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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9년 4월 19일 바이런 사망하다.

바이런(1788~1824)은 어찌보면 왜 이리 유명한지 의아합니다. 그의 이름이 “Byronic”이라는 단어도 만들었습니다. 그 단어는 로맨틱 영웅을 상징합니다. 뿐만 아니라 버트란트 러셀의 ‘서양철학사’에도 그는 인용되었습니다. 사악한 귀족이던 종조부의 남작 작위를 승계한 이 시인이 “찬미할 자유란 독일 왕이나 체로키 인디언 추장의 자유이지, 일상의 평범한 사람들이 생각하거나 향유할 수 있는 열등한 자유가 아니었다” 그는 그만큼 특별했습니다.

그의 두권의 시집을 출판했고,  1809년에 학위를 받은 후 그는 2년 동안 포르투갈, 스페인, 근동을 여행했습니다. 그의 경험이 담은 ‘차일드 해롤드의 순례’ 등을 출판하여 주목을 끌었습니다. 그는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유명해졌습니다.” 그의 시, 매너, 패션, 취향은 널리 모방되었다. 결혼과 이혼, 방탕한 스캔들로 더 유명해졌습니다.

항상 자유주의 대의와 국가 독립을 열렬히 지지했던 바이런은 터키로부터 독립을 위한그리스 독립 전쟁을 지지했습니다. 그는 그리스에서 대의에 합류하여 군대를 훈련시켰고, 그곳에서 36세 생일 직후 사망했습니다. 오늘날에도 그는 그리스의 국가적 영웅으로 여겨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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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 첫인도 매장 오픈

다양한 인도언어를 구사하는 직원이 근무하는 인도 최초의 애플매장이 뭄바이에 문을 열었습니다. 애플 매장은 라자스탄의 석재와 델리의 목재 타일로 장식되었있습니다. 상대적으로 다른 나라의 애플매장보다 더 화려합니다. 이는 애플의 인도에 대한 높은 희망을 반영합니다.

인구 14억읜 인도는 소득이 올라가면서, 휴대폰도 업그레이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이폰의 시장점유율은 인도 스마트폰 시장의 5% 미만입니다. 그러므로 앞으로 수요가 빠르게 성장할 것으로 기대됩니다. 지난 2월 애플은 인도에서 두 자릿수 매출 성장을 기록했습니다. 팀쿡 도 “인도에 대해 매우 낙관적”이라고 말합니다.

뿐만 아니라 인도는 돋 아이폰의 제조공장이 될 것입니다. 현재 대부분의 애플 제품은 중국에서 만들어집니다. 그렇지만 코로나, 생산비용 증가, 미중갈등으로 인한 지정학적인 이슈때문에 중국은 이제 더이상 매력적인 생산기지가 아닙니다. 앞으로 2025년까지 아이폰의 4분의 1이 중국 밖에서 만들어 질 것이라고 합니다.  당연히 인도가 가장 큰 수혜자가 될 것입니다. 나렌드라 모디 총리는 금색 아이폰 모델을 이미 사용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인도에서 아이폰판매는 급성장할 것으로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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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본성의 선한천사 vs. 악한천사


스티븐 핑커의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는 한마디로 인류 역사에서 폭력은 꾸준히 감소했다고주장합니다. 계량역사학이 정리해 놓은 방대한 수치, 그리고 심리학과 게임이론, 뇌과학 등 연구 성과를 인용해 그 근거를 제시합니다. 그의 계몽주의적 진보론은 다양한 분야의 학자들로부터 광범위하게 비판받아왔습니다. 역사학계도 증명하려는 스티븐 핑거의 주장에 비판적입니다.

핑거의 주장은 본래 노베르트 엘리아스의 것입니다. 그에게 문명화란 ‘폭력을 순화하고 예의가 존중되는 사회’입니다. 스티븐 핑커는 서구 문명과 자본주의가 본질적으로 폭력적이고, 불평등하고, 부정의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핑커에 따르면, 폭력은 말하자면 일탈 현상입니다. 스티븐 핑커는 ‘폭력이 줄어든다는 주장’을 데이터로 증명하려고 했습니다. 자연스럽게 그의 통계적 증거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까지 있습니다. 그는 때로 반대증거를 무시하거나,매우 취약한 정량적 증거를 근거로 광범위한 결론을 내립니다.

일찍이 지그문트 바우만은 현대문명의 비폭력성을 환상이라고 말합니다. “문명화 과정에서 일어난 것은 폭력의 재배치”라고 합니다. 폭력의 존재가 없어진 것이 아니라 단지 시야에서 사라졌을 뿐이라고 말합니다. 인류 역사에서 폭력이 줄어든 것처럼 보이는 것은 착시 현상이라고 합니다. 유사 이래 지속된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을 종식하기 위해, 개인의 무력 행사권을 국가에 일임한 것이 근대의 시작입니다. 부부 싸움에 국가가 개입할 수 있는 근거가 거기 있습니다.

폭력을 독점적으로 소유한 국가는 관료제·자본·기술과 연계하여 상비군을 창설합니다. 지난 2세기 동안 국가의 이름으로 벌어진 전쟁의 사망자는 그 전세기의 전쟁에서 생긴 사망자를 모두 합한 것보다 많으며, 폭력이 관료제의 일부가 됨으로써 오히려 합리화되는 경향을 낳았습니다. 인간 본성 속의 천사가 내면의 악마에게 승리를 거두었다면, 돌도끼와 활로 무장을 했던 미개인보다 핵무기와 미사일로 무장을 한 현대인이 천사에 더 가까운 것일까요?!


역사학자들은 폭력의 심원한 역사를 연구하는 것에 전적으로 찬성합니다. 다만 이 폭력의 역사에서는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를 역사의 최전선과 중심에 두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문제는 ‘이러저러한 시기는 얼마나 폭력적이었나’가 아니라 ‘이러저러한 시기는 어떻게 폭력적이었는가’를 설명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 본성의 악마와 그 악마를 부추기는 힘도 섬뜩하게 설명합니다. 우리 안의 악마를 억누르고 천사를 북돋우려면 정교한 사회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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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미유피사로, 몽마르뜨거리에 내리는 봄비

카미유 피사로는 덴마크출생하고 파리에서 활동한 인상파 화가입니다.  말년의 피사로는 야외로 나가는 대신 파리의 풍경화를 그립니다. 2월부터 4월까지, 파리의 봄을 주제로 한 14점의 연작을 그립니다. 그는 계절과 시간에 따라 달라지는 파리를 포착했습니다.

가로수는 푸릇해 봄을 알리지만, 우산을 쓴 파리는 왠지 쌀쌀해 보입니다. 봄비내리는 서울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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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3년 리치몬드 빵폭동

남북전쟁이 한창인, 1863년 4월2일에 남부의 수도인 리치먼드에서 총과 돌을 든 여성노동자 수백 명이 거리로 나섰습니다. 이유는 단순합니다. 식량을 살수가 없어서… 전쟁중에 인플레이션과 남부의 통화 약세로 인해 빵 가격은 5배나 뛰었습니다. 게다가 1863년 3월 남부군이 필요에 따라 식량과 기타 보급품을 압수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한 ‘인상법’을 통과시켜 상황을 악화시켰습니다. 

1863년 부활절 주간의 목요일인 4월 2일에 수백 명의 여성(및 일부 남성)이 리치몬드의 거리로 나왔습니다. 약간의 부상자가 보고되긴 했지만 폭동이라기보다는, 그야말로 배고파서 일어난 시위였습니다. 그들은 식품이 보관된 창고와 식료품점 등을 급습했습니다.폭동의 주동자라고 알려진 잭슨은 34세의 네 아이의 엄마이자 노천 시장에서 일하는 행상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리치몬드의 지도자들은 여성의 시위를 경시하고 ‘폭도’ ‘사회의쓰레기’로 비난하기 바빴습니다.

빵 폭동은 진정됐으나 여파는 계속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식량부족을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비축한 식량자체가 부족해서, 군인도 민간인도 배고픔을 참아야 했습니다. 반면 북부의 군대와 주민들은 비교적 풍족한 식단을 누렸습니다.극심한 경제난에도 불구하고, 남부는 연속해 무리수를 두었습니다. 병력을 채운다며 징병 대상자를 늘렸고, 농사할 인력이 없는 상황에서, 식량부족을 더 악화시켰습니다. 남부의 패배는 무엇보다 식량부족이 아니었을까요?

이후 시위 참가자들은 재판에 회부되어 폭동죄로 기소되었지만, 100명 미만이 처벌을 받았다고합니다. 나이가 많고 가난한 많은 여성들이 유죄 판결을 받았지만 더 젊고 옷을 잘 입는 여성들은 그렇지 않았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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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년 4월 18일, 샌프란시스코 지진

 4월 18일 오전 5시 13분, 리히터 규모 8.0으로 추정되는 지진이 샌프란시스코를 강타했습니다. 수많은 건물이 무너지면서 약 3천명이 사망했습니다. 지진의 충격파는 오레곤 남부에서 로스앤젤레스까지 느껴졌습니다.

샌프란시스코의 벽돌 건물과 빅토리아 시대 목조 건물은 특히 황폐화되었습니다. 화재는 즉시 발생했고, 곧 도시전체로 화재 폭풍이 번져갔습니다. 샌프란시스코 시장은 황혼부터 새벽까지 통금 시간을 시행했고, 약탈자는 총살할 수 있도록 승인했습니다. 한편, 심각한 여진에 직면한 소방관과 미군은 화재를 진압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웠다. 방화벽을 만들기 위해 도시 전체를 다이너마이트했습니다. 4월 20일, 대규모 화재로 갇힌 수천 명의 난민들이 대피했습니다. 군대는 결국 도시 전역에 걸쳐 20개 이상의 군대식 텐트 캠프에 2만명의 난민을 수용하게 됩니다.

4월 23일까지 대부분의 화재가 진압되었습니다. 당국은 폐허가 된 대도시를 재건하는 작업을 시작합니다. 샌프란시스코 대지진과 그로 인해 도시가 파괴된 화재로 인해 약 3천여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주택과 빌딩 포함하여 3만채의 건물이 파괴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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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키 로빈슨

1947년 4월 15일, 28세의 재키 로빈슨은 브루클린 다저스 유니폼을 입고 메이저리그 무대에 등장합니다. 메이저 리그의 첫 아프리카계 미국인 선수가 되었습니다. 그날 2만 7천명의 관중석에는 흑인 관중이 1만 4천명에 달했습니다.  50년 후인 1997년 4월 15일,그를 기념하는 행사가 뉴욕 스타디움에서 열립니다. 로빈슨의 등번호 42는 오직 로빈스만을 위한 것이라 선언합니다.  

로빈슨은 물론 뛰어난 운동선수입니다. 재키는 UCLA 재학 중에서 야구, 농구, 미식축구, 육상의 4개 스포츠에서 선수로 초청 받았습니다. 베를린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획득한 그의 형의 멀리뛰기 기록도 경신합니다. UCLA미식축구 팀에서도 패스, 돌진 및 득점 부문에서 선두였습니다. 그럼에도 로빈슨은 재정적인 어려움으로 UCLA를 중퇴해야했고, 1942년에 군에 입대하여 중위로 임관했습니다. 그는 군 복무 중 인종 차별 사례에 항의한 후 1944년에 군법회의에 회부되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명예 제대했습니다.

프로야구에서도 올해의 신인상, MVP 및 6회 올스타 자격을 보유했습니다. 그는 관중을 끌어모아, 열광케 하고, 흑인도 갈 수 있는 길을 보여주었습니다. 로빈슨은 50년 이상 인종 차별을 받아온 스포츠에서 인종 장벽을 허물었습니다. 그의 재능과 성공에도 불구하고 로빈슨은 야구팬과 동료 선수들로부터 엄청난 인종 차별에 시달렸습니다. 동료선수들은 로빈슨을 팀에서 제외시켜 달라는 청원도 했습니다. 로빈슨이 남부에서 경기하는 동안, 팀 동료와 동일한 호텔과 레스토랑을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인종차별의 사례는 헤아릴수 조차 없이 많습니다. 그의 진정한 힘은 그 모욕적인 인종차별에 직면하여, 굳건한 인내로 대항했다는 것입니다.

로빈슨의 인내는 그를 메이저리크에 스카웃한 브랜치 리키 다저스 단장과의 약속입니다. 그를 발탁하면서 다저스 단장은 “인종적 모욕을 참을 수 있느냐”고 질문합니다.일상적인 조롱과 위협에서 광범위한 제도적 불평등에 이르는 뿌리 깊은 인종차별을 이야기합니다. 특히 가경기장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욕적인 사례를 이야기하고 어떻게 대항해야하는지 말해줍니다. 단장은 “부당한 대접도 감수하겠다”는 다짐도 받냈습다.

평생 인종차별을 겪은 로빈슨은 단장에게 침착함을 유지하겠다고 약속합니다. 브랜치 리키는 인종차별을 반대하는 운동가는 아닙니다. 다만 그는 뛰어난 운동 능력을 지닌 흑인 선수들을 뛰지 못하는 하는 불합리한 통념에 의문을 제기했을 뿐입니다. 그가 야구에 몰고 온 혁신은 ‘재키 로빈슨’ 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리그가 시작되자 로빈슨에게 곧바로 공격이 가해집니다. 잔인한 인종 차별적 조롱은 그나마 괜찮은 것이었고, 그는 데뷔후 고의적인 투구에 여러차례 투구에 맞았습니다. 배팅 헬멧이 도입되기 전, 로빈스는 모자안쪽에 금속판을 덧대어 대응합니다. 선수들은 그를 쫓아내기 위한 청원도 합니다.  미국 대중은 로빈슨에게 팬 메일, 증오 메일, 사인 및 출연 요청, 살해 위협을 쏟아부었습니다. 그의 안전은 결코 보장되지 않았습니다.

널리 알려진 공인으로서 로빈슨은 다양한 영역에 휘둘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의제를 발전시키기 위해 흑인 커뮤니티에서 그의 상징적인 지위를 활용하기를 열망했습니다. 리차드 닉슨 등 정치인, 마틴 루터킹 등 시민 운동가, 다양한 사업가들과 함께 활동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진정한 의미는 재능있는 흑인 젊은이에게 기획의 문을 열어주었다는 것입니다. 흑인계 미국인들은 그의 성공과 그것이 상징하는 기회에 열광했습니다. 다양한 운동분야에서이제 재능있는 운동선수들이 발탁할 수 있는 문을 열어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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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4월17일,미국 피그만 공격

1959년 1월, 피델 카스트로는 혁명에 성공한다. 플로리다 주에서 90마일밖에 떨어지지 않는 쿠바의 사회주의 정부는 미국입장에서는 눈에 가시일 수밖에 없었다. 미국 중앙정보국은 카스트로 암살과 정권전복을 위한 비밀작전을 준비했다. 그러나 쿠바의 피그만에 침투한 특공대의 작전은나 나흘만에 처참한 실패로 끝났다.1400여명의 특공대원들 중 200명이 현장에서 숨지고, 나머지는 모두 생포됐다. 비밀해제된 보고서는 “중앙정보국의 무지, 무능, 오만으로 작전이 실패했다”고 진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