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소련이 해체되고 우크라이나가 독립국가가 된 후, 우크라이나 지폐에 그려진 인물이 있다. 미하일로 흐푸세프스키(1866년~1934년)가 그다. 그는《우크라이나-루스의 역사》《삽화로 보는 우크라이나의 역사》등의 역사책을 집필한 역사가이자, 1917년 볼세비키 혁명당시 우크라이나 중앙라다의 의장이었던 정치인이었다.

19세기는 민족주의의 시대였다. 특히 동유럽지역에서 민족의식과 민족담론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었다. 제국의 지배를 벗어나 독립국가를 만들거나 문화적 자율성을 갖는 것은 당연한 시대과제처럼 여겨졌다.

이런 질풍노도의 시기엔 민족들의 욕구가 민족주의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민족주의가 민족을 만들기도 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우크라이나는 어떤 민족이 될 지 확실하게 알 수 없는 갈림길에 있었다.

본래 ‘우크라이나’라는 이름은 폴란드 지배 시기 폴란드와 타타르 사이의 변경지대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 이를 일부 지식인들이 19세기 전반부터 민족을 칭하는 말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폴란드 지배 하에서는 종교가 집단적 정체성의 잣대였다. 비잔티움 정교와 로마 가톨릭으로 두 민족은 구분되었다. 한편으론 적지 않은 우크라이나 엘리트층 구성원은 카톨릭으로 개종하면서 폴란드에 동화되어 가기도 했다.

그 반면 우크라이나가 러시아 제국의 일부였을 때에는 우크라이나인과 러시아인의 구분이 쉽지 않았다. 러시아인과 우크라이나인의 종교적 공통성, 러시아어와 우크라이나어의 유사성, 공통의 국가적 기원론을 뒷받침해 준 역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러시아제국이 지배하던 시기, 러이사의 공식입장은 대러시아인, 소러시아인, 백러시아(벨라루스) 세개의 집단이 하나의 공동체라고 말해졌다. 이는 17세기 후반 모스크바 대공국이 동부 우크라이나를 차지하면서 성직자들이 만든 역사서술이었다.

흐루셰프스키가 [우크라이나의 역사]란 책을 쓸 때는 아직 ‘우크라이나’라고 불리는 나라가 존재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흐루셰프스키는 우크라이나 민족이 역사적으로 형성된 독자적 정체성을 가지며, 특정한 영토적 범위를 가지는 독자적 민족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는 서로 구분되는 민족이라고 보았다. 키예프 국가의 법제 및 문화는 우크라이나/루스 민족의 창조물이다. 반면 블라디미르 대공국/모스크바 대공국과 그 법제 및 문화는 대러시아 민족의 창조물로 보았다.

그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공유했던 문어체인 교회의 슬라브어 대신 근대 우크라이나 민중의 구어를 중시함으로써 러시아와의 언어적 공통성을 희석하고자 했다. 러시아 지배 하에서 우크라이나 민족주의는 언어 민족주의적 성격을 강조할 수 밖에 없었다.

1917년 러시아의 2월 혁명으로 흐루셰프스키는 새로운 기회를 맞았다. 그는 키예프에서 3월 초 결성된 중앙라다의 의장으로 선출되어,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 수립을 선언하였다.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즉각적인 독립선언은 그의 역사해석이 뒷받침되었기에 가능했다.

그런데 우크라이나 땅에는 두개의 우크라이나가 서로 다투게 되었다. 흐루셰프스키가 주도하는 키예프 중심의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과 노동자 병사 농민 소비에트가 주도하는 하르키프 중심의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정부가 양립했다.

1918년 초 볼셰비키 군대가 키예프로 들어와 도시를 장악하였다. 흐루셰프스키는 볼셰비키가 민족문제에서 옛 제정 러시아 정부와 다를 바 없다고 여겼기 때문에 소비에트 정부에 반대했다. 그리고 중앙라다 정부는 독일군의 개입을 스스로 요청했다. 당시 그의 행보는 논란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다.

이에 볼세비키는 전향적으로 민족을 품게 되었다. 레닌은 민족의 자치가 가능하게 설계된 연방제를 제안했다. 민족공화국들로 구성되고, 그 안에 자치공화국과 자치주가 포함된 체계, 곧 1922년 세워진 소비에트 사회주의공화국 연방이다. 그 연방의 15개 공화국의 하나가 우크라이나 소비에트였다. 우크라이나를 연방공화국으로 편성했으며 우크라이나의 언어적 문화적 독자성을 존중하고 장려하는 정책을 펴기 시작했다.

흐루셰프스키는 우크라이나인에 의한, 우크라이나인을 위한, 우크라이나인의 역사를 서술했다. ‘우크라이나 민족’을 만들어낸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역사서술로 우크라이나인의 테두리가 만들어졌고, 그가 만든 테두리가 곧 오늘날의 우크라이나를 이룬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소련시기에 우크라이나 분리주의의 근원이 되지 않을까 하는 의심때문에, 당국의 불신을 받았던 흐루셰프스키였다. 소련 해체 후 독립한 우크라이나에서 건국의 공로자로 여겨지고 있다.

*참고문헌: 러시아연구 제24권 제 2호. 후루셰프스키의 [우크라이나의 역사]와 우크라이나 정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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