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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본성의 선한천사 vs. 악한천사


스티븐 핑커의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는 한마디로 인류 역사에서 폭력은 꾸준히 감소했다고주장합니다. 계량역사학이 정리해 놓은 방대한 수치, 그리고 심리학과 게임이론, 뇌과학 등 연구 성과를 인용해 그 근거를 제시합니다. 그의 계몽주의적 진보론은 다양한 분야의 학자들로부터 광범위하게 비판받아왔습니다. 역사학계도 증명하려는 스티븐 핑거의 주장에 비판적입니다.

핑거의 주장은 본래 노베르트 엘리아스의 것입니다. 그에게 문명화란 ‘폭력을 순화하고 예의가 존중되는 사회’입니다. 스티븐 핑커는 서구 문명과 자본주의가 본질적으로 폭력적이고, 불평등하고, 부정의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핑커에 따르면, 폭력은 말하자면 일탈 현상입니다. 스티븐 핑커는 ‘폭력이 줄어든다는 주장’을 데이터로 증명하려고 했습니다. 자연스럽게 그의 통계적 증거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까지 있습니다. 그는 때로 반대증거를 무시하거나,매우 취약한 정량적 증거를 근거로 광범위한 결론을 내립니다.

일찍이 지그문트 바우만은 현대문명의 비폭력성을 환상이라고 말합니다. “문명화 과정에서 일어난 것은 폭력의 재배치”라고 합니다. 폭력의 존재가 없어진 것이 아니라 단지 시야에서 사라졌을 뿐이라고 말합니다. 인류 역사에서 폭력이 줄어든 것처럼 보이는 것은 착시 현상이라고 합니다. 유사 이래 지속된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을 종식하기 위해, 개인의 무력 행사권을 국가에 일임한 것이 근대의 시작입니다. 부부 싸움에 국가가 개입할 수 있는 근거가 거기 있습니다.

폭력을 독점적으로 소유한 국가는 관료제·자본·기술과 연계하여 상비군을 창설합니다. 지난 2세기 동안 국가의 이름으로 벌어진 전쟁의 사망자는 그 전세기의 전쟁에서 생긴 사망자를 모두 합한 것보다 많으며, 폭력이 관료제의 일부가 됨으로써 오히려 합리화되는 경향을 낳았습니다. 인간 본성 속의 천사가 내면의 악마에게 승리를 거두었다면, 돌도끼와 활로 무장을 했던 미개인보다 핵무기와 미사일로 무장을 한 현대인이 천사에 더 가까운 것일까요?!


역사학자들은 폭력의 심원한 역사를 연구하는 것에 전적으로 찬성합니다. 다만 이 폭력의 역사에서는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를 역사의 최전선과 중심에 두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문제는 ‘이러저러한 시기는 얼마나 폭력적이었나’가 아니라 ‘이러저러한 시기는 어떻게 폭력적이었는가’를 설명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 본성의 악마와 그 악마를 부추기는 힘도 섬뜩하게 설명합니다. 우리 안의 악마를 억누르고 천사를 북돋우려면 정교한 사회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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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미유피사로, 몽마르뜨거리에 내리는 봄비

카미유 피사로는 덴마크출생하고 파리에서 활동한 인상파 화가입니다.  말년의 피사로는 야외로 나가는 대신 파리의 풍경화를 그립니다. 2월부터 4월까지, 파리의 봄을 주제로 한 14점의 연작을 그립니다. 그는 계절과 시간에 따라 달라지는 파리를 포착했습니다.

가로수는 푸릇해 봄을 알리지만, 우산을 쓴 파리는 왠지 쌀쌀해 보입니다. 봄비내리는 서울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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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3년 리치몬드 빵폭동

남북전쟁이 한창인, 1863년 4월2일에 남부의 수도인 리치먼드에서 총과 돌을 든 여성노동자 수백 명이 거리로 나섰습니다. 이유는 단순합니다. 식량을 살수가 없어서… 전쟁중에 인플레이션과 남부의 통화 약세로 인해 빵 가격은 5배나 뛰었습니다. 게다가 1863년 3월 남부군이 필요에 따라 식량과 기타 보급품을 압수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한 ‘인상법’을 통과시켜 상황을 악화시켰습니다. 

1863년 부활절 주간의 목요일인 4월 2일에 수백 명의 여성(및 일부 남성)이 리치몬드의 거리로 나왔습니다. 약간의 부상자가 보고되긴 했지만 폭동이라기보다는, 그야말로 배고파서 일어난 시위였습니다. 그들은 식품이 보관된 창고와 식료품점 등을 급습했습니다.폭동의 주동자라고 알려진 잭슨은 34세의 네 아이의 엄마이자 노천 시장에서 일하는 행상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리치몬드의 지도자들은 여성의 시위를 경시하고 ‘폭도’ ‘사회의쓰레기’로 비난하기 바빴습니다.

빵 폭동은 진정됐으나 여파는 계속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식량부족을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비축한 식량자체가 부족해서, 군인도 민간인도 배고픔을 참아야 했습니다. 반면 북부의 군대와 주민들은 비교적 풍족한 식단을 누렸습니다.극심한 경제난에도 불구하고, 남부는 연속해 무리수를 두었습니다. 병력을 채운다며 징병 대상자를 늘렸고, 농사할 인력이 없는 상황에서, 식량부족을 더 악화시켰습니다. 남부의 패배는 무엇보다 식량부족이 아니었을까요?

이후 시위 참가자들은 재판에 회부되어 폭동죄로 기소되었지만, 100명 미만이 처벌을 받았다고합니다. 나이가 많고 가난한 많은 여성들이 유죄 판결을 받았지만 더 젊고 옷을 잘 입는 여성들은 그렇지 않았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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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년 4월 18일, 샌프란시스코 지진

 4월 18일 오전 5시 13분, 리히터 규모 8.0으로 추정되는 지진이 샌프란시스코를 강타했습니다. 수많은 건물이 무너지면서 약 3천명이 사망했습니다. 지진의 충격파는 오레곤 남부에서 로스앤젤레스까지 느껴졌습니다.

샌프란시스코의 벽돌 건물과 빅토리아 시대 목조 건물은 특히 황폐화되었습니다. 화재는 즉시 발생했고, 곧 도시전체로 화재 폭풍이 번져갔습니다. 샌프란시스코 시장은 황혼부터 새벽까지 통금 시간을 시행했고, 약탈자는 총살할 수 있도록 승인했습니다. 한편, 심각한 여진에 직면한 소방관과 미군은 화재를 진압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웠다. 방화벽을 만들기 위해 도시 전체를 다이너마이트했습니다. 4월 20일, 대규모 화재로 갇힌 수천 명의 난민들이 대피했습니다. 군대는 결국 도시 전역에 걸쳐 20개 이상의 군대식 텐트 캠프에 2만명의 난민을 수용하게 됩니다.

4월 23일까지 대부분의 화재가 진압되었습니다. 당국은 폐허가 된 대도시를 재건하는 작업을 시작합니다. 샌프란시스코 대지진과 그로 인해 도시가 파괴된 화재로 인해 약 3천여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주택과 빌딩 포함하여 3만채의 건물이 파괴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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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윤복, 봄빛이 전원에 가득하다.

연두색 저고리 여인이 오랜만에 봄나물을 캐어왔습니다. 솔나무 잎 끝에도, 잡목가지 끝에도 여린 연두빛 새순이 돋고 있습니다. 오랜만에 맞은 봄빛아래, 두남녀가 바구니를 잡고 실랑이 하네요.. 아름다운 봄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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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키 로빈슨

1947년 4월 15일, 28세의 재키 로빈슨은 브루클린 다저스 유니폼을 입고 메이저리그 무대에 등장합니다. 메이저 리그의 첫 아프리카계 미국인 선수가 되었습니다. 그날 2만 7천명의 관중석에는 흑인 관중이 1만 4천명에 달했습니다.  50년 후인 1997년 4월 15일,그를 기념하는 행사가 뉴욕 스타디움에서 열립니다. 로빈슨의 등번호 42는 오직 로빈스만을 위한 것이라 선언합니다.  

로빈슨은 물론 뛰어난 운동선수입니다. 재키는 UCLA 재학 중에서 야구, 농구, 미식축구, 육상의 4개 스포츠에서 선수로 초청 받았습니다. 베를린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획득한 그의 형의 멀리뛰기 기록도 경신합니다. UCLA미식축구 팀에서도 패스, 돌진 및 득점 부문에서 선두였습니다. 그럼에도 로빈슨은 재정적인 어려움으로 UCLA를 중퇴해야했고, 1942년에 군에 입대하여 중위로 임관했습니다. 그는 군 복무 중 인종 차별 사례에 항의한 후 1944년에 군법회의에 회부되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명예 제대했습니다.

프로야구에서도 올해의 신인상, MVP 및 6회 올스타 자격을 보유했습니다. 그는 관중을 끌어모아, 열광케 하고, 흑인도 갈 수 있는 길을 보여주었습니다. 로빈슨은 50년 이상 인종 차별을 받아온 스포츠에서 인종 장벽을 허물었습니다. 그의 재능과 성공에도 불구하고 로빈슨은 야구팬과 동료 선수들로부터 엄청난 인종 차별에 시달렸습니다. 동료선수들은 로빈슨을 팀에서 제외시켜 달라는 청원도 했습니다. 로빈슨이 남부에서 경기하는 동안, 팀 동료와 동일한 호텔과 레스토랑을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인종차별의 사례는 헤아릴수 조차 없이 많습니다. 그의 진정한 힘은 그 모욕적인 인종차별에 직면하여, 굳건한 인내로 대항했다는 것입니다.

로빈슨의 인내는 그를 메이저리크에 스카웃한 브랜치 리키 다저스 단장과의 약속입니다. 그를 발탁하면서 다저스 단장은 “인종적 모욕을 참을 수 있느냐”고 질문합니다.일상적인 조롱과 위협에서 광범위한 제도적 불평등에 이르는 뿌리 깊은 인종차별을 이야기합니다. 특히 가경기장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욕적인 사례를 이야기하고 어떻게 대항해야하는지 말해줍니다. 단장은 “부당한 대접도 감수하겠다”는 다짐도 받냈습다.

평생 인종차별을 겪은 로빈슨은 단장에게 침착함을 유지하겠다고 약속합니다. 브랜치 리키는 인종차별을 반대하는 운동가는 아닙니다. 다만 그는 뛰어난 운동 능력을 지닌 흑인 선수들을 뛰지 못하는 하는 불합리한 통념에 의문을 제기했을 뿐입니다. 그가 야구에 몰고 온 혁신은 ‘재키 로빈슨’ 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리그가 시작되자 로빈슨에게 곧바로 공격이 가해집니다. 잔인한 인종 차별적 조롱은 그나마 괜찮은 것이었고, 그는 데뷔후 고의적인 투구에 여러차례 투구에 맞았습니다. 배팅 헬멧이 도입되기 전, 로빈스는 모자안쪽에 금속판을 덧대어 대응합니다. 선수들은 그를 쫓아내기 위한 청원도 합니다.  미국 대중은 로빈슨에게 팬 메일, 증오 메일, 사인 및 출연 요청, 살해 위협을 쏟아부었습니다. 그의 안전은 결코 보장되지 않았습니다.

널리 알려진 공인으로서 로빈슨은 다양한 영역에 휘둘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의제를 발전시키기 위해 흑인 커뮤니티에서 그의 상징적인 지위를 활용하기를 열망했습니다. 리차드 닉슨 등 정치인, 마틴 루터킹 등 시민 운동가, 다양한 사업가들과 함께 활동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진정한 의미는 재능있는 흑인 젊은이에게 기획의 문을 열어주었다는 것입니다. 흑인계 미국인들은 그의 성공과 그것이 상징하는 기회에 열광했습니다. 다양한 운동분야에서이제 재능있는 운동선수들이 발탁할 수 있는 문을 열어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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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4월17일,미국 피그만 공격

1959년 1월, 피델 카스트로는 혁명에 성공한다. 플로리다 주에서 90마일밖에 떨어지지 않는 쿠바의 사회주의 정부는 미국입장에서는 눈에 가시일 수밖에 없었다. 미국 중앙정보국은 카스트로 암살과 정권전복을 위한 비밀작전을 준비했다. 그러나 쿠바의 피그만에 침투한 특공대의 작전은나 나흘만에 처참한 실패로 끝났다.1400여명의 특공대원들 중 200명이 현장에서 숨지고, 나머지는 모두 생포됐다. 비밀해제된 보고서는 “중앙정보국의 무지, 무능, 오만으로 작전이 실패했다”고 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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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쉬와 세계대전

오늘날과 비슷한 초코릿제품은 1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 군인들을 위한 초콜릿 배급에서 시작되었습니다.미군도 그 뒤를 따랐고, 전쟁이 끝난 후 돌아온 군인들은 초콜릿이나 캔디바로 불리는 단것들을 전파합니다. 1920년대 내내 이런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수천 명의 소규모 지역 제과업체가 등장합니다. 냉장과 운송 문제는 전국적인 유통의 장벽으로 남아 있었기 때문에 지역 브랜드가 각 시장을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밀턴 허쉬(1857년~1945년)는 1893년 시카고 만국박람회에 전시된 독일인 리먼의 초콜릿 제조기계를 보고, 초콜릿 사업에 뛰어들었습니다. 캐러맬 사업을 하던 허쉬는 캐러멜에 초콜릿 코팅을 할 수 있는 기계를 구매합니다. 허쉬는 덴버의 가게에서 일하며 신선한 우유와 바닐라와 설탕으로 캐러맬은 만드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그렇지만 밀크 초코릿을 만드는 것은 캐러맬과 달랐습니다. 그는 실패를 계속 했습니다.  핵심은 초코릿에 액체인 우유를 넣어야 하는데, 초콜릿은 고체여야합니다. 마침내 탈지우유를 설탕과 잘 섞어 엿처럼 만들수 있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밀크 초코릿이 ‘허쉬 코코아’입니다.

제조의 난제를 풀어냈지만, 그래도 그의 진정한 경쟁력은 대량생산의 성공입니다. 대량생산의 경쟁력은 무엇보다 가격에서 나옵니다. 당시 원가에서 제일 비싼 것은 카카오였고, 허쉬는 우유와 설탕의 비중을 높여 가격을 낮추어습니다. 뿐만 아니라 안정적인 재료 확보, 전국 적 유통망을 만들어냅니다. 1899년에 허쉬는 초콜릿 대량 생산을 위한 최초의 공정을 개발했습니다. 이듬해 그는 유럽의 쓴 초콜릿 맛을 선호하지 않는 미국인의 입맛에 맞춘 밀크 초콜릿 캔디바를 선보였습니다. 

이후 1900년대에 출시된 ‘허쉬초콜릿’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밀크초콜릿은 그 풍미와 질감, 달콤함까지 기존의 초콜릿과는 비교불가였습니다. 무엇보다 보통사람이 살 수 있는 가격이었습니다. 허쉬는 이 과자에 “Great American Chocolate Bar”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이제 초코릿은 부자들만 즐길 수 있는 사치품이 아니라, 대중들이일상적으로 즐길 수 있는 제품이 되었습니다. 마치 포드자동차 처럼, 식품산업에서도 진정한 미국적 생산방식을 만들어냈습니다.

그런데 곧 닥친 대공황은 초콜릿 골드러시를 늦추었습니다. 빠른 에너지와 저렴한 칼로리가 필요했던 시대에, 캔디바가 패스트푸드가 되었습니다. 독립적인 지역 제과업체도 사업을 접거나, 더 큰 제조업체에 인수되었습니다. 그래도 허쉬만은 살아남을 수있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 발발하면서 식량난은 더욱 심화되었습니다. 군대는 대형제조사에게 초콜릿 배급을 의뢰하여 지역 캔디바 붐을 종식시켰습니다. 군대는 칼로리뿐만 아니라 각성도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1937년 미 육군은 허쉬에 바형태의 초코릿” 을 주문합니다. 요구사항은 “4온스의 무게, 높은 에너지, 고온에 녹지않아야 하며, 삶은 감자보다 맛이 조금 더 좋아야”한다.  

허쉬는 귀리 가루 등을 조합하여 초콜릿 바를 마치 벽돌처럼 만들었습니다. 고온에 견딜 수 있게 만들어졌기 때문에 초코릿바는 매우 단단했고, 칼로 조각내어야 먹을 수 있다고 합니다. 제 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무렵, 허쉬는 30억 개 이상의 배급 바를 제조했습니다. 2차대전 중 유럽과 아시아에 주둔한 미국PX에서 허쉬바를 팔았습니다. 허쉬 초코릿은도 세계적 인 브랜드로 성장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제조, 운송 및 냉장 기술이 발전합니다. 이제 지역에 있는 제과업체는 더욱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대기업은 중소기업을 사들여 전국 배급망을 제공하게 됩니다. 오늘날 미국에 남아있는 “빅 쓰리” 초콜릿브랜드는 허쉬, M&M을 만드는 마즈, 네슬레가 시장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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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4월 14일, 아카데미 첫 생중계

1969년 4월 14일, 제41회 아카데미 시상식이 전 세계에 최초로 생중계됩니다. 37개국에서 아마데미 시상식을 시청했습니다.

30여년 만에 여우주연상도 처음으로 공동수상합니다. “겨울의 사자 “에서 아키텐의 엘레노어 역을 맡은 캐서린 헵번과 “퍼니 걸” 에서 데뷔한 바브라 스트라이샌드에게 돌아갔습니다.두 여배우는 각각 3,030표를 받았습니다. 주요 오스카 부문에서 처음으로 정확한 동점이었습니다. 또 다시 받을 거라고는 생각치 못한 헵번은 시상식에 불참했습니다. 바브라 스트라이샌드는퍼니걸의 오프닝대사 독무대에서 “안녕, 멋져”로 수상소감을 말하며, 금빛 오스카를 수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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