깥으로 힘을 써본 것이 12~13세기 십자군 운동이었다. 약간의 자신감을 갖고 먼 곳까지 눈을 돌리기 시작한 것이 15세기 이후의 아프리카 해안 탐사나 아시아 여행이라 할 것이다. 포르투갈인 바스코 다 가마가 1497년 리스본을 떠나 아프리카 동부의 말린디를 거쳐 인도의 캘리컷에 도착했다. 다 가마는 “우리는 기독교도와 향료를 찾아서 왔다”고 소리쳤다. 하지만 그들이 만난 사람은 모두 힌두교도였고, 향료와 교환하려고 유럽에서 가지고 간 직물은 비웃음을 샀다.

다 가마 일행은 인도사람으로부터 50년전에 당신들과 비슷하게 흰 피부를 가진 사람들이 왔었다는 소문을 들었다. 명나라 환관 정화가 이끈 대 함대의 항해를 가르키는 것이었다. 1405년~1433년 사이 300척의 배와 2만8천명의 선원으로 구성된 대규모 원정대를 바다로 내보냈다. 정화 함대가 아프리카 동부 해안을 순항한 것은 분명하고 일설에 희망봉 근처까지 간 것으로 되어 있다. 내친 김에 아프리카를 돌아 유럽까지 항해하여 런던 앞바다를 가로막고 행패를 부리고 왔다면 어떻게 됐을까?

하지만 정화의 항해는 평화적이었다. 대표적인 충돌사건으로 실론섬의 어느 국왕이 시비를 걸어와서 소규모 전쟁정도를 벌인 것일 정도로 평화적이었다.중국은 종교에 대해 관대했다. 정화가 실론섬에 세운 비석은 세 개의 문자로 기록되어 있다. 정화가 절에서 부처님께 공양을 드렸다는 내용은 한자로, 명 황제가 힌두의 신을 찬양한다는 내용은 타밀어로, 알라의 영광을 기린다는 내용은 페르시아어로 새겨져 있다.

정화 함대를 파견한 이유는 생사를 알 수 없는 건문제(정난의 변에서 영락제에게 제위를 빼앗김)를 찾는 것이었으나, 실제 중국의 힘과 위엄을 과시하여 중화 세계의 질서를 세우기 위함이었다. 인도양 순항이후 중국이 내린 결론은 해외의 오랑캐들은 중화에 필요치 않다는 점이었다. 이런 태도에 만주족의 위협이 심각해지자 남해보다는 북방대륙으로 관심이 옮겨갔다.

또 유교적 관료들이 황제의 총애를 받는 정화 등 환관을 비판하자 해외 탐험은 물 건너가고 말았다. 배는 쪼개서 땔감으로 쓰고 민간인이 바다로 나가는 것 자체를 법령으로 금지시켜버렸다.(해금령) 해금령으로 인해 중국은 ‘제국주의 없는 제국’ 자기 내부로 갇혀버린 제국이 되었다. 머지 않아 왜구들이 중국 해안을 제집 드나들 듯 헤집고 다녀도 제어하지 못하고, 포르투갈인을 비롯한 서양 오랑캐들이 집적대도 마땅히 대응할 방도가 없게 된 것이다.

근대 초입, 중화제국은 여전히 세계 최정상에 있었다. 상업을 천시하는 중화제국의 황제의 눈에 포르투갈 왕이 아시아에 보낸 선단을 보내고 나서 ‘상업과 항해의 왕’이라는 촌스럽기 그지 없는 이름을 쓰는 것을 알았다면 눈물나게 웃었을 것이다.그러나 장거리 경주에서 최후의 승자는 뒤에서 뛰쳐나오기 십상이다. 포르투갈 뒤편에는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같이 훨씬 더 지독한 종자들이 줄줄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점을 황제가 알리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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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5월 8일, 2차 대전 승리의 날

1945년 5월 8일, 영국과 미국은 유럽 승리의 날을 축하합니다. 두 나라의 도시와 이전에 점령되었던 서유럽의 도시들은 나치독일의 패배를 기뻐하며 깃발과 현수막을 내걸었습니다 .

5월 8일은 유럽 전역의 독일군이 마침내 무기를 내려놓은 날이었습니다. 프라하에서 독일군은 소련군에 항복했습니다. 코펜하겐과 오슬로에서,  북부 라트비아 등등에서 독일의 항복으로 마침내 전쟁이 끝납니다. 대략 13,000명 이상의 영국 포로가 풀려나 영국으로 송환되었습니다.

그당시 독일 병사들의 주요 관심사는 소련군의 포로로 잡히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약 100만 명의 독일군인들이 체코슬로바키아에서의 전투가 끝났을 때, 서방으로 대규모 탈출을 시도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곧 소련의 포로로 잡혔습니다. 소련은 독일의 항복 전후에 약 200만 명의 포로를 잡았습니다.

독일-소련의 대결은 5월 9일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그 이후에야 스탈린은 라디오 방송으로 “슬라브 국가의 오랜 투쟁은… 당신의 용기가 나치를 물리쳤습니다. 전쟁은 끝났다.”고 선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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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대법원, 파라마운트 반독점 소송

1948년 5월, 미국 대법원은 파라마운트 픽쳐스와 다른 7개 주요 헐리우드 영화제작사에 대한해 반독점 소송을 제기합니다. 이미 1928년 9개의 주요 영화제작사를 상대로 반독점 소송제기 되어, 이들 기업은 1930년 반독점법 위반으로 유죄 판결을 받은바 있습니다.

대공황이 시작되자 국가 산업 회복법의 후원 아래, 이들 영화사에 대한 시정조치는 유야무야되었습니다. 1938년 7월 미국 공정위는 할리우드에 대한 입장을 번복하고, 다시 파라마운트, 유니버설, MGM, 20세기 폭스, 워너 브라더스, 컬럼비아, RKO 등 7개 메이저 제작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합니다.

할리우드의 영화 제작사들은 당시 영화의 제작과 배급은 물론, 극장까지 소유함으로써 영화시장을 사실상 독점하고 있었습니다. 가격을 담합한다던가 혹은 소규모의 독립극장들을 차별하는 식으로 불공정한 관행들이 지속되었습니다. 영화사가 여러 개의 영화를 묶어서 극장에 일괄 판매하는 이른바 ‘블록딜’이 일상적인 판매방식이었습니다. 그에 따라 영화시장은 끼워팔기와 독점적 판매가 공공연히 이루어집니다.

미 공정위는 영화사들이 독점을 위해 영화제작과 배급을 수직통합을 구축하였다고 판단합니다. 그리고 반독점법 위반으로 8개 스튜디오를 고발합니다. 당시 스튜디오는 자체 극장 체인을 소유하거나, 독립 극장과 블록딜로 판매하였습니다. 미 공정위는 극장소유와 블록딜을 금지했습니다.  그로 인해 메이저 스튜디오들은 극장을 모두 처분해야 하며, 극장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법원의 승인이 있어야 된다는 판결을 받게 되었습니다. 극장을 소유하지 못했던 마이너 스튜디오들 역시 독점에 따른 불공정 행위들을 금지받았습니다.

이 사건은 1940년 6월 처음으로 뉴욕 연방 법원에서 재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정부와 제작사의 변호사가 시정조치관련해서 타협을 합니다. 영화사가 극장을 유지하면서, 블록 예약을 제한하는 계약을 체결합니다. 이에 영화 독점에 반대하는 영화인들이 결성한 단체(SIMPP)가 만들어집니다. 그들은 대형 영화사들이 불공정 게임을 한다고 주장했고, 영화 제작사가 영화관 체인을 소유하는 것을 금지할 것을 주장합니다. 찰리 채플린, 월트 디즈니 등의  독립 제작사의 노력으로 타협안은 페기됩니다.

재판은 1948년 2월 대법원에 이르자 빠르게 진행되었습니다. 5월 3일 법원은 이전 판결을 확인하고 독점금지법을 위반한 스튜디오를 유죄로 선언하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평결의 조건에 따라 스튜디오는 블록 예약을 종결하고 모든 영화를 개별적으로 판매해야했습니다. 또한 대형 영화사는 자체 극장 체인을 매각해야 했습니다. 이 결정으로 독립 프로듀서들은 마침내 관객과 배우를 놓고 메이저 스튜디오와 경쟁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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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5월 4일, 팔레스타인 자치 협정

1994년 5월 4일 라빈 이스라엘 총리와 아라파트 PLO 의장은 카이로에서 팔레스타인 자치 1단계에 대한 합의에 도달했습니다. 오슬로 협정은 중동의 평화를 추구하는 획기적인 순간이었습니다. 오슬로 협정은 PLO가 이스라엘 국가를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게 가자와 서안 지구에서 제한된 자치를 허용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공식적인 평화 조약의 비준으로 이어질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국경확정, 예루살렘 지위, 팔레스타인 난민 문제 등 오슬로 협정에 근거한 논의를 시작해 2년 내 즉 오슬로 협정을 마무리하는 것을 목표로 했습니다. 합의 이행 첫 단계로 1994년 5월 이스라엘은 가자지구와 예리코의 통치권을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에 넘겼습니다. 회담 중에 작성된 조항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지만 아직 지속적인 평화를 가져오지 못했습니다. 양측은 계속해서 갈등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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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5월 3일,일본 신헌법이 발효되다

신헌법은 보통선거권을 부여했고, 히로히토 일왕 의 상징적 권력을 제외한 모든 권력을 박탈했으며, 권리장전을 규정하고, 귀족 제도를 폐지하고, 일본의 전쟁권을 불법화했습니다. 이 법안의 대부분은 맥아더장군과 점령군 참모부가 작성한 것입니다.

1941년부터 1942년까지 필리핀에서, 1942년부터 1945년까지 태평양에서 연합군 사령관으로맥아더는 일본과의 전쟁에서 승리합니다. 일본의 공식적인 항복 조건에 따라 히로히토 천황과 일본 정부는 맥아더 장군이 임명한 일본 점령지 연합국 최고사령관의 권한에 종속되었습니다.

맥아더는 도쿄의 황궁이 내려다보이는 총사령부에서 미국 모델을 따라 일본 정부, 산업 및 사회를 재건하는 일을 주도했습니다. 맥아더는 뛰어난 행정가였으며 그의 진보적인 개혁은 대체로 일본 국민의 환영을 받았습니다.

미국 점령기에 의해 수행된 가장 중요한 개혁은 1889년 메이지 헌법을 대체하는 새로운 헌법의 제정이었습니다. 1946년 초 일본 정부는 새 헌법 초안을 총사령부에 제출했지만 너무 보수적이라는 이유로 거부당했습니다. 맥아더는 미국의 버전을 만듭니다.  상징적인 천황제를 도입하고, 시민의 자유를 보호했습니다. 9조는 일본이 다시는 전쟁을 벌이는 것을 금지했습니다.

히로히토 천황의  권한은 실제로는 극히 제한적이었지만, 공식적으론 일본의 절대 통치자이었습니다. 1931년부터 제 2차 세계대전 까지 일본 정부와 협의하여 전쟁을 승인했습니다. 히로히토는 자신이 전범으로 기소되어 일본 황실이 폐지될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맥아더의 헌법은 최소한 천황을 “국가와 국민 통합의 상징”으로 보존했기 때문에 히로히토는 지지를 표명했습니다. 보수적 정치인의 입장과 달리, 1946년 4월 일본 여성이 처음으로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었습니다. 일본 정부가 약간 수정한 최종 초안은 일주일 후에 공개되었고, 11월 3일 일본 의회인 국회에서 공포되어 1947년 5월 3일 발효되었습니다.

1948년 요시다 시게루가 총리로 선출되면서 일본의 정치적 안정과 급속한 경제 성장을 특징으로 하는 요시다 시대가 열렸습니다. 1949년 맥아더는 자신의 권한을 일본 정부에 넘겼고, 1951년 9월 미국과 48개국은 일본과 정식 평화조약을 맺었다. 1952년 4월 28일 조약이 발효되었고 연합국의 점령이 끝나자 일본은 완전한 주권을 갖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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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6월 2일 엘리자베스 2세의 대관식

1952년 11월 조지 6세가 폐암으로 56세의 이른 나이에 사망한 이후, 영국국민들은 대관식을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대관식자체 뿐만 아니라 텔레비전으로 중계하는 첫 번째 행사이기 때문입니다. 1953년 6월 2일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대관식은 2,700만 명의 영국인 과 8,500만 명의 미국인이 전 세계 시청자와 함께 BBC 방송을 시청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사원 으로 가는 길에서도 300만 명의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금빛 마차에 탄 엘리자베스 여왕과 필립공를 보기 위해 사람들은 줄을 섰습니다. 그들 중에는 92개국을 대표하는 2,000명 이상의 언론인과 500명의 사진가가 있었습니다. 그날은  비가 쏟아지는 날인데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비가오는 쌀쌀한 날씨라 여왕의 마차 좌석 아래에 온수 히터를 설치했다고 합니다.

1950년대는 영국의 라이프스타일에 큰 변화가 있었습니다. 1940년대 전쟁을 끝나고, 영국은 희망의 시대가 시작됩니다. 고용이 증가했고, 국가의 의료서비스가 마련되었습니다. 다양한 소비재가 처음으로 상점 진열장에 등장했습니다. 더 많은 어린이들이 학교를 다니고, 문법을 공부했습니다.텔레비전이 라디오를 대체해갔고, 로큰롤이 탄생했습니다. 엘리자베스 2세의 즉위는 영광과 번영의시대가 시작됨을 의미했습니다. 천년이 넘게 계속된 역사를 보여주는 대관식은 희망찬 드라마였습니다.

여왕은 또한 수세기의 전통을 깨고 흰색 대신, “영연방 국가를 대표하는 모든꽃을 수놓은 드레스를 입었습니다. 웨일스의 상징인 부추, 캐나다 단풍잎, 스코틀랜드 엉겅퀴, 인도 연꽃 및 튜더 장미가 포함되었습니다. 엘리자베스의 대관식은 영연방 모든 사람의 마음을 담았습니다. 모두가 여왕이 어떻게 영연방을 유지할 것인지 궁금해했습니다.

엘리자베스는 대관식을 마친 후 저녁에 방송을 통해 영국민의 지원에 감사드리고, 국가에 봉사하겠다고 약속합니다. 왕가는 특별한 과거와 연결하고 군주제의 지속을 정당화하기 위해 말하자면 행사의 순간이 필요합니다. 이벤트의 목적은 관객감동이고, 엘리자베스는 본능적촉이 있습니다. 찰스 3세는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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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는 어떻게 다수파가 되는가

프랭클린 루스벨트와 뉴딜 연합문재인대통령은 7월 16일 한국판 뉴딜은 포용국가의 토대 위에서 디지털 뉴딜과 그린 뉴딜의 두 축으로 추진할 것이라고 연설했습니다.이번 주 뉴스레터는 크리스티 앤더슨의 ‘진보는 어떻게 다수파가 되는가'(이철희 역)의 책을 소개합니다.

1932년 미국 대선에서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당선되었습니다. 
루스벨트는 대공황 위기에 빠진 미국을 건지기 위해 뉴딜를 선언합니다. 그리고 1945년까지 대통령을 맡아 미국 민주당을 다수파가 되도록 이끌었습니다.앤더슨의 책은 공화당중심 정치 지형에서 민주당이 다수파로 자리잡은 현상을 ‘전향’과 ‘동원’의 관점에서 분석합니다.한국의 더불어 민주당도 미국 민주당처럼 박근혜 탄핵을 계기로 정권을 잡았고, 이어 대공황 못지 않은 코로나를 계기로 다수파가 되었습니다.

더불어 민주당이 한국판 뉴딜 연합을 통해 앞으로 수십년을 지배하게 될지, 아니면 철학과 전략 부재로 인해 그런 기회를 놓칠지 자못 궁금합니다.앤더슨 책에서 실마리를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사회경제적 약자를 투표장으로 이끈 정치 전략1.1896년부터 대공황까지 미국 정치는 공화당이 권력을 독점하고 있었다.  민주당은 소멸을 걱정해야 할 만큼 존재감이 없었다. 중간에 민주당의 우드로 윌슨이 집권하긴 했지만 공화당의 분열에 따른 어부지리였을 뿐이다. 

2.프랭클린 루스벨트의 민주당이 대공황을 계기로 대통령선거에서 승리해 집권한 뒤 다수파로 변신하는 데 성공하고, 30여 년간 민주당 전성시대를 열었다. 민주당은 1932년 대선부터 1968년 대선까지 10번의 대선에서 7번 승리했으며 의회에서는 언제나 다수당이었다.

3.민주당 장기 집권에 대한 기존 분석은 “불황으로 말미암아 공화당 지지자 수백만 명이 민주당 지지자로 돌아섰다”는 ‘전향’론이었다.4.1920~36년 사이 대통령 선거에 참여한 전체 투표자 수가 70%나 증가했다. 또 1936년 투표자의 약 40%는 1920년 이후 처음으로 투표한 시민들이다. 이는 새로운 투표자들이 압도적으로 민주당을 지지했다는 ‘동원’설을 뒷받침한다.

5.투표에 많이 참여한 사람일수록 단기적인 정치적 자극으로부터 영향 받을 가능성이 작은 ‘면역’ 유권자다. 이에 비해 기존 정당 체계를 경험하거나 공감하는 바가 거의 없는 층은‘비면역’ 유권자에 해당된다. 6.프랭클린 루스벨트는 1932년 대선에서 흑인과 여성 ,이민자, 청년 등 비면역 유권자들을 투표장으로 이끌었다. 루스벨트의 사회 통합론이 이들을 움직였던 것이다.7.루스벨트가 주도한 뉴딜 연합은 대공황의 폐해를 가장 많이 보고 있는 사회경제적 약자들, 즉 ‘잊힌 사람들’의 삶을 보살피는 정책들을 통해 이들의 안정적 지지를 얻음으로써 만들어졌다. 사회적 가치를 부각시켜 새로운 지지층을 동원하는데 성공한 것이다.8.한국에서 빈번히 인용되지만 늘 오해되고 있는 단어가 바로 ‘뉴딜’이다. 뉴딜은 진보를 표방한 정치 세력이 다수 연합을 형성하는데 성공하고, 그 결과 큰 변화를 이루어 낸 정치 전략이자 기획으로 이해되어야 한다.(역자 이철희)9.집권한 진보가 해야 할 일은 권력과 예산으로 뒷받침되는 정책을 통해 사회경제적 약자의 삶을 개선하고, 그들이 진보의 정치적 기반이 될 수 있도록 결속시켜야 한다. 또 새로운 갈등, 균열 또는 프레임을 설정해 정치 사회적 질서를 재편함으로써 다수 연합을 구축해야 한다.(역자 이철희)10.민주주의는 정치를 통해 세상을 바꾸는 것이다.  뉴딜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한국의 진보가 정치적 무능에서 벗어나기 위해 필요한 지적 각성제다.(역자 이철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