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정무는 어린 시절, 다락방에서 발견한 백과사전의 삽화에 마음을 빼앗긴 후 미술을 운명이라 믿게 됐다. 서울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를 졸업하고,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이론과 교수이다.원시, 고대부터 현대까지 아우르는 미술의 장구한 역사를 인류 문명사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저서들을 꾸준히 집필 중에 있다. 유학 시절 도서관보다 박물관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미술관, 박물관 가이드를 가장 재미있게 하는 학생으로 유명세를 탔다.

발가벗은 미술관

미술의 눈으로 보면 역사와 인류가 다시 보인다.

미술과 역사의 안내자 양정무가 고대부터 현대까지 아우르는 미술의 장구한 역사를 이야기한다. 그동안 미술사를 대중화하는 데 노력해온 양정무는 이번에는 오랫동안 미술작품을 마주할 때마다 고민해오던 문제들을 오랫동안 꼽싶어 보고 정면으로 마주한다. 예를 들면 그는 “미술은 왜 끊임없이 과거로 되돌아가려는 속성을 보여주는가”를 스스로에게 질문한다. 고전미술의 신화화 과정을 파헤치고, 미술관에 들어설 때마다 느끼던 무게감이 ‘초상화의 무표정성’이라는 관점에서 분석한다.

또한 인간이 “미라는 추상적인 관념을 어떻게 시각적으로 구축했는가” 를 묻는다. 박물관과 시민사회의 함수관계, 화려한 미술 속에 담긴 질병의 그림자 등 미술을 다양한 각도에서 바라보고자 하는 문제의식을 느낄 수 있었다. 과거와 현재, 서구와 한국을 넘나들면서 펼쳐지는 설명은 직관적이어서 부담 없이 따라갈 수 있다.

우리가 아는 고전미술은 사실 ‘짝퉁’이다?

사람들은 흔히 미술이라고 하면 고상하고 우아하며 품위 있는 세계에 속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고전미술의 경우 특히 그렇다. 현대미술은 전위적인 성격을 띤 경우가 많아 고전미술처럼 고상한 어떤 것이라고 여기진 않지만 우리 현실이나 일상과는 동떨어진 세계로 인식한다는 점에서는 매한가지다.

양정무는 그러한 우리의 관성적인 인식에 의문을 제기하며 ‘고전은 없다’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고전이란 무엇일까’라는 질문에 대해 사실상 고전은 허상임을 꼬집으며 첫 물꼬를 트는 것이다. 이어 미술교육 과정에서 흔히 접했던 아그리파 등의 석고상, 데생이라는 특정한 방식의 훈련이 어째서 미술교육의 기본이 되었을까를 묻는다.

결국 특정 시기(기원전 6~4세기), 특정 지역(그리스)의 미술이 서구에서 수천년 동안 아름다움의 기준이 되어온 역사가 있었음을 알게된다. 다만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진실은 아름답지만은 않다. 고대 그리스 조각을 복제한 로마의 석고상이 그리스의 작품으로 잘못 오해되면서 순백색의 대리석 조각이 이상화되었다. 그리고 백인종의 우수성에 대한 근거로 쓰여지게 된다. 이상적 아름다움의 결정체로 여겨지는 그리스 조각은 군국주의적이고 남성중심적인 문화 속에서 탄생한 것이었음이 드러난다. 그런 고전미술이 이런 교육을 통해 우리의 미감을 형성하게 된것이다.

미술은 웃지 않는다? 

그리곤 ‘왜 초상화에는 웃는 얼굴이 드물까?’ 하는 궁금증과 호기심으로 미술과 웃음의 관계를 살펴본다. 결국 각 시대와 문명을 대표하는 표정을 탐구하게 된다. 전통적인 초상화에서 웃는 얼굴이 별로 없는 데에는 기술적인 요인도 있다. 모델이 웃는 표정을 오랜 시간 유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또 사진과 달리 초상화가 평생 한 장 남길까 말까 한 공식적인 그림이라는 점에서도 환히 웃기는 쉽지 않다.

그래도 역시 시대적인 배경에 따라 각 문명을 대표하는 표정이 있다. 아파이아 신전의 죽어가는 전사상은 가슴에 박힌 창을 손으로 쥐고도 환하게 웃고 있다. 고대 이집트 람세스상, ‘백제의 미소’로 알려진 서산마애삼존상 등 고대 미술에서는 우아한 미소가 자주 보인다.

그러나 ‘크리티오스 소년’ 등 그리스 조각상에서는 미소가 사라진다. 특정한 개인을 연상시키는 것을 경계한 당시 정치적 상황과 맞물린 결과다. 로마 시대까지 이어진 무표정한 초상 조각은 당시 유행한 금욕주의와도 닿아 있다. 시대가 흘러 미술품에 다시 미소가 번진다. 미술사의 대표적인 미소인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를 비롯해 요하네스 페르메이르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중국 현대미술 작가 유에민쥔의 그림까지 시대를 담은 미소가 있다.

어떤 시대를 특정 시대정신으로 규정하고 나면 꼭 그 틈을 미끄러져나가는 존재들이 있고, 이는 미술에서 더욱 선명하게 포착된다. 신을 중심으로 세계의 의미가 규정되었던 중세에도 인간 본연의 생명력을 뿜어내는 얼굴들이 있었다. 예술을 낳는 것이 사회이기도 하지만, 한 개인이 자신을 담은 하나의 미술작품이기도 하다.

인간을 담는 미술, 미술을 담는 건축

인간은 미술에 자신의 모습을 담는 한편 미술을 위한 집을 만들어주기도 했는데, 바로 미술관과 박물관이다. 사람들이 미술을 어렵고 심각한 것으로 생각하는 데에는 미술관의 분위기도 한몫한다. 심각하고 엄숙한 표정으로 관람객들을 내려다보는 초상화들 앞에 서면 절로 경직되고 위축되기 마련이다. 오늘날의 박물관은 고상한 지식의 성채 또는 편안한 휴식의 공간으로 이용되고 있다. 허나 사실 박물관이 걸어온 길에는 제국주의의 침탈의 역사와 통치의 정당성을 마련하려 했던 국가권력의 욕망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는 비단 과거의 일만은 아니다. 프랑스, 영국, 미국, 독일 등 많은 나라들이 여전히 박물관을 통해 국가권력의 통치를 정당화하고, 국가권력이 내세우고 싶은 이미지를 시각화하는 데 박물관을 활용한다. 건축을 통해 드러나는 국가 간의 미묘한 경쟁심, 계층 간의 갈등은 박물관 역시 그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라는 점을 선명히 드러낸다.

팬데믹 시대, 고통이 미술이 되다

전세계가 코로나로 고통받고 있지만, 팬데믹은 인류역사화 함께 했다. 다만 우리가 겪고 있는 코로나의 경험은 미술 속의 질병과 죽음을 완전히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게 한다. 역사속에서도 감염병이 당시 사람들의 삶을 송두리째 위협하는 일이었고, 그로 인한 변화가 미술 속에서도 당연히 나타났다. 르네상스시대에 발발한 흑사병은 사람들의 일상뿐 아니라 사후세계에 대한 관념을 뒤바꿔놓았고, 종교적 실천의 양상 및 경제활동까지도 새롭게 규정했다.

안드레아 오르카냐, 〈스트로치 제대화〉,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 피렌체, 1357

흑사병 직후에 제작된 이 제대화는 대역병의 공포 때문인지 엄격하고 단조로운 양식을 보여준다. 흑사병은 결과적으로 르네상스 문예운동으로 이어진다. 사실 흑사병을 이야기할 때 역설적으로 ‘르네상스’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흑사병은 결과적으로 유럽인을 엄격한 종교적인 삶에서 벗어나 개성과 이성의 세계에 한 발 더 다가가게 했기 때문이다. 가공할 전염력을 가진 흑사병은 가까운 친지들과 동료들의 관계를 재정립하게 했다. 검게 타들어가며 죽음을 맞이하는 흑사병 환자에게 병자성사를 집행할 신부는 많지 않았다. 어쩌면 흑사병이 가져온 엄청난 죽음을 냉정하게 목격한 유럽인이 다시 역사를 써내려간 결과가 바로 르네상스라고 할 수 있다.

흑사병은 르네상스라는 역사적 반전을 이뤄냈지만, 스페인 독감은 이와는 다른 역사적 결말을 가져왔다고 볼 수 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가던 1918년 봄부터 1920년까지 미국과 유럽, 그리고 아시아까지 전 세계 인구의 절반 가까이가 걸렸고 최대 5,000만 명이 이 독감으로 사망하게 된다. 우리나라도 당시 일제의 무책임한 대처로 14만 명 가까이 이 독감으로 사망했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에드바르트 뭉크, 〈스페인 독감에 걸린 자신의 모습〉, 국립미술관, 노르웨이, 1919

어렸을 때부터 병약했던 뭉크는 스페인 독감에 걸렸으나 이겨내고 이후에도 꾸준히 작업에 몰입한다. 스페인 독감은 이렇게 20세기 전반에 가공할 상처를 인류에게 남겼지만, 문학과 예술에서는 그 영향력은 독자적으로 보기보다는 시기적으로 1차 세계대전과 묶이면서 ‘다다’와 ‘초현실주의’의 세계로 이어진다. 현대 문화예술 운동에서 다다와 초현실주의의 세계를 어느 누구도 가볍게 다룰 수는 없을 것이지만, 현실을 떠나 꿈과 판타지 세계를 추구했던 이 문예운동 후에 펼쳐지는 역사는 2차 세계대전이다. 1차 세계대전과 스페인 독감의 교훈을 냉철히 읽어내지 못한 덕분일까, 곧이어 벌어진 2차 세계대전은 직전의 재앙보다 훨씬 더 많은 사상자를 낸 역사적 대재앙으로 기록된다.

Newsletter

1주1책 뉴스레터

* indicates required

댓글을 남기세요