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 생활자’를 자처하는 손관승 작가가 지난해 11월 ‘리더를 위한 하멜 오디세이아’를 냈다. ‘글로 생활자’는 손작가가 전업 작가를 재치있게 표현한 것이다. 그는 MBC에 기자로 입사하여 베를린 특파원,국제부장 등을 거쳐 iMBC대표를 지낸 저널리스트다.

저널리스트가 은퇴후에 전업작가를 지향하는 것은 흔치 않다. 손작가는 거대 언론사라는 울타리를 떠난 뒤에도 저널리스트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읽고, 쓰고, 말하는 활동을 왕성하게 펼치고 있다.

한국인에게 하멜은 국사 교과서속에 박제되어 있는 인물이다. 정규 교육을 받은 사람이면 누구나 하멜을 ‘하멜 표류기’를 써서 조선을 서양 세계에 최초로 알린 인물로 기억할 것이다. 좀 더 확장하면 박연이라는 네덜란드인이 먼저 조선땅에 흘러들어와 조선에 살다가 제주도에 표류한 하멜 일행을 만났던 사실도 기억할 것이다.

하지만 하멜이 어떤 사람인지, 조선에서 보고 듣고 기록한 내용이 실제 어떤 것인지, 어떻게 조선을 탈출하여 고향으로 돌아갔는지를 상세하기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더욱이 조선과 하멜의 만남이 세계사 흐름속에서 어느 지점에 속하는지를 가늠하기도 어렵다.

이는 하멜이 남긴 ‘하멜 표류기’를 정독한 사람이 없는 것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하멜표류기는 하멜이 13년동안 조선에 억류되어 있다가 탈출한 다음에 동인도회사로부터 임금을 받아내기 위해 작성한 경과보고서 성격을 띠고 있어 일반인이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니다.

손작가는 그런 하멜이 교과서 밖으로 걸어 나와 21세기 한국인에게 말을 걸듯이 생생하면서 입체적 인물로 그려내려고 시도했다. 최근 유행하는 메타버스에 빗대면, 하멜이 살았던 17세기 대항해 시대를 시간과 공간을 씨줄과 날줄로 삼아 메타버스에 입체적으로 구현하려는 듯하다.

하멜은 1630년 네덜란드에서 태어나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VOC)에 취직하였다. 따라서 암스테르담, 델프트, 레이던 등 네덜란드 주요 도시와 연을 맺었다. 또 바타비아(현재 자카르타), 타이완, 나가사키 등 동인도회사가 장악했던 무역 거점이 그의 생활무대였다.

하멜의 삶을 따라가면 자연스럽게 대항해 시대, 시끌벅적했던 항구 도시 풍경을 만나게 되고 그 도시속에서 살았던 사람과 그들이 즐겼던 문화 예술을 접하게 된다. 손작가는 렘브란트, 페르메이르 등 네덜란드의 유명 작가의 작품과 하멜의 삶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슬쩍 슬쩍 보여준다.

하멜은 또 제주도에서 시작해 한양, 강진, 여수 등 조선의 도시와 마을에서 13년을 생활했기에 하멜의 공간은 조선땅까지 확장되었다. 한국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강진과 여수도 하멜의 삶과 겹쳐 놓으면 새로운 호기심이 발동된다. 이 책을 읽고 나서 강진과 여수를 다시 찾고 싶어지는 것이다.

손작가의 작업 덕분에 하멜 루트는 하나의 그랜드 투어 루트로 재탄생하였다. 예를 들어 암스테르담에서 시작하여 자카르타-제주도-여수-나가사키 순으로 하멜의 궤적을 찾아다니면 대항해 시대 하멜의 경험을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을 것 같다.

손작가는 또 하멜이라는 일 개인을 네덜란드 황금의 시대와 대항해 시대라는 큰 그림속에 놓음으로써 조선과 하멜의 만남이 지닌 역사적 의미를 또렷하게 보여준다. 즉, 동서양이 만나는 새로운 루트인 바닷길이 일본에 이어 조선까지 이어졌던 문명적 대사건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무엇보다 손작가는 역경을 이겨낸 탁월한 리더로서 하멜상을 새로 제시한다. 즉 꿈에도 생각하지도 않았던 이국 땅에 발을 디딘 뒤 기약없는 세월을 견디며 마침내 귀향하는 과정에서 21세기 경영자가 배울 점을 꼼꼼하게 찾아낸 것이다. 그래서 손작가는 하멜과 오디세이아를 합쳐 이 책 제목을 정했다.

손작가가 주목한 하멜의 리더십의 근간은 뛰어난 적응력과 소통력이다. 예를 들어 왕실에서 공식적으로 제공되는 쌀만으로 살아가기 힘들어 하멜 일행은 민가를 부지런히 돌아다니며 먹을 것과 일상용품을 얻어왔다. 또 하멜 일행은 산에 땔감을 구하러 다니면서 사찰 승려와 어울리는 사교성도 발휘했다.

손작가는 하멜 표류기속에서 하멜이 기근 속에서 먹을 것을 스스로 구하고 또 장사를 통해 필요한 물건을 확보하는 비즈니스 기질을 발휘한 점을 찾아냈다. 또 손작가는 하멜이 여수에서 3년에 걸친 치밀한 준비끝에 탈출에 성공한 점은 불운에 굴하지 않는 리더의 표본이라고 해석했다.

손작가는 그동안 10여권의 책을 냈는데, 2014년에 펴낸 ‘괴테와 함께 한 이탈리아 여행’가 퇴직후에 낸 첫 책이다. 그후 손작가는 ‘그림 형제의 길'(2015년) ‘투아레그 직장인 학교’ (2017년)’me,베를린에서 나를 만났다'(2018년) 등 출간했다.

그가 제시하는 화두는 늘 시대와 호흡하는 것들이다. 직장인의 번아웃과 은퇴이후의 삶을 다루고, 창조적 도시로 거듭난 베를린를 재조명함으로써 성수동의 변신를 제대로 볼 수 있는 시각을 제시했다. 하멜 스토리를 통해 대항해 시대와 조선을 연결해줬고, 아울러 역경을 딛고 마침내 귀향하는 하멜의 리더십을 생생하게 그려냈다.

그는 이런 저술 작업을 바탕으로 강연 활동을 활발하게 하고 또 한겨레, 매경 등 여러 언론에 정기 연재물을 게재하고 있다. 퇴직후에 현역 때보다 더 왕성하게 집필과 강연활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손작가의 퇴직 이후 삶은 현직 저널리스트에게 롤 모델이 될 수 있다. 무엇보다 그의 작업방식은 전형적인 저널리즘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작업은 현역 기자시절 때처럼 아주 작은 단서나 의문에서 출발한다.

하멜 스토리의 경우 ‘한국인중에서 누가 최초로 와인을 마셨을까’라는 질문에서 시작했다고 한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에서 하멜표류기에 하멜 일행이 난파된 배에서 건진 틴타주(붉은 포도주의 일종)를 조선 병사에게 선물했다는 대목을 찾았고, 한발 더 나아가 하멜과 하멜의 시대를 추적하는 방대한 작업으로 이어졌다.

두번째 저널리즘 방식은 현장을 직접 찾아가서 확인하는 현장주의다. 그는 이 책을 쓰기 위해 하멜의 행적을 직접 찾아 다니면서 현장을 확인하고 부속 자료를 광범위하게 수집했다.

세번째 저널리즘 방식은 점과 점을 연결하여 새로운 의미를 찾아내는 연결력이다. 손작가는 하멜 관련 자료를 잘 분해하고 다시 한국인의 관점에서 연결하는 방식으로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면을 부각시켰다.

예를 들어 하멜이 살았던 강진에서 청어뼈 문양(Herringbone stone wall)을 한 돌담을 보고, 청어와 네덜란드의 부흥이 어떤 관계를 갖고 있는지를 기술했다. 대항해 시대 청어 가공기술은 네덜란드의 국력과 떼랠야 뗄 수 없는 관계다.

네덜란드인들이 북해 바다에 풍부하지만 쉽게 상하는 청어를 오래 보관할 수 있는 혁신 기술을 찾아내고, 그 덕분에 선박산업,제염산업,금융산업 등 연관 산업을 확 키울 수 있었다. 청어 가공기술 혁신은 나아가 렘브란트, 페르메이르 등 네덜란드의 예술을 활짝 피우는 자양분 역할을 했다. 손작가는 당시 청어 가공기술 혁신은 21세기 첨단 반도체 기술의 역할과 같다고 본다. 손작가의 이런 연결력 덕분에 강진의 돌담은 암스테르담-바타비아-나가사키-제주-강진에 이르는 청어 루트를 완성시키는 의미를 부여받았다.

만약 이 책을 읽고 강진을 방문한다면 청어뼈 문양 돌담을 찾을 것이다. 그 담벼락을 보면서 네덜란드와 청어 스토리를 머리속에서 그릴 수 있을 것이다. 또 페르메이르가 그린 ‘델프트 풍경’속의 청어잡이 배를 떠올릴 것이다.

손작가는 저널리즘의 엄격한 방식에 머무르지 않고 과감한 상상력을 그의 작업에 덧붙였다. 손작가는 “문헌과 자료는 물론 중요하고 현장 인터뷰도 충실해야 하지만 그것 못지 않게 상상력의 힘이 뒷받침되어야 훌륭한 인문 여행작가로 성장한다”고 밝혔다.

저널리스틱 콘텐츠는 소설과 같은 픽션과 실험과 논증에 기반을 둔 아카데믹 콘텐츠와 확연하게 다른 영역이다. 저널리스틱 콘텐츠는 여러 분야에서 밝히거나 정리한 팩트를 바탕으로 직접 읽고, 보고, 들어서 새로운 의미를 잘 찾아내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지식 생태계에서 저널리스틱 콘텐츠에 대한 수요는 늘 존재하고 또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세계적인 베스트 셀러작가중에서 저널리즘 백그라운드를 지닌 이들이 수두록 하다. 예를 들어 말콤 글래드웰, 토머스 프리드먼, 스티븐 존슨 등 유명 작가들이 그러하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반짝이는 호기심을 갖고 아카데미 영역에서 펴낸 논문을 부지런히 읽으면서 점과 점을 연결해 새로운 키워드를 발굴하는데 탁월한 솜씨를 발휘한다. 또 저술 활동의 부산물로서 강연을 하거나 포럼에서 마더레이터 역할을 하면서 탄탄한 영향력을 구축하고 있다.

물론 저널리스트가 모두 베스트 셀러 작가를 지향할 수는 없다. 특히 한국어 시장이 그리 크지 않은 점을 고려하면 한국에서 전업 작가로 제2의 저널리스트를 꿈꾸기 어렵다.

하지만 손관승 작가는 퇴직후 저술 활동은 40~50대 현역 저널리스트가 벤치 마킹 대상으로서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손작가는 저널리즘 특유의 호기심을 갖고 질문하는 직업 습관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여기에 늘 책을 손에서 놓지 않는 독서력으로 무장하고 있다. 무엇보다 손작가의 강점은 지식 시장의 고객이 누구이고, 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계속해서 캐내려는 자세이다. 이 자세야 말로 손작가가 지치지 않고 새로운 책을 기획하고 실제 결과물로 내는 원동력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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