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그동안 6편의 연재글을 일주일 단위로 게재하였는데, 이는 50여년간의 다양한 디지털 변화를 ‘디지털 공간’이라는 핵심 단어로 살펴보면서, 대한민국이라는 물리 공간이 보다 강하고 지속 가능한 공간이 되는 방안을 모색하는, 여하간 멈출 수 없는 작업이다.
사실 ‘디지털 공간’을 살펴보는 일보다도 먼저 ‘디지털’이 무엇인가를 살펴보는 일이 더 선행작업이라고는 생각하지만, “디지털론”이라는 작업은 내가 틈틈이 다루기는 하겠지만 감당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미시 세계에서의 ‘양자적’ 현상이 ‘디지털적’ 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거시 세계에서의 ‘디지털적’ 현상을 ‘양자적’ 현상으로 치환하여 세상의 이치와 변화를 설명할 수 있을까? 다른 누군가도 이런 궁금증을 계속 풀어주기를 희망한다.
삶과 사회와 세계와 우주를 늘 생각하는 인간의 사고 습성은 ⒜ 한편으로는 파르메니데스(Parmenides)와 헤라클레이토스(Heraclitus of Ephesus), ⒝ 다른 한편으로는 환원주의(Reductionism, 還元主義)와 전일주의(Holism, 全一主義)로 대비되는 양 극단의 가운데 어느 언저리에서 맴돌고 있다. 물론 지금은 철학에서조차 논변의 가치가 희박해지고 있는 ⒞ 심신일원론(mindbody monism, 心身一元論)과 심신이원론(mindbody dualism, 心身二元論)도 인류의 사고 습성을 지배하던 것이었다.
나도 개인적인 사고습성으로서 이런 3가지의 대립적 논변이외에도,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theory of relativity, 相對性理論),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uncertainty principle, 不確定性原理) 그리고 쿠르트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Gödel’s incompleteness theorem, 不完全性定理)를 나의 3위 일체라고 말하고 있지만 그 3가지의 과학이론은 나의 물리 세계를 설명하는 근본적 지침이다.
나는 삶과 죽음 또는 신과 인간에 관한 논변도 이 3위 일체에 기대어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이제 현대의 철학 논증도 사변적 논변 외에도 지금까지의 인간이 축적한 과학기술에 기초하지 않는 논증은 설 자리가 없어지고 있다.
철학의 기원이라는 고대 그리스의 자연철학은 다 알다시피 오늘날의 철학과 과학이 분리되기 전 하나의 학적 체계이었다. 동양의 사변은 처음부터 혼융, 융합, 태극이라는 개념으로 설파되고 전승되어 왔지만, 세상의 변혁을 가져오는 ‘과학’으로서의 학문의 축적은 약하지 않았던가.
상기의 사고 습성이 오랜 세월을 거쳐 전술한 인류의 위대한 과학이론을 낳았다. 3위 일체의 과학이론이다. 앞으로도 새로운 거대 과학이론을 계속 낳을 것인가? 아직도 미지의 것들을 파헤치는 인류의 작업은 어디에서 새로운 결실을 맺을까? 상기의 3가지의 사고 습성과 3위 일체의 과학이론은 디지털 공간에서는 어떤 의미를 낳을 것인가? 아니면 디지털 공간에 오직 적용되는, 기존과 다른 새로운 과학이론을 낳을 것인가?
관련하여 아래는 한국전자통신연구원 소속 이순석 박사의 “디지털건축가의 소명” 145번째의 글인데 나의 글 4편까지의 글을 읽고 남긴 리뷰이다. 디지털 공간 설계의 기초를 논하는 작업에 참고가 되기를 바란다.
최근 IT기자클럽에 게재된 ‘디지털 신 글로벌 전략’이란 아티클을 발견한다. 처음 접한 이후로 머리 속에서 떠나 않아 새 글을 기다리며 수시로 IT기자클럽을 찾게 된다. 짧은 글이지만 결코 작은 글이 아니다. “디지털 공간론”이라는 거대담론이자 근미래의 현실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1편, 2편, 3편까지 우리나라의 디지털전략의 실효성에 문제제기를 쪽집게 같이 짚어내며, 기존 전략의 한계가 결국은 새로운 공간 창출이라는 판짜기의 부재에 있음을 깔끔하게 정리한 후, 4편에 이르러, 새로운 공간에 대한 정의를 시작한다.
우리가 흔히 전체를 정의할 때 사용하는 기본요소라는 개념을 탈피하여 기존의 물질세계와는 또다른 물질세계를 정의하기 위하여 보다 일반화된 용어를 차용한다. 이른바 원리다. 제1원리는 비트의 독립공간이다. 제2의 원리는 그 공간 속의 ‘나비’라는 존재다. 제3의 원리는 자율 운행이다. 새로운 물질세계인 디지털공간의 3요소의 정의인 셈이다. 비트 공간, 나비 존재, 자율 운행 등이다.
디지털공간에 대한 군더더기 없는 간결한 정의다. 멋지다. 이제 다음 편이 더욱 기다려진다. ‘디지털 공간’에 대한 대부분의 어설픈 접근은 ‘플랫폼’으로 통칭되지만, 그 플랫폼이 어떻게 생성되고 유지되고 성숙하고 퇴조하는지에 대한 설명이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apple, amazon, alphabet을 필두로 하는 다수의 플랫폼 기업들을 열심히 흉내내기를 하지만 아무런 실효성이 없다. 공간이라는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는 플랫폼전략은 돈만 버리는 결과가 예고된 재앙이나 다름없다.
디지털공간은 기존의 물질세계를 설명하는 물리법칙들이 더욱 일반화되어 적용되는 공간이다. 일반상대성이론을 일반화 할 수 있어야 하고, 불확정성의 원리를 더욱 일반화 할 수 있어야 하고, 불완전성의 원리를 또한 확장해야만 하는 공간이다. 그런 새로운 물리법칙을 토대로 새로운 세상을 설계하는 것은 디지털건축가들의 소명일수 밖에 없다. 그 전에 물리법칙에 대한 정확하고도 완전한 이해의 선결이 필요하다.
대전광역시에는 이 법칙들에 대해서 먼저 말해줘야 하겠다.
이순석 박사의 리뷰는 나의 글에 대한 과찬의 글이지만 그의 글은 디지털론과 디지털 공간론에 대한 나의 생각의 일단을 잘 정리한 글이고 나의 후속 글에 대해 더 깊은 고민을 하게 만든다. 이 인용 글은 그의 깊은 사색의 결과이기 때문에 그의 후속 글도 기대된다.
나는 이미 앞에서 디지털 공간에 대한 코페르니쿠스적인 관점 전환을 요구하였던 바 그런 관점 전환과 관련한 그동안의 철학적 사유의 흔적을 좀 더 살펴본다.
“(언어학이란) 모든 언어에서 영원하고 보편적으로 작용하는 힘을 찾아보며, 역사의 모든 독특한 현상을 포괄할 수 있는 일반법칙을 추출해 내는 것이다.” 소쉬르가 ≪일반언어학 강의≫에서 주장하였던 말이다. 소쉬르는 언어활동의 보편적 문제를 다루기 위해선 개별 언어 간의 비교 또는 역사적 변화 과정을 탐구하는 데 그쳐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소쉬르에게 언어는 다른 학문의 연구대상과 다르게 이미 존재하고 있는 대상이 아니며 관점에 의해서 창조되는 실체라고 생각했다. (중략) 소쉬르의 언어학에 대한 인식론적 전환은 세계에 대해 기존과 전혀 다른 시각을 제시하는 ‘구조주의’로 발전했다.
소쉬르는 구조적 관점에서 개별 언어가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했다. 이 생각은 독립적이며 구체적인 대상의 본질을 추구하는 기존 경험주의나 실증주의의 태도를 거부하며 관계의 망 속에서 분절된 대상의 의미를 찾는 구조주의로 발전하게 됐다.
앞서 여러 편의 나의 글에서 언급한 디지털 공간론의 3가지 ‘원리’는 소쉬르의 말에 언급된 언어 공간의 ‘관점에 의해 창조되는 실체’로서의 언어에 공리의 지위를 부여하는 것처럼 ‘공리’에 비유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소쉬르의 아이디어는 전통적인 사고의 방식을 근본적으로 거부하는 사상인데, 이는 파르메니데스와 플라톤의 철학사상과 맥락을 공유하는 점은 없는가? 또한 칸트가 제시한 인식대상과 인식주체와의 관계 전복을 통한 코페르니쿠스적인 인식 전환과 맥락이 닿아있지 않은가?
마찬가지로 이런 이야기를 덧붙이는 것은 내가 앞에서 계속 말하는 ‘디지털 공간’에 대한 또 다른 코페르니쿠스적인 인식 전환을 토대로 물리적 공간에서도 자유로운 디지털 공간의 궁극적 실체는 무엇일까? 그 “것”에 대한 탐색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을 강조하기 위해 ≪대학신문≫에서도 깊게 언급한 소쉬르의 아이디어를 디지털 공간론에서도 흡수하려는 것이다.
앞서 말한 디지털론에서 말하는 ‘양자적’ 디지털 현상과 디지털 공간에서 말하는 ‘인위적’ 디지털 현상은 아직은 그 맥락을 같이 하는 점을 찾기는 어렵다. 그래서 이 글은 이순석 박사의 기대에는 아직 미치지 못한다. 그럼 인간은 ‘인공적 디지털론’으로 무엇을 얻으려는 것일까?
이 글에서는 논변의 도약을 어쩔 수 없이 저질러야 하겠다. ‘인공적 디지털’은 ‘데이터’라는 것이다. 생물로 하면 DNA라고 할 수도 있고, 혈액이라고 할 수도 있는데 상론은 나중으로 미룬다. 이렇게 설정하고 나면 ‘디지털 공간론’을 좀 더 구체적으로 들여다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디지털 공간론’을 ‘데이터 공간론’으로 좁혀볼 필요는 없다.
데이터 공간론에 관한 약간의 논변은 나의 제5편의 글에도 남아 있다. 나의 데이터 공간론을 포괄하는 디지털 공간론에는 그리하여 소쉬르에서 비롯된 ‘구조주의’뿐만이 아니라, ’기능주의’, ’자연주의’, ‘물리주의’라는 인문학적 접근방법이 교호적으로 적용될 여지가 제법 많다. 이런 학문 사조의 실제적 의미를 나중에 다시 상론할 기회를 가질 수도 있지만, 이들 사조의 앞에 공통적으로 수식 가능한 말은 바로 ‘방법론적’ 또는 ‘방편론적’이라는 단어인데 이 글의 실제적 목적 때문에 더욱 더 그런 입장이 요구된다.
‘디지털 정보’인 ‘데이터’는 왜 출현했을까? ‘아날로그’는 어떤 한계를 갖고 있는 것일까? 디지털 정보기술은 왜 출현했을까? 과연 인간은 왜 전통적인 아날로그, circuit 방식으로 정보를 전달하는 기술에서 새로운 디지털, packet 방식으로 정보를 전송하는 기술로의 전환을 꾀하는가? 그냥 정보전송방식의 단순한 변화인가? 아니면 거기에 인간의 어떤 욕망이, 아니면 물리 공간에서의 어떤 한계를 극복하려는 욕망이 잠재되어 있는가?
대한민국에서는 1994년부터 인터넷이 민간에 개방되었다. 1990년 대 중반의 미국의 인터넷고속도로(information highway) 프로젝트가 국가적 과제로 부상할 때, 대한민국에서도 초고속정보통신망 구축사업이 국가적 최우선 과제로 추진되었다.
국가의 영토는 좁지만 인터넷 공간은 무한한 것이니 사이버 영토(cyber territory)를 선점해야 한다는 프로파간다(propaganda)가 우렁찼고 기세가 드높았다. 1990년 대 말부터는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는 앞서가자”라는 구호도 등장했다. (동 구호의 제목에 부제목 ‘인터넷 코리아 시대의 개척자들’을 붙여 ‘한국IT기자클럽’은 2016년 책을 발간했다.)
2000년대 초에는 인터넷 버블(bubble)을 야기할 정도였다. 사람들은 네티즌(netizen)이 되었고 웹서핑(web surfing)으로 늘 여가를 즐겼다. 2010년대에 들어서기 직전에 애플의 아이폰(iPhone)이 등장하면서 인터넷 기술트렌드는 새로운 도약을 하였고 수많은 글로벌 자본은 모바일 비즈니스로 집중되었다.
PC 웹(pc web)을 날아오르는 모바일 앱(mobile app)의 시대가 10년 정도를 풍미했다. 모바일 버블(bubble)은 없었다. 이를 지탱한 인터넷 비즈니스 철학은 네트워크 중립성(network neutrality)였다. 모바일 비즈니스는 날개를 달았다. 그러는 과정에 수많은 인터넷 공간 프로젝트 – 포털, e커머스, SNS, 플랫폼, OS 등 – 출현으로 디지털 공간은 풍부해졌다.
이제는 그 공간이 블록체인 공간으로 오르다가 메타버스로 갈아타는 중이다. 또한 블록체인 토대 위에 메타버스 공간이어야 한다는 주장도 강하다.
대한민국에서 ‘인터넷에서의 무한영토확장 만큼은 앞장서자’라고 하면서 지나온 시간은 드디어 디지털 공간’성’을 획득하는 인터넷의 역사적 전개와 발전을 이루었다. 애플을 추격하던 삼성전자는 세계적인 기업으로 우뚝섰다. 반도체와 스마트폰이 밀어올린 세계적 성취였다. 세계 100대 시총 기업 리스트에는 대한민국 기업으로는 오직 삼성전자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런데, 제4차 산업혁명의 질풍노도 한 가운데에서 일본은 침몰하고 있는가? 대한민국은 디지털 강국을 향한 보다 강력한 운행을 하고 있는가? 우리의 ‘디지털’ 공간 건설 도전은 그 웅대한 꿈은 이루지 못하고, 결국 한반도에 갇혀, 그것도 5,000만 인구를 가진 한반도의 남쪽에 갇혀 서로 오직 ‘물리’ 공간을 차지하려는 각축전을 벌였던 것은 아니었던가?
진실로 정보화는 앞섰고, 특히 국세행정과 민원행정과 복지행정의 정보화는 대단한 성과를 거양했고, 서울시의 정보화는 국제적으로 칭송받았다. 그렇다면 그 성과가 지식사회 또는 지식기반사회에 걸맞는 정보화였던가? 정저지와(井底之蛙)라는 비난을 감수해야 되지 않는가? 작금의 화두인 디지털 플랫폼 정부는 과연 제대로 설계될 것인가?
전세계 인터넷 사용자가 40억명을 돌파하였지만 대한민국에서 창출한 디지털 공간 중에 세계적인 공간으로 우뚝 선 게 없지 않은가? 이것도 오호통재라! 이러한 문제 의식은 바로 내가 ‘디지털 공간 설계’의 능력 부족이라는 근본적 원인을 살펴보게 만든다.
왜 있는 그대로의 정보를 그대로 담아 전송하는 (아날로그) 방식을 버리고, 있는 그대로의 정보를 분절하고 다시 합하여 전송하는 (디지털) 방식으로 전환하는가? 왜 인간의 것들만 전송하는 communication이 인간의 것들을 넘어서는 무수한 사물들의 것들을 전송하는 communication으로 전환하는가? 이것은 제4차 산업혁명과 어떻게 결합하고 있는가?
제4차 산업혁명이란 무엇인가? AI, 플랫폼, 사물인터넷, 3D프린터, 드론, 자율주행차, 비행(자율)자동차, 자동화공장, 기계와 기계의 소통, 가상현실, 탈중앙화와 블록체인, 주문생산, 기계학습, 원격조종, 원격치료, 로봇, 양자컴퓨터, 나노산업, 신재료공학, 스마트시티와 신도시공학, 공유경제 등은 제4차 산업혁명의 다양한 응용과 적용의 모습을 보여준다.
도대체 제4차 산업혁명으로 통칭되는 변화에서 ‘디지털 공간’은 왜 새로운 산업혁명의 동인이자 결과물로 부각되고 있는가? 아래위로 좌우로 다채롭고 수많은 디지털 공간들을 추구하는 제4차 산업혁명의 과정에서 과연 인간의 의미는 어떻게 취급되고 모색되는가?
나는 종종 ‘디지털 기술’이 ‘바이오 기술’과 같은 맥락에 놓여 있다는 생각을 한다. 공통의 개념은 바로 재현(representation)이다. 맥락에 따라서는 복원 또는 표상으로도 사용되는 개념이지만 재현은 철학적 인문학적으로 가장 다의적인 개념 중의 하나이고 기저에는 환원주의가 섞여있다. 재현은 기독교철학이 지배하는 중세 기간 내내 신의 구현을 대표하는 개념이었고, 근대의 인간 주체의 철학에서는 인간과 자연의 모든 것을 재창조하는 의미를 지닌 개념이었다.
그럼 ‘디지털’이 횡행하는 현대에는 인간은 무엇을 재현하려는 욕망으로 가득찼는가? 특히 물리공간과 인간으로부터 독립된 디지털 공간은 무엇을 재현하려 하고, 그 재현의 가장 근본 요소는 무엇인가? 소위 메타버스는 어떤 유형의 디지털 공간인가? 《디지털 공간 설계의 기초 요소》를 이제야 본격적으로 거론할 수 있게 되었다. 통신의 역사이든 인터넷의 역사이든, 기술 중심의 설명이든 심리적 SF 공간적 설명이든 기존의 그 어떤 방식의 접근방법으로도 만족하지 못하는 논변들의 궤와는 다르게 나는 이렇게 좀 다른 관점에서 접근하고자 하는 것이다.
전편까지의 6편의 연재글에서 자세히 설명한 디지털 공간론과 그 3가지 원리를 바탕에 놓고 이제 《디지털 공간 설계 기초》를 어찌 논하는 것이 좋을까? 바로 앞에서 던진 여러가지 질문들, 특히 디지털 공간에서의 인간의 의미 변화 또는 디지털 공간을 통한 재현의 추구 이유 등을 묻는 질문들에 대한 답변의 단서를 제시하는 일이기도 하다.
디지털 공간론의 관점에서 디지털 공간에 접속되는 모든 단말디바이스는, 그것이 스마트폰이든, 스마트워치든. 노트북이든, PC든 아니면 IoT 단말 디바이스든, 연결 자동차(connected vehicles)든, 원격의료기기든, 기상관측위성이든, 우주망원경이든 그리고 그 단말디바이스 내에 설치된 HW로서의 기기든 SW로서의 앱이든 전부 센서라는 선언을 할 수 있겠다.
따라서 모든 디지털 공간은 2015년 제4차 산업혁명의 선언과 함께, 5G 이동통신의 등장에 의해 유무선의 통신네트워크가 All-IP로 전환함과 함께 전통적인 인간 중심의 communication의 시대를 넘어 그야말로 모든 것의 communication의 시대로 전환하기 시작했다고 선언을 할 수 있겠다. 패러다임 전환이 일어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스마트폰에는 이미지 센서, 터치 센서, 마이크로폰, GPS, 모션 센서, 지자기(geomagnetic) 센서, 조도 센서, 지문 센서, 심박수 센서 등 약 20~30개 이상의 센서가 탑재되고 있다.
자동차에는 약 30여종 200여개의 센서가 사용되고 있다. 최근 자동차의 미래 트렌드로 떠오르고 있는 CASE(Connected, Autonomous, Shared, Electric)와 같은 트렌드는 센서의 사용을 증대시키고 있다. 내연기관 자동차도 파워트레인에서부터 섀시, 안전, 편의장치, 배기장치, 텔레매틱스와 같은 다양한 곳에 센서를 폭넓게 사용하고 있다. 현재 자동차에 사용되고 있는 센서로는 위치 센서, 속도 센서, 압력 센서, 관성 센서, 산소 센서, 온도 센서, 질소산화물 센서, 이미지 센서 등이 주로 사용되고 있다.
무수한 센서의 사용은 다른 무수한 센서의 사용을 불가피하게 만들고 있다. 센서는 데이터가 들고나가는 장치다. 센서라는 장치에서도 HW에 불가결한 SW, 나아가 SW-defined HW 시대에는 HW와 SW의 디커플링(decoupling)도 기술경쟁력의 요소가 되고 있다는 것을 읽어내야 한다. 디지털 공간은 데이터를 존재의 근거이자 에너지로 삼는 센서 네트워크 나아가 센서 공간이라는 본질적인 속성을 가진 것이라는 것이다. 모든 단말디바이스를 통해 데이터의 무한한 추출과 공급을 본질적 속성으로 하는 디지털 공간 시대에 들어서고 있는 것이다.
‘디지털 신 글로벌 전략’으로서의 ‘디지털 공간 설계’는 이 지점에서 시작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 어떤 제품과 서비스라 하더라도 가능한한 ‘디지털 공간’에 연결되어야 하고, 그 제품과 서비스에다가 ‘디지털 공간’이 동시에 제공되어야 하고, 데이터는 ‘디지털 공간’의 에너지로 취급되어야 하고, 데이터를 지배하여야 한다는 생각은 앞의 글들에서 제시한 디지털 ‘신뢰’ 공간에 관한 여러가지의 과제들의 해법을 구체적으로 모색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도 센서의 타깃이 되고, 인간 자체가 센서가 되는 ‘데이터 생산물로서 인간’도 ‘디지털 공간’에서 이제 서서히 물화(Reification, 物化)되고 있는 시대로 돌입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우리가 아는 IoT (Internet of Things)에서 인간도 예외가 아니었고 바로 thing이었구나! All-IP로 전환한 5G 네트워크도 인간의 communication을 위한 위한 것이 아니라 B2B 또는 thing-to-thing 교신을 위한 것이었구나! 제4차 산업혁명의 과정에서 피를 흘리는 일은 없어도 인간은 디지털화를 통해 스스로를 완전한 존재를 추구하면서도 스스로 물화(Reification, 物化)를 자초하는 모순을 야기하고 있는 것이구나! 아니면 번영할 것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에서는 세계인과 세계의 것을 아우르는 디지털 공간도, IoT라는 이름으로 디지털 공간물을 연결하여 담는 디지털 공간도 제대로 만들어본 적이 있는가? OCF (Open Connectivity Foundation)이든 Matter (formerly Project Connected Home over IP – CHIP)이든 이들 표준화 포럼에서의 좌장 활동을 국내 대기업의 임원이 해본들 그 표준의 함의도 모르고, 그 표준에 의한 비즈니스 생태계 전략과 그것의 실행 계획도 제대로 세우지 않고, 이를 디지털 공간이라는 전략적 범주로 확장하지 않는 것을 어찌 지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MSF (Metaverse Standards Forum)에서는 어떤 지적을 받게 될 것인가? 이렇게 이 글 ≪디지털 공간 설계 기초 (1)≫을 마무리 한다.
(2022년 7월 5일)
/디지털신뢰공간 아키텍트 황철증 디지털신뢰공간연구소 소장
서울대 법대(학사) 및 행정대학원(석사), 미국 콜럼비아 법대 (석사), 고려대 정경대학원(박사)을 졸업했습니다.
행정고시 29회로 1986년 중앙공무원교육원과 아시안게임조직위원회에서 단기 훈련을 거친 후 정보통신부에서 공직을 시작하였습니다.
BH, 국무총리실, 국정원(사이버안전센터), NIA 등에서도 근무를 한 바 있으나 주로 정보통신부에서 잔뼈가 굵었습니다. 방송통신위원회를 끝으로 26년간의 공직을 마친 후 사회의 한 구석에서 꼼지락 거리고 있습니다.
그동안 온갖 분야의 독서와 사색으로 삶을 붙들고 있으면서, 일찌기 담당한 인터넷 정책에 관한 주제에도 여전히 많은 관심을 쏟고 있습니다. 소위 디지털(인터넷) 아키텍처와 디지털(인터넷) 철학자로 스스로를 부르며 현대의 기술문명 역사의 흐름을 조망하는 것을 즐깁니다.
한편으로 이병주 소설가, 박이문 철학자, 최제우 동학창시자, 리처드 도킨스 진화생물학자, 움베르토 에코 기호학자 등 훌륭한 학자와 문인에게 지적 의식을 의탁하고 사는 자입니다.
이번 연재글의 게재로 IT기자클럽의 디지털문명 칼럼니스트로 소박한 의무를 시작하는 셈입니다.
연락처는 newdhjj@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