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 4월 26일,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
소련시대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에서 세계 최악의 원자력 발전소 사고가 발생합니다. 스웨덴 당국이 낙진을 보고한 후에야 소련 당국은 마지못해 사고가 발생했음을 인정했습니다.
체르노빌기지는 우크라이나 키예프에서 북쪽으로 약 65마일 떨어진 곳에 있었습니다. 1970년대 말 프리피야트 강둑에 건설된 체르노빌에는 4개의 원자로가 있었습니다. 초보적 수준의 엔지니어 그룹이 원자로에서 무모한 실험을 했고, 폭발과 이어진 화재로 인해 50톤 이상의 방사성 물질이 대기 중으로 방출되었습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의 몇 배나 되는 대기 중으로 빠져나간 방사선은 바람을 타고 북유럽과 동유럽으로 퍼져 수백만 에이커의 숲과 농지를 오염시켰습니다. 약 5,000명의 소련 시민이 결국 체르노빌 방사능 노출로 인한 암 및 기타 방사선 유발 질병으로 사망했으며 수백만 명이 건강에 악영향을 미쳤습니다. 2000년에 체르노빌의 마지막 가동 원자로가 폐쇄되었고 발전소는 공식적으로 폐쇄되었습니다.
1954년 4월 26일, 제네바 회담 개최
제네바 회담( 1954년 4월 26일부터 6월 15일)은 두가지 현안을 해결하기 위한 회담이었다. 첫째는 군사적 합의인 정전협정을 대체하는 한반도 평화협정의 체결이며, 둘째는 주제는 베트남 분단 협약이었다.
50여 일간 한국의 통일 문제에 대해 나올 수 있는 거의 모든 방안이 거론되었다. 외국군 동시 철수, 남북한 동시 선거를 논의했다. 평화체제의 모습이나, 경제협력에 대해서도 논의했다. 그러나 다람쥐 체바퀴 돌듯 논쟁만 계속되었다. 한반도 평화협정은 아무런 합의도 이루지 못한 채 결국 막을 내렸다.
이에 비해 베트남을 분단하여 통치하는 것을 논의하는 인도차이나 문제의 경우, 이 회의체는’ 제네바 합의’라 불리는 결과문을 만들어냈다.
1859년 4월 25일, 수에즈운하 착공
수에즈운하에 대한 최초의 진지한 조사는 18세기 말 나폴레옹의 프랑스가 이집트를 점령하는 동안 시작돼습니다. 나폴레옹은 고대 운하의 유적을 조사했고, 프랑스는 운하에 대한 추가 연구를 진행합니다. 마침내 1854년 프랑스는 이집트 총독과 운하 건설 계약을 체결하고, 1856년 수에즈 운하 회사가 설립됩니다. 그 회사는 공사 완료 후 99년 동안 운하 운영권을 보장받았습니다.
처음 공사는 이집트인 노역자들이 땅을 팠고. 나중에 준설선과 장비를 동원해 공사를 했습니다. 노동 쟁의와 콜레라 전염병으로 공사가 지연되어, 예정보다 4년이나 늦어진 1869년 11월에 수에즈 운하는 공식개통합니다. 운영 첫해에 500 척 미만의 선박이 항해했고, 이후 대대적인 개선을 해 운하는 가장 붐비는 선박 항로로 성장했습니다.
1875년 영국은주식을 사들임으로써 수에즈 운하 회사의 최대 주주가 됩니다. 1882년 영국은 이집트를 침공하여 이집트를 점령합니다. 1936년 영국-이집트 조약은 이집트를 사실상 독립시켰지만, 영국은 여전히 운하에 대한 권리는 놓치않았습니다. 나세르가 집권한 후 1956년 7월 운하를 국유화합니다. 그러자 10월에 이스라엘이 침공하고, 곧이어 영국과 프랑스군은 운하를 점령합니다. 유엔의 압력으로 영국과 프랑스가 ,이어 이스라엘군이 철수합니다.
10년 후 이스라엘의 시나이 반도 점령 이후 다시 운하를 폐쇄합니다. 우여곡절 끝에 1975년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이 평화의 표시로 수에즈 운하를 재개방했습니다. 오늘날 수십 척의 선박이 매일 운하를 항해하며 연간 3억 톤 이상의 상품을 운반하고 있습니다.
2006년 4월 25일, 노무현대통령 담화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독도는 우리 땅입니다. 그냥 우리 땅이 아니라 40년 통한의 역사가 뚜렷하게 새겨져 있는 역사의 땅입니다. (……)지금 일본이 독도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제국주의 침략전쟁에 의한 점령지 권리, 나아가서는 과거 식민지 영토권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한국의 완전한 해방과 독립을 부정하는 행위입니다. 또한 과거 일본이 저지른 침략전쟁과 학살, 40년간에 걸친 수탈과 고문, 투옥, 강제징용, 심지어 위안부까지 동원했던 그 범죄의 역사에 대한 정당성을 주장하는 행위입니다.
우리는 결코 이를 용납할 수 없습니다.우리 국민에게 독도는 완전한 주권회복의 상징입니다. 야스쿠니신사 참배, 역사교과서 문제와 더불어 과거 역사에 대한 일본의 인식, 그리고 미래의 한일 관계와 동아시아의 평화에 대한 일본의 의지를 가늠하는 시금석입니다.
일본이 잘못된 역사를 미화하고 그에 근거한 권리를 주장하는 한, 한일 간의 우호관계는 결코 바로 설 수가 없습니다. 일본이 이들 문제에 집착하는 한, 우리는 한일 간의 미래와 동아시아의 평화에 관한 일본의 어떤 수사도 믿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어떤 경제적인 이해관계도, 문화적인 교류도 이 벽을 녹이지는 못할 것입니다.
이제 정부는 독도문제에 대한 대응방침을 전면 재검토하겠습니다. 독도문제를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 야스쿠니신사 참배문제와 더불어 한일 양국의 과거사 청산과 역사인식, 자주독립의 역사와 주권 수호 차원에서 정면으로 다루어 나가겠습니다.
물리적인 도발에 대해서는 강력하고 단호하게 대응할 것입니다. 세계 여론과 일본 국민에게 일본 정부의 부당한 처사를 끊임없이 고발해 나갈 것입니다. 일본 정부가 잘못을 바로잡을 때까지 국가적 역량과 외교적 자원을 모두 동원하여 지속적으로 노력할 것입니다.그밖에도 필요한 모든 일을 다 할 것입니다. 어떤 비용과 희생이 따르더라도 결코 포기하거나 타협할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주디 갈런드 (1922-1969)
1939년 8월, 역사상 가장 사랑받는 영화 될 ‘오즈의 마법사’가 미국 전역에서 개봉합니다. 17세의 주디 갈런드도 뮤지컬 영화 배우로의 경력을 공식적으로 시작합니다. 주디는 세살부터 두 언니와 함께 이미 ‘검 시스터즈’로 활동했습니다. 도로시 역을 맡은 주디는 첫 장면부터 관객들을 매료시켰습니다. 그녀가 부른 ‘오버 더 레인보우’는 누구나 아는 노래가 됩니니다. 주디는 아카데미 등 온갖 상을 받으며, 할리우드에서 사랑 받는 아이콘으로 자리 잡습니다.
열 일곱 부터 스타였던 주디는 다른 어떤 것이 될 줄 몰랐습니다. 헐리우드의 스트레스는 그녀를 육체적으로 파괴하고 신경 쇠약으로 이어졌지만 여전히 그녀에게 행복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녀의 아이콘으로서의 위상은 너무나 커서 그녀의 목소리와 몸이 쇠약해져도 팬들을 위한 퍼포먼스를 멈출 수 없었습니다. 공연에 대한 스트레스는 그녀를 죽음으로 이끈 비극이기도 하지만, 멈출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그녀가 아이콘으로 살아가는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비평가들의 극찬을 받은 1954년 영화 “스타탄생”은 뮤지컬 영화 배우로서 주디의 명성을 새롭게 했습니다. 1961년 4월의 주디의 카네기 홀 공연은 “연예계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밤”이라고 불리웁니다. 공연은 라이브로 녹음되었고, 미국 앨범 차트에 95주(1위 13주 포함)동안 자리를 지켰습니다. 수백만장의 레코드를 판매합니다. 주디는 이제 위대한 가수의 반열에 오릅니다.
도로시가 된지 30년 지나, 주디의 삶은 점점 수렁에 빠집니다. 오즈의 마법사를 촬영할 때 제작진은 각성제와 수면제를 권했고,영화촬영을 끝냈을 때 그녀는 이미 마약 중독자였습니다. 그 후, 주디의 삶이었던 세 자녀, 다섯 번의 결혼, 모두 비극으로 끝납니다. 40대 중년이 된 주디는 점점 더 몰락해 갑니다.
주디는 경력에 차질이 생길 때마다 항상 컴백 무대를 만들었습니다. 살이 찔 때마다 살을 빼는 데 집중했습니다. 그녀는 행사를 취소할 때마다, 그것을 만회하기 위해 긴 콘서트를 열었습니다.주디가 빛나는 순간은 무대 위였고, 무대에서 내려오는 순간 두려움에 떠는 아이였습니다. 이젠 정착할 집조차 없어 전 남편에게 양육권마저 빼앗길 위기에 처합니다. 마침, 그때 런던 웨스트엔드의 알려진 클럽인 ‘Talk of the Town’에서 초청을 받고 공연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주디는 아이들이 보고 싶은데다가 불면증에 시달리면서 술과 약물에 절어 리허설도 거절하고 첫 공연도 떼밀리다시피 무대에 오릅니다. 내면의 개인적 악마와 다툼을 벌이는 처지라 공연이 잘 될 리가 없었고, 관객들로부터 야유를 받습니다. 그러나 일단 노래를 시작하면 그의 열창은 완전히 무대와 관객을 사로잡습니다. 런던에서 수일간 이어진 콘서트 무대에서 그는 술에 취해 비틀대면서도 진심을 다해 노래를 부릅니다. 그리고 얼마지나지 않아 약물 과다복용으로1969년 47세로 그녀는 떠납니다. 그녀의 마지막 공연은 1969년 3월 25일 덴마크 공연입니다.
연극 “무지개의 끝”을 각색한 영화 ‘주디’는 무대를 사랑하는 주디에 집중합니다. 무대는 주디에게 이중적인 공간입니다. 노래 부르며 쇼를 보여주는 것은 주디가 좋아하고, 재능을 가진 일입니다. 동시에 어린 시절에 학대 받으며 해야 했던 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주디는 무대를 사랑하면서도 무서워합니다. 그녀의 내면은 불안했고, 청중이 열광할 때 그나마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영화’주디’는 말합니다. 주디는 악의와 풍자의 시선에서 보호 받아 마땅했던 배우였다고…그녀를포옹하는 마음으로 배우 ‘르네 젤위거’는 그녀의 역할을 맡았습니다. 주디가 되어 살았던 르네는 ‘주디’가 겪은 삶의 굴곡을 말합니다. 그녀의 인생 사이사이 빈 공간에 존재하는 감정과 이런 삶을 사는 것에 대한 의미까지도 생각할 수 있게 해주었다고…
르네 젤위거는 그녀가 살았던 주디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주디 갈런드’와 같은 사람은 정말 쉽게, 힘 하나 들이지 않고 무대를 소화했기에 내가 어느정도까지 노력을 해야만 그 정도의 수준까지 도달할 수 있을지는 가늠이 가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주디 갈런드’와 같은 수준의 노래를 몇 년 동안 지속적으로 전달한다는 것이 얼마나 신체적인 부담을 주는지 모를 것이라고 생각한다.”
“주디 갈런드가 인생을 걸쳐 겪은 최악의 순간들을 맞이하게 되었을 때 그녀처럼 노래 할 수 있을지 고민해봤다. 그녀의 인생에서 최악의 도전을 해야하는 때, 그녀를 압도하는 순간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최악이었다. ‘주디 갈런드’가 겪어내는 모든 순간들을 보면 우린 그나마 운이 좋다고 생각 할 수 있겠다.”
1980년 4월 24일, 독수리발톱작전
1979년 1월 이란의 팔레비 국왕이 이집트로 망명합니다. 1977년 부터 지속된 팔레비 국왕에 반대하는 시위 때문입니다. 이후 거리의 전투에서 반대파가 승리하면서, 이란은 1979년 4월 이슬람 공화국을 선포합니다. 그렇지만, 이란의 혁명은 단순히 이슬람 세계로 돌아가자는 종교혁명이 아닙니다. 서로 다른 결의 이데올로기들의 정치 혁명이자, 자주 공화국을 이상으로 삼습니다.
이후 카터 정부가 신병치료를 위해 팔레비를 미국에 입국하도록 허락합니다. 이에 이란 민족주의자들은 테헤란 주재 미 대사관을 점거하고 미국인 52명을 인질 삼아 팔레비의 신병 인도를 요구합니다. 그러나, 미국은 이를 거부합니다.
이란 인질 위기가 6개월째 이어지면서 외교적 노력도 실패로 끝나자, 카터 대통령은 인질 구출을 위해 ‘독수리 발톱’이라 명명된 군사작전을 지시합니다. 그러나 군사작전은 참담하게 실패합니다. 작전 중 헬리콥터 8대 중 3대가 고장나 작전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합니다. 후퇴하는 미군 8명이 사망하고, 인질은 한 명도 구하지 못하고 끝납니다. 결국 여론은 최악으로 치달았고, 레이건에 완패해 백악관을 떠납니다.
1937년 4월24일, 전화개설수 총 5,000대
1885년 서울과 인천을 잇는 한국 최초 전신선이 개통됐으며 한성정보총국이 이를 관리했다. 한국의 첫 전화기는 특별한 사람들만 사용했고, 1896년 고종이 그 주인공이다.특히, 고종은 인천 감리에게 직접 전화해 백범 김구 선생 사형 집행을 중지시키기도 했다. 서울과 인천 사이 전화가 가설된 것은 사형 집행 불과 사흘 전이었다. 당시 전화를 사용하려면, 교환기가 필요했다. 교환기는 사람이 직접 회선을 손으로 접속하는 수동식 교환 방식이었다. 마지막 황태자 의친왕은 교환원과 사랑에 빠져, 후실로 들이기도 했다.
한일 통신협정을 강제 체결한 후, 1905년이후 일제시대 전화는 특권의 대상이었다. 전화를 가입하기 위해선 지급전화 신청서를 제출하면 체신국에서 매년 설정한 지급전화 가입신청 순번에 의해 전화를 가설해 주었다. 물론 늘 수요가 넘쳐, 공급이 따라가지 못했다. 그래서, 전화선의 가설 등의 일체비용을 가입자가 직접 부담하면 가설해 주는 ‘특설전화’ 제도가 있었다.
1937년에는 전화개설 수가 총 5천대였고, 그중 1380대는 경성의 개설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